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교회에게 보낸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
(계 2:1-29)
Ⅰ. 도입
2-3장에 기술된 일곱 교회들에게 주신 예수님의 메시지는 1장에서 밧모 섬에 유배된 사도요한에게 성령의 감동을 통해 보여주신 환상의 내용을 기록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입니다. 일곱 교회들이란 당시 소아시아지역에 현존 했던 일곱 교회에게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일곱이라는 상징성이 가리키듯 완전수, 충만수로서 21세기의 현대 교회들은 물론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를 포함합니다.
일곱 교회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메시지는 편지 서두에 한결 같이 1장에서 묘사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다양한 자기명칭과 관련해 주어집니다. 말하자면 에베소 교회에게는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로, 서머나 교회에게는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로, 버가모 교회에게는 ”좌우에 날 선 검을 가진 이“ 등으로 말입니다. 이처럼 각 교회별로 각기 다른 자신의 명칭을 사용해 메시지를 전하심은 당시 각 교회가 처한 특별한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을 시키시며 칭찬과 책망, 권면과 약속 등을 차별화시켜 말씀해 주심으로 주의를 환기시켜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 과정에서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 같은 경우에는 책망의 요소가 발견되지 않습니다. 반면에 라오디게아 교회는 전혀 칭찬의 내용이 없습니다. 책망과 권면 일변도입니다. 그렇다고 칭찬만 있고 책망이 전혀 없는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를 통해 온전한 교회와 모범적인 교회상을 제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차피 지상의 교회는 인간의 본성 속에 내재된 죄성으로 인해 주님 앞에 백 퍼센트 완벽한 교회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일곱 교회에게 보낸 주님의 메시지를 통해 주님께서 원하시는 교회, 바람직한 교회상이 무엇인 지를 발견하고 주님의 마음에 합한 교회를 이루는 일에 최선으로 경주한다면, 이기는 자에게 약속하신 영적 상급들이 종말론적으로 확실하게 보장될 것을 확증시켜 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약속들은 주님의 생명에 연합된 지상의 참 된 교회공동체 속에서 이미 현재적으로 향유되고 있을지라도, 전투하는 교회상을 통해 종말론적으로 약속된 실질에 동참하게 될 것을 확실히 전망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2-3장의 일곱 교회의 영적 정체성을 한결 같이 전투하는 교회상으로 암시하는 가운데 이기는 자들에게 약속된 미래의 상급이 계 21:7을 통해 종말론적으로 보장될 것을 확증시켜 주십니다. 이런 일련의 진행과정을 통해 교회의 정체성은 공동체적이며 동시에 개인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와 ”이기는 ‘자(그)’에게는 내가 .....“를 상호 면밀히 비교해 보십시오. 전자는 복수대명사로 후자는 단수 대명사로 사용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로 보건대 신앙생활은 개인적이며 동시에 복수적인 양면성을 띠고 있음을 봅니다. 그러나 성경이 시종일관하게 지향하는 원리인 ‘교회를 이루는 구원’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구원을 누리는 신앙생활의 본질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공동체적으로 이루어 나가는 것을 통해 비로소 정당화된다는 사실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줄 압니다. 따라서 바른 교회에 속한다는 의미는 본질에서 구원론적인 천상적 통치와 양육을 말씀을 통해 지속적으로 받으며 적극 순종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일곱 교회에게 주신 주님의 메시지에서 매번 ”이기는 자에게 주시겠다“는 약속된 영적 상급이 강조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이제 2장 본문을 통해 일차적으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네 교회에게 주신 메시지의 내용을 살펴봅니다.
Ⅱ. 전개
‘호크마 주석’(요한계시록)에 의하면 본서에 기록된 일곱 교회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또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라고도 부릅니다. 본서와 신약에서 말하는 소아시아란 그 교회들이 소아시아 반도에 위치해 있음을 말합니다. 한편 ‘아시아’라고 말할 때는 당시 로마 제국의 행정구역상 ‘아시아 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소아시아 반도의 삼분의 일을 차지하는 지역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계시록에 나타난 일곱 교회는 소아시아 지역의 ‘아시아 도’에 속한 교회들인 셈입니다. 아시아 도는 소아시아 반도에서 가장 부유했고 경제적으로도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입니다. 아시아에 있던 교회들은 본서에 나오는 일곱 도시 이외에 드로아, 골로새 및 히에라폴리스에도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서에 일곱 교회가 의미하는 바는 단순히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넘어서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든 하나님의 참 된 교회들을 대상으로 삼는 상징성을 띤다고 하겠습니다.
1. 에베소 교회에게 주신 메시지(2:1-7)
메릴 C. 테니의 ‘요한계시록 해석’에 의하면 에베소(Ephesus)는 아시아의 로마 속령 중 가장 큰 도시였습니다. 특별히 1세기 말경에는 급속도로 번창했던 아시아의 중심 도시였습니다. 이 도시의 주요 우상은 아데미(다이아나) 여신이었습니다. 아데미 신전은 고대 세계의 불가사의 한 기적 중 하나로 손꼽히며 시민들의 강력한 숭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에베소 시민들은 거의 광신적으로 아데미 여신을 숭배하였습니다(행 19:27, 35절). 에베소는 바울이 전도여행 차 방문했을 때 아데미의 은감실(모조신전)을 만드는 자들이 선동하여 바울의 가르침을 반대하고 그들을 몰아내기까지 하였던 곳입니다(행 19:23-29).
그러나 온갖 박해와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에베소에는 바울의 전도여행 후 복음이 뿌리를 내리고 마침내 에베소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고 에베소 교회는 아시아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행 19:26). 에베소의 기독교인들은 복음 증거에도 열성적이었으며(행 19:10), 구습을 척결하는 데도 물질적 가치를 따지지 않아서 은 5만의 값어치가 나가는 책들을 아낌없이 불사르기까지 했습니다(행 19:19).
그러나 에베소 교회를 창설했던 열정적인 복음의 1세대들이 사라지게 되자 그 열기는 점차 식어갔습니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시점을 AD90년 전후로 추정한다면 바울에 의해 에베소 교회가 설립된 것이 40-50년경일진 데, 반백년이 지나지 않아 에베소 교회는 2세대들에 의해 복음의 열정이 퇴조되고 진리가 교리적으로만 남아있는 사변주의적 교회, 교조주의적 교회로 퇴락되고 말았습니다. 본장의 에베소 교회에 대한 주님의 메시지는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기록된 것입니다.
① 교회의 감독자와 양육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에베소 교회에게 계시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엡 2:1)로 나타나십니다. 이는 한 마디로 교회의 감독자와 양육자의 모습입니다. 요한복음의 설명을 빌리면 양 무리를 ‘먹이시고 돌보시는 분’으로서 말입니다(요 21:15-17). 이런 명칭이 의미하는 바는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바 된 교회가 아무리 퇴조되고 퇴락되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세우신 교회의 종들을 붙드시고 한결 같이 교회공동체를 돌보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악한 자들과 거짓선지자들을 몰아내고 교회의 순결, 곧 진리성과 진정성을 고수하고자 각고의 노력과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에베소 교회 1세대들의 전투적 신앙행보를 돌아볼 때(행 20:28-35), 2세대들로 구성된 1세기 에베소 교회의 상황이 많이 퇴락되었을지라도 주님께서는 여전히 에베소 교회의 지도자들을 통해 교회를 눈동자처럼 지켜 보호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확증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교회의 현실적인 여건과 상황이 열악하다고 할지라도 결코 낙심하거나 좌절하기보다 위로와 격려를 받으며 담대하게 현실을 대처해 나가는 믿음의 인내와 결단이 필요한 이유가 이런 사실로 말미암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도 성령님을 통해 피로 값 주고 산 당신의 몸 된 교회 속에 말씀을 통해 지속적으로 부활의 생명력을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세상을 이기는 하나님의 천상적 능력으로 기능합니다.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들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주님의 상징이 의미하는 바가 이렇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 및 교회의 종들(성도)과의 일체성과 연합성 그리고 통일성의 원리 말입니다(엡 2:21-22).
② 에베소 교회에 대한 칭찬
에베소 교회에 대한 주님의 메시지는 칭찬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주님은 에베소 교회가 취했던 세 가지 사실에 대해 친히 아신다고 말씀하시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첫째는 에베소 교회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표현은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 기도할 때마다 감사했던 세 가지 영적 덕목과 내용적으로 동일한 성격을 띱니다. 살전 1:3입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결국 에베소 교회에게 주신 메시지에서 행위는 데살로니가 교회와 관련해서 믿음의 역사와, 수고는 사랑의 수고와, 인내는 소망의 인내라는 의미와 동질성을 띤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범사에 하나님의 절대주권에서 비롯된 전능성과 전지성 및 신실성을 인정하는 데서 동기부여 된 믿음의 행위야말로 세상을 이기는 능력이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첩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이 동기유발 된 선행 또한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에 빚 진 자들로서 성도가 마땅히 취할 행동요강(行動要綱)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성취될 미래의 교회의 승리와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완성의 보증이야말로 모든 성도가 고난 중에도 소망을 갖고 인내해야 하는 결정적인 동인으로 작용한다고 하겠습니다(롬 8:18, 벧전 1:7, 고후 4:17-18).
그런데 감사한 것은 에베소 교회의 이런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 중에 인내했던 신앙적 삶을 주님께서 친히 아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속성인 전지성(omniscience)에 근거한 선언으로, 주 안에서 선을 지속적으로 행하는 자에게는 위로와 격려와 칭찬으로 기능하게 되고(고전 15:58, 요 5:28-29, 고후 5:10, 계 22:12), 악을 미연에 예방한다는 차원에서 각성이 된다고 하겠습니다(행 4:19). 결과적으로 주님께서 성도의 삶을 최종적으로 판단하시는 날에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찌어다“(마 25:21, 23절)란 최대의 찬사를 받게 될 것입니다. 지금 에베소 교회의 영적 상태가 이렇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무익한 종’(눅 17:10)의 심정으로 초지일관했다는 주님의 평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에베소 교회를 향한 주님의 칭찬의 내용은 현대교회가 개인적이며 공동체적으로 적극 본받아야 할 모범적인 사례인 줄 압니다.
칭찬의 두 번째 내용은 ‘악한 자를 용납지 않고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해 그 거짓된 것을 드러내 쫓아냈다’는 사실입니다. 한 마디로 진리를 생명처럼 소중하게 고수했던 교회란 말씀입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를 떠나기 전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청한 송별회 자리에서 앞으로 에베소 교회 속에 거짓 교사들이 나타나 성도들을 미혹케 할 것을 사전경고 식으로 예언한 적이 있습니다(행 20: 28-30). 아울러 거짓 교사들의 시험과 미혹을 분별하고 이에 대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말씀에 견고하게 서 있는 일임을 눈물로 당부합니다(행 20:31-32). 본 고별사에서 바울은 바람직한 감독자상(목회자상)을 언급하면서 ‘말씀에 대한 깊은 이해, 범사에 본을 보일 수 있는 모범적 삶, 그리고 섬김의 도리’를 들어서 강조합니다(행 20:32-35). 바울이 떠난 후 얼마간의 세월이 지났는지 알 수 없으나 본문의 말씀을 통해 추정해 보건대 에베소 교회 내에 거짓 교사들과 사도들이 출현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당부대로 에베소 교회성도들은 말씀에 굳건히 서서 가르침의 진위성 여부를 가름하는 가운데 악한 자들과 거짓 선지자들을 가려서 내어 쫓았던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본문에서 악한 자는 거짓 교사와 거짓 선지자들과 본질상 동의어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봅니다. 이런 사실을 통해 에베소 교회가 한편으로 얼마나 말씀의 본의에 깊이 접촉돼 있었는지를 넉넉히 추정하게 됩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바른 교회의 정체성은 진리성과 진정성에서 찾아집니다. 이는 바른 지식/바른 신앙/바른 교회의 삼각 구도 속에서 말씀에 순종하는 방식을 통해 구원론적 통치를 적극 받아 누리는 생명적 활동이 비로소 가능하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이런 원리 속에서 교회의 생명은 말씀에 의존하고 말씀은 자연히 교회의 생명으로 기능합니다.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표면적으로 살았다고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교회들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성경은 결코 배제하지 않습니다. 사데 교회의 경우가 이에 해당합니다(계 3:1). 그런 의미에서 교회의 생명은 질적이고 내적인 데 있는 것이지, 결코 양적이고 외적인 데 있지 않음을 강조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경우가 이런 사실을 뒷받침 해 줍니다(계3:17-18). 이런 이유로 교회의 생명은 철저히 말씀에 의존돼 있고, 교회가 말씀에 순종하는 방식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된다는 원리가 성립됩니다(벧전 1:23). 개혁주의자들이 말씀의 순수한 전파를 교회의 삼대 표지(말씀/성례/권징) 중 제 일순위에 놓은 이유가 이런 사실과 무관치 않습니다. 말씀의 변질은 곧 교회의 변질과 타락으로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특별히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을 두 가지로 제시합니다. 첫째, 계시 의존적이 아닌 자의적으로 말한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본의를 해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각을 말씀을 빙자해 전달하는 것에 불과합니다(겔 13:3-7, 렘 23:21-22). 에스겔은 본문에서 “본 것이 없이 자기 심령을 따라 예언하는 우매한 선지자”란 표현을 씁니다. 결국 “허탄한 묵시를 보며 거짓된 점괘를 말하는 것”에 다름 아니란 지적입니다. 이런 사실에 대한 현대적 해석과 적용은 말씀을 하나님의 본의를 좇아서 해석하지 않고, 사람의 귀를 간지럽게 해 주기 위해 철저히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편의적으로 적용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말씀을 세속적이고 기복적인 이익의 재료로 삼아 인간의 행복과 성공을 위한 방편으로만 사용한다는 데서 무자격 목회자의 정체성이 드러난다는 지적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소명이 아닌 자의적 소명관에 근거해 사역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특별히 예레미야 선지자는 본문(렘23:21-22)에서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한다”고 거짓 선지자들을 고발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하나님의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이란 사실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회의’에 참석치 않았다는 의미는 ‘선지자의 말과 선지자의 파송’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닌 철저히 자의적인 것이란 사실의 강조적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와 소명이 교회공동체를 통해 객관적으로 확인되는 과정이 없이, 개인적인 체험과 사사로운 이해관계가 동인으로 작용해 순전히 자의적으로 목회사역에 들어선 목회자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닌 것이 현실입니다. 결과적으로 교회 현장 속에 얼마나 많은 무(無)은사와 무(無)소명의 무자격 목회자가 난무하는지 모릅니다. 이런 결과는 말씀의 왜곡과 변질로 인해 교회의 타락과 세속화를 가속화시키며,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허무는 일에 적극 일조할 뿐입니다.
이처럼 에베소 교회는 거짓사도들과 교사들의 왜곡된 교리와 가르침을 잘 분별해 교회로부터 내어 쫓았던 것입니다. 결코 진리를 타협하거나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세속적인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편으로 삼지도 않았습니다. 진리를 굳게 보수했습니다. 이런 사실들의 가능성을 2:6의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했다”라는 지적을 통해 넉넉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니골라당은 니골라라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편당으로서 ‘니골라당의 행위’란 그의 교훈과 가르침을 따르는 일단의 무리들임을 문맥을 통해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니골라가 누구인지를 성경에서 확인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혹자는 초대 교회 때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일곱 집사들을 열 두 사도들을 대신해 구제사역을 전담시키기 위해 선출하게 되는데, 이때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교회의 니골라를 택하게 되는 바(행 6:5), 이 사람을 니골라당의 수장으로 지목하기도 합니다만 불확실합니다. 문제는 니골라란 인물의 정체성이 아닙니다. 니골라당의 행위 곧 거짓된 교훈과 가르침입니다. 그렇다면 니골라당의 행위는 무엇일까요. 버가모 교회에 대한 주님의 책망을 통해 니골라당의 교훈을 유추 해석할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버가모 교회를 책망하시는 과정에서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을 동일시하신다는 사실입니다.(2:14-15). 이는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이 본질에서 동질성을 띠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발람의 교훈이란 모압왕 발락의 요청으로 물질에 미혹돼 이스라엘을 저주했던 거짓 선지자 발람의 계교를 말합니다. 중심내용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모압 여인들과 음행을 행하며 이 과정에서 우상을 숭배하도록 미혹했던 사건입니다(민 22-24장, 25:1-3, 31:16). 한편 두아디라 교회를 책망하시는 과정에서는 이세벨의 교훈을 발람의 교훈과 본질에서 동질성을 띠는 것으로 간주하십니다(계 2:20). 베드로 사도는 발람의 교훈의 실체를 불의의 삯을 사랑하여 신앙을 도구화시킨 불법적 행위라고 규정합니다(벧후 2:15-16, 유 1:11). 이로 보건대 니골라당의 교훈이란 한 마디로 발람적이고 이세벨적인 교훈으로서 탐욕에 사로잡혀 신앙을 도구화시키는 기복주의적이고 세속주의적인 신앙관을 가리킨다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날 목회사역이 소명의 차원을 벗어나 일종의 직업화되고, 신앙 또한 철저히 기복적이며 세속화되는 경향은 현대판 니골라당의 교훈이 교회 현장에서 팽배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심히 우려할만한 조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런 사이비 기독교 진리를 규명해 거부했으며 나아가 거짓 사도와 교사들을 출교시켰다는 사실로 인해 주님으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았던 것입니다.
칭찬의 세 번째 내용은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2:3). 세 번째 칭찬은 첫 번 째와 두 번째 칭찬과 본질상 깊이 연관된 내용입니다. 한 마디로 에베소 교회의 신앙의 정절을 가리킵니다. 당시 1세기 교회들은 로마의 지배 하에서 강력한 황제숭배 요구에 직면해 있었기 때문에 바른 믿음을 고수한다는 것은 곧 죽음과 직결돼 있었습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일체의 환란과 핍박을 기꺼이 감수했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고 믿음의 절개를 지켰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투철한 신앙관은 첫 번째 칭찬에서 살펴봤듯이 미래에 대한 소망의 확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종말론적 신앙관 말입니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현재의 고난이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롬 8:18)는 사실을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의연하게 현실에 대처해 나갔던 것입니다. 계 14:4에서는 이런 성도들을 일컬어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란 표현입니다. 이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않은 믿음의 정절을 지킨 자들이요,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감으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로 묘사됩니다. 나아가 그 입에는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로 칭송됩니다. 오직 진리를 좇아 말씀의 통치를 적극 받아 누리는 삶을 통해 이 세상과는 철저히 차별화된 천상지향적 가치관을 추구하며 살아간 자들이란 설명입니다(롬 12:2, 요일 2:15-16, 마 6:33). 이들이 땅에서 구속함을 받은 144,000명, 곧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의 총화란 사실입니다. 당시 에베소 교회는 바로 이 144,000명에 소속돼 믿음의 정절있는 자로 인정을 받고, 친히 하나님께 인침 을 받은 하나님의 친 백성들로 존재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함을 받아 사죄의 은총과 구원의 확신을 갖고, 말씀이 하나님의 본의를 좇아 바르게 선포되는 참 된 교회에 소속돼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우리 또한 이미 하늘에 소속된 144,000명에 속한 자들로 여기에 존재하고 있는 셈입니다.
③ 에베소 교회에 대한 책망
칭찬에 이어 곧바로 책망의 내용이 소개됩니다.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지적입니다. 사도 바울에 의해 창설된 에베소 교회가 설립된 지 40-50년이 지난 1세기 말에 즈음해 신앙의 본질로서 복음의 감격과 열정, 진리에 대한 탐구심, 하나님 나라의 반영으로서 교회의 정체성을 상실했다는 책망의 말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에서 지적한 ‘처음 사랑’이란 앞의 칭찬의 내용들을 가능케 했던 원동력을 총체적으로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이 동기유발 돼 무익한 종의 심정으로 진리를 추구하고 말씀의 통치를 적극 받아 누리는 천상지향적인 삶의 자세 말입니다(마 6:33).
따라서 에베소 교회가 첫 사랑을 버렸다는 것은 복음과 진리의 본질과 정신을 잃어버리고 형식적인 정통주의 교회로 전락했음을 암시해 준다고 하겠습니다. 한 마디로 진리와 사랑은 본질상 공존해야 하는 것인데 에베소 교회에는 진리는 있었으나 사랑이 실종되었다는 지적입니다. 그것은 자칫 사변(思辨)적이고 교조(敎條)적으로 치우쳐 냉소(冷笑)적인 신앙으로 빠질 수 있는 위험성이 농후합니다. 흔히 교회 현장에서 진리가 강조되다보면 사랑의 행동이 외면당할 수 있고, 사랑이 강조되다보면 진리가 위축될 수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자칫 개인주의가 팽배될 수 있는 현대교회 속에서 진리와 사랑의 공존과 조화의 묘(妙)가 어느 때보다 강력히 요구된다고 하겠습니다.
④ 촛대를 옮길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경고
에베소 교회에 대해 처음 사랑을 버린 사실을 강하게 책망하신 주님께서는 철저한 회개를 통해 처음 사랑을 회복할 것을 촉구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촛대 곧 교회를 옮겨버리시겠다고 강력한 경고를 발하십니다(계 2:4-5). 그러나 주님께서는 먼저 첫사랑의 회복을 위한 세 가지 처방책을 제시해 주십니다.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말입니다(5절). 혹자는 주님의 처방책을 일컬어 3R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생각하라(Remember), 회개하라(Repent), 처음행위를 가지라(Repeat)는 슬로건을 제시하는 것을 통해서 말입니다. 회복(restoration)은 처음 것을 되찾는 것, 또는 처음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회복과 개혁(reformation)은 본질상 동질성을 띤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개혁 또한 본질에로의 회복을 주요 관건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처음 사랑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어디서부터, 무엇 때문에 빗나가기 시작했는지를 찾아내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마치 어느 한 지역에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먼저 역학조사를 벌이듯이 말입니다.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핌으로 원인을 찾아내기 위함입니다. 그 후에 발견된 내용을 하나님 앞으로 가지고 나와 상하고 통회하는 심정으로 아뢰면서 용서를 구하고 결단하는 회개의 시간을 가져야 됩니다. 마치 다윗이 밧세바와 부적절한 관계를 가진 후에 하나님께서 나단선지자를 통해 다윗을 책망하시는 과정에서 다윗이 철저히 회개했던 것처럼 말입니다(삼하 11-12장). 이때 다윗의 회개의 내용을 담은 시편의 내용이 시편 51편입니다. 본 시편은 하나님께서 받으심 직한 회개기도의 내용이 어떠해야 함을 시사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줍니다. 특별히 시 51:17의 말씀이 결정적인 해답을 줍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회개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심정의 발로를 통한 전인적인 가치관의 변화를 시도하는 것이며, 이에 따른 과거의 삶과의 단절을 통해 새로운 삶으로의 적극적인 변화를 가리킵니다. 교통법규와 관련해 설명한다면 한 마디로 차선 변경이 아닌 180도 방향전환(U-Turn)의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 철저히 회개하지 않으면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시겠다’고 경고하십니다(5절하). 본문에서 ‘촛대를 옮긴다’는 의미는 일종의 심판의 성격을 띠는 것으로 교회됨, 곧 교회의 속성과 표지(標識)를 제거시킴으로 더 이상 교회로서의 가치와 생명력을 발휘할 수 없게 하시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 담긴 경고성의 발언입니다. 따라서 어느 한 지역교회가 촛대를 상실하게 될 때 그 교회는 죽은 교회, 형식적인 교회, 또는 기독교적 종교단체로 변질되거나 심지어는 그 지역에서 아예 교회가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사실상 에베소 교회는 더 이상 당시의 현장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촛대를 옮기시겠다’고 경고하심으로 다른 지역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참된 교회가 세워질 수 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주십니다. 어느 시대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남은 자들을 보존해 주셔서 이들로 하여금 합당한 교회를 이루게 하시고, 지속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선양하고 운반하며 건설해 나갈 수 있도록 주관해 가신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왕상 19:18, 롬 11:4-5, 엡 4:11-13). 참된 교회의 정체성은 항상 말씀의 본의를 추구하는 진리성과 진정성에서 찾아집니다.
⑤ 이기는 자에게 약속된 상급
주님께서는 이상의 칭찬과 책망과 경고의 메시지를 에베소 교회에게 선포하신 후에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청종할 것”을 촉구하십니다(7절). 본문은 몇 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시사해 줍니다. 첫째는 에베소 교회에게 주신 메시지의 선포자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령님으로 바뀐 사실입니다. 이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님을 통해 교회를 돌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성령님을 통한 예수님의 현재적 사역 말입니다. 생전에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을 통해 자신의 교회사역을 계속하실 것에 대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요 14:15-17, 26, 16:13-14, 행 2:1-4). 그런 의미에서 성령님의 사역은 동시에 예수님의 사역의 성격을 띱니다. 복음사역의 확장을 위해서 말입니다(요 14:12).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시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본질상 삼위(三位) 일체적으로 역사하십니다(롬 8:9, 요 14:23). 따라서 범사에 성령님의 인도와 다스림을 받을 때 최선으로 주님의 뜻을 받들어 행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것은 곧 말씀의 본의를 바르게 깨닫고 이를 신앙과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살아가는 순종력의 발휘와 동질성을 띱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순종하는 방식을 통하지 않고는 바른 교회를 이룬다거나 하나님의 나라를 선양하고 운반하며 건설해 나가는 천상지향적 삶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말씀의 통치를 적극 받아 누리는 데서 구원의 실질인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된 사실이 확인되며(갈 2:20) 하나님 나라에 소속된 친 백성으로서의 천상적인 정체성이 확증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귀 있는 자’들에게만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생명으로 수납된다는 사실입니다(엡 1:13). 결국 말씀의 사역은 성령님의 주도적인 사역이란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하나님으로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자의적으로 될 수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눈을 여셔서 주의 법의 기이함을 깨닫게 하시고, 귀를 열어 주셔서 들을 수 있게 해 주셔야 된다는 것이 성경의 지적입니다(고전 12:3, 행, 16:14, 시 119:18, 105절). 이러므로 구원은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과, 성령님의 인침과 보증의 역사에 근거할 뿐입니다(엡 1:4-14).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인간 편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엡 2:8-9). 구원의 방편인 믿음조차도 하나님께서 주셔야 합니다(엡 2:8). 그래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지는 것입니다(살후 1:10).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할 수 있는 당위성이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엡 1:6, 고전 10:31, 전 12:13). 한편 구원의 은혜는 순종의 삶과 직결돼 있습니다. 은혜는 행함을 동반합니다. 이때 성령님의 주도적인 역사에 의해 말씀에 통치를 적극 받아가는 순종력의 발휘가 가능해 집니다.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셋째는 에베소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은 동시에 모든 지상의 현존하는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과 본질에서 동일시된다는 사실입니다. 1절에서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를 향해 말씀하셨는데, 7절에서는 성령님을 통해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바뀐 사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단수가 복수로 바뀌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좀 더 확대해석하게 되면 결국 일곱 교회에게 주신 메시지는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완전수와 충만 수로서 7이라는 숫자에 담긴 상징성의 의미가 이렇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감심(感心)으로 받고 이를 생명처럼 귀하게 받들어 행한 자들에게 상급이 보장돼 있습니다. 요한은 이를 ‘이기는 자’에게는 이란 표현을 통해 보증합니다(7절하). ‘이기는 자’란 묘사는 군사적인 용어로서 다분히 전투적인 성격을 띱니다. 지상의 교회가 예수님을 군대장관으로 모신 하늘의 군대, 곧 전투하는 교회의 정체성을 띠고 존재하고 있음을 감안할 때, 이기는 자에게 약속된 보상은 전투에서 승리하는 자에게 주시겠다는 상급의 이미지를 담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는 공중권세를 잡고 있는 사단 세력들과의 치열한 영적 전쟁을 염두에 둔 표현임에 틀림없습니다(엡 6:12, 2:2-3). 보다 본질적인 관점에서는 창 3:15에 예언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간의 적대적인 영적 전투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사역으로 인해 결정적인 승부가 갈렸음에도 불구하고 종말에 이르기까지 지속될 것에 대한 시사이기도 합니다(마 12:29, 눅 11:21-22, 벧후 2:4, 유 1:6, 계 20:1-3). 계시록의 본론 부분에 해당되는 4-20장까지의 내용의 중심주제가 다름 아닌 사단세력들과의 영적전투 모티브에 근거해 기술되고 있음이 이런 사실을 뒷받침 해 줍니다. 내용전개가 이렇습니다. 1장에서 군대장관(야전사령관)의 모습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계 1:13-16, 19:11-13), 2-3장의 일곱 교회를 향해 이기는 자에게 상급을 약속하시면서 전투에서의 승리를 촉구하시다가, 마침내 사단세력들과의 모든 전쟁을 승리로 이끄신 후에 다시 한번 이기는 자에게 약속하신 모든 상급들을 주실 것을 총체적으로 보증하고 계신 사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계 21:7).
사실상 일곱 교회들을 향해 이기는 자에게 약속하신 상급의 내용을 살펴보면 새 예루살렘 성으로 상징된 교회의 종말론적 승리와 완성을 통해 누리게 될 영적 축복 곧 구원의 완성을 다양한 측면에서 언급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에베소 교회를 향해 이기는 자에게 약속하신 상급도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서 먹게 하시겠다’는 내용입니다. 이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상징된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서 교회가 누릴 영생의 삶을 가리킵니다. 처음 하나님 나라로 존재했던 에덴동산에서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해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차단되었습니다(창 3:22-24). 생명대신 죽음의 저주가 죄의 형벌로 내려졌습니다. 이들은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에덴동산은 한 순간에 실낙원이 돼 버렸습니다. 그러나 창 3:15의 여자의 후손언약은 구속에 근거해 에덴의 회복을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여자의 후손의 당사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죄는 속량되고 영적 에덴은 현재적으로 회복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성취를 통해 여전히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남아 있을지라도 하나님 나라는 현재적으로 ‘이미’ 도래했다는 사실입니다(마 12:28, 눅 17:20-21). 이런 원리 속에서 예수님의 초림사역의 성취는 재림사역의 완성을 보증합니다. 때문에 이기는 자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생명적으로 연합된 성도들은 이미 회복된 에덴동산(하나님 나라)에서 생명나무로 상징되는 영생을 현재적으로 소유해 누리는 자들로 살아갑니다(요 11:25-26, 5:24). 그리고 종말론적으로 완성될 교회가 향유하게 되는 축복 속에서 영생의 실질을 만끽하게 될 것을 보장받습니다(계 22:1-2). 이들이야말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돼 영생하는 생명력을 발휘시키는 가운데 사단의 세력에 맞서 죽음까지도 불사함으로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하나님의 친 백성들로 존재하는 자들입니다(벧전 2:9, 계 14:4-5). ‘이기는 자’의 표현 속에 담긴 본의가 이렇습니다.
2. 서머나 교회에게 주신 메시지(2:8-11)
호크마 종합주석(요한계시록)에 따르면 서머나(Smyrna)는 에베소 북쪽 약 80km 지점에 위치해 있었고, 당시 인구가 약 20-30만 정도로 소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항구 도시였습니다. 서머나 항은 요즈음도 서아시아 무역의 관문으로 활발하게 무역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이곳은 호머의 출생지이며 학문, 특히 과학과 의술이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종교적으로는 이교 문화와 종교의 중심지로 황제 숭배의 심장부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서머나는 소아시아 도시들 가운데서 지리적으로나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복음이 순수하게 전파되지 못하고 황제 숭배로 말미암는 혼합주의와 박해가 뒤따른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한편 사도요한의 제자이며 서머나 교회의 초대 감독이었던 폴리 캅(BC 155-166)이 이곳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① 역사의 주관자와 생명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서머나 교회에게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의 명칭은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로 말씀하십니다. “처음과 나중”이란 묘사는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만물과 만사의 진행이 주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관장된다는 그리스도의 주권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관련된 표현으로 구속주로서 사망과 음부의 권세를 이기신 부활 승리하신 주님을 강력히 증거합니다.
서머나 교회에게 예수 그리스께서 이런 명칭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것은 본문의 메시지에서 확인되듯이 당시 서머나 교회가 처한 상황이 심한 환란과 궁핍과 시험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9-10절). 따라서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가운데 결국에는 서머나 교회가 겪는 이런 모든 열악한 상황과 환경까지도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히 인도해 주실 것을 확약해 주시려는 강력한 메시지의 성격을 띱니다. 특별히 사단의 역사에 의해 몇 사람이 투옥되는 모진 시련과 시험을 받을 것과 관련해 ‘십일 동안 환란을 받으리라’(10절하)고 말씀하심으로 사단의 시험조차도 주님의 의해 그 결국이 좌우되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해 주십니다(욥 1:12, 2:6, 왕상 22:20-23).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관계 속에서 세상역사의 진행은 물론, 모든 피조물의 행동까지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의존되고 종속될 뿐입니다(잠 16:4, 마 10:29).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6).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관련해 때때로 인간 이성(인본주의적 관점)에 근거해 해석을 시도함으로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제한 주권처럼 평가절하시키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속성은 사랑이시기에 절대 주권에 의해 처음부터 택자와 불택자를 예정하셨다는 소위 이중 예정교리는 사랑의 속성과 모순이라고 지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선택사상과 관련한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정당성과 당위성은 이미 로마서 기자에 의해 기술된 에서와 야곱의 얘기와, 토기장이와 진흙 한 덩어리의 비유를 통해 그 진의가 밝히 해명되고 있습니다(롬 9:10-21). 창조주 하나님과 토기장이의 주권적인 권한상 선택의 여부와 만듦의 권(權)이 당연히 주권자의 기뻐하는 뜻에 의해 얼마든지 좌우될 수 있다는 논지입니다. 아울러 절대 주권자에 의해 취해진 행동은 오직 선할 뿐이며 옳다고 인정받을 뿐입니다. 절대 주권자의 결정과 행동은 피조물에 의해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절대 주권자는 결정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옳기에 당신의 행위에 피조물에 의해 대해 책임추궁을 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완전하신 분은 본질상 언행심사에 있어서 호리만큼의 결함도 있을 수 없기에 자연히 책임의 문제가 제기될 수 없습니다. 모든 일들이 오직 그 분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진행되기 때문입니다(엡 1:5). 주권성(Sovereignty)으로 말미암는 실현성(Feasibility)의 원리상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피조물에 의해 책임을 추궁당할 이유도, 필요도 없는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입니다. 책임과 의무는 죄성의 지배를 받는 피조물들만이 담당해야하는 창조주 하나님의 요구일 뿐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문제도 민감한 문제이긴 하지만 동일한 원리 속에서 접근해야한다고 봅니다. 사단의 미혹으로 말미암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문제도 죄의 원인자(原因者)와 조성자(造成者) 문제를 운운하기 전에, 논리상 엡 1:4-6에 언급된 창세전 삼위 하나님의 구원협약에 기원을 두고 풀어야 할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엡 1:4에서 기술한 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란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사건에 근거해 그 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 확인되는 구속 곧 대속사역이 전제되고 있는 표현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택함’은 곧 죄로부터의 구원을 전제로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단의 미혹으로 말미암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 또한 논리전개상 창세전 하나님의 구원협약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주제이지 별개의 독립된 주제일 수 없습니다. 아담의 범죄가 하나님의 절대주권사상과 무관할 수 없을지라도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책임소재를 돌릴 수 없다는 사실이 토기장이와 그릇의 비유를 통해 재확인됩니다. 토기장이와 그릇의 비유에 있어서도 천히 쓰임 받게 될 그릇의 입장에서 보면 토기장이의 처사가 못마땅하고 심지어 불의한 결정으로 평가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기자는 에서와 야곱의 경우에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롬 9:14)고 선언하며 토기장이와 진흙 한 덩이의 경우는 ‘....그럴 권(權)이 없느냐’(롬 9:20-21)란 질문을 던짐으로 그럴 권한이 마땅히 있음을 우회적으로 설파합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창조주로서의 주권성과 구속주로서의 영원성에 근거해 서머나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환란과 궁핍과 마귀로부터의 시험까지도 넉넉히 이길 것을 주문하시며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십니다. 현대교회 성도들도 동일한 원리 속에서 우리 앞에 놓인 다양한 고난과 시련을 믿음의 인내로 감당하며 의연하게 대처해 나가야 될 줄 압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창조주로서 그리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생명의 주로서 오늘도 성령님을 통해 여전히 교회 중에 임재하셔서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처한 현실을 알고 계신다는 말씀이 큰 위로와 힘과 능력으로 작용합니다(9절). 아신다는 사실은 당신의 몸 된 교회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교회가 안고 있는 제반 문제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표명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성도는 하나님께 이미 아신 바 된 자들입니다(갈 4:9). 그것은 동시에 성도가 당면한 제반 문제와 요구와 필요들을 주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해결해 주실 것에 대한 보증의 말씀이기도 합니다(빌 4:19).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가 무엇인 지를 먼저 아신다고 말씀하시는 분입니다(마 6:32). 그것은 이미 문제가 해결되었음을 가리키는 선언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이런 사실을 전폭적으로 수납하는 일만이 관건일 뿐입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성도가 직면한 현실을 아신다는 사실은 성도로 하여금 매사에 신전의식(Coram Deo)을 가지고 살아가게 하는 거룩한 삶의 동인으로 작용할 뿐 아니라, 온갖 죄성의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나가게 하는 예방적 삶의 근간이 되기도 합니다.
② 참된 부요함
한편 예수님께서는 서머나 교회의 환란과 궁핍을 아신다고 위로하시면서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라고 격려해 주십니다(9절). 당시 서머나 교회가 처한 영적이고 현실적인 상황은 분명히 고난과 시련 중에 있음이 확실한데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서머나 교회가 부요한 상태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주님께서 보시는 부요와 축복의 관점이 세상의 관점과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일반적으로 세상의 부요는 가시적이며 물리적이고 현세지향적인 것으로 정의됩니다. 양적이고 외적인 것으로 평가됩니다. 그래서 비천한 자보다 권세 있는 자가, 가난한 자보다 부자가, 약한 자보다 강한 자가 상대적으로 행복한 자요 부요한 자로 평가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신앙여정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과의 관계성 여부를 복과 화, 행복과 불행, 부와 가난, 성공과 실패, 기쁨과 슬픔 등의 준거로 삼아 평가합니다. 한 마디로 온 천하를 얻었다 할지라도 이보다 더 중한 목숨 곧 생명의 문제가 보장돼 있지 않다면, 온 천하를 얻은 부귀영화의 삶은 한낱 일장춘몽에 불과하다는 것이 성경의 관점입니다(마 16:26).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된 자는 이미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않음으로 사실상 가장 부요한 자로 존재하는 자라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로 안에서 함께 하늘의 후사가 되고, 함께 주님의 지체가 되고, 함께 영원한 안식에 참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언약백성 된 자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엡 3:6). 여기서 복음으로 말미암아서란 구원의 생명이 다름 아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수납하는 방식을 통해 보증된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롬 3:21-22, 28절). 그런 의미에서 부요의 실체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강조합니다. “그 안에는(예수 그리스도)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 2:3). 밭에 감춰진 보화의 비유(마 13:44) 또한 모든 소유를 팔아서라도 마땅히 사둬야 할 최고의 보물로 하나님 나라를 가리킵니다. 보이는 것은 잠간 있다가 사라질 것들이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속한 것은 영원하고 영속적이기 때문입니다(요일 2:15-17, 고후 4:18).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회심했던 사도바울의 삶의 변화를 보십시오. 빌 3:7-8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된 참 된 구원받은 성도의 삶의 정체성은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이는 참 된 구원의 생명은 전인적인 가치관의 변화와 인생관의 변화를 동반한다는 사실을 교훈합니다(창 12:1). 차선 변경이 아닌 180도 방향전환(u-turn)의 성격을 띠고서 말입니다. 곧 자기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에로, 현세지향적인 삶에서 천상지향적인 삶의 자세로의 전환을 통해서 말입니다. 성도의 신앙생활 현장에서 본질상 이런 식의 전인적인 변화가 확인되지 않는다면, 그래서 여전히 구습을 좇는 옛사람의 행실을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반복한다면 한 번쯤 자신의 구원을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적이고 자기기만적인 종교인의 신분으로 얼마든지 종교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성경의 지적입니다. 고후 13:5입니다. ”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보증의 영이신 성령님의 인침과 내주와 근심의 역사는 이런 식의 구습을 좇는 옛 사람적 삶을 모른다고 외면하거나 방관하지 않으십니다. ”너희는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생명에 연합돼 말씀의 통치를 적극 받아 누리는 자들이야 말로 가장 행복한 자들이요 가장 부요한 자들이라는 게 성경의 지적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표상으로 묘사된 종말론적인 교회가 향유하게 될 다양한 축복의 내용들이 계 21-22장에 집중적으로 소개돼 있습니다. 이는 혼인잔치에 단장한 신부로 등장하는 승리한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마침내 구원의 완성 곧 영생의 실질을 만끽하게 됨으로, 이 ‘크신 일’을 이루신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의 영광을 송축하며 경배드리는 모습을 총체적으로 기술한 내용입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가장 행복하고 부요하며 복된 자들입니다. 비록 서머나 교회의 당시의 형편과 처지가 곤고했을지라도 주님께서는 저들의 영적인 상태를 보시며 복되고 부요하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현대교회 성도들이 이런 주님의 관점과 시각을 가지고 말씀의 본질에 깊이 접촉돼 천상지향적인 삶을 적극 추구해 간다면 넉넉히 세상을 이기는 자들로 살아가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③ 사단의 회로서의 거짓 교회
서머나 지역에는 표면적인 유대인들이 적지 않게 활동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9절하). 이들은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을 근거로 하나님의 선민(選民)임을 자처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켜 행하는 것으로 거룩과 믿음의 진위성 여부를 규명하려고 했습니다. 할례를 구원의 근거로 삼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를 전파하는 기독교인들과 사사건건 충돌했으며 첨예하게 적대적인 대립의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초대교회 당시 여러 이단들과 잘못된 사상 중에 유대주의자들은 가장 포괄적으로 기독교를 박해하는 진리의 훼방꾼들이였습니다. 갈라디아서 기자는 유대주의를 ‘다른 복음’으로 정죄했습니다(갈 1:6-9).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 된 신분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지 않습니다(요 1:13).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신 창세전 하나님의 선택사상에 근거해서 말입니다(엡 1:4-6. 딤후 1:9, 딛 1:2). 이런 사실에 근거해 자신의 구원을 모태신앙 운운하면서 과시하려는 태도는 무의미합니다. 구원의 신앙은 세습되는 것이 아닙니다. 철저히 하나님의 선택적 은혜에 근거합니다. 복음 곧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의 손길을 통해서 말입니다(고전 1:21). 믿음과 구원이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엡 2:8).
이런 관점에서 서머나의 유대인들은 표면적인 유대인들로서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니었습니다. 진정한 유대인은 이면적 유대인일 뿐입니다(롬 2:28-29).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 말입니다. 성경은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아브라함의 후손들이요 약속의 자녀들이라고 정의합니다(갈 3:7, 29절). 따라서 주님은 서머나 지역의 표면적 유대인들을 일컬어 ‘사단의 회’라고 규정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향해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요 8:44)고 책망하시면서,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 하였음이로다“(요 8:47)라고 이들의 사단적 정체성을 폭로하십니다. 본문에서 유의할 대목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들로 곧 사단의 회에 속한 자들이란 지적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로 비유하셨습니다(요 10:10). ”주님의 양은 목자 되신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주님은 저희를 알며 저희는 주님을 따른다“(요 10:27)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이 전해질 때 성령께서 택자의 심령 속에 말씀으로 인쳐 주시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찾으신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엡 1:13, 고후 1:22, 고전 1:21, 12:3, 행 16:14).
이런 사실은 비단 복음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는 지에 관한 성경의 본의가 총체적인 계시관에 근거해 전해질 때, 말씀을 이익의 재료로 삼아 기복의 수단으로 신앙해 온 사람들은 정작 진리를 거부하며 외면하기 일쑤입니다. 구원의 은혜에 감심으로 반응함으로 하나님을 목적삼아 무익한 종의 심정으로 섬겨야 하는 것이 바른 성경의 가르침인데도 불구하고, 자의적 숭배신앙에 습관화 돼 세속적인 행복과 성공을 목적삼아 방편적으로 하나님을 신앙하다보면 자기부인의 삶이 힘들게 돼 스스로 하나님을 도구 삼는 우상 숭배적 신앙관에 깊이 빠지게 될 뿐입니다. 교회의 생명은 말씀에 의해 좌우됩니다. 바르게 해석된 말씀의 지속적인 선포와 공급, 그리고 이를 생명의 도리로 붙잡고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성경적인 바른 신앙과 바른 교회를 이루는 첩경으로 기능합니다. 그렇지 못할 때 자칫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주님 보시기에 죽은 교회, 심지어 사단의 회로 전락할 수도 있음을 성경은 엄히 경고합니다. 사데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를 통해 이럴 수 있는 가능성과 위험성에 대해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④ 성도가 경험하는 고난의 의미
예수님은 표면적 유대인들로 말미암는 사단의 회의 핍박에 대해 언급하신 후, 마귀의 적극적인 공세로 말미암아 서머나 교회가 당할 ‘십일 동안의 환란’에 대해 예언해 주십니다(10절하). 사실 서머나 교회는 빌라델비아 교회와 함께 주님의 책망을 받지 않은 교회입니다. 환란과 궁핍의 고난 중에서도 진리에 입각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부요한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사단의 회에 의해 심한 박해를 받았음에도 시종일관하게 신앙의 정절을 지켜낸 충성된 교회로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보다 공격적인 마귀의 시험이 주어질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심지어 서머나 교회 성도들 중 몇 몇이 감옥에 투옥돼 심한 고난을 받게 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성도들에게 고난과 시험은 필연적입니다. 진리를 추구하며 말씀의 본의를 좇는 바른 교회일수록 사단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다양한 형태의 고난과 시련에 늘 직면하게 됩니다. 지상의 교회를 전투적인 교회라고 일컫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이는 또 다른 관점에서 주님의 남은 고난에 동참한다는 구속사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골 1:24입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물론 본문의 남은 고난이란 예수님의 구속사역의 불충분성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한 번 죽으심으로 영원히 우리의 죄과를 도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구속사역은 완전하고 영원합니다. 단지 주님의 몸 된 교회공동체가 주님의 재림 시까지 사단의 세력들과의 불가분의 적대적인 관계 속에서 직면하고 있는 다양한 고난과 핍박과 관련해 몸의 유기적인 원리 속에서 언급된 내용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창 3:15(여자의 후손언약)에 예언된 두 세력 간의 투쟁적 관계는 예수님의 구속사역으로 승패가 갈렸음에도 불구하고 재림 때까지 지속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주님의 몸 된 교회가 받는 환란과 핍박과 고난으로 인해 교회는 넘어지거나 아주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난과 박해를 통해 교회의 진리성과 진정성을 시험받게 되는 것으로 인해 진위여부가 드러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거짓교회는 사라지게 될 것이요, 참 교회는 더욱 천상적 교회의 정체성을 뚜렷하게 현시하게 될 것입니다(계 14:4-5). 이는 성도들 개개인에게도 동일한 원리 속에서 적용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겪었던 극심한 핍박과 관련해 이를 전심으로 하나님만 바라고 의지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하심으로 해석합니다. 고후 1:8-9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란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한 때 바울은 자신의 ‘육체에 가시’ 곧 육신의 연약함을 위해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고후 12:7-9). 그 때도 주님은 바울의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강함과 능력을 체험할 수 있음으로 도리어 바울의 가시(약함)가 하나님의 크신 은혜의 방편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사단의 시험까지도 이를 믿음으로 감내하게 될 때 오히려 유익으로 작용하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지적입니다. 더욱 성도가 사단의 시험과 고난을 믿음의 인내를 가지고 감당해야 함은 사단의 시험조차도 하나님의 절대 주권 하에 의존돼 있다는 사실입니다. 욥을 송사하는 사단의 시험을 통해 이런 사실이 극명하게 확인됩니다(욥 1:12, 2:6). 아합을 꾀는 거짓 영의 역사 또한 이런 사실을 뒷받침 해 줍니다(왕상 22:20-23). 에덴에서 뱀을 통해 아담과 하와를 미혹했던 사단의 역사 또한 엡 1:4-6의 창세전 하나님의 구원협약과 관련시켜 해석할 때 ‘논리상’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무관하지 않음을 추정하게 됩니다. 성경의 계시사의 중심사상인 구속사의 출발은 분명 엡 1:4-6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예수님은 서머나 교회가 직면한 마귀의 시험을 ‘십일 동안’으로 한정시켜 말씀하십니다. 본문에서 십일 동안은 문자적으로 열흘이 아닙니다. 상징적인 숫자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정해 놓으신 섭리적 작정의 기간으로 말입니다. 마치 계시록의 다른 부분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짐승이 교회를 핍박하는 42달의 기간(계 11:1-2, 13:5), 용의 핍박으로부터 1260일 동안 교회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양육의 기간(계 12:6),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하는 1000년 동안의 기간(계 20:6) 등처럼 말입니다. 문제는 시험의 내용이 어떤 성격을 띠고 있든지 그것의 시종은 하나님의 의해 좌우된다는 사실입니다. 마침내 끝이 올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피할 길도 열어 주십니다(고전 10:13). 이런 사실로 인해 어떤 경우의 시험일지라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이루는 데 합력해 선용될 뿐입니다. 시험에 직면한 성도들에게 믿음의 인내가 요구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때문에 주님은 시험에 직면한 서머나 교회를 향해 죽도록 충성하라고 권면해 주십니다. 어떤 형태의 시험일지라도 본질상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이루시는데 선용되기 때문입니다. 충성은 성도의 신앙과 믿음의 진위를 가름하는 영적 덕목입니다. 특별히 말씀을 맡은 자에게 요구되는 조건 중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요소가 다름 아닌 충성심입니다(딤후 2:2, 고전 4:2). 그런 의미에서 충성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행해야 되는 모든 성도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우선적인 덕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계 14:4-5). 예수님은 온갖 시련과 핍박 중에서도 주님을 향한 믿음의 정절과 신앙의 절개를 지킨 자들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약속해 주십니다. 생명의 면류관은 종말론적으로 누리게 될 영생의 삶을 가리킵니다. 면류관은 경기의 승자에게 주는 영광의 표식이요 징표입니다. 계 4장은 두 번째 환상동아리가 시작되는 첫 장입니다. 본 환상동아리의 배경은 하늘보좌와 깊이 연관돼 있습니다. 특별히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쓴 24장로들이 하늘 보좌를 중심으로 둘러서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을 향해 감사와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계 4:2-4, 5:13). 이들 24장로들은 모든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을 총체적으로 가리킵니다. 이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썼다는 것은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근거해 죄씼음을 받고 의롭게 된 승리한 교회가 하늘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묘사해 줍니다. 땅의 교회는 동시에 하늘에 속한 교회와 동일시되며 동질성을 띠고 있음을 요한계시록은 부단히 다양한 상징과 묵시를 통해 보여줍니다. 교회의 이중구조 속에서 말입니다. 전투하는 교회의 성격을 지닌 지상의 교회가 계시록을 통해 큰 위로와 힘과 능력과 종말론적인 약속을 보장 받을 수 있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예수님은 이상의 권면과 약속들을 성령님을 통해 서머나 교회에게 확증시켜 주시는 가운데 ‘교회들’이란 복수대명사를 사용하심으로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로 당신의 약속을 확대 적용시켜 주십니다(11절). 요한계시록이 시공을 초월해 현대교회 성도들에게도 동일한 관점에서 위로와 격려와 큰 힘과 능력을 공급해 주심이 이상의 원리 속에서 가능합니다. 전투하는 교회의 승리자에게 주님은 둘째 사망의 해가 미치지 못할 것을 약속해 주십니다(11절하). 이는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에게 약속하신 특권과 동일한 성격을 지닙니다(계 20:6). 본문에서 둘째 사망의 해가 미치지 못한다는 표현은 둘째 사망 곧 불못으로 비유되는 지옥의 형벌로부터 영원히 제외됨을 의미합니다(계 20:13-15, 요 5:24). 이를 환언하면 계 20:11-15에 소개된 종말론적 심판, 소위 백보좌의 심판으로부터 성도는 본질상 제외됨을 가리킵니다. 요 5:24에서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은혜로 베풀어 주시는 구속사적 특권을 설명하는 가운데 영생의 삶과 심판으로부터의 제외됨이 강조되고 있음을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효가 모든 죄를 도말했을 뿐 아니라 의롭다고 이미 선언해 주셨기 때문입니다(히 10:14-18, 롬 3:23-24, 8:33-34). 그러나 들을 '귀 있는 자'들만이 서머나 교회에게 주신 말씀을 오늘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생명의 말씀으로 받게 될 것이라고 계시록은 경종을 울려 줍니다. 정작 볼 눈과 들을 귀가 열려있지 않다면, 그래서 그 내용들을 적극 지켜 행하는 실천적 삶이 뒷받침 되지 않는다면 계시록에 기술된 다양한 복과 상급들은 나와는 무관할 뿐입니다. 대신 각종 화(禍)와 재앙과 심판을 피할 수 없기에 영원한 후회가 뒤따르게 될 것입니다.
3. 버가모 교회에게 주신 메시지(계 2:12-17)
호크마 종합주석과 메릴 C. 테니의 요한계시록 해석에 따르면, 버가모(Pergamum)는 수세기 동안 독립된 왕국의 행정적 중심부였습니다. 서머나 북쪽 약 100km 되는 곳에 위치했으며 주전 130년경에 로마의 식민지로 편입되었습니다. 로마의 아시아 속령 중 처음으로 버가모에 로마와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기리는 황제 숭배의 전이 건립되기도 했습니다(BC26년경). 뿐만 아니라 치료의 신으로 이해되었던 아에스쿨라피우스라 불리는 뱀신과 주신인 제우스, 그리고 아테네 신전 지도자 디오니소스 등을 숭배하는 각종 우상숭배의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실은 주님께서 버가모 교회를 향해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계 2:13상)고 지적하시는 말씀을 통해서도 확인됩니다.
① 말씀의 진위를 가리시는 판관 되신 예수 그리스도
버가모 교회를 향해 예수님은 자신을 “좌우에 날 선 검을 가지신 이”로 나타내십니다. 이는 버가모 교회 속에 니골라당이란 사단의 회가 조직돼 발람의 교훈을 퍼트리고 있다는 사실과 밀접하게 연관된 명칭입니다. 당시 버가모 교회는 이런 이교도적 교훈과 이단사상에 미혹돼 진리를 거스르는 자들이 생겨났고 이로 인해 심히 혼돈된 상태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게다가 버가모 지역의 종교적 특성상 황제숭배와 각종 우상숭배가 만연했던 곳으로 사단의 역사가 특별히 강하게 나타났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영적 암매와 혼돈 속에서 예수님은 버가모 교회를 향해 ‘좌우에 날 선 검을 가지신 이’로 자신을 현시하심으로 말씀의 진위를 가려서 엄중히 심판하실 것을 선언하시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좌우에 날 선 검’이란 심판의 성격과 옳고 그름을 가름하게 되는 성령의 검, 곧 말씀의 특징적인 성격을 비유적으로 설명한 표현입니다(엡 6:17, 히 4:12).
이런 주님의 자기계시는 발람의 교훈에 동조해 이를 좇으며 니골라당에 가담한 자들에게는 큰 위협이 아닐 수 없겠으나, 순교의 정신을 가지고 믿음의 정절과 절개를 지켜 행하는 성도들에게는 큰 위로와 격려와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② 버가모 교회에 대한 주님의 칭찬
주님은 버가모 교회가 처한 신앙의 위기와 절박함을 아신다고 격려해 주십니다. 환란과 핍박의 강도가 아무리 심할지라도 주님께서 함께 해 주시고, 더구나 성도의 형편을 주께서 아신다고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시는 주님의 말씀은 고난 중에 있는 버가모 교회에게는 큰 위로와 기쁨과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당시 버가모가 각종 우상숭배의 온상으로 사단의 위(位), 곧 통치권이 가장 권세 있게 발휘되는 총사령부와 방불한 곳임을 감안할 때, 버가모 교회가 신앙의 순수성과 믿음의 정절을 지켜 행한다는 것은 죽음까지도 불사해야만 할 형편이었습니다. 결국 버가모 교회는 사단의 집요한 핍박과 박해 앞에 안디바라는 순교자를 배출하기까지 했습니다. 충성된 증인 안디바는 황제숭배 강요와 각종 우상숭배의 유혹 앞에서도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의 정절을 결코 저버리지 않았음을 본문은 시사합니다. 이런 식으로 주님은 안디바의 순교를 통해 버가모 교회가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신앙의 순수성을 지켰음을 총체적으로 평가해 주십니다.
안디바의 순교사건을 통해 사단의 세력과 불가피하게 투쟁해야 하는 지역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영적 전투와 관련해 살펴봅니다. 첫째, 지역교회의 전투 목적은 ‘내 이름’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입니다(13절). 이는 다른 말로 예수의 증거입니다. 사도요한이 밧모 섬에 유배된 이유도 예수의 증거(계 1:9)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이나 ‘예수의 증거’는 동의어로서 복음증거와 말씀전파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으로 고백하며 주와 하나님으로 믿고 섬기는 신앙생활 전반을 가리킵니다. 다시 한번 정리하건대, 지역교회의 전투 목적(존재이유)은 복음과 진리의 말씀을 부단히 전파하며 가르치는 것을 통해 구원의 역사와 진리 안에서 자라가는 성숙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를 삼는 데 우선순위가 집중됩니다(마 28:19-20, 빌 3:7-8)). 이 과정에서 목회자의 사명은 성도를 말씀으로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워나가는 데서 찾아집니다(엡 4:11-13). 둘째, 전투의 성격은 ‘충성된 증인’으로 평가되기 위함입니다(13절). 사단과의 영적 전투에서 그리스도의 군사 된 성도(딤후 2:3-4)들에게 요구되는 사항은 말씀을 좇아 죽도록 충성하는 일사각오의 정신입니다. 임전무퇴의 믿음의 정절과 순결 말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된 증인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순교의 정신이 요구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안디바에게 내 충성된 증인이라고 치하(致賀)하심은 비단 안디바 한 사람에게 국한된 칭찬이 아닙니다. 전투하는 지상의 교회들에게 분부하신 지상명령이나 다름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담당하시는 과정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충성된 종의 이미지로 이미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계 1:5상). 주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충성된 종의 이미지는 한 마디로 ‘고난을 통한 영광의 승리’(No Cross, No Glory)란 패턴입니다. 계시록에 ‘어린양의 구속에 힘입어 그 옷을 씻고 의롭게 된 큰 무리들’에 관한 이미지 또한 큰 환란에서 나온 자들로 묘사되는 것을 봅니다(계 7:13-14). 이들이 하나님의 충성된 증인들로, 곧 구속함을 받아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라고 계시록은 증거합니다(계 14:4-5). 지상의 교회들은 사단세력들과의 불가분의 대치국면(창 3:15, 엡 6:12, 계 11:1-2, 13:5) 속에서 주님의 재림 시까지 복음을 위한 영적 싸움은 지속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최후의 승리가 찾아올 것입니다(계 17-20장). 그 날이 오기까지 지역교회에 속한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롬 12:2, 요일 2:15-16), 말씀에 순종함으로 믿음의 정절을 지키는 가운데,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일편단심의 심정으로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이들이야말로 진정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요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충성된 자들이라고 성경은 증언합니다(계 14:4-5).
③ 발람의 교훈을 책망하시는 주님
사단의 세력에 굴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의 충절을 지킴으로 순교자까지 배출했던 버가모 교회에게도 책망의 요소가 깃들어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발람의 교훈을 교묘하게 끌어들인 니골라당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일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14절). 발람의 교훈이란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향해 행군해 가는 과정에서 모압 왕 발락의 제안에 미혹돼 이스라엘을 범죄와 타락에로 빠트렸던 거짓 선지자 발람의 계략을 가리킵니다(민 22-25장, 25:1-3). 이처럼 발람은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했고, 행음하도록 간계를 꾸밈으로 ‘불의의 삯’을 위해 일했던 패역한 선지자였습니다(벧후 2:15, 유 1:11). 따라서 발람의 교훈의 핵심은 이스라엘을 우상숭배와 행음으로 타락시켰던 악의적이며 교묘한 ‘사상’입니다. 그런데 이런 발람의 패역한 교훈과 사상이 니골라당이란 이단적인 무리들에 의해 당시 에베소 지역(계 2:6)과 버가모 교회에 도입돼 재현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당시 니골라당이 과거 발람의 계략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로 범죄케 했던 우상숭배와 행음을 문자적으로 도입해 적용시켰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문제는 이스라엘을 타락과 범죄로 이끌었던 발람의 패역한 간계와 사상에 모아집니다. 다시 말해 과거 이스라엘을 타락시켰던 발람의 계책이 니골라당에 의해 묘한 사상체계를 이루는 가운데 버가모 교회 속에서 재현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식으로 니골라당의 묘한 사상이 논리적으로 체계화된 교훈을 이루는 가운데 변질된 복음의 모습을 띠고 버가모 교회 성도들을 미혹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교리적으로 바르게 정립되지 못한 의식 없는 일부 교인들이 단순히 현실적인 이해관계에만 얽매여 동조함으로 니골라당의 교훈은 버가모 교회 속에 누룩처럼 번져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발람의 교훈에 기조를 둔 니골라당의 교훈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베드로 사도의 지적에 따르면, 발람의 교훈의 실체는 ‘불의의 삯’을 사랑했다는 것입니다(벧후 2:15). 이는 신앙을 사욕의 도구로 삼으려는 탐욕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온갖 기복(祈福)의 수단으로 하나님을 도구화하려는 신앙은 본질에서 우상숭배와 하등 다를 바 없습니다. 여호와의 신앙이 인간의 세속적인 목적과 성공 및 행복의 방편으로 사용될 때, 더 이상 하나님 중심의 바른 신앙이랄 수 없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에 의해 조성된 소위 여로보암 종교의 정체성이 다름 아닌 여호와 종교를 빙자한 자의적 숭배신앙(우상숭배)의 전형으로 평가됩니다(왕상 12:25-33). 여로보암 종교의 특징은 외형적으로는 한결 같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채색되었으나 본질과 내용에 있어서는 철저히 왕권의 보존을 위해 작위적이며 편의적이고 방편적인 요소들로 채워졌다는 사실입니다. 여호와 중심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온 천하보다 귀한 목숨 곧 구원의 생명을 은혜로 먼저 공급해 주신 사실에 근거해(롬 5:8, 요일 4:10), 목적적 신앙이 아닌 방편적 신앙으로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자와 구원자로서 범사에 우리의 목적이 되시는 분입니다(전 12:13, 마 6:33, 눅 17:10). 인본주의적 신앙관의 폐해는 창조주 하나님을 인간의 행복과 영광을 위해 도구 삼으려는 데 있습니다. 이상의 논리에 근거할 때 발람의 교훈에 근거한 니골라당의 교훈의 정체는 인간의 현세적인 목적달성과 성공적인 삶을 위해 신앙을 도구 삼으려는 기복적인 종교행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목회와 관련해 하나님의 소명차원보다는 삶의 질과 연관시켜 세속적인 직업적 관점으로 평가하려는 분위기의 팽배를 심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위 성공적인 목회란 차원에서 말입니다.
둘째로 발람의 교훈의 핵심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우상숭배적 행음에 빠지게 했다는 사실입니다(계 2:14, 고전 10:7-8). 이는 종교적 쾌락을 탐닉했음을 가리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과 나라로서의 정체성을 율법의 정신을 따라 뚜렷이 현시함으로 말씀의 통치를 적극적으로 받아 누리는 제사장 나라로 존재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발람의 올무에 사로잡혀 종교라는 이름으로 정작 육체의 쾌락과 탐심을 좇아 행하는 일에 착념함으로 국가적인 범죄와 타락에 빠져버렸습니다(민 25:1-3, 고전 10:7-8).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사실로 인해,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는 것을 목적삼아 살지 못하고, 여전히 구습을 좇는 옛 사람적 삶을 살아가는 실패한 성도의 모습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상의 논리에 따른 니골라당의 교훈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고 구원을 이미 받았기에, 육신의 정욕을 좇아 구습을 좇는 옛사람의 행실을 추구한다고 할지라도 더 이상 죄와는 무관하다는 도덕 폐기론자 내지는 율법 무용론자적 삶을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궤변을 결코 용납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했기에(롬 8:2) 이후부터는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함으로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으려는 천상의 질서 속에서 부단히 살아가게 된다고 가르칩니다(갈 5:16).
버가모 교회의 지도자들은 에베소 교회처럼 니골라당의 거짓된 교훈을 밝히 드러내 이들을 출교시켰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일에 실패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버가모 교회는 진리를 생명처럼 받들어 순교조차 두려워 않는 신앙의 정절을 지키는 자들이 있었던 반면에, 일부에서는 니골라당의 이단적 교훈에 미혹돼 복음을 적극 거스르는 자들이 공존하는 혼합주의적 교회의 성격을 띠고 있었습니다.
현대교회가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 또한 버가모 교회가 당면한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작금 한국의 기독교 신앙의 문제점은 흔히 기복주의/상급주의/지성감천주의/신비주의적 색체가 상대적으로 강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이는 분명히 성경이 말하는 여호와중심의 신앙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이런 식의 신앙자세가 한결 같이 견지하고 있는 공통적인 특징은 한 마디로 신앙의 도구화 현상입니다. 하나님을 통해 자신의 현세적이며 육신적인 목적과 소원을 성취시켜 보려는 종교적 욕심의 발로현상 말입니다. 이는 비단 왜곡된 기독교 신앙에서만 발견되는 현상은 아닙니다. 일반적인 종교현장에서 보편적으로 확인되는 현상입니다.
성경은 욕심의 발로에서 신을 찾는 행위를 일컬어 우상숭배라고 정의합니다(골 3:5). 그래서 욕심과 우상숭배를 본질상 동일시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을 인간의 유익을 위해 도구화시켜 섬긴다면 사실상 우상숭배와 다를 바 없으며, 이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여타의 우상 중 하나로 평가절하시키는 패역한 범죄행위가 성립될 뿐입니다. 현 시점에서 바른 신관에 따른 바른 신앙관의 정립이 어느 때보다 각별히 요구된다고 하겠습니다. 바른 신관은 바른 계시관을 통해 정립되기 마련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에 대한 총체적인 계시관의 정립이 무엇보다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롬 10:2-3이 이런 사실을 구체적으로 확인시켜 줍니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아니하였느리라.” 본문에서 하나님의 의와 자기(인간)의가 극명하게 대비돼 설명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의’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의로서,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구원의 도리를 가리킵니다(롬 3:21-22). 반면에 ‘자기(인간)의’란 유대주의가 지향하는 율법의 행위에 근거한 구원교리를 가리킵니다(롬 9:30-32). 그러나 율법의 행위로는 누구든지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율법이 부딪히는 돌이 되어(롬 9:32) 죄인으로 정죄당하며 심판아래 있게 할 뿐입니다(롬 3:19-20).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왜 이렇게 무모하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본문에서 원인을 찾는다면 지식 곧 성경의 본의를 좇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롬 10:2, 호 4:6, 6:3). 구원의 도리에 관한 지식의 체계(하나님의 의)를 무시하고 자기 소견에 좋을 대로, 자기 뜻(자기 의)과 타락한 종교심을 좇아 하나님을 임의로 섬겼다는 지적입니다. 그 결국은 불복종적이고 불법적 신앙으로 판정돼 하나님으로부터 모른다고 외면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마 7:21-23). 현대교회 역시 이런 준엄하신 주님의 책망과 경고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깊이 인식하고 자성해야 할 줄 압니다. 그렇지 않을 때 주님의 경고가 우리의 현실로 다가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④ 니골라당의 교훈을 극복하는 해결책
버가모 교회와 에베소 교회 속에 발람의 교훈에 근거한 니골라당의 교훈과 행위가 가시적으로 역사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두아디라 교회에서는 이세벨이라는 자칭 선지자를 용납함으로 거짓 교훈과 가르침이 교회 내에 공개적으로 만연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현대교회에 큰 경종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마디로 죽은 교회, 거짓 목회자, 거짓 교인이 얼마든지 양산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감안해, 사태의 진위를 가릴 수 있는 영적 분별력과 통찰력이 어느 때보다 강력히 요구된다고 하겠습니다. 베뢰아 교회 성도들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되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으로 상고해 분별하는 계시의존적인 신앙관의 정립이 시급히 요청되는 시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행 17:11).
그런 의미에서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를 총체적인 성경 계시관에 입각해 바르게 해석함으로 하나님의 본의를 밝히 해명할 수 있는 통전적인 성경공부의 필요성이 절실히 요구됩니다. 교회의 생명은 다양한 종교적 활동에 의해 좌우되지 않습니다. 바르게 해석된 말씀의 지속적인 공급과 이를 순전하게 받들어 행하는 순종력을 통해 보존됩니다(요삼 4절, 롬 10:2-3, 마 7:21-23, 행 20:31-32. 6:4). 교회 속에 말씀의 수종자로 목사의 은사를 주신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엡 4:11-13). 이런 관점에서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드시고 일곱 교회 사이를 다니시는 주님의 현재적 사역’의 상징(계 2:1)을 통해 주님과 교회와 목회자 삼자(三者) 간의 일체성과 연합성 및 통일성을 바르게 정립하는 일은 바른 신앙관/바른 교회관/바른 목회관을 정립하는 일과 관련해 생명처럼 소중한 원리입니다.
주님께서 버가모 교회 안에 성행하고 있는 니골라당의 교훈을 근절시킬 수 있는 치유책을 알려주십니다. 먼저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16절상). 회개란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용서를 빌 뿐 아니라, 종전의 잘못된 삶의 방향성을 180도 전환시키는 전인적인 회심까지를 포함합니다. 환언하면 니골라당이 가르치는 왜곡되고 변질된 복음, 곧 신앙을 도구삼아 육신의 정욕을 추구하는 기복적이고 세속적인 우상숭배적 신앙관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목적 삼는 계시의존적인 참 된 신앙관의 회복을 재정립하라는 강력한 주문을 뜻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께서 속히 임하셔서 입의 검(히 4:12, 엡 6:17), 곧 진리의 말씀으로 저들의 진위를 가려 심판하시겠다고 강력한 의지를 표명해 주십니다(계 2:16하). 이 대목을 통해 어느 시대건 참 된 교회는 주님의 직접적인 인도와 통치 속에서 영원히 안전하게 보호되고 보장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일곱 별과 일곱 금 촛대’의 상징을 통해 이런 사실이 재확인됩니다.
그렇다면 이들 거짓 무리들의 교훈을 주님께서 친히 입의 검, 곧 진리의 말씀으로 진위를 가려 심판하신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어떤 방식으로 심판하신다는 것일까요. 죽은 교회나 방불했던 사데 교회의 상황을 통해 본문이 말하는 ‘진위를 가려 심판하신다’는 의미를 유추 해석할 수 있습니다. 주님 보시기에 당시 사데 교회는 총체적인 관점에서 살았다고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교회와 방불했다고 계시록은 선언합니다(계 3:1). 본문에서 ‘죽었다’는 표현은 비유적인 묘사입니다. 곧 복음의 본질과 가치와 생명력을 거의 상실한 채, 형식적인 종교활동을 추구하는 데만 일관했다는 지적입니다. 그럼에도 사데 교회가 여전히 실낱같은 희망이 남아 있었던 것은 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소수의 신실한 남은 자들이 여전히 존재했었다는 사실에서 찾아집니다. 이들이야말로 사데 교회가 다시 복음의 생명력을 회복시킬 수 있는 소중한 불씨였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들을 통해 복음의 본질과 가치를 회복시키고 말씀의 본의를 밝히 해명케 하심으로 사데 교회 전체가 다시 영적으로 소성함을 입을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느 시대건 참 된 교회와 참 된 성도들은 존재하며, 특별히 하나님에 의해 친히 소명을 받은 참 된 지도자들을 통해 진리의 말씀을 증거케 함으로 몸 된 교회를 철저하게 양육하시고 보존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계 12:6, 3:4). 이 과정에서 에베소 교회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듯이 거짓 선생들에 의한 거짓 교훈을 밝히 드러내 마침내 출교시키는 방식으로 저들을 심판하시고 교회의 진리성과 진정성을 보존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상의 내용은 ‘칠천의 남은 자’(왕상 19:18, 롬 11:4-5) 사상과도 일맥상통하는 원리입니다. 아합 왕이 통치하던 북이스라엘은 당시 왕비 이세벨이 아합 왕을 충동해 우상숭배 장려정책을 시행함으로 북이스라엘 전역이 우상숭배로 만연됩니다. 선지자 엘리야는 이런 현실을 안타까워하면서 외롭게 바알숭배자들과 맞서 갈멜산에서 영적 전투를 벌인 끝에 승리를 거둡니다(왕상 18장). 마침내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신 사실이 확증됩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앞세워 바알 선지자와 아세라 선지자 수백 명을 일거에 살해합니다. 그러나 정작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숭배로부터 쉽게 돌아오지 않습니다(왕상 18:40). 이 소식을 들은 이세벨이 엘리야를 찾아 죽이려고 사자를 보냅니다. 엘리야가 이세벨을 피해 호렙산에 이릅니다. 거기서 여호와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여호와의 선지자는 자신만 남게 되었음을 하소연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선지적 사명(왕상 19:15-17)을 주시는 가운데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여호와 신앙의 정절자 칠천 인을 남겨 두었다고 천명해 주십니다(왕상 19:18).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어느 시대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친 백성들과 참 된 교회를 섭리적으로 보존하시는 가운데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사를 집행해 가신다는 의지의 표명입니다(롬 11:4-5). 이들은 말씀의 본질에 깊이 접촉돼 진리의 말씀을 생명처럼 받드는 자들이요,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로, 세속에 물들지 않고 믿음의 정절을 지켜 행하는 자들입니다(계 14:1-5). 바른 교회에 속한 자들의 실상이 이렇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른 교회에 속한다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돼 구원론적인 통치를 적극 받아 누리는 천상의 삶을 사는 것과 본질에서 다를 바 없습니다(계 4:4).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이 보장될 수 없다’는 말의 본의가 이런 원리에 근거합니다. 여기서 ‘교회’란 구원론적 근거로서 바르고 참 된 교회를 제한적으로 가리킵니다.
⑤ 이기는 자에게 보장된 약속
주님께서는 오늘도 성령님을 통해 교회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요 14:16-17, 26, 16:13-14). 이는 주께서 소명과 은사와 말씀을 주심으로 친히 세우신 교회의 목회자(요 21:15-17, 엡 4:11-13)들을 통해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며 가르치게 하는 방식으로 몸 된 교회를 재림 시까지 철저하게 돌보시며 양육하신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교회의 절대 안전과 보장이 이런 원리 속에서 확증됩니다.
그런데 진리의 영 되신 성령님께서 목회자를 통해 교회 앞에 말씀을 증거하실 때, ‘귀 있는 자는 청종하라’고 매번 각 교회들을 향해 강조해 말씀하십니다(계 2:7, 11, 17, 29, 3:6, 13, 22절). 이는 일곱 교회를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다양한 칭찬과 책망과 경고와 권면의 내용들을 지상의 모든 교회들이 경계로 받아 적극 실행에 옮길 것을 강권하시는 의미를 띱니다. 그렇지 못할 때 일곱 교회에게 경고하신 책망과 심판으로부터 현대교회들 또한 결코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는 전투하는 지상의 교회의 종말론적 승리를 보증하는 결정적인 표증으로 작용하게 될 것입니다. 일곱 교회를 향해 ‘이기는 자에게 약속하신 보증의 내용’들이 계 21:7을 통해 총체적으로 성취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확증시켜 줍니다. 여기서 ‘이기는 자’란 각 교회에게 주신 주님의 메시지에 근거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운 자를 가리킵니다(엡 6:12-13, 벧전 5:8). 그러나 정금(계 21-22장)같이 나오기 위해 먼저 많은 환란과 고난의 연단과정(계 4-20장)을 통과해야만 한다는 것이 성경의 진술입니다(눅 17:25, 욥 23:10, 롬 8:18). 복음의 정체성은 고난(죽음)을 통한 영광(부활/승천)으로 집약돼 설명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계 1장은 서론, 2-3장은 총론, 4-20장은 본론 및 상론(詳論), 계 21-22장은 결론이란 관점으로 분류해 접근할 수도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버가모 교회를 향해 이기는 자와 관련해 두 가지를 약속해 주십니다(17절). 첫째로 감추었던 만나를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만나는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첫 수확물로 식물을 삼을 때까지 광야여정 길에서 육체의 생명을 보존해 주시기 위해 주신 양식입니다(출 16:35, 수 5:12). 여기서 만나를 일컬어 ‘감추었던 만나’라 함은 이스라엘이 백성들이 광야 길에서 양식으로 삼았던 만나는 사실상 만나의 실체가 아니었음을 의미합니다. 실체가 비밀로 감춰져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었던 만나의 실체는 따로 있었다는 것이요, 그런 의미에서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는 만나의 실체를 예표하는 모형이요 상징이었음을 가리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를 먹고도 광야에서 죽었다고 지적함으로 만나의 실체는 영생하는 생명의 떡을 역설적으로 가리키고 있음을 시사합니다(요 6:49). 그렇다면 만나의 실체인 영생하는 생명의 떡은 무엇일까요. 사도 요한은 영생의 근원이시며 ‘생명의 떡’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의 실체, 곧 ‘산 떡’으로 지목합니다. 요 6:47-51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만나의 실체되신 영생하는 ‘산 떡’으로 증거합니다. 누구든지 이 떡, 곧 예수님의 살을 먹는 자는 영생이 보장됨을 약속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사죄와 구원과 영생을 실질로 소유하게 됨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감추었던 만나’란 다름 아닌 만나의 실체되신 영생하는 ‘산 떡’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이 비밀의 경륜이 구약시대에는 모형적 계시로 감춰졌었는데 이제 때가 차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마침내 밝히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골 1:26-27입니다.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그렇다면 ‘감추었던 만나를 주시겠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는 생명의 떡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영생에 대한 확고한 보증을 가리킵니다. 복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 갈 길을 마치고, 믿음의 정절을 지킨 자들이야말로 다름 아닌 ‘이긴 자’들이요, 이들에게 승자의 표증인 각종 면류관(딤후 4:7-8, 벧전 5:4) 특별히 생명의 면류관(약 1:12)이 수여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감추었던 만나를 주시겠다’란 뜻은 종말론적인 교회의 완성을 통해 승리의 면류관으로 상징된 영생의 실질을 소유해 누리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로 새 이름이 새겨진 흰 돌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본 절에서 ‘흰’ 것과 ‘새’ 것이란 표현은 요한계시록 속에서 장차 도래하게 될 천국의 성격을 반영하는 중요한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봅니다(계 1:14, 3:4, 5, 18, 4:4, 6:2, 11, 7:9, 13, 14, 19:11, 14, 20:11, 21:1, 2, 5절). 새 이름은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주신 약속(계 3:12하)에 근거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추정됩니다. 그렇다면 흰 돌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다양한 견해가 분분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문맥과 당시의 정황을 고려할 때 경기의 승자에게 수여하는 승리의 증표로 보는 견해가 우세합니다. 따라서 ‘새 이름이 기록된 희 돌’의 의미는 전투하는 교회의 군사로서 신앙의 정절을 지킨 승리자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사하는 종말론적 상급, 곧 구원의 완성과 영생의 실질을 누리는 천국의 삶에 대한 확고부동한 보증과 특권을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사실은 창세전에 수립하신 하나님의 선택사상의 경륜 속에서 진행되는 것이기에, 택자들만이 하나님의 구속의 비밀의 경륜을 깨닫게 되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버가모 교회의 이긴 자에게 약속하신 천상적인 축복의 내용들은 모든 시대의 참 된 성도들에게 동일한 복과 상급으로 소유될 것입니다. 아니 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현재적으로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통치 속에서 이미 소유해 누리고 있는 셈입니다(마 12:28, 요 5:24, 롬 8:33, 벧전 2:9, 계 5:10). 이 비밀을 아는 자는 참으로 복 된 자들입니다. 미래의 약속 또한 보장돼 있기 때문입니다.
4. 두아디라 교회에게 주신 메시지(2:18-29)
두아디라(Thyatira)는 호크마 종합주석에 따르면 버가모와 서머나의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공업도시로 유명한 곳입니다. 주전 190년경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고 태양신 아폴로와 아데미, 삼바다 등의 신전이 있었으며 공업이 발달하게 된 동업조합(同業組合)이 성행했습니다. 빌립보에서 개종한 자주 장사 루디아가 이곳 출신의 여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행 16:14). 한편 두아디라 교회가 어떻게 설립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바울이 에베소에 머무를 때에 전도했거나 루디아에 의해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두아디라의 동업조합들은 나름대로 각종 우상숭배와 깊이 관련돼 있었습니다. 당시의 사회적 상황은 출세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조합에 가입해야 했고, 조합회원이 되려면 다양한 우상을 숭배해야만 했습니다. 이런 식의 우상숭배가 구조적으로 만연돼 있던 당시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조합에서 탈퇴한다는 것은 즉시 직장과 모든 사회적인 지위를 한 순간에 잃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리고 이내 경제적 빈곤과 신앙적 핍박에 처해지게 됩니다. 그렇다고 현실적인 이유를 앞세워 조합원으로 남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우상숭배와 불가피하게 연관돼 결과적으로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셈이 됩니다.
이렇게 경제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절박한 상황에 처한 두아디라 교회를 향해 주님은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로 자신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이는 죄를 감찰하시고 찾아내 용서치 않으시겠다는 심판주의 엄위하신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두아디라 교회 내에서는 이세벨이라는 자칭 여선지지자가 나타나 성도들을 공공연하게 미혹함으로 우상숭배를 조장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용납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① 엄위하신 심판주와 하나님의 아들로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2:18-29)
어느 시대건 참 된 교회와 참 된 성도들이 겪는 고난과 시련은 본질에서 동질성을 띱니다. 그럼에도 문자적인 우상숭배와 각종 타락의 양상이 다양한 삶의 영역 속에 깊이 연루돼 있던 당시 삶의 성격상, 우상숭배로부터 근본적으로 이탈한다는 것은 곧 생존의 위협과 직결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시 경제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이중의 진퇴양난의 위기에 처해 있던 두아디라 교회 앞에 주님은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 같은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나셨습니다(18절). 이는 계 1:14-15에 기록된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으로 단 10:6의 반영입니다. 본문에서 ‘눈이 불꽃같다’는 것은 죄악을 감찰하셔서 낱낱이 드러내시는 예리한 통찰력을 가리킵니다. 히 4:12-13입니다.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다음으로 ‘그 발이 빛난 주석 같다’는 표현은 불의와 불법을 철저히 응징하시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담긴 심판주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상과 같이 주님께서 사태의 진상을 통찰하시는 공의로우신 심판주의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내 보여주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자칭 여선지자 이세벨의 교훈이 두아디라 교회 속에 공공연하게 만연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회개치 않으면 더욱 상황을 악화시켜서 큰 환란과 사망 가운데 내치시겠다고 강력히 경고하고 계십니다(22절).
② 두아디라 교회를 향한 칭찬
주님은 두아디라 교회를 향해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신다”고 칭찬해 주십니다. 이런 결과로 두아디라 교회는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욱 개선되고 발전됨으로 활성화돼 가고 있는 교회’라고 격려를 아끼지 않으십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책망하셨던 에베소 교회와 대조를 이룹니다. 분명히 두아디라 교회는 사랑이 동기 유발된 실천적 삶을 전개시켜 나가는 데는 괄목할만한 성장을 보였음에 틀림없습니다. 이로 인해 외적으로 크게 부흥한 교회의 모습을 띠고 있었음을 충분히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내 거짓 여선지자 이세벨의 교훈을 용납함으로 교회 전체가 변질된 복음에 무방비상태로 미혹당하고 있음을 볼 때, 지식에 근거한 계시의존적인 열심이 아닌 자의적 열심의 위험성과 폐해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자칫 지식이 배제된 열심은 자의적 숭배신앙관을 형성하게 되고, 열심이 결핍된 지식위주의 신앙은 냉냉한 교조주의적 신앙관을 낳게 될 공산이 큽니다. 따라서 바른 지식에 근거한 믿음의 역사와, 이에 따른 사랑의 수고와, 미래지향적인 소망의 인내야말로 바른 신앙관/바른 교회관을 확립하는 첩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③ 이세벨의 교훈을 책망하심
자칭 여선지자 이세벨의 교훈은 두아디라 교회가 내적으로 직면했던 신앙적 위기로서 주님은 이를 엄히 책망하시며 돌아설 것을 강력히 촉구하셨습니다. 이세벨의 교훈의 핵심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과 행음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20절). 여기서 행음을 문자적인 범죄행위로만 제한시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에서 음행은 우상숭배와 세속주의에 깊이 착념해 동화되는 것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의 이교도적 문화에 동화된 이스라엘의 경우(호 1:2)와 당시 로마의 황제숭배와 세속문화에 연루된 행위를 음녀 바벨론과 비유적으로 연관시켜 음행으로 정죄하고 있는 계시록의 내용(계 1-2)들이 이런 사실을 뒷받침 해 줍니다. 동일한 원리 속에서 현대교회가 기복주의 신앙관(탐심)에 사로잡혀 현세지향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목적을 위해 신앙을 도구화시켜 행한다면 이 또한 종교를 빙자한 현대판 행음 죄가 성립될 뿐입니다(약 4:4, 골 3:5).
본문에서 여선지 이세벨의 교훈이란 성격상 버가모 교회 중에서 역사 했던 발람의 교훈 및 니골라당의 교훈과 맥을 같이 합니다. 다시 말해 에베소 교회와 관련해서는 강하게 거부되었던 니골라당의 교훈(2:6)이 버가모 교회 가운데서는 암암리에 침투해 들어와 일부 교인들을 중심으로 역사했으며(2:14-15), 이제 두아디라 교회에서는 공공연하게 이 교훈을 용납할 정도로 표면화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본성 속에 내재된 죄성의 발로는 부단히 죄와 동거하기를 원하는 나머지 이에 대한 대비책을 지속적으로 강구하지 않으면 부지불식간에 틈을 타고 들어와 자리를 잡게 마련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개혁된 교회는 지속적으로 개혁돼야한다’고 강조한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다른 한편 본문의 여선지 이세벨의 교훈은 내용상 아합 왕의 아내인 왕비 이세벨이 아합 왕을 충동해 시행했던 바알숭배 정책과도 맥을 같이 합니다(왕상 16:30-33). 이런 관점에서 두아디라 교회에서 활동했던 여선지자 이세벨은 문자적인 인물일 수도 있겠지만, 교훈의 내용과 끼친 해악(害惡)상 동일한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 아합 왕의 악처 왕비 이세벨의 사상의 반영일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이처럼 신앙이 도구화된 우상숭배 신앙의 정체성을 탐심으로 규정합니다. 골 3:5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세속주의에 바탕을 둔 현세지향적인 신앙의 정체성을 영적 음행으로 간주합니다. 약 4:4입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왜냐하면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닌 세상 곧 마귀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성경은 밝히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요일 2:15-16).
그렇다면 이세벨의 교훈으로 발전된 발람의 교훈이나 니골라당의 교훈 등이 어떻게 교회 속에서 버젓이 용납되고 활동할 수 있었을까요. 이는 본질상 죄로 인해 타락하고 부패한 인간의 보편적인 종교적 욕구를 자극하고 충동해 충족시켜 준다는 데서 가능하게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당시 우상숭배와 음행으로 일관되었던 이세벨의 교훈과 발람의 교훈 및 니골라당의 교훈이 갖는 현대적 원리는 철저하게 탐심과 세속성에 바탕을 둔 기복주의/성공지상주의/상급주의/지성감천주의 신앙 등으로 표출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처럼 인간이 추구하는 종교적 욕구는 타락한 본성상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본질에서 동질성을 띠고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부단히 말씀의 본질에 접촉돼 이를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살아가는 계시의존 사색신앙관의 정립이 전제되지 않을 때, 어느 누구라도 이런 죄성의 미혹과 범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갈 5:16, 롬 6:11-14).
중세 영적 암매로부터 말씀의 본의를 회복시켰던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500주년이 목전에 다가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사역을 성취하시고 피로 값 주고 사신 몸 된 교회를 세상 가운데 드러내신 이후 이천 년이 이미 지났습니다. 사도들이 살아있었던 1세기 교회 속에 벌써 온갖 이단적인 사상과 가르침이 만연돼 말씀의 혼잡이 야기됐었다면(고후 2:17, 요일 4:1-3),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교회 속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까를 짐작해 보십시오. 현대교회가 소유해 누리고 지향하고 있는 신앙적인 내용과 관점이 과연 얼마나 성경에 근거한 진리성과 진정성을 함의하고 있을까요.
이런 일말의 염려를 아주 떨칠 수 없는 이유는 현대교회가 두아디라 교회처럼 비록 많은 종교적 활동과 실적을 쌓고 있을지라도, 정작 바른 계시관에 입각해 바른 신앙과 바른 교회의 정체성을 구현해 나가는 일에 얼마나 고민하며 비상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지를 심히 의심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과 관련해 예레미야 선지자가 경종을 울려줍니다. 당시 거짓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고 거짓 예언을 일삼았습니다(렘 6:14, 28:1-4). 더욱 마음 아픈 일은 백성들이 이런 거짓예언들을 좋게 여겨 적극 추종했다는 사실입니다(렘 5:30-31). 예레미야 선지자는 거짓 예언을 지적하며 책망하며 탄식했으나 백성들은 막무가내였고 오히려 거짓선지자가 예레미야를 핍박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국은 바벨론에 의한 멸망이 기다리고 있었을 뿐입니다. 성경은 말세의 특징을 언급하면서 ‘사람들이 극한 이기주의에 사로잡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쾌락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며, 종교적 경건은 모양만 있을 뿐 진리를 좇는 순종력은 철저히 부인될 것에 대해 경고합니다(딤후 3:1-5, 4:3-4). 예수님의 초림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현재적으로 도래해 역사될 때부터 이미 말세는 시작된 셈입니다(히 1:1-2, 약 5:3, 고전 10:11). 그런 의미에서 현대교회 성도들은 현실을 직시하는 영적 통찰력과 분별력 및 성경의 본의를 밝히 해명할 수 있는 지혜와 계시의 정신이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를 살아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④ 사랑으로 권면하심
주님께서는 이세벨을 즉각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충분한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나 그녀는 끝까지 회개치 않습니다(21절). 일반적으로 도덕적 범죄로부터 돌이켜 회개하는 일은 쉽습니다. 양심에 화인 맞은 자가 아닌 이상 대부분 가책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짓 교훈으로부터 돌이키는 일은 훨씬 어렵습니다. 그것은 거짓 교훈을 나름대로 진리처럼 수납해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딛 3:10)고 말씀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단에 속한 자들은 근본에서 사단의 세력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기에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돌이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주께서는 이세벨의 교훈에 동조해 회개치 않는 자들에게 큰 환란이 임할 것과 아울러 엄중한 심판을 경고하십니다. 결코 일시적인 눈가림식으로 주님을 속일 수는 없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입니다. 이런 사실과 관련해 주님은 자신을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분”으로 다시 한번 강조해 선언하십니다. 철저히 회개할 것을 촉구하심에 다름 아닙니다.
주님은 당신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그러기에 모두가 회개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한 사람의 낙오자라도 나오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오늘도 은혜의 문을 마감치 않으시고 구원의 문을 열어 놓으시는 이유가 이런 사실 때문입니다(벧후 3:9, 고후 6:1-2).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세상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남은 자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 가운데 섭리적으로 보존해 두신 참 된 하나님의 백성이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이들이 다 구원의 문에 들어오기 전까지 세상은 여전히 존속될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는 중단되지 않을 것입니다. 두아디라 교회에도 예외는 아닙니다. 이세벨의 변질된 복음에 의해 두아디라 교회가 상당한 혼란에 빠졌던 것은 틀림없으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와중에서도 당신의 신실한 남은 자들을 보존하고 계셨습니다(24절, 롬 11:4-5, 왕상 19:18). 이들은 이세벨의 교훈을 받지 않았습니다. 적극 거부했습니다. 더구나 진리를 빙자해 복음을 변질시키며 자기열심을 조장함으로 경건을 사욕의 수단으로 삼게 하려는 소위 ‘사단의 깊은 것’과는 상종을 마다했습니다. 제아무리 하나님의 열심이 있을지라도 지식의 체계를 좇아 계시의존적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면 열심을 낼수록 자기 의를 힘써 추구하는 것이 됨으로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않는 자의(恣意)적 숭배신앙으로 판정받게 될 뿐입니다(롬 10:2-3, 마 7:21-23).
주님께서는 이들 남은 자들에게 이세벨의 교훈 외에 다른 짐, 곧 다른 교훈을 추가로 지킬 것을 주문하지 않으십니다. 종전대로 진리를 보수하는 가운데 이 세대를 본받지 말며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일편단심의 믿음을 시종일관하게 지켜나갈 것을 요구하실 뿐입니다. 이는 마치 바울의 전도를 통해 기독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에게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하는 것’ 외에 아무 짐도 지우지 않기로 결의했던 예루살렘 회의의 결정과 방불하다 하겠습니다(행 15:19-21, 28-29).
⑤ 이기는 자에게 보장된 약속
주님께서는 두아디라 교회를 향해 남은 진리성과 진정성을 끝까지 붙잡고 신앙의 정절을 지킬 것을 당부하십니다. 심은 대로 거두시는 것 또한 하나님의 섭리방법입니다. 이기는 자에게 주님은 두 가지를 약속해 주십니다. 첫째는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입니다. 본문은 시 2:8-9의 반영입니다. 시편 2편은 메시아의 주권사상을 노래한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세상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은 것처럼 성도들도 그리스도와 연합돼 동일한 통치에 참여함을 시사합니다. 나아가 이는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벧전 2:9, 계 5:10, 20:6)으로 현재 만왕의 왕이 되셔서 세상을 통치하고 계신 주님의 정권에 현재적이며 미래적으로 동참할 것에 대한 확약이기도 합니다(마 28:18, 빌 2:9-11, 계 22:5). 물론 세세토록 왕 노릇하리란 종말론적인 보장(계 22:5)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묘사된 천국에서 성도가 성도를 다스린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에덴동산에서 피조물에 대한 왕적 통치권을 대리적으로 위임하셨듯이(창 1:28) 미래의 신천지에서 에덴동산에서 허락하셨던 통치권의 시행이 막힘없이 재현될 것에 대한 보증입니다. 한편 이러한 왕적 통치권의 현재적 적용은 복음전파를 통해 시행되고 있습니다. 복음에 대한 수납은 영생이요 거절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왕적 통치를 거부하는 것으로 곧 멸망이요 영원한 심판과 지옥의 형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막 16:15-16).
이기는 자에게 약속해 주신 두 번째 내용은 ‘새벽 별’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계 22:16에서 주님은 자신을 ‘다윗의 뿌리요 자손으로서 곧 광명한 새벽 별’로 묘사하십니다. 본문에서 ‘광명한 새벽 별’은 민 24:17에 언급된 ‘야곱의 한 별’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민수기서에서 야곱의 한 별은 사실상 문자적으로 다윗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다윗으로 말미암는 신정왕국의 새로운 계시시대가 열린 것과 관련해서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윗은 신정왕국의 여명을 밝힌 별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계 22:16에서는 앞의 ‘다윗의 뿌리요 자손’과 연결돼 다윗의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를 명백히 지칭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광명한 새벽 별’이 되신다함은 예수님의 구속사역의 승리로 인해 죄와 허물로 죽어서 마치 흑암가운데 처해 있었던 인생들에게 구속사역의 완성으로 말미암는 새로운 은혜와 평강의 종말론적 새 시대의 여명이 밝았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표현으로 새벽 별 이미지를 차용한 것입니다. 따라서 새벽 별을 주신다함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돼 그 분의 생명을 소유함으로 천상의 승리한 교회에 소속돼 영생의 삶이 보장됨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상의 참 된 교회에 속한 성도는 이미 현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에 연합돼 영생의 삶을 여기서부터 선취적으로 맛보며 살아가는 자들로 존재합니다. 요 5:24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이미 영생이 현재완료 적으로 주어졌으며 미래의 심판으로부터도 이미 제외되었음을 밝히 증거해 줍니다. 요 11:25-26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본문에서도 예수님을 살아서 믿는 자들은 영원히 죽지 않는 부활의 생명을 이미 현재적으로 소유해 살아가고 있음을 분명히 시사합니다. 부활의 생명을 현재적으로 소유해 살아간다는 것은 영생의 생명력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과 본질에서 다를 바 없습니다. 죽음의 권세가 부활의 생명을 더 이상 주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차별적이어서 들을 귀 있는 자들에게만 생명의 말씀으로 인(印)쳐 짐으로 새벽 별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Ⅲ. 결론
계 2-3장은 1장을 통해 자신을 상징적으로 계시해 주신 다양한 모습에 근거해 일곱 교회에게 친히 메시지를 전달하시는 내용이 소개됩니다. 일곱 교회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일곱이라는 상징이 가리키듯 모든 시대의 모든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말씀인 셈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곱 교회를 향한 메시지는 현대교회를 향해 동일하게 선포되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메시지입니다. 자신을 다양한 상징적인 모습을 통해 계시하실지라도 이를 하나의 상징으로 종합해 묘사한다면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드시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이”(1:20)로 함축할 수 있습니다. 이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주님의 몸 된 교회와 세우신 종들을 하나로 연합시키는 일체성과 통일성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계시입니다. 본 상징이 의미하는 바는 주님은 오늘도 피로 값 주고 사신 당신의 교회 속에 친히 세우신 말씀의 수종자들을 통해 눈동자처럼 교회를 돌보시며 양육하시며 인도해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전투하는 교회의 성격이 상대적으로 강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현대교회들이 환란과 시련 중에도 위로와 격려를 받으며 담대한 믿음의 인내로 넉넉히 현실을 대처해 나갈 수 있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일곱 교회들을 향해 주님은 교회별로 칭찬과 책망과 권면과 회개와 약속들을 전해 주십니다. 특별히 본장에서 네 교회를 향해 선포하신 메시지들의 공통점은 본질에서 말씀에 근거한 진리성과 진정성의 진위여부를 검증하는 일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신앙의 정체성이 목적적인지 방편적인지의 여부를 발람의 교훈, 니골라당의 교훈, 이세벨의 교훈 등에 근거해 집중적으로 진단하시며 확증해 주십니다. 일곱 교회를 향해 이기는 자에게 보증하고 계신 약속들 또한 한결 같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한 구원의 종말론적 완성 곧 신천지에서 영생의 실질을 누리는 것에 집중됩니다.
신앙이 점차 도구화되고 활동이 말씀을 대신하는 경향이 팽배된 현대교회 속에서 일곱 교회를 향해 주시는 주님의 메시지를 통해 우리의 현실을 통찰하고 진단함으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 지를 새롭게 재발견하는 절호의 기회로 삼아야 할 줄 압니다. 나아가 인본주의의 팽배와 만연 속에서 온갖 거짓 교훈과 세속성을 앞세워 교회를 미혹하며 혼란케 하는 사단의 궤계와 핍박에도 불구하고, 말씀의 본질을 추구하는 시종일관한 믿음의 정절과 일사각오의 순교의 정신으로 신앙의 순수성을 지켜 행하는 일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합당한 충성된 증인으로 거듭나는 최선책이 될 것입니다.
(계 2:1-29)
Ⅰ. 도입
2-3장에 기술된 일곱 교회들에게 주신 예수님의 메시지는 1장에서 밧모 섬에 유배된 사도요한에게 성령의 감동을 통해 보여주신 환상의 내용을 기록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입니다. 일곱 교회들이란 당시 소아시아지역에 현존 했던 일곱 교회에게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일곱이라는 상징성이 가리키듯 완전수, 충만수로서 21세기의 현대 교회들은 물론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를 포함합니다.
일곱 교회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메시지는 편지 서두에 한결 같이 1장에서 묘사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다양한 자기명칭과 관련해 주어집니다. 말하자면 에베소 교회에게는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로, 서머나 교회에게는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로, 버가모 교회에게는 ”좌우에 날 선 검을 가진 이“ 등으로 말입니다. 이처럼 각 교회별로 각기 다른 자신의 명칭을 사용해 메시지를 전하심은 당시 각 교회가 처한 특별한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을 시키시며 칭찬과 책망, 권면과 약속 등을 차별화시켜 말씀해 주심으로 주의를 환기시켜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 과정에서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 같은 경우에는 책망의 요소가 발견되지 않습니다. 반면에 라오디게아 교회는 전혀 칭찬의 내용이 없습니다. 책망과 권면 일변도입니다. 그렇다고 칭찬만 있고 책망이 전혀 없는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를 통해 온전한 교회와 모범적인 교회상을 제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차피 지상의 교회는 인간의 본성 속에 내재된 죄성으로 인해 주님 앞에 백 퍼센트 완벽한 교회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일곱 교회에게 보낸 주님의 메시지를 통해 주님께서 원하시는 교회, 바람직한 교회상이 무엇인 지를 발견하고 주님의 마음에 합한 교회를 이루는 일에 최선으로 경주한다면, 이기는 자에게 약속하신 영적 상급들이 종말론적으로 확실하게 보장될 것을 확증시켜 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약속들은 주님의 생명에 연합된 지상의 참 된 교회공동체 속에서 이미 현재적으로 향유되고 있을지라도, 전투하는 교회상을 통해 종말론적으로 약속된 실질에 동참하게 될 것을 확실히 전망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2-3장의 일곱 교회의 영적 정체성을 한결 같이 전투하는 교회상으로 암시하는 가운데 이기는 자들에게 약속된 미래의 상급이 계 21:7을 통해 종말론적으로 보장될 것을 확증시켜 주십니다. 이런 일련의 진행과정을 통해 교회의 정체성은 공동체적이며 동시에 개인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와 ”이기는 ‘자(그)’에게는 내가 .....“를 상호 면밀히 비교해 보십시오. 전자는 복수대명사로 후자는 단수 대명사로 사용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로 보건대 신앙생활은 개인적이며 동시에 복수적인 양면성을 띠고 있음을 봅니다. 그러나 성경이 시종일관하게 지향하는 원리인 ‘교회를 이루는 구원’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구원을 누리는 신앙생활의 본질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공동체적으로 이루어 나가는 것을 통해 비로소 정당화된다는 사실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줄 압니다. 따라서 바른 교회에 속한다는 의미는 본질에서 구원론적인 천상적 통치와 양육을 말씀을 통해 지속적으로 받으며 적극 순종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일곱 교회에게 주신 주님의 메시지에서 매번 ”이기는 자에게 주시겠다“는 약속된 영적 상급이 강조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이제 2장 본문을 통해 일차적으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네 교회에게 주신 메시지의 내용을 살펴봅니다.
Ⅱ. 전개
‘호크마 주석’(요한계시록)에 의하면 본서에 기록된 일곱 교회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또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라고도 부릅니다. 본서와 신약에서 말하는 소아시아란 그 교회들이 소아시아 반도에 위치해 있음을 말합니다. 한편 ‘아시아’라고 말할 때는 당시 로마 제국의 행정구역상 ‘아시아 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소아시아 반도의 삼분의 일을 차지하는 지역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계시록에 나타난 일곱 교회는 소아시아 지역의 ‘아시아 도’에 속한 교회들인 셈입니다. 아시아 도는 소아시아 반도에서 가장 부유했고 경제적으로도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입니다. 아시아에 있던 교회들은 본서에 나오는 일곱 도시 이외에 드로아, 골로새 및 히에라폴리스에도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서에 일곱 교회가 의미하는 바는 단순히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넘어서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든 하나님의 참 된 교회들을 대상으로 삼는 상징성을 띤다고 하겠습니다.
1. 에베소 교회에게 주신 메시지(2:1-7)
메릴 C. 테니의 ‘요한계시록 해석’에 의하면 에베소(Ephesus)는 아시아의 로마 속령 중 가장 큰 도시였습니다. 특별히 1세기 말경에는 급속도로 번창했던 아시아의 중심 도시였습니다. 이 도시의 주요 우상은 아데미(다이아나) 여신이었습니다. 아데미 신전은 고대 세계의 불가사의 한 기적 중 하나로 손꼽히며 시민들의 강력한 숭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에베소 시민들은 거의 광신적으로 아데미 여신을 숭배하였습니다(행 19:27, 35절). 에베소는 바울이 전도여행 차 방문했을 때 아데미의 은감실(모조신전)을 만드는 자들이 선동하여 바울의 가르침을 반대하고 그들을 몰아내기까지 하였던 곳입니다(행 19:23-29).
그러나 온갖 박해와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에베소에는 바울의 전도여행 후 복음이 뿌리를 내리고 마침내 에베소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고 에베소 교회는 아시아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행 19:26). 에베소의 기독교인들은 복음 증거에도 열성적이었으며(행 19:10), 구습을 척결하는 데도 물질적 가치를 따지지 않아서 은 5만의 값어치가 나가는 책들을 아낌없이 불사르기까지 했습니다(행 19:19).
그러나 에베소 교회를 창설했던 열정적인 복음의 1세대들이 사라지게 되자 그 열기는 점차 식어갔습니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시점을 AD90년 전후로 추정한다면 바울에 의해 에베소 교회가 설립된 것이 40-50년경일진 데, 반백년이 지나지 않아 에베소 교회는 2세대들에 의해 복음의 열정이 퇴조되고 진리가 교리적으로만 남아있는 사변주의적 교회, 교조주의적 교회로 퇴락되고 말았습니다. 본장의 에베소 교회에 대한 주님의 메시지는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기록된 것입니다.
① 교회의 감독자와 양육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에베소 교회에게 계시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엡 2:1)로 나타나십니다. 이는 한 마디로 교회의 감독자와 양육자의 모습입니다. 요한복음의 설명을 빌리면 양 무리를 ‘먹이시고 돌보시는 분’으로서 말입니다(요 21:15-17). 이런 명칭이 의미하는 바는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바 된 교회가 아무리 퇴조되고 퇴락되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세우신 교회의 종들을 붙드시고 한결 같이 교회공동체를 돌보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악한 자들과 거짓선지자들을 몰아내고 교회의 순결, 곧 진리성과 진정성을 고수하고자 각고의 노력과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에베소 교회 1세대들의 전투적 신앙행보를 돌아볼 때(행 20:28-35), 2세대들로 구성된 1세기 에베소 교회의 상황이 많이 퇴락되었을지라도 주님께서는 여전히 에베소 교회의 지도자들을 통해 교회를 눈동자처럼 지켜 보호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확증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교회의 현실적인 여건과 상황이 열악하다고 할지라도 결코 낙심하거나 좌절하기보다 위로와 격려를 받으며 담대하게 현실을 대처해 나가는 믿음의 인내와 결단이 필요한 이유가 이런 사실로 말미암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도 성령님을 통해 피로 값 주고 산 당신의 몸 된 교회 속에 말씀을 통해 지속적으로 부활의 생명력을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세상을 이기는 하나님의 천상적 능력으로 기능합니다.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들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주님의 상징이 의미하는 바가 이렇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 및 교회의 종들(성도)과의 일체성과 연합성 그리고 통일성의 원리 말입니다(엡 2:21-22).
② 에베소 교회에 대한 칭찬
에베소 교회에 대한 주님의 메시지는 칭찬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주님은 에베소 교회가 취했던 세 가지 사실에 대해 친히 아신다고 말씀하시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첫째는 에베소 교회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표현은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 기도할 때마다 감사했던 세 가지 영적 덕목과 내용적으로 동일한 성격을 띱니다. 살전 1:3입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결국 에베소 교회에게 주신 메시지에서 행위는 데살로니가 교회와 관련해서 믿음의 역사와, 수고는 사랑의 수고와, 인내는 소망의 인내라는 의미와 동질성을 띤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범사에 하나님의 절대주권에서 비롯된 전능성과 전지성 및 신실성을 인정하는 데서 동기부여 된 믿음의 행위야말로 세상을 이기는 능력이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첩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이 동기유발 된 선행 또한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에 빚 진 자들로서 성도가 마땅히 취할 행동요강(行動要綱)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성취될 미래의 교회의 승리와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완성의 보증이야말로 모든 성도가 고난 중에도 소망을 갖고 인내해야 하는 결정적인 동인으로 작용한다고 하겠습니다(롬 8:18, 벧전 1:7, 고후 4:17-18).
그런데 감사한 것은 에베소 교회의 이런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 중에 인내했던 신앙적 삶을 주님께서 친히 아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속성인 전지성(omniscience)에 근거한 선언으로, 주 안에서 선을 지속적으로 행하는 자에게는 위로와 격려와 칭찬으로 기능하게 되고(고전 15:58, 요 5:28-29, 고후 5:10, 계 22:12), 악을 미연에 예방한다는 차원에서 각성이 된다고 하겠습니다(행 4:19). 결과적으로 주님께서 성도의 삶을 최종적으로 판단하시는 날에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찌어다“(마 25:21, 23절)란 최대의 찬사를 받게 될 것입니다. 지금 에베소 교회의 영적 상태가 이렇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무익한 종’(눅 17:10)의 심정으로 초지일관했다는 주님의 평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에베소 교회를 향한 주님의 칭찬의 내용은 현대교회가 개인적이며 공동체적으로 적극 본받아야 할 모범적인 사례인 줄 압니다.
칭찬의 두 번째 내용은 ‘악한 자를 용납지 않고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해 그 거짓된 것을 드러내 쫓아냈다’는 사실입니다. 한 마디로 진리를 생명처럼 소중하게 고수했던 교회란 말씀입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를 떠나기 전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청한 송별회 자리에서 앞으로 에베소 교회 속에 거짓 교사들이 나타나 성도들을 미혹케 할 것을 사전경고 식으로 예언한 적이 있습니다(행 20: 28-30). 아울러 거짓 교사들의 시험과 미혹을 분별하고 이에 대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말씀에 견고하게 서 있는 일임을 눈물로 당부합니다(행 20:31-32). 본 고별사에서 바울은 바람직한 감독자상(목회자상)을 언급하면서 ‘말씀에 대한 깊은 이해, 범사에 본을 보일 수 있는 모범적 삶, 그리고 섬김의 도리’를 들어서 강조합니다(행 20:32-35). 바울이 떠난 후 얼마간의 세월이 지났는지 알 수 없으나 본문의 말씀을 통해 추정해 보건대 에베소 교회 내에 거짓 교사들과 사도들이 출현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당부대로 에베소 교회성도들은 말씀에 굳건히 서서 가르침의 진위성 여부를 가름하는 가운데 악한 자들과 거짓 선지자들을 가려서 내어 쫓았던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본문에서 악한 자는 거짓 교사와 거짓 선지자들과 본질상 동의어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봅니다. 이런 사실을 통해 에베소 교회가 한편으로 얼마나 말씀의 본의에 깊이 접촉돼 있었는지를 넉넉히 추정하게 됩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바른 교회의 정체성은 진리성과 진정성에서 찾아집니다. 이는 바른 지식/바른 신앙/바른 교회의 삼각 구도 속에서 말씀에 순종하는 방식을 통해 구원론적 통치를 적극 받아 누리는 생명적 활동이 비로소 가능하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이런 원리 속에서 교회의 생명은 말씀에 의존하고 말씀은 자연히 교회의 생명으로 기능합니다.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표면적으로 살았다고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교회들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성경은 결코 배제하지 않습니다. 사데 교회의 경우가 이에 해당합니다(계 3:1). 그런 의미에서 교회의 생명은 질적이고 내적인 데 있는 것이지, 결코 양적이고 외적인 데 있지 않음을 강조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경우가 이런 사실을 뒷받침 해 줍니다(계3:17-18). 이런 이유로 교회의 생명은 철저히 말씀에 의존돼 있고, 교회가 말씀에 순종하는 방식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된다는 원리가 성립됩니다(벧전 1:23). 개혁주의자들이 말씀의 순수한 전파를 교회의 삼대 표지(말씀/성례/권징) 중 제 일순위에 놓은 이유가 이런 사실과 무관치 않습니다. 말씀의 변질은 곧 교회의 변질과 타락으로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특별히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을 두 가지로 제시합니다. 첫째, 계시 의존적이 아닌 자의적으로 말한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본의를 해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각을 말씀을 빙자해 전달하는 것에 불과합니다(겔 13:3-7, 렘 23:21-22). 에스겔은 본문에서 “본 것이 없이 자기 심령을 따라 예언하는 우매한 선지자”란 표현을 씁니다. 결국 “허탄한 묵시를 보며 거짓된 점괘를 말하는 것”에 다름 아니란 지적입니다. 이런 사실에 대한 현대적 해석과 적용은 말씀을 하나님의 본의를 좇아서 해석하지 않고, 사람의 귀를 간지럽게 해 주기 위해 철저히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편의적으로 적용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말씀을 세속적이고 기복적인 이익의 재료로 삼아 인간의 행복과 성공을 위한 방편으로만 사용한다는 데서 무자격 목회자의 정체성이 드러난다는 지적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소명이 아닌 자의적 소명관에 근거해 사역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특별히 예레미야 선지자는 본문(렘23:21-22)에서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한다”고 거짓 선지자들을 고발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하나님의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이란 사실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회의’에 참석치 않았다는 의미는 ‘선지자의 말과 선지자의 파송’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닌 철저히 자의적인 것이란 사실의 강조적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와 소명이 교회공동체를 통해 객관적으로 확인되는 과정이 없이, 개인적인 체험과 사사로운 이해관계가 동인으로 작용해 순전히 자의적으로 목회사역에 들어선 목회자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닌 것이 현실입니다. 결과적으로 교회 현장 속에 얼마나 많은 무(無)은사와 무(無)소명의 무자격 목회자가 난무하는지 모릅니다. 이런 결과는 말씀의 왜곡과 변질로 인해 교회의 타락과 세속화를 가속화시키며,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허무는 일에 적극 일조할 뿐입니다.
이처럼 에베소 교회는 거짓사도들과 교사들의 왜곡된 교리와 가르침을 잘 분별해 교회로부터 내어 쫓았던 것입니다. 결코 진리를 타협하거나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세속적인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편으로 삼지도 않았습니다. 진리를 굳게 보수했습니다. 이런 사실들의 가능성을 2:6의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했다”라는 지적을 통해 넉넉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니골라당은 니골라라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편당으로서 ‘니골라당의 행위’란 그의 교훈과 가르침을 따르는 일단의 무리들임을 문맥을 통해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니골라가 누구인지를 성경에서 확인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혹자는 초대 교회 때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일곱 집사들을 열 두 사도들을 대신해 구제사역을 전담시키기 위해 선출하게 되는데, 이때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교회의 니골라를 택하게 되는 바(행 6:5), 이 사람을 니골라당의 수장으로 지목하기도 합니다만 불확실합니다. 문제는 니골라란 인물의 정체성이 아닙니다. 니골라당의 행위 곧 거짓된 교훈과 가르침입니다. 그렇다면 니골라당의 행위는 무엇일까요. 버가모 교회에 대한 주님의 책망을 통해 니골라당의 교훈을 유추 해석할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버가모 교회를 책망하시는 과정에서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을 동일시하신다는 사실입니다.(2:14-15). 이는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이 본질에서 동질성을 띠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발람의 교훈이란 모압왕 발락의 요청으로 물질에 미혹돼 이스라엘을 저주했던 거짓 선지자 발람의 계교를 말합니다. 중심내용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모압 여인들과 음행을 행하며 이 과정에서 우상을 숭배하도록 미혹했던 사건입니다(민 22-24장, 25:1-3, 31:16). 한편 두아디라 교회를 책망하시는 과정에서는 이세벨의 교훈을 발람의 교훈과 본질에서 동질성을 띠는 것으로 간주하십니다(계 2:20). 베드로 사도는 발람의 교훈의 실체를 불의의 삯을 사랑하여 신앙을 도구화시킨 불법적 행위라고 규정합니다(벧후 2:15-16, 유 1:11). 이로 보건대 니골라당의 교훈이란 한 마디로 발람적이고 이세벨적인 교훈으로서 탐욕에 사로잡혀 신앙을 도구화시키는 기복주의적이고 세속주의적인 신앙관을 가리킨다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날 목회사역이 소명의 차원을 벗어나 일종의 직업화되고, 신앙 또한 철저히 기복적이며 세속화되는 경향은 현대판 니골라당의 교훈이 교회 현장에서 팽배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심히 우려할만한 조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런 사이비 기독교 진리를 규명해 거부했으며 나아가 거짓 사도와 교사들을 출교시켰다는 사실로 인해 주님으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았던 것입니다.
칭찬의 세 번째 내용은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2:3). 세 번째 칭찬은 첫 번 째와 두 번째 칭찬과 본질상 깊이 연관된 내용입니다. 한 마디로 에베소 교회의 신앙의 정절을 가리킵니다. 당시 1세기 교회들은 로마의 지배 하에서 강력한 황제숭배 요구에 직면해 있었기 때문에 바른 믿음을 고수한다는 것은 곧 죽음과 직결돼 있었습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일체의 환란과 핍박을 기꺼이 감수했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고 믿음의 절개를 지켰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투철한 신앙관은 첫 번째 칭찬에서 살펴봤듯이 미래에 대한 소망의 확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종말론적 신앙관 말입니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현재의 고난이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롬 8:18)는 사실을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의연하게 현실에 대처해 나갔던 것입니다. 계 14:4에서는 이런 성도들을 일컬어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란 표현입니다. 이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않은 믿음의 정절을 지킨 자들이요,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감으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로 묘사됩니다. 나아가 그 입에는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로 칭송됩니다. 오직 진리를 좇아 말씀의 통치를 적극 받아 누리는 삶을 통해 이 세상과는 철저히 차별화된 천상지향적 가치관을 추구하며 살아간 자들이란 설명입니다(롬 12:2, 요일 2:15-16, 마 6:33). 이들이 땅에서 구속함을 받은 144,000명, 곧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의 총화란 사실입니다. 당시 에베소 교회는 바로 이 144,000명에 소속돼 믿음의 정절있는 자로 인정을 받고, 친히 하나님께 인침 을 받은 하나님의 친 백성들로 존재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함을 받아 사죄의 은총과 구원의 확신을 갖고, 말씀이 하나님의 본의를 좇아 바르게 선포되는 참 된 교회에 소속돼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우리 또한 이미 하늘에 소속된 144,000명에 속한 자들로 여기에 존재하고 있는 셈입니다.
③ 에베소 교회에 대한 책망
칭찬에 이어 곧바로 책망의 내용이 소개됩니다.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지적입니다. 사도 바울에 의해 창설된 에베소 교회가 설립된 지 40-50년이 지난 1세기 말에 즈음해 신앙의 본질로서 복음의 감격과 열정, 진리에 대한 탐구심, 하나님 나라의 반영으로서 교회의 정체성을 상실했다는 책망의 말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에서 지적한 ‘처음 사랑’이란 앞의 칭찬의 내용들을 가능케 했던 원동력을 총체적으로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이 동기유발 돼 무익한 종의 심정으로 진리를 추구하고 말씀의 통치를 적극 받아 누리는 천상지향적인 삶의 자세 말입니다(마 6:33).
따라서 에베소 교회가 첫 사랑을 버렸다는 것은 복음과 진리의 본질과 정신을 잃어버리고 형식적인 정통주의 교회로 전락했음을 암시해 준다고 하겠습니다. 한 마디로 진리와 사랑은 본질상 공존해야 하는 것인데 에베소 교회에는 진리는 있었으나 사랑이 실종되었다는 지적입니다. 그것은 자칫 사변(思辨)적이고 교조(敎條)적으로 치우쳐 냉소(冷笑)적인 신앙으로 빠질 수 있는 위험성이 농후합니다. 흔히 교회 현장에서 진리가 강조되다보면 사랑의 행동이 외면당할 수 있고, 사랑이 강조되다보면 진리가 위축될 수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자칫 개인주의가 팽배될 수 있는 현대교회 속에서 진리와 사랑의 공존과 조화의 묘(妙)가 어느 때보다 강력히 요구된다고 하겠습니다.
④ 촛대를 옮길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경고
에베소 교회에 대해 처음 사랑을 버린 사실을 강하게 책망하신 주님께서는 철저한 회개를 통해 처음 사랑을 회복할 것을 촉구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촛대 곧 교회를 옮겨버리시겠다고 강력한 경고를 발하십니다(계 2:4-5). 그러나 주님께서는 먼저 첫사랑의 회복을 위한 세 가지 처방책을 제시해 주십니다.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말입니다(5절). 혹자는 주님의 처방책을 일컬어 3R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생각하라(Remember), 회개하라(Repent), 처음행위를 가지라(Repeat)는 슬로건을 제시하는 것을 통해서 말입니다. 회복(restoration)은 처음 것을 되찾는 것, 또는 처음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회복과 개혁(reformation)은 본질상 동질성을 띤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개혁 또한 본질에로의 회복을 주요 관건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처음 사랑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어디서부터, 무엇 때문에 빗나가기 시작했는지를 찾아내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마치 어느 한 지역에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먼저 역학조사를 벌이듯이 말입니다.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핌으로 원인을 찾아내기 위함입니다. 그 후에 발견된 내용을 하나님 앞으로 가지고 나와 상하고 통회하는 심정으로 아뢰면서 용서를 구하고 결단하는 회개의 시간을 가져야 됩니다. 마치 다윗이 밧세바와 부적절한 관계를 가진 후에 하나님께서 나단선지자를 통해 다윗을 책망하시는 과정에서 다윗이 철저히 회개했던 것처럼 말입니다(삼하 11-12장). 이때 다윗의 회개의 내용을 담은 시편의 내용이 시편 51편입니다. 본 시편은 하나님께서 받으심 직한 회개기도의 내용이 어떠해야 함을 시사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줍니다. 특별히 시 51:17의 말씀이 결정적인 해답을 줍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회개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심정의 발로를 통한 전인적인 가치관의 변화를 시도하는 것이며, 이에 따른 과거의 삶과의 단절을 통해 새로운 삶으로의 적극적인 변화를 가리킵니다. 교통법규와 관련해 설명한다면 한 마디로 차선 변경이 아닌 180도 방향전환(U-Turn)의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 철저히 회개하지 않으면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시겠다’고 경고하십니다(5절하). 본문에서 ‘촛대를 옮긴다’는 의미는 일종의 심판의 성격을 띠는 것으로 교회됨, 곧 교회의 속성과 표지(標識)를 제거시킴으로 더 이상 교회로서의 가치와 생명력을 발휘할 수 없게 하시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 담긴 경고성의 발언입니다. 따라서 어느 한 지역교회가 촛대를 상실하게 될 때 그 교회는 죽은 교회, 형식적인 교회, 또는 기독교적 종교단체로 변질되거나 심지어는 그 지역에서 아예 교회가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사실상 에베소 교회는 더 이상 당시의 현장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촛대를 옮기시겠다’고 경고하심으로 다른 지역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참된 교회가 세워질 수 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주십니다. 어느 시대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남은 자들을 보존해 주셔서 이들로 하여금 합당한 교회를 이루게 하시고, 지속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선양하고 운반하며 건설해 나갈 수 있도록 주관해 가신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왕상 19:18, 롬 11:4-5, 엡 4:11-13). 참된 교회의 정체성은 항상 말씀의 본의를 추구하는 진리성과 진정성에서 찾아집니다.
⑤ 이기는 자에게 약속된 상급
주님께서는 이상의 칭찬과 책망과 경고의 메시지를 에베소 교회에게 선포하신 후에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청종할 것”을 촉구하십니다(7절). 본문은 몇 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시사해 줍니다. 첫째는 에베소 교회에게 주신 메시지의 선포자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령님으로 바뀐 사실입니다. 이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님을 통해 교회를 돌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성령님을 통한 예수님의 현재적 사역 말입니다. 생전에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을 통해 자신의 교회사역을 계속하실 것에 대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요 14:15-17, 26, 16:13-14, 행 2:1-4). 그런 의미에서 성령님의 사역은 동시에 예수님의 사역의 성격을 띱니다. 복음사역의 확장을 위해서 말입니다(요 14:12).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시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본질상 삼위(三位) 일체적으로 역사하십니다(롬 8:9, 요 14:23). 따라서 범사에 성령님의 인도와 다스림을 받을 때 최선으로 주님의 뜻을 받들어 행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것은 곧 말씀의 본의를 바르게 깨닫고 이를 신앙과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살아가는 순종력의 발휘와 동질성을 띱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순종하는 방식을 통하지 않고는 바른 교회를 이룬다거나 하나님의 나라를 선양하고 운반하며 건설해 나가는 천상지향적 삶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말씀의 통치를 적극 받아 누리는 데서 구원의 실질인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된 사실이 확인되며(갈 2:20) 하나님 나라에 소속된 친 백성으로서의 천상적인 정체성이 확증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귀 있는 자’들에게만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생명으로 수납된다는 사실입니다(엡 1:13). 결국 말씀의 사역은 성령님의 주도적인 사역이란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하나님으로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자의적으로 될 수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눈을 여셔서 주의 법의 기이함을 깨닫게 하시고, 귀를 열어 주셔서 들을 수 있게 해 주셔야 된다는 것이 성경의 지적입니다(고전 12:3, 행, 16:14, 시 119:18, 105절). 이러므로 구원은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과, 성령님의 인침과 보증의 역사에 근거할 뿐입니다(엡 1:4-14).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인간 편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엡 2:8-9). 구원의 방편인 믿음조차도 하나님께서 주셔야 합니다(엡 2:8). 그래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지는 것입니다(살후 1:10).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할 수 있는 당위성이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엡 1:6, 고전 10:31, 전 12:13). 한편 구원의 은혜는 순종의 삶과 직결돼 있습니다. 은혜는 행함을 동반합니다. 이때 성령님의 주도적인 역사에 의해 말씀에 통치를 적극 받아가는 순종력의 발휘가 가능해 집니다.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셋째는 에베소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은 동시에 모든 지상의 현존하는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과 본질에서 동일시된다는 사실입니다. 1절에서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를 향해 말씀하셨는데, 7절에서는 성령님을 통해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바뀐 사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단수가 복수로 바뀌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좀 더 확대해석하게 되면 결국 일곱 교회에게 주신 메시지는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완전수와 충만 수로서 7이라는 숫자에 담긴 상징성의 의미가 이렇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감심(感心)으로 받고 이를 생명처럼 귀하게 받들어 행한 자들에게 상급이 보장돼 있습니다. 요한은 이를 ‘이기는 자’에게는 이란 표현을 통해 보증합니다(7절하). ‘이기는 자’란 묘사는 군사적인 용어로서 다분히 전투적인 성격을 띱니다. 지상의 교회가 예수님을 군대장관으로 모신 하늘의 군대, 곧 전투하는 교회의 정체성을 띠고 존재하고 있음을 감안할 때, 이기는 자에게 약속된 보상은 전투에서 승리하는 자에게 주시겠다는 상급의 이미지를 담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는 공중권세를 잡고 있는 사단 세력들과의 치열한 영적 전쟁을 염두에 둔 표현임에 틀림없습니다(엡 6:12, 2:2-3). 보다 본질적인 관점에서는 창 3:15에 예언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간의 적대적인 영적 전투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사역으로 인해 결정적인 승부가 갈렸음에도 불구하고 종말에 이르기까지 지속될 것에 대한 시사이기도 합니다(마 12:29, 눅 11:21-22, 벧후 2:4, 유 1:6, 계 20:1-3). 계시록의 본론 부분에 해당되는 4-20장까지의 내용의 중심주제가 다름 아닌 사단세력들과의 영적전투 모티브에 근거해 기술되고 있음이 이런 사실을 뒷받침 해 줍니다. 내용전개가 이렇습니다. 1장에서 군대장관(야전사령관)의 모습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계 1:13-16, 19:11-13), 2-3장의 일곱 교회를 향해 이기는 자에게 상급을 약속하시면서 전투에서의 승리를 촉구하시다가, 마침내 사단세력들과의 모든 전쟁을 승리로 이끄신 후에 다시 한번 이기는 자에게 약속하신 모든 상급들을 주실 것을 총체적으로 보증하고 계신 사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계 21:7).
사실상 일곱 교회들을 향해 이기는 자에게 약속하신 상급의 내용을 살펴보면 새 예루살렘 성으로 상징된 교회의 종말론적 승리와 완성을 통해 누리게 될 영적 축복 곧 구원의 완성을 다양한 측면에서 언급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에베소 교회를 향해 이기는 자에게 약속하신 상급도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서 먹게 하시겠다’는 내용입니다. 이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상징된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서 교회가 누릴 영생의 삶을 가리킵니다. 처음 하나님 나라로 존재했던 에덴동산에서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해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차단되었습니다(창 3:22-24). 생명대신 죽음의 저주가 죄의 형벌로 내려졌습니다. 이들은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에덴동산은 한 순간에 실낙원이 돼 버렸습니다. 그러나 창 3:15의 여자의 후손언약은 구속에 근거해 에덴의 회복을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여자의 후손의 당사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죄는 속량되고 영적 에덴은 현재적으로 회복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성취를 통해 여전히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남아 있을지라도 하나님 나라는 현재적으로 ‘이미’ 도래했다는 사실입니다(마 12:28, 눅 17:20-21). 이런 원리 속에서 예수님의 초림사역의 성취는 재림사역의 완성을 보증합니다. 때문에 이기는 자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생명적으로 연합된 성도들은 이미 회복된 에덴동산(하나님 나라)에서 생명나무로 상징되는 영생을 현재적으로 소유해 누리는 자들로 살아갑니다(요 11:25-26, 5:24). 그리고 종말론적으로 완성될 교회가 향유하게 되는 축복 속에서 영생의 실질을 만끽하게 될 것을 보장받습니다(계 22:1-2). 이들이야말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돼 영생하는 생명력을 발휘시키는 가운데 사단의 세력에 맞서 죽음까지도 불사함으로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하나님의 친 백성들로 존재하는 자들입니다(벧전 2:9, 계 14:4-5). ‘이기는 자’의 표현 속에 담긴 본의가 이렇습니다.
2. 서머나 교회에게 주신 메시지(2:8-11)
호크마 종합주석(요한계시록)에 따르면 서머나(Smyrna)는 에베소 북쪽 약 80km 지점에 위치해 있었고, 당시 인구가 약 20-30만 정도로 소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항구 도시였습니다. 서머나 항은 요즈음도 서아시아 무역의 관문으로 활발하게 무역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이곳은 호머의 출생지이며 학문, 특히 과학과 의술이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종교적으로는 이교 문화와 종교의 중심지로 황제 숭배의 심장부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서머나는 소아시아 도시들 가운데서 지리적으로나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복음이 순수하게 전파되지 못하고 황제 숭배로 말미암는 혼합주의와 박해가 뒤따른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한편 사도요한의 제자이며 서머나 교회의 초대 감독이었던 폴리 캅(BC 155-166)이 이곳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① 역사의 주관자와 생명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서머나 교회에게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의 명칭은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로 말씀하십니다. “처음과 나중”이란 묘사는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만물과 만사의 진행이 주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관장된다는 그리스도의 주권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관련된 표현으로 구속주로서 사망과 음부의 권세를 이기신 부활 승리하신 주님을 강력히 증거합니다.
서머나 교회에게 예수 그리스께서 이런 명칭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것은 본문의 메시지에서 확인되듯이 당시 서머나 교회가 처한 상황이 심한 환란과 궁핍과 시험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9-10절). 따라서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가운데 결국에는 서머나 교회가 겪는 이런 모든 열악한 상황과 환경까지도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히 인도해 주실 것을 확약해 주시려는 강력한 메시지의 성격을 띱니다. 특별히 사단의 역사에 의해 몇 사람이 투옥되는 모진 시련과 시험을 받을 것과 관련해 ‘십일 동안 환란을 받으리라’(10절하)고 말씀하심으로 사단의 시험조차도 주님의 의해 그 결국이 좌우되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해 주십니다(욥 1:12, 2:6, 왕상 22:20-23).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관계 속에서 세상역사의 진행은 물론, 모든 피조물의 행동까지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의존되고 종속될 뿐입니다(잠 16:4, 마 10:29).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6).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관련해 때때로 인간 이성(인본주의적 관점)에 근거해 해석을 시도함으로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제한 주권처럼 평가절하시키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속성은 사랑이시기에 절대 주권에 의해 처음부터 택자와 불택자를 예정하셨다는 소위 이중 예정교리는 사랑의 속성과 모순이라고 지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선택사상과 관련한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정당성과 당위성은 이미 로마서 기자에 의해 기술된 에서와 야곱의 얘기와, 토기장이와 진흙 한 덩어리의 비유를 통해 그 진의가 밝히 해명되고 있습니다(롬 9:10-21). 창조주 하나님과 토기장이의 주권적인 권한상 선택의 여부와 만듦의 권(權)이 당연히 주권자의 기뻐하는 뜻에 의해 얼마든지 좌우될 수 있다는 논지입니다. 아울러 절대 주권자에 의해 취해진 행동은 오직 선할 뿐이며 옳다고 인정받을 뿐입니다. 절대 주권자의 결정과 행동은 피조물에 의해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절대 주권자는 결정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옳기에 당신의 행위에 피조물에 의해 대해 책임추궁을 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완전하신 분은 본질상 언행심사에 있어서 호리만큼의 결함도 있을 수 없기에 자연히 책임의 문제가 제기될 수 없습니다. 모든 일들이 오직 그 분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진행되기 때문입니다(엡 1:5). 주권성(Sovereignty)으로 말미암는 실현성(Feasibility)의 원리상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피조물에 의해 책임을 추궁당할 이유도, 필요도 없는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입니다. 책임과 의무는 죄성의 지배를 받는 피조물들만이 담당해야하는 창조주 하나님의 요구일 뿐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문제도 민감한 문제이긴 하지만 동일한 원리 속에서 접근해야한다고 봅니다. 사단의 미혹으로 말미암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문제도 죄의 원인자(原因者)와 조성자(造成者) 문제를 운운하기 전에, 논리상 엡 1:4-6에 언급된 창세전 삼위 하나님의 구원협약에 기원을 두고 풀어야 할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엡 1:4에서 기술한 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란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사건에 근거해 그 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 확인되는 구속 곧 대속사역이 전제되고 있는 표현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택함’은 곧 죄로부터의 구원을 전제로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단의 미혹으로 말미암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 또한 논리전개상 창세전 하나님의 구원협약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주제이지 별개의 독립된 주제일 수 없습니다. 아담의 범죄가 하나님의 절대주권사상과 무관할 수 없을지라도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책임소재를 돌릴 수 없다는 사실이 토기장이와 그릇의 비유를 통해 재확인됩니다. 토기장이와 그릇의 비유에 있어서도 천히 쓰임 받게 될 그릇의 입장에서 보면 토기장이의 처사가 못마땅하고 심지어 불의한 결정으로 평가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기자는 에서와 야곱의 경우에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롬 9:14)고 선언하며 토기장이와 진흙 한 덩이의 경우는 ‘....그럴 권(權)이 없느냐’(롬 9:20-21)란 질문을 던짐으로 그럴 권한이 마땅히 있음을 우회적으로 설파합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창조주로서의 주권성과 구속주로서의 영원성에 근거해 서머나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환란과 궁핍과 마귀로부터의 시험까지도 넉넉히 이길 것을 주문하시며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십니다. 현대교회 성도들도 동일한 원리 속에서 우리 앞에 놓인 다양한 고난과 시련을 믿음의 인내로 감당하며 의연하게 대처해 나가야 될 줄 압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창조주로서 그리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생명의 주로서 오늘도 성령님을 통해 여전히 교회 중에 임재하셔서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처한 현실을 알고 계신다는 말씀이 큰 위로와 힘과 능력으로 작용합니다(9절). 아신다는 사실은 당신의 몸 된 교회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교회가 안고 있는 제반 문제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표명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성도는 하나님께 이미 아신 바 된 자들입니다(갈 4:9). 그것은 동시에 성도가 당면한 제반 문제와 요구와 필요들을 주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해결해 주실 것에 대한 보증의 말씀이기도 합니다(빌 4:19).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가 무엇인 지를 먼저 아신다고 말씀하시는 분입니다(마 6:32). 그것은 이미 문제가 해결되었음을 가리키는 선언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이런 사실을 전폭적으로 수납하는 일만이 관건일 뿐입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성도가 직면한 현실을 아신다는 사실은 성도로 하여금 매사에 신전의식(Coram Deo)을 가지고 살아가게 하는 거룩한 삶의 동인으로 작용할 뿐 아니라, 온갖 죄성의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나가게 하는 예방적 삶의 근간이 되기도 합니다.
② 참된 부요함
한편 예수님께서는 서머나 교회의 환란과 궁핍을 아신다고 위로하시면서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라고 격려해 주십니다(9절). 당시 서머나 교회가 처한 영적이고 현실적인 상황은 분명히 고난과 시련 중에 있음이 확실한데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서머나 교회가 부요한 상태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주님께서 보시는 부요와 축복의 관점이 세상의 관점과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일반적으로 세상의 부요는 가시적이며 물리적이고 현세지향적인 것으로 정의됩니다. 양적이고 외적인 것으로 평가됩니다. 그래서 비천한 자보다 권세 있는 자가, 가난한 자보다 부자가, 약한 자보다 강한 자가 상대적으로 행복한 자요 부요한 자로 평가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신앙여정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과의 관계성 여부를 복과 화, 행복과 불행, 부와 가난, 성공과 실패, 기쁨과 슬픔 등의 준거로 삼아 평가합니다. 한 마디로 온 천하를 얻었다 할지라도 이보다 더 중한 목숨 곧 생명의 문제가 보장돼 있지 않다면, 온 천하를 얻은 부귀영화의 삶은 한낱 일장춘몽에 불과하다는 것이 성경의 관점입니다(마 16:26).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된 자는 이미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않음으로 사실상 가장 부요한 자로 존재하는 자라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로 안에서 함께 하늘의 후사가 되고, 함께 주님의 지체가 되고, 함께 영원한 안식에 참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언약백성 된 자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엡 3:6). 여기서 복음으로 말미암아서란 구원의 생명이 다름 아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수납하는 방식을 통해 보증된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롬 3:21-22, 28절). 그런 의미에서 부요의 실체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강조합니다. “그 안에는(예수 그리스도)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 2:3). 밭에 감춰진 보화의 비유(마 13:44) 또한 모든 소유를 팔아서라도 마땅히 사둬야 할 최고의 보물로 하나님 나라를 가리킵니다. 보이는 것은 잠간 있다가 사라질 것들이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속한 것은 영원하고 영속적이기 때문입니다(요일 2:15-17, 고후 4:18).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회심했던 사도바울의 삶의 변화를 보십시오. 빌 3:7-8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된 참 된 구원받은 성도의 삶의 정체성은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이는 참 된 구원의 생명은 전인적인 가치관의 변화와 인생관의 변화를 동반한다는 사실을 교훈합니다(창 12:1). 차선 변경이 아닌 180도 방향전환(u-turn)의 성격을 띠고서 말입니다. 곧 자기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에로, 현세지향적인 삶에서 천상지향적인 삶의 자세로의 전환을 통해서 말입니다. 성도의 신앙생활 현장에서 본질상 이런 식의 전인적인 변화가 확인되지 않는다면, 그래서 여전히 구습을 좇는 옛사람의 행실을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반복한다면 한 번쯤 자신의 구원을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적이고 자기기만적인 종교인의 신분으로 얼마든지 종교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성경의 지적입니다. 고후 13:5입니다. ”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보증의 영이신 성령님의 인침과 내주와 근심의 역사는 이런 식의 구습을 좇는 옛 사람적 삶을 모른다고 외면하거나 방관하지 않으십니다. ”너희는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생명에 연합돼 말씀의 통치를 적극 받아 누리는 자들이야 말로 가장 행복한 자들이요 가장 부요한 자들이라는 게 성경의 지적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표상으로 묘사된 종말론적인 교회가 향유하게 될 다양한 축복의 내용들이 계 21-22장에 집중적으로 소개돼 있습니다. 이는 혼인잔치에 단장한 신부로 등장하는 승리한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마침내 구원의 완성 곧 영생의 실질을 만끽하게 됨으로, 이 ‘크신 일’을 이루신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의 영광을 송축하며 경배드리는 모습을 총체적으로 기술한 내용입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가장 행복하고 부요하며 복된 자들입니다. 비록 서머나 교회의 당시의 형편과 처지가 곤고했을지라도 주님께서는 저들의 영적인 상태를 보시며 복되고 부요하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현대교회 성도들이 이런 주님의 관점과 시각을 가지고 말씀의 본질에 깊이 접촉돼 천상지향적인 삶을 적극 추구해 간다면 넉넉히 세상을 이기는 자들로 살아가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③ 사단의 회로서의 거짓 교회
서머나 지역에는 표면적인 유대인들이 적지 않게 활동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9절하). 이들은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을 근거로 하나님의 선민(選民)임을 자처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켜 행하는 것으로 거룩과 믿음의 진위성 여부를 규명하려고 했습니다. 할례를 구원의 근거로 삼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를 전파하는 기독교인들과 사사건건 충돌했으며 첨예하게 적대적인 대립의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초대교회 당시 여러 이단들과 잘못된 사상 중에 유대주의자들은 가장 포괄적으로 기독교를 박해하는 진리의 훼방꾼들이였습니다. 갈라디아서 기자는 유대주의를 ‘다른 복음’으로 정죄했습니다(갈 1:6-9).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 된 신분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지 않습니다(요 1:13).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신 창세전 하나님의 선택사상에 근거해서 말입니다(엡 1:4-6. 딤후 1:9, 딛 1:2). 이런 사실에 근거해 자신의 구원을 모태신앙 운운하면서 과시하려는 태도는 무의미합니다. 구원의 신앙은 세습되는 것이 아닙니다. 철저히 하나님의 선택적 은혜에 근거합니다. 복음 곧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의 손길을 통해서 말입니다(고전 1:21). 믿음과 구원이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엡 2:8).
이런 관점에서 서머나의 유대인들은 표면적인 유대인들로서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니었습니다. 진정한 유대인은 이면적 유대인일 뿐입니다(롬 2:28-29).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 말입니다. 성경은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아브라함의 후손들이요 약속의 자녀들이라고 정의합니다(갈 3:7, 29절). 따라서 주님은 서머나 지역의 표면적 유대인들을 일컬어 ‘사단의 회’라고 규정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향해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요 8:44)고 책망하시면서,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 하였음이로다“(요 8:47)라고 이들의 사단적 정체성을 폭로하십니다. 본문에서 유의할 대목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들로 곧 사단의 회에 속한 자들이란 지적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로 비유하셨습니다(요 10:10). ”주님의 양은 목자 되신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주님은 저희를 알며 저희는 주님을 따른다“(요 10:27)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이 전해질 때 성령께서 택자의 심령 속에 말씀으로 인쳐 주시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찾으신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엡 1:13, 고후 1:22, 고전 1:21, 12:3, 행 16:14).
이런 사실은 비단 복음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는 지에 관한 성경의 본의가 총체적인 계시관에 근거해 전해질 때, 말씀을 이익의 재료로 삼아 기복의 수단으로 신앙해 온 사람들은 정작 진리를 거부하며 외면하기 일쑤입니다. 구원의 은혜에 감심으로 반응함으로 하나님을 목적삼아 무익한 종의 심정으로 섬겨야 하는 것이 바른 성경의 가르침인데도 불구하고, 자의적 숭배신앙에 습관화 돼 세속적인 행복과 성공을 목적삼아 방편적으로 하나님을 신앙하다보면 자기부인의 삶이 힘들게 돼 스스로 하나님을 도구 삼는 우상 숭배적 신앙관에 깊이 빠지게 될 뿐입니다. 교회의 생명은 말씀에 의해 좌우됩니다. 바르게 해석된 말씀의 지속적인 선포와 공급, 그리고 이를 생명의 도리로 붙잡고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성경적인 바른 신앙과 바른 교회를 이루는 첩경으로 기능합니다. 그렇지 못할 때 자칫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주님 보시기에 죽은 교회, 심지어 사단의 회로 전락할 수도 있음을 성경은 엄히 경고합니다. 사데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를 통해 이럴 수 있는 가능성과 위험성에 대해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④ 성도가 경험하는 고난의 의미
예수님은 표면적 유대인들로 말미암는 사단의 회의 핍박에 대해 언급하신 후, 마귀의 적극적인 공세로 말미암아 서머나 교회가 당할 ‘십일 동안의 환란’에 대해 예언해 주십니다(10절하). 사실 서머나 교회는 빌라델비아 교회와 함께 주님의 책망을 받지 않은 교회입니다. 환란과 궁핍의 고난 중에서도 진리에 입각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부요한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사단의 회에 의해 심한 박해를 받았음에도 시종일관하게 신앙의 정절을 지켜낸 충성된 교회로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보다 공격적인 마귀의 시험이 주어질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심지어 서머나 교회 성도들 중 몇 몇이 감옥에 투옥돼 심한 고난을 받게 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성도들에게 고난과 시험은 필연적입니다. 진리를 추구하며 말씀의 본의를 좇는 바른 교회일수록 사단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다양한 형태의 고난과 시련에 늘 직면하게 됩니다. 지상의 교회를 전투적인 교회라고 일컫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이는 또 다른 관점에서 주님의 남은 고난에 동참한다는 구속사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골 1:24입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물론 본문의 남은 고난이란 예수님의 구속사역의 불충분성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한 번 죽으심으로 영원히 우리의 죄과를 도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구속사역은 완전하고 영원합니다. 단지 주님의 몸 된 교회공동체가 주님의 재림 시까지 사단의 세력들과의 불가분의 적대적인 관계 속에서 직면하고 있는 다양한 고난과 핍박과 관련해 몸의 유기적인 원리 속에서 언급된 내용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창 3:15(여자의 후손언약)에 예언된 두 세력 간의 투쟁적 관계는 예수님의 구속사역으로 승패가 갈렸음에도 불구하고 재림 때까지 지속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주님의 몸 된 교회가 받는 환란과 핍박과 고난으로 인해 교회는 넘어지거나 아주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난과 박해를 통해 교회의 진리성과 진정성을 시험받게 되는 것으로 인해 진위여부가 드러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거짓교회는 사라지게 될 것이요, 참 교회는 더욱 천상적 교회의 정체성을 뚜렷하게 현시하게 될 것입니다(계 14:4-5). 이는 성도들 개개인에게도 동일한 원리 속에서 적용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겪었던 극심한 핍박과 관련해 이를 전심으로 하나님만 바라고 의지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하심으로 해석합니다. 고후 1:8-9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란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한 때 바울은 자신의 ‘육체에 가시’ 곧 육신의 연약함을 위해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고후 12:7-9). 그 때도 주님은 바울의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강함과 능력을 체험할 수 있음으로 도리어 바울의 가시(약함)가 하나님의 크신 은혜의 방편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사단의 시험까지도 이를 믿음으로 감내하게 될 때 오히려 유익으로 작용하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지적입니다. 더욱 성도가 사단의 시험과 고난을 믿음의 인내를 가지고 감당해야 함은 사단의 시험조차도 하나님의 절대 주권 하에 의존돼 있다는 사실입니다. 욥을 송사하는 사단의 시험을 통해 이런 사실이 극명하게 확인됩니다(욥 1:12, 2:6). 아합을 꾀는 거짓 영의 역사 또한 이런 사실을 뒷받침 해 줍니다(왕상 22:20-23). 에덴에서 뱀을 통해 아담과 하와를 미혹했던 사단의 역사 또한 엡 1:4-6의 창세전 하나님의 구원협약과 관련시켜 해석할 때 ‘논리상’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무관하지 않음을 추정하게 됩니다. 성경의 계시사의 중심사상인 구속사의 출발은 분명 엡 1:4-6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예수님은 서머나 교회가 직면한 마귀의 시험을 ‘십일 동안’으로 한정시켜 말씀하십니다. 본문에서 십일 동안은 문자적으로 열흘이 아닙니다. 상징적인 숫자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정해 놓으신 섭리적 작정의 기간으로 말입니다. 마치 계시록의 다른 부분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짐승이 교회를 핍박하는 42달의 기간(계 11:1-2, 13:5), 용의 핍박으로부터 1260일 동안 교회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양육의 기간(계 12:6),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하는 1000년 동안의 기간(계 20:6) 등처럼 말입니다. 문제는 시험의 내용이 어떤 성격을 띠고 있든지 그것의 시종은 하나님의 의해 좌우된다는 사실입니다. 마침내 끝이 올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피할 길도 열어 주십니다(고전 10:13). 이런 사실로 인해 어떤 경우의 시험일지라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이루는 데 합력해 선용될 뿐입니다. 시험에 직면한 성도들에게 믿음의 인내가 요구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때문에 주님은 시험에 직면한 서머나 교회를 향해 죽도록 충성하라고 권면해 주십니다. 어떤 형태의 시험일지라도 본질상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이루시는데 선용되기 때문입니다. 충성은 성도의 신앙과 믿음의 진위를 가름하는 영적 덕목입니다. 특별히 말씀을 맡은 자에게 요구되는 조건 중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요소가 다름 아닌 충성심입니다(딤후 2:2, 고전 4:2). 그런 의미에서 충성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행해야 되는 모든 성도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우선적인 덕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계 14:4-5). 예수님은 온갖 시련과 핍박 중에서도 주님을 향한 믿음의 정절과 신앙의 절개를 지킨 자들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약속해 주십니다. 생명의 면류관은 종말론적으로 누리게 될 영생의 삶을 가리킵니다. 면류관은 경기의 승자에게 주는 영광의 표식이요 징표입니다. 계 4장은 두 번째 환상동아리가 시작되는 첫 장입니다. 본 환상동아리의 배경은 하늘보좌와 깊이 연관돼 있습니다. 특별히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쓴 24장로들이 하늘 보좌를 중심으로 둘러서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을 향해 감사와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계 4:2-4, 5:13). 이들 24장로들은 모든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을 총체적으로 가리킵니다. 이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썼다는 것은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근거해 죄씼음을 받고 의롭게 된 승리한 교회가 하늘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묘사해 줍니다. 땅의 교회는 동시에 하늘에 속한 교회와 동일시되며 동질성을 띠고 있음을 요한계시록은 부단히 다양한 상징과 묵시를 통해 보여줍니다. 교회의 이중구조 속에서 말입니다. 전투하는 교회의 성격을 지닌 지상의 교회가 계시록을 통해 큰 위로와 힘과 능력과 종말론적인 약속을 보장 받을 수 있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예수님은 이상의 권면과 약속들을 성령님을 통해 서머나 교회에게 확증시켜 주시는 가운데 ‘교회들’이란 복수대명사를 사용하심으로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로 당신의 약속을 확대 적용시켜 주십니다(11절). 요한계시록이 시공을 초월해 현대교회 성도들에게도 동일한 관점에서 위로와 격려와 큰 힘과 능력을 공급해 주심이 이상의 원리 속에서 가능합니다. 전투하는 교회의 승리자에게 주님은 둘째 사망의 해가 미치지 못할 것을 약속해 주십니다(11절하). 이는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에게 약속하신 특권과 동일한 성격을 지닙니다(계 20:6). 본문에서 둘째 사망의 해가 미치지 못한다는 표현은 둘째 사망 곧 불못으로 비유되는 지옥의 형벌로부터 영원히 제외됨을 의미합니다(계 20:13-15, 요 5:24). 이를 환언하면 계 20:11-15에 소개된 종말론적 심판, 소위 백보좌의 심판으로부터 성도는 본질상 제외됨을 가리킵니다. 요 5:24에서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은혜로 베풀어 주시는 구속사적 특권을 설명하는 가운데 영생의 삶과 심판으로부터의 제외됨이 강조되고 있음을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효가 모든 죄를 도말했을 뿐 아니라 의롭다고 이미 선언해 주셨기 때문입니다(히 10:14-18, 롬 3:23-24, 8:33-34). 그러나 들을 '귀 있는 자'들만이 서머나 교회에게 주신 말씀을 오늘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생명의 말씀으로 받게 될 것이라고 계시록은 경종을 울려 줍니다. 정작 볼 눈과 들을 귀가 열려있지 않다면, 그래서 그 내용들을 적극 지켜 행하는 실천적 삶이 뒷받침 되지 않는다면 계시록에 기술된 다양한 복과 상급들은 나와는 무관할 뿐입니다. 대신 각종 화(禍)와 재앙과 심판을 피할 수 없기에 영원한 후회가 뒤따르게 될 것입니다.
3. 버가모 교회에게 주신 메시지(계 2:12-17)
호크마 종합주석과 메릴 C. 테니의 요한계시록 해석에 따르면, 버가모(Pergamum)는 수세기 동안 독립된 왕국의 행정적 중심부였습니다. 서머나 북쪽 약 100km 되는 곳에 위치했으며 주전 130년경에 로마의 식민지로 편입되었습니다. 로마의 아시아 속령 중 처음으로 버가모에 로마와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기리는 황제 숭배의 전이 건립되기도 했습니다(BC26년경). 뿐만 아니라 치료의 신으로 이해되었던 아에스쿨라피우스라 불리는 뱀신과 주신인 제우스, 그리고 아테네 신전 지도자 디오니소스 등을 숭배하는 각종 우상숭배의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실은 주님께서 버가모 교회를 향해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계 2:13상)고 지적하시는 말씀을 통해서도 확인됩니다.
① 말씀의 진위를 가리시는 판관 되신 예수 그리스도
버가모 교회를 향해 예수님은 자신을 “좌우에 날 선 검을 가지신 이”로 나타내십니다. 이는 버가모 교회 속에 니골라당이란 사단의 회가 조직돼 발람의 교훈을 퍼트리고 있다는 사실과 밀접하게 연관된 명칭입니다. 당시 버가모 교회는 이런 이교도적 교훈과 이단사상에 미혹돼 진리를 거스르는 자들이 생겨났고 이로 인해 심히 혼돈된 상태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게다가 버가모 지역의 종교적 특성상 황제숭배와 각종 우상숭배가 만연했던 곳으로 사단의 역사가 특별히 강하게 나타났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영적 암매와 혼돈 속에서 예수님은 버가모 교회를 향해 ‘좌우에 날 선 검을 가지신 이’로 자신을 현시하심으로 말씀의 진위를 가려서 엄중히 심판하실 것을 선언하시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좌우에 날 선 검’이란 심판의 성격과 옳고 그름을 가름하게 되는 성령의 검, 곧 말씀의 특징적인 성격을 비유적으로 설명한 표현입니다(엡 6:17, 히 4:12).
이런 주님의 자기계시는 발람의 교훈에 동조해 이를 좇으며 니골라당에 가담한 자들에게는 큰 위협이 아닐 수 없겠으나, 순교의 정신을 가지고 믿음의 정절과 절개를 지켜 행하는 성도들에게는 큰 위로와 격려와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② 버가모 교회에 대한 주님의 칭찬
주님은 버가모 교회가 처한 신앙의 위기와 절박함을 아신다고 격려해 주십니다. 환란과 핍박의 강도가 아무리 심할지라도 주님께서 함께 해 주시고, 더구나 성도의 형편을 주께서 아신다고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시는 주님의 말씀은 고난 중에 있는 버가모 교회에게는 큰 위로와 기쁨과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당시 버가모가 각종 우상숭배의 온상으로 사단의 위(位), 곧 통치권이 가장 권세 있게 발휘되는 총사령부와 방불한 곳임을 감안할 때, 버가모 교회가 신앙의 순수성과 믿음의 정절을 지켜 행한다는 것은 죽음까지도 불사해야만 할 형편이었습니다. 결국 버가모 교회는 사단의 집요한 핍박과 박해 앞에 안디바라는 순교자를 배출하기까지 했습니다. 충성된 증인 안디바는 황제숭배 강요와 각종 우상숭배의 유혹 앞에서도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의 정절을 결코 저버리지 않았음을 본문은 시사합니다. 이런 식으로 주님은 안디바의 순교를 통해 버가모 교회가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신앙의 순수성을 지켰음을 총체적으로 평가해 주십니다.
안디바의 순교사건을 통해 사단의 세력과 불가피하게 투쟁해야 하는 지역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영적 전투와 관련해 살펴봅니다. 첫째, 지역교회의 전투 목적은 ‘내 이름’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입니다(13절). 이는 다른 말로 예수의 증거입니다. 사도요한이 밧모 섬에 유배된 이유도 예수의 증거(계 1:9)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이나 ‘예수의 증거’는 동의어로서 복음증거와 말씀전파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으로 고백하며 주와 하나님으로 믿고 섬기는 신앙생활 전반을 가리킵니다. 다시 한번 정리하건대, 지역교회의 전투 목적(존재이유)은 복음과 진리의 말씀을 부단히 전파하며 가르치는 것을 통해 구원의 역사와 진리 안에서 자라가는 성숙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를 삼는 데 우선순위가 집중됩니다(마 28:19-20, 빌 3:7-8)). 이 과정에서 목회자의 사명은 성도를 말씀으로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워나가는 데서 찾아집니다(엡 4:11-13). 둘째, 전투의 성격은 ‘충성된 증인’으로 평가되기 위함입니다(13절). 사단과의 영적 전투에서 그리스도의 군사 된 성도(딤후 2:3-4)들에게 요구되는 사항은 말씀을 좇아 죽도록 충성하는 일사각오의 정신입니다. 임전무퇴의 믿음의 정절과 순결 말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된 증인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순교의 정신이 요구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안디바에게 내 충성된 증인이라고 치하(致賀)하심은 비단 안디바 한 사람에게 국한된 칭찬이 아닙니다. 전투하는 지상의 교회들에게 분부하신 지상명령이나 다름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담당하시는 과정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충성된 종의 이미지로 이미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계 1:5상). 주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충성된 종의 이미지는 한 마디로 ‘고난을 통한 영광의 승리’(No Cross, No Glory)란 패턴입니다. 계시록에 ‘어린양의 구속에 힘입어 그 옷을 씻고 의롭게 된 큰 무리들’에 관한 이미지 또한 큰 환란에서 나온 자들로 묘사되는 것을 봅니다(계 7:13-14). 이들이 하나님의 충성된 증인들로, 곧 구속함을 받아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라고 계시록은 증거합니다(계 14:4-5). 지상의 교회들은 사단세력들과의 불가분의 대치국면(창 3:15, 엡 6:12, 계 11:1-2, 13:5) 속에서 주님의 재림 시까지 복음을 위한 영적 싸움은 지속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최후의 승리가 찾아올 것입니다(계 17-20장). 그 날이 오기까지 지역교회에 속한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롬 12:2, 요일 2:15-16), 말씀에 순종함으로 믿음의 정절을 지키는 가운데,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일편단심의 심정으로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이들이야말로 진정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요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충성된 자들이라고 성경은 증언합니다(계 14:4-5).
③ 발람의 교훈을 책망하시는 주님
사단의 세력에 굴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의 충절을 지킴으로 순교자까지 배출했던 버가모 교회에게도 책망의 요소가 깃들어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발람의 교훈을 교묘하게 끌어들인 니골라당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일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14절). 발람의 교훈이란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향해 행군해 가는 과정에서 모압 왕 발락의 제안에 미혹돼 이스라엘을 범죄와 타락에로 빠트렸던 거짓 선지자 발람의 계략을 가리킵니다(민 22-25장, 25:1-3). 이처럼 발람은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했고, 행음하도록 간계를 꾸밈으로 ‘불의의 삯’을 위해 일했던 패역한 선지자였습니다(벧후 2:15, 유 1:11). 따라서 발람의 교훈의 핵심은 이스라엘을 우상숭배와 행음으로 타락시켰던 악의적이며 교묘한 ‘사상’입니다. 그런데 이런 발람의 패역한 교훈과 사상이 니골라당이란 이단적인 무리들에 의해 당시 에베소 지역(계 2:6)과 버가모 교회에 도입돼 재현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당시 니골라당이 과거 발람의 계략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로 범죄케 했던 우상숭배와 행음을 문자적으로 도입해 적용시켰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문제는 이스라엘을 타락과 범죄로 이끌었던 발람의 패역한 간계와 사상에 모아집니다. 다시 말해 과거 이스라엘을 타락시켰던 발람의 계책이 니골라당에 의해 묘한 사상체계를 이루는 가운데 버가모 교회 속에서 재현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식으로 니골라당의 묘한 사상이 논리적으로 체계화된 교훈을 이루는 가운데 변질된 복음의 모습을 띠고 버가모 교회 성도들을 미혹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교리적으로 바르게 정립되지 못한 의식 없는 일부 교인들이 단순히 현실적인 이해관계에만 얽매여 동조함으로 니골라당의 교훈은 버가모 교회 속에 누룩처럼 번져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발람의 교훈에 기조를 둔 니골라당의 교훈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베드로 사도의 지적에 따르면, 발람의 교훈의 실체는 ‘불의의 삯’을 사랑했다는 것입니다(벧후 2:15). 이는 신앙을 사욕의 도구로 삼으려는 탐욕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온갖 기복(祈福)의 수단으로 하나님을 도구화하려는 신앙은 본질에서 우상숭배와 하등 다를 바 없습니다. 여호와의 신앙이 인간의 세속적인 목적과 성공 및 행복의 방편으로 사용될 때, 더 이상 하나님 중심의 바른 신앙이랄 수 없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에 의해 조성된 소위 여로보암 종교의 정체성이 다름 아닌 여호와 종교를 빙자한 자의적 숭배신앙(우상숭배)의 전형으로 평가됩니다(왕상 12:25-33). 여로보암 종교의 특징은 외형적으로는 한결 같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채색되었으나 본질과 내용에 있어서는 철저히 왕권의 보존을 위해 작위적이며 편의적이고 방편적인 요소들로 채워졌다는 사실입니다. 여호와 중심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온 천하보다 귀한 목숨 곧 구원의 생명을 은혜로 먼저 공급해 주신 사실에 근거해(롬 5:8, 요일 4:10), 목적적 신앙이 아닌 방편적 신앙으로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자와 구원자로서 범사에 우리의 목적이 되시는 분입니다(전 12:13, 마 6:33, 눅 17:10). 인본주의적 신앙관의 폐해는 창조주 하나님을 인간의 행복과 영광을 위해 도구 삼으려는 데 있습니다. 이상의 논리에 근거할 때 발람의 교훈에 근거한 니골라당의 교훈의 정체는 인간의 현세적인 목적달성과 성공적인 삶을 위해 신앙을 도구 삼으려는 기복적인 종교행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목회와 관련해 하나님의 소명차원보다는 삶의 질과 연관시켜 세속적인 직업적 관점으로 평가하려는 분위기의 팽배를 심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위 성공적인 목회란 차원에서 말입니다.
둘째로 발람의 교훈의 핵심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우상숭배적 행음에 빠지게 했다는 사실입니다(계 2:14, 고전 10:7-8). 이는 종교적 쾌락을 탐닉했음을 가리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과 나라로서의 정체성을 율법의 정신을 따라 뚜렷이 현시함으로 말씀의 통치를 적극적으로 받아 누리는 제사장 나라로 존재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발람의 올무에 사로잡혀 종교라는 이름으로 정작 육체의 쾌락과 탐심을 좇아 행하는 일에 착념함으로 국가적인 범죄와 타락에 빠져버렸습니다(민 25:1-3, 고전 10:7-8).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사실로 인해,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는 것을 목적삼아 살지 못하고, 여전히 구습을 좇는 옛 사람적 삶을 살아가는 실패한 성도의 모습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상의 논리에 따른 니골라당의 교훈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고 구원을 이미 받았기에, 육신의 정욕을 좇아 구습을 좇는 옛사람의 행실을 추구한다고 할지라도 더 이상 죄와는 무관하다는 도덕 폐기론자 내지는 율법 무용론자적 삶을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궤변을 결코 용납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했기에(롬 8:2) 이후부터는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함으로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으려는 천상의 질서 속에서 부단히 살아가게 된다고 가르칩니다(갈 5:16).
버가모 교회의 지도자들은 에베소 교회처럼 니골라당의 거짓된 교훈을 밝히 드러내 이들을 출교시켰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일에 실패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버가모 교회는 진리를 생명처럼 받들어 순교조차 두려워 않는 신앙의 정절을 지키는 자들이 있었던 반면에, 일부에서는 니골라당의 이단적 교훈에 미혹돼 복음을 적극 거스르는 자들이 공존하는 혼합주의적 교회의 성격을 띠고 있었습니다.
현대교회가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 또한 버가모 교회가 당면한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작금 한국의 기독교 신앙의 문제점은 흔히 기복주의/상급주의/지성감천주의/신비주의적 색체가 상대적으로 강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이는 분명히 성경이 말하는 여호와중심의 신앙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이런 식의 신앙자세가 한결 같이 견지하고 있는 공통적인 특징은 한 마디로 신앙의 도구화 현상입니다. 하나님을 통해 자신의 현세적이며 육신적인 목적과 소원을 성취시켜 보려는 종교적 욕심의 발로현상 말입니다. 이는 비단 왜곡된 기독교 신앙에서만 발견되는 현상은 아닙니다. 일반적인 종교현장에서 보편적으로 확인되는 현상입니다.
성경은 욕심의 발로에서 신을 찾는 행위를 일컬어 우상숭배라고 정의합니다(골 3:5). 그래서 욕심과 우상숭배를 본질상 동일시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을 인간의 유익을 위해 도구화시켜 섬긴다면 사실상 우상숭배와 다를 바 없으며, 이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여타의 우상 중 하나로 평가절하시키는 패역한 범죄행위가 성립될 뿐입니다. 현 시점에서 바른 신관에 따른 바른 신앙관의 정립이 어느 때보다 각별히 요구된다고 하겠습니다. 바른 신관은 바른 계시관을 통해 정립되기 마련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에 대한 총체적인 계시관의 정립이 무엇보다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롬 10:2-3이 이런 사실을 구체적으로 확인시켜 줍니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아니하였느리라.” 본문에서 하나님의 의와 자기(인간)의가 극명하게 대비돼 설명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의’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의로서,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구원의 도리를 가리킵니다(롬 3:21-22). 반면에 ‘자기(인간)의’란 유대주의가 지향하는 율법의 행위에 근거한 구원교리를 가리킵니다(롬 9:30-32). 그러나 율법의 행위로는 누구든지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율법이 부딪히는 돌이 되어(롬 9:32) 죄인으로 정죄당하며 심판아래 있게 할 뿐입니다(롬 3:19-20).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왜 이렇게 무모하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본문에서 원인을 찾는다면 지식 곧 성경의 본의를 좇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롬 10:2, 호 4:6, 6:3). 구원의 도리에 관한 지식의 체계(하나님의 의)를 무시하고 자기 소견에 좋을 대로, 자기 뜻(자기 의)과 타락한 종교심을 좇아 하나님을 임의로 섬겼다는 지적입니다. 그 결국은 불복종적이고 불법적 신앙으로 판정돼 하나님으로부터 모른다고 외면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마 7:21-23). 현대교회 역시 이런 준엄하신 주님의 책망과 경고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깊이 인식하고 자성해야 할 줄 압니다. 그렇지 않을 때 주님의 경고가 우리의 현실로 다가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④ 니골라당의 교훈을 극복하는 해결책
버가모 교회와 에베소 교회 속에 발람의 교훈에 근거한 니골라당의 교훈과 행위가 가시적으로 역사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두아디라 교회에서는 이세벨이라는 자칭 선지자를 용납함으로 거짓 교훈과 가르침이 교회 내에 공개적으로 만연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현대교회에 큰 경종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마디로 죽은 교회, 거짓 목회자, 거짓 교인이 얼마든지 양산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감안해, 사태의 진위를 가릴 수 있는 영적 분별력과 통찰력이 어느 때보다 강력히 요구된다고 하겠습니다. 베뢰아 교회 성도들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되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으로 상고해 분별하는 계시의존적인 신앙관의 정립이 시급히 요청되는 시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행 17:11).
그런 의미에서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를 총체적인 성경 계시관에 입각해 바르게 해석함으로 하나님의 본의를 밝히 해명할 수 있는 통전적인 성경공부의 필요성이 절실히 요구됩니다. 교회의 생명은 다양한 종교적 활동에 의해 좌우되지 않습니다. 바르게 해석된 말씀의 지속적인 공급과 이를 순전하게 받들어 행하는 순종력을 통해 보존됩니다(요삼 4절, 롬 10:2-3, 마 7:21-23, 행 20:31-32. 6:4). 교회 속에 말씀의 수종자로 목사의 은사를 주신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엡 4:11-13). 이런 관점에서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드시고 일곱 교회 사이를 다니시는 주님의 현재적 사역’의 상징(계 2:1)을 통해 주님과 교회와 목회자 삼자(三者) 간의 일체성과 연합성 및 통일성을 바르게 정립하는 일은 바른 신앙관/바른 교회관/바른 목회관을 정립하는 일과 관련해 생명처럼 소중한 원리입니다.
주님께서 버가모 교회 안에 성행하고 있는 니골라당의 교훈을 근절시킬 수 있는 치유책을 알려주십니다. 먼저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16절상). 회개란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용서를 빌 뿐 아니라, 종전의 잘못된 삶의 방향성을 180도 전환시키는 전인적인 회심까지를 포함합니다. 환언하면 니골라당이 가르치는 왜곡되고 변질된 복음, 곧 신앙을 도구삼아 육신의 정욕을 추구하는 기복적이고 세속적인 우상숭배적 신앙관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목적 삼는 계시의존적인 참 된 신앙관의 회복을 재정립하라는 강력한 주문을 뜻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께서 속히 임하셔서 입의 검(히 4:12, 엡 6:17), 곧 진리의 말씀으로 저들의 진위를 가려 심판하시겠다고 강력한 의지를 표명해 주십니다(계 2:16하). 이 대목을 통해 어느 시대건 참 된 교회는 주님의 직접적인 인도와 통치 속에서 영원히 안전하게 보호되고 보장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일곱 별과 일곱 금 촛대’의 상징을 통해 이런 사실이 재확인됩니다.
그렇다면 이들 거짓 무리들의 교훈을 주님께서 친히 입의 검, 곧 진리의 말씀으로 진위를 가려 심판하신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어떤 방식으로 심판하신다는 것일까요. 죽은 교회나 방불했던 사데 교회의 상황을 통해 본문이 말하는 ‘진위를 가려 심판하신다’는 의미를 유추 해석할 수 있습니다. 주님 보시기에 당시 사데 교회는 총체적인 관점에서 살았다고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교회와 방불했다고 계시록은 선언합니다(계 3:1). 본문에서 ‘죽었다’는 표현은 비유적인 묘사입니다. 곧 복음의 본질과 가치와 생명력을 거의 상실한 채, 형식적인 종교활동을 추구하는 데만 일관했다는 지적입니다. 그럼에도 사데 교회가 여전히 실낱같은 희망이 남아 있었던 것은 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소수의 신실한 남은 자들이 여전히 존재했었다는 사실에서 찾아집니다. 이들이야말로 사데 교회가 다시 복음의 생명력을 회복시킬 수 있는 소중한 불씨였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들을 통해 복음의 본질과 가치를 회복시키고 말씀의 본의를 밝히 해명케 하심으로 사데 교회 전체가 다시 영적으로 소성함을 입을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느 시대건 참 된 교회와 참 된 성도들은 존재하며, 특별히 하나님에 의해 친히 소명을 받은 참 된 지도자들을 통해 진리의 말씀을 증거케 함으로 몸 된 교회를 철저하게 양육하시고 보존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계 12:6, 3:4). 이 과정에서 에베소 교회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듯이 거짓 선생들에 의한 거짓 교훈을 밝히 드러내 마침내 출교시키는 방식으로 저들을 심판하시고 교회의 진리성과 진정성을 보존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상의 내용은 ‘칠천의 남은 자’(왕상 19:18, 롬 11:4-5) 사상과도 일맥상통하는 원리입니다. 아합 왕이 통치하던 북이스라엘은 당시 왕비 이세벨이 아합 왕을 충동해 우상숭배 장려정책을 시행함으로 북이스라엘 전역이 우상숭배로 만연됩니다. 선지자 엘리야는 이런 현실을 안타까워하면서 외롭게 바알숭배자들과 맞서 갈멜산에서 영적 전투를 벌인 끝에 승리를 거둡니다(왕상 18장). 마침내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신 사실이 확증됩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앞세워 바알 선지자와 아세라 선지자 수백 명을 일거에 살해합니다. 그러나 정작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숭배로부터 쉽게 돌아오지 않습니다(왕상 18:40). 이 소식을 들은 이세벨이 엘리야를 찾아 죽이려고 사자를 보냅니다. 엘리야가 이세벨을 피해 호렙산에 이릅니다. 거기서 여호와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여호와의 선지자는 자신만 남게 되었음을 하소연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선지적 사명(왕상 19:15-17)을 주시는 가운데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여호와 신앙의 정절자 칠천 인을 남겨 두었다고 천명해 주십니다(왕상 19:18).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어느 시대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친 백성들과 참 된 교회를 섭리적으로 보존하시는 가운데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사를 집행해 가신다는 의지의 표명입니다(롬 11:4-5). 이들은 말씀의 본질에 깊이 접촉돼 진리의 말씀을 생명처럼 받드는 자들이요,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로, 세속에 물들지 않고 믿음의 정절을 지켜 행하는 자들입니다(계 14:1-5). 바른 교회에 속한 자들의 실상이 이렇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른 교회에 속한다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돼 구원론적인 통치를 적극 받아 누리는 천상의 삶을 사는 것과 본질에서 다를 바 없습니다(계 4:4).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이 보장될 수 없다’는 말의 본의가 이런 원리에 근거합니다. 여기서 ‘교회’란 구원론적 근거로서 바르고 참 된 교회를 제한적으로 가리킵니다.
⑤ 이기는 자에게 보장된 약속
주님께서는 오늘도 성령님을 통해 교회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요 14:16-17, 26, 16:13-14). 이는 주께서 소명과 은사와 말씀을 주심으로 친히 세우신 교회의 목회자(요 21:15-17, 엡 4:11-13)들을 통해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며 가르치게 하는 방식으로 몸 된 교회를 재림 시까지 철저하게 돌보시며 양육하신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교회의 절대 안전과 보장이 이런 원리 속에서 확증됩니다.
그런데 진리의 영 되신 성령님께서 목회자를 통해 교회 앞에 말씀을 증거하실 때, ‘귀 있는 자는 청종하라’고 매번 각 교회들을 향해 강조해 말씀하십니다(계 2:7, 11, 17, 29, 3:6, 13, 22절). 이는 일곱 교회를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다양한 칭찬과 책망과 경고와 권면의 내용들을 지상의 모든 교회들이 경계로 받아 적극 실행에 옮길 것을 강권하시는 의미를 띱니다. 그렇지 못할 때 일곱 교회에게 경고하신 책망과 심판으로부터 현대교회들 또한 결코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는 전투하는 지상의 교회의 종말론적 승리를 보증하는 결정적인 표증으로 작용하게 될 것입니다. 일곱 교회를 향해 ‘이기는 자에게 약속하신 보증의 내용’들이 계 21:7을 통해 총체적으로 성취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확증시켜 줍니다. 여기서 ‘이기는 자’란 각 교회에게 주신 주님의 메시지에 근거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운 자를 가리킵니다(엡 6:12-13, 벧전 5:8). 그러나 정금(계 21-22장)같이 나오기 위해 먼저 많은 환란과 고난의 연단과정(계 4-20장)을 통과해야만 한다는 것이 성경의 진술입니다(눅 17:25, 욥 23:10, 롬 8:18). 복음의 정체성은 고난(죽음)을 통한 영광(부활/승천)으로 집약돼 설명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계 1장은 서론, 2-3장은 총론, 4-20장은 본론 및 상론(詳論), 계 21-22장은 결론이란 관점으로 분류해 접근할 수도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버가모 교회를 향해 이기는 자와 관련해 두 가지를 약속해 주십니다(17절). 첫째로 감추었던 만나를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만나는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첫 수확물로 식물을 삼을 때까지 광야여정 길에서 육체의 생명을 보존해 주시기 위해 주신 양식입니다(출 16:35, 수 5:12). 여기서 만나를 일컬어 ‘감추었던 만나’라 함은 이스라엘이 백성들이 광야 길에서 양식으로 삼았던 만나는 사실상 만나의 실체가 아니었음을 의미합니다. 실체가 비밀로 감춰져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었던 만나의 실체는 따로 있었다는 것이요, 그런 의미에서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는 만나의 실체를 예표하는 모형이요 상징이었음을 가리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를 먹고도 광야에서 죽었다고 지적함으로 만나의 실체는 영생하는 생명의 떡을 역설적으로 가리키고 있음을 시사합니다(요 6:49). 그렇다면 만나의 실체인 영생하는 생명의 떡은 무엇일까요. 사도 요한은 영생의 근원이시며 ‘생명의 떡’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의 실체, 곧 ‘산 떡’으로 지목합니다. 요 6:47-51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만나의 실체되신 영생하는 ‘산 떡’으로 증거합니다. 누구든지 이 떡, 곧 예수님의 살을 먹는 자는 영생이 보장됨을 약속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사죄와 구원과 영생을 실질로 소유하게 됨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감추었던 만나’란 다름 아닌 만나의 실체되신 영생하는 ‘산 떡’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이 비밀의 경륜이 구약시대에는 모형적 계시로 감춰졌었는데 이제 때가 차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마침내 밝히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골 1:26-27입니다.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그렇다면 ‘감추었던 만나를 주시겠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는 생명의 떡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영생에 대한 확고한 보증을 가리킵니다. 복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 갈 길을 마치고, 믿음의 정절을 지킨 자들이야말로 다름 아닌 ‘이긴 자’들이요, 이들에게 승자의 표증인 각종 면류관(딤후 4:7-8, 벧전 5:4) 특별히 생명의 면류관(약 1:12)이 수여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감추었던 만나를 주시겠다’란 뜻은 종말론적인 교회의 완성을 통해 승리의 면류관으로 상징된 영생의 실질을 소유해 누리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로 새 이름이 새겨진 흰 돌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본 절에서 ‘흰’ 것과 ‘새’ 것이란 표현은 요한계시록 속에서 장차 도래하게 될 천국의 성격을 반영하는 중요한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봅니다(계 1:14, 3:4, 5, 18, 4:4, 6:2, 11, 7:9, 13, 14, 19:11, 14, 20:11, 21:1, 2, 5절). 새 이름은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주신 약속(계 3:12하)에 근거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추정됩니다. 그렇다면 흰 돌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다양한 견해가 분분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문맥과 당시의 정황을 고려할 때 경기의 승자에게 수여하는 승리의 증표로 보는 견해가 우세합니다. 따라서 ‘새 이름이 기록된 희 돌’의 의미는 전투하는 교회의 군사로서 신앙의 정절을 지킨 승리자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사하는 종말론적 상급, 곧 구원의 완성과 영생의 실질을 누리는 천국의 삶에 대한 확고부동한 보증과 특권을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사실은 창세전에 수립하신 하나님의 선택사상의 경륜 속에서 진행되는 것이기에, 택자들만이 하나님의 구속의 비밀의 경륜을 깨닫게 되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버가모 교회의 이긴 자에게 약속하신 천상적인 축복의 내용들은 모든 시대의 참 된 성도들에게 동일한 복과 상급으로 소유될 것입니다. 아니 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현재적으로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통치 속에서 이미 소유해 누리고 있는 셈입니다(마 12:28, 요 5:24, 롬 8:33, 벧전 2:9, 계 5:10). 이 비밀을 아는 자는 참으로 복 된 자들입니다. 미래의 약속 또한 보장돼 있기 때문입니다.
4. 두아디라 교회에게 주신 메시지(2:18-29)
두아디라(Thyatira)는 호크마 종합주석에 따르면 버가모와 서머나의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공업도시로 유명한 곳입니다. 주전 190년경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고 태양신 아폴로와 아데미, 삼바다 등의 신전이 있었으며 공업이 발달하게 된 동업조합(同業組合)이 성행했습니다. 빌립보에서 개종한 자주 장사 루디아가 이곳 출신의 여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행 16:14). 한편 두아디라 교회가 어떻게 설립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바울이 에베소에 머무를 때에 전도했거나 루디아에 의해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두아디라의 동업조합들은 나름대로 각종 우상숭배와 깊이 관련돼 있었습니다. 당시의 사회적 상황은 출세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조합에 가입해야 했고, 조합회원이 되려면 다양한 우상을 숭배해야만 했습니다. 이런 식의 우상숭배가 구조적으로 만연돼 있던 당시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조합에서 탈퇴한다는 것은 즉시 직장과 모든 사회적인 지위를 한 순간에 잃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리고 이내 경제적 빈곤과 신앙적 핍박에 처해지게 됩니다. 그렇다고 현실적인 이유를 앞세워 조합원으로 남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우상숭배와 불가피하게 연관돼 결과적으로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셈이 됩니다.
이렇게 경제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절박한 상황에 처한 두아디라 교회를 향해 주님은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로 자신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이는 죄를 감찰하시고 찾아내 용서치 않으시겠다는 심판주의 엄위하신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두아디라 교회 내에서는 이세벨이라는 자칭 여선지지자가 나타나 성도들을 공공연하게 미혹함으로 우상숭배를 조장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용납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① 엄위하신 심판주와 하나님의 아들로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2:18-29)
어느 시대건 참 된 교회와 참 된 성도들이 겪는 고난과 시련은 본질에서 동질성을 띱니다. 그럼에도 문자적인 우상숭배와 각종 타락의 양상이 다양한 삶의 영역 속에 깊이 연루돼 있던 당시 삶의 성격상, 우상숭배로부터 근본적으로 이탈한다는 것은 곧 생존의 위협과 직결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시 경제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이중의 진퇴양난의 위기에 처해 있던 두아디라 교회 앞에 주님은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 같은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나셨습니다(18절). 이는 계 1:14-15에 기록된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으로 단 10:6의 반영입니다. 본문에서 ‘눈이 불꽃같다’는 것은 죄악을 감찰하셔서 낱낱이 드러내시는 예리한 통찰력을 가리킵니다. 히 4:12-13입니다.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다음으로 ‘그 발이 빛난 주석 같다’는 표현은 불의와 불법을 철저히 응징하시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담긴 심판주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상과 같이 주님께서 사태의 진상을 통찰하시는 공의로우신 심판주의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내 보여주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자칭 여선지자 이세벨의 교훈이 두아디라 교회 속에 공공연하게 만연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회개치 않으면 더욱 상황을 악화시켜서 큰 환란과 사망 가운데 내치시겠다고 강력히 경고하고 계십니다(22절).
② 두아디라 교회를 향한 칭찬
주님은 두아디라 교회를 향해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신다”고 칭찬해 주십니다. 이런 결과로 두아디라 교회는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욱 개선되고 발전됨으로 활성화돼 가고 있는 교회’라고 격려를 아끼지 않으십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책망하셨던 에베소 교회와 대조를 이룹니다. 분명히 두아디라 교회는 사랑이 동기 유발된 실천적 삶을 전개시켜 나가는 데는 괄목할만한 성장을 보였음에 틀림없습니다. 이로 인해 외적으로 크게 부흥한 교회의 모습을 띠고 있었음을 충분히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내 거짓 여선지자 이세벨의 교훈을 용납함으로 교회 전체가 변질된 복음에 무방비상태로 미혹당하고 있음을 볼 때, 지식에 근거한 계시의존적인 열심이 아닌 자의적 열심의 위험성과 폐해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자칫 지식이 배제된 열심은 자의적 숭배신앙관을 형성하게 되고, 열심이 결핍된 지식위주의 신앙은 냉냉한 교조주의적 신앙관을 낳게 될 공산이 큽니다. 따라서 바른 지식에 근거한 믿음의 역사와, 이에 따른 사랑의 수고와, 미래지향적인 소망의 인내야말로 바른 신앙관/바른 교회관을 확립하는 첩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③ 이세벨의 교훈을 책망하심
자칭 여선지자 이세벨의 교훈은 두아디라 교회가 내적으로 직면했던 신앙적 위기로서 주님은 이를 엄히 책망하시며 돌아설 것을 강력히 촉구하셨습니다. 이세벨의 교훈의 핵심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과 행음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20절). 여기서 행음을 문자적인 범죄행위로만 제한시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에서 음행은 우상숭배와 세속주의에 깊이 착념해 동화되는 것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의 이교도적 문화에 동화된 이스라엘의 경우(호 1:2)와 당시 로마의 황제숭배와 세속문화에 연루된 행위를 음녀 바벨론과 비유적으로 연관시켜 음행으로 정죄하고 있는 계시록의 내용(계 1-2)들이 이런 사실을 뒷받침 해 줍니다. 동일한 원리 속에서 현대교회가 기복주의 신앙관(탐심)에 사로잡혀 현세지향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목적을 위해 신앙을 도구화시켜 행한다면 이 또한 종교를 빙자한 현대판 행음 죄가 성립될 뿐입니다(약 4:4, 골 3:5).
본문에서 여선지 이세벨의 교훈이란 성격상 버가모 교회 중에서 역사 했던 발람의 교훈 및 니골라당의 교훈과 맥을 같이 합니다. 다시 말해 에베소 교회와 관련해서는 강하게 거부되었던 니골라당의 교훈(2:6)이 버가모 교회 가운데서는 암암리에 침투해 들어와 일부 교인들을 중심으로 역사했으며(2:14-15), 이제 두아디라 교회에서는 공공연하게 이 교훈을 용납할 정도로 표면화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본성 속에 내재된 죄성의 발로는 부단히 죄와 동거하기를 원하는 나머지 이에 대한 대비책을 지속적으로 강구하지 않으면 부지불식간에 틈을 타고 들어와 자리를 잡게 마련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개혁된 교회는 지속적으로 개혁돼야한다’고 강조한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다른 한편 본문의 여선지 이세벨의 교훈은 내용상 아합 왕의 아내인 왕비 이세벨이 아합 왕을 충동해 시행했던 바알숭배 정책과도 맥을 같이 합니다(왕상 16:30-33). 이런 관점에서 두아디라 교회에서 활동했던 여선지자 이세벨은 문자적인 인물일 수도 있겠지만, 교훈의 내용과 끼친 해악(害惡)상 동일한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 아합 왕의 악처 왕비 이세벨의 사상의 반영일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이처럼 신앙이 도구화된 우상숭배 신앙의 정체성을 탐심으로 규정합니다. 골 3:5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세속주의에 바탕을 둔 현세지향적인 신앙의 정체성을 영적 음행으로 간주합니다. 약 4:4입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왜냐하면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닌 세상 곧 마귀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성경은 밝히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요일 2:15-16).
그렇다면 이세벨의 교훈으로 발전된 발람의 교훈이나 니골라당의 교훈 등이 어떻게 교회 속에서 버젓이 용납되고 활동할 수 있었을까요. 이는 본질상 죄로 인해 타락하고 부패한 인간의 보편적인 종교적 욕구를 자극하고 충동해 충족시켜 준다는 데서 가능하게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당시 우상숭배와 음행으로 일관되었던 이세벨의 교훈과 발람의 교훈 및 니골라당의 교훈이 갖는 현대적 원리는 철저하게 탐심과 세속성에 바탕을 둔 기복주의/성공지상주의/상급주의/지성감천주의 신앙 등으로 표출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처럼 인간이 추구하는 종교적 욕구는 타락한 본성상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본질에서 동질성을 띠고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부단히 말씀의 본질에 접촉돼 이를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살아가는 계시의존 사색신앙관의 정립이 전제되지 않을 때, 어느 누구라도 이런 죄성의 미혹과 범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갈 5:16, 롬 6:11-14).
중세 영적 암매로부터 말씀의 본의를 회복시켰던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500주년이 목전에 다가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사역을 성취하시고 피로 값 주고 사신 몸 된 교회를 세상 가운데 드러내신 이후 이천 년이 이미 지났습니다. 사도들이 살아있었던 1세기 교회 속에 벌써 온갖 이단적인 사상과 가르침이 만연돼 말씀의 혼잡이 야기됐었다면(고후 2:17, 요일 4:1-3),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교회 속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까를 짐작해 보십시오. 현대교회가 소유해 누리고 지향하고 있는 신앙적인 내용과 관점이 과연 얼마나 성경에 근거한 진리성과 진정성을 함의하고 있을까요.
이런 일말의 염려를 아주 떨칠 수 없는 이유는 현대교회가 두아디라 교회처럼 비록 많은 종교적 활동과 실적을 쌓고 있을지라도, 정작 바른 계시관에 입각해 바른 신앙과 바른 교회의 정체성을 구현해 나가는 일에 얼마나 고민하며 비상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지를 심히 의심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과 관련해 예레미야 선지자가 경종을 울려줍니다. 당시 거짓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고 거짓 예언을 일삼았습니다(렘 6:14, 28:1-4). 더욱 마음 아픈 일은 백성들이 이런 거짓예언들을 좋게 여겨 적극 추종했다는 사실입니다(렘 5:30-31). 예레미야 선지자는 거짓 예언을 지적하며 책망하며 탄식했으나 백성들은 막무가내였고 오히려 거짓선지자가 예레미야를 핍박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국은 바벨론에 의한 멸망이 기다리고 있었을 뿐입니다. 성경은 말세의 특징을 언급하면서 ‘사람들이 극한 이기주의에 사로잡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쾌락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며, 종교적 경건은 모양만 있을 뿐 진리를 좇는 순종력은 철저히 부인될 것에 대해 경고합니다(딤후 3:1-5, 4:3-4). 예수님의 초림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현재적으로 도래해 역사될 때부터 이미 말세는 시작된 셈입니다(히 1:1-2, 약 5:3, 고전 10:11). 그런 의미에서 현대교회 성도들은 현실을 직시하는 영적 통찰력과 분별력 및 성경의 본의를 밝히 해명할 수 있는 지혜와 계시의 정신이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를 살아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④ 사랑으로 권면하심
주님께서는 이세벨을 즉각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충분한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나 그녀는 끝까지 회개치 않습니다(21절). 일반적으로 도덕적 범죄로부터 돌이켜 회개하는 일은 쉽습니다. 양심에 화인 맞은 자가 아닌 이상 대부분 가책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짓 교훈으로부터 돌이키는 일은 훨씬 어렵습니다. 그것은 거짓 교훈을 나름대로 진리처럼 수납해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딛 3:10)고 말씀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단에 속한 자들은 근본에서 사단의 세력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기에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돌이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주께서는 이세벨의 교훈에 동조해 회개치 않는 자들에게 큰 환란이 임할 것과 아울러 엄중한 심판을 경고하십니다. 결코 일시적인 눈가림식으로 주님을 속일 수는 없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입니다. 이런 사실과 관련해 주님은 자신을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분”으로 다시 한번 강조해 선언하십니다. 철저히 회개할 것을 촉구하심에 다름 아닙니다.
주님은 당신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그러기에 모두가 회개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한 사람의 낙오자라도 나오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오늘도 은혜의 문을 마감치 않으시고 구원의 문을 열어 놓으시는 이유가 이런 사실 때문입니다(벧후 3:9, 고후 6:1-2).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세상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남은 자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 가운데 섭리적으로 보존해 두신 참 된 하나님의 백성이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이들이 다 구원의 문에 들어오기 전까지 세상은 여전히 존속될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는 중단되지 않을 것입니다. 두아디라 교회에도 예외는 아닙니다. 이세벨의 변질된 복음에 의해 두아디라 교회가 상당한 혼란에 빠졌던 것은 틀림없으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와중에서도 당신의 신실한 남은 자들을 보존하고 계셨습니다(24절, 롬 11:4-5, 왕상 19:18). 이들은 이세벨의 교훈을 받지 않았습니다. 적극 거부했습니다. 더구나 진리를 빙자해 복음을 변질시키며 자기열심을 조장함으로 경건을 사욕의 수단으로 삼게 하려는 소위 ‘사단의 깊은 것’과는 상종을 마다했습니다. 제아무리 하나님의 열심이 있을지라도 지식의 체계를 좇아 계시의존적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면 열심을 낼수록 자기 의를 힘써 추구하는 것이 됨으로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않는 자의(恣意)적 숭배신앙으로 판정받게 될 뿐입니다(롬 10:2-3, 마 7:21-23).
주님께서는 이들 남은 자들에게 이세벨의 교훈 외에 다른 짐, 곧 다른 교훈을 추가로 지킬 것을 주문하지 않으십니다. 종전대로 진리를 보수하는 가운데 이 세대를 본받지 말며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일편단심의 믿음을 시종일관하게 지켜나갈 것을 요구하실 뿐입니다. 이는 마치 바울의 전도를 통해 기독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에게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하는 것’ 외에 아무 짐도 지우지 않기로 결의했던 예루살렘 회의의 결정과 방불하다 하겠습니다(행 15:19-21, 28-29).
⑤ 이기는 자에게 보장된 약속
주님께서는 두아디라 교회를 향해 남은 진리성과 진정성을 끝까지 붙잡고 신앙의 정절을 지킬 것을 당부하십니다. 심은 대로 거두시는 것 또한 하나님의 섭리방법입니다. 이기는 자에게 주님은 두 가지를 약속해 주십니다. 첫째는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입니다. 본문은 시 2:8-9의 반영입니다. 시편 2편은 메시아의 주권사상을 노래한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세상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은 것처럼 성도들도 그리스도와 연합돼 동일한 통치에 참여함을 시사합니다. 나아가 이는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벧전 2:9, 계 5:10, 20:6)으로 현재 만왕의 왕이 되셔서 세상을 통치하고 계신 주님의 정권에 현재적이며 미래적으로 동참할 것에 대한 확약이기도 합니다(마 28:18, 빌 2:9-11, 계 22:5). 물론 세세토록 왕 노릇하리란 종말론적인 보장(계 22:5)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묘사된 천국에서 성도가 성도를 다스린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에덴동산에서 피조물에 대한 왕적 통치권을 대리적으로 위임하셨듯이(창 1:28) 미래의 신천지에서 에덴동산에서 허락하셨던 통치권의 시행이 막힘없이 재현될 것에 대한 보증입니다. 한편 이러한 왕적 통치권의 현재적 적용은 복음전파를 통해 시행되고 있습니다. 복음에 대한 수납은 영생이요 거절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왕적 통치를 거부하는 것으로 곧 멸망이요 영원한 심판과 지옥의 형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막 16:15-16).
이기는 자에게 약속해 주신 두 번째 내용은 ‘새벽 별’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계 22:16에서 주님은 자신을 ‘다윗의 뿌리요 자손으로서 곧 광명한 새벽 별’로 묘사하십니다. 본문에서 ‘광명한 새벽 별’은 민 24:17에 언급된 ‘야곱의 한 별’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민수기서에서 야곱의 한 별은 사실상 문자적으로 다윗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다윗으로 말미암는 신정왕국의 새로운 계시시대가 열린 것과 관련해서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윗은 신정왕국의 여명을 밝힌 별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계 22:16에서는 앞의 ‘다윗의 뿌리요 자손’과 연결돼 다윗의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를 명백히 지칭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광명한 새벽 별’이 되신다함은 예수님의 구속사역의 승리로 인해 죄와 허물로 죽어서 마치 흑암가운데 처해 있었던 인생들에게 구속사역의 완성으로 말미암는 새로운 은혜와 평강의 종말론적 새 시대의 여명이 밝았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표현으로 새벽 별 이미지를 차용한 것입니다. 따라서 새벽 별을 주신다함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돼 그 분의 생명을 소유함으로 천상의 승리한 교회에 소속돼 영생의 삶이 보장됨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상의 참 된 교회에 속한 성도는 이미 현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에 연합돼 영생의 삶을 여기서부터 선취적으로 맛보며 살아가는 자들로 존재합니다. 요 5:24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이미 영생이 현재완료 적으로 주어졌으며 미래의 심판으로부터도 이미 제외되었음을 밝히 증거해 줍니다. 요 11:25-26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본문에서도 예수님을 살아서 믿는 자들은 영원히 죽지 않는 부활의 생명을 이미 현재적으로 소유해 살아가고 있음을 분명히 시사합니다. 부활의 생명을 현재적으로 소유해 살아간다는 것은 영생의 생명력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과 본질에서 다를 바 없습니다. 죽음의 권세가 부활의 생명을 더 이상 주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차별적이어서 들을 귀 있는 자들에게만 생명의 말씀으로 인(印)쳐 짐으로 새벽 별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Ⅲ. 결론
계 2-3장은 1장을 통해 자신을 상징적으로 계시해 주신 다양한 모습에 근거해 일곱 교회에게 친히 메시지를 전달하시는 내용이 소개됩니다. 일곱 교회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일곱이라는 상징이 가리키듯 모든 시대의 모든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말씀인 셈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곱 교회를 향한 메시지는 현대교회를 향해 동일하게 선포되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메시지입니다. 자신을 다양한 상징적인 모습을 통해 계시하실지라도 이를 하나의 상징으로 종합해 묘사한다면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드시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이”(1:20)로 함축할 수 있습니다. 이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주님의 몸 된 교회와 세우신 종들을 하나로 연합시키는 일체성과 통일성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계시입니다. 본 상징이 의미하는 바는 주님은 오늘도 피로 값 주고 사신 당신의 교회 속에 친히 세우신 말씀의 수종자들을 통해 눈동자처럼 교회를 돌보시며 양육하시며 인도해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전투하는 교회의 성격이 상대적으로 강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현대교회들이 환란과 시련 중에도 위로와 격려를 받으며 담대한 믿음의 인내로 넉넉히 현실을 대처해 나갈 수 있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일곱 교회들을 향해 주님은 교회별로 칭찬과 책망과 권면과 회개와 약속들을 전해 주십니다. 특별히 본장에서 네 교회를 향해 선포하신 메시지들의 공통점은 본질에서 말씀에 근거한 진리성과 진정성의 진위여부를 검증하는 일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신앙의 정체성이 목적적인지 방편적인지의 여부를 발람의 교훈, 니골라당의 교훈, 이세벨의 교훈 등에 근거해 집중적으로 진단하시며 확증해 주십니다. 일곱 교회를 향해 이기는 자에게 보증하고 계신 약속들 또한 한결 같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한 구원의 종말론적 완성 곧 신천지에서 영생의 실질을 누리는 것에 집중됩니다.
신앙이 점차 도구화되고 활동이 말씀을 대신하는 경향이 팽배된 현대교회 속에서 일곱 교회를 향해 주시는 주님의 메시지를 통해 우리의 현실을 통찰하고 진단함으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 지를 새롭게 재발견하는 절호의 기회로 삼아야 할 줄 압니다. 나아가 인본주의의 팽배와 만연 속에서 온갖 거짓 교훈과 세속성을 앞세워 교회를 미혹하며 혼란케 하는 사단의 궤계와 핍박에도 불구하고, 말씀의 본질을 추구하는 시종일관한 믿음의 정절과 일사각오의 순교의 정신으로 신앙의 순수성을 지켜 행하는 일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합당한 충성된 증인으로 거듭나는 최선책이 될 것입니다.
출처 : remnant7000
글쓴이 : sky blu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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