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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2

[스크랩] 요한계시록 구속사(제 1 강) :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제 1 장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계 1:1-20)



  Ⅰ. 도입



  전통적으로 요한계시록의 저작 시기는 로마의 토미티안 황제의 통치기간이었던 AD81-96년경으로 보는 것에 많은 신학자들이 의견의 일치를 모으고 있습니다. 도미티안 황제는 네로에 이어 로마 역사상 가장 혹독하게 기독교를 박해했던 인물 중 한 사람으로 지목됩니다. 그는 황제숭배를 정책적으로 시행함으로 자신을 주와 신으로 경배케 했으며 이 과정에서 가장 피해를 본 대상이 다름 아닌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어떤 대상도 진정한 의미의 주님(the Lord)으로 고백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신앙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 황제숭배를 거부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었습니다. 사도요한도 당시 에베소 교회에서 그의 말년의 사역을 감당하면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집중하던 중, 황제숭배를 거역했다는 이유로 주로 정치범들의 유배지인 밧모 섬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당시 로마의 속령에 속해 지배를 받고 있었던 현 터키지역의 일곱 교회들이 처한 형편도 요한의 경우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이런 모진 핍박과 환란에 직면했던 당시 교회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 위로하고 격려하며 종말론적인 신앙관을 확립케 함으로 신앙의 정절과 담대한 믿음의 고취 및 경계를 촉구하기 위해 기록된 일종의 예언서(1:3)였던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당시 사도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했던 구약 선지자들의 신탁(神託)적 사역의 연장선상에서 선지자의 심정을 가지고 본서를 기록하고 증거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도요한이 본 계시록을 예언의 말씀과 동일시하는 의중을 통해 이런 사실이 감지됩니다. 따라서 요한은 본서를 기록함에 있어서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과 제반 약속들이 일관되게 지향해 나온 이스라엘의 미래적 회복이란 주제를 참 이스라엘인 교회의 종말론적 회복과 승리라는 언약적 구속사의 관점으로 재해석하는 데 집중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특별히 포로기 전후 선지들이 이스라엘의 회복과 관련해 사용했던 다양한 상징과 묵시적 표현들을 동일한 맥락 속에서 사도요한이 본서에서 채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강력히 뒷받침 해 줍니다.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이스라엘의 회복은 사실상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구속사역으로 새 이스라엘인 현시대 교회공동체를 통해 일단락되었고(갈 3:7, 29, 6:16), 재림으로 말미암는 종말론적인 성취와 완성을 향해 남은 구속사가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초림의 성취는 재림을 통한 미래의 완성을 철저히 보증한다는 것이 본서의 증언입니다. 



  Ⅱ. 전개

 

  사도요한이 본서에 대한 계시를 받은 곳은 밧모 섬이 확실하지만(계 1:9), 밧모 섬에서 본서를 기록했는지 아니면 유배생활을 마치고 에베소에 돌아와 기록했는지의 여부는 단언하기 어렵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문제는 기록장소의 중요성보다는 기록동기와 기록내용 및 기록목적이 관건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본서를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안에 기록한 내용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역설합니다. 



  요한계시록은 당시 로마의 극한 기독교 박해 속에서 두려움과 의심과 시험에 직면해 있는 1세기 교회공동체를 향해 어린양의 승리에 근거한 교회의 최후의 승리를 확약해 줍니다. 나아가 이런 확증을 다양한 구약의 상징과 묵시를 사용해 파노라마처럼 보여줌으로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며 믿음의 정절과 인내를 고취시켜 줍니다. 이제 본서의 내용을 언약적 구속사의 관점에서 주해하며 본의를 살펴봅니다.



  1.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1:1)



  본서의 제목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비록 본서가 사도요한에 의해 기록되었다고 할지라도(1:11) 계시의 전달과정이 ‘하나님-예수 그리스도-천사-요한-각 교회 지도자들’의 순서를 밟고 있기 때문입니다(1:1).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란 계시의 전달 주체가 예수 그리스도란 사실 뿐만 아니라, 계시의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일’로서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사역의 전 과정이 포함돼 있음을 가리킵니다.    



  본서의 기록목적은 1절에서 언급했듯이 ‘반드시 속히 될 일’을 일곱 교회성도들에게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성취의 때가 가깝고, 이를 통해 위기에 처한 당시 교회들에게 위로와 격려 및 믿음의 정절과 경계를 고취시켜 주시기 위함입니다. 본문에서 ‘반드시 속히 될 일’이란 ‘반드시 성취되고 속히 될 일’로서, 반드시란 ‘속히 될 일’에 대한 성취의 필연성을 강조합니다. ‘속히’란 시간적인 개념보다는 종말론적 임박성과 성취의 확실성을 강조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무난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재림은 1세기 교회 성도들에게나 21세기 교회 성도들을 막론하고 동일하게 현재적인 임박성과 즉각성 및 돌발성의 성격을 띠고 다가옵니다(마 24:40-44). 



  요한은 계속해서 계시로 받은 ‘반드시 속히 될 일’의 내용을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로 환언해 설명하면서, 자신이 보고 들은 것에 대한 증거(기록)내용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해 설명합니다(2절). 이는 본서에 대한 요한의 증거가 예수님께서 전해 주신 계시의 내용과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사실을 확증하는 표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란 본서를 통해 계시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적 전 생애, 곧 주님의 성육신, 공생애 사역의 핵심인 죽음과 부활 및 승천, 천상에서의 대제사장적 중보사역, 종말론적 재림과 심판과 왕권의 발휘 등을 포괄합니다.



  2. 요한계시록이 약속한 첫 번째 복(1:4)



  계시록에는 모두 일곱 번에 걸쳐 축복의 구절이 소개됩니다(1:4, 14:13, 16:15, 19:9, 20:6, 22:7, 22:14). 본문에서 복으로 주신 약속의 내용은 ‘본서의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에게’라고 대상이 한정돼 있습니다. 본문에서 읽는 자는 단수로 처리된 것에 비해, 듣는 자들과 지키는 자들을 복수로 처리한 것은 당시 본서가 회람용 편지형식으로 각 교회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한 사람이 읽고 교회공동체가 듣는 형식을 취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계속해서 본문의 내용이 복이 되는 이유를 ‘때가 가깝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3절하). 이는 위의 1절에서 언급한바 있는 ‘반드시 속히 될 일’과 병행구를 이루면서 예언 성취의 임박성과 확실성을 가리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완성과 교회의 종말론적 승리 말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위의 첫 번째 복의 실체인 ‘종말론적 구원의 완성과 교회의 승리와 영광에 참여’는 사실상 일곱 교회를 향해 각각 이기는 자에게 상급으로 약속하고 계신 내용들의 총화와 본질에서 다를 바가 없습니다(2:7, 11, 17, 26, 3:5, 12, 21절). 이로 보건대 사실상 지상의 참 된 교회에 속한 자들은 본질상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에 연합된 자들로 계시록에서 약속한 복의 실질들을 이미 여기서부터 소유해 누리는 자들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지역교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사역으로 인해 이미 이 땅에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는 자들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땅의 교회는 하늘에 속한 교회와 본질상 동질성을 띤다는 교회의 이중성은 요한계시록이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는 특별한 주제이기도 합니다. 이런 이유로 지상의 참 된 교회공동체에 소속된 성도들은 계시록이 약속하고 있는 7가지 복은 물론, 7교회를 향해 이기는 자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신 상급 또한 ‘이미’ 현재적으로 소유해 누리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아직’은 미래적인 완성의 여지가 남아 있을지라도 말입니다. 지역교회에 소속된 성도들이 고난과 환란 중에도 낙심과 좌절 및 시험에 빠지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로 말미암습니다. 미래의 승리가 보장된 자들로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래서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또한 넉넉히 감당할만한 것이라고 요한은 계시록을 통해 줄기차게 강조하는 것입니다. 

           

  잠시 성경이 말하는 복의본질에 대해 살펴봅니다. 성경을 통해 성도들에게 약속하고 있는 복의 실질은 현세 지향적인 것에 근거한 성공지향적인 삶의 보장이 아닙니다. 한 마디로 성경이 약속하고 있는 복의 정체성은 잠시 있다가 없어질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요소가 아닙니다. 천상지향적인 것으로 인해 영속적이며 영원한 요소들입니다.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약속된 구원의 완성, 영생, 부활, 영원한 안식, 하나님 나라의 완성, 심판에서 제외됨 등등 말입니다(시 133:1-3, 마 16:26, 히11:6, 요 5:24). 성경은 세상적이고 육신적인 복의 정체성을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치부(置簿)함으로 본질상 마귀에게 속한 것이라고 선언합니다(요일 2:15-16). 다시 말해 타락한 본성으로부터 요구되는 것은 한결 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으며 사실상 죄악된 것으로 사단적이란 지적입니다(골 3:5-6). 선악과 금령을 어긴 사건과 바벨탑 축조사건 속에 담긴 불순종의 본질이 이렇습니다. 지존사상(자존심)의 고취를 통한 자기영광과 자기의의 구현 말입니다. 그러나 불순종은 근본에서 욕심에 이끌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으로 판정되기에 사단적 발상과 동질성을 띱니다(마 16:21-23, 4:8-10). 죄의 문자적 정의를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과녁을 빗나간 것’으로 해석하듯이 죄의 정체성은 범사에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사죄의 은총과 칭의의 은혜를 덧입은 성도들이야말로 복중의 복을 받은 자들이요 가장 행복한 자들로 평가된다고 하겠습니다. 온 천하를 얻고도 목숨을 잃는다면 그 모든 것이 무슨 유익이 되겠는지요(마 16:26). 더구나 영영한 지옥의 형벌에 처해진다면 땅에서 잠시 누렸던 부귀영화의 축복인 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지요. 다만 일장춘몽(一場春夢)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의 축복관이 성경적으로 바르게 정립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못할 때 자칫 신앙을 도구삼아 하나님을 우상처럼 섬기는 기복적인 자의적 숭배신앙의 함정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구약의 신명기서에서 약속하고 있는 소위 신명기적 축복(신 28:1-14)의 실체는 순종을 담보로 가나안 땅에서 누릴 복의 내용들을 소개합니다. 그런데 사실상 이스라엘은 구약의 역사 속에서 한 번도 율법을 제대로 지켜보질 못했습니다. 따라서 신명기서에 약속된 축복의 내용 또한 가나안 땅에서 제대로 누려보지 못했습니다. 특별히 역대기서 기자는 바벨론에 의한 남 유다 왕국의 멸망과 70년간의 포로생활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역설적으로 해석하면서, ‘가나안 지경의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여 70년을 지내게 되었다’고 기술합니다(대하 36:21).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의 정신(하나님 경외와 이웃 사랑)을 총체적으로 대표하고 있는 안식년 준수를 한 번도 제대로 지키지 못한 불순종의 대가로 바벨론에 의해 언약적 징계를 당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율법의 순종을 통해 가나안에서 누릴 제반 축복을 약속하고 있는 신명기적 사관(史觀)은 본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해 교회공동체가 은혜로 누릴 천상적 복을 전망케 합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실제로 신약의 교회공동체에게 이미 주어졌습니다. 벧전 2:9입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갈 3:29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그러나 아직 미래의 완성된 축복은 남아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은 이 모든 남은 구속사를 성취시키는 결정적인 사건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3. 삼위일체론적 문안(1:4)



  요한은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을 향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편지를 써서 발송합니다. 이 때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은혜와 평강을 빌어줍니다. 이런 식으로 요한은 계시록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교리를 우회적으로 증거합니다.



  먼저 성부하나님을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로 묘사합니다(1:4, 8, 4:8). 이는 영원불변하시고 영존하시는 하나님의 신적 속성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특별히 도치법을 사용해 과거시제와 현재시제를 뒤바꿔 놓은 것은 하나님의 사역의 현재성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해 영원불변하시고 영존하시는 하나님께서 당시 영육 간에 위기에 직면해 있는 7교회 가운데 여전히 함께 하고 계심을 강력히 시사함으로 계시록의 모든 말씀이 현재적으로 유효하게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당시 절체절명의 신앙적 위기에 처해 있던 7교회들로서는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저들과 함께 계셔서 눈동자처럼 보호하시고 교회의 종국적인 승리와 영광을 보증하고 계심을 확신할 수 있다는 것만큼 큰 힘과 위로가 되는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요한은 한 편으로 영존하시는 하나님의 현재성을 강조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위기에 직면해 있는 7교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담대한 믿음과 신앙의 정절을 고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성령하나님에 대한 명칭을 “그 보좌 앞의 일곱 영”으로 표현합니다. 5장의 하늘 보좌 환상에서는 성령님에 대한 설명을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고 묘사합니다(5:6). 여기서 일곱 영이란 스가랴서에서 채용한 표현(슥 4:10)으로 온 세상에 보내심을 받아, 두루 행하며 하나님의 복음 사역을 감당하시는 성령님을 지칭하는 상징적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원리 속에서 성령님은 오늘도 여전히 세상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된 구속사역의 공효를 택하신 백성들에게 적용시켜 구원사역을 수행하심으로(엡 1:13)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말씀으로 세워나가시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십니다(요 14:26, 16:13-14).



세 번째로 성자하나님에 대한 명칭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언급하면서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표현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런 3중적 표현은 그 분의 공생애 사역을 연대기적인 순서를 따라 요약한 내용일 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지상의 생애는 한 마디로 하나님의 충성된 증인의 삶으로 특징지어집니다. 창세전 성부하나님께서 수립하신 구속계획(엡 1:4-6)을 세상 속에서 죽기까지 성실하게 이행하신 충성된 증인이셨습니다. 이는 선지자들의 새 언약 사상에 내포된 대속사상, 곧 고난의 종의 사역을 적극적으로 담당한 사실과도 맥락을 같이 합니다. 나아가 천국의 복음과 천국의 삶이 어떤 것인 지를 구체적인 예를 들어 가르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산상수훈의 내용들은 천국복음과 천국의 삶에 대해 집약적으로 가르치신 구체적인 실례들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충성된 종과 증인의 모습은 당시 온갖 박해로 인해 고난과 환란과 시험가운데 빠져있던 1세기 교회 성도들에게는 큰 위로와 도전 및 새로운 결심과 각오를 다짐케 하는 결정적인 동인으로 작용하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죽은 자(죽음)들 가운데서 먼저 일어나신 분입니다. 이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명칭입니다. 이런 표현은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 그리스도를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고전 15:20)로 표현한 것과 유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성도들에게 부활의 확실성을 심어주셨을 뿐만 아니라, 죽음을 극복케 하는 부활신앙의 확립(고전 15:55-57)을 고취시키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합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부활이후의 예수님의 사역까지도 포함합니다. 특별히 베드로 사도는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그의 첫 번째 설교에서 이런 사실을 함축해 선포합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하나님이 오른 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 2:32-33). 성령강림 사건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주도적인 사역의 일환이란 지적입니다(요 14:16). 나아가 지금도 하늘 보좌에 좌정하셔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친히 간구하시며 대제사장적 중보사역을 담당해 주신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롬 8:34, 히 7:25). 이로 보건대 “죽은 자들 가운데 먼저 나신 자”란 예수님의 부활과 관련된 명칭은 예수님의 현재적이며 미래적인 사역과 능력을 동시적으로 확신케 해 주는 위로와 소망의 표현임에 틀림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땅의 임금의 머리가 되신 자”라란 명칭은 예수님의 구속사역의 승리와 직결된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충성된 증인으로 마침내 구속사역을 완성하셨을 뿐 아니라, 사단을 본질상 정복하신 승리자로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회복하신 만왕의 왕으로 등극하셨음을 강력히 시사합니다(마 28:18, 빌 2:9-11). 



  요한은 이후에 전개되는 계시록의 내용을 통해 이상 세 가지 예수님과 관련된 명칭이 보다 구체적으로 확대/심화 적용되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1:1)라고 명명된 본서의 제목이 단지 계시록의 전달자가 예수님이실 뿐만 아니라, 내용 또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현재적이며 미래적인 사역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는 사실이 이를 명백히 증거합니다. 본문의 문안내용과 관련된 삼위하나님의 명칭에서 성자하나님과 성령하나님의 통상적인 위치를 바꿔서 예수님을 마지막에 설명하는 요한의 의도 또한 이런 사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곧 이후 전개되는 계시록의 내용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현재적이며 미래적인 사역에 모든 초점이 집중돼 있다는 사실에 대한 확증 말입니다.  



  이상 삼위하나님의 이름으로 7교회들에게 문안한 요한은 이제 주 예수 그리스도의 헌제사역에 근거해 본서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헌정(獻呈)하는 내용을 소개합니다(1:5하-6). 이는 마치 어떤 책의 저자가 평소 특별히 은혜를 입은 자에게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은 자에게 자신의 책을 헌정하는 것과 본질상 다를 바 없습니다. 헌정사의 요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구속사역의 요지를 속죄와 그 결과에 집중시켜 천명합니다. 곧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사실” 말입니다. 사실 죄의 종노릇으로부터 성도가 해방돼 구원받은 것은 예수님의 피 값이 지불된 결과입니다. 이 결과로 성도는 주님의 종과 자녀 된 신분으로 바뀌었으며, 일평생 주님을 주와 하나님으로 섬기며 신앙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부여가 된 것입니다(눅 17:10). 나아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과 나라(벧전 2:9)로 존재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택하신 백성(행 13:48)인 잃어버린 남은 자(눅 19:10, 롬 11:5)를 찾는 일에 충성된 증인, 곧 제사장적 중보사역을 감당하는 자들로 살아가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4.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약속(1:7)



  본서에서 사단의 세력들과의 종말론적인 전투장면들을 통해 예수님의 재림사건이 틀림없이 묘사됨에도 불구하고, 만왕의 왕과 영광의 주님으로 재림하시는 메시아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의도적으로 유보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다만 본문(1:7)에서 재림과 관련해 직접적으로 언급돼 있고, 22:20을 통해 주님의 재림에 대한 성도들의 간절한 염원이 담긴 소망이 간략히 소개되고 있을 뿐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재림 자체가 계시록의 중심주제나 핵심사상이라기 보다, 예수님의 종말론적인 사역으로 인한 교회의 최종 승리와 영광에 보다 실제적인 무게가 실려 있음을 감지하게 됩니다. 이런 관점으로 계시록에 접근하게 될 때, ①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사망과 음부의 권세를 붙잡고 계신 예수님께서(1:5, 18절) ②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드시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인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셔서(1:12-13, 16, 20, 2:1) ③일곱 교회들을 향해 반복해서 이기는 자에게 약속된 상급을 보증하시는 가운데(2:7, 11, 17, 25, 3:5, 12, 21절) ④마침내 21:7을 통해 이기는 자는 이 모든 것들을 유업으로 주실 것을 최종적으로 확약하심으로 계시록의 대단원을 마감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구조적인 맥락에서 살펴볼 때, 4-19장까지의 내용은 7교회에게 약속하신 이겨야 될 것이 무엇인 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의 상술(詳述) 또는 해설로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주제를 살펴봅니다. 먼저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설명합니다(7절상). 이는 단 7:13의 인용입니다. 본문에서 다니엘은 환상 중에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내려와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나라를 상속받고 열국의 백성들로부터 찬양과 영광과 권세 및 섬김을 받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는 구약의 메시아 대망사상이 인자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구체적으로 성취될 것에 대한 예언적 환상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문의 구름은 재림하시는 메시아의 왕적 권위, 위엄, 영광 등을 총체적으로 표상하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후 40일간을 제자들과 함께 세상에 계시다가(행 1:3) 승천 하실 때에도, 구름이 저를 가려서 보이지 않게 되었었다고 누가는 사도행전을 통해 기록합니다(행 1:9). 이런 설명을 본문의 재림의 모습과 연관시켜 상고해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승천 전부터 이미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장악하고 계신 만왕의 왕의 신분으로 계셨음을 통찰하게 됩니다(마 28:18, 빌 2:9-11). 



  둘째로 재림의 시기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재림의 징조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합니다(마 24장). 그러나 시기에 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아니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 아버지 외에는 천사나 아들조차도 재림의 날과 때를 알 수가 없다고 예수님께서 친히 단정적으로 말씀하십니다(마 24:36). 마태는 재림의 시기를 알 수 없다는 사실과 관련해 두 가지 실례를 들어 설명합니다. 노아 때 홍수 사건과 도적의 비유입니다(마 24:37-44, 눅 17:26-30). 전자의 경우는 홍수가 나서 저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한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삶의 성격과 방향이 적극적으로 본능적인 삶을 탐닉하고 추구하느라(요일 2:15-16, 창 3:6) 하나님께 대해 철저하게 무관심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딤후 3:1-5, 4:3-4). 창세기 저자는 사람들의 이런 보편적인 삶의 반응과 성격을 ‘죄악의 관영함’(창:6-5, 15:16)으로 판정해 심판의 불가피성을 경고합니다. 후자의 도적의 비유의 경우는 때를 알지 못하는 것과 관련해 예측 불허의 재림의 돌발성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평소부터 늘 깨어 기도하며 근신하는 사전 준비와 대비에 철저한 삶을 살아갈 것을 강력히 촉구합니다. 마 24장에 뒤이어 25장에서 열 처녀의 비유(준비)와 달란트 비유(헌신)가 첨부된 것이 이런 사실을 구체적으로 뒷받침 해 줍니다(마 25:1-30). 그렇다면 재림에 지혜롭게 대비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결국이 어떻게 될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다름 아닌 마 25:31-46의 내용으로 곧 종말론적인 심판을 통해 각 사람의 영원한 삶의 현주소가 천국의 영생과 지옥의 영벌로 갈라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분별할 줄 아는 영적 분별력과 통찰력 및 계시의 정신이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롬 13:11).



  셋째로 재림의 성격입니다. 본문은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의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할 것’을 예언합니다. 이는 인격적인 재림을 가리킵니다. 다른 말로 육체적인 재림 또는 가견(可見)적인 재림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올라가신 방식대로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행 1:11). 아울러 재림의 방식은 공개적인 방식을 취하게 될 것입니다.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란 말이 이런 사실을 뒷받침 해 줍니다. 여기서 찌른 자들이란 표현은 슥 12:19의 반영입니다. 초림 때에는 은밀한 가운데 비공식적으로 가난한 중에 몇 사람에게만 보이셨습니다. 대속물이 되시기 위해 버림받으실 고난의 종의 신분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재림 시는 다릅니다. 메시아의 실체로 오십니다. 영광과 존귀와 위엄으로 관을 쓰시고 만왕의 왕의 신분으로 오셔서 성도들에게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 기이히 여김을 받으실 것입니다(살후 1:10). 그래서 공개적이고 공식적으로 오십니다.



  넷째로 재림의 목적입니다. 재림사건은 구속사의 모든 경륜을 종식시키는 의미를 가집니다. 여기에는 심판과 상급이 필연적으로 뒤따릅니다. 심판은 사단을 비롯한 두 짐승과 악의 세력 및 모든 불신자들이 총체적으로 해당됩니다. 그 결국은 지옥의 영원한 형벌입니다(마 25:33, 41, 46절상, 요 5:29절하, 살후 1:7-9, 계 19:20, 20:10, 11-15, 21:8). 상급은 어린양의 피로 구속함을 받고,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않았으며,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랐던 믿음의 정절을 지킨 자들로,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에게 주어집니다(계 14:4, 22:12). 여기서 상급의 본질은 구원의 종말론적인 완성과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안식과 기업에 참여하는 것을 가리키며, 새 예루살렘으로 표상된 승리한 교회가 새롭게 변혁된 창조질서 속에서 누릴 일체의 영광과 축복을 향유하는 것을 가리킵니다(계 21-22장).            

                         

  5. 계시록 저자의 날인(1: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1:8). 본문은 계시록의 서론 부분의 마지막 구절로 표제지에 맨 밑에 위치한 서명 날인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은 역사의 시종을 주관하시는 창조주하나님의 절대 주권성을 강조하며 동시에 만물과 만사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진행되며 종결된다는 사실을 함의합니다. 이런 사실은 특별히 계 21:6에서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는 계시록의 결론적 선언 속에서 구체적으로 확증됩니다. 본문에서 ‘이루었도다’(It is done)라는 선언은 그동안 신구약 성경역사를 통해 시종일관하게 진행돼 오던 언약적 구속사의 전 경륜이 때가 차매 마침내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서 온전히 성취되었음을 선포하는 감격적인 내용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속사가 이처럼 완벽하게 성취될 수 있음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성품이 역사의 주관자로서 알파와 오메가(처음과 나중)가 되실 뿐만 아니라, 영원자존자로서 시공을 초월해 존재하시며 역사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제도/전에도/장차 올 자)이시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1:8절 본문을 4절과 비교해 볼 때 ‘전능하신 자’라는 표현이 첨가된 것은,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요한에게 주신 계시록의 예언의 말씀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에 의해 반드시 성취될 것임을 확증시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으로 불 수 있습니다. 빌 1:6입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롬 11:36입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6. 첫 번째 환상 동아리(1:10-3:22)



  사도요한은 말년에 에베소 교회에서 마지막 사역을 감당하는 가운데 에베소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당시 도미티안 황제의 기독교 박해의 희생자로 밧모 섬에 일정 기간 유배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본서는 이런 사실을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 섬에 갇혔다고 밝힙니다(9절). 요한계시록은 그가 밧모 섬에 유배돼 있을 당시 ‘성령에 감동하여’(엔 프뉴마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환상으로 본 바를 기록한 내용입니다(1:11). 본문에서 ‘성령에 감동하여’란 표현은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또는 '내가 성령 안에 있었다‘(I was in the Spirit)라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다시 말해 평소의 정상적인 의식 상태를 벗어난 초월적인 상태 속에서 환상의 내용을 보고 듣게 되었다는 설명입니다.     



  계시록에는 모두 네 번에 걸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란 표현이 소개됩니다. 첫 번째가 본문의 밧모 섬에서 주의 날에 인자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1:10). 첫 번째 환상은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에게 주신 계시의 말씀(2:1-3:22)을 포함해 하나의 군(群) 곧 동아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두 번째 경우는 하늘 문이 열리고 하늘 보좌를 보게 된 환상입니다(4:2). 두 번째 환상은 16:21까지의 내용을 통해 계시록의 본론 부분에 해당하는 각기 다른 일곱 인/나팔/대접 재앙의 내용을 포함하면서 가장 큰 동아리 환상군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광야로 인도되어 붉은 빛 짐승을 타고 있는 여자(음녀)의 환상을 보게 됩니다(17:3). 본 음녀의 환상은 어린양의 신부된 새 예루살렘 성(교회)과 극적인 대조를 이루면서 21:9까지의 내용(악의 세력의 총체적인 멸망)을 포함해 또 하나의 환상군을 이룹니다. 마지막으로 크고 높은 산으로 데려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 환상을 보여줍니다(21:10). 천사는 새 예루살렘 성의 실체가 어린양의 신부된 교회라고 설명해 줍니다(21:9). 이처럼 사도요한은 모두 네 차례에 걸쳐 성령의 사로잡힌바 돼 계시록 전체의 내용을 담고 있는 환상을 보며 음성을 듣게 된 것입니다. 이상의 네 환상군은 사실상 계시록 전체를 내용의 성격상 크게 넷으로 구분하는 환상군의 역할을 담당합니다. 



  서       론    :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선언(1:1-8)

  환상 동아리 Ⅰ : 교회를 돌보시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1:9-3:22)

  환상 동아리 Ⅱ : 우주만물의 통치의 중심이 되는 하늘 보좌와 어린양(4:1-16:21)

  환상 동아리 Ⅲ : 사단의 세력을 멸하시는 어린양(17:1-21:8) 

  환상 동아리 Ⅳ : 어린양의 승리와 교회의 승리(21:9-22:5) 

  에 필 로 그    :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밧모 섬에서의 첫 환상을 보게 된 것은 주의 날이었습니다(1:10). 주의 날은 신약의 초대교회가 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정해진 예배의 날입니다. 이 날은 안식 후 첫날 곧 일요일로서 우리가 주일로 삼아 지키는 날입니다. 종전까지는 유대교적 배경 속에서 토요일 안식일을 지켜왔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완성을 기점으로 더 이상 구약계시에 근거한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대신 부활하신 날인 일요일을 주의 날로 정해 지켰습니다(행 20:7, 고전 16:2). 사실상 구약의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 구속사역을 통해 성취될 진정한 안식의 모형으로서 한시적이며 임시적인 제도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과 구속사역의 완성은 구약의 다양한 모형과 예표적인 계시들을 실체화시키는 ‘하나님의 열심’(사 9:7)의 결과로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로 말미암는 진정한 의미의 안식이 이미 성취됐음을 강력히 선언하는 의미를 가집니다(마 12:8, 눅 6:5). 물론 예수님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최종 완성은 미래적으로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말입니다. 



  따라서 신약의 교회가 주일을 지키는 원리는 단순히 구약의 안식일을 주일로 대체해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안식의 실체인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도래한 사실에 근거해 새롭게 설정된 날을 감사함으로 기념해 지키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주일 예배의 본질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완성과 이로 인해 성도들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격과 기쁨을 공동체적으로 표출해 내는 신앙 고백적 행위인 셈입니다. 주일 예배가 개인이 아닌 몸, 곧 공동체적으로 드려져야 하는 당위성이 이런 구속의 원리 속에서 요구됩니다. 이런 뜻 깊은 날에 사도요한은 유배지 밧모 섬에서 성령에 이끌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구속사의 절정인 교회의 승리와 축복의 내용을 다양한 환상과 더불어 보고 듣고 이를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일곱 교회와 요한이 처했던 극심한 핍박과 박해의 상황을 고려하면 본 계시록의 내용이 얼마나 큰 위로와 힘과 능력으로 작용했을까를 넉넉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먼저 요한은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듣습니다. 나팔소리는 구약의 배경 속에서 백성을 소집하거나 군사적인 비상사태를 선포할 때(겔 33:6), 전쟁 때(겔 7:14), 절기 때(레 23:24), 그리고 하나님의 현현하심을 상징적으로 묘사할 때(출 19:16-19) 사용되곤 했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징표와 더불어 나타납니다(마 24:31, 살전 4:16). 본 계시록에서는 종말론적인 심판의 특성을 알리는 징표로서 도처에서 사용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계 8:2). 그런 의미에서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이란 나팔소리 자체가 아닌 긴박한 상황을 알리고 사람들에게 경계와 주의를 환기시키려는 경종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큰 음성이란 겔 43:2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묘사하는 내용을 인용한 것으로 15절에서는 큰 음성을 ‘많은 물소리’로 바꿔서 설명합니다. 거대한 폭포수가 굉음을 울리며 떨어지는 장엄한 광경과 주변 사방 수 킬로미터에 걸쳐 퍼져나가는 하얀 물안개를 연상해 보십시오. 경외감을 유발시키는 장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상의 비유적인 표현을 통해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이란 다름 아닌 비교될 수 없는 절대주권자의 무한한 왕적 권세와 위엄을 비유적으로 나타내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메시아적 권세와 위엄이란 관점에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환상을 통해 보게 될 다양한 광경과 내용을 일곱 교회에게 써 보내라는 지시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요한계시록의 수신자로 특별히 소아시아지역에 위치해 있는 일곱 교회만을 대상으로 선정한 것은 요한계시록의 기록 성격상 다분히 상징성을 띠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7이라는 숫자가 상징하고 있는 완전수 또는 충만수로서 곧 모든 시대에 걸쳐 존재하는 주님의 몸 된 교회 전체를 포함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사실상 당시 소아시아 지역에는 본 계시록의 일곱 교회 외에도 드로아, 골로새 및 히에라폴리스 등지에 여러 교회들이 존재해 있었습니다. 따라서 일곱 교회를 대상으로 주신 요한계시록은 동시에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교회들에게도 시공간을 초월해 동일한 맥락에서 현재성을 띤 주님의 계시의 말씀으로 수납되는 것입니다. 물론 본문에 기록된 일곱 교회는 1:4에서 언급된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가리킵니다. 



  ①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요한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과 관련해 ‘보여주신 계시’의 내용입니다(계 1:12-16). 본문에서 기술된 예수님의 상징적인 모습들은 계속해서 2-3장에 소개된 일곱 교회가 처한 형편과 관련해 자신의 모습을 계시하신 내용과 밀접하게 상호 연관됩니다. 첫째로 요한은 큰 음성의 정체를 확인하려는 과정에서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띤 인자 같은 이가 일곱 금 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12-13절). 본문에서 발에 끌리는 옷과 가슴에 금띠를 띤 복장은 구약의 제사장과 왕의 복장을 방불케 합니다(출 28:4, 28:8, 29:5, 25:7, 단 10:5-6). 이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과 메시아로서의 왕적 권위 및 위엄을 함축적으로 표상합니다. 특별히 ‘인자 같은 이’란 표현이 이를 뒷받침 해 줍니다. 본문에서 인자란 표현은 단 7:13-14의 반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 나라의 왕권을 수여받고 세상만국을 권세와 위엄으로 다스리는 영광의 메시아를 총체적으로 시사하는 용어로 사용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에도 종종 자신을 인자로 드러내셨으며(마 12:8, 32, 16:13, 27-28, 막 10:45, 눅 6:5, 22, 요 1:51, 3:13-14, 5:27), 부활 승천 후 심판주로 재림하시는 자신을 일컬어 인자(마 24:30, 25:31, 행 7:56)로 지칭하셨습니다. 이런 식으로 인자란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동시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특별한 단어로서 구속사적인 용례와 관련해 사용되곤 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런 인자 같은 분이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닐고 계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일곱 금 촛대란 슥 4:2의 반영으로 스가랴서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의 미래적인 회복과 관련해 보여준 환상의 내용입니다. 계시록 본문에서는 스가랴서의 환상을 채용해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적용시킴으로 당시 일곱 교회는 물론 일곱 교회의 상징을 통해 모든 시대를 망라한 세상의 모든 교회를 눈동자처럼 친히 아끼시고 돌보시며 인도하시는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계신 내용입니다. 후에 20절에서 이런 사실을 주님께서 친히 해석해 주십니다. 일곱 금 촛대가 일곱 교회를 가리킨다고 말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환상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과 메시아로서 왕적인 권위와 권능을 가지고 지금도 여전히 피로 값 주고 사신 바 된 당신의 교회를 철저히 돌보시며 통치하신다는 그리스도의 현재적 사역을 시사해 줍니다(롬 8:34, 히4:14-16, 7:25). 



  둘째로 13-14의 내용입니다.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 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 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이상의 상징적이며 비유적인 표현은 한 마디로 만국을 심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의로운 심판권과 이를 행사하시는 과정에서 사단의 세력들과의 영적 전투가 불가피한 군대장관 되신 예수님의 다양한 이미지를 함축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계시록의 시종을 관통하고 있는 중심사상인 구속사의 성격을 창 3:15의 여자의 후손언약의 종말론적 성취라는 관점에서 규명하게 될 때, 두 세력 간의 적대적인 투쟁의 역사는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군대와 사단과 그의 졸개들과의 전투모티브로 대별될 수 있습니다. 본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피 뿌린 옷을 입으신 백마 탄 자의 모습(계 19:11)과 유다지파의 사자(5:5)로 등장해 사단의 세력을 패배시키는 승리자로 묘사됩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2-3장에서 일곱 교회를 향해 이기는 자에게는 이에 상응하는 보상을 주시기로 약속하시는 주님께서는 4-20장의 내용을 통해 친히 사단의 세력들과의 싸움을 진두지휘하시는 가운데, 마침내 모든 싸움이 종식 된 후 21:7을 통해 이기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영적 상급을 하사해 주실 것을 총괄적으로 보증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계시록은 만왕의 왕과 영광의 주님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사건을 집중적으로 묘사하기보다 사단의 세력을 종말론적으로 멸망시키시고 이로 인한 교회의 완성과 승리와 연합과 일치를 선포하시는 군대장관 되신 승리자로 어린양 되신 예수님을 집중적으로 조명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특별히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계신 모습으로 자신을 계시해 주십니다. 이는 앞 절에서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모습과 병행을 이루는 가운데 일곱 교회의 지도자들을 대표적으로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12-16절을 통해 요한이 본 인자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양한 표상이 제시하는 중심 주제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도 여전히 당신이 세우신 교회 지도자들을 든든히 붙드시고 피로 값 주고 사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친히 돌보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20절에 소개된 일곱 별과 일곱 촛대에 담긴 비밀의 본의가 이런 사실을 뒷받침 해 줍니다. 교회의 현재 상황이 비록 고난과 핍박과 궁핍 가운데 처해 있을지라도 믿음의 인내로 넉넉히 감당하며 극복할 수 있음은 오늘도 주님께서 성령님의 임재와 인도와 다스림을 통해 여전히 성도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며 힘과 능력을 공급해 주신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② 두 번째는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해 주신 계시’의 내용입니다(계 1:17-20). 11절에서도 요한이 본 것을 책에 써서 일곱 교회에게 보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사도요한이 인자 같은 예수님을 보게 되었을 때 그는 죽은 자같이 그 앞에 거꾸러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피조물인 인간이 비록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죄성으로 말미암는 연약성과 한계성을 가지고 창조주를 만나게 될 때 보편적으로 느끼게 되는 경외심의 발로로서 공포와는 본질에서 다릅니다. 경외심은 신앙과 관련된 긍정적인 두려움인 반면에 공포는 불신앙과 죽음과 심판과 깊이 연루된 부정적인 두려움의 발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최초의 두려움은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찾아 오셨을 때 저들이 보인 부정적인 반응과 태도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10). 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두려움과 공포심과 미움과 다툼을 유발시킵니다. 원수관계를 맺게 합니다. 그러나 사도요한의 두려움은 불신앙에서 발로된 공포심이 아닙니다. 창조주와 구속주를 향한 경외심입니다.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가 그의 죄를 양털 같이 희게 씻어 주었으며 다시는 죄가 기억되지 않을뿐더러 적극 의로운 자로 여김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요한을 붙드시고 두려워말라고 위로해 주십니다. 자신을 처음과 나중 되신 분 곧 역사의 주관자와 종결자로 말씀해 주십니다(계 21:6). 이는 역사의 결국이 창세 전 하나님께서 수립하신 영원하신 작정에 근거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 진행되고 종결된다는 의미를 함의합니다. 계속해서 자신을 전에 죽었었지만 이제 세세토록 살아서 사망과 음부의 권세를 가지신 분으로 알려주십니다. 이는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 근거해 자신을 설명하시는 내용입니다. 이런 설명은 요한을 포함해 모든 교회들과 불가분의 생명적 관계를 맺고 계신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 자신의 구속사적 정체성을 밝히 증거함에 다름 아닙니다. 성도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쁨과 감사와 감격의 심정으로 학수고대하며 예배드릴 수 있는 당위(must)가 이런 주님의 헌제(獻祭)사역에 근거합니다. 이제 더 이상 죄와 사망의 권세가 성도들의 삶을 주관하지 못합니다(롬 6:11-14). 사망과 음부의 권세를 깨치고 죽음에서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력이 이 모든 사단적 권세를 철저히 패배시켰고 성도를 은혜가운데 보존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성도들의 생명이 주님의 부활의 생명에 깊이 연합돼 있기에 아무도 이 생명을 빼앗거나 무효화시킬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명백한 증언입니다(롬 8:35-39). 기독교 신앙의 성립과 동기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따라서 구원의 감격과 기쁨과 감사가 동인으로 작용하지 않는 신앙이란 본질에서 타락한 종교심을 부추기는 데서 생성된 자의적 숭배신앙에 불과할 뿐입니다. 인간의 현세적인 행복과 성공에 초점을 맞춘 방편적 신앙 말입니다. 이는 목적적 신앙으로서 성경이 말하는 여호와 중심의 신앙과는 무관합니다(롬 10:2-3, 마 7:21-23).



  이제 1장을 마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한에게 다시 한번 결론적으로 계시록의 내용을 일곱 교회에게 기록해 전달할 것을 명하십니다(계 1:19-20). 이 과정에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본 절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흔히 과거/현재/미래적인 관점으로 3등분 해 접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1장 전체를 과거적 계시, 2-3장의 일곱 교회에 관한 메시지를 현재적 계시, 그리고 4장 이후의 내용을 주님의 재림에 즈음한 소위 ‘7년 대환란’(단 9장) 기간에 집중적으로 일어날 미래적인 계시로 구분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구분에는 다소 작위적인 시도가 없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본서를 시작하면서 요한은 서두에 본서의 기록동기와 목적을 간략하게 언급했습니다(계 1:1-8). 이어서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기술하게 된 내력을 소개합니다(계 1:9-10). 이런 사실을 감안하면 요한이 성령에 감동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환상을 보고, 음성을 듣고, 그 모든 내용을 일곱 교회에게 보내라는 지시를 받은 때부터 이미 계시록의 내용은 현재적이며 미래적으로 적용되고 있는 셈입니다. 따라서 본서의 내용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들을 향해 항상 현재적이며 미래적인 예수님의 메시지로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19절에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에 대한 표기는 ‘네 본 것 곧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로 바꿔서 해석하는 것이 본서 전체 문맥의 흐름상 자연스럽고 내용 전개와 해석에도 무리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때문에 현대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요한계시록은 비록 과거의 기록일지라도(AD 81-96), 적용에 있어서는 늘 현재적이며 미래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당위성이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결론부분에서 1장에 계시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12-16절)을 총체적으로 함축시켜 설명한 내용이 20절입니다. “네 본 것은 내 오른 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본문의 요지는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와, 주님의 몸 된 교회와, 주께서 친히 세우신 교회의 지도자들이 하나로 연합돼 있다’는 사실입니다. 곧 삼자(三者)의 일체성과 통일성과 연합성 말입니다. 이는 요한계시록 전체의 사상을 함축하고 있는 논지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계시록 전체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종말론적 완성을 통해 성취되는 교회의 미래적인 완성과 이를 통한 임마누엘 사상의 최종 성취에 집중된다고 하겠습니다(계 21:1-7). 



  그렇다면 일곱 별과 일곱 금 촛대의 상징 속에 함의된 삼자간의 일체성과 통일성 및 연합성의 원리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교회는 주님의 피 값으로 사신 바 된(행 20:28) 주님의 몸으로 비유됩니다(엡 1:23, 4:12, 16, 5:30, 골 1:18). 따라서 교회는 주님을 머리로 구속받은 성도들이 지체로 연합돼 함께 몸을 이룸으로 유기적체적인 생명공동체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로 이 때 교회의 생명적 활동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생명력이 말씀을 통해 교회에 공급되는 방식을 통해서 가능합니다(벧전 1:23). 그런 의미에서 말씀의 진위성 여부는 교회의 진위성 여부를 가름하는 결정적인 잣대로 기능합니다. 말씀의 순수한 전파를 교회의 제 일 표지로 선정했던 종교개혁자들의 관점이 이상의 원리에 근거합니다. 말씀의 순수한 전파야말로 바른 교회를 이루는 첩경입니다. 따라서 말씀의 왜곡과 변질은 곧바로 교회의 타락과 직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때 말씀의 순수한 전파는 이에 상응하는 순종력의 발휘를 수반합니다(약 2:17, 22, 26절). 교회가 말씀에 순종하는 방식을 통해서 비로소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돼 있다는 사실과 구원론적인 천상의 통치를 적극 받아 누린다는 의미가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생명력이 말씀을 통해 교회공동체 속에 공급되는 것이 가능할까요. 다름 아닌 교회의 머리되시며 주인 되신 예수님께서 친히 교회 중에서 은사를 통해 택해 세우신 주님의 사자 곧 오늘날의 목사들을 세우시는 방식을 통해서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목사들을 교회 가운데 세우시고 이들을 통해 교회에게 말씀을 공급하시는 방식으로 부활하신 생명을 수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의 생명이 말씀에 철저히 의존돼 있기에 말씀의 수종자인 교회의 사자들로 하여금 말씀의 본의를 밝히 해명해 전달하는 방식으로 당신의 몸 된 교회를 건강하게 세워나가게 되는 것입니다(엡 4:11-13). 



  이런 관점에서 말씀의 수종자인 목사가 세워지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교회를 통해 부름을 받게 되는 것이 순리입니다. 사사로운 이유와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자의적으로 되어지는 것은 편법행위일 수 있습니다. 비록 현실적으로 후자의 경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를 정상적으로 수용하기에는 교회 현장에서 많은 문제가 야기되는 것 또한 엄연한 현실임을 감안할 때, 모든 수단이 동일한 목적을 정당화시킬 수는 없다는 사실을 새삼 재확인하게 됩니다. 교회의 변질과 타락이 일차적으로 말씀과 깊이 연루돼 있다고 할 때, 무자격 목회자는 말씀의 진위를 분별하는 데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을 테니 말입니다. 따라서 바른 지식/바른 신앙/바른 교회/바른 목회는 상호 유기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돼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상으로 일곱 별과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 속에 내포된 삼자간의 연합성과 일체성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한 마디로 요한계시록의 중심주제는 구속사의 진행 속에서 기독론과 구원론이 교회론을 중심으로 통일돼 나타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계 21:1-7).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꽃이며 임마누엘 신학의 정수(精髓)임이 재삼 확인됩니다. 언약적 구속사의 원천인 창세 전 삼위 하나님의 구원협약의 중심사상이 다름 아닌 교회론에 집중돼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엡 1:3-14) 요한계시록의 결국이 교회론의 종결로 마감될 것임을 충분히 전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송영으로 구속사의 대단원이 막을 내린다는 사실을 함의합니다. 주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고 선언하시는 말씀(계 22:13)의 본의가 이런 사실에 대한 구체적인 확증이 아닐 수 없습니다.



  Ⅲ. 결론



  1장은 본 요한 계시록이 당시 로마 속령인 소아시아에 위치했던 일곱 교회에게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임을 선언합니다. 당시 일곱 교회는 로마의 도미티안 황제의 기독교 박해정책의 시행으로 신앙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서는 죽음까지도 불사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사도요한 또한 당시 에베소 교회를 중심으로 말년의 사역을 담당하고 있던 중 로마정부의 기독교 박해의 일환으로 밧모 섬에 유배되었음을 본서 1장의 서론 부분을 통해 충분히 추정됩니다.



  당시 1세기 교회들이 처한 환란과 핍박의 상황은 대개가 대동소이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동시에 경계를 촉구함으로 신앙적 위경가운데서도 믿음을 잃지 말 것을 독려하기 위해 기록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를 위해 지상교회의 실체인 천상의 교회와 승리한 교회의 미래적인 모습을 환상을 통해 반복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런 시도(試圖)에는 “현재의 고난이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롬 8:18)는 말씀과 “우리의 잠시 받는 환란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게 함이라”(고후 4:17)는 말씀의 본의를 다양한 상징과 묵시를 통해 시청각적으로 보여줌으로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계시의존적이고 섭리의존적인 신앙관을 확립시켜 주려는 의도가 역역합니다.  



  이런 사실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다양한 묘사를 통해 설명하는 내용들을 통해서도 확인됩니다. 이를테면 “알파와 오메가요,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오실 전능하신 분”으로, “전에 죽었다가 세세토록 살아계셔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분”으로 설명합니다. 이는 한 마디로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성과 심판권을 강조함에 다름 아닙니다. 따라서 교회의 현재적인 형편이 어떻든지 간에 그 결국은 주님에 의해 주도됨으로 교회의 종말론적인 승리와 구속사의 최종성취가 보장된다는 사실을 확증합니다. 나아가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드시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분’으로 소개하심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현재적인 사역을 강조함으로 모든 시대의 교회를 향해 위로와 격려 및 시종일관한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살아갈 것을 촉구하고 계심을 확인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승리는 교회의 현재적이며 미래적인 승리의 보증이며 천상적인 능력의 원천으로 기능합니다.  

             

     













                                                                     

                                                                                                  

                        

   





출처 : remnant7000
글쓴이 : sky blu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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