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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2

[스크랩] 요한계시록 구속사(14강) : 일곱 대접재앙 시리즈

일곱 대접 재앙 시리즈
(계 15:1-16:21)

Ⅰ. 도입

본문의 일곱 대접 재앙 시리즈를 논하기 전에 일관된 스토리의 전개를 위해 앞에 기술된 12-14장의 삽입환상 군의 내용과 성격을 요약적으로 정리하는 것이 이해에 도움이 될 줄 압니다. 12-14장의 삽입환상 동아리는 용과 짐승으로 상징되는 적그리스도의 세력과 교회공동체와의 적대적인 투쟁의 관계를 다양한 상징과 묵시기법을 통해 기술합니다. 이는 11장에서 두 증인의 사역을 통해 살펴본 교회와 악의 세력과의 적대관계를 부연해 근원부터 자세히 풀어서 설명한 내용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12장은 교회와 사단과의 투쟁관계를 여자와 용의 상징을 통해 소개합니다. 13장은 용과의 동역관계에 있는 두 짐승과 교회와의 적대관계를 666으로 상징된 짐승의 표와 함께 기술합니다. 14:1-5은 이상의 적대세력의 핍박과 공격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인내로 신앙의 정절을 지켜낸 교회의 종말적 승리를 어린양과 함께 하늘의 시온 산에 앉아 있는 144,000인의 교회 상징을 통해 밝히 증거합니다.

한편 14:6-20은 사단의 도성을 상징하는 바벨론의 멸망과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한 자들의 종말론적 심판광경을 소개합니다. 이런 내용은 이번 강론부터 다루게 되는 15-16장의 일곱 대접 재앙 시리즈에 대한 내용을 개괄적으로 예고하는 의미가 있으며, 17-20장에서 확인되는 악의 세력에 대한 최후의 심판 내용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15장에 소개되는 일곱 대접 재앙기사의 도입은 세 번째 화, 곧 일곱째 천사가 부는 나팔 재앙과 관련된 11:14-19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즉 11:14-19은 14:6-20과 함께 종말적 심판과 구원사건을 예고하는 내용으로 18절의 심판기사 부분은 15-18장, 19:11-21, 20: 7-10, 11-15절과 연관되고, 16-17절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기사는 19:1-10, 20:4-6, 21:9-22:1-5과 관계됩니다. 따라서 일곱 번째 나팔재앙(11:15)은 일곱 번째 인 재앙이 일곱 나팔 재앙을 도래시키는 역할을 했듯이(8:1-2), 마지막 일곱 대접 재앙(15:1, 16:1)을 도입하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 과정에서 11:14-19절은 14:6-20과 더불어 일곱 대접 재앙으로 초래하게 될 종말적 심판과 이에 대립되는 종말적 구원사건을 예고해 줍니다.

이런 관점에서 15장은 16장에서 구체적으로 소개되는 일곱 대접 재앙의 준비과정이며 서론부분에 해당됩니다. 먼저 15장의 구성은 세 부분(1, 2-4, 5-8)으로 구분됩니다. 1절은 일곱 인 재앙, 일곱 나팔 재앙에 이어 일곱 대접 재앙의 도래를 선언하면서 이것으로 마지막 재앙이 될 것을 예고합니다. 2-4절까지는 42달 기간의 짐승의 핍박과 고난을 견디고 이긴 자들이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며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사역을 찬양하는 환상장면을 소개합니다. 5-8절은 일곱 천사가 일곱 대접 재앙을 가지고 나타나는 장면을 기술합니다.

반면 16장은 마지막 재앙인 일곱 대접 재앙이 구체적으로 시행되는 내용을 다룹니다. 그래서 마지막 일곱 째 대접이 쏟아지자 보좌로부터 ‘되었다’(It is done)라고 하나님께서 심판의 종결을 선언하십니다. 이 선언은 사실상 악한 세력들의 근본적인 멸망을 선포하는 것으로 이후 이 사실에 근거해 바벨론의 멸망(17-18장), 두 짐승의 멸망(19장),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온 용의 멸망과 불신자들의 최후의 심판(20장)이 집행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일곱 대접 재앙이 마지막 재앙인 이유가 이런 사실들로 인해 확인됩니다. 16장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1-9절은 처음 네 개의 대접 재앙의 내용이 소개됩니다. 10-21절의 나머지 세 개의 대접 재앙이 소개됩니다. 일곱 나팔 재앙이 그랬듯이 본 대접 재앙도 처음 네 개의 심판 재앙의 대상은 주로 자연계에 집중되나 인간의 고통을 수반합니다. 이런 인간의 고통은 짐승을 경배하고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에 대한 심판으로 구체화됩니다. 나머지 세 대접 재앙은 처음 네 경우와 대상을 달리하면서 심판의 동인(動因)으로 작용했던 짐승의 보좌, 큰 강 유브라데, 그리고 악의 세력의 사령부 역할을 했던 공기(공중)를 향해 집중적으로 집행되는 내용을 소개합니다.

Ⅱ. 전개

15장은 16장에서 본격화되는 일곱 대접 재앙의 도입부분에 해당됩니다. 이는 15:1과 5-8절에서 일곱 대접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2-4절에서는 심판재앙과는 극한 대조를 이루면서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찬양하는 모세와 어린양의 구원의 노래가 소개됩니다. 이는 16장부터 시행될 마지막 일곱 대접 재앙의 성격과, 짐승의 핍박과 고통으로부터 승리한 교회가 어린양의 구속사역의 승리를 찬양하는 장면을 대비시킴으로 하나님의 종말적 심판이 가져다주는 구원과 심판의 이중성과 양면성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심판의 성격은 악인에게 극심한 고통과 환난과 죽음과 불못(지옥)의 형벌을 가져다주는 반면, 성도(교회공동체)에게는 승리와 기쁨과 영원한 구원의 안식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1. 일곱 대접 재앙의 도입과 이중적 의미(15:1-8)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1절)

요한은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환상을 통해 봅니다(1절). 그것은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진 환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1절의 크고 다른 이적은 표적의 성격을 띱니다. 여기서 일곱 재앙의 정체성은 5-8절에서 확인되듯이 하나님의 진노를 담은 ‘마지막’ 일곱 대접 재앙을 가리킵니다. 이런 식으로 요한은 본 일곱 대접 재앙을 마지막 재앙으로 표현함으로 앞서 기록된 일곱 인 재앙(6장, 8:1-2)과 일곱 나팔 재앙(8:6-13, 9:1-21, 11:15-19)과 차별화시킵니다. ‘크고 다른’ 이적이란 의미가 이런 사실을 함의합니다. 따라서 이번 일곱 대접 재앙으로 악의 세력을 포함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의 재앙은 일단락됩니다. 그 후에는 최후의 종말적 심판만이 기다릴 뿐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1절하)란 표현이 이런 사실을 시사해 줍니다. 여기서 ‘마치리로다’(completed)란 완성과 성취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일곱 대접 재앙의 성격이 일곱 인 재앙과 일곱 나팔 재앙과 병행 관계를 이루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진노를 마무리하는데 집중적으로 조명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2-4절)

15:1은 사실상 15;5로 연결되면서 일곱 대접 재앙의 도입부분을 이룹니다. 따라서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부분인 2-4절은 일종의 삽입형식을 취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접재앙의 도입부분과 연결된 사실로 인해 대접재앙의 내용과 유기적으로 관련성을 맺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대접재앙의 도입과 관련해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하는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는 최후의 심판에서 제외된 승리한 교회의 모습을 대비해서 보여줌으로(2-4절) 대접재앙이 지나간 후에 승리한 자들의 감격과 감동의 심정을 대변해 줍니다. 심판의 이중적 성격인 구원과 멸망 말입니다. 이런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현대교회 성도들이 여전히 짐승의 핍박과 공격에 노출돼 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성취 안에서 이미 종말적 승리가 보장된 사실로 인해 동일하게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들이 충족돼 있다는 사실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고난 중에 있는 성도가 위로가 이에 있습니다.

요한은 2-3절을 통해 두 가지 광경을 목격합니다. 하나는 불이 섞인 유리바다이고, 다른 하나는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바다 가에 서서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모습입니다. 전자는 하늘 성전을 보여주고 있는 4:6의 수정 같은 유리바다와 병행관계를 이룹니다. 다른 점은 ‘불과 수정’의 차입니다. 이런 차이는 문맥상에서 오는 차이입니다. 수정 같은 유리바다(4:6)란 하늘 성전에서 하늘 홍해를 건너서 구원의 완성을 누리는 승리한 교회의 거룩하고 정결한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합니다. 반면 불이 섞인 유리바다란 문맥 속에서 일곱 대접 재앙에 직접적으로 연결돼 바야흐로 대접 재앙이 시행될 것을 예고해 줍니다.

그렇다면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의 정체는 누구인가요. 이들이 왜 유리바다 가에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는 것일까요.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는 공히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내용이란 점에서 동질성을 띱니다. 반면에 모세의 노래는 홍해도하를 통한 이스라엘의 구원사건에(출 15:1-21), 그리고 어린양의 노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속죄와 구원과 영생에 집중된다는 점에서 전자는 후자의 예표로 기능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의 정체는 모세의 노래와 관련해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어린양의 노래와 관련해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의 총화 곧 새 이스라엘인 교회공동체를 가리킵니다. 이 또한 구속사의 점진적인 진행의 원리 속에서 전자는 후자의 예표와 모형의 성격을 띱니다.

이런 관점에서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 곧 666표를 받지 않고 짐승의 핍박과 고난을 믿음과 인내로 견뎌낸 성도들(15:2)은 14장의 144,000인과 사실상 동일한 대상들입니다. 이런 사실이 이들 144,000명을 가리켜 땅에서 구속함을 받은 자들로서 하늘에서 거문고를 타며 보좌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는 자들이란 표현 속에서 동질성이 확인됩니다. 이상 삼자(이스라엘 백성/짐승의 표 받지 않은 자들/144,000인) 간의 상호 유기적인 연관성은 이들이 부른 새 노래와 모새의 노래 및 어린양의 노래가 본질상 동일한 내용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노래임을 간파하게 됩니다. 3-4절은 어린양의 노래의 내용입니다. 어린양의 노래의 주된 주제는 ‘하나님의 크고 기인한 일’(출 15:11)로서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예표합니다. 이런 사실은 사도행전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원역사인 ‘하나님의 큰 일’(행 2:11)과도 맥을 같이 합니다. 오늘날 구원받은 성도들이 주일 예배 시에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공동체적으로 찬미하며 부르는 예배찬송의 성격이 사실상 모세의 노래이며 어린양의 노래이고 곧 새 노래에 해당됩니다. 새 노래의 본질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이라면 구원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알파요 오메가인 사실을 다시 한번 확증시켜 줍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지불된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기에 예수님의 피 값과 동일한 가치로 평가됩니다(행 20:28).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 신앙에서 ‘구원+알파’의 신앙공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복 중의 복이며 상급 중의 상급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금 대접 재앙(5-8절)

5절은 1절에서 연결된 부분입니다. 요한은 마지막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열려진 하늘의 증거 장막 성전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봅니다. 열려진 성전의 모습은 이미 11:19에서 살펴본 바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종결과 언약성취가 확실함을 예고해 줍니다. 특별히 성전을 언급하면서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으로 표현한 것이 이런 사실을 뒷받침 해 줍니다. 이는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을 상징했던 성막제작을 하늘의 식양대로 짓도록 명하신 성막계시 사건과 관련된 표현입니다(출 25:8-9, 히 8:5). 본문에서 ‘증거’란 언약과 관련된 용어로 지성소에 안치된 증거궤나 언약궤를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언약궤가 상징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성취의 신실성의 증거입니다. 아브라함 언약 속에 약속 되었던 자손언약은 출애굽 사건을 통해 이미 신실히 성취되었습니다. 자손언약의 성취는 다음 단계인 가나안 정복을 통한 땅 언약을 신실히 성취해 주실 것에 대한 보증의 의미를 띱니다. 이런 식으로 성막의 지성소에 안치된 언약궤는 아브라함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한 성취를 보증해 주는 담보의 기능이 있음을 시사합니다. 따라서 하늘의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렸다는 것은 일곱 천사에 의한 일곱 대접 재앙과 관련한 종말적 심판현상 또한 어김없이 시행될 것에 대한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가 표명되고 있는 셈입니다.

이런 사실은 일곱 재앙을 가진 천사가 하늘 성전에서 나오는 광경을 통해 재확인됩니다(6절). 하늘 성전은 하나님의 통치가 시행되는 현장입니다. 이를 통해 일곱 천사가 하늘 성전에서 나온다는 의미는 하나님의 뜻인 일곱 대접 재앙이 바야흐로 일곱 천사들을 통해 시행될 것임을 시사합니다. 일곱 천사의 모습이 소개됩니다.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었다고 기술합니다. 이는 구약에서 왕과 제사장의 복장입니다. 특별히 가슴에 금띠를 띤 것은 1:13에 소개된 인자의 모습과도 방불합니다. 결국 이상과 같은 천사들의 복장이 의미하는 바는 이들이 일곱 대접 재앙의 수행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대리적으로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을 간파하게 됩니다. 마침내 네 생물 중의 하나가 하나님의 진노가 담긴 금 대접 일곱을 일곱 재앙을 가진 천사에게 건네줍니다(7절). 네 생물은 계시록에서 하나님의 보좌를 보좌(補佐)하는 중심 요소들 중 하나에 해당하면서(4:6-7), 중요한 사명과 사역을 감당하는 일에 쓰임을 받고 있습니다(5:6-7, 6:1-8, 7:11, 14:3, 19:4). 하나님의 진노가 담긴 ‘금 대접’이란 표현은 5:8에서 성도의 기도가 가득 담긴 대접과 병행을 이루면서 하나님의 진노와 성도의 기도를 연결시킵니다. 이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성도의 기도응답을 포함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6:10, 8:3-5). 죽은 성도들의 순교의 피의 신원에 대한 기도요청에 ‘아직 잠시 쉬라고’(6:11) 하셨던 말씀이 이제 이런 식으로 대접 재앙의 시행을 통해 성취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인내로 신앙의 정절을 고수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경험할 수밖에 없는 성도의 순교와 핍박과 박해와 고난의 대가가 이렇게 가해자들에게 최종적으로 돌려진다는 것이 성경의 명백한 진술입니다. 성도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의지하며 심지어 원수 갚는 것조차 하나님께 맡겨야 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기인합니다(롬 12:18-21). 하나님은 선악 간에 사람들이 행한 모든 것의 시비(是非)를 가려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전 12:14).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에게 금 대접을 주는 것과 때를 같이해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인해 성전에 연기가 가득 차게 됩니다(7-8절). 연기는 구름을 가리키며 구약적인 배경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현현과 임재의 상징으로 종종 사용됩니다(출 19:18, 40:34, 대하 7:1-3, 사 6:4). 따라서 이때에 성전에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의 구름이 가득 찼다는 것은 일곱 천사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담긴 금 대접을 건네준 사건과 밀접하게 연관된 것으로 하나님의 심판집행에 대한 강력한 의지의 표명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심판 시행은 하나님의 공의가 막힘없이 발휘되는 것을 통해 악한 자를 징벌하심으로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현시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따라서 8절에서 일곱 천사에 의한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영광현시와 심판시행이 밀접하게 연관돼 있음으로 심판이 종결될 때까지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하심이 너무도 경외스러워 어느 누구도 감히 성전에 범접할 수 없게 된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이는 달리 최후의 심판이 종식 될 때라야 비로소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갈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호크마 종합주석, 447). 물론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갈 수 있는 자들입니다(히 4:16). 하늘 보좌에 ‘이미’ 앉힌바 된 자들입니다(엡 2:6). 그러나 그 최종 상태는 예수님의 재림과 종말적 심판이 종식되는 것을 통해 비로소 현실화될 것입니다(골 3:4, 요일 3:2).

2. 마지막 일곱 대접 재앙(1-21절)

16장은 본격적으로 마지막 일곱 대접 재앙의 시행을 소개합니다. 대접 재앙이 마지막 재앙인 이유는 특별히 일곱째 대접이 공기(공중) 가운데 쏟아지는 것을 통해 “되었다”(It is done)라는 선언이 성전보좌 곧 하나님으로부터 발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본질상 악의 세력들의 총사령부가 초토화되었음을 의미합니다. 16장은 크게 1-9절과 10-21절로 구분됩니다. 전자는 네 개의 대접 재앙이 주로 자연계를 중심으로 땅, 바다, 강과 물샘, 그리고 하늘에 각각 부어집니다. 이상의 네 영역은 나팔 재앙의 처음 네 경우와도 동일한 내용입니다. 이는 재앙의 우주적인 성격을 의미합니다. 반면 대접 재앙의 경우에는 자연계와 더불어 인간의 고통을 동시적으로 수반하는데 이들은 주로 짐승의 표를 받고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집중됩니다.

우주적 재앙인 처음 네 대접 재앙(1-9절)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납니다(1절). 이 음성이 일곱 대접 재앙을 가진 천사들에게 하나님의 진노의 대접을 땅에 쏟으라고 명령합니다. 본 절에서 땅이란 물리적인 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일곱 대접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에게 한결 같이 땅에 대접재앙을 쏟을 것을 명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5-7째 대접 재앙은 그 대상을 짐승의 보좌와 큰 강 유브라데와 공기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 절의 땅은 자연계를 포함한 사단세력의 영역 전부를 포괄하면서 사단의 세력을 향한 총체적인 심판이 개시되었음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후에 일곱째 대접재앙이 공기 중에 부어질 때, ‘되었다’(17절)라는 선언이 주어지는 것을 통해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공기란 공중과 동일한 표현으로 곧 공중권세 잡은 사단의 총사령부를 가리키고 있습니다(엡 2:2, 6:12).

한편 인(印) 재앙에서는 인을 뗀다고 기술함으로 계시 내지는 개봉의 성격을 강하게 나타냈습니다. 나팔 재앙에서는 나팔을 분다고 함으로 경고의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반면 대접 재앙에서는 ‘진노의 대접을 땅에 쏟으라’고 표현하심으로 종말적 심판의 집행이 ‘마지막’이란 인상을 강하게 전달해 주고 있음을 간파하게 됩니다. 성전에서 나는 큰 음성은 하나님의 명령임에 틀림없습니다. 15:8에서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 성전에 아무도 능히 들어갈 자가 없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심판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4:5). 하나님의 진노의 대접이란 표현은 재앙의 정도가 인 재앙과 나팔 재앙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강화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아마 ‘마지막 재앙’이란 사실이 이런 표현을 사용하도록 촉구한 듯합니다.

성전의 명을 받들어 첫째 천사가 대접을 땅에 쏟아 붓습니다(2절). 본문의 땅은 사단의 전 영역을 상징하는 1절에 언급된 땅이 아닙니다. 물리적인 땅입니다. 자연계의 땅입니다. 계속해서 대접 재앙이 바다와 강과 물샘 및 하늘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악하고 독한 헌데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하나님의 인을 받은 자들은 첫 번째 대접재앙의 대상이 아닌 사실을 간파하게 됩니다. 첫 번 대접재앙의 증상은 사실상 출애굽사건과 관련해 애굽의 전역에 내렸던 여섯 번째 독종재앙을 연상케 합니다(출 9:8-11). 이때에도 피해의 대상은 애굽사람들에게만 국한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철저히 구별되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통해서도 첫째 대접재앙의 대상이 짐승의 표를 받고 그 우상에게 경배했던 악한 자들에게만 집중적으로 쏟아진 사실을 추정하게 됩니다. 땅에 이어 둘째 천사가 대접을 바다에 붓습니다(3절). 이내 바다가 죽은 자의 피같이 응고돼 바다의 모든 생물이 죽어버립니다. 이는 애굽에 내린 첫 번째 재앙과 유사하며(출 7:14-21) 둘째 나팔재앙의 피해와도 방불합니다(계 8:8-9). 단지 나팔재앙 때에는 바다생물의 삼분의 일이 죽는 제한적인 재앙이었던 반면에 대접재앙은 바다의 모든 생물이 죽음으로 범위와 강도 면에 있어서 훨씬 강화되고 있음을 봅니다. 마지막 재앙이란 사실이 이처럼 상대적으로 막대한 피해를 초래하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따라서 대접 재앙을 통해 확인되는 피해양상은 주님의 재림이 가까워 올수록 더욱 구체화 될 것이 확실합니다. 이제 셋째 천사가 대접을 강과 물의 근원에게 쏟자 강물이 피가 됩니다(4절). 이런 현상도 애굽에 내렸던 첫 번째 재앙과 유사합니다. 특별히 강과 물 근원이 피로 변한 것은 바다가 응고된 피로 변할 것보다 훨씬 애굽 재앙 이미지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대접 재앙이 상대적으로 애굽재앙 모티브를 적극 반영하고 있는 것은 구약교회인 이스라엘을 핍박하고 고통을 가하고 있는 애굽의 이미지가 사단적 사상과 동질성을 띠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은 계시록적 관점에서 사단의 세력들에게 가해지는 종말적 심판현상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 2-4절에 기술된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는 자들의 정체성을 논하면서 요한은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홍해바다를 연상케 하는 유리바다 가에 서서 거문고에 맞춰 구속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고 소개하는 것입니다. 여기 마지막 일곱 대접재앙을 기술하면서 상대적으로 애굽재앙의 이미지를 집중적으로 적용시키는 의도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따라서 애굽재앙 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혀 열 재앙의 피해를 보지 않고 구원을 받았듯이 마지막 대접재앙이 시행되는 과정에서도 하나님의 인(印) 맞은 자들의 피해는 극소화될 것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한편 셋째와 넷째 대접재앙 사이의 막간을 이용해 물을 차지한 천사가 등장하면서 찬양하는 내용이 소개됩니다(5-6절). 이 천사가 물을 차지하고 있다는 표현을 통해 앞의 바다와 강과 물 근원에 대접재앙을 쏟은 천사로 추정됩니다. 천사의 찬양의 요지는 하나님의 심판의 정당성과 공정성을 선포하는 내용에 집중됩니다(5-6절). “전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거룩하신 이여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 저희가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저희로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이다 하더라”(16:5-6). 본문에서 몇 가지 사실이 확인됩니다. 먼저 심판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신 사실입니다. 전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거룩하신 이란 하나님의 존재성에 대한 표현이 이런 사실을 증거합니다. 여기서도 11:17처럼 ‘장차 오실이’란 표현이 생략된 것은 자못 의도적입니다. 대접재앙이 마지막 심판의 성격을 띠고 있음으로 사실상 더 이상의 추가적인 심판이 불필요함을 암시합니다. 일곱째 대접재앙으로 사단의 총사령부 격인 공기(공중)가 초토화되었다는 사실(16:17)은 본질상 사단의 종말적 심판이 집행되었음을 시사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공정성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공정성과 정당성은 순교자들의 피 값을 가해자들로부터 취하시는 응보적 성격을 띠고 주어진다는 데서 성립됩니다. 다시 말해 종말적 성격을 띠고 있는 대접재앙의 정체성은 순교자들의 피 값을 요구하는 신원(伸寃)의 기도에 대한 응답의 성격을 띱니다(6:9-11). 이런 사실은 하나님의 심판에 화답하는 제단의 음성을 통해 재확인됩니다(7절). 이 부분은 죽은 순교자들의 영혼들이 하늘 성전의 제단 아래에서 하나님을 향해 신원의 기도로 간청하는 내용(6:9-10)과 성도의 기도(8:3-5)가 함께 연계돼 있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드리는 기도는 응답됩니다. 하나님은 주님의 피 값으로 사신 바 된 성도의 원통함을 결코 묵과하지 않으십니다. 모든 원한을 갚아주십니다(롬 12:19).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히 9:17).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행위에 따라 공정하고 합법적으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전 12:14). 성도들이 진리로 말미암아 세상에서 겪는 불의와 불법과 불공정 및 억울함과 원통함 등이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반드시 보상받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본문의 천사는 ‘저희(가해자:악한 세력)로 피(신원의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다’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과응보의 법칙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주관하시는 통치원리의 일환이기도 합니다(사 49:26).

8-9절은 네 번째 대접재앙의 기사와 사람들의 반응이 소개됩니다. 넷째가 대접을 해에게 쏟아 붓습니다. 그러자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웁니다(8절). 하나님께서 이 일을 주관하십니다. 이는 계 7:16에서 어린양의 피로 구속받은 성도들이 해나 어떤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않을 것에 대한 약속의 보증과 대조를 이룹니다. 넷째 나팔 재앙에서는 해가 빛을 잃고 천계의 삼분의 일이 어두워집니다(8:12). 그러나 대접 재앙은 해가 더욱 빛과 열을 발산함으로 피해가 극심할 것을 증거합니다. 9절은 “태움을 당한 자들이 이 재앙의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며 또 회개하여 영광을 주께 돌리자 않더라”고 대접재앙의 피해자들의 반응이 소개됩니다. 이는 다분히 고의적인 패역한 행동임을 문맥 속에서 간파하게 됩니다. 고의적인 범죄와 회개치 않는 화인 맞은 양심은 전혀 구원의 기회가 없습니다(시 19:13, 딤전 4:2, 롬 1:32). 영원한 불못의 형벌만이 기다릴 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모독하고 모욕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요한은 13:6에서도 짐승의 사역의 본질이 하나님과 성도를 훼방하는 것이라고 고발합니다. 그렇다면 대접 재앙의 피해를 받는 장본인들의 정체성이 결국은 짐승을 경배하며 우상에게 절했던 자들이란 사실을 반증합니다. 더하여 이들이 회개치 않는다는 것은 대접재앙이 회개를 목적삼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한 선의적인 심판이 아님이 확실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종말적 심판의 성격을 가집니다. 종말적 심판은 행위를 따라 처치함으로 영벌의 심판일 뿐입니다(계 20:12, 15절). 더 이상의 구원의 기회는 없습니다.
악의 세력을 응징하는 마지막 세 대접 재앙(10-21절)

1-9절까지는 애굽 재앙 이미지를 차용한 자연계에 집중되는 강도 높은 대접 재앙으로 인간의 고통까지도 수반하는 모습을 봅니다. 특별히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악한 세력들이 대상이 됩니다. 마치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이 임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무관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종말적 심판의 성격을 띠고 있기에 더욱 이런 차별적인 현상이 강조됩니다. 하나님의 인 맞은 성도들은 최후의 심판과는 무관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계 20:15).

이제 10-21절까지는 5-7째 대접재앙 기사가 소개됩니다. 그 대상은 사단의 총체적인 세력들에 집중됩니다. 짐승의 보좌와 악의세력을 규합한 대규모 전쟁을 상징하는 큰 강 유브라데와 사단의 사령부인 공기(공중)를 대상으로 합니다. 이들 대상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유발시킨 장본인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점에 이르러 종말적 심판현상이 란 인상이 유난히 부각됩니다. 마침내 다섯째 천사가 대접을 짐승의 보좌에 쏟아 붓습니다(10절). 짐승의 보좌란 표현은 13:2에 근거합니다. 13:2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 하늘에서 쫓겨난 용으로부터 일체의 용의 보좌의 권세를 한시적으로 위임받아 통치권을 대행하는 내용이 소개됩니다. 따라서 짐승의 보좌는 사실상 용의 보좌요 사단의 보좌와 일반입니다. 그런데 다섯째 천사의 대접재앙을 바로 이 짐승의 보좌에 직접 쏟아 붓는다는 것입니다. 정공법입니다. 적의 심장부를 강타해 일거에 패배시키려는 의도가 엿보입니다. 그만큼 심판의 때가 무르익었다는 반증입니다. 추수할 때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사실이 일곱째 대접재앙을 사단의 심장부나 다름없는 공기(공중) 가운데 쏟음으로 보다 강화된 표현으로 기술됩니다(17절). 하여튼 나머지 세 대접 재앙은 이런 식으로 사단의 핵심부분들을 겨냥해 집중적으로 공략함으로 마침내 사단의 세력은 대패하게 된다는 것이 세 대접재앙이 갖는 요지입니다.

한편 요한 당시 ‘짐승의 보좌’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일세기 교회를 핍박했던 로마제국을 상대적으로 언급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제국에게만 제한적으로 적용시킬 수는 없습니다. 짐승의 보좌란 의미가 물리적이기 보다는 상징성을 띠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짐승의 보좌란 시공을 초월해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회를 핍박하는 세상 권세를 총체적으로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이런 결과 짐승의 나라가 어두워지며 사람들은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며 고통으로 인해 하나님을 훼방하고 자기 죄를 회개치 않았다고 진술합니다. 여기서도 회개가 없습니다. 재앙으로 인한 고통 중에도 더욱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훼방하는 일만 가중됩니다. 이것이 멸망받기로 작정된 자들의 패역한 모습입니다(살후 2:11-12). 회개 없이 하나님을 훼방하는 자들은 양심이 화인 맞은 자들로 본질상 짐승에게 속한 자들일 뿐입니다(13:6). 여기서 ‘그(짐승) 나라가 어두워졌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분리된 지옥에서의 형벌의 삶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치 애굽에 내린 아홉 번째 흑암의 재앙(출 10:23)으로 애굽과 이스라엘 지경이 구분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애굽 또한 철저히 단절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사실상 하나님과 무관한 삶을 살아가는 불신자의 옛사람적 삶의 성격 또한 어두움의 삶이라고 성경을 지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는 어두움에서 해방돼 빛 가운데로 나온 자들인 셈입니다(엡 5;8-11).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반면에 하나님께 속한 자들은 죄를 책망 받을 때 원망하거나 불평불만을 토로하지 않습니다. 책임을 전가시키지도 않습니다. 죄를 시인하며 즉각 상하고 통회하는 심정으로 회개에 돌입합니다(시 51:17). 모든 죄를 자백하며 용서와 긍휼을 구합니다. 이런 회개의 전형을 다윗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부적절한 관계를 가진 후, 그녀의 남편인 우리아를 의도적으로 최전선으로 보내 전사를 유도합니다(삼하 11:4, 14-15절). 악의적인 처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패역한 죄를 묻고자 선지자 나단을 다윗 왕에게 보냅니다. 나단은 어린 암양 새끼 한 마리를 가진 가난한 사람과 많은 가축을 소유한 부자의 비유를 들어서 부자의 패역함을 고발합니다. 이 비유의 얘기를 들은 다윗이 부자에게 크게 노합니다. 이때 나단은 그 부자가 다름 아닌 다윗이라고 직언합니다. 다윗이 그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상하고 통회하는 심정으로 죄를 자복하고 용서와 긍휼을 빕니다(삼하 12:1-15). 이런 다윗의 심정을 고백한 내용이 시 51편의 내용입니다. 본 시편에서 다윗은 철저히 자신의 죄성과 범죄행위를 고백합니다. 무엇보다도 정한 마음과 정직한 영을 회복시켜 달라고 간청합니다. 이는 과거와의 단절과 청산을 의미합니다. 아울러 전심으로 통회하며 용서와 긍휼을 구합니다. 본 시편의 다윗의 기도는 가히 회개기도의 모범이요 전형이랄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회개의 진정성은 자신의 소욕을 좇아 가던 길과 행하던 일을 멈추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향해 180도 방향과 가치관을 전환하는 전인적인 유턴(u-turn)의 삶을 가리킵니다(죤 박스터, 회심).

여섯째 천사가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아 붓습니다(12절). 그 결과 발생하는 사건의 전개를 12-16절까지 기술합니다. 대접재앙이 유브라데 강에 쏟아지자 강물이 마릅니다. 그래서 동방으로부터 오는 왕들의 길이 준비됩니다. 유브라데 강을 통한 재앙 이미지는 여섯 번째 나팔재앙과도 유사성을 가집니다. 그러나 두 재앙 사이에 분명한 차이가 발견됩니다. 나팔재앙에서는 유브라데 강에 결박된 네 천사가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 위해 놓임을 받습니다(9:14). 반면에 여섯 째 대접재앙에서는 동방의 왕들, 곧 지상의 통치자들이 연합전선을 구축해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해 유브라데 강을 건너는 것으로 소개됩니다. 혹자는 이런 유브라데 강 도하사건을 죽은 네로 황제가 다시 살아나 동방의 우수한 유목 민족인 파르티아의 군대를 인솔해 로마를 침공해 올 것에 대한 네로 재생설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고 소개하기도 합니다(이필찬, 679/호크마 종합주석, 460). 그러나 이런 관점은 로마와 파르티아 사이에 고조되는 당시의 역사적인 전쟁발발의 정황을 배경삼아 사단의 세력과 하나님과의 첨예한 영적 전쟁 상황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을 뿐이지 실제적인 정치군사적인 상황을 직접적으로 기술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종말적인 긴박한 영적 전쟁 상황을 동방의 왕들로 묘사된 사단의 동조 세력들이 하나님과의 최후의 일전을 위해 연합전선을 구축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유브라데 강은 언약의 땅인 가나안의 동쪽 경계선입니다(창 15:18), 이 강 건너편에는 앗수르를 위시한 이방 국들이 포진하고 있어서 구약적 배경에서 이 강은 이스라엘의 대적들로 상징되었습니다(사 7:20, 8:7, 렘 46:10).

13절은 잠시 장면이 바뀝니다. 그리고 용과 짐승과 거짓선지자의 입에서 나온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인 귀신의 영이 천하 만국을 미혹해 땅의 임금들을 전쟁을 위해 아마겟돈으로 소집합니다(16절). 이 소집의 일환으로 지금 동방의 왕들이 유브라데 강을 건너려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전쟁은 본질상 영적 전쟁인 사실이 확실합니다. 사단의 진영과 교회공동체 간에 벌어질 대규모의 종말적 최후의 영적 전투 말입니다. 이런 사유로 이 영적 전쟁은 예수님의 재림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음을 간파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전쟁의 시점을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과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14절). 이런 표현은 구약에서 종말적 시점과 관련해 사용되는 관용구적 문구입니다(욜 2:11, 습1:14).

아마겟돈(Armageddon) 전쟁과 관련해 유의할 것은 용과 짐승과 거짓선지자의 입에서 나온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의 정체와 사역입니다. 요한은 먼저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을 봅니다. 개구리는 유대인들에게 부정한 생물(레 10:10, 41절)이고, 모세를 통해 애굽에 내려진 재앙 중 하나이며(출 8:5-11), 시편에서도 재앙을 가져오는 동물로 묘사됩니다(시 105:30). 그런데 이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과 짐승과 거짓선지자의 입으로부터 나옵니다. 용은 옛 뱀 곧 마귀와 사단으로 일컫는 온 천하를 꾀는 속이는 자의 수장입니다(12:3, 9절). 짐승은 13:1-2에 언급된 바다에서 올라온 용의 화신입니다. 왜냐하면 용이 짐승에게 보좌와 관계된 통치권 일체를 위임했기 때문입니다. 거짓선지자는 13:11에 소개된 땅에서 올라온 짐승으로 바다짐승의 보좌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자로서 짐승의 추종자들에게 짐승의 표(666)를 받게 한 자입니다. 이들은 계시록에서 사단 왕국의 삼두체제를 구성하면서 하나님과 교회를 적극 대적하는 악의 세력으로 활동합니다. 이들 악의 삼인방의 입에서 나온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은 14절에서 귀신의 영으로 통합해 호칭됩니다. 다시 말해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의 정체는 귀신의 영과 병행시킴으로 동일시합니다. 신약성경에서 마귀를 종종 더러운 귀신으로 표현합니다(막 1:23, 3:11, 5:2). 그렇다면 귀신의 영의 사명은 무엇일까요. 14절은 귀신의 영의 사명이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큰 날의 전쟁에 참여토록 소집하는 일’이라고 설명합니다. 물론 이적의 실상이 무엇인지 침묵합니다. 그러나 이들 귀신의 영의 실체인 개구리 같은 세 영이 악의 삼인방의 입에서 나왔다는 설명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입에서 나온다는 것은 저들의 말과 결부돼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다시 말해 성령께서 진리의 영으로 오셔서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듯이 악령의 역사도 이들 악의 삼인방의 입에서 나오는 미혹의 말로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귀신의 영이 땅의 임금들을 아마겟돈 전쟁에 동참시키는 일과 관련해 사용된 이적은 거짓된 말을 통해 속인다는 사실을 간파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지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요일 4:1). 구약 성경은 이와 동일한 원리를 통해 일어난 미혹의 전쟁기사를 소개합니다.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 시대입니다(왕상 22장). 당시 아합 왕은 길르앗 라못의 탈환을 위해 아람과의 전투를 계획합니다. 마침 이스라엘을 방문한 남유다의 여호사밧 왕에게 아합은 함께 연합해 아람을 공격할 것을 제안합니다. 이때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뜻을 묻게 됩니다. 아합의 어용(御用) 선지자들은 한결 같이 전쟁의 승리를 확신하며 하나님께서 아람을 아합의 손에 붙이셨다고 거짓 예언을 합니다. 남유다의 여호사밧 왕은 하나님의 선지자의 예언 듣기를 청합니다. 이에 미가야가 불려옵니다. 미가야는 우회적으로 아합 왕의 죽음과 패배를 예언합니다(왕상 22:17). 그리고 이어서 어용 선지자들의 예언이 왜 거짓예언인지를 밝힙니다. 이 과정에서 미가야는 환상을 통해 본 ‘천상의 회의’ 장면을 일러줍니다. 이 회의에서 아합을 꾀어 전쟁에서 죽게 할 거짓말하는 영이 등장합니다. 즉 거짓말하는 영이 아합의 선지자들의 입에 들어가 아합 왕을 꾀어 전쟁을 일으키도록 미혹합니다(왕상 22:19-23). 예수님께서도 종말에는 거짓 선지자들이 이적과 기사로 많은 사람들을 미혹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마 24:24). 바울도 악한 자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일하게 될 것을 예고합니다(살후 2:8-10). 이처럼 마귀의 속성은 거짓과 속임수로 미혹하는 것입니다(계 12:9). 이때 유사성(類似性)을 가지고 접근함으로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면 미혹 당하게 됩니다. 전체를 보지 못하면 유사한 일부분에 사로잡혀 결국 속게 됩니다. 속임수는 자고로 마귀의 고전적인 수법입니다. 하와가 선악과 금령의 본질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뱀의 미혹에 빠졌습니다(창 3:1-5). 후에 마귀는 예수님에게조차 성경을 왜곡시켜서 시험하려 했습니다(마 4:5-7, 시 91:11-12). 이런 식으로 마귀는 이 시대에도 동일한 유사성의 원리를 가지고 성도를 미혹합니다. 심지어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합니다.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위장합니다(고후 11:14-15). 상황이 이럴 진대 겉만 보고는 실체를 파악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저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 정체성이 드러납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없기 때문입니다(마 7:16). 그러기 위해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 지에 대한 총체적인 성경계시관의 정립이 어느 때보다 시급히 요청됩니다. 성경신학적 관점(언약적 구속사관)에 근거해서 말입니다. 본질에 깊이 접촉됨이 없이는 유사성의 실체를 파악하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본질을 추구하는 신앙관의 정립을 강조하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따라서 아마겟돈 전쟁(16:16)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연관돼 교회를 포함한 어린양의 진영과 사단의 추종세력들 사이에 벌어지게 될 최후의 한 판 영적 전쟁을 가리킵니다. 아마겟돈 전쟁이 영적 전쟁이란 사실은 15절에서 교회의 영적 각성을 촉구하는 내용이 소개되는 것과, 14절에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해 온 천하 임금들을 모으더라는 표현이 최후의 종말적 전쟁을 묘사하고 있는 12:17(용과 여자의 남은 자손), 19:19(두 짐승/땅의 임금들의 군대와, 백마 탄 자와 그의 군대인 교회), 20:8(용/곡/마곡과 성도들의 진/교회)과 병행관계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16:14의 영적 전쟁은 사단의 진영과 교회를 포함한 어린양의 진영 간의 전쟁인 셈입니다. 계속되는 15절은 이런 긴박한 영적 전투에 직면해 현대교회 성도들이 어떻게 지혜롭게 이 위기국면을 극복해 나가야 될 것인지에 대해 권면해 줍니다.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15절). 이는 주님의 재림과 관련한 종말의 때가 임박한 상황에서 주어진 신약의 여러 본문들과 병행관계를 이룹니다(마 24:42-44, 25:13, 살전 5:2, 계 3:3). 이처럼 ‘도적’ 모티브를 사용하는 종말적 삶의 특징과 강조점은 ‘그 때’(재림/심판)가 언제일는지 알지 못하니 근신(謹愼)하며 깨어 대비하는 삶을 살라는 경계의 메시지로 집약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일곱 교회를 향해 동일하게 요구하시는 이기는 자의 지혜로운 삶의 자세인 셈입니다. 성도의 믿음과 인내가 이에 절실히 요구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단 세력들과 최후의 영적 전쟁을 상징하는 16절의 아마겟돈은 구약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심판과 관련해 사용되고 있는 므깃도(삿 5:19-21, 왕상 18:40, 황하 23:29-30, 대하 35:20-25)를 동일한 어근으로 사용함으로 악의 삼인방에 대한 종말적 심판의 장소로 인용되고 있는 셈입니다(이필찬, 688-689). 따라서 본 아마겟돈 전쟁은 영적 전쟁이며 동시에 악의 삼두체제의 결정적인 패배로 끝날 것임을 암시해 줍니다. 이런 점에서 여섯 번째 대접재앙은 종말적 심판의 성격을 가장 극명하게 증시해 줍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단의 진영과 어린양의 진영과의 영적 전쟁의 의미를 담고 있는 아마겟돈 전쟁은 사실상 하나님의 구속사의 진행 속에서 다양한 양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사건은 종말적 아마겟돈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하는 성경에 나타난 여러 아마겟돈 전쟁의 결정적인 단초로 기능합니다. 따라서 계시록의 아마겟돈 전쟁은 사실상 창 3:15의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그 실체가 총체적으로 잠재돼 있었다는 사실을 간파하게 됩니다.

17-21절은 일곱 번째 대접재앙의 내용과 결과에 대해 기술합니다. 일곱째 천사가 마지막 일곱 번째 대접을 공기가운데 쏟아 붓습니다(17절). 이때 일곱 천사에게 대접재앙의 집행을 선언했던 큰 음성이 다시 성전의 보좌부터 들려오는데 ‘되었다’(It is done)라고 선포합니다. 여기 일곱 번째 대접을 공기가운데 쏟아 부었다는 것은 공기, 곧 사단의 핵심영역인 ‘공중’을 집중적으로 공격해 사단의 진영을 초토화시켰음을 의미합니다. 엡 2:2은 사단을 ‘공중 권세 잡은 자’로 설명함으로 공중을 사단의 사령부로 지목합니다. 따라서 사단의 총사령부격인 공중이 진멸됨으로 사실상 사단의 진영은 초토화돼 공중분해 된 셈이나 다름없습니다. 일순간에 아마겟돈 전쟁은 승패가 나버린 셈입니다. 이런 사실을 성전의 보좌로부터 ‘되었다’란 선언이 뒷받침 해 줍니다. ‘되었다’는 선언은 ‘성취되다’, ‘완성되다’란 의미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이 종식되었음을 직접적으로 선포하는 종전선언에 해당합니다. 세상역사의 종식을 가리킵니다. 구속사의 종말적 완성을 의미합니다. 이는 창 3:15의 여자의 후손언약이 예수님의 구속사역으로 이미 성취되었고 이제 사단의 본거지인 공중이 파괴됨으로 최종적으로 완성된 것을 증거합니다. 이런 사실은 하나님의 심판은 구속사의 진행 속에서 늘 있어 왔지만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해 성취의 절정을 이루게 될 것을 시사합니다. 계 21:6은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와 교회의 종말적 승리와 관련해 '이루었도다'(It is done)라고 최종 선언함으로 이런 사실을 강력히 뒷받침합니다. 따라서 이상 사단의 진영이 공중분해 된 것과 관련된 ‘되었다’(It is done)와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로 말미암는 최종적인 ‘이루었도다’(It is done)란 선언은 공히 예수님의 구속사역의 성취(요 19:30, ‘다 이루었다’, It is finished)에 공히 기반을 두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성취는 종말의 시작입니다(히 1:2, 약 5:3, 딤후 3:1, 고전 10:11). 종말적 구속사건이며 심판의 의미를 가집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신묘막측하신 창세 전 구속의 경륜(엡 1:4-6)은 구속사의 진행 속에서 ‘삼 단계의 되었다’란 선언을 통해 마침내 악의 결국은 멸망이요 선의 결국은 승리란 도식을 통해 최종 마감될 것입니다. 성도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이래서 지속적으로 요구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의 미래는 인간의 희망사항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확고부동한 약속의 보증입니다. 18절은 종말적 심판 현상을 소개합니다. 이런 현상은 일곱 번째 인 재앙(8:5)과 일곱 번째 나팔 재앙(11:19) 후에도 동일하게 나타났던 동일한 현상입니다. 그러나 대접 재앙의 경우는 동일한 양상을 유지하면서도 표현상 더욱 강화되고 확대된 내용을 확인하게 됩니다. 일례로 ‘큰 지진’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유사 이래 없었던 큰 지진인 사실과, 이로 인해 만국의 성들이 무너지고, 각 섬과 산들도 사라지고, 큰 성 바벨론마저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받아 멸망된 사실 등이 추가됩니다. 여기서 바벨론 성의 멸망은 14:8-10의 내용과 병행을 이루면서 좀 더 발전된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 뿐 아니라 ‘큰 우박’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무게가 한 달란트(50-90kg)나 되는 큰 우박으로 인해 피해가 막심하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훼방하게 되었다고 보충 설명합니다. 이런 식으로 심화되고 강화된 종말적 심판현상들로 인해 일곱 번째 대접 재앙은 최후의 심판이란 성격을 극대화시켜 설명해 줍니다.

이상의 논증을 통해 특별히 5-7번째 대접재앙의 실상을 담고 있는 10-21절의 내용은 악의 세력의 삼두체제인 용과 짐승과 거짓선지자 및 이 모든 세력을 포괄하는 큰 성 바벨론에 대한 심판의 기사를 총론적 관점에서 다루고 있음을 살펴봤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곱 대접재앙이 마지막 종말적 재앙(심판)이란 시각은 절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실은 21세기를 살아가는 현 교회시대가 하나님의 구속사의 진행 속에서 얼마나 치열한 영적 전쟁의 와중에 처해있는 지를 실감나게 해 줍니다. 따라서 혹자들의 주장대로 계시록의 다양한 묵시적 예언들이 여전히 재림과 관련된 미래적인 사건으로 치부되는 관점은 마땅히 시정돼야 합니다. 계시록이 제시하고 있는 세 종류의 각기 다른 일곱 재앙심판들은 미래가 아닌 주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현 교회시대에 우리의 인식여부를 불문하고 현재진행형으로 시행되고 있는 종말적 심판현상인 사실을 간파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구속사를 마무리 짓는 최종적인 영적 아마겟돈 전쟁은 여전히 미래의 사건으로 남아 있을지라도 말입니다.

Ⅲ. 결론

15-16장은 마지막 일곱 대접재앙을 기술합니다. 15장은 16장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되는 일곱 대접 재앙의 도입부분의 성격을 띠면서 동시에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구속의 노래를 소개함으로 종말적 심판에 담긴 구속의 또한 측면을 대조해 기술합니다.

일곱 대접재앙이 마지막 종말적 심판의 성격을 띠는 것은 특별히 10-21절의 내용을 통해 5-7번째 대접재앙의 대상들이 악의 핵심세력을 상징하고 있는 용과 두 짐승과 큰 성 바벨론에 집중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짐승의 보좌를 와해시키는 다섯 번째 대접재앙 심판(10절)은 사단 세력의 중심영역으로 총사령부 격인 공기(공중, 엡 2:2)를 일곱 번째 대접재앙에 의해 초토화시킴으로 사실상 병행관계를 이룹니다. 이런 사실은 다시 한번 각각의 일곱 재앙들이 시간적인 연속성을 극복해 반복과 병행과 점진적인 방법 등 다양하고 복합적인 요소를 띠고 진행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특별히 일곱 대접재앙과 관련해 재앙의 내용들이 출애굽 당시 애굽에 내렸던 열 가지 재앙을 근간으로 시행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합니다. 이는 당시 모세를 통해 애굽지역에 내린 열 가지 재앙의 대상이 애굽인들에게만 제한적으로 해당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혀 열 가지 재앙의 피해로부터 안전하게 보존되었을 뿐 아니라 마침내 출애굽을 통한 구원의 은혜를 덧입게 되었습니다. 동일한 맥락 속에서 15장은 대접재앙의 도입과 더불어 출애굽 구속의 모티브에 근거한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15:3)를 소개함으로 애굽에 대한 심판 중에서도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체성을 어린양에 속한 새 이스라엘에게 연관시킴으로 모형과 실체의 관계를 통한 교회공동체의 구원을 강조합니다. 이 과정에서 열 가지 재앙의 피해자인 애굽인들을 대접재앙의 피해자인 짐승의 표를 받고 그 우상에게 경배한 자들과 연계시킴으로(16:2) 상호간의 병행관계를 시도합니다. 이런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에게 속하지 않은 자들의 결말은 항상 멸망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한편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는 본질상 구속의 은혜를 찬양하는 것이란 측면에서 동질성을 띱니다. 반면 전자는 구속에 대한 예표를, 후자는 구속에 대한 실체와 더불어 구원의 영속성과 영원성을 함의한다는 관점에서 차이점을 가집니다.

마지막으로 5-7번째 대접재앙으로 사단의 세력들이 일망타진되었다는 선언(17절)은 이것이 종말적 심판의 성격을 강하게 증시한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17-20장에 기술된 사단의 지휘체제의 구체적인 멸망을 예시해 주는 척도로 기능하는 효과를 가집니다. 즉 10-21절은 용과 두 짐승과 바벨론의 멸망을 소개합니다. 그런데 17-20장에는 바벨론과 두 짐승과 마지막으로 용의 멸망을 상술함으로 스토리 전개의 극적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킵니다. 이런 상호 불가분의 관계는 전자는 후자를 총론적 관점에서 기술하고 있다면 후자는 전자의 내용을 좀 더 발전시키고 구체화시켜 각론적 관점으로 기록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할 사항은 주님의 재림과 관련해 발생하게 될 이런 최후의 종말적 사건들은 세상 역사 속에서 집행될 때 순식간에(in the twinkling of an eye, 고전 15:51-52)에 진행된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재림은 이 모든 종말적 사건 속에 포함된 다양한 요소와 국면들을 총체적으로 포괄해 일시에 집행하는 결정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일례로 주님의 재림과 관련해 마 25장에 소개된 우편 양과 좌편 염소의 우주적 분리사건, 계 20장에 기록된 불신자들에 대한 최후의 심판정황, 주님의 재림과 동시에 발생하게 될 우주적인 부활사건 등이 시차를 가지고 시공간의 제약 속에서 진행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재림은 동시에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는 의미가 성립됩니다. 그 나라는 더 이상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완성된 나라이기에 더 이상의 발전도 성장도 성숙도 불필요합니다. 영존하는 나라로서 항상 현재적입니다. 그래서 영원의 세계, 영원의 나라입니다.
출처 : remnant7000
글쓴이 : sky blu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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