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 강
하늘의 십사만 사천과 최후의 심판 메시지
(계 14:1-20)
Ⅰ. 도입
계 14장은 12장부터 시작되는 삽입환상 군(群)의 마지막 환상부분입니다. 14장은 하나님의 인을 받은 자들과 짐승의 표를 받은 두 진영 간의 상반된 종말적 형편을 상징적으로 묘사합니다. 12-14장까지의 삽입환상 동아리의 중심내용은 11:3-13에 기술된 두 증인(교회공동체)의 선지적 복음증거 사역과 이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야기되는 악의 세력들과의 적대적인 투쟁관계를 좀 더 심화/확장시켜서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12장은 악의 세력의 총수로 묘사된 용의 삼 단계 전쟁과정을 소개합니다. 즉 용과 아이(예수님), 용과 여자(교회공동체), 그리고 용과 여자의 후손들(성도 개개인) 간의 전쟁기사가 창 3:15의 여자의 후손언약에 근거해 신구약 전 역사를 관통하는 가운데 기술됩니다. 13장은 아이의 승천으로 본질상 패배한 용이 무저갱에 1000년간 갇히기(계 20:1-3) 전, 42달 동안 짐승에게 통치권을 부여함으로(계 13:1-2) 짐승을 하수인 삼아 여전히 세상을 지배하는 흑암의 왕으로 행세하면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회를 핍박하는 내용을 진술합니다. 이런 사실에 입각해 악의 지휘체계는 용-짐승-거짓선지자의 삼두체제를 이루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정체성을 적극 모방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오른 손과 이마에 짐승의 표를 받은 땅에 속한 자들은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가 짐승을 추종하며 짐승의 우상을 경배합니다. 이 일을 주도적으로 관장하면서 짐승을 신격화시키는 데 앞장 서 역사하는 자가 땅에서 올라온 두 번째 짐승인 거짓선지자입니다.
계 14장은 이상의 논증과 정황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마치 여섯 째 인 재앙심판 결과 누가 하나님의 심판에서 피할 자가 있겠느냐고 질문하는 가운데 7장의 삽입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인 맞은 144,000의 교회만이 가능함을 기술하고 있듯이 말입니다. 동일한 패턴 속에서 13장의 두 짐승에 의한 무차별적인 공격과 박해로 패배한 것처럼 보인 교회가 어떻게 승리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13장에서 짐승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은 채, 믿음과 인내로 신앙의 정절을 지켰던 지상의 교회공동체가 14:1-5에서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이름으로 이마에 인침을 받은 하늘에 속한 십사만 사천명의 모습으로 소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13장은 지상의 관점에서 교회의 핍박과 투쟁적 관계를 기록했다면, 14장은 천상적 관점에서 승리한 교회공동체의 종말의 모습을 스케치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렇게 교회의 영적 정체성은 양면성을 띠면서 여기(this world) 존재하며 동시에 하늘(that world)에 속한 자들로 기술합니다. 성도들의 믿음의 인내와 위로와 기쁨과 소망이 이에 있습니다. 교회는 죽는 자 같으나 최후의 종말적 승리가 확실하게 보장된 자들로 살아갑니다.
Ⅱ. 전개
계 14장은 내용상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특별히 ‘내가 보니’란 표현을 기준으로 1-5절은 시온산에 어린양과 함께 서 있는 십사만 사천명의 승리한 교회공동체를 소개합니다. 6-13절은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의 종말적 심판의 메시지를 기술합니다. 14-20절은 두 종류의 추수내용을 환상을 통해 진술하면서 앞의 세 다른 천사의 구원(6-7절)과 심판(8-11절)의 메시지 내용을 곡식추수(14-16)와 포도수확(17-20절)의 상징을 통해 보다 발전시켜 설명합니다. 이는 구원의 종말적 의미와 필연성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심판의 의미와 비참함을 대비시켜 기술함으로 두 진영 간의 결국이 어떻게 결말날 것인 지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요한은 이런 사실에 근거해 지상의 교회가 짐승의 핍박과 시험과 유혹 앞에서 어떤 신앙관을 견지해야 할는지를 성도들의 믿음의 인내와 말씀의 순종이란 표현을 통해 재확인시켜 줍니다(11절). 따라서 계 14장 자체에서도 하나님의 표를 받은 자와, 짐승의 표를 받은 자를 상호 대비시키면서 그 결국이 구원과 심판, 승리와 패배로 갈라질 것을 제시합니다.
요한은 이런 식으로 초대교회공동체는 물론 모든 시대에 걸쳐 존재하는 하나님의 참 된 교회들을 향해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롬 8:18)는 사실을 암묵적으로 선포하면서 하나님과 어린 양을 향한 일편단심의 믿음과 시종일관한 인내의 필요성을 강력히 촉구합니다(14:4-5). 이런 관점에서 ‘믿음의 정절과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는 참된 교회공동체가 전통적으로 견지해 왔던 세 가지 참 된 신앙자세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살전 1:2-3).
1. 어린양으로 말미암는 교회의 종말적 승리(1-5절)
계 14:1-5은 땅에서의 고난과 핍박을 믿음과 인내로 감당하면서 마침내 하늘의 영광에 동참하고 있는 승리한 교회의 종말적인 영광의 상태를 보여줍니다.
시온 산에 서 계신 어린양과 144,000인
요한은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십사만 사천인과 함께 서 계신 환상을 봅니다(1절상). 이는 12:17하에서 용이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는 모습과 대조를 이룹니다. 후자는 바다가 악의 세력의 본거지를 상징하는 것으로(계 13:1, 21:1, 단 7:3) 곧 용이 악의 세력의 총수임을 시사합니다(계 13:1-2). 동일한 원리 속에서 시온 산에 서 계신 어린양의 이미지는 하나님 나라 곧 신정왕국의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빌 2:10-11, 계 11:15)의 모습을 시온 산의 상징을 통해 계시해 주는 환상입니다.
1절에서 어린 양이 서 계신 시온 산은 구약의 배경 속에서 종말론적으로 성취될 하나님의 신정왕국과 왕적 통치권이 시행되는 구원의 현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사 2:2-3은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 들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고 선포함으로 미래의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가 하나님의 처소인 시온 산을 중심으로 시행될 것을 증거합니다. 욜2:32에서는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고 말씀함으로 시온 산이 말일에 구원의 산이 될 것을 증거합니다. 시편 기자는 시 133:3에서 “... 시온 산에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라고 고백하며, 시 134:3에서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 지어다”라고 선포함으로 시온이 구원의 완성을 통한 영생의 삶을 실질로 누리는 하나님의 왕적 통치의 현장으로 기술되고 있음을 봅니다. 히브리서 기자 또한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히 12:22)라고 지적함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착한 광야의 시내산과 이스라엘의 실체인 교회공동체가 이른 하늘의 시온 산을 대비해 설명함으로 구원공동체로서 교회의 최종목적지가 천상의 하나님 나라인 사실을 구약의 시온 산 이미지를 통해 해명해 줍니다. 따라서 본 절의 시온 산 또한 계속 이어지는 내용 속에서도 확인되지만(2절상) 하늘에 위치한 시온 산을 가리킴이 확실합니다. 땅에서 구속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인이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고 있다(3절)는 본문의 정황이 이런 확신을 뒷받침 해 줍니다. 따라서 14장에서 발견되는 144,000인은 땅에서 구속함을 받은 144,000인(3절)과 동일집단이며, 동시에 7:1-8에 기록된 전투하는 지상의 교회공동체와도 본질상 동일한 공동체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은 무슨 이유로 지상의 교회공동체를 천상의 공동체와 일치시키면서 존재양식에 따른 변화를 시도하는 것일까요. 13장의 문맥을 통해 이런 변화의 당위성에 대한 해답을 시사받게 됩니다. 다시 말해 13:6-7에서 짐승에 의해 핍박과 공격을 받아 패배한 것처럼 보였던 교회가 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성취에 근거해 본질상 승리한 교회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존재성에 일대 대 전환을 시도한 것입니다. 따라서 ‘어린양이 144,000인과 함께 시온 산에 서 있다’란 표현은 마침내 하나님의 구속사가 최종 성취됨으로 만 왕의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리한 교회공동체와 더불어 종말론적으로 도래한 하나님의 신정왕국을 접수하게 되었음을 시사합니다. 말하자면 “세상나라가 우리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주께서 세세토록 왕 노릇하시게 되었다”(11:15)는 종말론적 선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세상역사는 마감되었습니다. 세상역사의 본질인 하나님의 구속사가 세상역사를 접수한 셈입니다. 어린양의 피가 이 모든 하나님의 구속사를 최종 마감하는 결정적인 근거로 작용합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알파와 오메가가 되십니다.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역사는 이렇게 마감 될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 연합돼 이미 종말적 승리에 동참하고 있는 자들로 여기 존재합니다. 교회의 이중적 정체성이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여기 존재하며 동시에 천상에 존재하는 교회의 이중성 말입니다. 아이의 승천과 용의 패배가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척도로 기능합니다.
144,000인들의 이마에 어린 양과 하나님의 이름이 써 있다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소유된 백성임을 증거하는 상징적인 표지(標識)입니다. 이 표지는 믿음으로 받습니다. 성령께서 택하신 백성들의 영혼을 먼저 거듭나게 하시고 믿음을 주셔서 복음을 믿도록 역사하십니다(행 16:14). 이들을 인(印)쳐 주시고 저들 속에 내주하심으로 구원을 보증해 주십니다(엡 1:13, 고후 1:22). 물론 여기서 성령의 내주란 영적 관계성을 말합니다. 성령의 내주하시는 역사로 말미암아 성도를 성령의 전으로 삼으셔서 영원토록 하나님의 처소가 되게 하시는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시는 연합의 역사 말입니다(요 14:16, 고전 3:16, 엡 2:22). 14장에서 하나님과 어린 양의 이름을 가진 144,000인을 소개하는 것은 13장에서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의 총수를 나타내는 666표와 대비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은 어린양과 함께 하나님의 신정왕국인 시온 산에 들어 올 자격이 없음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이들에게 시온 산은 고사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받아 불과 유황불에서 세세토록 고난을 받게 될 것을 선포합니다(14:9-11).
따라서 세상역사의 본질인 하나님의 구속사적 관점에서 영적전쟁(엡 6:12)은 두 계열 간의 극한 투쟁의 성격을 띠고 진행됩니다. 여자의 후손계열과 뱀의 후손계열 간의 사생결단의 적대적 투쟁 말입니다(창 3;15). 양 진영의 총수는 여자와 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용 곧 사단입니다. 그러나 아이의 승천(구속사역의 성취)으로 용은 이미 패배했습니다(계 11:5, 7-9절, 요 19:30). 용은 무저갱에 결박당한 채 이미 갇혔습니다(계 20:1-3). 현재는 용의 사역을 짐승이 한시적으로 대신하고 있을 뿐입니다(계 13:1-2). 그러나 아이의 승천과 용의 패배 속에서 악의 세력의 종말적 패배는 기정사실화 돼 있습니다(계 14:8). 상대적으로 교회의 종말적 승리는 보장됩니다(14:1). 이런 식의 필연적인 교회의 승리의 원동력을 가리켜 계시록에서는 ‘어린양의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심’(5:9)으로 설명합니다.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다’(7:13-14)고 증거합니다. 계시록에서 의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어린양으로 묘사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어린양의 피 값이 지불된 구속의 능력이 영적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하는 결정적인 동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구속의 연장선상에서 성도에게 미치는 구속의 은혜가 신앙의 동기유발의 전제가 되며, 새 창조의 질서 속에서 완성된 구원의 실질을 누린다는 것은 성경이 약속하고 있는 최고의 복과 최상의 상급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구원의 확신은 기독교 신앙의 알파요 오메가로 기능합니다. 교회공동체가 영원토록 찬송할 새 노래의 주 된 주제가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 있도다”(7:10)란 사실에 집중돼야 하는 당위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계시록에서 소개되는 경배와 찬양의 중심주제와 내용이 한결 같이 어린 양의 구속 안에서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집중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5:9-12, 7:10-12, 11:15-18, 12:10-12, 15:2-4, 19:5-8). 구속사의 핵심 주제는 단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찬양과 영광돌림에 집중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 총체적으로 계시해 주고 있는 엡 1:4-6의 말씀의 종말론적 성취이기도 합니다. 교회의 위로가 이에 있습니다. 성도의 믿음의 인내가 요구되는 이유가 이런 사실과 깊이 관련됩니다. 현재의 고난이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성도의 미래는 단순한 희망사항이 아닙니다. 실제상황입니다. 변개될 수 없고 무효화될 수 없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하나님의 신실성이 보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린양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보증의 총화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예와 아멘이 되기에 족합니다(고후 1:20).
새 노래를 부르는 십사만 사천인(2-3절)
요한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듣습니다. 요한은 천상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설명하면서 ‘맑은 물소리, 큰 뇌성, 그리고 거문고 타는 소리’ 등으로 설명합니다. 이는 세상소리와 차별화된 천상의 소리에 대한 장엄함과 아름다움의 표현입니다. 이 소리의 주제는 ‘새 노래’입니다. 그러나 이 노래를 부르는 주인공들의 정체는 불확실하지만(3절상), ‘땅에서 구속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다’(3절하)는 설명과 이들의 신앙적 정체성을 기술하고 있는 4-5절의 내용을 통해 교회공동체인 사실이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하늘에서 새 노래를 부르는 무리는 땅의 십사만 사천인의 실체로서 하늘의 십사만 사천인을 가리킴에 틀림없습니다. 땅에 있으면서 동시에 하늘에 존재하는 교회의 이중적 존재성의 원리 속에서 말입니다.
본 절의 새 노래는 5:9의 새 노래와 병행을 이룹니다. 이 노래를 새 노래로 부르는 이유는 ‘땅에서 구속함을 받은 자들’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들로 존재하는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 자들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들로 존재하는 자들입니다.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믿음의 인내로 신앙의 절개를 지킨 자들입니다. 오직 무익한 종의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며 영원토록 하나님으로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본질상 마귀에게 속한 이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만을 목적삼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기는 자들이 아닙니다. 자신의 세속적인 행복과 성공과 유익을 위해 하나님을 도구 삼는 기복적인 신앙의 소유자들이 아닙니다. 구원의 은혜에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목적삼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상의 사실들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게 된 사실을 신앙으로 고백하며, 이 크신 일을 이루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송축하며 영광 돌리는 노래가 다름 아닌 새 노래의 주요 주제요 가사의 내용입니다.
이렇게 볼 때, 자연히 ‘땅에서 구속함을 받은 144,000인’만이 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이 충족된 자들인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됩니다. 한 마디로 어린양의 구속 안에서 나와 하나님 사이에 무슨 일이 이루어졌고, 이루어지고 있고, 이루어 질 것인가를 확신하며 감사함으로 신앙 고백한 내용이 새 노래의 주요 내용입니다. 구원의 생명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동일한 가치인 사실을 깨달아 구원을 최고의 복이요 최상의 상급으로 절감하면서 일생 무익한 종의 심정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새 노래란 말입니다. 짐승의 표를 받고 종교를 부의 수단과 방편으로 삼아 욕심을 충족시키려는 자들은 새 노래와는 무관합니다. 666의 정체는 물질적인 축복을 미끼삼아 사람들을 기복적인 신앙으로 미혹해 결국은 하나님의 구원과는 무관한 자들로 실족시키려는 사단의 고등술책인 셈입니다. 따라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에 사로잡혀 하나님과 무관한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아가는 일체의 세속주의적 삶의 정체성이 다름 아닌 666 사상이 지향하는 짐승의 표를 받는 삶인 셈입니다(요일 2:15-16). 복음서는 이를 가리켜 사람들의 보편적이며 일상적인 삶의 정황으로 묘사합니다(눅 17:26-30). 그러나 그 본질은 하나님을 불신하고 거역하는 데서 오는 죄의 관영의 삶과 동질성을 띠는 것으로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창 6:5-8, 창 18:20-21).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구원의 확신이 동기유발 돼 무익한 종의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을 목적적으로 신앙하며,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는 신앙 고백적 차원에서 예배를 드리며, 감사하며 찬양드리는 신앙행위야말로 새 노래로 찬양하며 경배드리는 삶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어느 시대건 진리 안에서 구속의 진리성과 진정성에 깊이 접촉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찬양하며 경배하는 자들은 새 노래를 부르기에 합당한 자들인 셈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대의 구원받은 성도들이 주일 예배 때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며 공동체적으로 선곡해 부르는 찬송이야말로 하늘의 십사만 사천인이 부르는 새 노래와 내용상 하등 다를 바가 없습니다. 연속성을 가집니다. 문제는 땅에서 구속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인 가운데 나와 우리가 섬기는 교회가 정녕 속해 있느냐가 관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새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유자격자에 속한 자들인 셈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어린 양의 구속 안에서 영원히 안전하게 보장된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계시록은 어린 양이 새 노래를 부르는 144,000인과 함께 하늘의 시온 산에 이미 서 계신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구속사의 절정(consummation)이며 완성(fulfillment)을 의미합니다. 현대교회는 시온 산에 서 있는 144,000인 속에서 나와 내가 속한 교회의 모습을 봐야 합니다.
십사만 사천인의 특성(4-5절)
4-5절은 땅에서 구속함을 받은 144,000인이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과 비교해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구체적으로 기술합니다. 하나님의 표를 받은 자들의 삶의 특징은 무엇보다 먼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않았음을 강조합니다(4절상). 계시록에서 여자는 두 가지 대립되는 용례로 사용됩니다. 12장의 여자는 아이를 낳은 교회를 상징합니다. 17장에서는 짐승을 타고 있는 여자가 소개됩니다(3절). 이 여자는 음녀로서 사단의 세력을 총칭하는 사단왕국의 도성인 큰 성 바벨론과 동일시 취급됩니다(18절). 이는 새 예루살렘 성이 그리스도의 신부와 동일시되는 것에 대한 모방의 의미를 가집니다(계 21:9-10). 음녀와 큰 성 바벨론과의 관계는 14:8에서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라는 표현을 통해 추정됩니다. 여기서 큰 성 바벨론은 인격체로 기술합니다. 곧 사단과 동일시됩니다. 따라서 바벨론은 사단왕국의 도성이며 동시에 사단과 동일시됨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때 바벨론으로 묘사된 사단이 열국을 음행에 빠지게 해서 진노의 포도주 곧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에 빠지게 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한 장본인이 다름 아닌 음녀입니다(17:1-2).
그렇다면 무엇을 가지고 이 음녀가 땅의 임금들 곧 모든 나라를 음행의 포도주에 빠지게 했을까요. 17:4절 후반부에는 음녀가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고 설명합니다. 2절에서도 땅의 임금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고 증거합니다. 한 마디로 음행으로 미혹했다는 지적입니다. 음행은 구약의 배경에서 우상숭배에 해당하는 범죄행위로 간주됩니다(호 1:2).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이방인의 삶에 동화된 것을 가리켜 영적 음행으로 간주하십니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께서는 범죄 한 이스라엘을 음행한 여인에 비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로 하여금 음란한 여인과 결혼할 것을 통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부적절한 관계를 비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깨달아 음행의 범죄로부터 회개하고 돌아오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범죄 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악으로부터 회개하고 돌아오게 하실 것을 확증해 주십니다(새 언약 사상). 이런 상황을 호세아 선지자는 회개하고 돌아오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다시 장가드는 결혼식의 비유를 통해 확증해 주십니다(호 2:19-20). 이사야는 회복된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가리켜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남편 되심을 선언합니다(사 54:5). 이는 신약에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의 관계를 남편과 신부의 관계로 설명하는 것으로 발전돼 실체화됩니다(엡 5:22-33). 이토록 음행은 구약적 배경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에서 떠나 우상숭배와 불순종에 참여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바벨론의 신부인 음녀의 미혹으로 땅의 임금들이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고(17:2), “큰 성 바벨론에 의해 모든 나라가 음행하게 되었다”(14:8상)는 설명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계 18장은 큰 성 바벨론의 멸망과 관련해 바벨론으로 말미암는 음행의 죄악상들이 낱낱이 고발됩니다. 이 모든 죄악상이 총체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한 마디로 물질적인 축복을 가장한 세속주의로 집약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반한 육신의 정욕과 만족을 좇아 행하게 함으로 자기만족과 자기 의와 자기영광을 추구케 하려는 사단왕국의 삶의 원리 말입니다(창 3:4-5, 11:4, 마 4:7). 후에 이 부분을 보다 구체적으로 다룰 것입니다. 따라서 사단왕국의 원리는 한 마디로 세속주의(인본주의)와 깊이 연루됩니다. 세속주의는 세상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인간의 육신적인 성공과 행복과 유익을 위해 세상의 가치를 목적 삼는 현세지향적인 삶입니다. 세속주의의 정체는 탐심의 발로입니다. 이는 본질상 우상숭배와 맥을 같이 합니다.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욕심을 충동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충족시키려는 현대판 우상숭배의 본질은 탐욕이라고 성경은 정의합니다(골 3:5). 또한 이들 세속적인 요소들의 출처는 세상 곧 사단이라고 성경은 밝히 증거합니다(요일 2:16).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 속한 자들은 세속주의로부터 자신을 경계시켜야 될 것을 의미합니다. 로마서 기자가 성도들의 영적 예배의 삶을 언급하면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명령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롬 12:1-2). 본문에서 세대는 세상과 동일시 사용됩니다. 뿌리가 사단과 연관돼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단은 음녀로 상징되는 세속주의를 통해 인간의 욕심을 부추김으로 사람들을 온갖 세속적이고 육신적인 정욕에 종노릇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짐승의 표인 666의 정체입니다. 특별히 신앙인들에게는 기복주의의 옷을 입고 미혹하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합니다. 반면 비(非)신앙인들에게는 물질만능주의와 배금주의 및 성공지상주의의 유혹을 통해서 접근해 옵니다. 이 모든 사상의 중심은 인본주의입니다. 인간의 자기영광추구와 자기 의의 과시 말입니다(창 3:4-5, 11:4, 마 4:7).
기독교 신앙은 본질상 기복적일 수 없습니다. 최상의 복과 상급인 죄로부터의 구원과 영생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이미 소유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잠시 이렇게 자문자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인류(나/우리)에게 최악의 상태와 최대의 불행이 무엇인지를 상고하면 이내 답변이 나올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질문하셨듯이 ‘온 천하를 얻고도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고 말입니다(마 16:26, 눅 12:16-21). 본문에서 ‘온 천하’란 인류가 공통적으로 소망하는 ‘필요의 총화’를 대변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만일 어느 누군가가 온 천하를 거머쥐었다고 해도 정작 목숨을 잃는다면 그 막강한 권세와 만족과 유익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냔 말입니다. 이제 반대로 인류에게 최선의 상태와 최대의 행복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미 위에서 ‘온 천하와 목숨’의 비교를 통해서 살펴본바 있습니다. 그것은 목숨을 영원히 보장받는 일일 것입니다(요 11:25-26). 이 일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가능할 수 있습니까. 성경은 이르기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 구속의 도리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고 구원과 영생을 받으며 심판에 이르지 않게 된다고 선언합니다(요 5:24). 이처럼 구원의 의미는 성도의 정체성이 죄인에서 의인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영벌에서 영생으로, 지옥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새롭게 거듭난 사실을 확증합니다. 뿐만 아니라 구원의 가치 또한 무한대의 예수님의 피 값이 지불된 것으로 구원의 값은 예수님의 피 값과 사실상 상응하는 가치로 평가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의 정체성을 땅에서 존귀한 자로 평가해 주시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시 16:3). 구원의 의미와 가치가 이처럼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존귀한 것인데,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구원을 따 놓은 당상처럼 여기면서 플러스 알파의 추가적인 복과 상급을 기대하는 기복적인 유사기독교가 저변확대 되고 있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구원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몰이해와 부족과 결핍, 아니면 자기기만과 자기도취에 빠진 착각 때문은 아닐는지요. 지적신앙을 전인적 신앙으로 오판해서 말입니다. 만의 하나라도 육신적인 필요의 총화인 온 천하보다 귀한 목숨의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보장받은 거듭난 하나님의 친 백성들로 확신하면서도 여전히 세상적인 ‘알파’의 필요를 목적삼아 신앙을 도구로 삼는 자의적(恣意的)이고 보상심리적인 신앙생활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가히 기적(?)이요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이를 정당한 신앙으로 용납하지 않습니다(롬 10:2-3, 마 7:21-23). 무익한 종의 신앙고백이 이를 명백히 증거합니다(눅 17:10). 이상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않은 믿음의 정절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요약하면 그것은 본질상 사단왕국의 삶의 원리인 세속주의(육신의 정욕/안목의 정욕/이생의 자랑)를 목적삼고 살아가는 삶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일입니다. 보다 적극적으로 말씀의 원리를 좇아 살아가는 천상지향적인 삶의 자세를 가리킵니다.
다음으로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삶(4절중)이란 문맥 속에서 죽음의 자리라 할지라도 마다않고 따라가는 일사각오의 정신의 삶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연합의 삶을 가리킵니다. 하나님 앞에서란 명제 속에서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곧 말씀 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자세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주인 삼아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그 분의 뜻을 좇는 자기부인의 삶을 가리킵니다(잠 3:5-6). 사람 가운데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4절하)이란 하나님께 성물로 바쳐지기 위해 구별된 하나님의 소유된 자들을 뜻합니다. 특별히 ‘처음 익은 열매’란 제의적인 표현으로 일년 간의 수확물 중 가장 좋은 처음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헌제의식과 관련된 용어입니다(레 23:9-14, 신 18;4, 민 18:12). 처음 익은 열매의 봉헌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첫째는 소산물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허락하시고 모든 자연적인 환경을 조성해 주시지 않았다면 인간의 노력만 가지고 풍성한 수확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씨를 심고 물을 주고 김을 매줄 수 있을지라도 식물을 자랄 수 있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고전 3:6). 둘째는 첫 수확물을 드림으로 모든 수확물이 하나님의 소유란 사실을 인정하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나아가 첫 수확물은 나머지 수확물에 대한 보증의 의미도 가집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재림으로 구속사가 종결될 때까지 어린 양의 구속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역사는 지속될 것입니다. 최후의 한 사람의 남은 자가 구속의 반열에 편입될 때까지 말입니다. 이처럼 구속함을 받은 교회공동체의 정체성은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선택적으로 구별해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들로 존재합니다(계 5:9). 이런 원리 속에서 창조자요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좇는 성도의 신앙생활의 성격은 종과 백성 된 신분으로 당위적이지 취사선택 적이거나 보상심리 적일 수 없습니다.
나머지 5절은 교회공동체의 특징을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라고 소개합니다. 이는 습 3:13에 언급된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악을 행치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궤휼한 혀가 없으며 먹으며 누우나 놀라게 할 자가 없으리라“의 말씀을 연상케 합니다. 여기서 거짓말이 없다는 것은 거짓말을 평생 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직 진리의 말씀만을 신앙과 생명의 도리로 붙잡고 살았으며 동시에 진리가 아닌 것은 결코 증거하지 않았음을 차별적으로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마치 요한이 밧모 섬에 유배당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함이라고 설명했듯이 말입니다(계 1:9). ‘흠이 없다’란 속죄 제물로 드려질 어린 양의 상태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표현입니다(출 12:5). 이는 진리를 좇는 데서 오는 신앙의 순수성과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구별되고 분리된 삶의 행동양식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란 하나님 앞에서 진리성과 진정성에 입각해 살아가는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총체적으로 언급한 표현입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교회 속에 내주하신 성령께서 이 모든 일이 가능하도록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성도의 심령을 관장해 가십니다.
2. 세 천사에 의한 종말적 메시지(6-13절)
1-5절은 13장에서 짐승의 박해와 666의 짐승의 표로 미혹함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인내로 신앙의 정절을 지켜낸 교회의 종말적 승리를 어린양과 함께 시온 산에 서 있는 십사만 사천인의 환상을 통해 보여줍니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 이 광경은 아직은 교회의 미래적인 모습입니다. 교회가 처한 현재적인 모습은 11장에 소개된 두 증인에 의한 1260일 간의 복음증거사역과, 12장에 기술된 1260일(한 때 두 때와 반 때) 간의 교회의 양육기간과, 13장에 언급된 42달 동안의 두 짐승에 의한 무차별적 박해와 물질적인 축복을 미끼로 짐승의 표를 통한 미혹의 시대를 살아갑니다.
한편 본문의 6-13절은 다시 6-12절과 13절로 구분됩니다. 먼저 6-12절은 세 천사에 의한 종말적 메시지 선포의 내용을 기술합니다. 이는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교회가 최종 승리를 쟁취하기까지 세상을 향해 복음증거사역을 지속적으로 감당해 나가야 함을 세 천사에 의한 임박한 종말의 메시지 선포를 통해 재차 강조합니다. 13절은 영원한 복음으로 말미암아 성도가 누리게 되는 영원한 안식을 다룹니다. 악의 무리는 불못의 심판에 처해져 밤낮 쉼을 얻지 못하는데 반해(11절하) 성도는 산자나 죽은 자를 막론하고 최후의 영원한 안식이 보장돼 있음을 확증시켜 줍니다. 고난 중에도 성도의 위로가 이에 있습니다.
첫째 천사의 메시지
6-7절은 첫째 천사에 의해 영원한 복음이 선포되는 내용을 기술합니다. 영원한 복음이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과거와 현재와 주님께서 재림하실 종말의 때까지 지속적으로 선포돼야 할 복음증거의 초월적 성격을 가리킵니다(마 24:35). 그래서 하나님의 남은 자들 중 최후의 일인(the last one among God's remnants)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편입될 때까지 복음은 전파돼야 할 것을 시사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영원한 복음의 성격은 구원과 심판입니다. 이 둘은 한 짝입니다. 동전의 양면입니다. 복음을 받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거절하는 자는 심판에 처해진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막 16:15-16). 본 절에서 복음전파의 주체가 천사로 나타나지만 복음전파의 사명은 교회에게 주어진 특별한 사역이기에(10:11, 11:3) 천사의 복음증거사역을 통해 교회의 존재이유와 사명을 재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천사가 전한 복음의 내용은 ‘하나님을 경외하라’,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 ‘심판의 임박성에 대한 경고‘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경배‘ 등으로 요약됩니다(7절). 한 마디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영광돌리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동시에 심판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첫 번째 천사는 창조주와 심판주이신 하나님의 임박한 종말적 심판 메시지를 선포함으로 회개를 강력히 촉구합니다.
그렇다면 천사의 영원한 복음을 들어야 할 대상은 누구일까요. 6절은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으로 묘사합니다. 계시록에서 ’땅에 거하는 자들‘이란 관용구는 짐승에게 속하여 그를 경배하고 하늘의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멸망 받을 자들을 총체적으로 가리키는 표현입니다(11:10, 13:8. 17:2). 그렇다면 이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한다고 해도 합당한 회개와 구원을 기대하기란 불가능할 뿐입니다. 따라서 복음증거 자체가 무의미해 질 수 있습니다. 이런 난제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다행스럽게 본 6절은 ’땅에 거하는 자들‘을 보충설명하면서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이라고 추가설명을 해 줌으로 전자와 후자를 동격관계로 설명합니다. 이는 땅에 거하는 자들이 보다 광범위한 대상을 포함하고 있는 우주적인 의미를 띠고 있음을 시사해 줍니다. 마치 계 5:9에서 새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대상과, 7:9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하늘의 큰 무리들의 출처를 밝히는 과정에서 ’각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서 나온 자들‘이란 표현이 공히 사용되고 있는 사실을 통해 이런 해석의 타당성을 뒷받침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14:6에서 언급한 ’땅에 거하는 자들‘이란 짐승과 관련돼 멸망받기로 작정된 불신자의 집단(9-11절)을 차별적으로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을 받고 구원받을 성도들까지를 포함한 전 우주적인 표현인 셈입니다. 딤후 4:2에서 신약의 교회를 향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기서 교회의 선지적 사명의 필요성이 강조되는 것은 오늘도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남은 자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제되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관점에서 계 14:6은 임박한 종말과 관련시키면서 천사를 통해 이런 교회의 선지사명의 당위성과 절박성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자존자(I am that I am)로서 시간을 초월해 계시는 분입니다(벧후 3:8). 그러나 이 시대는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워 온 것만은 분명합니다(롬 13:11). 때를 분별하는 자들은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않을 것입니다(롬 13:14). 오히려 깨어 근신하면서 자신을 성찰하며 거룩과 경건을 추구하는 일에 관심을 도모해 나갈 것입니다(골 3:1-10), 이 과정에서 복음은 교회의 증인사역을 통해 부단히 증거되며 전파돼야 합니다. 교회는 그 날과 시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둘째 천사의 메시지
8절은 둘째 천사가 심판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둘째 천사는 첫째 천사의 뒤를 따라 증거합니다. 이는 첫째와 둘째 천사 간에 밀접한 연관성이 있음을 시사합니다. 다시 말해 첫째 천사에 의해 선포된 영원한 복음의 메시지를 감심으로 받지 못하는 자에게는 무서운 종말적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이 사실을 둘째 천사는 큰 성 바벨론의 멸망을 통해 증시(證示)해 줍니다. 계시록에서 큰 성 바벨론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도성으로 비유되듯이 동일한 원리 속에서 사단왕국의 도성으로 시사됩니다. 이런 대비는 다분히 구약적인 배경에서 나온 사상입니다. 바벨론은 구약적 배경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반(反)신적인 적대세력입니다. 바벨론 제국의 강포와 포악과 폭력적인 위세는 가히 전율을 일으키기에 족할 정도였습니다(합 1:5-11). 이사야 선지자는 바벨론의 교만을 하나님의 보좌를 찬탈하려다 쫓겨난 사단의 교만에 암시적으로 비유하면서 그 결국이 사단의 멸망처럼 패배당해 수치와 모욕을 당할 것을 예언합니다(사 14:12-17).
이처럼 바벨론은 세상권세와 권력의 모형이었으며 온갖 불의와 부정과 패역과 부도덕이 팽배했던 죄악과 배역의 도시였습니다. 특별히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것과 관련해 바벨론은 하나님을 대적하며 성도를 핍박하는 배도적인 국가세력을 상징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바벨론이란 단어의 용례는 1세기 당시 묵시문학적인 표현기법으로 보아 교회를 대적하고 핍박했던 로마제국을 일차적으로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이필찬, 622-623/호크마 종합주석, 430/이순태, 221/유도순, 254). 그러나 계시록 전체의 관점에서 볼 때, 바벨론 사상은 단순히 로마제국에게만 제한적으로 적용시키기에는 보다 포괄적이고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됩니다. 다시 말해 모든 시대에 걸쳐서 교회를 핍박하는 권세이며 동시에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세상 권세를 총체적으로 상징합니다. 이런 사실은 본문에서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라는 표현을 통해 확인됩니다. 본문은 렘 51:7-8의 인용으로 보입니다. 본문의 ‘온 세계로 취하게 만드는 금잔’이란 표현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상나라들을 미혹하고 충동해 하나님을 거부하고 대적하게 했던 세력들의 배후에서 항상 사단의 사주와 역사가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이로 인해 바벨론은 사단세력의 상징으로 사단왕국의 도성이며 사단과 사실상 동일시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런데 바벨론이 주도했던 악행의 핵심은 모든 나라들로 음행케 했다는 사실에 집중됩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곧 심판을 초래케 했다고 선포합니다.
그렇다면 바벨론 사상에 동조했던 열국이 진노의 포도주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음행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계 17:1-2은 바벨론의 사역을 돕는 음녀의 등장을 소개합니다. 사실상 5절과 18절에서는 바벨론과 음녀를 동일시합니다. 이들의 불가분의 연합과 동역의 관계를 3절에서는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다’고 소개합니다. 붉은 빛 짐승은 12:3과 13:1-2을 조합해 상고할 때, 용의 권세와 보좌와 능력을 위임받은 바다짐승임에 틀림없습니다. 결국 사단과 짐승과 음녀가 상호 결탁해서 세상을 미혹함으로 하나님께 대적하고 교회를 핍박하는 일에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때 미혹의 무기가 음행이라고 강조합니다. 구약에서 음행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이방에 동화돼 우상과 짝하는 삶을 가리킨 표현입니다. 이때 이스라엘은 자연히 음녀로 간주됩니다.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음란한 여인과 결혼시키는 방식으로 하나님과 영적 음행을 일삼는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선포케 하며 회개를 촉구합니다(호 1:2). 여기서 음행이란 주로 모세의 율법을 좇는 여호와신앙을 외면하고 이방인의 우상숭배를 본받으며 불순종함으로 이교도적 삶에 동화돼가는 것을 일컫습니다. 계 14:4에서는 음녀의 미혹을 설명하면서 “그 여자가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고 기술합니다. 다시 말해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게 했다는 것은 이런 더러운 것과 가증한 것들로 인해 미혹했음을 가리킵니다. 이런 이유로 음행의 현대적 적용과 관련해 이를 단순히 문자적으로 우상숭배 행위와 연결시키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다행스럽게 신약의 기자는 구약의 우상숭배를 근원적으로 해석하면서 그 실체를 인간의 타락한 본성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탐심과 탐욕으로 규명합니다(골 3:5). 우상숭배가 신을 도구삼아 인간의 욕심을 충족시키려는 종교행위인 사실을 고려할 때, 우상숭배의 실체와 근본이 탐심이요 탐욕이란 지적은 타당합니다. 이런 맥락 속에서 음행의 실체를 상고해 보면 욕심으로 발로된 육신적이고 세속적이며 현세지향적인 가치관을 추구하는 일체의 행위가 모두 음행과 직결돼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실이 구체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무엇일까요. 요일 2:15-16이 이에 대한 해답을 제시합니다. 곧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집약됩니다. 육신의 정욕이란 타락한 본성으로부터 야기되는 일체의 세속적인 욕심을 총괄해 가리킵니다. 물욕, 식욕, 색욕 등 주로 생활과 직결된 의식주의 문제와 깊이 관련돼 있습니다. 이런 내부적인 요소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인간의 자기만족과 영광을 추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안목의 정욕이란 외부적인 자극과 충동에 의해 내적인 욕망을 불러일으킴으로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행동을 가리킵니다. 주로 오감(五感)에 의한 욕심의 발로가 이에 속합니다. 방법에서 차이가 있을 뿐 본질에서 육신의 정욕과 동질성을 띱니다. 이생의 자랑(boasting of what he has and does)은 영어번역성경이 말해주듯 자신의 현재적인 삶의 정황에 심히 만족하며 그것으로 자랑하고 자긍하여 남을 멸시하는 교만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문제는 이런 요소들의 출처가 하나님이 아닌 세상 곧 사단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입니다(요일 2:16하). 이런 관점에서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요소들이 결국은 인간의 욕심을 충동시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적 사상과 내용적으로 깊이 연루돼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따라서 현대판 음행의 실체인 탐심의 정체는 총론적 관점에서 세속주의에 근거한 인본주의의 추구와 실현이란 궁극적인 주제와 깊이 관계돼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인본주의의 실상은 인간의 자기영광 추구와 구현으로 본질상 사단의 속성과 동질성을 띱니다(유 1:6, 벧후 2:4, 사 14:12-14). 선악과 금령에 불순종하도록 시험한 미혹의 본질이 인간의 지존사상의 고취이며(창 3:4-5), 바벨탑 축조사건 속에 담긴 저의(底意) 또한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과 의에 도전하는 인간의 자기영광 구현에 집중됩니다(창 11:4).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반역하고 대적함으로 인간의 타락과 함께 출발한 자기영광 추구와 자기 의의 구현을 위한 지존사상의 고취는 바벨사상을 통해 인류역사 속에 면면히 계승됩니다. 이런 패역한 사상이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을 패배시킨 바벨론 제국을 통해 역사의 전면에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계시록은 인류역사 속에서 하나님을 배역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하며 핍박했던 바벨사상을 본질상 사단적 사상과 동일시하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종말적 세력으로 재등장 시킵니다. 물론 과거 역사 속에서 페르시아, 희랍, 로마 등도 바벨론의 반역과 패역을 계승했던 나라들입니다. 다니엘서에서 이런 사실을 환상을 통해 밝히 보여줍니다(단 7-8장). 그러나 현대 교회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바벨사상은 특정한 나라의 권세를 통해 제한적으로 활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시대에 걸쳐 다양한 모양과 모습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며 교회를 핍박하는 모든 세상 권세와 주의와 주장, 철학과 세상풍조 등을 총칭합니다(롬 12:2). 때문에 현대판 바벨사상은 다양한 옷을 입고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상들을 일컬어 세속주의, 기복주의, 물질만능주의, 또는 배금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종교다원주의, 인본주의 등으로 표현합니다. 사실상 음행의 외적 형태들이 이런 내용들입니다. 사람들에게 매력을 느끼게 하고 호기심을 발동시키며 관심을 갖게 해 전심으로 그것에 몰입하고 탐닉하게 함으로 그것을 사랑하고 목적 삼게 만드는 요소들의 총화 말입니다. 음녀의 손에 든 금잔의 내용물들이 이런 것들입니다. 그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릴 뿐입니다.
그런데 14:7에서 둘째 천사가 바벨론의 멸망을 선언하는 시점은 아직 바벨론의 멸망의 때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천사가 바벨론의 멸망을 선포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역사에 근거합니다. 세상역사의 결국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마감될 것이며 이미 아이의 승천을 통해 용의 패배는 기정사실화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20:7-10).
셋째 천사의 메시지(9-12절)
9-12절은 셋째 천사의 메시지와 연관됩니다. 셋째 천사도 둘째 천사의 뒤를 이어 메시지를 선포함으로 둘째 천사의 메시지와 깊이 연관돼 있음을 시사합니다. 8절에서는 큰 성 바벨론이 제공하는 음행의 포도주에 취해 모든 나라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게 되는데 반해, 9절은 이를 좀 더 제한시켜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이란 조건절을 통해 심판의 대상이 국한되고 있음을 봅니다. 이는 6절에서 첫째 천사가 선포하고 있는 영원한 복음에 반응 여부가 심판의 대상을 좌우한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영원한 복음이 전파됨에도 불구하고 짐승의 표를 받고 계속해서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는 심판을 받겠지만 중도에서 회개하고 돌이키면 심판에서 제외되고 구원의 은혜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짐을 시사합니다(호크마 종합주석, 430).
10절은 심판상황을 설명합니다. 첫째 천사의 복음전파로 인해 회개와 구원의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짐승과 우상에게 경배하고 짐승의 표를 받는 자들은 구원의 기회가 사라집니다. 심판만이 기다립니다. 그런데 이런 자들에게 임할 심판의 성격을 요한은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로 표현합니다. 이는 희석되지 않은 독주라는 의미입니다. 한번 마시면 깊이 취하여 인사불성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토록 아들의 희생의 터 위에서 오랜 기다림으로 회개의 기회를 충분히 주었음에도 불구하고(벧후 3:9) 복음을 거절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은 무자비하여 정상참작의 여지가 전혀 없음을 시사합니다(삼상 15:2-3). 심판주는 당연히 주님이십니다(요 5:22). 이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심판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들에게 내려진 심판의 선고내용은 불과 유황입니다. 이는 불못을 가리킵니다. 계시록은 용과 두 짐승과 이들을 경배하고 짐승의 표를 받은 무리들과 죽은 모든 불신자들이 한결 같이 불못에 던져질 것을 선언합니다(20:10, 19;19-20, 14:9-11, 20:12-15). 불못은 영벌의 장소입니다. 고난의 장소입니다. 지옥의 다른 이름입니다. 무저갱이 흑암의 세력들을 가두는 일시적인 감옥의 기능을 가졌다면 불못은 영벌의 장소인 셈입니다. 11절에서 불못은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는 장소로 묘사됩니다. 영벌의 고통의 장소임을 암시합니다. 이는 밤낮 쉼을 얻지 못한다(11절하)는 말씀을 부연 설명해 줍니다. 불못은 안식이 없는 고통의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짐승의 표를 받고 우상에게 경배한 자들의 말로가 이렇습니다. 반면에 13절에서 지금 이후(from now on)로 주 안에서 죽은 자들 곧 하나님과 어린양의 인을 받은 자들은 수고를 그치고 안식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안식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구원의 완성과 안식을 통해 성도가 누리는 복의 본질입니다. 13장과 14장에 나타난 양 진영 간의 종말상황에 대한 극단의 대비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왜 ‘수고를 그치고 안식한다’고 말했을까요. 지상의 교회는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이미 안식을 소유해 누리는 자로 존재합니다(눅 6:5). 그러나 지상의 교회가 누리는 안식의 성격은 재림을 통해 누릴 종말론적 안식에 비해 수고가 뒤따르는 안식이란 점에서 성격상 차이가 있습니다. 사단의 핍박이 상존하고 죄성으로 말미암는 육체의 연약성이 여전히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질상 다를 바 없습니다. 지상의 안식에 이미 동참해 누리는 자만이 천상의 안식이 보장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성취가 이 둘의 안식을 하나로 연결시켜 주는 고리역할을 합니다. 이런 두 안식 간의 상호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주 안에서 이미 현재적으로 소유해 누리는 자는 결국 온전한 것을 소유해 누리게 될 것이 보장됩니다.
12절은 다시 한번 성도의 믿음의 인내를 촉구합니다. 이는 13:10과 병행을 이루는 인내입니다. 그러나 13:10의 인내가 짐승의 혹독한 핍박을 신앙의 정절을 통해 견뎌내야 하는 ‘과정의 인내’인 반면에, 여기 14:12절의 인내란 사단과 교회의 미래의 결국을 확신하는 데서 오는 계시의존적이며 종말론적인 소망의 인내를 말합니다. 이처럼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을 경배하는 자들의 결국이 불못에 던져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데서 오는 인내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신앙과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의 정절을 수반합니다. 종말을 살아가는 현대교회 성도들에게 믿음의 인내가 필요한 것은 짐승의 표를 받고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의 말로는 불못의 심판이 예정돼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붙들고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비록 일시적인 고난과 핍박이 주어질지라도 궁극적인 구원의 완성과 승리가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4장에서는 짐승과 그의 추종자들의 결말이 임박한 시점에 와 있습니다. 가시권에 들어와 있습니다. 때문에 인내가 더욱 요청됩니다. 현대교회가 직면한 현실이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약 5:7-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 15:58). 이상의 권면의 말씀들은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뿐만 아니라, 동일한 42달 동안의 짐승의 핍박 하에 놓여 있는(계 13장) 현대교회 성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현재적인 메시지입니다.
성도의 영원한 안식(13절)
13절은 일종의 삽입절의 형식을 띠면서 6-12과 14-20절의 내용을 연결시켜주는 고리역할을 합니다. 즉 복음을 거절함으로 하나님께 대적했던 사단의 도성인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의 맹렬한 심판으로 멸망당하고 사단을 좇던 무리들도 불못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복음에 접촉돼 믿음의 정절을 지킴으로 하나님께 속한 자들은 하늘의 영원한 안식에 참여할 것을 확약해 줍니다. 지상에서 고난 중에 있는 교회의 위로와 소망이 이에 있습니다. 특별히 “자금 이후‘(from now on)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다”는 강조적 표현은 광의적으로는 요한이 살던 시대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전 교회시대를 포괄하지만 보다 협의적으로는 요한이 살던 당대를 부각시켜 조명해 줍니다. 이런 식으로 요한은 본문의 말씀을 당대의 성도들에게 적용시킴으로 고난과 핍박 중에 있는 일세기 교회공동체를 위로하며 미래의 소망에 대해 확신을 심어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 왜 복이 있는 것일까요. 본문은 저희의 수고를 그치고 쉬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수고를 그치고 쉰다는 것은 새 창조의 질서(21:1) 속에서 영원한 구원의 안식과 평안을 만끽한다는 사상을 가리킵니다. 이는 11절에서 짐승과 그 우상에게 경배했던 자들이 불못에 던져져 밤낮 쉼을 얻지 못하는 것과 극한 대조를 이룹니다. 저들은 짐승에게 속해 땅에서 잠시 얻는 일신상의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찰나의 안식’을 누렸을지 모르지만 그 결국은 영원한 고통의 형벌만 기다릴 뿐입니다. 반면 성도의 고난과 핍박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에 불과합니다. 곧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에 들어갈 것이 약속돼 있습니다(고후 4:17). 그것은 땅에서의 수고를 그치고 영원한 하늘의 안식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안식에 참여한다는 것은 다른 의미에서 구원의 완성에 참여해 영생의 실질을 누리는 천국의 삶을 가리킵니다. 본문은 이를 가리켜 복(福)이라고 설명합니다. 구속사의 진행 속에서 복과 상급의 실체는 구원약속의 종말론적 성취를 가리킵니다. 곧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구원의 완성을 통한 영원한 안식과 영생의 삶을 실제로 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영원한 안식의 성격은 지상의 교회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인내로 싸워가는 과정에서 공통적으로 소망하는 궁극적인 관심이요 약속성취의 절정인 셈입니다. 이것이 영원한 안식과 관련해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13절하)고 한 표현의 의미입니다. 곧 저희의 행한 믿음의 선한 싸움의 결과로 마침내 수고가 그치고 안식하는 구원의 완성에 이르게 되었다는 선언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영벌에서 영생으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썩어질 육의 몸에서 썩지 않을 신령한 부활체로 말입니다. 이보다 더한 복과 상급의 의미가 어디 있겠는지요.
3. 두 종류의 추수(14-20절)
본문은 곡식추수와 포도수확의 두 비유를 통해 구원과 심판의 양면성을 환상의 방식으로 보여줍니다. 본문은 14-16절의 곡식추수 내용과 17-20절의 포도수확 내용으로 구분됩니다. 본문의 두 추수환상은 6-12절에 기술된 세 다른 천사의 구원과 심판에 관한 메시지를 좀 더 발전된 내용으로 반복해 소개합니다. 곧 환상을 통해 구원과 심판이 구체적으로 실행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이는 복음증거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이 하나님의 공의에 입각해 철저하게 시행될 것에 대한 강력한 의지의 표명입니다.
곡식추수 환상(14-16절)
요한이 환상을 봅니다. 세 가지 광경이 한데 어울려져 조합을 이루고 있는 복합적인 환상입니다. 먼저 구름을 봅니다. 구름 위에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가 앉아 있는 것을 봅니다. 그는 머리에 금 면류관을 썼고 손에는 이한 낫을 가졌습니다. 본문의 환상은 단 7:13에서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 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란 문구를 배경삼고 있습니다. 계 1:7에서도 “아멘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고 재림하실 주님에 대해 기술합니다. 이로 보건대 본문의 사람의 아들과 같은 분은 재림하실 인자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킴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인자께서 구름에 앉아 금 면류관을 쓰고 손에는 날카로운 낫을 가졌다고 묘사합니다. 이는 재림하실 주님께서 만왕의 왕 된 자격과 신분으로 영광과 승리의 보좌에 앉으셔서 만국을 심판하시기 위한 장엄하고도 근엄한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인자의 정체성을 설명하고 있는 단 7:14과 계시록 본문(15-16절)을 통해 확인됩니다. 단 7:14은 인자 같은 이가 구름을 타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권세와 영광과 만국을 다스리는 통치권을 부여받는 모습을 소개합니다. 계시록 본문에서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있는 인자 같은 이의 모습은 이런 만왕의 왕 된 사실에 대한 상징적인 묘사입니다.
이한 낫에 대한 의미는 계시록 본문(15-16절)에서 땅에서 익은 곡식을 거두라는 천사의 음성을 통해 확인됩니다. 그런데 다른 한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서 인자에게 낫을 휘둘러 익은 곡식을 거두라고 전합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가 시행되는 현장입니다. 따라서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서 추수의 명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속사가 최종 완성의 단계에 이르렀기에 추수할 자를 다 거둬들임으로 구속사를 종결시킬 것을 통보하는 내용입니다. 본 곡식추수 환상에서 추수는 심판이 아닌 구원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심판의 개념으로 사용된 추수의 의미는 계속되는 포도수확 환상(17-20절)을 통해 기술됩니다. 결국 14-16절은 만왕의 왕이시며 동시에 심판주로 재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최종적으로 구원받을 자를 모으시는 광경을 곡식추수 환상을 통해 보여줍니다. 마 13:30입니다. “둘 다 추수할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본문은 곡식과 가라지 비유를 통해 천국에 관해 강론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본 비유에서 추수는 심판과 구원의 의미를 동시적으로 포함합니다. 곡식은 구원의 대상을, 가라지는 심판의 대상을 가리킵니다. 이런 식으로 계시록 본문에서 인자 같은 이의 곡식추수 환상은 재림 시에 있을 최종 구원사건을 보여줍니다. 현 교회시대 속에서 다양한 사단의 핍박과 고난과 미혹을 믿음의 인내로 감수하면서 끝까지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은 신앙의 정절자들이 이 최종적인 곡식추수에서 영광의 주인공들이 될 것입니다(계 14:4-5). 성도들의 믿음의 인내가 이에 있습니다.
포도수확 환상(17-20절)
요한은 이어지는 환상의 다른 장면을 봅니다. 이번에는 성전에서 또 다른 천사가 이한 낫을 들고 나옵니다(17절). 14에서 인자 같은 이의 손에 들린 이한 낫과 병행을 이룹니다. 따라서 천사의 손에 들린 낫도 수확과 관련된 것이 분명합니다. 이 천사도 성전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명을 받고 이를 수행하기 위해 나온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본질상 곡식추수 환상과 동질성을 띠면서 성격만 다릅니다. 동일한 수확인데 곡식추수는 구원을, 포도수확은 심판을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장면이 또 바뀝니다. 이번에는 불을 다스리는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이한 낫을 가진 천사에게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고 명합니다(18절). 포도가 익었다고 말합니다. 심판의 때가 절정에 이르렀음을 의미합니다. 천사가 나온 제단은 순교한 성도들의 영혼이 하늘 제단 앞에서 자신들의 피를 신원해 달라는 내용을 기술하고 있는 계 6:9과 8:3-5의 장면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음을 문맥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포도수확과 관련된 하나님의 종말적 심판은 하나님의 진노와 더불어 순교자들과 의인들의 기도응답의 일환으로 시행된다는 사실을 간파하게 됩니다. 결국 6:9과 8:3-5에 기록된 순교자들과 의인의 신원의 기도는 이런 식으로 종말적 심판을 통해 온전히 성취되는 것을 봅니다(6:11). 따라서 14:18의 불을 가진 천사 또한 제단에서 성도의 기도를 금향로에 담아 하나님께 드림으로 제단에서 수종들고 있는 8:3-5의 천사와 깊이 연관돼 있음이 분명합니다.
19-20절은 포도수확을 통한 심판의 참상을 상징을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먼저 이한 낫을 가진 천사가 불을 다스리는 천사의 명을 따라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집니다. 특별히 20절은 심판의 집행이 얼마나 맹렬하고 무자비하며 비극적인 참상인지를 상징을 통해 보여줍니다. 여기서 땅의 포도는 심판의 대상을 가리킵니다. 계시록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을 거부하고 대적하며 교회를 핍박했던 용과 짐승과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과 땅에 속한 모든 불신자들이 다 포함됩니다. 본문은 수확한 포도를 큰 포도주 틀에 던져 넣어 성 밖에서 밟으니 틀에서 포도주 즙이 아닌 피가 나와 말굴레까지 닿았고 일천 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다고 증거합니다. 성경에서 포도를 포도주 틀에 넣고 즙을 짜는 행위는 하나님께서 대적들에게 맹렬히 진노를 발하시는 것의 비유로 사용되곤 합니다. 본 상징의 경우는 사 63:6과 욜 3:13을 배경삼고 있습니다. 요한은 상기 두 곳의 말씀을 필요에 따라 조합해 하나의 사상체계를 이룹니다. 계시록 본문이 설명하는 ‘낫을 들어 땅의 포도를 수확해 큰 포도주 틀에 넣고 성 밖에서 밟았더니 포도주 즙이 피가 되어 땅에 쏟아졌다’는 표현이 이런 방식으로 상기 두 문장을 조합해 나온 내용입니다. 여기서 ‘성 밖’이란 하나님의 심판에 처해 질 악한 무리들의 처소와 멸망의 장소인 예루살렘 밖을 상징하는 것으로, 성 안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하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안과 구원의 장소를 상징한다고 보여집니다(11:1). 그런 의미에서 성 안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처소로, 성 밖은 심판에 처할 멸망의 장소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요한은 포도주 틀에서 흘러나온 즙(피)의 양을 가리켜 높이로는 말굴레까지 닿았고, 넓이로는 일천 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심판의 강렬함과 엄중함 및 무자비한 참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Ⅲ. 결론
14장은 12장부터 시작된 삽입환상 동아리 군의 결론부분입니다. 특히 13장의 짐승에 의해 핍박과 고난을 당해 거의 사경에 처했던 지상의 교회공동체가 하늘에 속한 승리한 교회로 변화된 사실을 144,000인의 상징을 통해 보여줍니다(1-5절). 대신 13장에서 교회를 핍박하던 짐승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던 무리들은 불과 유황에 던져져 심판의 고통과 형벌을 받는 사건이 대조적으로 기술됩니다(8-12절).
이처럼 14장은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을 극명하게 대비시켜 기술합니다. 교회는 1260일 동안 두 증인으로 비유된 복음증거사역의 사명을 감당하면서 동시에 짐승에 의해 42달 동안의 핍박과 고난을 겪어야 하는 이중적인 정체성을 띠고 지금 여기에 존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창 3:15(여자의 후손언약)에 의한 두 계열 간의 적대적인 투쟁의 역사는 여전히 종결되지 않았습니다. 첨예한 대립의 모습을 계시록은 시종일관하게 기술합니다. 그럼에도 구속사의 진행 속에서 사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성취를 통해 사실상 패배했습니다. 이때로부터 하나님에 의한 교회의 양육과 보호와 증거사역 기간인 1260일과 한 때 두 때 반 때의 섭리적 작정기간은 시작되었습니다. 이 기간은 사단에게도 동일하게 짐승을 통해 대리적으로 교회를 핍박하는 42달 기간으로 설정됩니다. 이런 식으로 ‘이미와 아직‘의 원리는 구속사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를 바르게 이해하고 해석하는 결정적인 단초로 작용합니다.
그러나 종말의 정황은 명백합니다. 알곡추수와 포도수확의 비유가 구원과 심판의 결국을 극명하게 대비시켜 진술합니다. 들판의 곡식은 희어져 벌써 추수하게 되었습니다(요 4:35). 낫을 휘둘러 거둘 때가 이르렀습니다. 종말의 구원의 날이 다가옵니다. 마침내 어린양이 십사만 사천인과 함께 시온 산에 서 계십니다. 그렇게 종말의 구원은 성취될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땅의 포도 또한 거둘 만큼 잘 익었습니다. 포도주 틀에 넣어 즙을 만들 때가 충분히 성숙했습니다.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둘 때가 다가왔습니다. 종말의 심판 때가 가까워옵니다. 마침내 사단의 도성인 큰 성 바벨론이 무너졌습니다. 그렇게 종말의 심판은 성취될 것입니다.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 15:58).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롬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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