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세 교회에게 보낸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
(계 3:1-22)
Ⅰ. 도입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에게 보낸 주님의 메시지는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 유배되었을 당시 성령에 이끌림 받아 환상 중에 받은 내용입니다(계 1:9-11). 2장을 통해 먼저 네 교회인 에베소 교회, 서머나 교회, 버가모 교회, 두아디라 교회에게 보낸 메시지를 살펴봤습니다. 네 교회를 향해 말씀하실 때마다 예수님은 각 교회의 형편과 상황에 따라 자신의 명칭을 달리 계시하시면서 칭찬과 책망과 권면 및 회개와 약속을 확증해 주심으로 각 교회와 자신을 일치시켜 메시지를 전달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에 존재하는 각 지역교회의 형편과 처지에 따라 적절하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심으로 당신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를 적극 돌보고 계심을 시사해 줍니다. 교회가 늘 ‘하나님 앞에서’란 명제 하에서 신앙의 경주를 다짐해야 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이번 3장에서는 나머지 세 교회 곧 사데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주신 주님의 메시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이 또한 동일하게 현대교회를 향해 선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말씀으로 수납해야 합니다.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Ⅱ. 전개
2장을 통해 네 교회에게 주신 주님의 메시지를 주의해 분석해 보면 메시지 간의 동질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칭찬의 내용과 관련해서는 순교의 정신과 각오를 가지고 말씀의 본질을 좇았던 믿음의 정절과 신앙의 순수성을 높이 평가해 주십니다. 그러나 책망과 회개를 촉구하시는 내용과 관련해선 칭찬의 내용을 시종일관하게 견지하지 못한 사실을 엄중하게 지적하십니다. 특별히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복음이 본질에서 이탈하는 현상이 나타났으며, 그 결과 발람의 교훈, 니골라당의 교훈, 이세벨의 교훈 등으로 일컫는바 인간의 탐욕을 부추기는 변질된 복음을 수용해 신앙을 철저하게 도구화시켰음을 지적하시며 회개를 강력히 촉구하십니다. 약속으로 보증해 주신 이기는 자에 대한 상급은 한결 같이 구원의 최종완성을 통해 교회가 신천지에서 누리게 될 종말론적인 영적 축복에 집중되고 있음을 봅니다.
이미 언급한 대로 이상의 내용들과 관련해 한 가지 유념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그것은 일곱 교회들에게 선포된 주님의 메시지는 일곱이란 상징성 안에서 사실상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를 향해 주시는 주님의 직접적인 말씀이란 사실입니다. 특별히 각 교회를 향해 이기는 자에게 보증하신 제반 약속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바르게 연합된 지상의 모든 참 된 교회 속에서 현재적으로 이미 소유해 누리고 있는 영적 축복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로 인해 참 된 진리의 말씀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생명적 연합을 현재적으로 확증하는 데서 미래적인 연합과 일치의 완성이 보증된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성 여부가 사죄와 구원 및 영생의 관건으로 기능하게 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기 때문입니다(요 14:6).
1. 사데 교회에게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3:1-6)
사데(Sardis)는 두아디라 남동쪽 약 48km 지점에 위치한 옛 루디아 왕국의 수도였습니다. 지리적인 여건상 성채가 남쪽만 제외하고 모두가 암벽으로 둘려 있어서 난공불락의 천연적인 요새를 방불케 해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장기간 평화와 안녕을 보장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안일함이 화근이 돼 고레스(B.C, 6세기)와 안티오쿠스(B.C. 3세기)에 의해 침략을 받았습니다.
호크마 종합주석에 의하면 종교적으로는 시벨리 여신을 섬겼으며 황제 숭배가 극심했습니다. 한편 사데 교회의 기원은 분명치 않으나 역사가들에 의하면 사도 요한의 전도로 세워졌고 2세기에 이르러 변증가이며 주석가로 유명했던 멜리토가 이 교회의 감독이 됨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물질적인 부요로 말미암는 내적인 피폐로 인해 사회전반에 걸쳐 만연되었던 무사 안일함과 도덕적 해이와 불감증의 영향이 교회에까지 침투하기에 이릅니다.
① 사데 교회의 영적 생명을 회복시켜 주실 것을 확증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주님은 사데 교회를 향해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로 자신을 계시해 주십니다. 일곱 영이란 하나님의 깊은 곳까지도 통달하시는 성령님의 완전함과 살리는 영이신 성령님의 역사(롬 8:11)를 종합적으로 일컫는 표현입니다. 일곱 별이란 교회의 일곱 사자 곧 지도자들을 포기치 않고 여전히 붙들고 계신 교회의 주인 되심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런 모습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배경에는 사데 교회가 “살았다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고 평가하신 말씀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곧 죽은 것이나 방불한 사데 교회를 직시하시며,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회복시킴으로 영적 생명을 소성시켜 주실 것에 대한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 담긴 모습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데 교회는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전적으로 회복 불가능한 아주 죽은 교회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현대 교회가 온갖 자의적 숭배요소와 세속성으로 가득 찼다고 할지라도, 그래서 사실상 죽은 사데 교회와 방불한 요소들이 가득할지라도 여전히 남은 바 죽게 된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를 굳게 회복시켜 나갈 때 현대 교회 또한 재생의 가능성과 확실성이 보장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잘못 된 것을 직시해 이를 철저히 회개함으로 모든 악한 것과 우매한 것으로부터 자신을 회복시키려는 강력한 의지의 결단이 요구된다고 하겠습니다.
② 살았으나 실상은 죽은 사데 교회
주님은 사데 교회의 정체성을 살았다하는 이름만 가진 실상은 죽은 교회로 평가하십니다. 여기서 ‘살았다하는 이름만 가졌다’는 것은 교회의 내적 생명력을 상실한 형식적인 교회를 가리킵니다. 외형적으로는 온갖 기독교적인 요소와 행위들로 화려하게 치장돼 있어서 아무런 하자가 없는 듯 정상적인 교회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는 지적입니다. 그러나 내적 본질과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네 행위를 아신다’(1절하)고 하신 표현 속에서 이런 사실들이 구체적으로 확인됩니다. 다시 말해 사데 교회의 다양한 기독교적 활동은 정작 살았다고 하는 내적 생명력의 발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실상은 죽은 것과 방불한 외적인 행위와 깊이 관련돼 있었을 뿐이란 지적입니다. 결과적으로 사데 교회의 활발했던 기독교적 행위는 생명력을 상실한 데서 취해진 단지 종교 활동에 불과했다는 주님의 평가입니다.
현대 교회가 이런 위험성에 얼마든지 노출될 수 있습니다. 현대 교회 또한 만연돼 가는 인본주의와 세속주의의 영향권에서 아주 자유로울 수 없다보면 교회운영과 목회방향성 및 신앙관의 형성이 자연스럽게 사람중심으로 무게의 중심이 이동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열망하며 추구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요삼 4절, 딤전 2:4), 사욕을 좇아 사람을 즐겁게 하는 일에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습니다(딤후 4:3-4). 결과적으로 기독교적인 모양과 치장은 발견되는데 정작 기독교의 본질인 경건의 능력은 실종되게 마련입니다(딤후 3:5). 기독교의 외적 요소들인 예배와 기도와 헌금 및 찬양과 각종 교육 및 봉사와 구제 등 제반 활동들은 철저히 본질에 깊이 접촉된 데서부터 나와진 자율적인 순종의 열매로서 기능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할 때 종교적 활동에 불과한 나머지 형식 이상 아무 것도 아닌 셈이 됩니다. 경건의 모양만 있을 뿐 본질인 능력을 부인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실상은 죽은 교회’라고 평가하십니다. 여기서 사데 교회가 죽었다는 것은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외적으로는 다양한 기독교적 활동을 전개시켜 나감으로 살아있는 교회처럼 보일지라도 교회의 표지와 속성을 가리키는 본질을 추구하는 내적 생명력을 상실함으로 죽은 교회와 다름없다는 지적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3-1649) 제 25장 5항에 따르면 “지상에서는 아무리 순수한 교회들일지라도 혼잡과 과오에 빠질 수 있다. 심지어 어떤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 사단의 공회가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지상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교회가 있을 것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본 신앙고백서에 따르면 교회 중에는 거짓 교회와 참 교회, 그리고 심지어 사단적인 교회까지도 존재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 종교개혁자들은 개혁된 교회가 지속적으로 개혁되지 않으면 반드시 변질될 수밖에 없음을 경고합니다. 여기서 개혁의 진정한 의미는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는가에 대한 말씀의 본질의 회복을 가리킵니다. 말씀의 도구화가 아닌 계시의존 사색신앙으로서 말씀의 목적화 말입니다. 인간의 죄성과 사단의 집요한 미혹으로 말미암아 지속적인 개혁이 수반되지 않을 때 신앙의 변질과 교회의 세속화는 불가피하다는 것이 개혁자들의 관점이었습니다.
장수민은 그의 요한계시록 강해에서 죽은 교회와 방불했던 사데 교회와 관련해 교회의 수명(壽命) 문제를 제기합니다(요한계시록 주해서, 1999, 352). 어느 한 곳의 지역교회가 일정기간 외적인 성공과 부흥 일변도의 물량주의적 성장을 시도하다보면 반드시 죽게 된다는 얘깁니다. 여기서 교회의 죽음과 관련된 수명의 문제는 그 지역에서 한 교회가 아주 없어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존속합니다. 그럼에도 주님으로부터 사망선고를 받은 교회로 판정받게 되는 것은 교회의 대형화와 비대화로 인해 다양한 활동은 극대화시킬 수 있을지라도 정작 교회의 내적 생명력을 좌우하는 유기체적 속성을 잃게 됨으로 지체간의 인격적인 교제가 더 이상 보존될 수 없다는 지적입니다. 따라서 장수민은 교회의 생명을 외적인 성장에서 찾기보다 내적인 교회됨의 본질에서 찾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으로서 지체 간 생명적 연합으로 말미암는 유기체적인 영적 교제와 교통이 말씀을 매개로 교감되며 활성화돼야 합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교회의 생명은 외적 활동과 물량에 있지 않습니다. 말씀의 본질을 추구하는 내적 생명력의 발휘에 철저히 의존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사데 교회가 부정적인 의미의 죽은 교회를 밝히 증시해 준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이상의 논지는 대형교회를 일방적으로 매도하거나 소위 개척교회로 불리는 소형교회를 상대적으로 예찬하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소형교회라고 할지라도 무조건적으로 정상적인 교회로 평가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데 교회를 향해 주님은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세워 회복시켜 나갈 것을 강력히 주문하십니다(2절상). 여기서 ‘남은 바 죽게 된 것’이란 교회의 정체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곧 말씀의 본질을 의미합니다. 사데 교회가 전체적으로는 죽은 교회나 방불하지만 그래도 한 가닥 생명의 보존을 위한 실낱같은 희망이 남아 있다는 지적입니다. 대형교회나 소형교회를 막론하고 근본에서 말씀의 본질을 추구하는 데서 가능한 진리성과 진정성을 상실한다면 더 이상 주님의 몸 된 교회로 평가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 3:15하)로서 바르게 해석된 말씀만이 교회의 생명을 좌우합니다. 다시 말해 교회의 생명은 말씀에 의존돼 있고 말씀은 교회의 생명의 원천으로 기능합니다. 따라서 말씀의 본질에 접촉된 데서 나와진 행위만이 정당성을 인정받습니다. 그렇지 못할 때 자의적 숭배신앙으로 판정되며 자기 의와 열심으로 평가될 뿐입니다. 이는 불복종적이며(롬 10:2-3) 불법적인 신앙행위(마 7:21-23)라고 성경은 엄히 경고합니다.
사데 교회의 다양한 활동성은 외부적으로 살아있는 교회, 능력있는 교회, 부흥하고 성공한 교회의 모습으로 비춰졌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데 교회의 활동과 열심을 지적하시면서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했다”고 평가하십니다(2절하). 물론 본 절에서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이란 완전한 행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단지 사데 교회가 최선을 다해 경주했던 기독교적 활동이 주님 보시기에는 전혀 다른 차원의 자의적 숭배신앙의 발로에서 나와진 자기 열심에 불과했다는 평가이십니다. 성경은 이를 불법적이고 불복종적인 열심으로 평가한다는 사실을 위에서 이미 확인한 바 있습니다.
나아가 이들의 행위가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치 못하였다는 사실은 이들이 갖고 있었던 복음의 본질이 변질되었음을 시사합니다. 외적 행위는 내적인 마음의 생각이 겉으로 표출되는 것이기에 바른 복음은 복음에 합당한 열매 곧 바른 행동을 촉구하기 마련입니다. 롬 8:5-6입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이로 보건대 사데 교회의 사망선고는 단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타락에 기인한 것이 주원인이 아닙니다. 듣고 믿음으로 받았던 복음의 변질에 있었습니다.
한편 주님은 사데 교회의 형식적이고 가식적인 신앙관을 일방적으로 정죄하지만 않으십니다. 회개를 촉구하시며 심판을 경고하심으로 치유의 기회를 주십니다(3절). 이미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1절)로 자신을 계시하신 데서 사데 교회가 아주 죽지 않았으며, 따라서 회복의 여지가 남아 있음을 시사하신 바 있습니다. 치료책은 세 가지 명령을 통해 주어집니다. 본질에서 에베소 교회에게 주신 치유책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먼저 복음을 처음에 어떻게 받았으며 들었는지를 깊이 ‘생각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첫 사랑을 버렸으니 어디서 떨어진 것을 먼저 생각하라고 명하셨던 에베소 교회의 경우와 본질에서 동질성을 띱니다(2:5). 반복되는 일상의 삶에 지쳐 깊은 매너리즘에 빠짐으로 신앙의 활기와 영성을 잃어갈 때, 처음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회복시키는 것이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될 것임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마치 결혼생활의 권태기에 접어든 부부가 이를 극복하기 위한 일환으로 과거 연애시절의 즐거웠던 추억과 신혼의 감미로웠던 삶을 되돌아보며 현실을 재해석하는 방식으로 위기를 넘길 수 있듯이 말입니다.
다음으로 ‘지키라’는 것입니다. 이는 유지하다란 의미로 이미 들었고 믿음으로 받았던 복음과 진리의 말씀들을 회복시켜 굳게 붙잡으라는 주문입니다. 곧 순종의 삶으로 연결시키라는 명령이십니다. 믿음은 진리의 말씀을 들음에서 나지만(롬 10:17) 들은 진리의 말씀을 생명의 도리로 붙잡고 살아가는 순종력의 발휘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죽은 믿음과 다를 바 없습니다(약 2:17, 26절). 믿음은 행함으로 온전해지기 때문입니다(약 2:22). 그런 의미에서 진리와 믿음과 순종은 신앙의 삼대 요소로 상호 보완적이고 의존적으로 기능합니다.
셋째는 철저히 회개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도 동일하게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본질의 회복에 근거한 처음 사랑과 처음 행위의 재정립은 회개가 수반되지 않는다면 허사로 끝납니다. 아무리 처음 상태를 생각하고 회복시켜 지킨다고 할지라도 먼저 자신의 잘못된 현실을 직시하며 성찰하는 데서 비롯된 적극적인 시인과 깊은 뉘우침, 그리고 전인적인 회개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본질의 회복이란 언어의 유희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회개란 단순한 잘못의 시인과 이제까지의 과오를 중단하는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좇는 일을 적극 추구하는 가치관과 인생관의 대전환까지를 포함합니다. 말하자면 단지 차선 변경이 아닌 180도 방향전환을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회개치 않는 교회를 주님은 언약적 징계를 통해 심판하시겠다고 경고하십니다. 그것은 극단적인 경우 에베소 교회를 향한 주님의 경고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듯이 촛대를 옮기는 방식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생명력 상실로 인해 사망선고를 받은 유명무실한 교회 그리고 끝내는 교회의 황폐화와 사라짐까지를 포함합니다.
오늘날 현대교회가 외적인 치장과 기독교적인 활동 및 물량적인 것을 잣대로 교회의 부흥과 목회의 성공여부를 평가하려 한다면 큰 우(愚)를 범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사데 교회를 진단하시며 평가하셨듯이 자칫 살았다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교회로 판정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데 교회는 복음의 본질로부터 이탈되었습니다. 복음과 진리에 바르게 접촉된 데서 주어지는 영적 기쁨과 위로와 평강을 상실했습니다. 대신 외적인 활동과 부요함에 만족하며 허상을 좇는 형식적인 교회로 존재했을 뿐입니다. 교회의 생명은 외부적인 활동과 업적에 있지 않습니다. 교회의 생명은 말씀의 본질에 깊이 접촉돼 이를 생명의 도리로 붙잡고 살아가는 적극적인 순종력의 발휘에 좌우됩니다. 현대교회가 자칫 사람을 즐겁게 하는 데 치우쳐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는 데 급급한 나머지 말씀의 본질을 추구하는 경건의 능력을 등한히 여긴다면 사데 교회에게 주신 동일한 책망을 결코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데 교회를 향해 주신 메시지를 현대교회에게 주시는 주님의 음성과 경고로 들을 수 있는 복된 귀를 가져야 될 줄 압니다.
③ 흰 옷을 입은 남은 자
비록 사데 교회 전체가 대부분 깊은 영적 암매에 빠져 자의적 숭배신앙에서 비롯된 종교적 활동에 사로잡혀 형식적인 신앙생활로 일관하고 있을지라도 소수의 남은 자가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들을 가리켜 “그 옷을 더럽히지 않는 자 몇 명”,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는 합당한 자” 등으로 묘사해 소개해 주십니다. 사실 사데 교회가 여전히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고 또한 실낱같은 한 줄기 생명의 불씨를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이들 소수의 남은 자들에 의해 복음과 진리의 생명력이 아직 잔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시대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남은 자를 섭리적으로 보존하셔서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사를 집행해 가신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롬 11:4-5, 왕상 19:18). 이들은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않으며,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만을 받들어 추구하는 일을 생명처럼 소중하게 붙들고 살아가는 자들로 존재합니다(계 14:4-5). 주님은 사데 교회에 속한 이들을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는 합당한 자“로 묘사해 설명하십니다. 본 절에서 ‘흰 옷을 입었다’는 표현은 계시록 전반을 통해 두 가지 의미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그 옷을 씻어 의롭게 된 자들을 가리킵니다(계 7:9-14).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 하나님의 친 백성들을 총괄적으로 지칭합니다(롬 3:23-24, 28절). 다른 하나는 세속에 물들지 않는 성결의 삶을 가리킵니다(계 19:7-8, 롬 12:2, 요일 2:15-16, 갈 5:16). 이는 점진적인 성화의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함으로 의롭게 될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천상지향적인 새로운 가치관의 정립으로 인해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그 분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날로 심화시켜 나가는 성숙한 교제의 삶을 가리킵니다. 이들이 ‘합당한 자’로 인정을 받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복음의 본질에 바르게 접촉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합당하게 연합된 자들만이 사죄의 은총을 입어 구원을 받고 의롭다고 인정을 받으며 하나님의 자녀와 소유된 백성으로 편입된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이들은 큰 환란에서 나오는 자들로 어떤 경우라도 흰 옷을 더럽히지 않고 주님과 동행함으로 믿음의 정절을 지키는 합당한 자들로 존재합니다. 정금은 풀무 불같은 모진 제련의 연단과정을 통해 나오게 됩니다. 죄성으로 말미암는 육체의 정욕과 세상의 풍조 및 사단의 세력들(엡 2:2-3)과의 적대적인 대치상태에 직면해 있는 성도들의 신앙생활은 성격상 전투적인 삶의 전개가 불가피합니다(창 3:15). 지역교회에 속한 하나님의 남은 자들의 정체성이 이렇습니다.
④ 승리자에게 약속하신 세 가지 상급
주님께서는 일곱 교회들을 향해 한결 같이 이기는 자가 받을 종말론적인 상급에 대해 약속해 주십니다. 사데 교회도 예외는 아닙니다. 종교적인 활동만 무성하고 말씀의 본질을 추구하는 데서 나와지는 진리성과 진정성을 상실함으로 사실상 죽은 교회나 방불했던 사데 교회를 향해서도 주님은 회개를 촉구하심으로 승리자의 반열에 설 수 있음을 약속해 주십니다. 주님은 세 가지를 약속해 주십니다.
첫째, 이기는 자는 흰 옷을 입게 될 것을 약속하십니다. 사데 교회는 당시 현존했던 다른 교회에 비해 외부적인 핍박이나 이단적인 교훈의 악영향을 크게 받지 않은 것으로 확인됩니다. 반면 진리를 사모하는 열정을 상실한 채, 자의적 숭배신앙을 적극 추구함으로 다양한 종교 활동(1절하)을 앞세워 스스로 자족하는 형식주의 신앙이 팽배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교회의 생명이 말씀에 의존돼 있음을 감안할 때, 사데 교회를 향해 말씀하신 ‘이기는 자’란 말씀의 본질을 회복시켜 이를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살아가는 계시의존적인 신앙관의 소유자들을 염두에 둔 표현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들에게 흰 옷을 입게 될 것을 약속해 주십니다. 위에서도 이미 언급했듯이 ‘흰 것’과 ‘새 것’이란 표현은 계시록 전반에서 신천지의 성격과 밀접하게 연관된 개념을 담고 있습니다.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서 큰 소리로 외치는 흰 옷 입은 큰 무리“(계 7:9)와 ”새 하늘과 새 땅“(계 21:1) 등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기는 자는 흰 옷을 입게 될 것’이란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들이 계속해서 자기부인을 통해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가운데 말씀의 통치를 적극적으로 받아 누리는 구별된 순종의 삶을 총체적으로 가리킵니다. 이들이 신천지에서 승리한 교회의 모티브를 통해 칭의의 완성에 이르게 될 것을 약속하시는 내용입니다. 그 때에 현재의 예비적인 칭의의 상태가 완전한 의의 상태로 성취될 것입니다. 구속사의 진행과 관련해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의 원리 속에서 말입니다.
둘째, 이기는 자의 이름을 반드시 생명책에서 흐리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생명책이 의미하는 상징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돼 천국시민으로서의 영생의 삶을 확실하게 보증한다는 의미를 갖습니다(빌 3:20, 눅 10:20). 이는 둘째 사망 곧 지옥의 불 못에 들어가는 종말론적인 심판과 형벌로부터 제외되는 것을 가리킵니다(계 21:15). 따라서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의미는 미래적인 영생의 삶이 보장되었을 뿐만 아니라, 현재적으로 이미 영생의 삶을 소유해 누리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요 5:24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본문에서 ‘영생을 얻었다’는 표현은 현재형의 시제로서 이미 영생을 현재적으로 소유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따라서 성도들의 삶의 성격은 여기서부터 부활의 생명인 영생의 생명력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갈 2:20)이란 표현이 이런 사실을 뒷받침 해 줍니다. 본문의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란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생명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삶의 성격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않겠다’는 것은 영생의 삶에 대한 영원한 안전과 보장을 확약하는 표현입니다. 이런 이유로 생명책에 한 번 녹명된 이름은 어떤 이유로도 중도에서 취소되거나 무효화될 수 없습니다(롬 8:33, 38-39). 구원의 정체성은 창세전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의 원리에 근거하고 있으며(엡 1:4-6),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효 또한 영원하고 영속적이며(히 10:12-18), 구원의 보증의 영이신 성령의 인침과 내주의 역사도 영원성을 띠고 있기 때문입니다(엡 1:13, 고후 1:22, 요 14:16).
셋째, 이기는 자의 이름을 하나님 앞과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본문은 마 10:32의 반영입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여기서 ‘이름을 시인하겠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돼 그에게 부속된 자임을 공적으로 확실하게 증거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는 이기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효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과 하나님 나라에 소속된 자로서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며 성결의 삶을 살았음을 보증함에 다름 아닙니다.
결과적으로 이기는 자는 신천지에서의 종말론적인 구원의 완성과 영생의 실질을 철저하게 보장받게 될 것입니다. 참 된 지역교회의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인 시인에 이미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은 전투하는 교회원의 신분으로 큰 위로와 힘과 능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롬 8:34, 히 7:25).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눈동자와 같이 지켜 보호해 주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시 121:8).
2.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3:7-13)
빌라델비아(Philadelphia)는 사데 동남쪽 약 40km 지점에 위치한 고원 도시로 포도 생산지로 유명했습니다. 빌라델비아란 도시 이름은 버가모 왕 아탈러스 빌라델버스 Ⅱ세가 이 도시를 건설했으므로(BC 159-138) 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호크마 주석에 따르면 빌라델비아에는 이교 신전과 각종 종교행사가 많았고 아시아가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침략을 받았을 때 유일한 기독교의 보루로서 신앙적인 면에서 가장 칭찬을 받은 지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나 단지 암미아라는 여선지자가 이 교회를 관할하며(AD 100-160) 큰 부흥을 이뤘다고 전해집니다.
① 메시아 왕국의 열쇠를 가지신 분으로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해 주님은 자신을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이”로 계시해 주십니다(7절). 본문에서 ‘거룩하고 진실한 분’으로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은 예수님의 신성과 메시아성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막 1:24, 행 2:27, 히 7:26, 요일 5:20). 특별히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는 사 22:15-22을 반영합니다. 본문에서 당시 유다 왕국의 국고의 열쇠를 맡았던 사람은 셉나라는 궁내대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주인 집에 수치를 끼치게 됨으로 여호와 하나님은 셉나에게 맡겼던 국고의 열쇠를 박탈하고 대신 하나님의 종 엘리아김에게 다윗의 열쇠를 맡기는 과정에서 “내가 또 다윗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다윗 집의 열쇠를 엘리아김의 어깨에 두었다는 표현은 유다 왕국의 출입과 모든 살림살이를 관장함으로 왕으로부터 절대적인 신임과 막강한 권세와 책임을 부여받았음을 의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다윗의 열쇠를 가지셨다는 것은 다윗왕국 곧 메시아 왕국의 절대주권이 오직 주님께 속해 있으며 구원 또한 주님에 의해 좌우되고 있음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구원의 생명과 관련해 빌라델비아 교회의 절대적인 보호자와 보증인이 되어 주시겠다는 의지의 표명입니다. 이처럼 은혜의 왕 노릇하는 권세는 예수님의 구속사역의 성취 안에서 넉넉히 죄의 왕 노릇하는 권세를 제압해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를 전가시켜 줌으로 사죄의 은총과 구원의 은혜를 덧입게 됩니다.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으로 묘사된 주님께서 계속해서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해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니 능히 닫을 사람이 없다”고 강조하십니다(8절). 그러니까 주님께서 다윗의 열쇠를 갖고 계실 뿐만 아니라 빌라델비아 교회 앞에 열린 문까지 열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열어 놓으신 문은 어떤 성격의 문일까요. 계시록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유다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5:5), 또는 ‘다윗의 자손’(22:16)이라고 지칭하십니다. 이는 죄로부터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구속사역과 관련된 표현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다윗의 열쇠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열리게 될 구원의 문을 여는 열쇠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따라서 주님은 당신의 구속사역에 근거해 구원의 문을 이미 열어 놓으셨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주님께서 구속사역의 성취를 통해 구원의 문을 이미 열어 놓으셨기에 어느 누구도 이 문을 능히 닫을 수가 없습니다(8절중). 그러므로 믿음으로 이 구원의 문을 통과한 자는 영원히 구원을 보장받습니다. 어떤 이유로도 결코 상실되거나 무효화되거나 빼앗길 수 없습니다(히 10:14-18, 롬 8:33, 38-39).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효는 영(永)단번(once for all)의 효력을 발생하기 때문입니다(히 10:12).
②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한 칭찬
빌라델비아 교회 또한 서머나 교회처럼 책망을 받지 않은 교회입니다. 특별히 두 가지 사실에 대해 주님께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8절중). 첫째, 적은 능력으로도 주님의 말씀을 지켰다는 사실입니다. ‘적은 능력’이란 당시 빌라델비아 교회가 처해 있던 변변치 못한 외적인 형편과 처지를 가리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빌라델비아 교회 성도들의 사회적 신분과 지위 및 경제적 수준과 활동상에 있어서 미약하기 그지없었다는 지적입니다. 이를테면 소위 개척교회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상태로, 외적으로 자랑하거나 흠모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무명한 교회로 존재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라델비아 교회는 주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데는 일사각오의 자세로 대처했습니다. 교회의 진리성과 진정성의 견지(堅持)와 관련해 빌라델비아 교회가 직면했던 문제는 외적으로 황제숭배와 관련된 물리적인 핍박도 아니요, 내적으로 발람의 교훈이나 니골라당의 교훈, 그리고 이세벨의 교훈 등 기복적이고 세속적인 신앙을 추구하는 혼합주의의 미혹도 아니었습니다. 거짓 유대인들에 의한 사단의 회와의 충돌이었습니다. 이들은 아브라함의 혈통에 근거해 자칭 선민이란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성을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복음을 거부함으로 스스로 사단의 회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표면적 유대인이 참 유대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면적 유대인 곧 아브라함의 참 후손이 되는 복음의 원리(갈 3:29)를 거부함으로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기를 자청한 자들입니다(롬 10:2-3). 이들의 집요한 방해와 핍박에도 불구하고 빌라델비아 교회 성도들은 결코 복음과 진리의 말씀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보다 적극적으로 말씀의 본질을 추구하며 이를 신앙과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살아가는 일에 일체의 타협과 양보와 절충을 불허했습니다. 실로 교회의 생명은 말씀에 의존돼 있으며 말씀의 순수한 전파와 순종력의 발휘는 참 된 교회의 진위를 가름하는 표지(標識)로 기능합니다. 참된 교회를 평가하시는 주님의 기준은 외적인 것에 있지 않습니다. 말씀의 본질을 추구하는 내적인 요소에 의해 좌우됩니다(마 7:21-23, 롬 10:2-3). 말씀의 본질에 접촉된 데서 나와진 행위와 활동이 아닐 진대, 그것은 살았다하는 허울 좋은 이름만 자랑할 뿐 실상은 죽은 행실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 사데 교회의 메시지를 통해 주시는 경종입니다(3:1).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한 칭찬의 두 번째 요소는 주님의 이름을 배반치 않았다는 사실입니다(8절하). 이는 말씀의 본질을 추구하는 것과 깊이 연관됩니다. 주님의 이름을 배반치 않았다는 것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그 분의 말씀의 통치를 받는 일과 관련해 어떤 불이익과 손해와 희생이 요구될지라도 이를 기꺼이 감수하며 오직 믿음과 인내로 신앙의 정절을 지켰음을 가리킵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남은 자들의 신앙자세가 이랬습니다. 아합 왕 당시 북이스라엘은 왕비 이세벨의 충동으로 바알숭배가 전국적으로 만연되었습니다. 이런 패역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당신의 신실한 남은 자 칠천을 섭리적으로 보존해 두심으로 엘리야 선지자를 위로해 주십니다(왕상 19:18).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은 당신의 남은 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사를 진행하시며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현 시대도 예외는 아닙니다(롬 11:4-5). 계시록에 기록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십사만 사천명의 상징적인 수에 해당되는 성도들의 삶 또한 그랬습니다(계 14:4-5). 이들은 세상풍조에 물들지 않았습니다(롬 12:2, 요일 2:15-16). 오직 말씀에 사로잡혀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믿음의 정절자들입니다. 충성된 종들입니다. 이들의 입술에는 거짓말이 없습니다. 궤사(詭詐)가 없습니다. 어떤 열악한 환경가운데서도 시종일관하게 진리의 말씀만을 신앙과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무익한 종의 심정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들이야말로 주님의 이름을 배반치 않는 자들이요 보다 적극적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며 존귀하게 드러내는 자들입니다.
③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
주님은 칭찬에 이어 빌라델비아 교회를 위로하시며 격려해 주십니다(9-11절). 첫째로 자칭 유대인들 중 몇을 빌라델비아 교회 앞에 절하게 하시겠다는 내용입니다(9절). 이는 굴복을 의미합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를 핍박하려던 표면적 유대인들 곧 사단의 회를 오히려 징계하시고 심판하심으로 승리를 안겨 주시겠다고 격려해 주십니다. 당시 표면적 유대인들로 구성된 사단의 회의 특징은 거짓말에서 찾아집니다(9절상). 저들은 하나님의 선민(選民)사상을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에서 찾으려 했습니다. 구원의 도리 또한 율법의 제반 규례들을 지켜 행하는 데서 찾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시며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되심을 거부했습니다. 갈라디아서 기자가 이런 부류의 표면적 유대인들의 주장을 다른 복음으로 정죄하며 신랄하게 비판했던 이유가 이런 거짓 교훈에 근거합니다(갈 1:6-8). 예를 들자면 바울의 회심 전 유대교적 열정은 본질상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한 자의적 숭배신앙의 발동으로서 자기열심 곧 종교적 열심에 불과했던 것입니다(빌 3:5-6). 계시의존적인 여호와 중심의 신앙과는 전혀 관계도 없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빌 3:7-8). 오늘날도 예외는 아닙니다. 한 편으로 여전히 십자가의 복음을 논하면서도 목회 전반에서 신앙을 도구화시켜 말씀의 해석과 적용을 인간의 현세적이고 세속적인 목적을 위해 자의적이고 편의적으로 가르친다면 본질상 위선이요 거짓 교훈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일례로 여기 타이타닉 같은 거대한 호화 유람선이 서쪽을 향해 순항 중에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런데 매일 아침 어느 한 승객이 동쪽을 향해 일정한 거리를 조깅한다고 한다면, 결과적으로 이 승객은 동쪽을 향해 달리는 것일까요 아니면 서쪽으로 진행하는 셈이 될까요. 신앙생활과 목회사역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총체적인 성경계시관 정립의 필요성이 시급히 요구되는 이유가 이런 자기기만적 현상 때문입니다.
한편 빌라델비아 교회 앞에 굴복할 유대인들이 비록 몇 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이는 대표성을 띤다는 의미가 성립됩니다. 사단의 종국적인 패배와 관련해서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의 승리는 주님의 승리와 직결됩니다. 주님의 구속사역의 성취는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하신 치명적인 사건으로(창 3:15) 본질상 사단과의 싸움에서 이미 승리하신 셈입니다(요 19:30, 16:33). 이런 주님의 선(先) 승리를 통해 교회의 종말론적 승리 또한 보장된다는 것이 계시록이 한결 같이 강조하는 중심 주제입니다. 마 28:18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빌 2:10-11입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전투적 교회의 성격을 띠고 있는 지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동시에 승리한 천상의 교회로 존재하고 있음을 계시록은 부단히 증거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지역교회가 비록 환란과 라박과 고난 중에 처해 있을지라도 아주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믿음의 역사와 소망의 인내와 사랑의 수고로 서로의 연약함을 담당하며 짐져가는 가운데 넉넉히 세상을 이길 수 있음이 이런 사실에 기초합니다. 따라서 사단의 회에 대한 빌라델비아 교회의 승리는 모든 교회의 승리를 보증하는 예표로 기능하기에 족합니다.
둘째로 시험의 때를 면케 해 주시겠다는 내용입니다(10절). 본 절에서 ‘시험의 때’란 이후 계속되는 문장 속에서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와 연결됩니다. 여기서 시험이란 심판만을 일방적으로 가리키기 보다는 주님의 초림부터 재림에 이르는 전 기간 동안 교회를 포함해 온 인류가 직면하게 될 다양한 환난과 고난과 재앙까지를 함의하는 것을 가리킵니다(계 6-16장). 그런 의미에서 본 절의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해 주신다’는 의미는 ‘피하게 해 주신다’는 것보다는 ‘시험에 미혹되지 않도록 보전해 주신다’는 의미가 강합니다. 마치 빗속을 우산을 쓰고 걸어 감으로 비를 흠뻑 맞지 않을 수 있듯이 말입니다. 요 17:15입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교회와 성도가 신앙여정 길에 겪는 다양한 시험과 환난과 고난과 관련해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경험에 근거해 단언합니다. 고후 1:10입니다.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과거) 또 건지시리라(현재).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미래).” 이는 바울의 2-3차 전도여행 시 아시아에서 몸소 경험했던 극심한 핍박과 환난으로 살 소망까지 끊어졌던 사건들을 염두에 두고 언급한 내용입니다(고후 1:8-9, 11:23-27).
다른 한편 성경은 시험을 면케 해 주시는 주님의 방법을 이렇게도 설명합니다. 고전 10:13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을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케 하시느니라.”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시험은 그것이 어떤 성격을 띠고 주어지든지 연단의 의미를 담고 있기에 믿음의 인내와 확신을 가지고 대처한다면 넉넉히 감당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더욱 시험의 긍정적인 효과는 성도들로 하여금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냄으로 이에 연달(練達)한 자는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성숙한 믿음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지적입니다(약 1:2-4).
셋째로 주님께서 속히 오실 것이기에 빌라델비아 교회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11절). 본문에서 빌라델비아 교회가 가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주신 주님의 메시지를 분석해 보면 적은 능력을 갖고도 말씀을 철저히 지킨 것, 주님의 이름을 배반치 않았던 확고부동한 믿음의 정절과 신앙의 절개 및 지속적인 믿음의 인내를 들 수 있습니다. 이를 굳게 잡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사단의 미혹과 핍박과 고난이 부단히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고 경종을 울려 주십니다. 이는 신앙경주에서 약속된 상을 잃지 않도록 최선으로 경주하라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히 12:1-2의 말씀입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와 영광은 곧 교회의 영광과 직결됩니다(엡 2:6, 골 3:4). 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승리 안에서 교회의 미래의 영광과 승리가 이미 보증되고 있음을 하늘 보좌의 환상을 통해 머리에 면류관을 쓰고 흰 옷을 입은 24장로들과 흰 옷을 입은 큰 무리들의 상징에 근거해 밝히 증거해 줍니다(계 4:4, 7:9-14).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 교회의 종말론적 승리는 이미 보증돼 있을 뿐 아니라, 현재적으로 이미 소유해 누리고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큰 영광과 기쁨과 위로와 힘과 능력으로 작용하는지 모릅니다. 말씀의 본질에 깊이 접촉돼 이를 신앙과 삶의 도리로 붙들고 살아가는 생명적 활동을 통해 미래의 축복은 이미 현재적으로 경험되고 소유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는 성도가 죽음을 통과해야만 들어가는 미래의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통치를 받는다는 사실을 통해 현재적으로 이미 경험되는 나라입니다(마 12:28, 눅 17:20-21). 하나님 나라의 정체성은 본질에서 통치의 개념과 동질성을 띠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통치의 수단으로 막힘 없이 자율적으로 시행된다는 사실을 통해 극명하게 확인된다는 의미입니다. 마치 아담의 범죄 전 에덴동산의 상태처럼 말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포함해 에덴동산의 모든 피조물과 자연환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완벽한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하나님의 목적하신 대로 경영(통치)되었음을 봅니다. 통치의 개념을 통해서 말입니다. 당시 하나님의 안식은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고 평가하셨던 하나님의 창조질서 곧 통치개념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었습니다. 완벽한 창조질서의 운영을 통해 당시 에덴의 모든 상태는 하나님 나라를 구체적으로 현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의 안식개념은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반영하는 중요한 요소로 기능합니다(신 12:10, 수 21:44, 왕상 4:25, 미 4:4, 슥 3:10).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교회가 하나님의 안식에 이미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은 안식의 실체인 하나님 나라가 ‘말씀의 통치’란 개념을 통해 현재적으로 역사하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는 셈입니다. 성경이 이런 사실을 뒷받침 해 주고 있습니다(마 12:8, 눅 6:5). 이로 인해 말씀이 순수하게 선포되는 바른 교회에 소속돼 있다는 사실은 구원의 지속적인 보장은 물론 현존하는 하나님 나라에 이미 참여함으로 이기는 자에게 주시겠다는 미래적인 약속과 상급 또한 현재적으로 소유해 누린다는 의미가 성립됩니다. 계시의존적인 관점으로 현대교회의 영적 현주소와 실상을 밝히 진단해 볼 필요가 이에 있습니다. 말씀의 본질에서 벗어나 물량적 부흥과 성공지상주의를 표방하는데 집중한다면 이는 비성경적인 관점이기에 말입니다. 자칫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교회로 평가받을 수도 있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늘 교회의 정체성을 점검하며 진단해야하는 이유는 말씀 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교회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④ 이기는 자에게 약속하신 상급
주님께서는 속히 오실 것을 확약하시면서 신앙의 정진을 촉구하십니다. 그러나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평소에 늘 말씀을 지켜 행하는 충성된 종들에게 재림의 시기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믿음의 정절을 지켜나가기만 한다면 승리자에게 수여될 구원의 면류관을 빼앗길 염려는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롬 8:33, 38-39).
계속해서 주님은 이기는 자에게 주실 상급을 구체적으로 약속해 주십니다. 먼저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며 성전으로부터 결코 쫓겨나지 않겠다는 확증입니다.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연합과 통치와 교제를 총체적으로 상징합니다(출 25:8). 곧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하신다는 임마누엘의 신학적 원리를 가시적으로 보여주시는 표상입니다. 임마누엘의 원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을 통해 성취되었고(마 1:23, 요 1:14), 성령님의 강림과 인침 및 내주사역으로 성도들과의 관계 속에서 현실화되었습니다(고전 3:16, 6:19, 고후 1:22, 5:5). 나아가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를 통해 종말론적으로 완성될 것을 계시록은 밝히 증거해 줍니다(계 21:1-3). 따라서 성전의 기둥이 된다는 의미는 하나님과 생명적으로 연합돼 하나님께서 소유하시고 누리시는 일체의 천상적 영광에 확실하게 동참하게 될 것을 확약해 주시겠다는 보증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성전기둥’ 모티브는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당시 빌라델비아 지역은 잦은 지진으로 건물들이 폐허가 되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나 파괴된 건물 중에서도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 있었으니 곧 신전의 기둥들이었습니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해 주시겠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들로서 빌라델비아 교회의 천상적 정체성을 확증시켜 주실 뿐 아니라, 구원의 절대 안전과 영원성을 보장해 주시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인 셈입니다. 이런 사실이 계속 이어지는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통해 확인됩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기둥 됨의 위치와 신분을 결코 상실하지 않으리란 확증 말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들에게 이 보다 더한 축복과 상급이 어디 있겠는지요. 실로 참된 복과 상급의 실체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들이 누리는 구원의 영원한 안전과 보장인 사실이 다시 한번 재확인됩니다.
12절하는 이상의 사실을 다른 각도에서 보충적으로 설명해 줍니다.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예수 그리스도의 새 이름을 이기는 자 위에 (on him who overcomes)새겨주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름이 새겨져 있다는 것은 그 이름의 소유를 뜻합니다. 가령 어느 집에 문패가 달려있다면 그 집은 문패에 쓰인 이름의 소유임을 증거해 줍니다. 서부 개척당시에 방목하는 가축들은 소유주의 확인을 위해 주인의 이름이 새겨진 불에 달군 쇠도장을 엉덩이에 찍어 구별했습니다. 계 7장과 14장에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별하는 방식으로 이마에 어린 양과 하나님의 이름이 쓰인 십사만 사천명이란 상징적인 숫자가 나옵니다(계 7:1-8, 14:1). 계시록은 이들을 가리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라고 설명합니다(계 14:4하).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 이름과 예수 그리스도의 새 이름’을 이긴 자 위에(on him who overcomes) 새겨주신다는 설명은 본질상 동일한 의미로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임을 삼중적으로 보증해 주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이름이 기록된다는 것은 위에서 확인한 대로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과 천국의 시민 됨을 가리킵니다(벧전 2:9, 빌 3:20). 둘째로 예수님의 새 이름을 기록한다는 것은 부활승천하심으로 영화로 관 쓰신 주님의 영광에 동참하게 됨을 의미합니다(골 3:4). 끝으로 새 예루살렘의 이름이 기록된다는 것은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이긴 자들이 종말론적으로 완성될 어린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 된 교회공동체에 속하게 될 것을 보증하는 내용입니다(계 21:2, 21:9-22:5). 계 21:12-14에는 완성된 교회를 상징하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성의 열 두 문과 열 두 기초석에는 각각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의 이름과 어린 양의 열 두 사도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기술합니다. 이는 새 예루살렘 성이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 곧 모든 시대에 존재하는 성도들의 총화를 상징적이며 대표적으로 가리키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어느 시대건 참 된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이미 완성된 종말의 교회에 소속돼 천상의 축복과 영광을 현재적으로 소유해 누리고 있음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이 12절 중반에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는 표현을 통해 확인됩니다. 이는 빌라델비아 교회의 이기는 자에게 약속하신 내용들이 종말론적으로 온전히 성취될 것을 확신시켜 주기 위한 저자의 의도임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마감하면서 주님은 다시 한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청종할 것을 촉구하십니다(13절). 이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은 이를 생명의 도리로 붙잡는 자들에게만 능력으로 역사되며 약속으로 성취될 것과, 모든 시대의 모든 교회공동체를 향해 주시는 영원불변의 말씀임을 시사합니다. 이 모든 사역의 집행은 진리의 영으로 교회 중에 거하시는 성령의 주도적인 역사로 말미암아 관장된다는 것이 주님의 메시지의 요지입니다.
3.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3:14-22)
라오디게아(Laodicea)는 빌라델비아 동남쪽 약 72km, 에베소에서 동쪽으로 약 160km 지점에 위치한 도시로서 기원전 253년경에 셀루시드의 왕 안디오쿠스 2세에 의해 건립된 무역의 중심지입니다. 이후 기원전 133년에 로마의 통치하에 귀속되었으며 로마에 항거했던 다른 도시와는 달리 로마제국에 충성하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라오디게아는 인근의 히에라볼리 및 골로새와 더불어 바울 서신에서 밀접하게 연관된 곳이기도 합니다(골 4:13, 16절). 호크마 종합주석에 따르면 라오디게아는 무역과 교통의 요충지였으며, ‘브루기아 가루’로 알려진 안약과 의학교가 있었고, 활발한 금융거래로 상대적으로 풍요롭고 부유한 생활을 누렸다고 합니다. 반면에 물 사정이 좋지 않아서 인근의 히에라볼리와 골로새로부터 항상 수로를 이용해 물을 공급받아야 했습니다. 한편 라오디게아 교회는 에바브라가 설립했으며(골 4:12-13) 골로새 교회와 함께 바울의 사역에 크게 의존했던 교회입니다.
① 신실하신 하나님으로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삼중적으로 자신의 명칭을 계시해 주십니다(14절). 첫째는 ‘아멘이신 분’입니다. 둘째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신 분’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분’입니다. 이는 총체적인 면에서 라오디게아 교회의 위선적이고 형식적인 실상과 밀접하게 연관된 호칭으로 상대적으로 예수님의 진리성과 진정성을 부각시키고 있는 표현입니다. 먼저 아멘이신 예수님에 대해 살펴봅니다(14절상). ‘아멘이신 분’은 사 65:16의 반영입니다. 요한은 이사야 본문의 ‘진리의 하나님’(the God of the truth/the God whose name is Amen)이란 표현을 차용해 계시록 본문(14절상)의 주님께 적용시킴으로 본질에서 ‘아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진리의 하나님’을 동일시합니다(사 65:15의 ‘진리의 하나님’ 난외주 ‘아멘의 하나님’ 참고). 사도 요한이 ‘아멘이신 분’이란 표현을 사65:16에서 차용해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사야서의 본문의 전후 문맥과 관련된 표현들을 요한이 다른 곳에서도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보다 확실하게 확인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필찬의 요한계시록 주해서인 ‘내가 속히 오리라’(2006, 207)를 참고해 보면 사 65:15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 ‘다른 이름’으로 호칭할 것에 대한 말씀은 계 3:12에서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 및 예수님의 새 이름’으로 기록될 것으로 인용됩니다. 사 65:16하의 “이전 환난이 잊어졌고 내 눈앞에 숨겨졌다“는 내용은 계 21:4하의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는 표현 속에서 의미적으로 차용되고 있음을 봅니다. 사 65:17의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표현은 계 21:1의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문자적으로 그대로 인용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도 요한은 이사야의 본문의 전후 문맥과 관련된 표현을 계시록의 다양한 부분에서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음을 봅니다.
나아가 사 65:16에 언급된 ‘진리의 하나님 곧 아멘의 하나님’이란 표현은 문맥의 흐름상 사 65:17부터 소개되고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묘사된 재창조의 사역과 깊이 연관돼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고 부패한 첫 창조를 회복시키셔서 새 창조를 이루시는데 ‘아멘의 하나님’이 되심을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이처럼 요한은 이사야서에서 새 창조를 이루실 하나님과 관련해 사용되었던 진리의 하나님 곧 아멘의 하나님이란 용어를 계시록 본문에서 예수님께 적용시킴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종말론적인 새 창조(계 21:1)를 이루실 아멘이 되시는 분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필찬은 이처럼 요한이 ‘아멘의 하나님’이란 표현을 통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동등한 분으로 일치시키는 것을 가리켜 ‘고도로 발전된 요한의 기독론’으로 설명합니다(내가 속히 오리라, 2006, 207). 아멘은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듯이 ‘그렇게 되는 것이 심히 합당함을 확증하는 화답’의 의미를 강조합니다. 이로 보건대 계시록 본 절(14절상)에서 예수님을 ‘아멘이신 분’으로 소개하는 내용이 사 65:16에 언급된 ‘진리의 하나님 곧 아멘의 하나님’의 반영으로 해석하게 될 때, 예수님은 첫 창조(잠 8:22, 요 1:1-14, 골 1:15-17, 히 1:1-3) 는 물론 새 창조의 근본이 되심을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사 65:17부터 소개되는 새 창조 사역에 대한 기술은 사 65:16의 ‘아멘의 하나님’(진리의 하나님)에 관한 진술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주님은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신 분’으로 묘사됩니다(14절중). 이는 ‘아멘이신 분’과 본질상 동일한 사상을 내포합니다. 본 절은 계 1:4-5의 일곱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문안을 통해 자신을 계시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5절). 왜냐하면 주님은 하나님의 구속의 뜻을 받들기 위해 하나님과 동등 됨을 스스로 포기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취하셔서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시종일관 충성된 종과 증인의 사역을 성실하게 수행하셨기 때문입니다(빌 2:6-8)입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행할 아멘의 삶을 가장 극명하게 증시(證示)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특별히 요한계시록에서 충성된 증인의 삶은 하나님의 뜻을 받들기 위해 말씀을 지켜 행하는 일과 관련해 죽음을 마다 않고 믿음의 정절과 순결을 보전한 순교의 정신을 강력히 요구합니다(계 7:14, 14:4-5, 20:4). 이런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죽기까지 순종하셨던 하나님의 가장 충성된 종과 증인이 되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성도의 삶의 성격이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고난의 발자취를 좇는 삶일 진대(골 1:24), 진리를 추구하는 데서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다양한 환란과 핍박과 각종 시련과 고난은 미래에 완성된 교회를 통해 누리게 될 영광과 축복과 상급과는 족히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논증이며 위로의 메시지입니다(롬 8:18, 계 21:9-22:5).
마지막으로 주님은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으로 호칭됩니다(14절하). 물론 본문은 첫 창조에 참여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창조사역을 결코 배제하지 않습니다(골 1:15-17, 요 1:1-14, 히 1:1-3). 그럼에도 본 절은 이미 위에서 설명한 대로 사 65:16의 반영으로서 ‘아멘이신 예수님’을 사 65:17의 새 창조 사역과 문맥상 상호 깊이 연결시키는 가운데 새 창조사역의 근본이 되시는 분으로 시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됩니다. 14절상의 ‘아멘이신 분’은 동시에 14절중의 ‘하나님의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 되시는 분’이며 나아가 14절하의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분’과도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 절에서 ‘예수님을 창조의 근본이신 분’으로 지칭할 때, 이는 첫 창조보다는 새 창조에 무게의 중심이 실리는 것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겠습니다(내가 속히 오리라, 2006, 209).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새 창조사역의 근본이 되실 수 있을까요. 이는 계 1:5의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분”과 1:18의 “곧 산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라”고 선언하시는 데서 확인됩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이야말로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 일생 종노릇하던 인생들을 예수님의 구속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하셔서, 예수님의 부활의 새 생명에 연합시켜, 영생의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시기 위해 새롭고 산길(a new and living way, 히 10:20)을 열어 놓으신 결정적인 사건으로 해석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창조, 곧 새 창조의 근본이 되실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을 충족시킨 유일한 분이신 셈입니다. 이런 사실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이기는 자에게 먼저 이기신 분으로서 왕적 통치권의 상징인 하늘 보좌에 함께 앉을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해 주시겠다고 당당하게 보증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21절).
이상의 모습을 통해 자신을 계신하심은 현재 라오디게아 교회가 처한 영적 실상과 밀접하게 연관시키신 의도적인 처사이십니다. 곧 새 창조의 회복을 위한 아멘이 되셔서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 성실하게 수행하신 충성된 종으로 자신을 계시해 주심으로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회복을 촉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② 라오디게아 교회의 미온적인 신앙태도를 책망하심
15절부터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주님의 메시지가 선포되는데 먼저 17절까지는 책망의 말씀이 소개됩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아무런 칭찬의 말씀도 해 주지 않으십니다. 대신 책망으로 시작하십니다.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바 된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이렇다 할 한 마디의 칭찬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비극 중의 비극입니다. 사실상 칭찬의 요소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은 본질에서 죽은 교회나 다를 바 없음을 가리킵니다. 지역교회 중에 이런 교회가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성공지상주의를 추구하며 물량적 부흥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현대교회가 심각하게 고민하며 자신을 성찰해야 할 큰 경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네 행위를 아신다고 말씀하시면서 차든지 덥든지 해야지 미지근한 상태로 지속된다면 토해내치시겠다고 크게 진노의 경고를 발하십니다(15-16절). 이는 에베소 교회처럼 복음에 대한 열정과 감사와 감격을 잃어버림으로 신앙의 매너리즘에 빠져버린 우유부단한 라오디게아 교회의 신앙태도를 미지근한 물에 비유해 은유적으로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라오디게아 교회의 미온적인 신앙태도는 당시 라오디게아가 처한 지리적인 삶의 정황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는 지적입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라오디게아 지역은 물질적인 부유함에도 불구하고 물 사정이 좋지 않아 자체적으로 수요공급이 이루어지질 않았습니다. 대신 인근 골로새와 히에라폴리스로부터 수로를 통해 생활용수를 공급받아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차지도 않다‘는 주님의 지적은 골로새 지역으로부터 공급받던 차고 신선한 물과 연관된 표현이고, ’덥지도 않다‘는 지적은 히에라폴리스로부터 공급받았던 뜨거운 온천수를 배경으로 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골로새와 히에라폴리스로부터 수로를 통해 라오디게아까지 물이 공급되는 과정에서 미지근하게 식어버린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때론 음료수로 마시기에 역겨울 정도로 구토 증세를 유발시키기도 한다는 얘깁니다. 주님께서는 이처럼 미지근하게 식어버림으로 음용(飮用)하기에는 부적절한 물의 상태를 라오디게아 교회의 신앙과 영적 상태에 비교해 은유적으로 지적하시며 책망하고 계신 것입니다. 본 절에서 ’토하여 내치시겠다‘는 것은 본질에서 에베소 교회를 향해 책망하신 것처럼 ’촛대를 옮기겠다‘(계 2:5)고 경고하신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주님의 피 값으로 사신 바 된 몸 된 교회로 인정하지 않으시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입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모든 관계가 단절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록 외적으론 여전히 교회의 모습을 갖추고, 정기적인 예배와 기독교적인 제반 활동이 지속될지라도 하나님과는 무관한 자의적 숭배신앙에 불과할 뿐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더 이상 하나님의 교회일 수 없는 것입니다.
③ 미온적인 신앙태도의 진상규명
이제 17절을 살펴보면 왜 라오디게아 교회의 신앙이 미온적일 수밖에 없었는지의 이유가 밝혀집니다. 한 마디로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기도취적이고 자기기만적인 신앙관에 깊이 빠져있었던 것이 확실합니다. 주님께서 이들의 신앙관의 실상을 낱낱이 고발하십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고 지적해 주십니다. 본문을 통해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점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 분석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외적인 부요와 풍족함에 도취돼 내적인 영적 빈곤과 피폐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물질적인 부요 자체를 문제 삼는다거나 더욱이 죄악시 할 필요는 없습니다. 문제는 이들의 물량적인 풍요를 하나님의 은혜와 언약적 축복의 결과로 착각한 나머지 정작 신앙의 내실을 다지는 본질을 추구하는 신앙관 정립에는 무관심했고 게을렀으며 무지하기까지 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자기만족에 사로잡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영적 무지의 결과로 곧 자기도취적이고 자기기만적인 신앙에 깊이 함몰된 것에 다름 아닙니다. 한 마디로 외화내빈(外華內貧)의 교회였습니다.
이런 면에서 라오디게아 교회는 서머나 교회와는 정반대의 영적 상태에 처해 있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계 2:9). 서머나 교회는 상대적으로 궁핍한 교회였습니다. 경제적으로 넉넉지 못한 교회였습니다. 게다가 외적으로 많은 환난과 핍박에 시달렸습니다. 심지어 순교자까지도 나왔던 신앙의 정절을 굳게 지킨 교회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서머나 교회를 향해 실상은 부요한 교회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계 2:9). 주님의 관점은 겉이 아닙니다. 속입니다. 말씀의 본질을 추구하는 내적 신앙입니다(마 7:21-23, 23:23). 영적으로 외화내빈의 신앙관은 위선과 가식이상 아무 것도 아닙니다. 물량적 부흥과 성공지상주의를 지향하는 현대교회의 신앙관과 교회관 및 목회관이 자칫 외화내빈의 중병에 걸려있다면 시급한 진단과 치료책을 강구해야 될 줄 압니다. 그렇지 못할 때, 현대교회 또한 주님 앞에서 토해내칠 수밖에 없는 자기도취와 자기기만에 깊이 빠져있는 현대판 라오디게아 교회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위에서 확인한 대로 외화내빈의 자기도취와 자기기만적인 신앙에 깊이 빠져있다는 확실한 증거는 주님의 진단을 통해 확인됩니다. 17절하입니다.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이는 한 마디로 영적 중병에 걸린 상태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영적 무지에 대한 진단입니다. 불신자의 영적 상태와 방불했다는 지적입니다. 이는 복음의 결핍단계를 지나 복음의 실종, 복음의 상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외적인 부요와 만족에 사로잡혀 내적인 영적 빈곤과 피폐와 수치를 미처 보지 못한 채 스스로 자기만족과 도취에 깊이 빠져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복음과 무관한 불신자처럼 자기중심적이며 세속적인 가치관의 지배를 적극 받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형편을 현대적 관점에서 조명해본다면 소위 3Bs로 요약될 수 있을 것입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초현대식 예배당 건물소유(Building), 수천, 수만에 달하는 교인확보(Baptism), 그리고 한 주에 걷히는 수억원의 헌금수령액(Budget) 등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교회라도 이런 외적인 사실들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간주해 ‘우리 교회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지 않겠는지요. 그러나 상황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다음으로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는 물질적인 부요와 축복을 하나님의 언약적 축복으로 착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자기만족과 도취에 사로잡힌 나머지 영적 암매와 안주에 빠져들어 갔던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외적인 것에 근거해 사물을 판단하는 데 익숙해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말씀의 본질을 추구함으로 칭찬을 받은 교회로 기록되고 있음을 봅니다(계 3:8하). 빌라델비아 교회의 적은 능력이란 이들의 외적인 조건과 상태를 가리킵니다. 외적인 비교에 있어서는 상대적으로 모든 부분에서 빈약했다는 것입니다. 예배당 규모나 교세에 있어서나 재정적인 면에 있어서도 말입니다. 그래서 어느 것 하나 겉으로 이렇다하게 내세울만한 것이 없었다는 지적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빌라델비아 교회를 극구 칭찬해 주셨습니다. 특별히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않았다”고 강조해 말씀해 주십니다. 이는 바르게 해석된 말씀을 신앙과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시종일관하게 신앙했음을 가리킵니다. 교회의 생명은 말씀의 본질을 추구하는데서 확인됩니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 3:15하)로서 교회의 생명과 보전이 말씀공급에 의존돼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말씀의 본질을 추구하는 계시의존적인 신앙관이 전제되지 않은 단지 외적인 규모의 소형화가 무조건적으로 진리성과 진정성을 대변한다는 주장은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형교회건 소형교회건 간에 주님께서 판단하시는 관건은 내적인 요소의 활성화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현대교회가 자칫 외적인 활동과 성공에 도취된 나머지 내적인 요소들을 소홀히 하거나 과소평가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정죄와 심판을 받게 될 것을 라오디게아 교회를 평가하시는 예수님의 책망을 통해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경청해야 할 것입니다.
④ 주님의 처방책
주님께서는 영적 암매와 영적 피폐에 깊이 빠져있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일방적으로 포기치 않으십니다. 회개를 통한 회복의 기회를 주십니다. 현대교회들이 자칫 라오디게아 교회를 비롯한 일곱 교회를 향해 발하신 책망의 요소들을 갖고 있을지라도 즉각 멸하지 않으시고 경고를 통해 회개케 하심으로 회복의 기회를 주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은혜며 감사한 일인지요. 이런 의미에서 남은 기회를 선용하는 지혜와 진리를 추구하는 일과 관련해 일체의 기득권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전인적인 결단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이제 주님은 18-19절을 통해 라오디게아 교회가 처한 영적 무지와 암매와 자기기만적인 신앙으로부터 회복될 수 있는 처방전을 제시해 주십니다. 처방전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하십니다. 처방전의 내용은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 주님으로부터 불로 연단할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고 하십니다(18절상). 이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자랑하고 있던 외적인 부요와 부자 됨에 대한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 외적인 부요를 추구할 것이 아니라, 내적인 부요에 관심을 갖고 이를 적극 회복시키라는 주문입니다. 지금 라오디게아 교회가 처해 있는 영적 상태는 가히 불신자와 방불한 지경입니다. 따라서 외적으로만 기독교적 치장으로 화려하게 꾸몄을 뿐이지 내막은 사실상 불신자처럼 영적으로 죽은 것과 다름없는 비참한 상태라는 지적입니다. “네 곤고한 것, 가련한 것, 가난한 것, 눈 먼 것, 벌거벗은 것”이 종합적으로 의미하는 바가 이렇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의 처방책은 총체적인 관점에서 구원의 복음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음을 간파하게 됩니다. 환언하면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인 상태는 사실상 복음이 실종된 것과 다름없는 종교집단에 불과하다는 지적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복음과 관련해 볼 때 ‘불로 연단한 금’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이는 잘 정제된 금, 곧 ‘연단된 성숙한 믿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벧전 1:7입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문제는 믿음의 정체성입니다. 본문이 지적하는 바는 단순히 ‘믿습니다’를 연발하면 되는 식의 자기 소견에 좋을 대로의 자의적(恣意的)이고 종교적인 믿음이 아니란 말입니다. 주님의 기뻐하시는 뜻과 일치되는 계시의존적인 믿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마 7:21-23, 롬 10:2-3). 라오디게아 교회는 영적 사망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는 현 상태에서 다른 무엇에 앞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적극 의지하는 데서 비롯된 구원받는 믿음이 시급히 요청되었습니다. 이것이 주님으로부터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는 처방책의 본질입니다. 구원의 믿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전혀 불가능할 뿐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시니라”(행 4:12, 마 1:21). 주님만이 인류의 죄 값을 지불하실 수 있는 유일한 대속물이 되시는 분입니다(막 10:45).
둘째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고 하십니다(18절중). ‘흰 것’과 ‘새것’이란 표현은 계시록 전반에 걸쳐 천상적 성격을 반영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흰 옷을 사라’는 명령은 ‘흰 옷을 더럽히지 않는 것’과는 별개의 의미입니다. 흰 옷을 사는 것이 선행돼야 합니다. 그 다음에 흰 옷을 입고 다니는 가운데 더러워지지 않도록 자주 빨아야 되는 것이 뒤따릅니다(계 3:4). 그런 의미에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흰 옷을 사라는 주문은 복음이 실종되고 상실한 것과 방불한 불신앙적 상태에서 이제 구원의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는 의의 옷, 곧 하나님의 칭의를 덧입으라는 강력한 주문인 셈입니다. 이로 보건대 엄밀한 의미에서 당시 라오디게아 교회는 참 된 그리스도인들이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소위 자칭 그리스도인들로 가득 차 있던 한낱 종교집단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에 이르는 믿음에 이어 흰 옷으로 상징되는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을 것을 강력히 요청하신 것입니다. 계 7:13-14입니다.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 옷을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란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이런 이유로 흰 옷을 사서 입음으로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는 것은 성결한 삶의 요구에 앞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효를 믿음으로 사죄의 은총을 받고 의롭게 될 것에 대한 강력한 요구인 셈입니다(롬 3:22, 28절).
셋째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18절하). 이는 영적 분별력을 회복시켜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통찰력의 발휘를 가리킵니다. 성령의 인침으로 거듭나 구원의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된 자들은 이후 성령의 조명을 통해 말씀을 배우고 깨달아 감으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에서 자라가게 됩니다. 이런 결과로 영적인 분별력과 통찰력이 생겨나게 되고 나날이 계시의 정신을 발휘하게 됨으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 가운데 계시의존적이고 섭리의존적인 신앙관에 깊이 접촉돼 자신의 삶을 천상지향적으로 경영해 가게 됩니다.
이상의 치료책을 처방하신 주님은 계속해서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침체와 무감각과 자기도취적 자만을 책망하시며 회개를 촉구하십니다(19절). 저들의 영적 상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라오디게아 교회를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은 아무리 타락하고 변질된 교회라 할지라도 회개해서 복음의 본질을 회복시킨다면 언제라도 용서와 화해와 교제의 기회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언약의 특징은 불순종에 대해 언약적 징계와 심판은 불가피할지라도 언약 자체가 파기되거나 무효화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⑤ 주님의 약속과 보증
주님은 20절을 통해 회개하고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원하는 자들에게 기꺼이 교제의 기회를 허락해 주실 것을 약속해 주십니다. 오히려 보다 적극적으로 주님께서 준비된 상태로 기다리고 계시다는 사실을 확증시켜 주십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본 절은 19절에서 보듯이 영적 암매와 무감각과 자기기만에 깊이 빠져있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회개와 믿음의 회복을 촉구하는 과정에서 주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흔히 본문을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영접을 촉구하는 과정에서 구원의 증거본문으로 사용하는 것은 본 절의 의미를 자칫 왜곡시킬 수 있습니다. 당시 라오디게아 교회는 명목상 엄연한 교회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제반 기독교 신앙과 활동에 익숙해 있었습니다. 단지 그것이 외향지향적인 것으로 인해 본질상 교회의 생명력을 상실한 것과 방불했다는 지적입니다. 때문에 일방적인 불신자들의 집단만은 아니었습니다. 얼마든지 회개와 갱신을 통한 믿음의 회복과 영적 소생의 가능성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런 맥락 속에서 20절의 말씀이 주어진 것입니다. 본문에서 ‘문을 연다’는 표현은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이 자신들의 영적 침체의 상태를 직시하고 상하고 통회하는 회개의 심정으로 하나님과의 바른 믿음과 교제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원한다면 주님은 언제라도 준비된 상태에서 기꺼이 응해 주시겠다는 확약의 말씀인 것입니다. 따라서 라오디게아 교회 앞에 문은 항상 열려 있는 셈입니다. 한 가지 본문을 통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는 것은 정작 라오디게아 교회의 주인이시며 머리 되신 주님께서 문 밖, 곧 라오디게아 교회 문 밖에 손님처럼 서 계시면서 문을 열어 줄 것을 줄곧 기다리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주객이 전도된 상태로 말입니다. 바로 이런 상황이 라오디게아 교회가 사실상 주님과의 영적 교제와 믿음으로부터 떠나 있음을 결정적으로 제시해 줍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상태가 “곤고함, 가련함, 가난함, 눈 멈, 벌거벗음”으로 평가되는 이유도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보편적으로 물량적인 부흥과 성장을 추구하는 일에 치심하고 있는 현대교회들에게 라오디게아 교회는 시의적절하게 경고와 경종을 울려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주님의 관심이 무엇이며 주님의 원하심이 어디에 있는지 현대교회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통해 냉정하게 자신을 성찰해야 할 줄 압니다. 그렇지 않을 때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주님의 책망의 메시지는 곧바로 현대교회를 향해 선포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21절은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상급으로 주님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십니다. 보좌는 왕적 통치권을 상징적으로 비유합니다. 이는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으로 주님의 왕적 통치권에 동참하게 될 것을 가리킵니다. 주님의 보좌에 동석한다는 사실은 구원의 종말론적 완성과 관련해 교회의 승리와 영광과 축복과 만물에 대한 대리적인 통치권의 발휘를 가장 극명하게 보증하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주님의 보좌에 앉는 통치권의 회복이 이미 이루어졌습니다(엡 2:6, 벧전 2:9, 계 5:10). 이것은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주신 특권이기도 합니다(계 20:4-6). 아울러 미래의 교회의 완성과 승리를 통해 종말론적으로 실현될 것입니다. 계 22:5이 이를 증거합니다.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본문에 약속된 새 창조사역을 통한 교회의 종말론적 승리와 통치권의 회복은 첫 창조인 에덴동산에서의 실패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회복시킨다는 의미가 성립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언약의 핵심사상인 임마누엘 신학의 연합원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속의 종말론적인 완성을 통해 교회와 성전과 에덴을 본질상 하나로 통일되게 합니다(엡 1:10, 계 21:3). 이로서 교회가 주님의 보좌에 함께 앉아 주님의 왕적 통치권에 동참한다는 사실은 일곱 교회의 이기는 자에게 보증하셨던 모든 약속의 내용을 총체적으로 집약해 선포하시는 대표성을 띤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승리한 교회의 피조물에 대한 통치권의 발휘(계 22:5)는 첫 창조 시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지상의 첫 교회)에게 복으로 언약하셨던 창 1:28의 창조언약이 종말론적으로 성취되는 것과 본질상 동질성을 띠게 됩니다.
이제 주 안에서 성령의 소욕을 좇아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자들에게 말씀은 신앙과 생명의 도리로 역사될 것입니다. 이들에게 이기는 자에게 약속하신 천상적 축복이 이미 소유되었고 장차 최종적으로 소유될 것입니다.
Ⅲ. 결론
2장의 에베소 교회, 서머나 교회, 버가모 교회, 두아디라 교회에 이어 3장에서 사데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 그리고 라오디게아 교회를 마지막으로 일곱 교회들에게 주신 주님의 메시지를 모두 살펴봤습니다. 각 교회에게 주신 메시지가 표현은 다를지라도 내용상 상호 중첩되고 때론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역교회의 형편과 상황에 다소 차이가 있을지라도 말씀의 본질을 추구하는 것을 통해 주님과의 관계성을 바르게 정립해야 하는 교회적 사명과 책임에 공통분모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현대교회는 심각한 도전과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하겠습니다. 일취월장하는 첨단과학문명의 발달과 지식의 팽창 및 급변하는 사회 문화적 변혁은 기존의 전통과 가치관에 심각한 도전을 가함으로 포스트모더니즘과 다원주의의 심연 속으로 급속히 빠져 들어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심지어 한 가족 구성원사이에도 다양한 가치관이 공존함으로 세대 간의 갈등과 불화를 야기시키는 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되는 분야가 다름 아닌 종교계입니다. 특별히 기독교회입니다. 절대주권자인 하나님의 말씀을 신앙과 생명의 도리로 붙잡고 살아가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풍조(롬 12:2, 약 4:4, 요일 2:15-16)와 육체의 소욕(골 3:5)과 사단의 미혹(엡 6:12)으로부터 초연한 삶의 자세를 견지한다는 것은 말같이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어쩌면 현실과 사회공동체로부터 소외당할 수 있는 위험마저도 감수해야 합니다. 계시록의 일곱 교회들이 직면했던 문제점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더욱 당시 우상숭배가 공공연하게 보편화되었고 구조적으로 다양한 생활기반들과 연결돼 있었기에 이런 구조적인 악으로부터 벗어나 신앙의 정절을 지킨다는 것은 생존의 위협마저도 감수하지 않으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성경은 상황윤리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현실적인 필요와 생존과 불가피성을 앞세운 타협과 절충과 양보를 결코 용납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행위를 배도와 배역으로 간주합니다. 성경이 요구하는 가치는 말씀에 근거한 절대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런 상황에서 실패의 거울입니다(고전 10:5-11). 불신앙적 삶의 실례요 모범입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이교적 문화와 정치와 종교를 현실적인 필요와 공존의 불가피성을 앞세워 수용했습니다. 그래서 더욱 깊이 가나안의 문화에 동화돼 갔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언약적 심판을 감수해야 했던 것입니다.
현대교회는 아스라엘 백성들이나 초대교회가 직면했었던 문자적인 우상숭배나 음행과 같은 이교적 관습과는 무관한 시대를 살아갑니다. 그렇다고 우상숭배와 음행에 담긴 영적 원리와 교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비록 현대교회가 문자적인 우상숭배와 우상의 제물과 음행과는 무관할지라도 이들 행위 속에 담긴 영적 원리와 가르침은 동일하게 거부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같은 행위 속에 담긴 영적 교훈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일곱 교회를 통해 발람의 교훈, 니골라당의 교훈, 이세벨의 교훈, 자칭 유대인의 회를 통해 경계시켜 주신 내용들과 맥을 같이 합니다. 곧 기복주의, 세속주의, 지성감천주의, 상급주의, 복음적 율법주의, 그리고 신앙주의에 따른 도덕폐기론과 율법무용론 등입니다. 특별히 우상숭배와 음행으로 대표되는 발람의 교훈, 니골라당의 교훈, 이세벨의 교훈의 정체성은 신앙을 도구삼아 육신적이고 현세적인 소원성취와 성공을 이루어보려는 종교적 욕심의 발로를 통해 가장 극명하게 현시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을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기복의 도구로 삼으려는 신앙관은 본질상 우상숭배와 동질성을 띠게 됨으로 하나님을 우상화시키는 패역하고 망령된 행실로 간주된다는 것이 성경의 준엄한 경고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소위 여로보암의 길로 표현되는 북이스라엘의 종교가 이런 사실을 극명하게 증시해 줍니다(왕상 12:25-33). 여로보암의 종교 속에 모세종교의 근간인 율법의 외형은 분명 발견되었습니다(여호와 하나님/제사장/절기). 그러나 본질은 실종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형상화돼 우상으로 전락되었고, 제사장은 레위인이 아닌 일반인으로 대체되었으며, 절기는 정해진 날짜가 아닌 편의성을 좇아 임의로 변경돼 지켜졌습니다. 한 마디로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는 나머지 경건의 모양은 있었으나 경건의 능력 곧 본질은 실종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이 같은 풍조를 말세의 징조로 경고하면서 이들로부터 돌아 설 것을 강력히 촉구합니다(딤후 3:1-5, 4:3-4).
이처럼 신앙의 도구화 현상은 이스라엘 역사는 물론 초대교회 속에서 이미 발견되었습니다. 일세기 교회인 계시록의 일곱 교회 속에서는 더욱 발전되고 구체화된 모습으로 역사했습니다. 중세교회 때는 천년 영적 암흑기로 타락의 절정의 시기였습니다. 하나님은 종교개혁자들을 통해 특별히 구원관과 교회관을 재정립해 주셨습니다. 그 후로 오백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갑니다. 일 세기 교회 속에 복음의 변질과 말씀의 왜곡으로 말미암는 신앙의 도구화 현상이 팽배돼 있었다면 종교개혁 후 오세기가 다가오는 현대교회의 실상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을까요. 얼마나 말씀의 본질에 입각한 진리성과 진정성을 순수하게 보전해 계승하고 있을는지 심각하게 자문자답해봐야 되지 않을는지요. 이런 식의 깊은 자기성찰의 자세야말로 일곱 교회에게 선포하신 주님의 메시지를 통해 현대교회의 영적 현실을 직시하는 가운데, 성경적인 바른 신앙관과 바른 교회관 및 바른 목회관을 재정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작용하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세 교회에게 보낸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
(계 3:1-22)
Ⅰ. 도입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에게 보낸 주님의 메시지는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 유배되었을 당시 성령에 이끌림 받아 환상 중에 받은 내용입니다(계 1:9-11). 2장을 통해 먼저 네 교회인 에베소 교회, 서머나 교회, 버가모 교회, 두아디라 교회에게 보낸 메시지를 살펴봤습니다. 네 교회를 향해 말씀하실 때마다 예수님은 각 교회의 형편과 상황에 따라 자신의 명칭을 달리 계시하시면서 칭찬과 책망과 권면 및 회개와 약속을 확증해 주심으로 각 교회와 자신을 일치시켜 메시지를 전달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에 존재하는 각 지역교회의 형편과 처지에 따라 적절하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심으로 당신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를 적극 돌보고 계심을 시사해 줍니다. 교회가 늘 ‘하나님 앞에서’란 명제 하에서 신앙의 경주를 다짐해야 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이번 3장에서는 나머지 세 교회 곧 사데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주신 주님의 메시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이 또한 동일하게 현대교회를 향해 선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말씀으로 수납해야 합니다.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Ⅱ. 전개
2장을 통해 네 교회에게 주신 주님의 메시지를 주의해 분석해 보면 메시지 간의 동질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칭찬의 내용과 관련해서는 순교의 정신과 각오를 가지고 말씀의 본질을 좇았던 믿음의 정절과 신앙의 순수성을 높이 평가해 주십니다. 그러나 책망과 회개를 촉구하시는 내용과 관련해선 칭찬의 내용을 시종일관하게 견지하지 못한 사실을 엄중하게 지적하십니다. 특별히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복음이 본질에서 이탈하는 현상이 나타났으며, 그 결과 발람의 교훈, 니골라당의 교훈, 이세벨의 교훈 등으로 일컫는바 인간의 탐욕을 부추기는 변질된 복음을 수용해 신앙을 철저하게 도구화시켰음을 지적하시며 회개를 강력히 촉구하십니다. 약속으로 보증해 주신 이기는 자에 대한 상급은 한결 같이 구원의 최종완성을 통해 교회가 신천지에서 누리게 될 종말론적인 영적 축복에 집중되고 있음을 봅니다.
이미 언급한 대로 이상의 내용들과 관련해 한 가지 유념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그것은 일곱 교회들에게 선포된 주님의 메시지는 일곱이란 상징성 안에서 사실상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를 향해 주시는 주님의 직접적인 말씀이란 사실입니다. 특별히 각 교회를 향해 이기는 자에게 보증하신 제반 약속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바르게 연합된 지상의 모든 참 된 교회 속에서 현재적으로 이미 소유해 누리고 있는 영적 축복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로 인해 참 된 진리의 말씀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생명적 연합을 현재적으로 확증하는 데서 미래적인 연합과 일치의 완성이 보증된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성 여부가 사죄와 구원 및 영생의 관건으로 기능하게 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기 때문입니다(요 14:6).
1. 사데 교회에게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3:1-6)
사데(Sardis)는 두아디라 남동쪽 약 48km 지점에 위치한 옛 루디아 왕국의 수도였습니다. 지리적인 여건상 성채가 남쪽만 제외하고 모두가 암벽으로 둘려 있어서 난공불락의 천연적인 요새를 방불케 해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장기간 평화와 안녕을 보장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안일함이 화근이 돼 고레스(B.C, 6세기)와 안티오쿠스(B.C. 3세기)에 의해 침략을 받았습니다.
호크마 종합주석에 의하면 종교적으로는 시벨리 여신을 섬겼으며 황제 숭배가 극심했습니다. 한편 사데 교회의 기원은 분명치 않으나 역사가들에 의하면 사도 요한의 전도로 세워졌고 2세기에 이르러 변증가이며 주석가로 유명했던 멜리토가 이 교회의 감독이 됨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물질적인 부요로 말미암는 내적인 피폐로 인해 사회전반에 걸쳐 만연되었던 무사 안일함과 도덕적 해이와 불감증의 영향이 교회에까지 침투하기에 이릅니다.
① 사데 교회의 영적 생명을 회복시켜 주실 것을 확증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주님은 사데 교회를 향해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로 자신을 계시해 주십니다. 일곱 영이란 하나님의 깊은 곳까지도 통달하시는 성령님의 완전함과 살리는 영이신 성령님의 역사(롬 8:11)를 종합적으로 일컫는 표현입니다. 일곱 별이란 교회의 일곱 사자 곧 지도자들을 포기치 않고 여전히 붙들고 계신 교회의 주인 되심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런 모습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배경에는 사데 교회가 “살았다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고 평가하신 말씀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곧 죽은 것이나 방불한 사데 교회를 직시하시며,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회복시킴으로 영적 생명을 소성시켜 주실 것에 대한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 담긴 모습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데 교회는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전적으로 회복 불가능한 아주 죽은 교회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현대 교회가 온갖 자의적 숭배요소와 세속성으로 가득 찼다고 할지라도, 그래서 사실상 죽은 사데 교회와 방불한 요소들이 가득할지라도 여전히 남은 바 죽게 된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를 굳게 회복시켜 나갈 때 현대 교회 또한 재생의 가능성과 확실성이 보장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잘못 된 것을 직시해 이를 철저히 회개함으로 모든 악한 것과 우매한 것으로부터 자신을 회복시키려는 강력한 의지의 결단이 요구된다고 하겠습니다.
② 살았으나 실상은 죽은 사데 교회
주님은 사데 교회의 정체성을 살았다하는 이름만 가진 실상은 죽은 교회로 평가하십니다. 여기서 ‘살았다하는 이름만 가졌다’는 것은 교회의 내적 생명력을 상실한 형식적인 교회를 가리킵니다. 외형적으로는 온갖 기독교적인 요소와 행위들로 화려하게 치장돼 있어서 아무런 하자가 없는 듯 정상적인 교회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는 지적입니다. 그러나 내적 본질과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네 행위를 아신다’(1절하)고 하신 표현 속에서 이런 사실들이 구체적으로 확인됩니다. 다시 말해 사데 교회의 다양한 기독교적 활동은 정작 살았다고 하는 내적 생명력의 발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실상은 죽은 것과 방불한 외적인 행위와 깊이 관련돼 있었을 뿐이란 지적입니다. 결과적으로 사데 교회의 활발했던 기독교적 행위는 생명력을 상실한 데서 취해진 단지 종교 활동에 불과했다는 주님의 평가입니다.
현대 교회가 이런 위험성에 얼마든지 노출될 수 있습니다. 현대 교회 또한 만연돼 가는 인본주의와 세속주의의 영향권에서 아주 자유로울 수 없다보면 교회운영과 목회방향성 및 신앙관의 형성이 자연스럽게 사람중심으로 무게의 중심이 이동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열망하며 추구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요삼 4절, 딤전 2:4), 사욕을 좇아 사람을 즐겁게 하는 일에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습니다(딤후 4:3-4). 결과적으로 기독교적인 모양과 치장은 발견되는데 정작 기독교의 본질인 경건의 능력은 실종되게 마련입니다(딤후 3:5). 기독교의 외적 요소들인 예배와 기도와 헌금 및 찬양과 각종 교육 및 봉사와 구제 등 제반 활동들은 철저히 본질에 깊이 접촉된 데서부터 나와진 자율적인 순종의 열매로서 기능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할 때 종교적 활동에 불과한 나머지 형식 이상 아무 것도 아닌 셈이 됩니다. 경건의 모양만 있을 뿐 본질인 능력을 부인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실상은 죽은 교회’라고 평가하십니다. 여기서 사데 교회가 죽었다는 것은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외적으로는 다양한 기독교적 활동을 전개시켜 나감으로 살아있는 교회처럼 보일지라도 교회의 표지와 속성을 가리키는 본질을 추구하는 내적 생명력을 상실함으로 죽은 교회와 다름없다는 지적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3-1649) 제 25장 5항에 따르면 “지상에서는 아무리 순수한 교회들일지라도 혼잡과 과오에 빠질 수 있다. 심지어 어떤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 사단의 공회가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지상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교회가 있을 것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본 신앙고백서에 따르면 교회 중에는 거짓 교회와 참 교회, 그리고 심지어 사단적인 교회까지도 존재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 종교개혁자들은 개혁된 교회가 지속적으로 개혁되지 않으면 반드시 변질될 수밖에 없음을 경고합니다. 여기서 개혁의 진정한 의미는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는가에 대한 말씀의 본질의 회복을 가리킵니다. 말씀의 도구화가 아닌 계시의존 사색신앙으로서 말씀의 목적화 말입니다. 인간의 죄성과 사단의 집요한 미혹으로 말미암아 지속적인 개혁이 수반되지 않을 때 신앙의 변질과 교회의 세속화는 불가피하다는 것이 개혁자들의 관점이었습니다.
장수민은 그의 요한계시록 강해에서 죽은 교회와 방불했던 사데 교회와 관련해 교회의 수명(壽命) 문제를 제기합니다(요한계시록 주해서, 1999, 352). 어느 한 곳의 지역교회가 일정기간 외적인 성공과 부흥 일변도의 물량주의적 성장을 시도하다보면 반드시 죽게 된다는 얘깁니다. 여기서 교회의 죽음과 관련된 수명의 문제는 그 지역에서 한 교회가 아주 없어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존속합니다. 그럼에도 주님으로부터 사망선고를 받은 교회로 판정받게 되는 것은 교회의 대형화와 비대화로 인해 다양한 활동은 극대화시킬 수 있을지라도 정작 교회의 내적 생명력을 좌우하는 유기체적 속성을 잃게 됨으로 지체간의 인격적인 교제가 더 이상 보존될 수 없다는 지적입니다. 따라서 장수민은 교회의 생명을 외적인 성장에서 찾기보다 내적인 교회됨의 본질에서 찾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으로서 지체 간 생명적 연합으로 말미암는 유기체적인 영적 교제와 교통이 말씀을 매개로 교감되며 활성화돼야 합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교회의 생명은 외적 활동과 물량에 있지 않습니다. 말씀의 본질을 추구하는 내적 생명력의 발휘에 철저히 의존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사데 교회가 부정적인 의미의 죽은 교회를 밝히 증시해 준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이상의 논지는 대형교회를 일방적으로 매도하거나 소위 개척교회로 불리는 소형교회를 상대적으로 예찬하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소형교회라고 할지라도 무조건적으로 정상적인 교회로 평가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데 교회를 향해 주님은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세워 회복시켜 나갈 것을 강력히 주문하십니다(2절상). 여기서 ‘남은 바 죽게 된 것’이란 교회의 정체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곧 말씀의 본질을 의미합니다. 사데 교회가 전체적으로는 죽은 교회나 방불하지만 그래도 한 가닥 생명의 보존을 위한 실낱같은 희망이 남아 있다는 지적입니다. 대형교회나 소형교회를 막론하고 근본에서 말씀의 본질을 추구하는 데서 가능한 진리성과 진정성을 상실한다면 더 이상 주님의 몸 된 교회로 평가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 3:15하)로서 바르게 해석된 말씀만이 교회의 생명을 좌우합니다. 다시 말해 교회의 생명은 말씀에 의존돼 있고 말씀은 교회의 생명의 원천으로 기능합니다. 따라서 말씀의 본질에 접촉된 데서 나와진 행위만이 정당성을 인정받습니다. 그렇지 못할 때 자의적 숭배신앙으로 판정되며 자기 의와 열심으로 평가될 뿐입니다. 이는 불복종적이며(롬 10:2-3) 불법적인 신앙행위(마 7:21-23)라고 성경은 엄히 경고합니다.
사데 교회의 다양한 활동성은 외부적으로 살아있는 교회, 능력있는 교회, 부흥하고 성공한 교회의 모습으로 비춰졌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데 교회의 활동과 열심을 지적하시면서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했다”고 평가하십니다(2절하). 물론 본 절에서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이란 완전한 행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단지 사데 교회가 최선을 다해 경주했던 기독교적 활동이 주님 보시기에는 전혀 다른 차원의 자의적 숭배신앙의 발로에서 나와진 자기 열심에 불과했다는 평가이십니다. 성경은 이를 불법적이고 불복종적인 열심으로 평가한다는 사실을 위에서 이미 확인한 바 있습니다.
나아가 이들의 행위가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치 못하였다는 사실은 이들이 갖고 있었던 복음의 본질이 변질되었음을 시사합니다. 외적 행위는 내적인 마음의 생각이 겉으로 표출되는 것이기에 바른 복음은 복음에 합당한 열매 곧 바른 행동을 촉구하기 마련입니다. 롬 8:5-6입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이로 보건대 사데 교회의 사망선고는 단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타락에 기인한 것이 주원인이 아닙니다. 듣고 믿음으로 받았던 복음의 변질에 있었습니다.
한편 주님은 사데 교회의 형식적이고 가식적인 신앙관을 일방적으로 정죄하지만 않으십니다. 회개를 촉구하시며 심판을 경고하심으로 치유의 기회를 주십니다(3절). 이미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1절)로 자신을 계시하신 데서 사데 교회가 아주 죽지 않았으며, 따라서 회복의 여지가 남아 있음을 시사하신 바 있습니다. 치료책은 세 가지 명령을 통해 주어집니다. 본질에서 에베소 교회에게 주신 치유책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먼저 복음을 처음에 어떻게 받았으며 들었는지를 깊이 ‘생각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첫 사랑을 버렸으니 어디서 떨어진 것을 먼저 생각하라고 명하셨던 에베소 교회의 경우와 본질에서 동질성을 띱니다(2:5). 반복되는 일상의 삶에 지쳐 깊은 매너리즘에 빠짐으로 신앙의 활기와 영성을 잃어갈 때, 처음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회복시키는 것이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될 것임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마치 결혼생활의 권태기에 접어든 부부가 이를 극복하기 위한 일환으로 과거 연애시절의 즐거웠던 추억과 신혼의 감미로웠던 삶을 되돌아보며 현실을 재해석하는 방식으로 위기를 넘길 수 있듯이 말입니다.
다음으로 ‘지키라’는 것입니다. 이는 유지하다란 의미로 이미 들었고 믿음으로 받았던 복음과 진리의 말씀들을 회복시켜 굳게 붙잡으라는 주문입니다. 곧 순종의 삶으로 연결시키라는 명령이십니다. 믿음은 진리의 말씀을 들음에서 나지만(롬 10:17) 들은 진리의 말씀을 생명의 도리로 붙잡고 살아가는 순종력의 발휘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죽은 믿음과 다를 바 없습니다(약 2:17, 26절). 믿음은 행함으로 온전해지기 때문입니다(약 2:22). 그런 의미에서 진리와 믿음과 순종은 신앙의 삼대 요소로 상호 보완적이고 의존적으로 기능합니다.
셋째는 철저히 회개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도 동일하게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본질의 회복에 근거한 처음 사랑과 처음 행위의 재정립은 회개가 수반되지 않는다면 허사로 끝납니다. 아무리 처음 상태를 생각하고 회복시켜 지킨다고 할지라도 먼저 자신의 잘못된 현실을 직시하며 성찰하는 데서 비롯된 적극적인 시인과 깊은 뉘우침, 그리고 전인적인 회개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본질의 회복이란 언어의 유희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회개란 단순한 잘못의 시인과 이제까지의 과오를 중단하는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좇는 일을 적극 추구하는 가치관과 인생관의 대전환까지를 포함합니다. 말하자면 단지 차선 변경이 아닌 180도 방향전환을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회개치 않는 교회를 주님은 언약적 징계를 통해 심판하시겠다고 경고하십니다. 그것은 극단적인 경우 에베소 교회를 향한 주님의 경고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듯이 촛대를 옮기는 방식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생명력 상실로 인해 사망선고를 받은 유명무실한 교회 그리고 끝내는 교회의 황폐화와 사라짐까지를 포함합니다.
오늘날 현대교회가 외적인 치장과 기독교적인 활동 및 물량적인 것을 잣대로 교회의 부흥과 목회의 성공여부를 평가하려 한다면 큰 우(愚)를 범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사데 교회를 진단하시며 평가하셨듯이 자칫 살았다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교회로 판정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데 교회는 복음의 본질로부터 이탈되었습니다. 복음과 진리에 바르게 접촉된 데서 주어지는 영적 기쁨과 위로와 평강을 상실했습니다. 대신 외적인 활동과 부요함에 만족하며 허상을 좇는 형식적인 교회로 존재했을 뿐입니다. 교회의 생명은 외부적인 활동과 업적에 있지 않습니다. 교회의 생명은 말씀의 본질에 깊이 접촉돼 이를 생명의 도리로 붙잡고 살아가는 적극적인 순종력의 발휘에 좌우됩니다. 현대교회가 자칫 사람을 즐겁게 하는 데 치우쳐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는 데 급급한 나머지 말씀의 본질을 추구하는 경건의 능력을 등한히 여긴다면 사데 교회에게 주신 동일한 책망을 결코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데 교회를 향해 주신 메시지를 현대교회에게 주시는 주님의 음성과 경고로 들을 수 있는 복된 귀를 가져야 될 줄 압니다.
③ 흰 옷을 입은 남은 자
비록 사데 교회 전체가 대부분 깊은 영적 암매에 빠져 자의적 숭배신앙에서 비롯된 종교적 활동에 사로잡혀 형식적인 신앙생활로 일관하고 있을지라도 소수의 남은 자가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들을 가리켜 “그 옷을 더럽히지 않는 자 몇 명”,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는 합당한 자” 등으로 묘사해 소개해 주십니다. 사실 사데 교회가 여전히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고 또한 실낱같은 한 줄기 생명의 불씨를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이들 소수의 남은 자들에 의해 복음과 진리의 생명력이 아직 잔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시대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남은 자를 섭리적으로 보존하셔서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사를 집행해 가신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롬 11:4-5, 왕상 19:18). 이들은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않으며,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만을 받들어 추구하는 일을 생명처럼 소중하게 붙들고 살아가는 자들로 존재합니다(계 14:4-5). 주님은 사데 교회에 속한 이들을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는 합당한 자“로 묘사해 설명하십니다. 본 절에서 ‘흰 옷을 입었다’는 표현은 계시록 전반을 통해 두 가지 의미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그 옷을 씻어 의롭게 된 자들을 가리킵니다(계 7:9-14).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 하나님의 친 백성들을 총괄적으로 지칭합니다(롬 3:23-24, 28절). 다른 하나는 세속에 물들지 않는 성결의 삶을 가리킵니다(계 19:7-8, 롬 12:2, 요일 2:15-16, 갈 5:16). 이는 점진적인 성화의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함으로 의롭게 될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천상지향적인 새로운 가치관의 정립으로 인해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그 분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날로 심화시켜 나가는 성숙한 교제의 삶을 가리킵니다. 이들이 ‘합당한 자’로 인정을 받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복음의 본질에 바르게 접촉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합당하게 연합된 자들만이 사죄의 은총을 입어 구원을 받고 의롭다고 인정을 받으며 하나님의 자녀와 소유된 백성으로 편입된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이들은 큰 환란에서 나오는 자들로 어떤 경우라도 흰 옷을 더럽히지 않고 주님과 동행함으로 믿음의 정절을 지키는 합당한 자들로 존재합니다. 정금은 풀무 불같은 모진 제련의 연단과정을 통해 나오게 됩니다. 죄성으로 말미암는 육체의 정욕과 세상의 풍조 및 사단의 세력들(엡 2:2-3)과의 적대적인 대치상태에 직면해 있는 성도들의 신앙생활은 성격상 전투적인 삶의 전개가 불가피합니다(창 3:15). 지역교회에 속한 하나님의 남은 자들의 정체성이 이렇습니다.
④ 승리자에게 약속하신 세 가지 상급
주님께서는 일곱 교회들을 향해 한결 같이 이기는 자가 받을 종말론적인 상급에 대해 약속해 주십니다. 사데 교회도 예외는 아닙니다. 종교적인 활동만 무성하고 말씀의 본질을 추구하는 데서 나와지는 진리성과 진정성을 상실함으로 사실상 죽은 교회나 방불했던 사데 교회를 향해서도 주님은 회개를 촉구하심으로 승리자의 반열에 설 수 있음을 약속해 주십니다. 주님은 세 가지를 약속해 주십니다.
첫째, 이기는 자는 흰 옷을 입게 될 것을 약속하십니다. 사데 교회는 당시 현존했던 다른 교회에 비해 외부적인 핍박이나 이단적인 교훈의 악영향을 크게 받지 않은 것으로 확인됩니다. 반면 진리를 사모하는 열정을 상실한 채, 자의적 숭배신앙을 적극 추구함으로 다양한 종교 활동(1절하)을 앞세워 스스로 자족하는 형식주의 신앙이 팽배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교회의 생명이 말씀에 의존돼 있음을 감안할 때, 사데 교회를 향해 말씀하신 ‘이기는 자’란 말씀의 본질을 회복시켜 이를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살아가는 계시의존적인 신앙관의 소유자들을 염두에 둔 표현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들에게 흰 옷을 입게 될 것을 약속해 주십니다. 위에서도 이미 언급했듯이 ‘흰 것’과 ‘새 것’이란 표현은 계시록 전반에서 신천지의 성격과 밀접하게 연관된 개념을 담고 있습니다.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서 큰 소리로 외치는 흰 옷 입은 큰 무리“(계 7:9)와 ”새 하늘과 새 땅“(계 21:1) 등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기는 자는 흰 옷을 입게 될 것’이란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들이 계속해서 자기부인을 통해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가운데 말씀의 통치를 적극적으로 받아 누리는 구별된 순종의 삶을 총체적으로 가리킵니다. 이들이 신천지에서 승리한 교회의 모티브를 통해 칭의의 완성에 이르게 될 것을 약속하시는 내용입니다. 그 때에 현재의 예비적인 칭의의 상태가 완전한 의의 상태로 성취될 것입니다. 구속사의 진행과 관련해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의 원리 속에서 말입니다.
둘째, 이기는 자의 이름을 반드시 생명책에서 흐리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생명책이 의미하는 상징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돼 천국시민으로서의 영생의 삶을 확실하게 보증한다는 의미를 갖습니다(빌 3:20, 눅 10:20). 이는 둘째 사망 곧 지옥의 불 못에 들어가는 종말론적인 심판과 형벌로부터 제외되는 것을 가리킵니다(계 21:15). 따라서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의미는 미래적인 영생의 삶이 보장되었을 뿐만 아니라, 현재적으로 이미 영생의 삶을 소유해 누리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요 5:24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본문에서 ‘영생을 얻었다’는 표현은 현재형의 시제로서 이미 영생을 현재적으로 소유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따라서 성도들의 삶의 성격은 여기서부터 부활의 생명인 영생의 생명력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갈 2:20)이란 표현이 이런 사실을 뒷받침 해 줍니다. 본문의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란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생명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삶의 성격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않겠다’는 것은 영생의 삶에 대한 영원한 안전과 보장을 확약하는 표현입니다. 이런 이유로 생명책에 한 번 녹명된 이름은 어떤 이유로도 중도에서 취소되거나 무효화될 수 없습니다(롬 8:33, 38-39). 구원의 정체성은 창세전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의 원리에 근거하고 있으며(엡 1:4-6),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효 또한 영원하고 영속적이며(히 10:12-18), 구원의 보증의 영이신 성령의 인침과 내주의 역사도 영원성을 띠고 있기 때문입니다(엡 1:13, 고후 1:22, 요 14:16).
셋째, 이기는 자의 이름을 하나님 앞과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본문은 마 10:32의 반영입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여기서 ‘이름을 시인하겠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돼 그에게 부속된 자임을 공적으로 확실하게 증거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는 이기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효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과 하나님 나라에 소속된 자로서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며 성결의 삶을 살았음을 보증함에 다름 아닙니다.
결과적으로 이기는 자는 신천지에서의 종말론적인 구원의 완성과 영생의 실질을 철저하게 보장받게 될 것입니다. 참 된 지역교회의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인 시인에 이미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은 전투하는 교회원의 신분으로 큰 위로와 힘과 능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롬 8:34, 히 7:25).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눈동자와 같이 지켜 보호해 주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시 121:8).
2.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3:7-13)
빌라델비아(Philadelphia)는 사데 동남쪽 약 40km 지점에 위치한 고원 도시로 포도 생산지로 유명했습니다. 빌라델비아란 도시 이름은 버가모 왕 아탈러스 빌라델버스 Ⅱ세가 이 도시를 건설했으므로(BC 159-138) 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호크마 주석에 따르면 빌라델비아에는 이교 신전과 각종 종교행사가 많았고 아시아가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침략을 받았을 때 유일한 기독교의 보루로서 신앙적인 면에서 가장 칭찬을 받은 지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나 단지 암미아라는 여선지자가 이 교회를 관할하며(AD 100-160) 큰 부흥을 이뤘다고 전해집니다.
① 메시아 왕국의 열쇠를 가지신 분으로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해 주님은 자신을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이”로 계시해 주십니다(7절). 본문에서 ‘거룩하고 진실한 분’으로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은 예수님의 신성과 메시아성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막 1:24, 행 2:27, 히 7:26, 요일 5:20). 특별히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는 사 22:15-22을 반영합니다. 본문에서 당시 유다 왕국의 국고의 열쇠를 맡았던 사람은 셉나라는 궁내대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주인 집에 수치를 끼치게 됨으로 여호와 하나님은 셉나에게 맡겼던 국고의 열쇠를 박탈하고 대신 하나님의 종 엘리아김에게 다윗의 열쇠를 맡기는 과정에서 “내가 또 다윗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다윗 집의 열쇠를 엘리아김의 어깨에 두었다는 표현은 유다 왕국의 출입과 모든 살림살이를 관장함으로 왕으로부터 절대적인 신임과 막강한 권세와 책임을 부여받았음을 의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다윗의 열쇠를 가지셨다는 것은 다윗왕국 곧 메시아 왕국의 절대주권이 오직 주님께 속해 있으며 구원 또한 주님에 의해 좌우되고 있음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구원의 생명과 관련해 빌라델비아 교회의 절대적인 보호자와 보증인이 되어 주시겠다는 의지의 표명입니다. 이처럼 은혜의 왕 노릇하는 권세는 예수님의 구속사역의 성취 안에서 넉넉히 죄의 왕 노릇하는 권세를 제압해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를 전가시켜 줌으로 사죄의 은총과 구원의 은혜를 덧입게 됩니다.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으로 묘사된 주님께서 계속해서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해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니 능히 닫을 사람이 없다”고 강조하십니다(8절). 그러니까 주님께서 다윗의 열쇠를 갖고 계실 뿐만 아니라 빌라델비아 교회 앞에 열린 문까지 열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열어 놓으신 문은 어떤 성격의 문일까요. 계시록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유다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5:5), 또는 ‘다윗의 자손’(22:16)이라고 지칭하십니다. 이는 죄로부터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구속사역과 관련된 표현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다윗의 열쇠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열리게 될 구원의 문을 여는 열쇠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따라서 주님은 당신의 구속사역에 근거해 구원의 문을 이미 열어 놓으셨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주님께서 구속사역의 성취를 통해 구원의 문을 이미 열어 놓으셨기에 어느 누구도 이 문을 능히 닫을 수가 없습니다(8절중). 그러므로 믿음으로 이 구원의 문을 통과한 자는 영원히 구원을 보장받습니다. 어떤 이유로도 결코 상실되거나 무효화되거나 빼앗길 수 없습니다(히 10:14-18, 롬 8:33, 38-39).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효는 영(永)단번(once for all)의 효력을 발생하기 때문입니다(히 10:12).
②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한 칭찬
빌라델비아 교회 또한 서머나 교회처럼 책망을 받지 않은 교회입니다. 특별히 두 가지 사실에 대해 주님께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8절중). 첫째, 적은 능력으로도 주님의 말씀을 지켰다는 사실입니다. ‘적은 능력’이란 당시 빌라델비아 교회가 처해 있던 변변치 못한 외적인 형편과 처지를 가리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빌라델비아 교회 성도들의 사회적 신분과 지위 및 경제적 수준과 활동상에 있어서 미약하기 그지없었다는 지적입니다. 이를테면 소위 개척교회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상태로, 외적으로 자랑하거나 흠모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무명한 교회로 존재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라델비아 교회는 주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데는 일사각오의 자세로 대처했습니다. 교회의 진리성과 진정성의 견지(堅持)와 관련해 빌라델비아 교회가 직면했던 문제는 외적으로 황제숭배와 관련된 물리적인 핍박도 아니요, 내적으로 발람의 교훈이나 니골라당의 교훈, 그리고 이세벨의 교훈 등 기복적이고 세속적인 신앙을 추구하는 혼합주의의 미혹도 아니었습니다. 거짓 유대인들에 의한 사단의 회와의 충돌이었습니다. 이들은 아브라함의 혈통에 근거해 자칭 선민이란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성을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복음을 거부함으로 스스로 사단의 회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표면적 유대인이 참 유대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면적 유대인 곧 아브라함의 참 후손이 되는 복음의 원리(갈 3:29)를 거부함으로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기를 자청한 자들입니다(롬 10:2-3). 이들의 집요한 방해와 핍박에도 불구하고 빌라델비아 교회 성도들은 결코 복음과 진리의 말씀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보다 적극적으로 말씀의 본질을 추구하며 이를 신앙과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살아가는 일에 일체의 타협과 양보와 절충을 불허했습니다. 실로 교회의 생명은 말씀에 의존돼 있으며 말씀의 순수한 전파와 순종력의 발휘는 참 된 교회의 진위를 가름하는 표지(標識)로 기능합니다. 참된 교회를 평가하시는 주님의 기준은 외적인 것에 있지 않습니다. 말씀의 본질을 추구하는 내적인 요소에 의해 좌우됩니다(마 7:21-23, 롬 10:2-3). 말씀의 본질에 접촉된 데서 나와진 행위와 활동이 아닐 진대, 그것은 살았다하는 허울 좋은 이름만 자랑할 뿐 실상은 죽은 행실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 사데 교회의 메시지를 통해 주시는 경종입니다(3:1).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한 칭찬의 두 번째 요소는 주님의 이름을 배반치 않았다는 사실입니다(8절하). 이는 말씀의 본질을 추구하는 것과 깊이 연관됩니다. 주님의 이름을 배반치 않았다는 것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그 분의 말씀의 통치를 받는 일과 관련해 어떤 불이익과 손해와 희생이 요구될지라도 이를 기꺼이 감수하며 오직 믿음과 인내로 신앙의 정절을 지켰음을 가리킵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남은 자들의 신앙자세가 이랬습니다. 아합 왕 당시 북이스라엘은 왕비 이세벨의 충동으로 바알숭배가 전국적으로 만연되었습니다. 이런 패역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당신의 신실한 남은 자 칠천을 섭리적으로 보존해 두심으로 엘리야 선지자를 위로해 주십니다(왕상 19:18).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은 당신의 남은 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사를 진행하시며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현 시대도 예외는 아닙니다(롬 11:4-5). 계시록에 기록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십사만 사천명의 상징적인 수에 해당되는 성도들의 삶 또한 그랬습니다(계 14:4-5). 이들은 세상풍조에 물들지 않았습니다(롬 12:2, 요일 2:15-16). 오직 말씀에 사로잡혀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믿음의 정절자들입니다. 충성된 종들입니다. 이들의 입술에는 거짓말이 없습니다. 궤사(詭詐)가 없습니다. 어떤 열악한 환경가운데서도 시종일관하게 진리의 말씀만을 신앙과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무익한 종의 심정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들이야말로 주님의 이름을 배반치 않는 자들이요 보다 적극적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며 존귀하게 드러내는 자들입니다.
③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
주님은 칭찬에 이어 빌라델비아 교회를 위로하시며 격려해 주십니다(9-11절). 첫째로 자칭 유대인들 중 몇을 빌라델비아 교회 앞에 절하게 하시겠다는 내용입니다(9절). 이는 굴복을 의미합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를 핍박하려던 표면적 유대인들 곧 사단의 회를 오히려 징계하시고 심판하심으로 승리를 안겨 주시겠다고 격려해 주십니다. 당시 표면적 유대인들로 구성된 사단의 회의 특징은 거짓말에서 찾아집니다(9절상). 저들은 하나님의 선민(選民)사상을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에서 찾으려 했습니다. 구원의 도리 또한 율법의 제반 규례들을 지켜 행하는 데서 찾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시며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되심을 거부했습니다. 갈라디아서 기자가 이런 부류의 표면적 유대인들의 주장을 다른 복음으로 정죄하며 신랄하게 비판했던 이유가 이런 거짓 교훈에 근거합니다(갈 1:6-8). 예를 들자면 바울의 회심 전 유대교적 열정은 본질상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한 자의적 숭배신앙의 발동으로서 자기열심 곧 종교적 열심에 불과했던 것입니다(빌 3:5-6). 계시의존적인 여호와 중심의 신앙과는 전혀 관계도 없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빌 3:7-8). 오늘날도 예외는 아닙니다. 한 편으로 여전히 십자가의 복음을 논하면서도 목회 전반에서 신앙을 도구화시켜 말씀의 해석과 적용을 인간의 현세적이고 세속적인 목적을 위해 자의적이고 편의적으로 가르친다면 본질상 위선이요 거짓 교훈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일례로 여기 타이타닉 같은 거대한 호화 유람선이 서쪽을 향해 순항 중에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런데 매일 아침 어느 한 승객이 동쪽을 향해 일정한 거리를 조깅한다고 한다면, 결과적으로 이 승객은 동쪽을 향해 달리는 것일까요 아니면 서쪽으로 진행하는 셈이 될까요. 신앙생활과 목회사역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총체적인 성경계시관 정립의 필요성이 시급히 요구되는 이유가 이런 자기기만적 현상 때문입니다.
한편 빌라델비아 교회 앞에 굴복할 유대인들이 비록 몇 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이는 대표성을 띤다는 의미가 성립됩니다. 사단의 종국적인 패배와 관련해서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의 승리는 주님의 승리와 직결됩니다. 주님의 구속사역의 성취는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하신 치명적인 사건으로(창 3:15) 본질상 사단과의 싸움에서 이미 승리하신 셈입니다(요 19:30, 16:33). 이런 주님의 선(先) 승리를 통해 교회의 종말론적 승리 또한 보장된다는 것이 계시록이 한결 같이 강조하는 중심 주제입니다. 마 28:18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빌 2:10-11입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전투적 교회의 성격을 띠고 있는 지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동시에 승리한 천상의 교회로 존재하고 있음을 계시록은 부단히 증거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지역교회가 비록 환란과 라박과 고난 중에 처해 있을지라도 아주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믿음의 역사와 소망의 인내와 사랑의 수고로 서로의 연약함을 담당하며 짐져가는 가운데 넉넉히 세상을 이길 수 있음이 이런 사실에 기초합니다. 따라서 사단의 회에 대한 빌라델비아 교회의 승리는 모든 교회의 승리를 보증하는 예표로 기능하기에 족합니다.
둘째로 시험의 때를 면케 해 주시겠다는 내용입니다(10절). 본 절에서 ‘시험의 때’란 이후 계속되는 문장 속에서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와 연결됩니다. 여기서 시험이란 심판만을 일방적으로 가리키기 보다는 주님의 초림부터 재림에 이르는 전 기간 동안 교회를 포함해 온 인류가 직면하게 될 다양한 환난과 고난과 재앙까지를 함의하는 것을 가리킵니다(계 6-16장). 그런 의미에서 본 절의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해 주신다’는 의미는 ‘피하게 해 주신다’는 것보다는 ‘시험에 미혹되지 않도록 보전해 주신다’는 의미가 강합니다. 마치 빗속을 우산을 쓰고 걸어 감으로 비를 흠뻑 맞지 않을 수 있듯이 말입니다. 요 17:15입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교회와 성도가 신앙여정 길에 겪는 다양한 시험과 환난과 고난과 관련해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경험에 근거해 단언합니다. 고후 1:10입니다.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과거) 또 건지시리라(현재).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미래).” 이는 바울의 2-3차 전도여행 시 아시아에서 몸소 경험했던 극심한 핍박과 환난으로 살 소망까지 끊어졌던 사건들을 염두에 두고 언급한 내용입니다(고후 1:8-9, 11:23-27).
다른 한편 성경은 시험을 면케 해 주시는 주님의 방법을 이렇게도 설명합니다. 고전 10:13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을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케 하시느니라.”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시험은 그것이 어떤 성격을 띠고 주어지든지 연단의 의미를 담고 있기에 믿음의 인내와 확신을 가지고 대처한다면 넉넉히 감당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더욱 시험의 긍정적인 효과는 성도들로 하여금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냄으로 이에 연달(練達)한 자는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성숙한 믿음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지적입니다(약 1:2-4).
셋째로 주님께서 속히 오실 것이기에 빌라델비아 교회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11절). 본문에서 빌라델비아 교회가 가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주신 주님의 메시지를 분석해 보면 적은 능력을 갖고도 말씀을 철저히 지킨 것, 주님의 이름을 배반치 않았던 확고부동한 믿음의 정절과 신앙의 절개 및 지속적인 믿음의 인내를 들 수 있습니다. 이를 굳게 잡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사단의 미혹과 핍박과 고난이 부단히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고 경종을 울려 주십니다. 이는 신앙경주에서 약속된 상을 잃지 않도록 최선으로 경주하라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히 12:1-2의 말씀입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와 영광은 곧 교회의 영광과 직결됩니다(엡 2:6, 골 3:4). 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승리 안에서 교회의 미래의 영광과 승리가 이미 보증되고 있음을 하늘 보좌의 환상을 통해 머리에 면류관을 쓰고 흰 옷을 입은 24장로들과 흰 옷을 입은 큰 무리들의 상징에 근거해 밝히 증거해 줍니다(계 4:4, 7:9-14).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 교회의 종말론적 승리는 이미 보증돼 있을 뿐 아니라, 현재적으로 이미 소유해 누리고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큰 영광과 기쁨과 위로와 힘과 능력으로 작용하는지 모릅니다. 말씀의 본질에 깊이 접촉돼 이를 신앙과 삶의 도리로 붙들고 살아가는 생명적 활동을 통해 미래의 축복은 이미 현재적으로 경험되고 소유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는 성도가 죽음을 통과해야만 들어가는 미래의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통치를 받는다는 사실을 통해 현재적으로 이미 경험되는 나라입니다(마 12:28, 눅 17:20-21). 하나님 나라의 정체성은 본질에서 통치의 개념과 동질성을 띠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통치의 수단으로 막힘 없이 자율적으로 시행된다는 사실을 통해 극명하게 확인된다는 의미입니다. 마치 아담의 범죄 전 에덴동산의 상태처럼 말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포함해 에덴동산의 모든 피조물과 자연환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완벽한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하나님의 목적하신 대로 경영(통치)되었음을 봅니다. 통치의 개념을 통해서 말입니다. 당시 하나님의 안식은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고 평가하셨던 하나님의 창조질서 곧 통치개념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었습니다. 완벽한 창조질서의 운영을 통해 당시 에덴의 모든 상태는 하나님 나라를 구체적으로 현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의 안식개념은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반영하는 중요한 요소로 기능합니다(신 12:10, 수 21:44, 왕상 4:25, 미 4:4, 슥 3:10).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교회가 하나님의 안식에 이미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은 안식의 실체인 하나님 나라가 ‘말씀의 통치’란 개념을 통해 현재적으로 역사하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는 셈입니다. 성경이 이런 사실을 뒷받침 해 주고 있습니다(마 12:8, 눅 6:5). 이로 인해 말씀이 순수하게 선포되는 바른 교회에 소속돼 있다는 사실은 구원의 지속적인 보장은 물론 현존하는 하나님 나라에 이미 참여함으로 이기는 자에게 주시겠다는 미래적인 약속과 상급 또한 현재적으로 소유해 누린다는 의미가 성립됩니다. 계시의존적인 관점으로 현대교회의 영적 현주소와 실상을 밝히 진단해 볼 필요가 이에 있습니다. 말씀의 본질에서 벗어나 물량적 부흥과 성공지상주의를 표방하는데 집중한다면 이는 비성경적인 관점이기에 말입니다. 자칫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교회로 평가받을 수도 있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늘 교회의 정체성을 점검하며 진단해야하는 이유는 말씀 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교회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④ 이기는 자에게 약속하신 상급
주님께서는 속히 오실 것을 확약하시면서 신앙의 정진을 촉구하십니다. 그러나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평소에 늘 말씀을 지켜 행하는 충성된 종들에게 재림의 시기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믿음의 정절을 지켜나가기만 한다면 승리자에게 수여될 구원의 면류관을 빼앗길 염려는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롬 8:33, 38-39).
계속해서 주님은 이기는 자에게 주실 상급을 구체적으로 약속해 주십니다. 먼저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며 성전으로부터 결코 쫓겨나지 않겠다는 확증입니다.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연합과 통치와 교제를 총체적으로 상징합니다(출 25:8). 곧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하신다는 임마누엘의 신학적 원리를 가시적으로 보여주시는 표상입니다. 임마누엘의 원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을 통해 성취되었고(마 1:23, 요 1:14), 성령님의 강림과 인침 및 내주사역으로 성도들과의 관계 속에서 현실화되었습니다(고전 3:16, 6:19, 고후 1:22, 5:5). 나아가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를 통해 종말론적으로 완성될 것을 계시록은 밝히 증거해 줍니다(계 21:1-3). 따라서 성전의 기둥이 된다는 의미는 하나님과 생명적으로 연합돼 하나님께서 소유하시고 누리시는 일체의 천상적 영광에 확실하게 동참하게 될 것을 확약해 주시겠다는 보증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성전기둥’ 모티브는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당시 빌라델비아 지역은 잦은 지진으로 건물들이 폐허가 되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나 파괴된 건물 중에서도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 있었으니 곧 신전의 기둥들이었습니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해 주시겠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들로서 빌라델비아 교회의 천상적 정체성을 확증시켜 주실 뿐 아니라, 구원의 절대 안전과 영원성을 보장해 주시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인 셈입니다. 이런 사실이 계속 이어지는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통해 확인됩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기둥 됨의 위치와 신분을 결코 상실하지 않으리란 확증 말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들에게 이 보다 더한 축복과 상급이 어디 있겠는지요. 실로 참된 복과 상급의 실체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들이 누리는 구원의 영원한 안전과 보장인 사실이 다시 한번 재확인됩니다.
12절하는 이상의 사실을 다른 각도에서 보충적으로 설명해 줍니다.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예수 그리스도의 새 이름을 이기는 자 위에 (on him who overcomes)새겨주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름이 새겨져 있다는 것은 그 이름의 소유를 뜻합니다. 가령 어느 집에 문패가 달려있다면 그 집은 문패에 쓰인 이름의 소유임을 증거해 줍니다. 서부 개척당시에 방목하는 가축들은 소유주의 확인을 위해 주인의 이름이 새겨진 불에 달군 쇠도장을 엉덩이에 찍어 구별했습니다. 계 7장과 14장에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별하는 방식으로 이마에 어린 양과 하나님의 이름이 쓰인 십사만 사천명이란 상징적인 숫자가 나옵니다(계 7:1-8, 14:1). 계시록은 이들을 가리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라고 설명합니다(계 14:4하).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 이름과 예수 그리스도의 새 이름’을 이긴 자 위에(on him who overcomes) 새겨주신다는 설명은 본질상 동일한 의미로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임을 삼중적으로 보증해 주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이름이 기록된다는 것은 위에서 확인한 대로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과 천국의 시민 됨을 가리킵니다(벧전 2:9, 빌 3:20). 둘째로 예수님의 새 이름을 기록한다는 것은 부활승천하심으로 영화로 관 쓰신 주님의 영광에 동참하게 됨을 의미합니다(골 3:4). 끝으로 새 예루살렘의 이름이 기록된다는 것은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이긴 자들이 종말론적으로 완성될 어린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 된 교회공동체에 속하게 될 것을 보증하는 내용입니다(계 21:2, 21:9-22:5). 계 21:12-14에는 완성된 교회를 상징하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성의 열 두 문과 열 두 기초석에는 각각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의 이름과 어린 양의 열 두 사도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기술합니다. 이는 새 예루살렘 성이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 곧 모든 시대에 존재하는 성도들의 총화를 상징적이며 대표적으로 가리키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어느 시대건 참 된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이미 완성된 종말의 교회에 소속돼 천상의 축복과 영광을 현재적으로 소유해 누리고 있음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이 12절 중반에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는 표현을 통해 확인됩니다. 이는 빌라델비아 교회의 이기는 자에게 약속하신 내용들이 종말론적으로 온전히 성취될 것을 확신시켜 주기 위한 저자의 의도임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마감하면서 주님은 다시 한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청종할 것을 촉구하십니다(13절). 이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은 이를 생명의 도리로 붙잡는 자들에게만 능력으로 역사되며 약속으로 성취될 것과, 모든 시대의 모든 교회공동체를 향해 주시는 영원불변의 말씀임을 시사합니다. 이 모든 사역의 집행은 진리의 영으로 교회 중에 거하시는 성령의 주도적인 역사로 말미암아 관장된다는 것이 주님의 메시지의 요지입니다.
3.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3:14-22)
라오디게아(Laodicea)는 빌라델비아 동남쪽 약 72km, 에베소에서 동쪽으로 약 160km 지점에 위치한 도시로서 기원전 253년경에 셀루시드의 왕 안디오쿠스 2세에 의해 건립된 무역의 중심지입니다. 이후 기원전 133년에 로마의 통치하에 귀속되었으며 로마에 항거했던 다른 도시와는 달리 로마제국에 충성하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라오디게아는 인근의 히에라볼리 및 골로새와 더불어 바울 서신에서 밀접하게 연관된 곳이기도 합니다(골 4:13, 16절). 호크마 종합주석에 따르면 라오디게아는 무역과 교통의 요충지였으며, ‘브루기아 가루’로 알려진 안약과 의학교가 있었고, 활발한 금융거래로 상대적으로 풍요롭고 부유한 생활을 누렸다고 합니다. 반면에 물 사정이 좋지 않아서 인근의 히에라볼리와 골로새로부터 항상 수로를 이용해 물을 공급받아야 했습니다. 한편 라오디게아 교회는 에바브라가 설립했으며(골 4:12-13) 골로새 교회와 함께 바울의 사역에 크게 의존했던 교회입니다.
① 신실하신 하나님으로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삼중적으로 자신의 명칭을 계시해 주십니다(14절). 첫째는 ‘아멘이신 분’입니다. 둘째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신 분’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분’입니다. 이는 총체적인 면에서 라오디게아 교회의 위선적이고 형식적인 실상과 밀접하게 연관된 호칭으로 상대적으로 예수님의 진리성과 진정성을 부각시키고 있는 표현입니다. 먼저 아멘이신 예수님에 대해 살펴봅니다(14절상). ‘아멘이신 분’은 사 65:16의 반영입니다. 요한은 이사야 본문의 ‘진리의 하나님’(the God of the truth/the God whose name is Amen)이란 표현을 차용해 계시록 본문(14절상)의 주님께 적용시킴으로 본질에서 ‘아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진리의 하나님’을 동일시합니다(사 65:15의 ‘진리의 하나님’ 난외주 ‘아멘의 하나님’ 참고). 사도 요한이 ‘아멘이신 분’이란 표현을 사65:16에서 차용해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사야서의 본문의 전후 문맥과 관련된 표현들을 요한이 다른 곳에서도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보다 확실하게 확인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필찬의 요한계시록 주해서인 ‘내가 속히 오리라’(2006, 207)를 참고해 보면 사 65:15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 ‘다른 이름’으로 호칭할 것에 대한 말씀은 계 3:12에서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 및 예수님의 새 이름’으로 기록될 것으로 인용됩니다. 사 65:16하의 “이전 환난이 잊어졌고 내 눈앞에 숨겨졌다“는 내용은 계 21:4하의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는 표현 속에서 의미적으로 차용되고 있음을 봅니다. 사 65:17의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표현은 계 21:1의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문자적으로 그대로 인용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도 요한은 이사야의 본문의 전후 문맥과 관련된 표현을 계시록의 다양한 부분에서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음을 봅니다.
나아가 사 65:16에 언급된 ‘진리의 하나님 곧 아멘의 하나님’이란 표현은 문맥의 흐름상 사 65:17부터 소개되고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묘사된 재창조의 사역과 깊이 연관돼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고 부패한 첫 창조를 회복시키셔서 새 창조를 이루시는데 ‘아멘의 하나님’이 되심을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이처럼 요한은 이사야서에서 새 창조를 이루실 하나님과 관련해 사용되었던 진리의 하나님 곧 아멘의 하나님이란 용어를 계시록 본문에서 예수님께 적용시킴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종말론적인 새 창조(계 21:1)를 이루실 아멘이 되시는 분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필찬은 이처럼 요한이 ‘아멘의 하나님’이란 표현을 통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동등한 분으로 일치시키는 것을 가리켜 ‘고도로 발전된 요한의 기독론’으로 설명합니다(내가 속히 오리라, 2006, 207). 아멘은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듯이 ‘그렇게 되는 것이 심히 합당함을 확증하는 화답’의 의미를 강조합니다. 이로 보건대 계시록 본 절(14절상)에서 예수님을 ‘아멘이신 분’으로 소개하는 내용이 사 65:16에 언급된 ‘진리의 하나님 곧 아멘의 하나님’의 반영으로 해석하게 될 때, 예수님은 첫 창조(잠 8:22, 요 1:1-14, 골 1:15-17, 히 1:1-3) 는 물론 새 창조의 근본이 되심을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사 65:17부터 소개되는 새 창조 사역에 대한 기술은 사 65:16의 ‘아멘의 하나님’(진리의 하나님)에 관한 진술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주님은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신 분’으로 묘사됩니다(14절중). 이는 ‘아멘이신 분’과 본질상 동일한 사상을 내포합니다. 본 절은 계 1:4-5의 일곱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문안을 통해 자신을 계시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5절). 왜냐하면 주님은 하나님의 구속의 뜻을 받들기 위해 하나님과 동등 됨을 스스로 포기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취하셔서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시종일관 충성된 종과 증인의 사역을 성실하게 수행하셨기 때문입니다(빌 2:6-8)입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행할 아멘의 삶을 가장 극명하게 증시(證示)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특별히 요한계시록에서 충성된 증인의 삶은 하나님의 뜻을 받들기 위해 말씀을 지켜 행하는 일과 관련해 죽음을 마다 않고 믿음의 정절과 순결을 보전한 순교의 정신을 강력히 요구합니다(계 7:14, 14:4-5, 20:4). 이런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죽기까지 순종하셨던 하나님의 가장 충성된 종과 증인이 되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성도의 삶의 성격이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고난의 발자취를 좇는 삶일 진대(골 1:24), 진리를 추구하는 데서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다양한 환란과 핍박과 각종 시련과 고난은 미래에 완성된 교회를 통해 누리게 될 영광과 축복과 상급과는 족히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논증이며 위로의 메시지입니다(롬 8:18, 계 21:9-22:5).
마지막으로 주님은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으로 호칭됩니다(14절하). 물론 본문은 첫 창조에 참여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창조사역을 결코 배제하지 않습니다(골 1:15-17, 요 1:1-14, 히 1:1-3). 그럼에도 본 절은 이미 위에서 설명한 대로 사 65:16의 반영으로서 ‘아멘이신 예수님’을 사 65:17의 새 창조 사역과 문맥상 상호 깊이 연결시키는 가운데 새 창조사역의 근본이 되시는 분으로 시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됩니다. 14절상의 ‘아멘이신 분’은 동시에 14절중의 ‘하나님의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 되시는 분’이며 나아가 14절하의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분’과도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 절에서 ‘예수님을 창조의 근본이신 분’으로 지칭할 때, 이는 첫 창조보다는 새 창조에 무게의 중심이 실리는 것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겠습니다(내가 속히 오리라, 2006, 209).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새 창조사역의 근본이 되실 수 있을까요. 이는 계 1:5의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분”과 1:18의 “곧 산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라”고 선언하시는 데서 확인됩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이야말로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 일생 종노릇하던 인생들을 예수님의 구속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하셔서, 예수님의 부활의 새 생명에 연합시켜, 영생의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시기 위해 새롭고 산길(a new and living way, 히 10:20)을 열어 놓으신 결정적인 사건으로 해석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창조, 곧 새 창조의 근본이 되실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을 충족시킨 유일한 분이신 셈입니다. 이런 사실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이기는 자에게 먼저 이기신 분으로서 왕적 통치권의 상징인 하늘 보좌에 함께 앉을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해 주시겠다고 당당하게 보증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21절).
이상의 모습을 통해 자신을 계신하심은 현재 라오디게아 교회가 처한 영적 실상과 밀접하게 연관시키신 의도적인 처사이십니다. 곧 새 창조의 회복을 위한 아멘이 되셔서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 성실하게 수행하신 충성된 종으로 자신을 계시해 주심으로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회복을 촉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② 라오디게아 교회의 미온적인 신앙태도를 책망하심
15절부터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주님의 메시지가 선포되는데 먼저 17절까지는 책망의 말씀이 소개됩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아무런 칭찬의 말씀도 해 주지 않으십니다. 대신 책망으로 시작하십니다.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바 된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이렇다 할 한 마디의 칭찬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비극 중의 비극입니다. 사실상 칭찬의 요소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은 본질에서 죽은 교회나 다를 바 없음을 가리킵니다. 지역교회 중에 이런 교회가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성공지상주의를 추구하며 물량적 부흥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현대교회가 심각하게 고민하며 자신을 성찰해야 할 큰 경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네 행위를 아신다고 말씀하시면서 차든지 덥든지 해야지 미지근한 상태로 지속된다면 토해내치시겠다고 크게 진노의 경고를 발하십니다(15-16절). 이는 에베소 교회처럼 복음에 대한 열정과 감사와 감격을 잃어버림으로 신앙의 매너리즘에 빠져버린 우유부단한 라오디게아 교회의 신앙태도를 미지근한 물에 비유해 은유적으로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라오디게아 교회의 미온적인 신앙태도는 당시 라오디게아가 처한 지리적인 삶의 정황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는 지적입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라오디게아 지역은 물질적인 부유함에도 불구하고 물 사정이 좋지 않아 자체적으로 수요공급이 이루어지질 않았습니다. 대신 인근 골로새와 히에라폴리스로부터 수로를 통해 생활용수를 공급받아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차지도 않다‘는 주님의 지적은 골로새 지역으로부터 공급받던 차고 신선한 물과 연관된 표현이고, ’덥지도 않다‘는 지적은 히에라폴리스로부터 공급받았던 뜨거운 온천수를 배경으로 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골로새와 히에라폴리스로부터 수로를 통해 라오디게아까지 물이 공급되는 과정에서 미지근하게 식어버린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때론 음료수로 마시기에 역겨울 정도로 구토 증세를 유발시키기도 한다는 얘깁니다. 주님께서는 이처럼 미지근하게 식어버림으로 음용(飮用)하기에는 부적절한 물의 상태를 라오디게아 교회의 신앙과 영적 상태에 비교해 은유적으로 지적하시며 책망하고 계신 것입니다. 본 절에서 ’토하여 내치시겠다‘는 것은 본질에서 에베소 교회를 향해 책망하신 것처럼 ’촛대를 옮기겠다‘(계 2:5)고 경고하신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주님의 피 값으로 사신 바 된 몸 된 교회로 인정하지 않으시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입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모든 관계가 단절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록 외적으론 여전히 교회의 모습을 갖추고, 정기적인 예배와 기독교적인 제반 활동이 지속될지라도 하나님과는 무관한 자의적 숭배신앙에 불과할 뿐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더 이상 하나님의 교회일 수 없는 것입니다.
③ 미온적인 신앙태도의 진상규명
이제 17절을 살펴보면 왜 라오디게아 교회의 신앙이 미온적일 수밖에 없었는지의 이유가 밝혀집니다. 한 마디로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기도취적이고 자기기만적인 신앙관에 깊이 빠져있었던 것이 확실합니다. 주님께서 이들의 신앙관의 실상을 낱낱이 고발하십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고 지적해 주십니다. 본문을 통해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점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 분석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외적인 부요와 풍족함에 도취돼 내적인 영적 빈곤과 피폐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물질적인 부요 자체를 문제 삼는다거나 더욱이 죄악시 할 필요는 없습니다. 문제는 이들의 물량적인 풍요를 하나님의 은혜와 언약적 축복의 결과로 착각한 나머지 정작 신앙의 내실을 다지는 본질을 추구하는 신앙관 정립에는 무관심했고 게을렀으며 무지하기까지 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자기만족에 사로잡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영적 무지의 결과로 곧 자기도취적이고 자기기만적인 신앙에 깊이 함몰된 것에 다름 아닙니다. 한 마디로 외화내빈(外華內貧)의 교회였습니다.
이런 면에서 라오디게아 교회는 서머나 교회와는 정반대의 영적 상태에 처해 있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계 2:9). 서머나 교회는 상대적으로 궁핍한 교회였습니다. 경제적으로 넉넉지 못한 교회였습니다. 게다가 외적으로 많은 환난과 핍박에 시달렸습니다. 심지어 순교자까지도 나왔던 신앙의 정절을 굳게 지킨 교회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서머나 교회를 향해 실상은 부요한 교회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계 2:9). 주님의 관점은 겉이 아닙니다. 속입니다. 말씀의 본질을 추구하는 내적 신앙입니다(마 7:21-23, 23:23). 영적으로 외화내빈의 신앙관은 위선과 가식이상 아무 것도 아닙니다. 물량적 부흥과 성공지상주의를 지향하는 현대교회의 신앙관과 교회관 및 목회관이 자칫 외화내빈의 중병에 걸려있다면 시급한 진단과 치료책을 강구해야 될 줄 압니다. 그렇지 못할 때, 현대교회 또한 주님 앞에서 토해내칠 수밖에 없는 자기도취와 자기기만에 깊이 빠져있는 현대판 라오디게아 교회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위에서 확인한 대로 외화내빈의 자기도취와 자기기만적인 신앙에 깊이 빠져있다는 확실한 증거는 주님의 진단을 통해 확인됩니다. 17절하입니다.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이는 한 마디로 영적 중병에 걸린 상태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영적 무지에 대한 진단입니다. 불신자의 영적 상태와 방불했다는 지적입니다. 이는 복음의 결핍단계를 지나 복음의 실종, 복음의 상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외적인 부요와 만족에 사로잡혀 내적인 영적 빈곤과 피폐와 수치를 미처 보지 못한 채 스스로 자기만족과 도취에 깊이 빠져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복음과 무관한 불신자처럼 자기중심적이며 세속적인 가치관의 지배를 적극 받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형편을 현대적 관점에서 조명해본다면 소위 3Bs로 요약될 수 있을 것입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초현대식 예배당 건물소유(Building), 수천, 수만에 달하는 교인확보(Baptism), 그리고 한 주에 걷히는 수억원의 헌금수령액(Budget) 등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교회라도 이런 외적인 사실들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간주해 ‘우리 교회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지 않겠는지요. 그러나 상황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다음으로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는 물질적인 부요와 축복을 하나님의 언약적 축복으로 착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자기만족과 도취에 사로잡힌 나머지 영적 암매와 안주에 빠져들어 갔던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외적인 것에 근거해 사물을 판단하는 데 익숙해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말씀의 본질을 추구함으로 칭찬을 받은 교회로 기록되고 있음을 봅니다(계 3:8하). 빌라델비아 교회의 적은 능력이란 이들의 외적인 조건과 상태를 가리킵니다. 외적인 비교에 있어서는 상대적으로 모든 부분에서 빈약했다는 것입니다. 예배당 규모나 교세에 있어서나 재정적인 면에 있어서도 말입니다. 그래서 어느 것 하나 겉으로 이렇다하게 내세울만한 것이 없었다는 지적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빌라델비아 교회를 극구 칭찬해 주셨습니다. 특별히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않았다”고 강조해 말씀해 주십니다. 이는 바르게 해석된 말씀을 신앙과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시종일관하게 신앙했음을 가리킵니다. 교회의 생명은 말씀의 본질을 추구하는데서 확인됩니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 3:15하)로서 교회의 생명과 보전이 말씀공급에 의존돼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말씀의 본질을 추구하는 계시의존적인 신앙관이 전제되지 않은 단지 외적인 규모의 소형화가 무조건적으로 진리성과 진정성을 대변한다는 주장은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형교회건 소형교회건 간에 주님께서 판단하시는 관건은 내적인 요소의 활성화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현대교회가 자칫 외적인 활동과 성공에 도취된 나머지 내적인 요소들을 소홀히 하거나 과소평가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정죄와 심판을 받게 될 것을 라오디게아 교회를 평가하시는 예수님의 책망을 통해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경청해야 할 것입니다.
④ 주님의 처방책
주님께서는 영적 암매와 영적 피폐에 깊이 빠져있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일방적으로 포기치 않으십니다. 회개를 통한 회복의 기회를 주십니다. 현대교회들이 자칫 라오디게아 교회를 비롯한 일곱 교회를 향해 발하신 책망의 요소들을 갖고 있을지라도 즉각 멸하지 않으시고 경고를 통해 회개케 하심으로 회복의 기회를 주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은혜며 감사한 일인지요. 이런 의미에서 남은 기회를 선용하는 지혜와 진리를 추구하는 일과 관련해 일체의 기득권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전인적인 결단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이제 주님은 18-19절을 통해 라오디게아 교회가 처한 영적 무지와 암매와 자기기만적인 신앙으로부터 회복될 수 있는 처방전을 제시해 주십니다. 처방전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하십니다. 처방전의 내용은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 주님으로부터 불로 연단할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고 하십니다(18절상). 이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자랑하고 있던 외적인 부요와 부자 됨에 대한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 외적인 부요를 추구할 것이 아니라, 내적인 부요에 관심을 갖고 이를 적극 회복시키라는 주문입니다. 지금 라오디게아 교회가 처해 있는 영적 상태는 가히 불신자와 방불한 지경입니다. 따라서 외적으로만 기독교적 치장으로 화려하게 꾸몄을 뿐이지 내막은 사실상 불신자처럼 영적으로 죽은 것과 다름없는 비참한 상태라는 지적입니다. “네 곤고한 것, 가련한 것, 가난한 것, 눈 먼 것, 벌거벗은 것”이 종합적으로 의미하는 바가 이렇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의 처방책은 총체적인 관점에서 구원의 복음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음을 간파하게 됩니다. 환언하면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인 상태는 사실상 복음이 실종된 것과 다름없는 종교집단에 불과하다는 지적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복음과 관련해 볼 때 ‘불로 연단한 금’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이는 잘 정제된 금, 곧 ‘연단된 성숙한 믿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벧전 1:7입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문제는 믿음의 정체성입니다. 본문이 지적하는 바는 단순히 ‘믿습니다’를 연발하면 되는 식의 자기 소견에 좋을 대로의 자의적(恣意的)이고 종교적인 믿음이 아니란 말입니다. 주님의 기뻐하시는 뜻과 일치되는 계시의존적인 믿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마 7:21-23, 롬 10:2-3). 라오디게아 교회는 영적 사망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는 현 상태에서 다른 무엇에 앞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적극 의지하는 데서 비롯된 구원받는 믿음이 시급히 요청되었습니다. 이것이 주님으로부터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는 처방책의 본질입니다. 구원의 믿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전혀 불가능할 뿐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시니라”(행 4:12, 마 1:21). 주님만이 인류의 죄 값을 지불하실 수 있는 유일한 대속물이 되시는 분입니다(막 10:45).
둘째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고 하십니다(18절중). ‘흰 것’과 ‘새것’이란 표현은 계시록 전반에 걸쳐 천상적 성격을 반영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흰 옷을 사라’는 명령은 ‘흰 옷을 더럽히지 않는 것’과는 별개의 의미입니다. 흰 옷을 사는 것이 선행돼야 합니다. 그 다음에 흰 옷을 입고 다니는 가운데 더러워지지 않도록 자주 빨아야 되는 것이 뒤따릅니다(계 3:4). 그런 의미에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흰 옷을 사라는 주문은 복음이 실종되고 상실한 것과 방불한 불신앙적 상태에서 이제 구원의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는 의의 옷, 곧 하나님의 칭의를 덧입으라는 강력한 주문인 셈입니다. 이로 보건대 엄밀한 의미에서 당시 라오디게아 교회는 참 된 그리스도인들이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소위 자칭 그리스도인들로 가득 차 있던 한낱 종교집단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에 이르는 믿음에 이어 흰 옷으로 상징되는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을 것을 강력히 요청하신 것입니다. 계 7:13-14입니다.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 옷을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란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이런 이유로 흰 옷을 사서 입음으로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는 것은 성결한 삶의 요구에 앞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효를 믿음으로 사죄의 은총을 받고 의롭게 될 것에 대한 강력한 요구인 셈입니다(롬 3:22, 28절).
셋째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18절하). 이는 영적 분별력을 회복시켜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통찰력의 발휘를 가리킵니다. 성령의 인침으로 거듭나 구원의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된 자들은 이후 성령의 조명을 통해 말씀을 배우고 깨달아 감으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에서 자라가게 됩니다. 이런 결과로 영적인 분별력과 통찰력이 생겨나게 되고 나날이 계시의 정신을 발휘하게 됨으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 가운데 계시의존적이고 섭리의존적인 신앙관에 깊이 접촉돼 자신의 삶을 천상지향적으로 경영해 가게 됩니다.
이상의 치료책을 처방하신 주님은 계속해서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침체와 무감각과 자기도취적 자만을 책망하시며 회개를 촉구하십니다(19절). 저들의 영적 상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라오디게아 교회를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은 아무리 타락하고 변질된 교회라 할지라도 회개해서 복음의 본질을 회복시킨다면 언제라도 용서와 화해와 교제의 기회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언약의 특징은 불순종에 대해 언약적 징계와 심판은 불가피할지라도 언약 자체가 파기되거나 무효화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⑤ 주님의 약속과 보증
주님은 20절을 통해 회개하고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원하는 자들에게 기꺼이 교제의 기회를 허락해 주실 것을 약속해 주십니다. 오히려 보다 적극적으로 주님께서 준비된 상태로 기다리고 계시다는 사실을 확증시켜 주십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본 절은 19절에서 보듯이 영적 암매와 무감각과 자기기만에 깊이 빠져있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회개와 믿음의 회복을 촉구하는 과정에서 주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흔히 본문을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영접을 촉구하는 과정에서 구원의 증거본문으로 사용하는 것은 본 절의 의미를 자칫 왜곡시킬 수 있습니다. 당시 라오디게아 교회는 명목상 엄연한 교회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제반 기독교 신앙과 활동에 익숙해 있었습니다. 단지 그것이 외향지향적인 것으로 인해 본질상 교회의 생명력을 상실한 것과 방불했다는 지적입니다. 때문에 일방적인 불신자들의 집단만은 아니었습니다. 얼마든지 회개와 갱신을 통한 믿음의 회복과 영적 소생의 가능성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런 맥락 속에서 20절의 말씀이 주어진 것입니다. 본문에서 ‘문을 연다’는 표현은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이 자신들의 영적 침체의 상태를 직시하고 상하고 통회하는 회개의 심정으로 하나님과의 바른 믿음과 교제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원한다면 주님은 언제라도 준비된 상태에서 기꺼이 응해 주시겠다는 확약의 말씀인 것입니다. 따라서 라오디게아 교회 앞에 문은 항상 열려 있는 셈입니다. 한 가지 본문을 통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는 것은 정작 라오디게아 교회의 주인이시며 머리 되신 주님께서 문 밖, 곧 라오디게아 교회 문 밖에 손님처럼 서 계시면서 문을 열어 줄 것을 줄곧 기다리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주객이 전도된 상태로 말입니다. 바로 이런 상황이 라오디게아 교회가 사실상 주님과의 영적 교제와 믿음으로부터 떠나 있음을 결정적으로 제시해 줍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상태가 “곤고함, 가련함, 가난함, 눈 멈, 벌거벗음”으로 평가되는 이유도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보편적으로 물량적인 부흥과 성장을 추구하는 일에 치심하고 있는 현대교회들에게 라오디게아 교회는 시의적절하게 경고와 경종을 울려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주님의 관심이 무엇이며 주님의 원하심이 어디에 있는지 현대교회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통해 냉정하게 자신을 성찰해야 할 줄 압니다. 그렇지 않을 때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주님의 책망의 메시지는 곧바로 현대교회를 향해 선포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21절은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상급으로 주님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십니다. 보좌는 왕적 통치권을 상징적으로 비유합니다. 이는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으로 주님의 왕적 통치권에 동참하게 될 것을 가리킵니다. 주님의 보좌에 동석한다는 사실은 구원의 종말론적 완성과 관련해 교회의 승리와 영광과 축복과 만물에 대한 대리적인 통치권의 발휘를 가장 극명하게 보증하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주님의 보좌에 앉는 통치권의 회복이 이미 이루어졌습니다(엡 2:6, 벧전 2:9, 계 5:10). 이것은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주신 특권이기도 합니다(계 20:4-6). 아울러 미래의 교회의 완성과 승리를 통해 종말론적으로 실현될 것입니다. 계 22:5이 이를 증거합니다.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본문에 약속된 새 창조사역을 통한 교회의 종말론적 승리와 통치권의 회복은 첫 창조인 에덴동산에서의 실패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회복시킨다는 의미가 성립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언약의 핵심사상인 임마누엘 신학의 연합원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속의 종말론적인 완성을 통해 교회와 성전과 에덴을 본질상 하나로 통일되게 합니다(엡 1:10, 계 21:3). 이로서 교회가 주님의 보좌에 함께 앉아 주님의 왕적 통치권에 동참한다는 사실은 일곱 교회의 이기는 자에게 보증하셨던 모든 약속의 내용을 총체적으로 집약해 선포하시는 대표성을 띤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승리한 교회의 피조물에 대한 통치권의 발휘(계 22:5)는 첫 창조 시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지상의 첫 교회)에게 복으로 언약하셨던 창 1:28의 창조언약이 종말론적으로 성취되는 것과 본질상 동질성을 띠게 됩니다.
이제 주 안에서 성령의 소욕을 좇아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자들에게 말씀은 신앙과 생명의 도리로 역사될 것입니다. 이들에게 이기는 자에게 약속하신 천상적 축복이 이미 소유되었고 장차 최종적으로 소유될 것입니다.
Ⅲ. 결론
2장의 에베소 교회, 서머나 교회, 버가모 교회, 두아디라 교회에 이어 3장에서 사데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 그리고 라오디게아 교회를 마지막으로 일곱 교회들에게 주신 주님의 메시지를 모두 살펴봤습니다. 각 교회에게 주신 메시지가 표현은 다를지라도 내용상 상호 중첩되고 때론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역교회의 형편과 상황에 다소 차이가 있을지라도 말씀의 본질을 추구하는 것을 통해 주님과의 관계성을 바르게 정립해야 하는 교회적 사명과 책임에 공통분모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현대교회는 심각한 도전과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하겠습니다. 일취월장하는 첨단과학문명의 발달과 지식의 팽창 및 급변하는 사회 문화적 변혁은 기존의 전통과 가치관에 심각한 도전을 가함으로 포스트모더니즘과 다원주의의 심연 속으로 급속히 빠져 들어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심지어 한 가족 구성원사이에도 다양한 가치관이 공존함으로 세대 간의 갈등과 불화를 야기시키는 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되는 분야가 다름 아닌 종교계입니다. 특별히 기독교회입니다. 절대주권자인 하나님의 말씀을 신앙과 생명의 도리로 붙잡고 살아가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풍조(롬 12:2, 약 4:4, 요일 2:15-16)와 육체의 소욕(골 3:5)과 사단의 미혹(엡 6:12)으로부터 초연한 삶의 자세를 견지한다는 것은 말같이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어쩌면 현실과 사회공동체로부터 소외당할 수 있는 위험마저도 감수해야 합니다. 계시록의 일곱 교회들이 직면했던 문제점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더욱 당시 우상숭배가 공공연하게 보편화되었고 구조적으로 다양한 생활기반들과 연결돼 있었기에 이런 구조적인 악으로부터 벗어나 신앙의 정절을 지킨다는 것은 생존의 위협마저도 감수하지 않으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성경은 상황윤리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현실적인 필요와 생존과 불가피성을 앞세운 타협과 절충과 양보를 결코 용납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행위를 배도와 배역으로 간주합니다. 성경이 요구하는 가치는 말씀에 근거한 절대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런 상황에서 실패의 거울입니다(고전 10:5-11). 불신앙적 삶의 실례요 모범입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이교적 문화와 정치와 종교를 현실적인 필요와 공존의 불가피성을 앞세워 수용했습니다. 그래서 더욱 깊이 가나안의 문화에 동화돼 갔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언약적 심판을 감수해야 했던 것입니다.
현대교회는 아스라엘 백성들이나 초대교회가 직면했었던 문자적인 우상숭배나 음행과 같은 이교적 관습과는 무관한 시대를 살아갑니다. 그렇다고 우상숭배와 음행에 담긴 영적 원리와 교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비록 현대교회가 문자적인 우상숭배와 우상의 제물과 음행과는 무관할지라도 이들 행위 속에 담긴 영적 원리와 가르침은 동일하게 거부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같은 행위 속에 담긴 영적 교훈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일곱 교회를 통해 발람의 교훈, 니골라당의 교훈, 이세벨의 교훈, 자칭 유대인의 회를 통해 경계시켜 주신 내용들과 맥을 같이 합니다. 곧 기복주의, 세속주의, 지성감천주의, 상급주의, 복음적 율법주의, 그리고 신앙주의에 따른 도덕폐기론과 율법무용론 등입니다. 특별히 우상숭배와 음행으로 대표되는 발람의 교훈, 니골라당의 교훈, 이세벨의 교훈의 정체성은 신앙을 도구삼아 육신적이고 현세적인 소원성취와 성공을 이루어보려는 종교적 욕심의 발로를 통해 가장 극명하게 현시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을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기복의 도구로 삼으려는 신앙관은 본질상 우상숭배와 동질성을 띠게 됨으로 하나님을 우상화시키는 패역하고 망령된 행실로 간주된다는 것이 성경의 준엄한 경고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소위 여로보암의 길로 표현되는 북이스라엘의 종교가 이런 사실을 극명하게 증시해 줍니다(왕상 12:25-33). 여로보암의 종교 속에 모세종교의 근간인 율법의 외형은 분명 발견되었습니다(여호와 하나님/제사장/절기). 그러나 본질은 실종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형상화돼 우상으로 전락되었고, 제사장은 레위인이 아닌 일반인으로 대체되었으며, 절기는 정해진 날짜가 아닌 편의성을 좇아 임의로 변경돼 지켜졌습니다. 한 마디로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는 나머지 경건의 모양은 있었으나 경건의 능력 곧 본질은 실종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이 같은 풍조를 말세의 징조로 경고하면서 이들로부터 돌아 설 것을 강력히 촉구합니다(딤후 3:1-5, 4:3-4).
이처럼 신앙의 도구화 현상은 이스라엘 역사는 물론 초대교회 속에서 이미 발견되었습니다. 일세기 교회인 계시록의 일곱 교회 속에서는 더욱 발전되고 구체화된 모습으로 역사했습니다. 중세교회 때는 천년 영적 암흑기로 타락의 절정의 시기였습니다. 하나님은 종교개혁자들을 통해 특별히 구원관과 교회관을 재정립해 주셨습니다. 그 후로 오백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갑니다. 일 세기 교회 속에 복음의 변질과 말씀의 왜곡으로 말미암는 신앙의 도구화 현상이 팽배돼 있었다면 종교개혁 후 오세기가 다가오는 현대교회의 실상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을까요. 얼마나 말씀의 본질에 입각한 진리성과 진정성을 순수하게 보전해 계승하고 있을는지 심각하게 자문자답해봐야 되지 않을는지요. 이런 식의 깊은 자기성찰의 자세야말로 일곱 교회에게 선포하신 주님의 메시지를 통해 현대교회의 영적 현실을 직시하는 가운데, 성경적인 바른 신앙관과 바른 교회관 및 바른 목회관을 재정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작용하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출처 : remnant7000
글쓴이 : sky blu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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