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요한계시록2

[스크랩] 요한계시록 구속사(9강) : 작은 책을 먹는 요한

작은 책을 먹는 요한 
(계 10:1-11)

  Ⅰ. 도입

  계시록 8-9장의 강론을 통해 여섯 번째까지의 나팔 재앙의 다양한 면모를 살펴봤습니다. 확실히 나팔 재앙의 성격은 인 재앙에 비해 모든 면에서 훨씬 강화된 내용을 보여줍니다. 무엇보다도 재앙의 범위 면에서 인 재앙이 땅의 사분의 일에 영향을 끼치는 반면에 나팔 재앙은 삼분의 일에 심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재앙에 사용된 도구에 있어서도 나팔 재앙은 사단의 세력들로 상징되는 황충과 이만만의 마병대를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적극 사용하십니다. 사단과 그의 세력들까지도 피조물로서 하나님께 종속돼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이루시는 일에 나름대로 쓰임을 받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만사와 만물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시는 일에 주권적으로 선용되고 있음을 시사해 줍니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 16:4).

  계시록 10장은 11:1-14까지의 내용과 더불어 삽입환상 군(群)을 이룹니다. 본 삽입환상은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나팔 재앙 사이에 위치하면서, 나팔 재앙에도 불구하고 회개치 않는 패역한 자들(9:20-21)을 어떤 방도로 회개시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할 수 있는지(11:13)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보충적 의미를 기술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물리적인 제재는 그것이 제아무리 강도 높은 심판과 재앙의 성격을 띠었다고 할지라도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결코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저들은 결코 회개치 않습니다. 이런 사실은 노아시대의 물 심판에도 불구하고 결코 인간의 심성에 일말의 아무런 변화도 발견할 수 없었던 사실을 통해 이미 확인된 바 있습니다(창 6:6, 8:21). 

  그렇다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무엇으로 회개시킬 수 있단 말인가요. 계시록 10-11장은 오직 교회의 복음증거 사역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증거합니다. 8-9장을 통해 나팔 재앙에 따른 비극적인 참상과 더불어, 결론 부분(9:20-21)에서 재앙에 죽지 않고 살아남은 자들의 부정적인 반응을 기술하는 내용에 이어서 10-11장의 삽입환상을 소개하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회개는 물리적인 방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복음으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물론 복음을 전해 듣는다고 모든 사람이 회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할 것을 명합니다(딤후 4:2). 첫째는 하나님의 택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며, 둘째는 복음이 세상 끝까지 전파되는 것을 통해 최후의 종말은 도래할 것이며(마 24:14), 셋째는 이상의 결과로 심판 때 사람들로 하여금 변명의 여지가 없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본 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첫째로 펴 놓인 작은 책을 들고 있는 힘 센 천사의 등장(1-7절)과, 둘째로 사도 요한이 천사로부터 작은 책을 받아먹는 내용입니다(8-11절). 

  Ⅱ. 전개

  1. 펴 놓인 작은 책(1-7절)

  10장은 ‘손에 펴 놓은 작은 책’을 들고 있는 힘 센 다른 천사의 등장으로 시작됩니다. 1절의 힘 센 천사에 관한 설명은 계 5:2에서는 일곱 봉인한 책과 함께, 18:21에서는 큰 성 바벨론의 멸망과 함께 등장합니다. 그러나 본 장에 등장하는 힘 센 천사는 용모와 설명에 있어서 특별합니다. 요한의 설명을 빌리자면, 10장에 등장하는 힘 센 천사는 먼저 ‘구름을 입었다’고 묘사합니다. 구름은 구약적인 배경에서 신적 ‘운송수단’(단 7:13, 시 68:4, 104:3, 행 1:9, 살전 4:17, 계 1:7, 14:14)과 신적 영광의 현현과 임재의 표현으로 사용되곤 합니다(출 16:10, 40:34-35, 왕상 8:10, 겔 10:4). 다음으로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얼굴은 해 같고, 발은 불기둥 같다고 기술합니다. 이런 묘사들은 한결 같이 계 1장에 소개된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다양한 측면에서 반영해 설명하고 있는 내용입니다(4:3, 1:15, 16절). 물론 그렇다고 본 장의 힘 센 천사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킨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계시록 어디에서도 예수님을 천사로 묘사한 곳은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구속사역의 내용과 효과를 세상 가운데 증거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종들로 묘사될 뿐입니다. 그렇다면 본 장에서 왜 힘 센 천사가 주님의 용모와 속성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구름, 무지개, 해, 불기둥과 같은 이미지를 반영하는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을까요. 이는 힘 센 천사가 천상적 위엄과 영광을 입은 가운데 예수님에 의해 친히 보내졌음을 시사합니다. 이런 사실은 일곱 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에 하나님의 비밀, 곧 약속된 재앙과 심판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해진 복음과 같이(10:7) 반드시 성취될 것에 대한 확약과 확증을 보증해 주기에 적절합니다.

  2절부터는 힘 센 천사의 사역이 소개됩니다. 천사의 손에 펴 놓인 작은 책이 들려있습니다. 천사의 오른 발은 바다를 밟고, 왼 발은 땅을 밟고, 입으로는 사자의 울부짖는 것 같은 큰 소리로 외칩니다. 먼저 천사의 손에 들려진 ‘펴 놓인 작은 책’은 5장의 일곱 봉인된 책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는 책으로 보여 집니다. 왜냐하면 두 책과 관련된 내용이 공히 겔 2:9-3:3까지 전개되는 일련의 문맥을 통해 유사성이 확인되기 때문입니다. 먼저 계 5:1의 내용은 겔 2:9-10과 병행을 이룹니다. 다음으로 계 10:9-10은 겔 2:9-10의 연장인 겔 3:1-3의 내용을 반영합니다. 따라서 계 5:1과 10:9-10이 동일한 주제의 설명으로 연결돼 있는 겔 2:9-3:3까지를 동시에 주된 배경으로 삼고 있다면, ‘펴 놓인 작은 책’(5:1)과 ‘봉인된 책’(10:2)은 결과적으로 동일한 책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5장의 봉인된 책이 어떻게 10장에서 열린 책으로 전환될 수 있었을까요. 이는 5장과 10장 사이에 모종의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으로 추정됩니다. 그 사건의 실상이 무엇일까요. 다름 아닌 6장과 8:1에서 5장의 일곱 인으로 봉인된 책의 인을 어린 양이 떼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일곱 인 재앙과 관련해 어린 양에 의해 일곱 인이 떼어진 결과로 10장에서 봉인되었던 책이 열려진 것을 보여준다는 논증입니다. 이런 사실이 총체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앞에서도 이미 수차례 지적했듯이 예수님의 초림사역으로 말미암아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종말의 핵심사상은 단연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집중됩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사상을 강조하고 있는 다니엘서의 중심주제가 다름 아닌 종말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조명해 줍니다. 그러나 다니엘서에서는 종말의 시점을 예수님의 재림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단 12:7), 계시록에서는 예수님의 초림으로 이미 시작되었고 재림으로 최종 마감될 이중 구조적인 종말사건을 가리킵니다. 이런 관점에서 일곱 인 재앙을 위시해 일곱 나팔 재앙과 일곱 대접 재앙을 연속적으로 소개하는 것은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 사이에 과도기적인 종말적 현상이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한다고 하겠습니다. 

  요한은 계속해서 펴 놓인 작은 책을 들고 있는 천사가 오른 발은 바다를 밟고, 왼 발은 땅을 밟고 서 있는 자세로 사자의 울부짖는 것 같은 큰 소리로 외치자 일곱 우레가 발해지는 광경을 목도합니다(3절). 계시록에서 땅과 바다는 종종 사단을 중심으로 악의 세력에 속한 영역으로 간주됩니다(6:10, 8:13, 12:9, 13, 13:1, 21:1). 그러나 본문에서 바다와 땅은 악의 세력과 관련시켜 부정적인 이미지로 사용된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보편적인 용례로 사용됩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바다와 땅은 온 세상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힘 센 천사에 의해 전달되는 메시지가 세상 전체를 향해 발해질 것을 시사한다고 하겠습니다. 그 메시지의 요지는 계시록의 문맥 속에서 종말적 현상과 관련해 아마도 심판과 구원이라는 이중적인 주제에 집중될 것입니다. 한편 ‘사자의 부르짖는 것 같은 큰 소리’는 호 11:10과 암 3:8을 반영하는 것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모습을 사자의 포효에 비유함으로 듣는 자들로 하여금 두렵고 떨리는 심정을 가지고 반드시 들어야 할 내용임을 주지시키기 위할 목적으로 사용된 표현입니다. 나아가 사자의 부르짖는 소리와 함께 일곱 우레 치는 소리가 들립니다. 우레는 계시록에서 뇌성, 천둥과 동의어로 사용되면서 그 소리의 내용과 성격이 신적 기원에 근거하고 있음을 증거합니다(6:1, 14:2, 19:6). 따라서 사자의 부르짖는 것 같은 일곱 우레 소리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계시해 주는 특별한 음성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일곱 우레 소리의 내용을 기록하려다 제지를 당합니다(4절). 하늘로부터 우레가 발한 내용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대신 요한은 바다와 땅을 밟고 선 힘 센 천사가 하늘을 향하여 손을 들고 천지의 주재가 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는 환상을 봅니다(5-6절). 그리고 이렇게 외칩니다. “일곱 째 천사가 나팔을 불게 될 때,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지체하지 않고 이루리라“(7절)고 말입니다. 본 절에서 하나님의 비밀과 선지자들에 의해 전파된 복음의 내용이 본질상 동일시됩니다. 다시 말해 구약 선지자들에 의해 여러 모양과 모습으로 예언된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말미암는 인격과 사역을 통해 이미 성취되었습니다. 어린양 되신 예수님의 대속사역으로 말미암는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닙니다. 밝히 드러났습니다(엡 1:7-10, 3:1-4, 골 1:26-27, 벧전 1:10-11). 그러나 재림으로 말미암는 종말적 성취는 아직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문맥 속에서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는 일곱 우레 소리의 내용(4절하)은 일곱 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성취되어질 하나님의 종말적 비밀(7절)과 동질성을 띤다고 보겠습니다. 그래서 일곱 우레의 소리는 계속 인봉한 상태로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때가 찰 때 반드시 성취될 것을 ‘지체하지 아니 하리라’(6절하)란 표현을 통해 강조합니다. 그것은 향후 일곱째 천사의 나팔로 도입하게 될 일곱 대접 재앙으로 곧 마지막 재앙이 되기 때문입니다(11:15, 15:1, 16:1). 이 일곱 대접 재앙으로 종말적 심판과 이에 반하는 구속의 역사는 사실상 마감될 것입니다. 일곱 대접 재앙 중 특별히 다섯 째, 여섯 째, 일곱 째 대접 재앙은 그 대상이 철저하게 사단과 연관된 세력들로 곧 짐승(16:10)과 유브라데(16:12)와 공중(16:17)에 집중됩니다. 특별히 공중(16:17, 공기)은 사단의 좌소요 본거지(엡 2:2, 6:12, 엡 12:7-8)로 묘사되는바, 공기 가운데 쏟아진 일곱 번째 대접 재앙은 사단의 세력을 근본적으로 무력화시키고 패배시키는 결정적인 동인(動因)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요한은 강조해 기술합니다. 요한은 일곱 번째 대접 재앙이 공기 가운데 쏟아졌을 때, 성전의 보좌로부터 ‘되었다’(It is done/It is finished)라는 큰 음성이 들렸고, 이어서 최후의 종말적 현상인 번개와 음성과 뇌성 및 유사 이래 가장 큰 지진이 동반해 일어났음을 지적합니다(16:17-18). 이는 사실상 창세전부터 수립하셨던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이 예수님의 구속사역에 근거해 일차적으로 실현되었고(요 19:30), 사단의 본거지요 사령부인 ‘공중’이 파괴됨으로 사실상 성취될 것이며(계 16:17), 이런 사실에 근거해 땅과 하늘이 새롭게 갱신되고 승리한 교회가 새 하늘과 새 땅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을 통해 종말론적으로 완성될 것을 시사합니다(계 21:5-6). 따라서 예수님의 초림사역으로 이미 도래한 종말사상과 관련해 그동안 역사 속에서 다양한 상징과 묵시 및 비유로 진행되었던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사역은 사단의 본거지인 ‘공중’이 심판과 재앙의 표적이 되는 것으로 사실상 마감될 것입니다. 이처럼 6장에서 시작돼 16장으로 마감되는 세 일곱 재앙의 내용은 이후 사단의 세력을 총칭하는 큰 성 바벨론의 멸망(17:1-19:10)과 승리한 교회를 상징하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영광스런 등장(21:9-22:5)을 소개하는 것을 통해 이런 사실을 확증시켜 줍니다. 결과적으로 계시록의 몸통 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세 일곱 재앙(6-16장)의 기록 의도는 심판을 통해 사단의 세력을 무력화시키고 패배시키는 한편, 동시에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새 예루살렘으로 상징된 승리한 교회를 이루게 하심으로 새 창조의 주인공을 삼으려는데 집중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계 21:1-3). 따라서 하나님의 구속사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함을 받은 교회공동체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함으로 하늘과 땅이 통일되게 하려는데 집중된다고 하겠습니다(엡 1:7-10).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세세무궁토록 송축하며 모든 찬양과 존귀를 하나님께 돌려야하는 당위성과 명제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엡 1:6, 12, 14절).              

  2. 작은 책을 먹는 요한(8-11절)

  일곱 우레의 발하는 소리를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고 하던 음성이 다시 요한에게 들립니다(8절상). 요한이 들은 음성의 요지는 힘 센 천사가 들고 있는 펴 놓인 책을 취하라는 내용입니다(8절하). 요한이 하늘의 명을 따라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고 청합니다. 그러자 천사는 책을 먹으라고 명하면서 “네 배에는 쓰나 입에는 꿀 같이 달 것이라고 말해줍니다(9절). 본문은 겔 2:8-3:3과 렘 15:16-19의 말씀을 반영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특별히 에스겔서 본문의 요지는 하나님께서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할 심판과 복음의 메시지가 담긴 두루마리 책을 에스겔에게 먹이십니다(겔 2:10). 에스겔이 그 두루마리를 받아먹자 입에서는 달기가 꿀 같았다고 고백합니다. 시편 기자도 동일한 관점에서 주의 말씀의 맛이 꿀보다 더하다고 간증합니다(시 119:103). 이는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그 본의를 깊이 깨닫게 되는 데서 오는 영혼의 소성함과 기쁨과 만족을 술회한 것입니다. 특별히 에스겔의 경우에는 범죄한 이스라엘을 대상으로 주시는 두루마리 책인 사실을 고려할 때, 두루마리의 말씀은 단순한 말씀이 아니고 심판과 애가의 말씀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이 내용의 전부는 아닙니다. 회개를 촉구하시며 구원을 보증해 주시는 구속의 복음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는 계 5:1의 일곱 봉인된 책의 성격이 겔 2:8-10을 반영하면서 동시에 어린양으로 말미암는 구속사역을 시사하기 때문입니다(계 5:9). 이는 계시록의 말씀이 에스겔서의 말씀을 반영하면서 그 내용을 좀 더 발전시켜 적용하고 있음을 봅니다. 따라서 복음으로 말미암는 죄의 사면과 구원 및 칭의에 근거한 하나님과의 제반 긍정적인 관계성을 고려할 때, 펴 놓인 작은 책(두루마리)을 먹는 요한은 입에서 꿀처럼 달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반면 복음의 반대급부적인 면을 고려할 때는 복음전파로 야기될 수 있는 온갖 분열(마 10:34-36)과 고난과 핍박과 환란 및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과 지옥 형벌 등의 내용으로 인해 배에서 쓸 수밖에 없음을 상징적으로 묘사합니다. 즉 복음의 이중적 효과와 국면(막 16:15-16)을 ‘입에 달고 배에 쓰다’는 상징적 표현을 통해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즉시 천사의 손에서 책을 받아먹습니다. 그러자 천사의 고지대로 요한의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배에서는 쓰게 되었습니다(10절). 물론 이는 복음의 양면성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통해 요한에게 ‘펴 놓인 작은 책’을 먹으라고 했을까요. 세상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함입니다. 11절은 이런 사실을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고 첨언합니다. 특별히 ‘다시 예언해야 한다’는 말씀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계 10장의 삽입환상이 앞의 나팔 재앙, 특별히 나팔 재앙의 결과 사람들의 반응을 기술하고 있는 계 9: 20-21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음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다시 말해 계 9:20-21은 나팔 재앙에 죽지 않고 살아남은 자들이 회개는 고사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각종 우상숭배와 음행과 불법을 자행하는 일에 몰두했다고 고발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심판의 성격은 형벌과 멸망 자체가 주된 목적이 아닙니다. 심판을 통해 회개를 촉구하시며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의입니다(벧후 3:10). 오늘도 세상을 은혜가운데 보존하시는 이유가 이런 사실과 무관치 않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무엇으로 강퍅한 이들의 마음을 돌이켜 회개시킬 수 있단 말인가요. 이런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주어진 내용이 다름 아닌 10장과 11장의 삽입환상의 주된 목적입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통해 요한에게 심판과 구원의 메시지가 담긴 펴 놓인 작은 책을 먹게 하심으로 복음전파를 통한 회개의 촉구를 감당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나팔 재앙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회개치 않는 세상을 향해 은혜의 때를 마감치 않으시고, 요한으로 하여금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사명을 부여받게 한 것과 관련해 ‘다시 예언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은 회개를 촉구시키기 위한 요한의 고난의 선지적 사명의 고취를 강력히 시사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이 받은 ”네가 많은 나라와 백성과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에언하여야 하리란“ 말씀은 자연스럽게 11장으로 연계돼 교회를 상징하는 두 증인의 순교적 복음사역을 통해 보다 구체화될 것입니다.

  Ⅲ. 결론  

  8-9장에 소개된 나팔 재앙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결코 회개하지 않습니다. 보다 적극적으로 우상숭배와 패역한 범죄행위에 몰두합니다. 물리적이고 제도적인 장치로는 결코 인간의 죄성을 근절시킬 수 없다는 사실이 확인된 셈입니다(계 9:20-21, 창 8:21). 그렇다면 무엇으로 세상을 회개시킬 수 있단 말인가요. 계 10장과 11:1-14은 이런 사실에 분명한 해답을 제시해 줍니다. 그것은 복음전파의 방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10장의 요한을 통해서는 복음의 양면성인 구원과 심판의 내용을 작은 책을 먹음으로 ‘입에는 달고 배에는 쓰다’는 상반된 상징적인 표현을 통해 해명합니다. 

  11장은 10의 주제를 발전시켜 두 증인의 상징을 통한 교회의 복음사명을 보다 구체화시켜 기술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기대했던 대로 사람들은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회개하면서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계 11:13). 이런 상호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요한에게 주신 복음전파를 위한 선지적 사명은 동시에 교회공동체의 사명과 동일시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11장 두 증인의 삽입환상을 통한 교회의 선지적 사명은 요한의 복음사역이 보다 발전된 내용인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10장과 11장의 삽입환상의 본의는 성격상 동일한 내용으로, 전자는 복음의 이중적 성격인 구원과 심판을 암시하고, 후자는 교회를 통한 복음사역의 구속사적 실상을 다양한 상징적 기법을 통해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결국 고난과 핍박과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교회의 선지적 복음전파는 마침내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를 촉구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효과적으로 기능을 발휘하기에 이릅니다(계 11:11). 이런 관점에서 10장과 11장의 삽입환상은 8-9장의 나팔 재앙에도 불구하고 회개치 않는 남은 자(9:20-21)들을 회개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교회의 선지적 사명을 통한 복음전파에 집중될 수밖에 없음을 강력히 시사해 줍니다. 현대교회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다양한 방도를 통해 말씀을 전파해야 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딤후 4:2).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전도의 미련한 방식을 통해서만 어제나 오늘이나 앞으로도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지속될 것이기 때문입니다(고전 1:21, 2:4-5). 



      

           



  



  
출처 : remnant7000
글쓴이 : sky blue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