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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2

[스크랩] 요한계시록 구속사(제 11 강) : 용과 아이와 여자의 투쟁적 환상

제 11 강

 

용과 아이와 여자의 투쟁적 환상

(계 12:1-17)

Ⅰ. 도입

계시록 12-14장은 7장과 10-11장에 이어 세 번째로 삽입환상 군(群)을 이룹니다. 본 삽입환상(12-14) 군은 내용 전개 및 성격상 연속성을 이루는 가운데, ‘교회와 악의 세력과의 적대적 투쟁’이라는 공통된 주제 속에서 하나의 문맥을 형성합니다. 편집 구성상 앞쪽으로는 8-11장에 걸쳐 소개되는 일곱 나팔재앙과 관련돼 있고, 뒤로는 15-16장에 기술된 일곱 대접재앙의 내용과 연결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앞의 두 삽입환상 군(7장/10-11장)이 그랬듯이 본 12-14장의 삽입환상 군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며, 앞뒤의 내용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요.

12-14장은 용과 짐승으로 대변되는 악의 세력과 여자와 하나님의 소유된 144000명으로 대변되는 교회와의 적대적인 투쟁관계를 중심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11장은 이미 살펴본 대로 두 증인의 예언사역으로 드러난 교회와 악의 세력과의 적대적 관계를 통해 교회의 존재의미가 복음사역에 집중돼 있음을 강조합니다. 이로 보건대 12-14장의 삽입환상 내용은 10-11장의 삽입환상과 본질상 동질성과 연속성을 띠면서 두 세력 간의 적대적인 충돌과 투쟁 상황을 보다 심층적이고 밀도 있게 기술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먼저 12장은 교회와 사단과의 투쟁적인 적대관계를 여자와 용의 대립적인 이미지를 통해 상징적으로 기술합니다. 13장은 교회의 적대세력의 수장(首長)인 용이 그의 추종자인 두 짐승(13:1, 11절)에게 권한을 부여함으로 사단의 활동을 대리적으로 담당케 하는 내용을 소개합니다. 이 과정에서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정치적인 세력을 통해,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종교적인 세력을 통해 교회를 향한 사단의 적대적인 역할을 계승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13장에서 특별히 용이 바다에서 나온 짐승에게 자신의 능력과 보좌의 권세를 위임하는 사건(1-3절)의 배경은 계 20:1-3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20:1-3에서 용이 하늘에서 쫓겨 내려와 천사에 의해 쇠사슬에 결박당한 상태로 무저갱에 일천년 동안 감금당하는 사건은 예수님의 초림과 관련해 구속사역의 성취로 말미암는 사단의 패배와 이로 인한 활동제한의 정황을 상징적으로 뒷받침해 줌에 틀림없습니다(호크마 종합주석, 532/이순태, 281/이필찬, 836-837/W.헨드릭슨, 232/유도순, 330). 물론 이때에 무저갱에 갇힌 사단의 결박상태가 완전결박이냐 제한결박이냐의 논의는 신학자들 간에 의견의 일치를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초림사역과 구속사역의 성취의 결과로 초래된 사단의 결박이란 관점과(막 3:27, 마 12:29, 눅 10:17-19, 요 12:31-33,골 2:15, 히 2:14), 이런 사실을 상징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12:7-12을 20:1-3, 7-10과 연관시켜 상고할 때, 완전결박의 정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시대인 현 시대의 사단의 활동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단 말인가요. 13:1-2이 힌트를 제공해 줍니다. 즉 사단이 예수님의 구속사역의 성취로 땅으로 내어 쫓긴 후, 완전히 결박당하기 직전에 자신의 하수인인 짐승에게 권세와 능력을 위임해 줌으로 짐승이 사단을 대신해 대리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해석입니다. 사단과 짐승은 본질상 동일한 정체성과 동질성을 띠고 역사하기에 저들의 다양한 활동양상 또한 근본적으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13:2에서 “용이 자신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바다에서 나온 짐승, 1절)에게 주었다”는 표현이 이런 사실을 암시적이나마 강력히 뒷받침해 줍니다. 이런 관점에서 13:1에 언급된 ‘짐승이 나온 바다’는 12:27에서 용이 교회와 최후의 종말론적인 일전을 벌이기 위해 찾아 와 ‘바다 모래 위에 섰다’는 내용과 의미상 병행관계를 가집니다. 따라서 계시록에서 바다는 사단의 전진기지로서 곧 야전사령부를 상징적으로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21:1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를 설명하면서 그 나라에는 ‘바다도 다시 있지 않다’고 강조하는 의미가 이런 사실을 확증시켜 줍니다.

한편 14:1-5에서는 사단의 핍박과 박해를 대리적으로 수행하고 있던 13장의 두 짐승의 적대세력으로부터 승리한 후 하늘에 앉힌바 된 승리한 교회의 모습을 144000명의 상징을 통해 기술합니다. 이런 식으로 14장에 소개된 하늘에 속한 승리한 교회의 종말론적 상징은 7장에 이스라엘의 12지파에서 나온 144000명과 하늘에 속한 셀 수 없는 큰 무리를 하나로 통합해 발전시킨 개념입니다. 이어서 14:6-20은 큰 성 바벨론으로 상징된 사단의 세력에 대한 최종심판의 정황을 다양한 각도에서 총괄적으로 소개합니다. 최종심판에 대한 이런 상징적인 정황은 계속되는 15-16장의 일곱 나팔대접 재앙을 포괄하면서 17-20장에 기록된 최후의 종말론적 심판현상을 함축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이필찬 521-522/호크마 종합주석, 395-397).

Ⅱ. 전개

교회와 사단의 세력들과의 적대적인 투쟁의 내용을 담고 있는 12-14장의 삽입환상 군에서 먼저 12장은 여자와 용의 대립적인 적대적 관계를 상징적으로 묘사합니다. 이는 이미 11장에서 살펴봤던 두 증인(교회)과 악의 세력들과의 긴장관계를 보다 발전시키고 구체화시킨 내용입니다. 12장은 자체 문맥 속에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6절은 여인과 용, 그리고 여인이 낳은 아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면서 용과 아이의 적대적인 관계에 집중됩니다. 7-12절은 용과 미가엘 천사와 이들의 추종자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면서 용과 미가엘의 적대적인 관계를 조명합니다. 마지막 13-17절은 용과 여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면서 이들 간의 적대적인 관계를 설명합니다. 특히 세 구분을 통해 용만이 공통적으로 등장합니다. 이는 용을 대상으로 세 주인공인 여자와 아이와 미가엘 천사가 상호 적대적인 관계를 형성하면서 12장 전체의 스토리가 전개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1. 여자가 낳은 아이와 용과의 적대관계(1-6절)

본 문단에서 1-2절은 해(sun)를 입은 여자의 영광에 대해 기술합니다. 3-4절은 큰 붉은 용과 아이 사이의 적대적인 관계를 진술합니다. 5절은 여자가 낳은 아이의 정체성을, 6절은 하나님에 의한 교회의 보호와 양육에 대해 소개합니다.

해를 입은 여자의 환상(1-2절)

먼저 하늘에 큰 이적이 보입니다(1절상). 여기서 큰 이적이란 큰 표적(sign)을 가리킵니다. 이 표적이 하늘로부터 보인다는 것은 표적의 출처와 기원이 하늘 곧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음을 시사해 줍니다. 요한은 큰 표적이라는 표현을 통해 곧 이어 등장하는 ‘한 여자’가 특별한 의미를 가진 존재임을 암시해 줍니다. 그런데 상징적인 묘사를 통해 기술하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요한은 환상을 통해 본 여자의 모습을 세 가지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첫째로 해(the sun)를 입었습니다. 발아래는 달이 있습니다. 머리에는 열 두 별의 면류관을 썼습니다. 해와 달과 별의 공통점은 빛을 발한다는 발광채란 사실입니다. 따라서 세 발광체에 의해 이 여자의 정체성이 상대적으로 탁월한 영광의 소유자란 사실이 확인됩니다. 그렇다면 왜 이 여자를 이처럼 영광스런 모습으로 묘사하는 것일까요. 이는 해와 달과 별의 구약적인 배경을 통해 그 의미를 추정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창 37:9은 요셉의 꿈을 기술하면서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요셉에게 절했다는 내용을 소개합니다. 이 꿈 내용에서 해와 달과 열한 별은 각각 야곱과 그의 아내와 야곱의 열 한 아들을 가리킵니다. 곧 이스라엘의 12지파에 따른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를 상징적으로 포괄하고 있음을 감지하게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 절의 여자를 구약의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 곧 구약의 교회공동체(행 7:38)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호 1:2에서는 하나님과 범죄 한 이스라엘의 관계를 호세아 선지자와 음행한 여인과의 혼인관계를 통해 비유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호 2:19-20에서는 1장의 부적절한 혼인관계가 개선됩니다. 하나님께서 패역한 이스라엘을 거듭나게 하십니다(호 2:14-15). 거듭난 새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장가드시는 방식을 취하심으로 참 이스라엘과의 새로운 관계가 회복될 것을 예언해 주십니다(호 2:19-20). 이사야 선지자 또한 회복된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가 개선될 것을 언급하면서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남편으로 묘사함으로 회복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내로 간주해 주십니다(사 54:4-5). 이처럼 구약의 구속사적 배경에서 여자란 하나님의 신부와 아내 된 이스라엘을 상징적으로 묘사합니다.

한편 언약적 구속사의 진전 속에서 선지자들의 새 언약(렘 31:31-34)을 통해 예언된 이스라엘의 회복은 예수님의 구속사역에 근거해 제정된 새 언약(눅 22:14-20, 히 10:11-18)으로 발전되면서 신약의 교회공동체의 출현 안에서 성취의 절정을 이룹니다. 따라서 구약의 이스라엘은 언약적 구속사의 점진적인 계시의 진행 속에서 신약의 교회공동체로 발전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 언약에 약속된 자손이란 본질상 혈통적 자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갈 3:16)와 그에게 속한 믿음의 자녀들을 총체적으로 가리킵니다(갈 3:7, 29, 롬 2:28-29, 9:6-8). 이상의 논증 속에서 에베소서 기자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의 관계(엡 5:22-33)를 통해 비유적으로 설명하는 배경 또한 구약의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전개한 진술임을 넉넉히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1절의 여자는 구약적 배경에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가리키며 동시에 선지자들의 새 언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구원받게 될 신약시대의 새 이스라엘 곧 교회공동체를 전망케 합니다. 신약의 교회는 그 잉태와 출생의 기원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근거를 둡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행 20:28)라고 진술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피 값을 지불함으로 사신 바 된 하나님의 소유된 친 백성들이란 의미입니다(딛 2:14). 따라서 교회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된 자들입니다(롬 6:5). 성령으로 거듭나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갈 2:20).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은 교회공동체의 생명과 본질상 동질성을 띱니다. 교회의 정체성을 일컬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 임재방식’으로 설명하는 이유가 이런 원리에 근거합니다. 이런 사실로 교회는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천상적 기관이며 동시에 천상적 공동체로 존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돼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며,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현시하는 천상적 생명 공동체로 살아가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상의 맥락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반영하는 신약의 교회는 그 뿌리를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두면서 구속사의 점진성의 원리 속에서 상호 불가분의 연속성을 갖게 됩니다. 1절에서 구약교회를 상징하는 여자가 해를 입은 것을 비롯해, 발아래 달이 있고, 머리에 열 두 별의 면류관을 썼다는 묘사는 이런 식으로 교회의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권능이 여자를 통해 반영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2절은 아이를 잉태한 여인이 해산의 고통으로 부르짖는 내용을 소개합니다. 본 절은 여인으로 묘사된 이스라엘이 잉태한 아이의 출산과 관련해 당하는 극한 핍박과 고난을 비유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이의 정체는 누구이고, 이스라엘과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기에, 아이의 출산과 관련해 해산의 고통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핍박과 고난을 당해야 하는 것일까요. 본 환상의 의미를 근원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창 3:15에 예언된 ‘여자의 후손언약’으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습니다.

여자의 후손언약은 창 2:17의 선악과 금령(일명 아담언약/선악과 언약)을 어긴 아담부부의 죄를 사면해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은혜로 맺어 주신 언약입니다. 언약의 성격상 여자의 후손으로 말미암는 구속의 의미가 담겨있는 것으로 인해 흔히 원(原)복음이라고 부릅니다(엡 1:4, 딤후 1:9). 이처럼 여자의 후손언약은 자체 속에 함의된 구속의 원리에 근거해 아담부부의 죄를 사면해 주심으로 창 1:28에 약속된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의 핵심주제인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지속적으로 수행해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은 것입니다(마 28:18-20). 한편 여자의 후손언약은 두 후손(여자/뱀) 간의 지속적인 적대적 갈등과 충돌과 투쟁의 역사를 예언합니다. 급기야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며, 뱀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것으로 적대적 관계는 일단락됩니다. 이는 비유적인 표현으로 여자의 후손에 의한 뱀의 종말적인 패배로 최후의 승리는 여자의 후손에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본 여자의 후손언약이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를 중심으로 세상 역사 속에서 진행된 계시사를 일컬어 구속사라고 부릅니다. 구속사의 진행이 구약역사 속에서 ‘선 언약/후 성취’의 방식을 취한다고 해서 언약적 구속사로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언약은 구속사를 푸는 열쇠입니다. 오늘날 신약시대에 하나님의 구속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함을 받은 참 이스라엘인 교회공동체를 중심으로 여전히 종말의 완성을 향해 진행 중에 있습니다. 세상역사의 본질은 구속사란 신학적 명제 속에 말입니다.

여자의 후손언약이 구속사의 옷을 입고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을 통해 본격적으로 시행되는 인류의 초기역사 속에서 적대적인 투쟁의 예언은 현실화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살인사건(창 4:8)은 단순히 예배 열납의 유무와 관련된 시기질투의 결과가 아닙니다.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일 뿐입니다. 살인의 배후에는 사단의 음모와 계략이 숨어 있습니다. 곧 사단이 가인을 하수인으로 삼아 동생 아벨을 살해하도록 사주한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담긴 두 계열 간의 적대적 사상이 구체적으로 표출되는 일환으로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여자의 후손언약은 아담의 자손들을 두 계열로 구분하는 가운데 상호 적대적이고 배타적인 원수관계를 맺는 가운데 첨예하게 대립각을 세우게 됩니다. 따라서 계 12:2절에서 여자가 아이를 잉태하고 해산하는 과정에서 산고로 부르짖는 환상은 본질상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예언된 두 계열간의 적대적인 투쟁관계가 구체화되는 모습을 상징적이며 동시에 총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광경입니다.

다시 말해 여자의 후손언약이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성취되는 과정에서 여자의 후손의 정체 속에 담긴 단수적 의미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게 될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반면에 여자의 후손의 정체 속에 담긴 복수적 의미는 하나님의 신민(神民)인 이스라엘 백성을 총체적으로 가리킵니다. 곧 구약교회입니다. 이런 관점은 뱀의 후손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따라서 여자의 후손의 이중적 정체성(단수/복수)을 고려할 때, 메시아는 이스라엘 백성 곧 구약교회를 통해 잉태되고 출산하게 된다는 논리가 성립됩니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뱀과 뱀의 후손들로 상징되는 사단과 악의 세력들에게 공격의 표적이 됨으로 극심한 환란과 핍박과 고난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런 사실을 계시록 저자는 2절을 통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고 환상을 통해 상징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이를 잉태한 여자의 산고’란 표현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메시아를 잉태한 이스라엘이 ‘뱀과 그의 후손들’로 인해 겪게 되는 다양한 고난의 모습을 상징적이고 비유적으로 진술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의 멸망을 통해 아이의 출산을 막기 위함이요, 이것이 실패할 경우 다음 단계는 아이를 살해하기 위함입니다. 사단의 궁극적 생존을 위한 자구책으로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역사 속에서 여자의 산고(産苦)로 비유된 이스라엘이 겪는 고난의 실체는 어떤 것일까요. 여자의 후손언약의 성취의 일환인 구속사의 점진적 진행이란 관점에서 살펴봅니다.

우선적으로 가인에 의한 아벨 살해사건(창 4:8)이 이에 해당됩니다. 이스라엘(구약교회)로 비유되는 ‘여자’의 원조는 계시의 성격상 여자의 후손언약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단에게 아벨의 죽음은 적어도 여자의 후손언약의 일차적 당사자를 제거함으로 구속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무산시켰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사단이 승리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자의 후손언약에 근거해 언약적 구속사를 경영해 가시려는 하나님의 의지는 포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죽음을 즉각 셋의 출생(창 4:25)으로 대신하는 가운데 여자의 후손언약이 계속 진행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십니다.

다음으로 애굽의 바로 왕에 의한 이스라엘의 남아 살해명령을 들 수 있습니다(출 1:15-16). 표면적으로만 보면 이 명령은 온갖 노역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날로 강성해 가는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바로의 두려움의 발로로 해석됩니다(출 1:12). 그러나 본 살해음모의 본질은 이스라엘 민족의 말살을 획책함으로 여자의 후손의 출생의 통로를 근본적으로 차단하려는 사단의 책략의 일환인 것입니다. 전에 가인을 충동해 아벨을 살해했듯이, 이번에는 바로가 사단의 하수인으로 이용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인과 바로는 본질상 뱀의 후손의 계열에 속한 자들임에 틀림없습니다(요일 3:12, 유 1:11).

셋째로 유다 왕 여호람의 아내 아달랴가 아들 아하시야의 뒤를 이어 유다의 왕위에 오른 후 다윗 혈통의 왕자들을 진멸한 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왕하 11:1, 대하 22:10). 아달랴는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과 왕비 이세벨 사이에 낳은 딸로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던 자였습니다. 당시 적대적 관계에 있었던 남북이스라엘의 화합과 평화협정을 위해 북쪽의 아합왕의 딸 아달랴와 남쪽의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 사이에 정략결혼이 성사되었습니다(왕하 8:16-18). 이로 인해 남 유다마저 당시 북이스라엘처럼 깊은 영적암매와 우상숭배의 만연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이런 영적 암매의 패역한 시대적 정황 속에서 남유다왕 여호람의 아내인 아달랴는 아들 아하시야의 죽음에 앙심을 품고 남유다의 어린 왕족들을 일거에 살해함으로 다윗의 왕위를 찬탈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아하시야의 아들 요하스가 여호람 왕의 딸이며 아하시야의 이복(?)누이인 여호세바(여호사브앗)의 도움으로 구사일생으로 피신합니다(왕하 11:2). 후에 제사장 여호야다가 일단의 병력을 규합해 아달랴를 축출하고 어린 요아스를 즉위시켜 다윗의 왕통을 계승시킵니다(왕하 11:4-12).

본 사건 또한 외견상 살해당한 아들에 대한 아달랴의 개인적인 원한과 왕위찬탈과정에서 빚어진 불가피한 참극으로 치부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열왕기서 기자가 유다 왕들의 행적과 관련해 언약적 단서조항을 달아 부가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내용을 살펴보면 아달랴의 살해음모의 저의가 다른 데 있었음을 간파하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그 종 다윗을 위하여 유다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저와 그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허하셨음이더라”(왕하 8:19/왕상 11:36). 본 절에서 ‘등불’이란 다윗의 왕위/왕통의 계승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유다 왕들의 통치행위의 시시비와 무관하게 다윗의 왕위는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한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철저하게 보존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바로 여자의 후손언약에 근거한 여자의 후손의 당사자가 이후 아브라함 언약과 다윗언약 속에 약속된 씨 곧 자손(창 13:15, 17;8, 삼하 7:12-14)을 통해 오게 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윗의 혈통을 계승하고 있는 어린 유다 왕족들에 대한 아달랴의 잔인무도한 살해음모는 단순히 사사로운 원한의 감정을 넘어 구속사적인 의미를 담고 있음을 간파하게 됩니다. 다윗의 혈통을 근원적으로 차단시킴으로 결과적으로 여자의 후손의 출생의 가능성을 근절시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넷째로 페르시아의 아하수에로 왕 때 총리대신 하만에 의한 유다민족 말살계획이 이에 해당합니다(에 3:13). 당시 하만은 하급 유대관리인 모르드개와의 사사로운 감정(에 3:5)을 비화시켜 페르시아 관할의 유다민족 전체를 일시에 진멸시키려는 천인공노할 살해음모를 수립해 반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에스더 왕비를 통해 아하수에로 왕의 마음을 주관하심으로 사건을 반전시키십니다. 대신 모르드개를 달아 죽이려는 장대에 하만을 달아 죽게 합니다(에 7:9-10). 모르드개가 하만의 권좌에 대신 오릅니다. 모르드개가 반포했던 유대인 살해명령에 대항해 전 유대인이 항거할 것을 추인해 반포합니다. 이로서 전 유다인의 생명이 보존되고, 이 날을 해마다 기념해 지키기 위한 부림절 규례가 반포됩니다(에 9:21-22).

본 사건 또한 아달랴의 왕족 살해음모와 본질상 다를 바가 없습니다. 아달랴가 개인적인 감정을 앞세워 어린 왕자들을 살해의 표적으로 삼았듯이, 하만 또한 모르드개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을 비화시켜 전 유다인을 대상으로 살해계획을 세웠습니다. 살해동기 또한 겉으로 보면 사사로운 감정의 발로로 동질성을 띱니다. 그러나 내막을 살펴보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의 손길이 이 사건의 배후에 깊이 개입해 역사하신 흔적과 자취가 한 편의 드라마를 보듯 구체적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하만은 아말렉 족속 중 아각의 후손으로 확인됩니다(호크마 종합주석, 에스더서). 그렇다면 하만은 과거 아말렉 족속과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오랜 악연으로 인해 평소부터 유다민족에 대한 적개심을 품고 있었음을 추정하게 됩니다. 그러던 것이 모르드개의 불충을 기화(奇貨)로 전 유다인을 볼모삼아 살해코자 하는 악랄한 음모를 수립하기에 이릅니다. 과거 왕정통치 하에서 얼마든지 가능한 얘깁니다.

그러나 이미 살펴 본대로 유다는 다윗언약이 성취되는 언약의 가문이며 구속사 진행의 통로입니다. 따라서 유다인의 멸절은 구속사의 기원이 되는 여자의 후손언약이 무효화되는 일과 직결됩니다. 그 결국은 하나님의 구속사가 중단됨으로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전 구속의 경륜이 취소가 되는 전대미문의 사태가 발생하게 됩니다. 바로 이 일을 시도하기 위해 사단은 유다인의 원수인 하만을 사주해 하나님의 언약백성들을 진멸시킴으로 여자의 후손의 통로를 다시금 봉쇄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상으로 ‘아이를 잉태한 여인의 산고’의 본의를 여인의 원조 격인 ‘여자의 후손언약’(창 3:15)에 근거해 구약교회 곧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살펴봤습니다. 이상의 논증을 통해 여인의 산고는 여자의 후손의 당사자인 메시아의 출생을 두고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간의 적대적인 투쟁의 모습을 비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리하게 됩니다.

큰 붉은 용의 환상(3-4절)

3-4절은 사단을 상징하는 큰 붉은 용의 등장과 그의 권세와 능력과 사명을 여자가 잉태한 아이의 출산과 연관시켜 다양한 상징을 통해 진술합니다. ‘큰 붉은 용’이 9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사단과 마귀와 동일시된다는 것은 본 장의 문맥 속에서 자연스런 귀결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큰 붉은 용’을 가리켜 ‘라합’(욥 26:12, 사 51:9), ‘하마’(욥 40:15-24), ‘리워야단’(사 27:1/악어) 등으로 표현하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의 세력의 대명사로 취급합니다(호크마 종합주석, 392).

용의 권세는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데 그 꼬리가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는 표현 속에서 극대화됩니다. 본 절에서 ‘뿔이 열’이라는 표현은 단 7:7의 반영입니다. 일곱과 열이라는 숫자는 계시록에서 완전수와 충만수를 상징적으로 가리킵니다. 따라서 일곱 머리, 열 뿔, 머리에 일곱 면류관 등의 표현은 실제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내용입니다(계 5:6, 19:12). 여기서 머리는 주권과 지혜를, 뿔은 힘과 권세와 능력을, 면류관은 영광과 승리를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상의 설명을 종합해 보면 큰 붉은 용의 완전하고 충만한 지혜와 권세와 능력과 힘의 발휘는 결과적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역을 나름대로 모방하고 있다는 사실을 시사해 줍니다. 실례로 13장에서 용의 사역을 대리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두 짐승의 사역을 살펴보면 ‘죽게 되었던 상처로부터 살아났다’(13:3, 14절)거나, ‘새끼 양 같이 두 뿔이 있다’(13;11) 등의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속죄양 되심을 은연중에 모방해 설명하는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거짓을 위장해 속이기 위함입니다. 특별히 ‘용의 꼬리로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 땅에 던진다’는 표현은 단 8:10을 배경으로 삼으면서 큰 붉은 용이 발휘하는 권세와 능력이 막강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환상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계시록 본문에서 ‘하늘 별 삼분의 일’은 다니엘서 본문에서 ‘하늘 군대와 별’과 비교됩니다. 나아가 본문에서 군대와 별 중의 몇이 땅에 떨어져 짓밟히는 장면은 문맥 속에서 대적자들에 의해 고난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환상입니다. 따라서 계 12:4절은 용과 하나님의 백성과의 영적 전투를 암시하는 장면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나머지 13-17절을 통해 이런 사실이 구체화됩니다. 교회시대를 살아가는 현대교회는 이미 이런 영적 전쟁에 노출돼 복음의 선한 싸움을 현재적으로 수행하는 자들로 존재합니다.

4절 후반부는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려 하고 있다”고 기술합니다. 본 절은 용의 주된 공격 대상이 여자가 아니라 여자가 잉태하고 있는 아이인 사실이 확인됩니다. 구속사의 진행 속에서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담긴 사단의 일차적 공격 대상은 이스라엘 곧 구약교회였습니다. 구속사의 진행 속에서 이스라엘은 여자의 후손(아이)의 모태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담긴 두 계열간의 적대적인 반목과 충돌과 투쟁의 실상을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이미 살펴본 바 있습니다. 따라서 본 절에서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의 아이를 삼키려하고 있다’는 표현은 여자로 비유되는 이스라엘을 공격해 아이의 잉태와 출산을 막으려 했었던 사단의 일차적인 계획이 이미 수포로 돌아갔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다음 단계는 직접 아이를 공격의 표적으로 삼는 일입니다. 여자의 후손언약의 당사자인 이 여인의 아이를 직접 살해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런 일은 실제로 아기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해 헤롯에 의한 2살 미만의 영아를 무참히 살해했던 베들레헴 영아 살해사건 속에서 유사성이 확인됩니다(마 2:16). 구속사적 관점에서 베들레헴 영아 살해사건은 헤롯을 사주해 여자의 후손의 당사자인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단의 궤계와 음모의 일환으로 해석됩니다.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 아기 예수님을 사전에 애굽으로 피신시킵니다. 헤롯이 죽은 후 하나님은 요셉 일행을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하셔서 나사렛에서 거주케 하십니다(마 2:19-23). 베들레헴 영아 살해음모와 관련해 아기 예수님에 대한 살해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후에도 사단의 적대적 감정은 포기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장성하신 후, 바야흐로 공생애 사역을 위해 준비하시는 과정에서 사단은 세 번에 걸친 시험을 통해 이번에는 직접적으로 예수님을 공격합니다(마 4:1-10).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을 말씀으로 물리쳐 승리하십니다. 급기야 마귀는 예수님을 일시적으로 떠납니다(마 4:11). 소위 작전상 후퇴라는 명목을 가지고 말입니다. 다음 단계는 가룟인 유다를 충동해 예수님을 십자가의 죽음에로 내몹니다(눅 22:3). 예수님의 죽음은 여자의 후손언약(창 3:15)에 약속된 예언 안에서 표면상 사단의 일시적인 승리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흘 후 죽음에서 살아나신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이상의 모든 사단의 궤계를 일거에 파하여 종식시키는 반전의 쾌거사로 평가됩니다. 이런 식으로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란 상징적인 예언은 마침내 성취의 절정을 이루게 됩니다.

물론 이상의 아기 예수님의 출생과정과 공생애 사역 기간에 나타난 사단과의 적대적인 투쟁기사는 계시록의 내용(11:5)과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계시록에서는 용이 아이가 출생하기 전에 공격합니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이내 하늘로 올려갑니다. 따라서 용이 아이를 공격할 기회를 전혀 갖지 못합니다. 이런 양자(복음서/계시록) 간의 기록을 통해 상호 병행적 관계를 확인할 수 있음에도, 요한은 아이의 탄생과 승천 및 사역 기사를 역사적인 사실에 일치시키기보다 묵시문학적 기법을 살려 극적으로 기술합니다(이필찬, 537). 그런 의미에서 아이의 출생과 승천 기사가 담긴 본 사건이 발생한 시점은 구약에서 자연스럽게 신약시대로 이미 옮겨졌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여자가 낳은 아이의 정체성(5절)

그렇다면 여자가 잉태하고 있는 아이의 정체는 누구일까요. 여자의 후손언약에 기초한 구속사의 점진적인 진행 속에서 이미 감지할 수 있는 것처럼 이 아이의 정체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런 사실이 5절을 통해 확인됩니다.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5절은 여자가 출산한 아이의 정체성과 사역의 전모를 한 문장으로 축약해 설명합니다. 아이의 정체성과 관련해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란 표현은 시 2:7-9의 말씀을 반영합니다. 본 절은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차 만국을 다스릴 왕권을 소유하게 될 것을 암시해 줍니다(사 9:6-7). 이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사역의 결과로 예비적인 성취를 이룹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마 28:18-20). 또한 재림과 더불어 종말론적으로 최종 성취될 것입니다(계 11:15).

아이의 사역과 관련해 아이에 대한 죽음이 생략된 채, 탄생과 승천의 기사만 강조됩니다. 이는 사실상 예수님의 죽음과 장사지냄과 다시 살아나신 부활사건을 문맥과 행간 속에 함축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런 식의 표현은 다분히 의도적입니다. 다시 말해 용과 아이와의 적대적인 대결 구도(4-5절)에서 아이로 대변되는 예수님의 최종 승리를 예시(豫示)적으로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이런 식으로 아이의 최종 승리를 예시함은 여자로 묘사된 교회공동체의 미래적인 승리를 보증함과 동시에 향후 전개될 내용의 전말을 어느 정도 사전 암시해 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상의 논증을 통해 용은 아이의 정체를 이미 파악하고 있었고, 아이로 말미암아 자신의 사역과 생명에 치명적인 결과가 초래될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창 3:15, 마 4:3, 6, 8:28-29).

교회의 보호와 양육(6절)

6절은 아이를 해산한 여자가 광야로 도망해 거기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에서 일천이백육십일 동안 양육 받는 내용이 소개됩니다. 여기서 ‘여자가 광야로 도망했다’는 표현은 5절에서 의도적으로 ‘아이의 죽음’을 생략한 것처럼 매우 의도적입니다.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하나님의 적극적인 인도와 보호와 임재와 다스림과 양육을 받았던 장소입니다(신 8:2-4). 요한은 이처럼 광야로 도망한 여자의 존재를 출애굽 모티브를 사용해 광야로 인도함을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과 연관시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여정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와 통치와 양육의 현장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향한 전폭적인 신뢰의 믿음을 가지고 선한 싸움을 싸워야 했던 연단과 고난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믿음으로 사는 삶의 도리를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신 8:2-4). 이는 이후 가나안 땅에 들어가 하나님 나라로서 신정왕국을 이루며 열방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왕 같은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며 살아가야 할 중차대한 사명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출 19:5-6). 이제 구속사의 점진적인 진행 속에서 여자의 실체로 발전된 신약의 교회공동체(계 21:9, 엡 5:31-32)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광야로 상징되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철저한 보호와 인도와 양육과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친 백성들로 존재하는 한편, 사단의 세력들과 영적 전투를 수행해야 하는 하나님의 군사로서 이중적 정체성을 띤 자들로 존재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늘날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신약의 교회공동체와 구속사의 진행 속에서 언약적으로 연속성과 더불어 상응성을 가집니다.

한편 여자가 광야에서 양육 받는 기간은 일천이백육십일입니다. 이 기간은 교회가 이방인들(11:1-2)과 짐승(13:5)에 의해 42달 동안 핍박과 박해를 받는 고난의 기간이며(11:1-2), 동시에 두 증인에 의해 복음증거사역을 감당하는 기간(11:3) 및 교회가 사단의 완전결박(20:1-3) 후,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으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하는 기간(20:6)과 동일합니다. 위에 기술된 하나님의 섭리적 작정기간들을 종합적으로 상고해 볼 때, 이 기간이란 주님의 초림으로부터 재림 때까지를 포함하는 상징적인 기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자가 광야로 도망해 하나님의 양육을 받는다는 6절의 시작이 5절에서 아이가 보좌 앞으로 올려가는 사건의 연속선상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아이의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승천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 기간들이 갖는 구속사적 성격은 교회공동체가 주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철저히 하나님이 양육을 받으며, 복음을 증거하는 선지적 사역을 감당하며, 이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야기되는 마귀의 세력들과의 적대적인 반목과 충돌과 투쟁관계에 직면해 있는 전투적인 교회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 결국은 교회의 종말적 승리로 마감된다는 것이 계시록의 관점입니다. 교회의 위로와 인내가 이런 사실에 근거해 강력히 요구됩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Short Cross)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Long Glory)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기 때문입니다”(고후 4:17).

2. 하늘에서의 전쟁(7-12)

7-12절의 환상은 하늘에서의 전쟁 상황을 소개합니다. 미가엘과 그의 휘하의 천사들이 용과 그의 추종세력들과의 한판 전쟁기사를 소개합니다. 이러한 장면의 변화는 1-6절에 근거하면서 특별히 5절에 언급된 여자가 낳은 아이가 하늘로 올려간 사건과 밀접하게 연관을 맺고 있음을 문맥 속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본 환상의 실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사건을 절정으로 하늘에서 동시적(simultaneity)으로 대규모의 영적 전쟁이 발생하게 되었음을 시사해 줍니다. 이는 하늘에서 발생하는 일과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불가피하게 연계돼 있음을 암시합니다(G. 골드워디, 복음과 요한계시록, 1991, 148/유도순, 221). 마치 교회의 정체성이 본질상 여기에 존재하며 동시에 하늘에 존재하는 것으로 이중 구조 속에서 설명하고 있듯이 말입니다(계 7:4, 9, 엡 2:6). 주기도문에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란 표현이 이런 사실을 뒷받침해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의 영전 전투기사는 앞의 1-6절에 소개된 환상과 불가분의 동질성(homogeneity)과 연속성(continuity)을 가지면서 그 속에 담긴 신학적 의미와 결과를 구체적으로 증거하는 기능을 담당합니다. 이 하늘의 전투에서 용의 진영이 패배합니다. 용은 더 이상 하늘의 영역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근본적으로 상실합니다. 땅으로 내어 쫓깁니다(눅 10:18). 이런 사실을 묵시적으로 보여주는 환상이 다름 아닌 계 20:1-3의 내용입니다. 따라서 용의 패배와 내어 쫓김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 수난(受難), 죽음, 부활과 승천으로 인한 구속사역이 온전히 성취된 사실과 인과관계를 가집니다. 본문(계 20:1-3)에 의하면, 사단의 현재적 상태는 무저갱에 쇠사슬로 묶인 채 천 년이 찰 때까지 한시적으로 완전결박 된 상태로 감금돼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단의 완전결박은 자연히 사단의 무(無)활동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계시록의 관점에 의하면 교회시대에 여전히 활동하고 있는 사단의 역사는 사실상 그의 수석(首席) 하수인인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 용(사단)으로부터 보좌의 권세와 능력을 위임받아 대리적으로 수행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13:1-2, 이순태, 13-26). 용(사단)과 짐승의 정체성은 본질상 동질성을 띠고 있기에 짐승의 활동은 사단의 활동을 대신한다는 논리가 성립됩니다.

본 문단(7-12절)의 내용은 두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먼저 7-9절은 하늘에서 적대적인 두 진영 간의 영적 전쟁 상황을 소개합니다. 10-12절은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는 성도(교회)의 승리와 용의 패배를 기술합니다.

적대적인 두 진영 간의 전쟁(7-9절)

본문에 소개된 하늘에서의 두 진영 간의 적대적인 전쟁은 문맥 속에서 5절에 언급된 아이의 승천사건과 밀접하게 연관됩니다. 아이의 출생을 저지하지 못함으로 아이의 승천이 가능했던 것은 용의 패배와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하늘에서의 전쟁은 동시에 땅에서의 전쟁의 반영이란 영적 논리가 가능해집니다. 물론 이 전쟁은 영적 전쟁을 묘사합니다.

그렇다면 용과의 하늘의 전투에서 우군의 수장(首長)으로 미가엘 천사장이 등장하는 배경은 무엇일까요. 이는 단 10장에 기록된 바사(페르시아)와 헬라의 연합군에 대항하는 미가엘과 인자의 전쟁 이미지를 차용하고 있습니다(1, 16-18, 20-21). 단 10장의 환상에서 미가엘과 인자는 바사와 헬라 연합군의 공격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군대의 자격으로 등장합니다(단 12:1).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제기됩니다.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 속에서 바사와 헬라는 실제로 이스라엘을 침공해 멸망시키고 지배했던 강대국으로 기술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미가엘과 인자가 바사와 헬라의 침공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구원한단 말인가요. 이는 다니엘서의 기록 의도가 이스라엘의 역사적 정황을 근거로 이스라엘의 종말적 회복과 밀접하게 관련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전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단 2:44-45, 7:13-14). 이처럼 요한은 다니엘서의 종말적 성취의 상황을 계 12장에서 미가엘과 용과의 하늘의 영적 전쟁의 배경으로 삼아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니엘서의 바사와 헬라의 연합군이 계시록 본문에서 용과 그의 추종세력들로 대체되고 있는 셈입니다.

마침내 하늘의 전쟁에서 용의 진영이 패배합니다. 땅으로 내어 쫓깁니다(9절하). 이 과정에서 요한은 용의 정체성을 각각의 영적 기능과 관련시켜 옛 뱀, 마귀, 사단으로 언급합니다(9절, 20:2). 먼저 옛 뱀이란 미혹하는 자, 시험하는 자로,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거짓말로 미혹해 타락하게 한 데서 유래한 이름입니다(창 3:1-5). 9절에서도 용을 온 천하를 꾀는 자로 소개합니다. 다음으로 마귀란 참소(讒訴)자와 무고(誣告)자란 의미입니다. 10절에서도 용을 가리켜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는 자가 쫓겨났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참소는 송사(訟事)의 의미(롬 8:33)로, 사전적 의미는 남을 헐뜯어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꾸며서 고해바치는 것을 말합니다. 뭐라고 송사했을까요. 롬 8:34은 송사의 내용을 정죄와 연관시켜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마귀는 지속적으로 죄성의 지배를 받고 있는 성도들의 옛 사람적 행동을 고발하며, 죄 값은 사망인데 왜 불순종의 행위를 심판하지 않느냐고 직고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성도들의 사이를 이간질 해 관계를 단절시키고 교제를 훼방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풀어 주시는 구원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구속에 근거해 영(永)단번(once for all)의 죄사함을 받았을 뿐 아니라(히 9:12, 10:12-18), 구원받은 이후에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공효가 여전히 성도들의 현재적 삶 속에 유효하게 적용되기 때문에 결코 정죄당할 수 없다는 것이 로마서 기자의 변호입니다(롬 8:34-39).

한편 성경에서 사단에 의한 참소의 전형(典型)은 욥에 대한 하나님의 칭찬에 이의를 제기했던 두 차례에 걸친 사단의 송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발견됩니다(욥 1:9-11, 2:3-5). 그런가 하면 이스라엘의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사단이 대적(참소)하고 있는 스가랴의 환상을 통해서도 그의 악의적인 기질이 확인됩니다(슥 3:1). 본 환상에서 사단은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있음을 들어서 정죄하며 참소합니다(슥 3:3). 여기서 ‘더러운 옷’이란 여호수아의 행위를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 대제사장 여호수아라 할지라도 자신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인정을 받을 수 없기에 당연히 심판을 받아야 된다고 사단이 하나님께 송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변호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의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을 벗기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라”고 말씀하십니다(슥 3:4).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종 순(筍, the Branch)을 나게 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슥 3:8). 곧 순(筍)의 실체로 오실 메시아(슥 6:12)의 구속 안에서 여호수아의 죄과를 도말해 주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로 세워 주시겠다는 의지의 표명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그렇다면 계 12:7-9에서 용의 군대가 미가엘의 군대에 패배해 땅으로 내어 쫓긴 것은 하늘에서 두 진영 간의 실제적인 전쟁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성취(죽음-부활-승천)로 본질상 사단이 패배한 영적 사건을 묵시문학적 기법으로 기술함으로 그리스도의 승리에 대한 극적 효과를 배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7-9절의 하늘의 전쟁은 지상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복음사역을 통해 겪는 다양한 고난의 행보를 대비시키면서 땅과 하늘에서 동시적으로 전쟁이 진행되고 있음을 묵시적 기법을 통해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5절에서 아이가 하늘로 올라감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죽음/부활/승천사건을 총체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표현으로, 이때 사단은 치명상을 입고(창 3:15) 사실상 예수님과의 영적 전쟁에서 완전히 패배한 셈입니다. 이런 지상에서의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하늘의 관점에서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으로 재현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늘에서 용과 그의 추종세력들이 미가엘의 군대에 패배해 땅으로 내어 쫓기는 시점은(9절) 5절에서 아이가 하늘로 올려가는(예수님의 승천) 시점과 본질상 동일한 시점인 사실을 문맥 속에서 간파하게 됩니다.

큰 용의 마지막 별명인 사단은 천상의 하나님의 보좌를 찬탈하려다 실패해 땅으로 내어 쫓긴 대적자와 반역자란 의미입니다(사 14:12-14).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유 1:6).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벧후 2:4).

그렇다면 계 12:9 후반부에서 큰 용이 그의 사자들과 함께 땅으로 내어 쫓기에 되었다는 표현은 하늘의 전쟁에서 용의 진영이 완전히 패배했음을 암시적으로 강조해 줍니다. 따라서 이 사건은 지상의 관점에서 해석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으로 말미암아 구속사역이 온전히 성취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여자의 후손으로 말미암아 뱀의 머리가 치명상을 받은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창 3:15). 이런 관점에서 계 12:1-6의 문맥 속에서 발견되는 용과 아이의 적대적인 투쟁과 7-9절에서 용의 진영과 미가엘 진영과의 적대적인 전쟁은 별개의 전쟁이 아니라, 하늘과 땅에서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전쟁기사를 묵시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계 20:1-3은 본 하늘의 전쟁에서 패배해 땅으로 쫓겨 내려간 사단의 현재의 처지와 정황을 쇠사슬로 묶인 채 한시적으로 무저갱에 완전결박 된 상태로 묘사합니다. 이는 교회시대에 더 이상 사단에 의한 직접적인 활동이 통제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단의 현재적 활동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에 의해 대리적으로 수행되고 있는 셈입니다(계 13:1-2).

이상의 사실을 통해 계시록은 사단의 추방을 세 가지 국면으로 설명합니다. 12:9에서 살펴봤듯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어 쫓긴 것이 첫 번째 추방입니다. 땅에서 쇠사슬로 결박당한 채 천 년 동안 무저갱에 감금당한 것이 두 번째 추방에 해당됩니다(20:1-3). 천 년이 찰 때 잠간 놓였다가 불못에 던져지는 것이 세 번째 추방이자(계 20:10) 영벌의 종말론적 추방입니다(마 25:41). 따라서 성경 전반에서 무저갱은 사단 및 그의 추종세력(눅 8:30-31)들이 불못(지옥)에 들어가기 전에 한시적으로 거처하는 형벌의 장소의 성격을 띱니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성취로 용이 패배해 하늘에서 내어 쫓겼다는 것은 그의 활동무대가 하늘과 무관하지 않았음을 시사합니다. 그렇다면 용으로 상징되는 사단이 하늘에서 어떤 활동을 했었단 말인가요. 10절 후반부가 힌트를 줍니다.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본 절을 통해 사단은 천상의 ‘어전회의’(御前會議)에 참석해 주로 성도를 참소하는 일과 미혹하는 일에 주력했음을 암시해 줍니다. 위에서 이미 살펴봤듯이 슥 3:1-4의 내용을 통해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었다고 참소하는 사단의 경우가 이에 해당합니다. 욥의 순전하고 신실한 신앙을 참소하는 사단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욥 1:9-11, 2:3-5). 같은 맥락에서 열왕기 저자는 아합 왕이 이스라엘의 관할 지역이었던 길르앗 라못을 탈환하기 위해 유다의 여호사밧 왕과 연합해 아람을 공격하는 전쟁기사를 기록합니다(왕상 22:1-3). 이 과정에서 아합왕과 여호사밧은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구합니다. 이때 하늘의 어전회의에 참석하고 있던 사단이 자원해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어용선지자들을 속일 것을 간청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허락하십니다. 결국 거짓말하는 영이 거짓선지자들에게 들어가 아합왕에게 거짓으로 승리를 예언함으로 아합은 전쟁에 나아가 결국은 죽게 됩니다(왕상 22:21-23, 34-35절).

용의 패배와 성도의 승리(10-12절)

하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미가엘이 승리하고 용은 패배해 땅으로 쫓겨납니다. 물론 이때의 추방은 천상의 보좌를 찬탈하려다 실패해 타락한 천사로 전락한 사건이 아닙니다(사 14:12-15, 유 1:6, 벧후 2:4). 아이의 승천 속에 담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성취로 말미암습니다(G.골드워디, 148). 이런 사실의 결과에 따른 신학적인 의미가 10-12절을 통해 하늘로부터 선포됩니다. 이 승리의 메시지에 의하면 용에 대한 미가엘의 승리는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결정적인 동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11절상). 물론 이때의 죽음은 ‘자기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기 위한’(마 1:21) 대속적인 죽음이란 성격을 띱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성도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의를 덧입어 의롭게 된 거듭난 자들입니다(롬 3:24). 따라서 사단은 더 이상 참소할 법적 근거를 찾지 못한 채(롬 8:33-34) 하늘로부터 내어 쫓긴 것입니다. 특별히 11절은 미가엘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까지도 그리스도의 죽음과 보혈의 공로에 근거해 천상의 승리에 동참하고 있음을 밝히 증거합니다. 이런 결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가 세상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었음을 강조합니다(10절). 이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현재적으로 능력 있게 발휘되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사역을 통해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시는 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와 천상의 왕적 권세가 막힘없이 시행되고 있음에 대한 명백한 증거요 표적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마 12:28-29). 이런 관점에서 예수님의 승리는 곧 성도의 승리와 동일시됩니다. 예수님의 생명에 연합돼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벧전 2:9)의 신분으로 존재하며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영적 정체성(spiritual identity)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용에 대한 미가엘 진영과 성도의 승리에는 어린양의 죽음이 결정적인 근거로 작용했지만 더불어 성도의 충성스런 복음증거사역 또한 배제될 수 없다는 것이 요한의 관점입니다. 예수님은 구속사역을 성취하셨고, 성도는 성령의 증거사역을 통해 복음의 증인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을 통해서 말입니다. 11절의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 하였도다”란 설명에서 “자기의 증거하는 말”과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았다“는 표현이 이런 사실을 뒷받침 해 줍니다. 계시록에서 교회의 복음증거사역은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비유하는 어린양의 죽음과 불가분의 관계성을 맺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부활/승천)은 복음증거사역의 핵심주제입니다. 이는 구속의 복음에 대한 반응여부가 구원(영생)과 심판(영벌)의 여부를 가름하는 유일한 잣대로 기능하기 때문입니다(막 16:15-16, 요 3:18). 계시록에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구원의 은혜 및 사단의 패배를 찬미하는 승리의 메시지(경배와 찬양)가 선포될 때마다,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가 주요 관심사로 칭송(稱頌)되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5:8-14, 7:9-12, 11:15-18, 12:10-12, 15:2-4, 19:1-8). 이런 의미에서 구원의 생명을 소유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에 빚진 자의 심정(눅 17:10)을 가지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며 감사하게 되는 것으로 인해 기독교 신앙관을 정립하는 결정적인 동인으로 작용합니다.

12절은 10-11의 결과를 기술합니다. 10-11절의 핵심주제는 예수님의 구속사역의 성취를 상징적으로 포괄해 암시하고 있는 ‘아이의 승천’(5절)으로, 참소하던 사단은 쫓겨났고 참소 당하던 하나님의 백성들은 승리했음을 선포합니다. 그 결과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게 됩니다(12절상). 여기서 ‘거하다’는 문자적으로 ‘장막’(요 1:14, tabernacle)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막(출 25:8)과 본질상 동질성을 띠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처소 삼으셔서 친히 거하시는 자들이란 의미가 성립됩니다. 이들은 성령의 내주로 말미암아 성전 된 교회공동체를 가리킵니다(고전 3:16, 6:19, 고후 6:16, 엡 2:21-22).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신학의 당사자들이 다름 아닌 교회(계 21:1-3)라는 사실은 교회가 향유할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이요 자랑이며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계 21장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완성될 ‘새 하늘과 새 땅’의 주인공으로 어린양의 신부된 교회공동체의 종말적 영광과 속성을 하나님의 영광과 속성의 반영으로 설명합니다(21:10-11, 4:3). 이 과정에서 계시록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으로 상징된 교회의 영광과 속성을 구약에 배경을 둔 각종 ‘보석 모티브’를 차용해 기술합니다(21:11-21). 교회의 영광과 속성을 상징하는 보석 모티브는 새 예루살렘(계 21:11-21, 사 54:11-12)과 성전(출 28:17-20, 대제사장의 에봇에 달린 보석)과 에덴동산(겔 28:13)을 내용적으로 상호 밀접하게 연관시킵니다. 이는 구속사의 진행과정에서 핵심주제로 제기돼 왔던 성전과 에덴의 궁극적 실체가 새 하늘과 새 땅의 주인공인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곧 완성된 종말적 교회공동체를 통해 회복되고 구현될 것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새 예루살렘 성에는 에덴적 요소(계 22:1-5)와 성전적 요소(21:3, 22절)가 필연적으로 공존하게 되는 셈입니다(이필찬, 요한계시록 어떻게 읽을 것인가, 271-273). 이상의 세 가지 요소를 동시적이고 총체적으로 함의하고 있는 임마누엘 신학의 의미가 새 창조(새 하늘과 새 땅) 안에서 종말론적으로 성취되기 때문입니다.

12절 후반부는 “땅과 바다는 화있을진저”라고 선포함으로 ‘땅에 사는 자들’ 곧 사단에 속해 짐승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임할 화(禍)에 대해 강조합니다. 여기서 바다는 땅과 함께 악의 본거지(13:1, 21:1)를 의미하기에 더불어 사용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마귀는 본성상 자기에게 속한 자들을 도적질하고 죽이고 고통을 주며 착취하고 멸망시키려는 속성을 가집니다(요 10:10상). 반면에 예수님은 자기 양들에게 구원의 생명과 평안과 위로와 인자와 긍휼을 베푸시고 더 풍성히 얻게 하시는 분입니다(요 10:10하). 자신의 추종세력들을 공격하고 멸망시키는 마귀의 이런 악의적이고 파괴적인 속성은 ‘황충과 이만만의 마병대’에 의해 고통과 죽임을 당하는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나팔재앙을 통해 이미 살펴본 바 있습니다(계 9:1-21).

그렇다면 땅에 속한 자들에게 왜 화가 임하게 되는 것일까요. 마귀가 하늘에서 패한 것에 앙심을 품고 분노하여 땅으로 내려갔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면 마귀의 분노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신의 남은 활동시간이 길지 않다는 사실을 예견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의 생명의 존속시간이 많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강박관념의 발로가 그를 분노케 했다는 관점입니다. 본 절에서는 이런 정황을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 된 줄을 알므로”라고 언급합니다. 마귀는 자신의 남은 생애가 길지 않음과 그 결국이 종말의 심판에 처해질 것을 예감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마귀로 하여금 이런 식으로 극도의 절망감에 빠지게 만들었을까요. 아이의 승천으로 인한 천상적 전투에서의 패배와 땅으로의 추방이 이런 사실을 충분히 예고(豫告)하는 의미를 띠기 때문입니다. 계 20:1-3은 하늘에서의 전투에서 패배해 땅으로 추방된 마귀의 정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천사에 의해 쇠사슬로 결박당한 채 무저갱에 일천년 동안 감금됩니다. 이는 사단의 무(無)활동을 암시하는 것으로 신학적으로 사단의 완전결박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러다가 일천년이 지나면 잠시 풀려납니다(20:7). 물론 여기서 천년이란 기간은 문자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주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를 가리키는 상징적인 기간으로 해석합니다. 이를 가리켜 신학적으로 무년천설(Amillennialism)이라고 부릅니다. 본 절에서 나오는 천년기간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소위 전천년설(역사적/세대주의적), 후천년설, 무천년설 등의 다양한 견해가 제시됩니다. 이 부분은 후에 계 20장을 주해하는 과정에서 다룰 예정입니다. 무저갱에 갇혔던 마귀는 일천년간의 하나님의 섭리적 작정기간이 끝나게 되면 잠시 풀려납니다(20:7).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입니다. 이내 사로잡혀 불못 곧 지옥에 던져집니다(계 20:10). 그런 의미에서 주님의 재림 직전에 마귀의 잠시 놓임과 역사가 제아무리 필사적이고 최후의 발악적인 행동으로 표출될지라도 이내 최후의 심판에 처해질 뿐입니다. 이런 사실은 성도의 종말론적 구원과 안전을 다시 한번 확증해 주는 근거가 됩니다. 이런 이유로 마귀는 예수님의 승천에 근거한 천상에서의 패배와 땅으로의 추방 속에 담긴 자신의 비참한 결말을 예견하고 극한 분노를 발했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 절에서 언급한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 된 줄을 알고 크게 분을 냈다”란 표현은 계 20:7-10의 내용과 동질성을 가집니다.

이상의 기록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사의 결말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를 가름 할 수 있는 통찰력과 계시의 안목을 갖게 됩니다. 계시록에서 어린양의 죽음과 아이의 승천에 대한 상징은 사단의 종말론적인 패배를 결정적으로 보증하는 사건입니다. 이런 사실은 상대적으로 교회의 종말론적 승리와 구원의 완성을 보증하는 근거로 작용합니다. 전투하는 교회의 성격을 띤 지상의 교회가 어떤 열악한 환경과 상황 가운데서도 믿음의 인내와 정절을 가지고 시종일관한 신앙관을 견지해야 하는 당위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고난은 짧고 영광은 영원하기에 말입니다.

3. 용과 여자의 적대적 관계(13-17절)

용의 핍박 시도와 하나님의 양육(13-14절)

13절은 용의 추방과 남자를 낳은 여자에 대한 핍박기사를 다룹니다. 그런 의미에서 13절 전반부의 용이 땅으로 내어 쫓긴 기사는 7-9절에 소개된 천상에서의 미가엘과 용과의 전쟁과 패배와 추방기사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요약합니다. 13절 후반부의 남자를 낳은 여자에 대한 용의 핍박기사는 1-6절의 내용을 배경 삼으면서 의미를 발전시킵니다. 다시 말해 4-5절에서 여자를 낳은 아이를 삼키려다 실패하고, 하늘의 전쟁에서 패해 땅으로 추방된 용은 이제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합니다. 본 환상에서 ‘남자를 낳은 여자’의 정체는 더 이상 혈통적 이스라엘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구속사의 점진적인 맥락 속에서 역사적 이스라엘의 실체인 참 이스라엘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 된 신약의 교회공동체를 의미합니다(갈 3:29, 롬 2:28-29, 9:6-8). 용이 여자를 핍박한다는 것은 문자적으로 추격하다란 의미를 띱니다(호크마 종합주석, 394/이필찬 552). 남자를 낳은 여인에 대한 용의 이런 추격은 과거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뒤쫓았던 바로의 군대를 연상시킵니다.

용의 추격(핍박, 13절)에 하나님께서는 여자에게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주어 광야로 날아가게 하십니다(14절상). 그리고 광야에서 뱀의 낯을 피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도록 보호해 주십니다(14절하). 본 환상은 6절에서 아이를 낳은 여자가 광야로 도망가 하나님에 의해 일천이백육십일 동안 양육 받는 기사와 병행을 이룹니다. 여자가 광야에서 양육을 받는다는 사실과 양육기간이 공히 1260일과 3년 반(한 때, 두 때, 반 때=1260일)으로 표현하고 있는 내용들이 상호간 병행적 관계를 증거해 줍니다. 차이가 있다면 6절에서 언급하지 않았던 ‘도망의 방법’이 14절에서는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로 날아갈 수 있었다는 내용입니다. 이런 표현은 출애굽의 모티브를 적용시킨 내용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 시내산까지 인도해 주신 사건을 가리켜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로 설명합니다(출 19:4). 신 32:11-12). 여기서 ‘독수리 날개’란 비유적인 표현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과 철저한 보호를 상징적으로 말씀하는 내용입니다(신 32:11-12, 사 30:31).

13-15절의 용(뱀)의 공격(핍박) 시기에 대한 다양한 견해

여기서 땅으로 추방당한 용이 남자를 낳은 여자를 향해 핍박(추격)을 시도하고(13절), 여자는 독수리 두 날개를 받아 광야로 피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1260일=3년 반)를 양육(보호)받는 일(14절)과 관련해 신학자간의 다소 견해의 차이가 있음을 잠시 살펴봅니다. 많은 신학자들은 본문(13절)에 나오는 사단의 핍박 시도의 시점과 구체적인 공격 내용을 소개하는 15절의 사건을 현 교회시대로 보는 관점이 지배적입니다. 이런 관점은 계 20:1-3에 소개된 용의 쇠사슬 결박과 무저갱에 감금된 환상을 완전결박(total inactivity)으로 보느냐, 제한결박(limited inactivity)으로 보느냐에 따른 해석의 차이 때문입니다. 후자의 관점으로 해석하게 되면 현 교회시대에 사단의 활동이 그 만큼 영향력이 제한되었고 대신 용의 하수인인 두 짐승(13장)과 동역의 관계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이필찬, 유도순, 장수민, W.헨드릭슨). 그러나 전자의 관점에 의하면 사단의 완전결박과 전적 무(無)활동으로 인해 제약을 받게 된 용은 대신 두 짐승에게 자신의 권세와 권한과 능력을 양도해 줌으로 배후에서 대리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식으로 현 교회시대에도 여전히 활동하고 있는 셈이 된다고 결론짓습니다(이순태, 13-17, 200-201/엡 4:26-27, 벧전 5:8-9).

따라서 무저갱에 갇힌 사단의 감금을 완전결박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13절에서의 용의 핍박시도는 14절에서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무위로 끝나고, 대신 두 짐승에 의해 대리적인 수행으로 대체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내용이 바다에서 나온 짐승에 의해 교회가 42달 동안 핍박받는 기사를 다루고 있는 13장의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로 13:1-2에서 용이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에게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주었다’고 설명합니다. 13장에서 42달 동안 교회를 향한 짐승(용)의 핍박기간은 12:6과 14절에 기술된 교회에 대한 광야에서의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호와 양육의 기간과 본질상 동일시되는 기간입니다.

그러므로 15절에서 구약의 홍수이미지를 통해 여자를 수장시키려는 뱀(용)의 적극적인 공격과, 이에 대처하는 하나님의 극적인 보호(16절)의 장면은 용이 추방된 직후가 아니라, 1260일(한 때와 두 때와 반 때=42달) 동안 광야에서의 교회양육과 보호기간이 끝난 직후가 된다는 지적입니다. 이런 사실의 개연성(probability)을 피력하면서 이순태는 14절과 15절을 잇는 두 절(節) 사이에 ‘그 후’(Then)라는 관계부사를 넣고 있는 NIV영어성경의 관점을 근거로 제시합니다(이순태, 200). 영어 본문을 살펴봅니다. 14절입니다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The woman was given the two wings of a great eagle, so that she might fly to the place prepared for her in the desert, where she would be taken care of for a time, times and half a time, out of the serpent's reach). 15절입니다.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하되”(Then from his mouth the serpent spewed water like a river, to overtake the woman and sweep her away with the torrent). 본 NIV영어성경에서 15절의 'Then'이라는 시제를 나타내는 관계부사는 ‘그 후’라는 의미로 14절의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의 교회양육 기간이 지난 시점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 이순태의 관점입니다. 용은 ‘아이의 승천’에 함의된 예수님의 구속사역이 이미 성취된 사실에 근거해 본질상 패배했음을 계 20:1-3의 상징이 강력히 뒷받침해 주고 있다는 견해 때문입니다. 계 20:1-3에 기록된 용의 결박이 문맥 속에서 완전결박인 사실을 여러 정황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음을 감안할 때, 이순태의 개연성의 관점은 충분히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보입니다. 본문을 통해 용의 완전결박을 뒷받침해 주는 몇 몇 단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문 중에서 “용을 잡으니”, “쇠사슬로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열쇠로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천 년이 찰 때) 반드시 잠간 놓이리라” 등의 표현은 아무리 양보한다고 해도 ‘제한결박을 통한 활동의 억제’보다는 ‘완전결박을 통한 무활동’의 면을 상대적으로 강력히 시사한다고 보여집니다(유 1:6, 벧후 2:4). 더구나 20:7에서 “천 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나와서”란 표현은 ‘결박과 석방’사이의 천년기간 동안을 무저갱에 철저하게 감금돼 활동의 여지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강력히 지지해 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상의 논증을 따르게 되면, 14절과 15절의 사건은 시간적인 연속성이 배제됩니다. 대신 중간에 ‘그 후’(Then)라는 관계부사의 삽입으로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1260일, 6절)의 교회양육과 보호의 기간이 끝난 시점이 됩니다. 이제 내용을 정리합니다. 용은 하늘에서 미가엘과의 전투에서 패배해 땅으로 추방됩니다(7-9절). 대신 용은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려고 시도합니다(13절).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교회는 광야에서 1260일 동안 철저히 보호와 양육을 받습니다(6, 14절). 결국 용의 핍박은 무위로 끝나고 이내 천사에게 잡혀 무저갱에 결박돼 천 년간 감금당합니다.(계 20:1-3). 대신 용의 추종세력인 두 짐승에게 모든 보좌의 권세와 권한과 능력을 양도함으로 이들을 통해 대리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됩니다(13:1-2, 11-12절). 현 교회시대의 사단의 역사는 이런 식으로 무저갱에 결박당한 용이 두 짐승을 통해 여전히 동일한 영향력을 행사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이순태, 14-15/엡 4:26-27, 벧전 5:8-9). 본질상 이들의 정체성은 동질성을 띠게 마련입니다. 마귀의 능력과 속성을 두 짐승이 그대로 이어받고 있기 때문입니다(13:1-2, 요 8:44). 그래서 이들의 호칭을 필요에 따라 상호 교환적으로 부른다고 해서 내용상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마치 용을 옛 뱀과 사단과 마귀와 동질성을 띤 존재들로 상호 동일시 여기듯이 말입니다(계 12:9). 또 16:13에서는 여섯 번째 대접재앙과 관련해 아마겟돈에서 지상최대의 영적 전쟁을 도발하는 환상이 기술됩니다. 이 과정에서 이 전쟁을 수행하는 장본인들을 소개하면서 용의 입과 짐승(바다에서 나온 자)의 입과 거짓선지자(땅에서 나온 짐승)의 입에서 나온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귀신의 영)으로 묘사합니다. 여기서 소위 ‘악의 삼위일체’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들 세 악한 흑암의 우두머리들은 본성상 동질성을 띠면서 동일시되고 있음을 문맥 속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땅으로 추방된 용이 “자기의 때가 얼마 못 된 줄을 알고”(12절하, 감금, 심판, 불못) 언제(when), 어디서(where)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에게 보좌의 권세와 능력을 양도했는가(13:1-2)의 문제가 제기됩니다. 물론 이 시점은 계시록 자체 속에서 문자적으로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자의 의도와 목적을 따라 시공을 초월해 넘나드는 묵시문학의 기술과 기법(G.골즈워디, 151-156)상, 용의 땅으로의 추방과 무저갱의 감금 사이의 어느 시점이 되리란 사실을 계시록의 다양한 문맥 속에서 충분히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용의 왕권 양도의 장소는 어디일까요. 용이 여자의 남은 자손들과 최후의 일전(1260일=한 때와 두 때와 반 때가 지난 후, 20:7-8)을 벌이기 위해 찾아간 곳이 ‘바다 모래 위’라고 12:17은 지적합니다. 13:1-2은 용의 수석(首席) 하수인인 짐승이 나온 곳이 바다(sea)라고 표기함으로 이 두 장소가 상호 병행을 이루면서 의미상 동질성을 띠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기서 바다란 단 7:3을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다니엘 본 절에서 바다란 용례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대세력들의 본거지를 총체적으로 상징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새 창조 세게(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바다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21:1).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는 사단을 비롯한 일체의 악의 세력들이 불못에 들어간 것(19:20, 20:10, 11-15절)과 때를 같이하며, 그 나라는 죄의 권세 또한 활동할 수 없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21:4). 따라서 용은 하늘에서 추방된 직후에 ‘자신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직감하고 악의 세력의 본산인 바닷가로 찾아가게 됩니다. 거기서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을 불러내 그에게 보좌의 통치권과 권세와 능력을 위임해 줍니다. 무저갱에서 잠시 놓임을 받아 성도와 최후의 일전을 벌일 때까지(20:1-3, 7-8절) 악의 대권을 잠정적으로 물려준 셈입니다. 계 20장에서는 이 기간을 천년기간으로 설정합니다(1-3, 7절). 그런 의미에서 계 20장에서의 천년 기간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의 전 기간을 상징적으로 가리키는 섭리적 작정의 기간으로 곧 1260일/한 때와 두 때와 반 때/42달 등의 기간과 본질상 동일한 기간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동일한 기간을 왜 계 20장에서는 굳이 천년이란 숫자로 표기하는 것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성취로 말미암는 사단의 완전결박과 대비시켜 그리스도와 성도의 왕 노릇의 완전함을 상징적으로 강조하기 위함이란 지적입니다(이순태, 40). 이상의 스토리의 전개는 비록 표면화된 기록은 아닐지라도 묵시적인 기법상 독자의 상상력을 동원시킴으로 문맥 속에 감춰진 저자의 의도를 발견할 수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관점일 수 있습니다.

다시 12장 본문으로 돌아옵니다. 요한은 이처럼 출애굽 모티브를 계시록 본문에 반영시킴으로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셨던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과 애정 어린 보호와 양육의 손길을 ‘남자를 낳은 여자’(신약의 교회공동체)에게 적용시킴으로 용의 공격과 핍박으로부터 눈동자와 같이 지켜 보호해 주실 것을 확증시켜 주십니다. 물론 이런 하나님의 구원과 보호의 약속과 보증은 현 교회시대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종말론적인 관점을 지향합니다. 성도의 위로가 이에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1260일이나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의 기간은 동일하게 주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전(全) 기간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음을 문맥 속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할 대목이 있습니다. 13절에서 땅으로 추방당한 용의 핍박을 피해 독수리 날개를 의지해 광야로 피신한 여자 곧 신약의 교회를 언급하면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라고 기술합니다. 같은 문맥 안에서 용이 뱀으로 표현이 바뀝니다. 이는 9절에서도 용과 뱀을 동일시하면서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고 했듯이, 내용상 연속성을 갖고 있는 13-14절에서도 용과 여자(교회)와의 적대적인 투쟁의 기원이 창 3:15에서부터 비롯되었음을 암시해 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계시록을 관통하는 구속사의 중심사상은 ‘여자의 후손언약’(창 3:15) 속에 예언된 두 계열 간의 지속적인 반목과 충돌과 투쟁의 역사에 기원을 두면서 진행됩니다. 그리고 이 두 계열 간의 오랜 적대적인 관계는 어린양의 구속사역의 성취를 포괄적으로 함의하고 있는 ‘아이의 승천’과 용의 패배를 통해 본질상 일단락됩니다. 따라서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케 한다”(창 3:15)는 묵시적 예언은 사실상 계 12장에서 영적인 성취를 보게 된 셈입니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 사역인 새 하늘과 새 땅은 마침내 실현될 것이며, 승리한 교회는 새 창조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될 것입니다(계 20:1-2). 실낙원은 복낙원으로 회복될 것입니다(22:1-5). 임마누엘 신학의 상징인 성전계시도 최종 성취될 것입니다(20:3, 22절).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의 종말적 완성은 에덴과 성전 속에 담긴 임마누엘의 계시적인 본의를 하나로 통일시키면서 온 우주만물을 연합시켜 하나 되게 하는 근거로 작용한다는 것이 계시록의 관점입니다(엡 1:10, 롬 8:19-21).

교회를 향한 용의 필사적인 공격(15-16절)

여자에 대한 뱀(용)의 필사적인 공격을 기술하는 15절의 본 사건은 위에서 그 개연성을 타진해 본대로 용의 추방 직후가 아니라, 교회의 양육기간인 1260일(한 때, 두 때, 반 때)이 지난 직후인 셈입니다. 그럼에도 교회를 향한 사단의 세력들에 의한 핍박은 교회시대 전 기간을 통해 지속적으로 가해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런 맥락 속에서 15-16절은 여자에 대한 용의 분노가 어떤 식으로 폭발했는지를 보여주며(15절), 동시에 여자(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가 어떤 방식으로 용의 핍박을 무력화시켰는지(16절)를 각기 구약의 이미지를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15절은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해내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도록 시도했다’고 기술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과 관련해 홍해사건의 정황을 역으로 적용시킨 경우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이를 가리켜 ‘역(逆) 출애굽 모티브’라고 칭합니다. 사건을 역설적으로 전개시켜 나가는 것을 통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보호와 양육(16절)의 실상을 보다 극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이필찬 556). 그런가 하면 혹자(或者)는 뱀의 이미지 차용과 관련해, 용의 이미지는 물리적인 무서운 핍박과 박해를 연상케 하지만, 뱀의 이미지는 말로 속이는 미혹과 연관시켜야한다고 강조합니다(창 3:1-5). 그러므로 뱀이 입으로 물을 강같이 토해내 여자를 수장시키려 했다는 것을 물리적인 박해나 핍박으로 보기보다는 세상풍조나 말씀의 왜곡과 변질 및 각종 주의(ism, 포스트모더니즘/종교다원주의), 철학적 허구, 정치적 이상향, 과학적 요설 등을 통해 교회를 세속화시키고 무력화시키는 사단의 고등한 궤계와 술책으로 해석해야한다고 주장합니다(W. 헨드릭슨, 173/유도순, 232/장수민, 135). 혹자는 구약적 배경에서 홍수는 주로 심판과 환난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용례(창 6:5-7, 시 69:15, 90:5, 사 59:19, 렘 46:7, 단 9:26, 암 9:5)로, 본 절에서는 사단이 교회를 핍박하는 온갖 형태의 파괴적인 행위를 총체적으로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호크마 종합주석, 395).

이상의 제반 견해와 주장들은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각각의 관점들을 뒷받침할 수 있는 논리적 근거와 유사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필찬의 견해는 출애굽사건에 이어 홍해도하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소위 ‘모세의 노래’(출 15장)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주께서 오른손을 드신즉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출 15;12)란 표현이 계 12:16의 말씀과 병행관계를 이룸으로 계 12:14의 내용이 역(逆) 출애굽 모티브를 적용하고 있다는 개연성을 가능케 한다고 주장합니다. W. 헨드릭슨과 동일한 입장을 취하는 경우도 계 12:9에서 용을 옛 뱀과 동일시하면서 그 정체성을 “온 천하를 꾀는 자”로 해석했음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여기서 용을 옛 뱀과 동일시한 것은 다분히 태초에 사단이 뱀을 이용해 하와를 꾀였던 것을 염두에 둔 표현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런 상호 불가분의 관계성 속에서 용이 뱀으로 바뀐 후 뱀에 의해 ‘입으로 물을 강같이 토하여 여자를 수장시키려 시도했다’(15절)는 표현은 ‘입의 물’이란 상징적 표현에 근거해 입으로 나오는 온갖 거짓말과 속임수와 말씀의 왜곡을 가지고 교회를 적극 미혹하는 것으로 충분히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엡 4:14). 호크마 종합주석의 주해에 따르면 성경에서 홍수 이미지는 주로 심판과 환난의 도구로 사용된 것을 감안하면, 계시록의 홍수 이미지와 본질상 충분히 상응성(correspondence)을 발견하게 됩니다. 따라서 15절의 홍수 이미지는 사단이 교회를 핍박하기 위해 사용하는 온갖 형태의 파괴적인 내용을 상징한다는 해석도 타당성을 가집니다.

따라서 이상의 다양한 관점을 필요적절하게 수용해 적용시켜보면, 사단의 극한 핍박과 고난이 엄몰하는 파도처럼 밀려오고, 온갖 거짓과 궤계와 미혹이 집요하게 교회를 공격할지라도, 하나님은 더욱 강력한 섭리의 손길로 교회를 보호하시고 돌보시며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셔서 마침내 종말론적 구원과 교회의 승리를 보증하신다는 말씀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말 28:18-20, 롬 8:33-39, 요 10:28-29, 시 121:8).

종말적 영적 전쟁(17절)

17절은 12장 전체를 마무리하면서 용의 분노가 전쟁의 도발도 불사하는 극한 적대적 감정으로 비화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런 이유는 12장의 문맥 속에서 두 번에 걸친 용의 분노에 근거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 번째는 하늘의 전쟁에서 패해 땅으로 추방되는 사건과 관련해 ‘자기의 생존의 기간이 많지 않음’에 대한 강박관념의 발로 때문입니다(12절하). 이는 최후의 심판을 의식한데서 오는 필연적인 반응의 결과를 의미합니다. 두 번째는 ‘입으로 물을 토해내’ 여자를 수장시키려 했던 계획이 무위로 끝나버린 데 대한 앙심의 반감이 충천했기 때문입니다(15-16절).

이런 결과로 용은 여자(교회공동체)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고 ‘여자의 남은 자손’을 향해 극한 분노를 표출하면서 모종의 중대 전쟁을 획책하게 됩니다. 용이 그의 최후의 일전을 각오하고 찾아간 곳이 악의 세력들의 본거지를 총체적으로 상징하는 바다(단 7:2-3, 계 17:1, 15절), 곧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는 표현이 이런 사실을 뒷받침해 줍니다(17절하). 용의 휘하의 악의 세력들을 총 규합해 여자의 남은 자손들과 최후의 일전을 벌일 일사각오의 결의를 가지고 말입니다. 12장에는 용과의 적대적인 대결 구도를 세 번에 걸친 관계설정을 통해 단계적으로 서술합니다. 먼저 ‘용과 아이’와의 적대적인 대립관계를 설정합니다(4-5절). 다음으로 용과 아이를 낳은 여자와의 대립관계입니다(13절). 마지막으로 ‘용과 여자의 남은 자손들’과의 최후의 일전입니다(17절). 여기서 ‘여자의 남은 자손들’이란 교회공동체 전체를 전쟁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닌 각개전투식의 전쟁방식을 가리킵니다(호크마 종합주석 395/W.헨드릭슨, 173). 이런 사실이 여자의 남은 자들을 설명하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이란 표현을 통해 확인됩니다. 이들은 다른 말로 ‘여자(음녀:세상)로 더불어 짝하지 않고 믿음의 정절이 있는 자들로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 구속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인 셈입니다(계 14:4).

그런 의미에서 17절의 내용은 문맥 속에서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 일어나게 될 마지막 종말적 영적 전쟁의 뉘앙스와 병행을 이루는 것으로 추정됩니다(계 16:12-16, 19:19-21, 20:7-10, 이필찬, 내가 속히 오리라, 559/요한계시록 어떻게 읽을 것인가, 190). 이런 사실을 이미 위에서 15절과 16절 사이에 ‘그 후’(Then)라는 관계부사의 용례가 삽입된 NIV영어성경의 관점을 통해 살펴본 바 있습니다. 용은 추방된 후에 이내 무저갱에 결박돼 감금되었기 때문에 남자를 낳은 여자 곧 신약의 교회공동체를 직접적으로 핍박하고 박해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했다는 관점 때문입니다(20:1-3). 17절에서 용과의 마지막 일전을 벌일 대상은 여자가 아닙니다. 여자의 ‘남은 자손들’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는 15-16절을 통해 여자에 대한 용의 공격이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과 보호와 인도로 인해 무위로 끝났기 때문입니다. 용(사단/마귀)이 여자 곧 교회공동체 전체를 멸망시킨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합니다. 게다가 용은 아이의 승천 속에 함의된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곧 구속사역의 성취로 본질상 이미 종말적 패배가 선언된 셈입니다. 따라서 여자의 남은 자손들을 대상으로 획책하고 있는 용의 전쟁시도는 일종의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식의 최후의 발악적 행동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아이의 승천’은 교회공동체는 물론 성도 개개인의 종말적 승리를 담보하는 근거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최후의 일전은 잠시 뿐입니다(계 20:1-3, 7-8절), 그 결국은 멸망인 사실이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계 20:7-10, 마 25:41).

이상 12장을 정리하면서 용과 아이와 여자와 여자의 남은 자손들과의 적대적인 반목과 투쟁의 역사는 멀리 창 3:15의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예언돼 있는 두 계열 간의 상극적인 첨예한 대결구도에서부터 유래되고 있음을 간파하게 됩니다. 결과는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에 치명상을 가함으로 승패는 일단락됩니다. 역사 속에서 예수님의 구속사역의 성취와 본 계 12장에서 아이의 승천 속에 담긴 영적 본의가 이런 사실을 밝히 해명해 줍니다. 따라서 여자(단수)의 승리 속에 여자의 남은 자들인 교회공동체(복수)의 승리 또한 보장됩니다. 대표성의 원리와 연합의 원리에 근거해서 말입니다. 계 12:17절은 이런 종말적 전쟁을 예시하는 것이요, 20:7-10은 그 결과를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용(사단)의 패배를 통한 여인(교회)의 궁극적 승리까지도 말입니다.

Ⅲ. 결론

계 12-14장은 또 하나의 삽입환상 동아리(group)를 이루면서 교회공동체와 악의 세력과의 적대적인 투쟁관계를 다양한 핍박과 환난의 모습을 통해 기술합니다. 이 과정에서 어린양의 성육신과 죽음과 부활 및 승천사건은 교회의 궁극적인 승리와 이로 인한 악한 세력에 대한 최후의 심판에 근거가 됨을 소개합니다. 이는 11장에 소개된 두 증인에 의한 교회의 복음증거 사역 과정에서 죄와 심판과 구원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것을 통해 악의 세력과의 불가피했던 충돌과정을 보다 근원적으로 접근해 기록한 내용으로 상호 연속성을 가집니다. 이런 식의 적대적인 두 세력 간의 첨예한 대립구도가 12장에서는 용과 아이, 용과 아이를 낳은 여자, 용과 여자의 남은 자손들이라는 적대적 삼각 구도 속에서 보다 심도 있게 다루어집니다.

이상의 용과 삼자(三者) 간의 대립구도는 아이의 승천(죽음/부활)에 근거해 용의 패배와 추방으로 일단락됩니다. 아이의 승천은 본질상 용의 패배를 근원적으로 가져왔으며, 반면 교회의 종말적 구원과 승리를 보증하는 결정적인 동인으로 작용합니다. 특별히 하늘 전쟁에서 미가엘 천사장에게 패해 땅으로 추방된 용의 패배사건은 하나님의 보좌찬탈에 실패한 사단의 타락사건과는 별개의 경우입니다(사 14:12-14, 유 1:6, 벧후 2:4). 12장에서의 용의 패배와 추방 기사는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성취에 근거합니다. 어린양의 피와 성도의 복음증거와 충성이 동인이 되었다는 11절의 하늘의 선언이 이런 사실을 결정적으로 뒷받침해 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약의 교회공동체는 복음의 증인으로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일과 복음을 증거함에 자신의 생명까지도 불사하겠다는 일사각오의 심정으로 사단의 세력들과의 영적싸움에 적극 임해야 할 것입니다(행 20:24). 왜냐하면 사단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사실로 인해 하수인인 짐승을 충동해 필사적으로 적대적인 공세와 미혹에 박차를 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계 13:1-2).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벧전 5:8).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4-15).

한편 계시록의 관점에 의하면 현 교회시대(초림-재림)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양육/보호/인도하시는 1260일(한 때 두 때 반 때)에 해당하는 광야 같은 성격을 띱니다(12:6, 14절). 그런가 하면 교회가 복음증거의 사명을 띠고 1260일 동안 회개를 촉구하며 구원과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선지사역의 기간이기도 합니다(11:3). 이 과정에서 교회는 불가피하게 죄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전파하며, 상하고 통회하는 심정의 회개를 촉구하게 되므로 사단의 세력들에 의해 필사적인 핍박과 공격과 미혹을 받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 합니다(계 11:2, 13:5-8, 20:7-10, 살후 2:9-12).

그러나 교회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해 승귀(exaltation)하신 주님과 함께 종말적 승리와 영광을 공유하고 있는(엡 2:6) 천상적 신분으로 존재합니다. 여기에 전투하는 교회원으로 존재하면서 동시에 본질상 하늘에 승리한 교회로 존재하는 이중적 정체성을 가진 자들로 말입니다(계 4:4, 7:9-10, 14:1-5).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하나님 나라는 마귀의 권세를 이기는 천상적 통치권의 발휘의 개념으로 이미 이 땅에 도래해 역사하고 있습니다(마 12:28-29). 성도는 예수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그 분의 부활하신 생명에 연합돼 이미 천국백성의 시민권을 가진 자들로 여기에 존재하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빌 3:20, 골 1:13).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 받고 구원받아 의롭게 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여기서부터 천국의 실질을 선취(先取, preoccupation)적으로 맛보고 체험하며 누리는 자들로 살아가는 천상적 존재들입니다. 전폭적인 신뢰의 믿음만이 하나님의 불변의 약속이 현재적으로 내게 이루어진 것과 앞으로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며 살아갈 수 있는 천상의 능력과 보증과 동인으로 작용하게 될 것입니다(히 11:1), 계시록을 관통하는 구속사의 도도한 흐름도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남은 성취를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히 11:6).

출처 : remnant7000
글쓴이 : sky blu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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