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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2

[스크랩] 요한계시록 10 강

제 11 장
두 증인과 일곱 번째 나팔재앙 
(계 11:1-19)

  Ⅰ. 도입

  계시록 11장은 10장과 더불어 제 2의 삽입환상 군(群)을 이루면서 요한의 복음증거 사명(10:11)을 보다 구체화시키고 발전시킨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계 9:20-21의 문맥에서 암시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회개의 당위성과 필연성을 교회의 선지적 복음증거사역을 통해 가능하다는 사실을 두 증인에 의한 11장의 삽입환상을 통해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해 11장은 힘 센 천사가 요한에게 작은 책을 먹으라고 권하면서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해야 하리라”(계 10:11)고 명령한 복음사명을 실제적으로 수행하는 내용이란 사실입니다.    

  10장에서 요한은 하늘에서 내려 온 힘 센 천사로부터 ‘펴 놓인 작은 책’을 받아먹음으로 선지적 복음증거 사역에 대한 증인의 사명을 부여받습니다. 증인의 사역은 펴 놓인 작은 책으로 표상된 복음의 성격상 두 가지 특성을 지닙니다. 구원의 확신으로 말미암는 기쁨과 감격이 있는가 하면, 선지적 사명을 감당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세상으로부터 받는 온갖 핍박과 환난 및 죽음까지도 불사해야 하며, 나아가 불신자들에 대한 정죄 선언과 이에 따른 심판과 지옥형벌을 선포하는 데서 오는 심적 고통과 아픔 및 안타까움이 수반되기 마련입니다. 계 10장은 이런 복음의 특징을 ‘입에는 꿀같이 달지만 배에는 쓰다’는 상징적 표현을 통해 기술합니다. 

  이상의 논증을 통해 10장에 언급된 요한의 선지적 복음사역은 자연히 11장의 두 증인에 의한 교회의 복음증거 사역으로 발전되고 확대되며 심화되기에 이릅니다. 이는 교회의 복음증거 사역을 통해서만 진정한 의미의 회개의 역사와 이로 인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음을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실제로 11장의 두 증인의 사역의 결과 하나님의 심판을 피한 남은 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되었다고 기술합니다(계 11:13). 두 증인의 상징을 통해 선포되는 교회사역의 실상을 살펴보겠습니다.     

  Ⅱ. 전개

  11장은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시면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성전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할 것을 명하시는 환상으로 시작됩니다(1절). 그러나 성전 밖 마당은 척량치 말 것을 제한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이방인에게 마흔 두 달 동안 내주었은즉 임의대로 짓밟게 될 것이란 말씀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문맥 속에서 이방인에 의해 짓밟히는 마흔 두 달의 기간은 동시에 두 증인에 의한 일천 이백 육십일 동안의 증거사역 기간과 중복되는 기간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는 한편에서 교회에 의한 복음이 전파되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이에 대응하는 핍박과 환난이 동시에 주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시사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해야 할 대목은 11장의 두 증인에 의한 증거사역의 성격은 10장의 요한에게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해야 하리라”말씀의 연속선상에서 주어진 명령이란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요한에게 펴 놓인 작은 책을 통해 ‘세계 만민에게 다시 예언해야 할 것’을 명한 10:11의 말씀은, 이제 11:3의 ‘두 증인에 의해 일천 이백 육십 일을 예언하는 것’으로 발전되고 구체화된다는 얘깁니다. 

  1. 성전 안을 척량하라(1-2절)

  10장에서 ‘펴 놓인 작은 책’을 취할 것을 명한 하나님께서(8절) 이번에는 요한에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십니다(11:1상). 본 절에서 갈대란 물건이나 건물을 재는 도구로 ‘길고 곧은 장대’를 가리킵니다(호크마종합주석, 1993, 375). 하나님께서는 갈대를 가지고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성전 밖 마당은 척량치 말로 그냥 놔두라고 명령하십니다. 왜냐하면 성전 밖 마당을 이방인에게 주어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게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구약적 배경 속에서 척량의 이미지는 재건이나 보존(겔 40:2-3, 렘 31:38-40, 슥 1:16, 2:1-5) 및 파괴와 멸망(삼하 8:2, 왕하 21:13, 사 28:17, 34:11, 암 7:7-9) 등의 상반된 의미를 동시에 가집니다. 본문의 성전척량 환상은 전자의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계 21:15-17).  

  계시록 본문의 성전척량에 관한 환상은 에스겔 40-48장에 소개되는 성전척량 사건을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특별히 겔 40:2-3은 ‘척량하는 갈대’로 성전을 척량할 것을 기술합니다. 물론 에스겔서에서의 성전척량의 의미는 성전의 확실한 건축과 우상숭배로부터의 지속적인 보호와 관리를 강조합니다(이필찬, 2006, 473). 그러나 척량의 이미지는 동일한 사상을 공유합니다. 곧 하나님의 철저한 보호와 안전과 구원 및 회복에 관한 보장 말입니다.  

  요한이 척량해야 할 대상은 세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입니다. 이들 세 요소들에게 각각의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구속사의 점진적인 진행이란 관점에서 성전의 실체인 신약의 교회공동체를 총체적으로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 줄 압니다(고전 3:16, 6:19, 고후 6:16, 엡 2:21). 따라서 본문의 성전척량의 의미는 ‘성전 밖 마당의 짓밟힘’(2절하)과 대응되는 내용으로, 곧 하나님의 통치와 보호와 인도 하에 있는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절대 안전을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통치와 보호와 인도란 성도들이 세상에 가해지는 각종 재앙과 환난 및 핍박과 고난으로부터 자유하다거나 전혀 무관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도들도 세상 가운데서 불신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자들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확신과 정절을 통해 고난과 핍박과 심지어 죽음까지도 불사(不辭)하면서, 모든 것을 합력해 선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섭리의 손길에 자신들의 삶을 철저히 의탁하며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계 7:14, 14:4-5). 이들의 구원은 신적 언약의 신실성 안에서 영원히 보장될 것입니다(롬 8:35-39).          

  반면에 2절에서 성전 밖 마당은 척량에서 제외됩니다. 이방인에게 주어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도록 허락하십니다. 이방인은 불신자들을 포함한 사단에 종속된 자들을 총체적으로 가리킵니다(18절). 거룩한 성은 구약적 배경에서 이스라엘의 도성인 예루살렘을 가리키나 계시록에서는 예루살렘 성의 이미지를 종말적으로 완성된 신약의 교회공동체를 상징적으로 묘사하는 데 사용합니다(계 21:2, 10, 22:19). 거룩한 성이 마흔 두 달 동안 이방인들에 의해 핍박과 박해를 받도록 허락하신다는 설명은 문자적으로 42개월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다분히 상징적인 기간입니다. 계시록에서 마흔 두 달의 기간은 단 7장(25절)의 반영으로 계시록에서 일천 이백 육십 일(계 11:3, 12:6),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계 12:14) 등과 동일한 기간을 의미합니다. 다니엘서에서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는 속성상 적그리스도를 표상한다는 희랍의 장군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성소와 유대인을 핍박하는 기간을 가리킵니다(호크마종합주석, 1993, 375). 다니엘서에서 삼년 반(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이 의미하는 기간은 종말적 기간으로 이 기간이 지나면 최후의 종말이 도래하게 됩니다. 요한은 이처럼 다니엘서에 나타난 종말적 기간을 계시록에 적용시키면서 성전 밖 마당이 이방인에 의해 마흔 두 달 동안 짓밟히게 될 것이라고 기술합니다. 이는 교회가 지상에 존재하는 초림과 재림사이의 기간으로 교회가 외적으로 고난 받는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따라서 척량한 ‘성전 안’이란 표현은 하나님에 의해 철저하게 보호받는 교회공동체의 내적인 상태를 가리키며, 이방인에게 내어 준 바 된 ‘성전 밖’은 고난 받는 교회의 외적인 모습을 상징적으로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이필찬, 477). 이처럼 교회가 겪게 되는 종말적 고난이 다니엘서에서 말하는 삼년 반 기간의 박해적 특성과 맥을 같이 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결국 계 11:1-2에서 성전과 거룩한 성으로 묘사된 신약의 교회공동체는 내적으로는 하나님의 절대 보호와 구원의 안전이 보장됩니다(1절). 그러나 외적으로는 사단적 세력들과 밀접하게 연계된 불신자들에 의해 고난과 핍박을 감수해야 하는 이중적인 정체성을 띠게 됩니다. 이런 사실이 2-3절에 언급된 이방인에 의한 마흔 두 달 동안의 핍박과 두 증인에 의한 일천 이백 육십일 간의 예언으로 대비돼 기술됩니다. 따라서 교회의 이중적 특징은 3절 이후부터 기술되고 있는 두 증인에 의한 교회의 복음사역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됩니다. 이처럼 교회는 복음으로 말미암는 증인사역을 감당하는 동안 핍박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담보할 정도의 극한 박해와 핍박 속에서도 교회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인도와 보호로 궁극적인 구원과 승리의 안식을 보장받게 된다는 것이 1-2절이 강조하는 중심 사상입니다. 

  2. 두 증인에 의한 교회의 복음사역(3-14절)

  계 10:11을 통해 요한에게 주신 교회의 선지적 사명은 본 절의 두 증인에 의해 구체화됩니다. 다시 말해 10장에서 요한에 의해 대표되는 교회의 증거사역이 본격화 될 때, ‘성전 안과 밖’(11:1-2)으로 묘사된 교회의 이중적 사역의 정체성이 어떤 모습으로 전개되는 지를 비유와 상징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내용이 11장의 삽입환상의 핵심 사상인 셈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두 증인의 사역은 교회의 선지적 복음사명을 상징적으로 묘사합니다.    

  3절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두 증인에게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일 동안 예언하는 권세를 주십니다. 이는 두 증인에 의한 예언의 권세 곧 복음전파의 사역이 철저하게 하나님에 의해 주도적으로 관장될 것임을 암시합니다. 어떤 외부적인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결코 포기되거나 중단될 수 없음에 대한 강력한 시사입니다. 특별히 두 증인이 받은 예언 사명은 10:11에서 요한이 받은 사명과 동질성을 띱니다. 이는 두 증인의 사역이 교회로 대표되는 요한의 선지적 사명을 구체적으로 계승하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그런 의미에서 10장과 11장은 내용 전개상 밀접하게 연관돼 있으면서 ‘요한에 의한 교회의 사명’과 ‘두 증인에 의한 교회의 사역’을 의무와 실행이라는 불가분의 연속적인 관점에서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본 절에서 두 증인이 굵은 베옷을 입었다는 것은 이들의 예언 사역의 주된 목적이 회개를 촉구하는 데 집중돼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런 사실은 계 9: 20-21에서 확인했듯이 회개의 역사는 심판과 재앙이라는 물리적인 방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교회의 선지적 사명 감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계 10-11장에 위치한 삽입환상의 의도가 이런 사실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습니다. 두 증인이 입고 있는 베옷은 구약적 배경에서 죄와 심판과 국가적 위기와 관련해 상하고 통회하는 심정으로 회개하는 내용과 깊이 관련돼 있습니다(욜 1:8, 암 8:10, 욘 3:5-9, 에 4:1-3). 이는 두 증인의 사명이 복음전파를 통해 회개를 촉구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 구원의 은혜를 덧입게 하는 일과 깊이 연관돼 있음을 시사해 줍니다(10:20-21, 11:13하).

두 증인의 정체성

  그렇다면 두 증인의 정체와 사역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먼저 두 증인은 하나님께로부터 예언의 권세를 부여받습니다(3절상). 이는 두 증인의 사역이 하나님에 의해 주권적으로 관장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두 증인의 사역의 주체가 두 증인이 아니라 하나님이란 사실입니다. 이들은 단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시는 데 도구로 선용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사실은 성도의 신앙생활이나 교회생활, 그리고 목회적 활동 전반에 걸쳐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성도의 성도됨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산물일 뿐입니다(고전 15:10). 4절에서 두 증인의 정체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라고 설명합니다. ‘이 땅의 주 앞에’란 표현은 온 세상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소유를 묘사합니다(호크마 종합주석, 376). 다시 말해 이들의 정체성은 하나님과 불가분의 관계성을 맺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하신 목적을 위해 친히 보냄을 받은 자들이란 사실입니다(마 28:18-20, 막 16:15-16). 이들 두 증인의 주된 사명이 예언사역인 점을 감안할 때(3절), 이는 계 10:11에서 요한에게 부과된 교회의 선지적 예언사명의 연장선상에서 해석돼야 합니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 두 증인의 정체는 요한을 통한 교회의 선지적 사명을 두 증인의 사역을 통해 구체화시킨 내용으로 곧 교회를 상징적으로 비유하고 있음을 넉넉히 추정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본 절에서 두 증인을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라고 밝히고 있는 것은 스가랴서의 환상을 반영합니다(슥 4:1-14). 

  먼저 촛대의 의미는 이미 계시록 초반부(1:12, 20, 2:1)에서 일곱 교회를 상징하는 일곱 촛대로 설명하고 있음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이처럼 일곱 촛대가 일곱 교회를 상징한다면 두 촛대 역시 두 교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일곱’이라는 숫자가 완전함과 충만함을 상징하는 숫자로 모든 교회를 총칭하는 의미를 띠고 있다면, ‘둘’이라는 숫자는 교회의 선지적 사명 곧 증인의 증거사역(신 17:6, 19:15, 마 18:16, 딤전 5:19, 히 10:28)의 의미를 나타낸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두 증인 또한 교회공동체 전체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함의하면서 교회의 복음증거사역을 총체적으로 가리키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두 증인은 스가랴서에서 두 감람나무로 비유합니다. 슥 4:3에서 환상을 통해 보게 된 등대 곁에 두 감람나무는 슥 4:14에서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 서 있는 기름 바른 자 둘’이라고 해석합니다. 이 둘은 당시 바벨론 포로로부터 귀환한 이스라엘의 과도기적 상황 속에서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총독(왕) 스룹바벨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호크마 종합주석, 376/이필찬, 483/요한계시록 파노라마, 유도순, 206). 그러나 사실상 이들 두 사람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자들로서 실상은 이스라엘 전체를 상징적으로 가리킵니다. 이처럼 어린양의 보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 곧 교회공동체를 일컬어 계시록에서는 ‘왕 같은 제사장’(20:4-6, 5:10)들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슥 4:14상에서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 섰는’이란 표현은 계 11:4상에서 ‘이 땅의 주 앞에 섰는’이란 묘사와 문자적 병행을 이루고 있음으로 상기 두 본문의 관련성은 확고부동하게 확인됩니다. 따라서 스가랴서의 배경에서 당시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이 ‘온 세상의 주님’을 전심으로 섬김으로 파괴되었던 솔로몬 성전의 재건축 사역을 충실하게 감당했듯이, 계시록 11장의 두 증인도 ‘이 땅의 주님’을 신실히 섬김으로 교회의 선지적 복음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도록 부름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상의 논증에서 독자의 관심을 끄는 대목이 있습니다. 두 증인을 상징하는 두 감람나무가 스가랴서 4장을 반영하고 있듯이, 계 4:5과 5:6에서 성령과 관련돼 언급된 ‘일곱 영’ 또한 동일하게 슥 4장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 두 증인과 성령의 불가분의 관계성을 추적할 수 있습니다. 곧 스가랴 4장에서 오직 ‘여호와의 신’의 도움으로 당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이 주도했던 성전건축이 가능할 수 있었듯이, 계시록에서 ‘일곱 영’(4:5, 5:6)으로 일컫는 성령의 도움으로 두 증인을 상징하는 교회의 선지적 복음사역은 종말적 실효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이필찬, 483-484).         

두 증인에 대한 하나님의 적극적인 보호

  5절은 두 증인의 사역과 관련해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적극적인 보호와 안전을 설명합니다. 두 증인의 사역을 방해하거나 이들을 해치는 자를 불로 심판해 소멸시키겠다고 엄히 경고합니다. 본 절은 하나님의 신실한 선지자들을 보호하신 기사를 다루고 있는 왕하 1:10과, 선지자들의 예언의 말씀을 심판의 불로 묘사해 악한 자를 징벌하시겠다는 렘 5:14의 말씀을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두 증인의 복음사역은 철저히 보호받을 것이며, 두 증인의 입을 통해 선포되는 불과 같은 하나님의 대언의 말씀들은 원수들을 철저하게 파멸시키게 될 것입니다. 

두 증인의 사역의 특성

  6절의 내용은 두 증인의 사역의 성격이 구약의 엘리야 선지자(왕상 17-18장)와 모세의 사역(출 7-11장)의 특성을 적극 반영하고 있음을 시사해 줍니다. 엘리야의 사역을 반영한다는 관점은 두 증인이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예언을 하는 기간에 비오지 못하게 한다’는 설명을 통해 확인됩니다(6절상). 모세의 사역을 반영한다는 것은 ‘물을 변하여 피 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친다’는 기술을 통해 확인됩니다(6절하). 

  그렇다면 요한은 왜 엘리야와 모세의 사역의 특성을 빌려서 두 증인의 사역을 설명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는 다른 무엇에 앞서 엘리야 선지자와 모세가 처해 있었던 당시 영적인 시대적 상황과, 두 증인으로 비유된 신약시대의 교회가 처한 영적 상황을 통해 유사성 내지는 동질성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해 과거 엘리야와 모세가 직면했었던 영적 싸움을 오늘날 교회 또한 동일한 관점과 상황 하에서 수행해야 한다는 필연성 때문입니다. 당시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역사상 최악의 영적 암매와 불법의 성행 및 우상숭배의 만연 속에서 하나님의 신실한 선지자로서 모세율법에 기초한 여호와 신앙의 회복과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위해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전파하는 일에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고군분투(孤軍奮鬪)했습니다. 모세 또한 애굽의 바로 왕의 통치 하에서 고역(苦役) 중에 종살이 하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 담대하게 맞서 영적 싸움을 수행했던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요 선지자였던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대리자의 신분으로 애굽의 바로 왕은 사단의 대리자의 신분으로 대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두 증인이 선지적 복음사역을 감당해야 할 ‘일천 이백 육십일’ 동안의 기간과 영적 상태는 엘리야와 모세의 사역에 함의된 영적 상태와 기간과 내용상 동질성을 띤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두 증인에 의한 선지적 사역 기간인 일천 이백 육십일은 엘리야의 사역 기간 동안 비오지 않음으로 기근재앙이 임했던 삼년 반(삼년 육개월, 약 5:17, 왕상 17:1, 18:1) 기간과 내용상 동일기간으로 추정됩니다. 따라서 엘리야의 예언으로 임했던 삼년 반의 기근은 당시 아합의 통치 하에 이스라엘의 불의와 불법 및 우상숭배에 따른 하나님의 적극적인 심판의 성격을 띱니다. 이때의 삼년 반이란 심판 기간의 용례(用例)가 발전돼, 다니엘서에서는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의 묵시적인 최후의 종말적 심판의 기간으로(단 12:7), 계시록에서는 두 증인에 의한 일천 이백 육십일 동안의 묵시적인 복은증거 기간으로(11:3), 이방인이 거룩한 성을 짓밟는 마흔 두 달 동안의 핍박과 박해의 기간으로(11:2), 여자 곧 교회가 광야에서 하나님의 의해 양육과 보호를 받는 일천 이백 육십일과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의 기간으로(12:6, 14절), 그리고 바다에서 나온 짐승(적그리스도)에 의해 마흔 두 달 동안 박해를 받는 기간 등과 본질상 동일시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상의 묵시적 기간은 사실상 예수님의 구속사역으로 도래한 종말적 기간으로 곧 신약의 교회시대 전체를 총체적으로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사단을 상징하고 있는 용이 결박돼 무저갱에 갇혀 있는 묵시적 천 년의 기간(계 20:1-3, 7절) 또한 사실상 위에 언급된 삼년 반이란 원리의 확대 적용이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무저갱에 갇혀있는 사단의 완전결박(20:1-3)과 최후의 멸망을 위한 일시적 석방(20:7-10) 사이의 기간을 시사하고 있는 천년의 기간(20:4-6)은, 문자적 천년이라기보다는 묵시적 기간으로 보는 것이 논리적 정당성을 뒷받침 해 줍니다. 소위 무천년설(Amillennialism)이란 관점이 이런 논리성에 근거를 둡니다. 다시 말해 천년의 묵시적 기간은 사단이 무저갱에 완전결박당한 기간인 반면, 동시에 교회가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으로 하늘과 땅에서 왕 노릇하는 교회시대의 전(全)기간이기도 하다는 견해입니다(계 20:4-6, 5:10, 벧전 2:9).   

  이상의 논증에 근거해 하나님께서는 두 증인을 통해 거룩한 성인 교회를 핍박하고 박해하는 흑암의 세력들과 대항해 싸워야하는 교회에게 엘리야와 모세에게 주셨던 영적 권세와 능력을 주셔서 어떤 경우에도 실족치 않고 넉넉히 이길 수 있도록 도우시겠다는 적극적인 의지를 표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두 증인을 비유하고 있는 교회의 선지적 사명과 사역의 실질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약시대의 교회는 심각한 영적 암매와 흑암의 세력에 직면해 생명의 위험을 불사하고 대처했었던 과거 엘리야와 모세의 심령을 소유한 자답게 존재하면서 적극적으로 선지적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두 증인의 사역과 관련해 과거 엘리야와 모세와 같은 선지적 인물의 재출현을 문자적으로 기대하는 것은 본 사건의 핵심을 크게 벗어나는 자의적 해석일 뿐입니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세례 요한의 출현을 가리켜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온 자’(눅 1:17, 막 11:14)로 묘사하고 있음이 이런 사실을 구체적으로 뒷받침 해 줍니다.     

두 증인의 사역의 절정과 결과

  7-13절은 두 증인의 사역의 절정과 결과를 기술합니다. 먼저 7절은 두 증인이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짐승이 올라와 두 증인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고 저들을 이기며 마침내 두 증인을 죽인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런 표현은 물리적 전쟁 상황을 실제로 묘사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다분히 회화(繪畵)적이며 상징적입니다. 이런 사실은 본문의 내용이 담고 있는 사건의 배경이 계 20:1-3에 기술된 사단의 무저갱 감금과 일시적 놓임 및 최후의 멸망 기사(7-10절)에 기초하고 있음을 넉넉히 추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보다 심도 있게 살펴봅니다. ‘두 증인이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짐승이 올라온다’고 지적합니다. 두 증인이 증거를 마칠 때란 앞서 3절에서 1260일 동안 예언의 권세를 받은 교회의 복음 증거 기간이 모두 지났음을 의미하며, 동시에 이방인들에 의해 짓밟히게 될 42달의 기간(2절)이 다 끝났음을 시사합니다(13:5).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보호와 양육의 손길(12:6, 14, 마 28:20하)이 짐승과 흑암의 세력들의 온갖 박해와 핍박을 넉넉히 이기며 극복하게 하심으로 안연히 보존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두 증인의 증거가 마칠 때란 총체적인 관점에서 교회의 선지적 복음사역의 기간이 다 지나서 이제 곧 주님의 재림의 때가 임박해 왔음을 우회적으로 시사해 줍니다. 그렇다면 7절 본문에서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온 짐승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계시록 전반에 걸쳐 무저갱이란 사단과 그의 추종자들이 불못에 영원히 던져지기 전 한시적으로 감금당해 있는 감옥과 같은 곳으로 묘사합니다(20:1-3, 17:8, 9:2, 눅 8:30-31). 본문은 두 증인이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짐승이 올라온다고 기술합니다. 이로 보건대 두 증인의 증거사역 기간인 1260일 동안은 짐승이 무저갱에 갇혀 있었다는 얘기가 성립됩니다. 따라서 본문의 짐승은 42달 동안 성도들을 핍박하기 위해 용의 권세를 위임받은(13:2) 바다로부터 올라온 13:1의 짐승과는 차별화되는 대상입니다. 왜냐하면 계시록에서 무저갱에 갇혀 있는 짐승의 정체는 20:1-3에서 용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으로 간주하며, 일천년 동안 감금당했다가 때가 찰 때 잠시 놓임을 받고 전쟁을 일으키며 성도를 미혹하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7-10절). 따라서 7절에서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온 짐승의 정체는 다름 아닌 20:1-3에서 용으로 묘사된 마귀요 사단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의 짐승이 ‘두 증인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고 두 증인을 이기고 저희를 죽인다’는 표현은 실제 상황이 아닙니다. 본질상 계 20:7-10에 근거해 사단과 교회 간에 발발하게 될 종말론적인 최후의 영적 전쟁을 물리적인 서술을 통해 회화적이고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본문의 설명이 이렇다고 해서 교회와 사단의 세력과의 영적 전쟁이 최후의 종말적 전쟁으로만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11:2에서 살펴봤듯이 42달 동안 교회는 흑암의 세력들 앞에 노출된 상태로 놓여있기에 박해와 핍박은 불가피한 상태입니다(13:5). 이상의 논증에서 교회의 복음사역 기간인 1260일이나 이방인으로 묘사된 흑암의 세력들에 의한 42달 동안의 핍박과 박해 기간은 교회의 이중적 특성(보호와 방임, 승리와 패배, 안전과 고난, 이필찬, 490)을 함의하는 것으로, 본질상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를 가리키는 동일한 기간으로 해석됩니다.

  8-10에서 두 증인의 선지적 예언사역으로 인한 핍박과 고난의 모습이 계속해서 소개됩니다. 8절은 짐승에 의해 죽임을 당한 두 증인의 시체가 큰 성의 길에 버려져 있음을 기술합니다. 그런데 이 큰 성은 영적으로 소돔과 애굽으로 일컬으며 동시에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루살렘 성으로 묘사됩니다. 다시 말해 두 증인이 죽임을 당해 버려진 큰 성은 영적으로 소돔과 애굽과 예루살렘으로 동일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영적이란 표현은 두 증인의 복음 사역의 현장인 큰 성이 상징적으로 소돔과 애굽 및 예루살렘을 가리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상의 세 도시가 동일시 될 수 있을까요. 구속사적 관점에서 세 도시가 함의하고 있는 영적 요소와 내적 정체성의 일관성 때문입니다. 즉 소돔은 고모라와 더불어 극한 음란으로 인한 성적 타락과 제반 죄의 관영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이 불가피했던 악의 도성이었습니다(창 18:20-21, 19:4-11). 애굽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노예로 삼아 핍박하고 학대했으며 종살이 시켰던 사단적인 도시로 각종 우상숭배가 만연한 도시였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루살렘 또한 예수님을 애매히 정죄해 십자가에 못 박은 반역과 배도로 가득 찬 도시였습니다. 이처럼 소돔과 애굽과 예루살렘은 구속사의 점진적인 진행과 관련해 부정적인 관점에서 영적으로 일관성과 통일성을 띠고 있으며 이런 결과로 상호간 동일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적으로 소돔과 애굽과 예루살렘으로 비유되는 큰 성(8절상)이란 본질상 시․공간을 초월해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역하며 그의 백성들을 핍박함으로 각종 범죄와 우상숭배로 가득 찬 세상을 총체적으로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요일 2:15-17). 이런 관점에서 계시록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짐승 곧 사단이 왕 노릇하고 있는 세상 권력과 온갖 세속주의를 총칭해 ‘큰 성 바벨론’으로 비유해 묘사합니다(계 17장). 그런 의미에서 큰 성 바벨론의 멸망(계 18:1-2)은 세상의 권세와 세속주의의 미혹을 통해 역사했던 사단세력의 총체적인 멸망을 상징적으로 가리킵니다. 계시록은 이런 사실에 근거해 순차적으로 19장에서 두 짐승의 멸망을(19-21절), 20장에서는 용 곧 사단의 멸망과(7-10절) 불신자들의 멸망을(11-15절) 연속적으로 기술해 줍니다. 

  계시록에서 바벨론의 용례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역하는 사단의 적극적인 활동과 사상을 대변하는 것은 다분히 구약적인 배경에 근거합니다. 곧 바벨탑 반역사건(창 11:4)과 이 사건의 기원인 선악과 미혹사건(창 3:1-4)에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는 다름 아닌 인본주의의 극치로서 뱀의 미혹의 핵심은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사람의 영광을 추구하게 함으로 결과적으로 인간지존사상의 구현을 고취시키려는 데 집중된다고 하겠습니다(창 3:5). 이런 계략이 성취될 때, 그것은 천상의 보좌 찬탈에 실패했던 사단이 하나님께 재도전하려는 끊임없는 야욕이 마침내 성공을 거두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단의 계책은 아담과 하와의 미혹으로 인해 일시적이나마 성공하는 것 같았습니다. 사단의 영광 또한 구현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범죄 한 아담과 하와에게 대속의 원리가 담긴 ‘여자의 후손언약’(창 3:15)을 맺어 주심으로 사단의 간교한 책략을 본질상 무효화시킵니다. 반면에 사단이 종말론적인 최후의 멸망에 처해질 때까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간에는 끊임없는 반목과 대립 및 적대적인 투쟁이 지속될 것을 예언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계시록 전반에 걸쳐서 발견되는 사단과 그의 추종세력들에 의한 교회와의 반목과 대립 및 온갖 박해와 핍박의 기원은 사실상 창 3:15에 의한 여자의 후손언약의 지속적인 성취의 일환인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때문에 그 결국은 여자의 후손언약에 예언된 대로 여자의 후손에 의해 뱀의 머리가  치명상을 입게 됨으로 여자의 후손의 최종 승리로 마감될 것입니다. 이런 사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성취로 이미 역사 속에서 예비적 성취를 보았고 재림으로 최종 완성 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신묘막측한 구속의 경륜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며 모든 영광과 존귀를 하나님께만 돌리게 하기 위함입니다(엡 1:6, 12, 14, 2:8-9, 롬 11:32). 하나님의 자기영광 구현을 위해서 말입니다. 

  여기서 잠시 성경의 계시역사의 진전 속에서 바벨사상에 담긴 사단의 자기영광 구현을 위한 계략의 실체와 전모를 살펴봅니다. 먼저 천상의 보좌 찬탈 계획에 실패한 사단은 세상으로 쫓겨나(유 1:6, 벧후 2:4) 피조물의 면류관인 인간을 표적삼아 하나님께 재도전하는 방식을 취합니다(창 3:1-4). 에덴동산에서부터 아담과 하와의 미혹 속에 숨겨졌던 사단의 자기영광 구현을 위한 음흉한 바벨사상(창 3:5)의 야욕은 역사 속에서 바벨탑 축조사건을 통해 사단의 왕국을 구축하려는 범세계적인 대규모 음모로 확장돼 재시도 됩니다(창 11:4). 하나님께서는 당시 인간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심으로 바벨탑 축조계획을 무산시킵니다(창 11:7-9). 대신 여자의 후손언약에 근거한 구속사역을 통해 당초 신정왕국을 건설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창 1:28)은 아브라함에 이르러 명시적으로 구체화되는 가운데 그의 후손들로 말미암는 역사적 이스라엘의 수립을 통해 마침내 예비적 성취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사단은 이를 방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신정왕국인 이스라엘을 불의와 불법과 불순종 및 각종 우상숭배를 통해 끊임없이 미혹하는 가운데 마침내 바벨론 제국을 통해 멸망시킵니다. 이런 관점에서 바벨론은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과의 관계 속에 애굽처럼 사단의 세력으로 대변됩니다. 

  성경역사 속에서 바벨론 제국의 출현은 그 건국의 지리적 위치부터가 심상치 않습니다. 다니엘서는 바벨론을 상징하는 신전이 시날 땅에 위치해 있음을 밝혀줍니다(단 1:1-2). 시날 평지는 다름 아닌 바벨탑을 축조하던 바로 그 장소입니다(창 11:1-2). 이는 바벨론 제국의 건설이 바벨탑 축조사건과 본질상 깊이 연루돼 있음을 강력히 시사해 줍니다. 따라서 바벨론의 건국 속에 담긴 이념과 사상은 내용적으로 바벨론 축조사건 속에 담긴 사상과 맥을 같이 하고 있음을 암시받습니다. 그것은 이미 살펴본 대로 하나님을 향한 적극적인 배역과 배도 및 투쟁 사상이요, 극한 교만에서 비롯된 인간의 영광구현과 이를 위한 지존사상의 고취에 다름 아닙니다. 다시 말해 바벨론 제국의 출현은 근본에서 바벨탑 사상을 계승함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역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대신하려는 교만의 극치를 반영하고 있다는 관점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바벨론의 멸망을 하나님의 보좌를 찬탈하려다 실패해 땅으로 내어 쫓긴 사단의 교만과 반역에 비유해 설명함으로 바벨론과 사단 사이에 내통하는 내적 동질성을 강력히 뒷받침 해 줍니다(사 14:3-14).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되었다는 사실은 보다 근원적으로 창 3:15에 약속된 여자의 후손언약의 관점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이처럼 성경의 계시역사(구속사) 속에서 하나님의 언약백성들은 부단히 사단의 세력과 충돌하며 적대적인 투쟁적 관계 속에 박해와 핍박을 받아왔으며 심지어 언약적 심판의 일환으로 멸망까지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했던 이스라엘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긍휼에 힙 입어 마침내 포로귀환을 통해 예루살렘으로 귀환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신정왕국의 회복이 아니었습니다. 특별히 선지자들의 새 언약 속에 보증된 다윗왕권의 회복이나 성전의 회복(겔 37:24-28) 및 성령의 내주하시는 역사로 말미암는 죄의 사면과 온전한 순종의 삶의 보장, 나아가 이로 말미암는 임마누엘의 신학의 완성 (겔 36:26-28, 렘 31:31-34, 사 53:5-6) 등이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선지자들의 새 언약 사상이 지향하는 내용들이 처음부터 역사적 이스라엘의 회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들의 새 언약 사상의 본의는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들로 구성된 참 이스라엘 곧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 안에서 구속함을 받은 교회공동체를 가리켰던 것입니다(갈 3:7, 16-17, 29절). 마태가 그의 복음서 서두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世系)라고 선언하는 의도가 이런 사실에 기초합니다(마 1:1). 이는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아브라함의 진정한 자손이며(갈 3:16-17, 행 3:25-26), 다윗의 진정한 아들이요 후손(눅 1:32)이란 사실의 강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동시에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의 실체이기도 합니다(마 12:42). 이처럼 마태는 구약의 언약적 구속사를 관통하는 계시적 통찰력을 가지고 과거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계시되었던 신정왕국의 정체성을 하나님 나라의 흥왕기(마 1:2-6)와 쇠퇴기(7-11) 및 회복기(12-17)로 구분하면서 회복의 기점을 예수 그리스도의 도래에 초점을 맞춰 기술합니다. 이는 역사적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의미하는 바가 구속사 진행에 있어서 모형적이며 예표적인 계시의 도구로 사용되었음을 시사합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실체로서 본격적인 신정왕국의 출현과 도래는 구약의 제반 모형적 계시의 실체이며 구약 언약의 총화로 기능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비로소 시작되었음을 강력히 증거 해 줍니다. 바벨론 사상의 배후 세력으로 지목되고 잇는 장본인인 마귀가 구약계시의 실체요 언약의 총화인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공격해 시험의 표적으로 삼는 배경이 이상의 구약적 배경의 연장선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언약에 약속된 두 후손 간의 지속적인 투쟁의 연장선상에서 참 이스라엘의 머리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해 넘어뜨림으로 구약의 구속사 진행 과정에서 연전연패했던 실패를 일거에 만회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첫 아담을 선악과 금령을 불순종으로 미혹했던 사건은 마지막 아담(둘째 아담)을 불순종으로 시험했던 사건과 내용적으로 동질성을 띱니다. 그러한 불순종의 요구는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한 자기 의와 자기 영광 구현을 부추기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는 또 다른 관점에서 바벨사상의 구현을 촉구하려는 저의와 일치되는 논증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구속사역의 성취로 인한 교회시대에, 사단의 치명적인 패배와 완전결박과 감금(계 20:1-3, 마 12:29, 창 3:15, 렘 31:22, 갈 4:4, 요 19:30) 하에서 마귀의 잔존 세력들의 활동은 어떤 방식으로 바벨사상을 유포하면서 만국과 성도를 미혹하는 것일까요. 계시록은 사단이 짐승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동일한 방식으로 역사한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13:1-3). 다시 말해 바다에서 나온 짐승(13:1)이 무저갱에 감금당한 짐승(11:7, 17:8, 20:1-3)의 대리인으로 권세를 위임받아 사단의 역사를 대행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바다짐승의 사역의 정체성은 무저갱에 갇힌 짐승(용=옛 뱀=마귀=사단, 계 20:1-2)의 사역과 본질상 다를 바가 없습니다. 동질성을 띱니다. 동일한 속성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현 교회시대에 사단을 대리한 짐승의 역사의 특성은 본질적으로 사단의 바벨사상을 계승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의미에서 바다짐승과 땅의 짐승에 의한 세속주의와 물질지상주의의 강력한 촉구와 시행(계 13장)은 근본에서 바벨사상과 맥을 같이 합니다. 세속주의의 본질은 세상의 풍속과 이념과 사상을 목표삼아 이를 생명의 도리처럼 붙들고 살아가는 데서 나오는 인간의 자기만족과 의와 영광 구현으로 표출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속주의는 바벨사상의 실체인 인본주의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표요 구체적인 실상이기도 합니다. 

  세속주의의 실상은 크게 세 가지 요소로 구분된다는 것이 사도 요한의 지적입니다(요일 2:16). 그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구성됩니다(요일 2:16). 이 세 요소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총체적 관점에서 자기 의와 자기 영광의 구현으로 귀착됩니다. 육신의 정욕은 타락한 본성과 관련된 내적 욕망을 가리킵니다. 외부적인 자극과 충동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죄성의 발로로부터 비롯된 탐욕적인 욕망의 표출을 의미합니다. 주로 생존을 위한 의식주의 문제와 깊이 관련돼 있게 마련입니다. 반면에 안목의 정욕은 외적 유혹으로 동기유발 된 내적 욕망의 발로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욕망의 동기부여가 외부적이 요소로 비롯된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오감을 통한 외부적 자극이 안목의 정욕이라는 총체적인 표현을 통해 동인(動因)으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안목의 정욕은 외부와의 차단된 환경 속에서는 그만큼에 비례해 죄성의 발로가 억제되는 여지가 없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보고․듣고․만지는 데서 동기유발 될 수 있는 직접적인 미혹으로부터 어느 정도 통제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생(what one has and does)의 자랑은 타락한 본성의 지배를 받고 있는 옛 사람 속에 현재적으로 소유하고 있거나, 행하고 있거나, 처해 있는 상황의 만족으로부터 오는 교만과 자긍과 과시욕을 총칭해 가리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생의 자랑은 일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의 의미를 총괄적으로 함의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상의 사실들을 고려할 때, 위의 세 요소들이 총체적으로 지향하는 세속적 사상의 실체는 자기 영광을 구현하는 것으로, 본질상 바벨사상 속에 담긴 인본주의 사상 곧 인간의 지존사상의 고취와 다를 바 없습니다. 

  따라서 구약의 계시사 속에서 하나님을 배도하고 대적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도전했던 바벨사상은 예수님의 구속사역의 성취로 이미 도래한 종말적 현 시대 속에서 극단의 세속주의와 인본주의 사상의 팽배와 만연을 통해 여전히 역사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런 사상이 종교의 옷을 입고 나타날 때에 자의적 숭배신앙의 모습을 띠고 다가오게 마련입니다. 자의적 숭배신앙의 정체성은 본질상 우상숭배와 동질성을 띠는 것으로 신앙을 인간의 행복과 성공 및 소원 성취를 위해 방편적으로 이용하는 이교도적 신앙관을 가리킵니다. 로마서 기자는 구원받은 성도의 참 된 예배와 신앙적 삶을 설명하면서 이 세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 것을 강력히 요구합니다. 대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며 살아 갈 것을 촉구합니다(롬 12:1-2). 본문에서 구원받은 영적 예배자의 삶의 실질은 다름 아닌 세상 풍조를 좇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시인 진리의 체계를 신앙과 삶의 유일한 표준과 규범으로 삼고 전인적으로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삶을 가리킵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는 의미가 이렇습니다(롬 12:1). 곧 본질을 추구하는 신앙태도 말입니다. 이는 거듭난 인격을 발휘해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는 지를 총체적인 계시관으로 통찰하고 해명해서 그것을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살아가는 전인적인 삶의 내용을 가리킵니다. 

  이런 식으로 현 시대 속에 만연된 세속주의와 인본주의의 사상이 계시록 속에서 구약의 바벨사상에 근거해 여전히 사단의 주된 권세와 미혹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계 13장, 17장). 그런 의미에서 세속주의와 인본주의 사상의 이면에는 바벨사상이 그렇듯이 하나님을 향한 배교와 우상숭배와 온갖 불순종의 요소들이 내포돼 있습니다. 계시록은 이런 바벨사상을 짐승을 타고 있는 음녀로 묘사함으로 이 둘 사이에 공존하는 내적 동질성을 강조합니다(17:4-5, 18절).      

 한편 위에서 언급한 세 도시(소돔/애굽/예루살렘)의 내적 동질성 및 영적 통일성과 관련해 유의할 것이 있습니다. 두 증인의 죽임과 관련해 요한은 특별히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루살렘을 지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8절하). 이런 저자의 표현은 예루살렘의 영적인 상태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걸어가셨던 핍박과 박해의 본을 두 증인으로 비유된 교회공동체가 동일하게 본받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된 교회가 지체로서 머리되신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벧전 4:12, 2:21).   

  9절은 백성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로 지칭된 이방인들이 두 증인의 시체를 장사하지 않고 사흘 반 동안 방치한 상태로 버려두었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실제상황이 아닙니다. 환상입니다. 상징적인 기술입니다. 곧 두 증인으로 비유된 교회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기간 동안 복음증거로 인해 경험하게 되는 불가피한 모욕과 수치와 적대적인 감정에 대한 묵시적인 표현입니다(왕상 21:24, 렘 8:1-2, 14:16, 삼상 17:43-47). 그래서 그 기간은 주님께서 무덤에 계셨던 사흘이 아니라 길거리에 방치된 삼일 반입니다. 어떤 면에서 주님보다 더한 모욕을 받는 셈입니다. 두 증인의 죽음과 방치는 교회의 증거사역과 이로 인한 선교기관으로서의 영향력이 주님의 재림이 가까울수록 현저하게 감소되며 제약을 받음을 의미합니다(11:7, 딤후 3:1-5, 4: 3-4). 여기서 삼일 반은 다니엘서에서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7:25, 12:7), 곧 종말적 섭리기간으로 작정된 ‘3.5’의 원리를 응용한 것으로, 두 증인에 의해 수행되는 복음증거 기간인 1260일과 병행적 관계를 이룹니다. 그렇다면 사흘 반과 1260일은 두 증인에게 어떤 의미와 성격을 띠는 것일까요. 이는 고난과 수치와 모독의 기간이며 동시에 영광과 환희와 희열의 기간임을 동시적으로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박해와 수치와 모욕으로 말미암는 고난의 기간은 짧은 반면에 영광의 기간은 길다(Short Cross, Long Glory) 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비교해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롬 8:18), 이 땅에서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과 감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고후 4:17). 보이는 세계는 잠간이고 보이지 않는 세계는 영원합니다(고후 4:18). 이런 사실을 믿음으로 확신할 수 있는 자라면, 전자보다 후자를 택하는 일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이처럼 교회의 미래는 사실상 영원히 안전하게 보장돼 있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마 28:20하, 롬 8:33-39). 삼위 하나님께서 협약하셔서 수립하신 창세 전 영원한 목적과 작정으로서 구속의 경륜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역사를 좇아 진행되는 것이기에 궁극적인 성취는 필연적입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계획을 무효화시킬 수 없습니다. 창조자의 주권이 이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교회의 종말론적 승리는 창세전부터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 속에서 이미 보증된 사항입니다.    

  10절은 땅에 거하는 자들이 왜 두 증인의 죽음을 방치한 채 오히려 즐거워하며 서로 간 예물까지 주고받는지를 기술합니다. 그것은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예언적 사역을 통해 회개를 촉구함으로 괴롭게 했는데, 이제 그들이 죽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본 절에서 ‘땅에 거하는 자들’이란 계시록에서 사단에게 종노릇하는 이방인들을 호칭하는 관용어적 표현입니다(3:10, 6:10, 8:13, 13:8). 따라서 이들의 정체성은 본질상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채 종말적인 최후의 심판(20:11-15)에서 불못에 들어갈 ‘죽은 자들’(11:18상)과 동일시되는 자들로 기술됩니다. 두 선지자가 이들을 괴롭게 했다는 것은 두 증인을 갑작스럽게 두 선지자로 바꿔서 표현하고 있는 사실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됩니다. 다시 말해 땅에 거하는 자들이 두 증인의 죽음을 쌍수를 들고 환영하며 서로 즐거워했던 이유는 이들의 복음증거 사역(11:3, 10:11)이 구약의 선지적 예언사역과 본질상 동질성을 띠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적 배경 속에서 선지자들의 예언사역이 갖는 공통적인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지적하고 책망함으로 회개를 촉구하고 심판을 경고하는 것으로 대변되곤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책망과 회개의 메시지를 들어야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이를 수용할 생각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는 여간 괴롭고 고통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급기야는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붙잡아 때리고 옥에 가두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이런 구약의 역사적 정황이 두 증인의 예언사역과 관련해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는 셈입니다. 오늘날 바른 교훈을 받지 않고,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며,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는 현상은 종말적 특징의 일환입니다(딤후 4:3-4). 이처럼 자기 사랑과 의와 영광 구현을 추구하는 개인주의의 팽배와 만연의 풍조가 하나님을 거부하며 복음을 혐오하는 반(反)기독교(anti-christianity) 문화를 조성하는 결정적인 동인으로 작용합니다. 게다가 급속도로 진전되는 첨단 과학문명과 의술 및 생명공학의 괄목할 만한 발달은 더 한층 인간의 능력을 과신하는 데서 오는 인간예찬과 인본주의를 부추기며 정당화시키는 원동력으로 기능하는 가운데, 급기야 신(神) 존재의 원천적인 부인과 종교 무용론까지 제기되는 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모름지기 종교란 인간의 나약성을 극복하기 위해 작위적으로 고안해 낸 일종의 정신적인 사상체계란 지적입니다. 이런 패역한 분위기 속에서 신의 존재와 능력과 역사를 믿고 신앙한다는 것은 무지와 무능의 소치(所致)요, 구시대적 발상으로 치부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방치된 두 증인의 시체를 목도하고 있는 사단세력의 추종자들은 복음을 거부한 채, 회개는커녕 적극적으로 이들의 죽음을 환영하며 축제의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9:20-21). 이런 광경은 어쩌면 교회의 세속화로 인해 대중들로부터 철저하게 외면과 불신을 당하고, 영적 무기력에 빠져 복음의 능력과 교회의 천상적 정체성을 상실한 채, 하나의 종교단체로 전락한 듯 한 현대교회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는 듯합니다. 

  11-12절에서 두 증인은 고난과 수치와 모욕의 절정에서 대반전(reverse)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삼일 반 후에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 죽은 두 증인이 부활합니다. 이어 하늘로부터 올라오라는 큰 음성을 듣고 두 증인은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갑니다. 본 환상은 에스겔서에서 골짜기의 마른 뼈로 상징되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생기를 받고 참 이스라엘로 거듭나는 사건을 반영합니다(겔 37:5. 10-12절). 이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 거듭난 생명의 수여를 가리킵니다. 이처럼 본 사건은 사단의 핍박과 박해로 인해 교회가 고난과 시련을 당해 거의 죽은 것과 방불하게 될지라도, 그것은 잠시 동안이요 교회의 생명은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관장되는 것이기에 교회의 종말론적 회복과 승리는 철저하게 보장된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이 또한 주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본을 좇는 교회의 영적 자취를 보여줍니다. 주님의 사역과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선지사역 간에 공존하는 불가분의 동질성의 문제 말입니다. 그렇다면 계시록이 이처럼 두 증인으로 비유된 교회의 선지적 복음사역의 증거 과정을 예수님의 본을 따르는 것으로 묘사하는 의도는 무엇일까요. 교회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된 천상적 생명공동체로서 본질상 한 몸으로 간주됩니다. 때문에 두 증인이 예수님의 생명에 연합된 하나님의 참 된 증인들이요, 이들의 증거 또한 참되다란 사실을 확증시키기 위함입니다(유도순, 211). 이런 이유로 교회는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죽은 자 같으나 산 자요, 멸망한 자 같으나 승리한 자로 살아가는 천상적 존재들입니다. 두 증인의 부활을 원수들도 구경한다(12절하)는 표현은 이처럼 교회의 종말적 최후 승리는 비밀이 아님을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역사적 사건으로 객관화되었듯이 교회의 종말적 승리 또한 역사적 사건으로 확증될 것입니다. 

  한편 13절은 두 증인이 부활승천 하는 것과 때를 맞춰 땅에서는 큰 지진으로 비유된 대규모 심판이 일어나게 되고, 이런 심판현상은 역설적으로 회개와 구원을 초래시키는 동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큰 지진으로 인한 심판현상의 결과 성의 십분의 일이 파괴됩니다. 죽은 사람이 칠천에 이릅니다. 그러나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면서 회개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본 절에서 지진으로 인해 무너진 성 십분의 일과, 죽임을 당한 칠천인의 표현은 역설적인 관점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갖습니다(사 6:13, 암 5:3/왕상 19:18, 롬 11:4-5). 남은 자가 아닌 죽은 자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를 띠고서 말입니다. 이는 7이라는 상징적인 숫자와 관련해 심판의 완전성을 시사하면서 동시에 복음의 무한한 능력을 강조해 줍니다. 즉 심판의 대상은 적고 구원의 대상은 많다는 계시록에서의 구원론의 신학적 경향성 말입니다(7:9). 7이란 숫자와 관련해 심판의 완전성을 시사하는 유사한 사건을 에스겔서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서 39장에는 회복된 이스라엘과 사단적 세력을 상징하는 곡과 마곡의 연합군과의 전쟁기사가 소개됩니다. 이때 패배한 연합군의 병기를 태우는데 칠년의 기간이 걸립니다(9절). 병사들을 장사지내는데 걸리는 기간이 일곱 달(11-12절)이 걸립니다. 본 사건에서도 칠이나 일곱이라는 숫자는 문자적 숫자가 아닙니다. 심판의 완전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상징적인 숫자입니다. 따라서 계시록 11:13에서 큰 지진으로 인해 죽은 자가 칠천이란 숫자의 의미도 심판의 완전성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숫자로 해석해야 합니다. 물론 큰 지진의 발생은 실제상황입니다. 성경 전반에 걸쳐서 지진은 심판에 대한 보편적인 현상으로 인용되기 때문입니다(계 6:12, 겔 38:19-20, 마 24:7).    

  반면 큰 지진으로 말미암는 심판재앙에 죽지 않고 살아남은 자들은 두려움에 떨며 회개하는 가운데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고 기술합니다(13절하). 본 절의 묘사는 다분히 9:20-21을 의식한 데서 나온 의도적인 해설입니다. 왜냐하면 10-11장의 삽입환상의 기록 의도는 9:20-21에 대한 반전을 교회의 복음사역을 통해 가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기술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11:13절에서 큰 지진으로부터 살아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다는 표현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사실 계시록 어디에서도 ‘땅에 속한 자들’로 호칭되는 사단에게 속한 자들이 회개했다는 사실이 전혀 발견되지 않습니다. 회개는커녕 오히려 적극적으로 불순종하며 대적했음을 고발합니다(9:20-21, 16:9, 11절). 이들은 본질상 사단에게 속한 자들로 생명책에서 제외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13:8, 17:8). 그런 의미에서 11:13에서 남은 자들이 하나님께 보여준 두려움과 회개와 영광 돌림은 예외적인 경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들 남은 자들의 돌변한 태도 변화 속에 담긴 본의는 무엇일까요. 이들의 변화는 회심과 구원까지도 보장받고 있는 것일까요. 왜 계시록은 이들의 회개와 영광 돌림의 기사를 기술하고 있는 것일까요. 사실 본 사건에 대한 의견은 분분합니다. 다양한 견해들로 인해 해석상의 통일성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이들의 변화를 참 된 회개와 구원으로까지 확대 해석합니다(호크마 종합주석, 378/이필찬 501/이순태, 189/유도순, ). 반면 W. 헨드릭슨 같은 신학자는 이들의 태도 변화를 회개와 무관한 일시적인 심정의 변화로 간주합니다. 극한 공포에 사로잡힌 심경의 변화 정도로 해석합니다(요한계시록, 1981, 158). 그 실례로 느부갓네살 왕의 일시적인 심경의 변화를 예로 듭니다. 그는 생존 시에 종종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과 존귀를 돌리곤 했습니다(단 2:47, 3;28, 4:1-3, 34, 37절). 그러나 그의 이런 긍정적인 행동이 참 된 회개로 인한 구원을 보장받게 되었다는 기사는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본 절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사실 이들이 진정으로 회개했느냐의 여부와, 이로 인해 이들이 구원을 받았느냐의 문제는 본 환상 속에서 사활이 걸릴 정도로 중요한 주제는 아닙니다. 계시록에서 본문의 기록 의도는 이들의 회개의 진위성 여부와 구원의 확신 여부를 확증하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두 증인의 증거사역을 통해 계시록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특별한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두 증인으로 비유된 교회공동체의 선지적 복음사역과 그로 인한 사람들의 반응을 소개함으로 교회의 존재 이유와 예언사역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바로 이런 사실로 인해 강도 높은 나팔 재앙에도 불구하고 전혀 회개치 않던 남은 무리들이(9:20-21), 두 증인에 의한 교회의 선지적 복음사역을 통해 마침내 회개에 이르게 된 사실을 독자들에게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11장의 삽입환상은 두 증인에 의한 교회의 선지적 사명을 기술하는 과정에서 외적으로는 고난과 핍박과 모욕과 수치가 불가피하지만(11:3-13) 내적으로는 하나님의 철저한 보호와 인도와 다스림을 통해 궁극적인 승리가 보장되고 있음을 증거해 줍니다(11:1-2). 아울러 이런 결과로 교회의 복음사역은 세상을 향해 심판을 경고하면서 동시에 회개를 촉구시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이중적인 성격을 띠고 나타나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오늘도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하나님의 교회를 세상에 존재케 하시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교회의 복음사역은 택하신 백성들로 하여금 거듭나게 함으로 죄의 인식을 통해 회개를 촉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성취된 구원의 도리를 깨닫고 이를 믿음으로 수납하게 함으로 의롭게 되고 구원의 은혜를 덧입게 합니다. 이들이 주님의 몸 된 교회에 지체로 더해짐으로 언약적 생명공동체를 이룹니다. 교회가 공동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통치를 적극 받아 누리는 삶을 통해 천국의 삶을 세상 속에서 선취적으로 경험하며 살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사단에 속한 세상과의 불가피한 관계를 통해 부단히 복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게 됩니다. 교회의 전투적 성격이 이런 사실로 인해 확인됩니다. 계시록에서 사단과 그의 하수인들로 인한 교회와의 적대적 투쟁의 역사가 다양한 상징과 묵시와 비유를 통해 기술되고 있습니다. 그 결국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교회의 종말적 승리가 실현될 것입니다. 마침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표상된 하나님 나라가 도래합니다. 승리한 교회가 이 나라의 주인공으로 참여합니다(계 21:1-3). 주 안에서 모든 것이 통일되고 완성됩니다(요 19:30, 계 16:17, 21:6). 따라서 구속사가 종결됩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과 교회가 연합됩니다. 파괴되었던 실낙원의 질서가 회복됩니다. 임마누엘 신학의 실체인 성전의 본질이 회복됩니다. 교회의 영광이 회복됩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이 마침내 최종적으로 성취됩니다(계 21-22장). 이 모든 구속사의 종말적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최종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나 계시록은 재림사건에 대해 충분히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기도할 것을 촉구합니다(22:20). 재림을 기대하는 종말신앙은 모든 교회의 한결 같은 소망이며 공동의 기도제목입니다. 

  이상의 논증에서 두 증인으로 말미암는 교회의 복음증거 사역은 심판과 구원, 고난과 안전, 핍박과 보호 등의 이중적 성격을 띠고 있음을 살펴봤습니다. 10-11장에 소개된 교회의 복음사역에 관한 삽입환상은 9:13-21까지 기술된 둘째 화, 곧 여섯 번째 나팔 재앙과 밀접하게 연관된 내용입니다. 사람들은 물리적인 방법으로 온전히 회개하지 않습니다(9:20-21, 창 8:21). 복음만이 회개의 유일한 방편으로 기능합니다. 이런 사실이 11장의 두 증인에 의한 선지적 예언사역을 통해 확인 되었습니다(11:13).

  이런 식으로 9:13-21과 삽입환상인 계 10-11장을 통해 둘째 화(禍)인 여섯 번째 나팔재앙도 끝났습니다. 이제 셋째 화인 일곱 번째 나팔 재앙이 남았습니다(11:14).

  3. 일곱 번째 나팔 재앙(15-19절)

  11:15-19은 10-11:1-14까지의 삽입환상에 의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던 8-9장의 일곱 나팔 재앙의 메시지를 지속시킵니다. 그런 의미에서 11:15-19절은 셋째 화인 일곱 번째 나팔 재앙과 관련된 메시지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본 절은 일곱 째 나팔 재앙의 실상을 직접적으로 기술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11장의 두 증인에 의한 교회의 복음사역의 결과를 강조해 소개합니다. 반면에 앞에서 이미 살펴본 대로, 일곱 째 인은 일곱 나팔 재앙을 도래시켰던 것처럼(8:1-2), 일곱 째 나팔은 뒤로 가서 15:1에 소개된 일곱 천사에 의한 ‘마지막’ 일곱 재앙과 연결되는 가운데, 16:1-21의 일곱 대접 재앙을 도입시키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따라서 일곱째 나팔과 관련된 본 절(15-19절)의 내용은 16:1-21의 내용과 함께 10:7에 언급된 하나님의 비밀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밝혀주는 단서가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 절의 내용은 11장의 두 증인에 의한 복음사역의 결과로 나타난 구속사의 종말적 절정을 선취적으로 시사해 주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본 절은 구속사 진행에 있어서 이미와 아직의 이중 구조적인 관점을 가지고 해석해야 할 줄 압니다. 이미 현재적으로 성취되었으며 동시에 재림과 관련해 세상 끝에 확실히 완성될 것을 확신하면서 말입니다. 본문의 중심사상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승리와 심판에 대한 찬양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먼저 15절은 일곱 째 나팔 재앙의 도입부분입니다. 일곱 인(印)재앙에서도 살펴봤듯이 일곱째 재앙은 항상 종말적 심판현상(8:5, 11:19, 16:18)과 함께 최후의 심판과 밀접하게 연관돼 집행된다는 것이 계시록의 구성상의 특징입니다. 일곱째 나팔재앙도 예외는 아닙니다(11:19). 그런 의미에서 15-19절의 내용은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도래와 최후의 심판이 상호 깊이 연관돼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사실은 11장에 소개된 두 증인에 의한 교회의 복음사역이 완수되었다고 선포했기에 가능한 내용입니다(11:7상). 그러나 이미 언급했듯이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이중적으로 임한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현재적이며 미래적으로 말입니다. 심판의 경우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됩니다. 다른 재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일곱 째 천사가 나팔을 부는 것으로 일곱째 나팔 재앙의 메시지는 시작됩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재앙의 구체적인 내용이 선포되지 않습니다. 대신 그리스도의 승리로 말미암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심판 및 구원의 메시지가 선포됩니다. 무엇보다 11장에 소개된 두 증인에 의한 교회의 복음사역이 완수되었기 때문입니다(11:7상). 

  요한은 하늘로부터 나는 큰 음성들을 듣습니다(15상). 음성이 복수로 표현되고 있는 내용으로 봐서 음성의 주인공들은 하늘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피조물, 그리고 수많은 천사들의 음성인 듯합니다(4:8-11, 5:8-14). 큰 음성에 따르면 세상나라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었다고 하며 그리스도께서 세세토록 왕 노릇할 것을 선포합니다. 본 절은 시온산으로 표상된 신정왕국의 종말적 회복을 예언하고 있는 사 2:2을 연상케 합니다. 그동안 한시적으로 사단의 통치영역이었던 세상(요 12:31, 요일 2:15-17, 엡 2:2, 6:12)이 하나님 나라로 접수되었다는 선언입니다. 이는 사단이 패배했음을 시사합니다(계 16:17). 결박당했음을 가리킵니다(20:1-3). 사단이 멸망했음을 의미합니다(20:10). 그의 추종자들도 함께 멸망했음을 증거합니다(19:19-21), 주기도문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뜻과 나라가 세상 가운데 온전히 실현되었다는 선언입니다(마 6:10).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관련해 이중 구조적으로 설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도래한 현재적 하나님 나라와 재림으로 도래하게 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로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 절에서 선언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의 발휘는 이미 이 땅 위에서 현재적으로 시행되고 있으며(마 12:28, 13:31-33, 눅 17:20-21), 동시에 재림에 맞춰 최종 성취될 것입니다(눅 17:22-24, 22:14-18). 이런 관점에서 현대교회는 바로 현재적으로 도래한 하나님 나라에 속해 천상적 삶을 여기서부터 선취적으로 소유해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친 백성들로 존재하는 셈입니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지상적 임재방식으로 존재하면서 말씀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적극 구현해 나가야 하는 자율적 의무와 책임이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여기서부터 소유해 누리는 천상적 언약기관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본 절에서 선포하고 있는 하나님의 신정왕국의 출현과 그리스도의 왕권의 발휘와 관련해, 이런 일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성취되었다는 말인가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다름 아닌 10-11장의 삽입환상이 바르게 해 주고 있습니다. 곧 복음에 빚 진 자의 심정을 가지고, 자신이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교회의 적극적인 복음사역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특별히 두 증인의 선지적 예언사역을 통해 강력히 시사해 줍니다. 마침내 두 증인으로 표상된 교회의 복음사역은 종료되었습니다(11:7절상). 이런 사실의 전제 속에서 그리스도의 나라는 도래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는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종말적 심판의 집행과 상 주심의 내용을 선포합니다(15-19절). 

  16-17절은 신구약 시대의 모든 성도들의 총화를 상징하고 있는 24장로들의 등장과 경배와 고백이 소개됩니다.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 이들의 고백의 중심 주제는 단연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의 현재적 발휘’에 집중됩니다. 본 절에서 ‘왕 노릇하신다’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메시아 왕국의 현재적 도래와 통치의 시행을 강력히 시사해 줍니다. 이런 사실은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17절상)이란 표현을 통해 한층 더 지지를 받습니다. 영원자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성과 관련돼 사용되는 위의 칭호는 앞에서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1:8)와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올 자”(4:8)란 표현과 대비를 이룹니다. 다시 말해 17절에서는 동일한 칭호 속에서 ‘장차 올 자’란 칭호가 생략되었습니다. 왜 생략되었을까요. 15절의 큰 음성들에 의해 선포된 내용 속에서 세상이 그리스도의 나라로 이미 바뀌었고, 그리스도께서 왕권을 가지고 오셔서 현재적으로 친히 통치하기 시작하셨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15-17절에 기술된 ‘그리스도의 나라의 도래와 주님의 왕적 통치권의 발휘’는 상대적으로 종말적 신정왕국의 도래를 강조하는 표현임을 문맥 속에서 간파하게 됩니다. 18절에 언급된 ‘두 부류’에 대한 최후의 심판 광경과 성도들에 대한 ‘상 주심’이 이런 사실을 확증시켜 줍니다. 특별히 본 절에서 두 부류란 ‘죽은 자들’에 대한 심판과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에 대한 파멸을 가리킵니다. 죽은 자들에 대한 심판묘사는 계 20:11-15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기술됩니다. 계시록은 불신자들의 죽음을 표현할 때 ‘죽은 자들’(20:5, 11-15절)로 묘사합니다. 반면에 신자들의 죽음은 ‘죽은 영혼들’(6:9, 20:4)로 표현합니다. 이런 식으로 죽은 자들 중에서 신자와 불신자에 대한 정체성을 구분해 설명합니다. 

  따라서 18절에서 죽은 자들에게 임하는 주님의 진노의 심판은 주님을 믿지 않은 상태에서 죽은 자들을 가리킴에 틀림없습니다. 같은 절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은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에게도 임한다고 기술합니다(18절하). 본 절에서 ‘죽은 자들’이나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은 공히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과 멸망을 받는 것으로 인해 이들의 정체성과 관련해 사실상 동일시되고 있습니다. 단지 ‘죽은 자들’의 죄악상을 다른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의 죄악상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킬까요. 땅은 하늘에서 이루어 진 하나님의 뜻이 동일한 방식으로 이루어 질 현장입니다(마 6:10, 계 22:1-5). 그런 의미에서 과거 아담이 범죄 하기 전 에덴동산은 이런 사실의 극치를 보여주었던 전형(典型)이었습니다. 하늘과 땅이 통일된 현장 말입니다. 계 22:1-5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속사역의 절정과 이로 인한 교회의 종말론적인 승리를 통해 과거 실낙원이 복낙원으로 회복된 모습을 기술해 줍니다. 회복된 에덴에서는 생명나무에로의 길이 열립니다. 피조물에 임했던 저주가 사라집니다. 하나님과 단절되었던 관계가 회복되고 교제가 재개됩니다. 하나님을 대신한 만물에 대한 통치권이 회복됩니다. 하늘과 땅이 통일됩니다. 당초 계획하셨던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인 하나님의 나라(창 1:28)가 구속의 종말론적 완성(창 3:15)을 통해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다시 회복되기에 이릅니다. 

  그런데 이처럼 회복된 상태로 보존되고 발전돼야 할 땅, 곧 세상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생들로 인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의 가득 찬 탐욕의 각축장이 돼 버렸던 것입니다. 자연히 사람의 제일 된 목적인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추구하는 삶을 살기보다 적극적으로 자기 소견에 좋을 대로 육신의 정욕을 좇아 살게 된 결과, 땅은 저주를 받게 되었고 세상은 양육강식의 생존원리와 빈익빈부익부의 경제 논리가 판을 치게 돼 사단이 왕 노릇 하는 패역한 현장이 돼 버렸던 것입니다. 로마서 기자는 이런 상태를 일컬어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고, 피조물이 함께 탄식하며 고통당하는 것으로 의인화시켜 기술합니다(롬 8:20-22). 그런 의미에서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의 죄악상이란 이처럼 끊임없는 죄성의 발로로 인해 사람들의 언행심사가 항상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삶(창 6:5, 8:21)으로 표출되는 반역과 배도의 삶을 총칭하는 표현이랄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성의 발로로 비롯된 인간의 죄악상은 그것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든지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결코 제외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창 6:5-7, 롬 1:28-32, 골 3:5-6, 계 21:8). 그 결국은 멸망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종말적 심판은 죽은 자들(18절상)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불신자들(18절하, 마 25:31-33)까지도 대상이 됩니다. 이로 보건대 일곱 째 천사의 나팔로 비롯된 본 절(11:15-18)의 내용은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해 성취될 최후의 종말적 심판의 정황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음을 간파하게 됩니다. 이런 사실은 이어서 보여주는 하늘에 있는 열려진 성전 환상과 최후의 종말적 심판현상(8:5, 16:18)을 소개하는 ‘번개와 음성과 뇌성과 지진’ 및 큰 우박’의 등장을 통해 재확인 됩니다(11:19). 특별히 일곱 째 인 재앙 현상과 비교해(8:5) 큰 우박이 더해진 것은 그 만큼 심판의 강도가 강화되었음을 시사해 줍니다. 

  일곱 째 천사의 나팔은 한편으로 심판과 멸망을 초래케 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 상 주심을 소개합니다. 상을 받게 되는 대상은 세 부류로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무론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로 한정해 기술합니다. 물론 본질상 이들 세 부류는 동일한 대상입니다. 하나님의 성도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시록에서 이들 수상자(受賞者)들을 굳이 세 부류로 구분한 것은, 신구약 모든 시대에 걸쳐 살았던 하나님의 친 백성들이 빠짐없이 하나님의 보상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기 위함임을 문맥 속에서 간파하게 됩니다(호크마 종합주석 379). 

  그렇다면 본 절의 문맥 속에서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상(賞) 주심’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살아생전에 행했던 열심과 충성도에 따른 보상의 개념일까요. 아니면 업적과 공적에 따른 대가의 개념일까요. 18절의 문맥 속에서 성도에게 수여되는 상의 개념은 불신자에게 형벌의 대가로 주어지는 심판과 멸망이란 용례와 밀접하게 연관돼 상대적인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처럼 본 절에서 상의 본질이 심판과 멸망의 용례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쓰였다면 이는 구원 외에 다른 의미로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상과 관련해 계 2-3장의 일곱 교회에게 주시는 주님의 메시지에서 이기는 자에게 주시기로 약속된 다양한 상의 보장은 한 마디로 구원의 다른 표현들임을 이미 살펴본 바 있습니다(2:7, 11, 17, 26, 3:5, 12, 21절).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해 구속사가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최후의 절정에서 승리한 교회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상과 복의 본질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구원의 완성을 실질로 누리는 천상적 삶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계 21:1-4). 

  여기서 잠시 성도에게 은혜로 베풀어 주시는 구원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에 대해 살펴봅니다. 구원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시켜 주신 은혜사건입니다(롬 5:8, 요일 4:9-10). 이 은혜사건의 기원은 창세 전 삼위 일체 하나님의 구원협약에 기초합니다(엡 1:4-6). 이에 따라 성부 하나님께서는 구원계획을 총괄하시면서 이를 수립하셨습니다. 성자 하나님께서는 구속사역을 통해 이를 친히 담당하셨습니다(엡 1:7, 골 1:14, 롬 4:25). 성령 하나님께서는 성자의 구속의 공효를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에게 적용시켜 믿게 하심으로(살후 1:10) 인(印)쳐주시고 보증해 주심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십니다(엡 1:13, 2:8).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인간의 공로는 철저히 배제됩니다(엡 2:8-9). 성경은 이런 식으로 대속의 원리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구원의 도리의 목적을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함이라”고 설파합니다(엡 1:6).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사역에는 우리의 죄를 사면해 주시기 위해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생명 곧 피가 우리의 죄 값으로 대신 지불되었습니다(엡 1:7, 히 9:12, 22, 28, 고후 5:14, 롬 3:23-24). 그런 의미에서 혹자가 이르기를 구원의 값은 ‘예수님짜리’라고 한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예수님짜리란 ‘무한대의 값’이란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생명 곧 하나님의 생명의 값을 세상 그 무엇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구원의 값은 예수님의 생명의 값과 동일시됩니다. 이런 이유로 구원의 생명은 예수님의 생명이요, 구원을 누리는 삶이란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삶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성도는 땅에서 존귀한 자요 하나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시 16:3). 성도의 영적 정체성은 아들 되신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사신 바 된 자들이요, 예수님의 생명에 연합돼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자들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삶은 또 다른 의미에서 영생의 삶이기도 합니다(요 5:24, 11:25-26). 성도는 옛 사람으로 사는 자들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인 새 사람으로 사는 자들입니다(고후 5:17). 그래서 구습을 좇던 옛 사람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의 뜻을 좇아 의와 진리의 거룩하심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으로 살아야합니다(엡 4:23-24, 골 3:10). 

  이런 식으로 구원의 생명은 사람의 힘과 능력과 열심으로 획득하거나 쟁취되는 것이 아닙니다(자력구원). 하나님의 사랑이 동기유발 된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수여되는 것입니다(타력구원). 이런 사실에 근거해 성경은 구원의 성격을 선물과 동일시합니다(엡 1:8). 때문에 예수님의 생명과 동일한 가치의 구원의 생명을 믿음으로 거저 공급받은 자(구원의 확신)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에 감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이란 하나님의 4중적인 특혜란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로부터의 구원, 죄 값인 사망으로부터의 구원, 죽음 후에 모든 사람에게 찾아오는 심판으로부터의 구원, 그리고 심판의 결과 영원한 지옥의 형벌로부터 천국의 영생에로의 구원이 그것입니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 믿음으로 수여되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면(엡 2:8, 롬 3:22, 28, 요 1:12, 3:14-18, 5:24) 하나님의 사랑에 빚진 자의 심정을 가지고 감심(感心)으로 반응하게 됩니다. 성경은 이를 가리켜 ‘무익한 종’의 심정이라고 기술합니다. 결국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참 된 신앙의 정체성이란 구원의 은혜에 감사해서 무익한 종의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좇는 자율적인 순종의 삶을 가리킵니다. 한 마디로 구원의 은혜에 자율적으로 반응하는 감사하는 마음이 신앙의 동기유발로 작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질상 하나님의 은혜는 합당한 행동을 수반하기 때문입니다(약 2:17, 22, 27, 골 3:1-3, 엡 4:1-3, 롬 12:1-2).

  따라서 구원의 은혜에 감심으로 반응하는 데서 성립되는 기독교 신앙관의 정체성은 사실상 조건적일 수가 없습니다. 기복적일 수도 없습니다. 지성감천주의적일 수도 없습니다. 복 중의 복이요 상급 중의 상급인 구원 곧 생명의 문제가 궁극적으로 보장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친히 목숨의 가치를 온 천하보다 귀한 것으로 평가해 주셨습니다(마 16:26). 마 16:26에서 온 천하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추구하며 소망하는 현세지향적인 최고의 복과 상급의 전형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 절에서 목숨은 온 천하보다 귀한 가치로 평가됩니다. 생명을 잃은 자에게 온 천하란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생명은 세상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가치입니다. 궁극적인 관심사입니다. 이런 귀한 성도의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영생의 생명으로 이미 보장을 받은 것입니다(요 5:24, 11:25-26).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 신앙관은 총체적인 성격상 ‘주옵소서’의 관점보다는 ‘감사합니다’의 모습으로 표출되는 것이 합당합니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관의 정체성은 이교도처럼 필요를 채우기 위한 조건적 신앙이 아닙니다. 궁극적인 필요와 요구인 생명의 문제가 이미 해결된 데서 나와지는 목적 지향적 신앙입니다. 성경은 이처럼 목적 지향적인 신앙관의 성격을 설명하면서 사람의 본분과 도리차원에서 접근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고 말입니다(전 12:13). 본 절에서 본분은 도리와 동의어로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 분으로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제일 된 목적적 삶의 자세를 가리킵니다(소요리문답 제 1 문). 왜냐하면 모든 인류는 창조주 하나님, 구원자 하나님, 그리고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불가분의 관계성을 맺으면서 지상에서의 모든 삶이 선악 간에 총체적으로 평가받는 것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히 9:27, 요 5:29, 마 25:31-33, 46, 전 12:14). 

  이상의 논증을 통해 다시 한번 결론적으로 언급합니다. 기독교 신앙관의 정체성은 조건적이 아닙니다. 목적적입니다. 은혜로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감사하며 찬송하며 경배드리는 것이 신앙의 동기요 시발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구원의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담보된 것으로 무한 가치입니다. 이처럼 성도가 받은 구원의 의미와 가치는 무한 가치의 예수님의 생명지불과 보혈의 공로에 힘입어 값없이 은혜로 받은 구원입니다. 이 생명에 연합돼 감사와 감격의 심정으로 살아가는 것이 구원의 실질이요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생활이 본질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무익한 종’(눅 17:10)의 심정으로 살아가는 보은(報恩)의 삶인 셈입니다. 기독교 신앙관의 정체성이 조건적이 아닌 목적 지향적으로 표출돼야 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이런 이유로 기독교 신앙관의 본질은 매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영화롭게 하는 것을 목적 삼는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자이시요, 구원자이시며, 심판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먼저 선택해 주셨고(엡 1:4, 딤후 1:9, 딛 1:2),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우리를 먼저 구원해 주셨습니다(엡 1:7, 롬 3:23-24, 5:8).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을 공급해 주셨습니다(요 5:24, 11:25-26, 갈 2:20). 그런 의미에서 무익한 종의 심정과 분리된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심으로 반응하는 참 된 믿음과 참 된 신앙으로 정의하기 힘듭니다. 

  11:19절은 일곱 째 천사의 나팔로 도래하게 되는 종말적 정황의 절정을 기술합니다. 이런 사실은 15-18절의 내용이 재림의 정황과 깊이 연루된 사건임을 더욱 확증하게 됩니다. 먼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려진 환상을 봅니다. 이는 앞서 4:1에서도 요한이 성령에 이끌려 하늘의 열린 문을 통해 하늘 성전의 광경을 환상으로 보았던 기록이 있습니다. 두 사건은 종말적 사건이란 공통분모를 가지면서도 동시에 다른 성격의 측면을 가집니다. 4장에 기록된 하늘의 열린 문은 예수님의 초림사역의 결과와 연관됩니다.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의 운명과 함께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로 갈라진 사건을 통해 이런 정황이 뒷받침됩니다(막 15:38, 마 27:51, 눅 23:45). 반면 11장에 언급된 하늘 성전이 열린 것은 본 장의 문맥 속에서 재림의 종말적 정황과 밀접하게 연관된 사건으로 확인됩니다. 그러나 전자는 후자를 대망케 한다는 점에서 상호 유기적인 연관성을 가집니다.

  다음으로 열린 성전을 통해 성전 안에 언약궤가 보입니다. 언약궤는 모세의 성막에서 지성소에 위치해 있으며 증거궤로도 부릅니다(출 26:34). 구약성경에서 언약궤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광야여정 길에서 그들과 함께하심을 보여주는 임재와 통치와 언약의 신실성에 대한 상징으로 시은소(施恩所)의 성격을 가집니다. 이곳에서 해마다 드리는 대제사장의 헌제(獻祭)사역에 의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한시적으로 속(贖)함을 받습니다(레 16:17, 히 10:11). 예수님의 헌제사역은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해마다 반복해서 드리는 대제사장의 속죄사역을 폐하시고 영(永)단번(once for all)의 속죄를 이루셨습니다(히 9:12, 10:11-18).    

  이처럼 19절에서 하늘 성전이 열리고 지성소의 언약궤가 보이는 최후의 종말적 정황이 의미하는 바는, 초림 시 성전휘장의 찢어짐으로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었던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이(막 15:38, 히 10:19-20, 4:16) 종말론적으로 온전히 성취되는 것을 가리킵니다(계 21:3, 22:1-5). 이는 달리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 언약의 최종 성취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초림으로 이미 성취되었고(마 1:21-23), 이제 재림으로 최종 완성에 이르게 되는 정황을 보여주는 것입니다(계 21:1-3).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계 21:3). 그러므로 본 절의 언약궤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로 구속사가 완성되었고 동시에 하나님의 언약이 종말론적으로 성취되었음을 통해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강력히 시사해 줍니다(호크마 종합주석, 379).   

  19절의 마지막 부분은 일곱 세 재앙(인/나팔/대접)의 일곱 째 재앙들과 관련해 종말적 심판현상으로 나타나는 “번개와 음성과 뇌성과 지진 및 큰 우박”의 현상을 기술합니다(8:5, 16:18). 이런 사실은 일곱 째 천사의 나팔과 관련된 본 절 또한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해 성취될 최후의 종말적 심판의 정황과 깊이 관련돼 있음을 시사해 줍니다. 특별히 일곱 째 인 재앙 현상과 비교해(8:5) ‘큰 우박’이 더해진 것은 그 만큼 심판의 강도가 강화되었음을 암시합니다. 이런 식으로 세 종류(인/나팔/대접)의 일곱 재앙들은 상호 병행적이면서도 점층적인 면(15:1, 마지막 재앙)을 부각시킴으로 복합적이며 입체적인 병행을 이루고 있음을 시사해 줍니다.

  Ⅲ. 결론

  계 11장은 10장과 더불어 내용적으로 연속성을 갖는 삽입환상 군(群)을 이룹니다. 두 삽입환상의 기록 배경은 여섯 번째(9:13)와 일곱 번째(11:14) 나팔재앙 사이에 위치해 있습니다. 두 삽입환상의 기록 동기는 여섯 번째 나팔재앙에도 불구하고 회개할 줄 모르는 남은 자들의 패역을 고발하는 방식으로 9:20-21의 정황에 근거해 기술됩니다. 다시 말해 강도 높은 나팔재앙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누가 어떻게 이들을 회개시킬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두 삽입환상이 상호 유기적인 관계성을 띠고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상의 맥락 속에서 두 삽입환상이 갖는 불가분의 유기적 연속성은 요한(10장)으로 대표되는 교회의 복음사명이 두 증인(11장)으로 비유되는 교회공동체에게 계승돼, 교회의 선지적 예언사역 곧 복음 증거사역으로 발전되기에 이릅니다. 이 과정에서 계시록은 두 증인에 의한 교회의 복음 증거사역의 성격이 본질상 예수님의 구속사역의 본을 뒤좇는 것으로 재현시킵니다. 이는 예수님과 교회 간의 불가분의 생명적 관계성을 증거하는 것이며, 교회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갈 때에 비로소 교회가 수행하는 증거사역의 진리성과 진정성이 보증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교회의 복음증거 사역의 정체성이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통해 원리적으로 이미 제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교회의 복음증거 사역이 완수됩니다(11:7상). 이는 두 증인에게 예언기간으로 허락된 1260일과 고난과 박해의 기간으로 설정된 42달이 다 지났음을 의미합니다(11:2-3). 따라서 교회의 복음증거 사역의 완수는 세상 가운데 종말적 심판현상을 초래케 하는 동인으로 작용하기에 필요충분조건을 충족시킵니다. 

  이 과정에서 종말적 심판은 구원과 멸망이라는 이중적인 성격을 띠고 도래합니다. 계시록에서 최후의 종말적 심판현상은 특별히 ‘번개와 음성과 뇌성 및 지진과 큰 우박’ 등을 동반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복음증거 사역의 완수를 언급함으로 종말적 심판현상을 다루고 있는 본 장에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이때 특별히 ‘지진으로부터 살아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는 대목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11:13). 이런 식으로 요한은 9:20-21을 통해 제기되었던 회개와 관련된 문제를 11:13을 통해 독자들에게 답변해 줌으로서 두 증인으로 말미암는 교회의 복음증거 사역만이 회개를 촉구하는 결정적인 요소로 기능한다는 사실을 증거합니다. 이는 다른 한편 교회의 존재이유(사명)가 선지적 복음증거 사역에 집중돼야 함을 강조합니다.

  결론적으로 교회의 복음증거 사역은 교회의 존재이유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 가운데 도래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기능합니다.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의 시행을 가져옵니다(15-17절). 이로 인해 불신자에게는 심판이 신자에게는 구원이 상급으로 수여됩니다(18절).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로 말미암는 구원의 완성은 성도가 향유(享有)할 수 있는 최고의 복이며 최고의 상급입니다.  



출처 : JESUSONE
글쓴이 : jtr28114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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