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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2

[스크랩] 요한계시록 구속사(제 20 강) : 재림의 소망과 종말적 신앙관(계시록 최종 강의안)

제 20 강

 

재림의 소망과 종말적 신앙관

(계 22:6-21)

Ⅰ. 도입

본문은 요한계시록 전체의 결론에 해당되면서 서론격인 1장과 여러 면에서 병행관계를 형성합니다. 이런 사실은 ‘속히 될 일을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에게 복의 보장’, ‘때의 긴박감’,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호칭의 공유’ 등 상호 중복되는 유사한 표현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로 보건대 대부분의 필자들이 그렇듯이 요한은 계시록의 결론 부분을 기록하면서 서론 부분을 상당이 의식하면서 서술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재림의 긴박성을 강조하고 종말적 교회공동체의 승리를 확증시켜 줌으로 재림에 대한 간절한 소망과 종말적 신앙관을 확립해 믿음의 인내로 신앙의 정절을 지켜나가게 하기 위한 요한의 의도로 여겨집니다.

특별히 계시록의 전체 구조상 이중적 결론에 해당되는 음녀 바벨론의 멸망(17:1-19:10) 과 신부 새 예루살렘의 등장(21:9-22:5)과 유관한 구절들 사이에 나타나는 병행적 관계를 살펴보면 요한의 의도성이 한층 엿보입니다. 일례로 음녀 바벨론의 멸망기사를 다루고 있는 도입부분(17:1-3)과 결론 부분(19:9-10)은 이에 대응하는 어린양의 신부 새 예루살렘 성을 소개하는 도입부분(21:9-10)과 결론 부분(22:6-9)에서 문맥상 상당한 유사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더구나 이런 문맥적 유사성은 요한에 의해 시도된 다분히 의도적인 구성이란 사실이 확인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계 22:6-9은 구조상 새 예루살렘 환상(21:9-22:5)의 결론부분이면서 계시록 전체 결론(22:6-21)의 도입부분에 해당됩니다(이필찬, 938-939).

 

Ⅱ. 전개

 

본문은 본서 전체의 결론 부분으로 다소 산만하게 구성돼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본서를 마감하면서 전하고자 하는 주제는 분명합니다. 본서에 기록된 예언의 신실성에 대한 확증(6-7, 16, 18-19절)과 그리스도의 재림의 긴박성(7, 12, 20절),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로의 초대와 경고(11-12, 15, 17-19)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호크마 종합주석). 특별히 본장의 마지막 부분은 예수님의 임박한 재림의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는 로마의 가혹한 핍박아래 있었던 일세기 교회공동체의 간절한 바람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21세기 현대교회 성도들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의 내용이 주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를 포괄하면서 교회시대 전체를 향한 예언서로 기능하기 때문입니다.

 

1. 본서에 기록된 예언의 신실성에 대한 확증

6절은 본서의 예언의 말씀이 신실하고 참된 사실을 천사의 고지를 통해 확증시켜 줍니다. 이는 계 19:9, 21:5에서도 발견되는 말씀으로 본 예언서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기원되었음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본 예언서는 완전하며 자충족한 계시입니다. 이런 사실이 18-19절에서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는 경고성 선언을 통해 절대화됩니다.

 

10절은 ‘때가 가까우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말씀은 동일하게 종말적 예언을 담고 있는 다니엘서와는 대조를 이룹니다(단 8:26, 12:4). 이런 대조는 종말의 시점에 대한 두 예언서 간의 해석과 적용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문제일 뿐입니다. 본질에선 다를 바 없습니다. 계시록은 종말의 도래를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십자가의 구속사역에 근거를 둡니다. 그런 의미에서 종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이미 시작되었고 재림으로 완성될 것을 시사합니다. 이처럼 계시록은 복음서의 관점과 동일하게 이중적인 종말의 성격을 반영시킵니다. 반면 다니엘서의 종말적 개념은 주로 재림사건과 밀접하게 연관됩니다(단 12:1-4, 2:44). 다시 말해 초림과 연관된 종말개념이 재림의 종말개념 속에 묻혀서 단일한 종말개념으로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마치 두 산이 중간의 먼 간격에도 불구하고 정면에서 볼 때 중첩돼 보임으로 마치 산이 하나인 것처럼 보이듯이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계시록의 예언의 말씀은 인봉해져서는 안 될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때가 이미 찼다는 선언입니다(10절). 다니엘서에 비해 많은 시간이 지났습니다. 마침내 구약 예언의 실체이신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종말의 구원의 비밀이 이미 드러났고 성취되었습니다(엡 1:8-10, 3:1-6, 골 1:26-27). 인봉한 책은 어린양의 구속으로 이미 열려진 책이 되었습니다(계 5:5-6). 따라서 초림에 근거해 재림의 때가 임박해 있습니다. 지금은 인봉함의 시기가 아닙니다. 더욱 알려서 재림에 대비해야 할 긴박한 시기입니다(7, 12, 20절).

 

둘째로 이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들에게 복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1:3). 본 절의 말씀과 관련해 본서 초두에 언급된 복의 약속(1:3)이 22:7에 와서는 ‘읽는 자와 듣는 자’에 대한 언급이 생략된 채, 곧바로 지키는 자에게 복이 있을 것을 강조해 기술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계시록에 수록된 예언의 말씀이 22:5절로 이미 일단락되었다는 반증입니다. 즉 계시록에 대한 읽고 듣는 일은 22:5로 다 끝났기 때문에 이제 할 일은 읽고 들은 바의 내용을 지키는 일만 남았다는 의미입니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 1:22).

 

계시록의 말씀을 지켜 행함으로 이기는 자에게 주실 복과 상급에 대해 주님께서는 2-3장의 일곱 교회들을 향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완성된 새 예루살렘 교회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누리게 될 영적 축복들을 총체적으로 가리킵니다. 22:1-5은 이런 영적 축복의 실상을 첫 창조의 목적이 온전하게 성취된 에덴의 회복된 삶의 내용을 근거로 새 예루살렘이 향유하게 될 종말적 축복의 내용을 기술합니다. 이와 관련해 주님께서는 선언하십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고 말입니다(12절). 이 말씀은 11절의 내용을 받으면서 각자가 행한 대로 보상을 받게 될 것을 분명하게 약속합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보상의 개념은 물리적인 복과 상급의 개념이 아닙니다. 구속사와 연관된 영적인 내용입니다. 이는 종말의 교회시대를 어떻게 살았느냐에 대한 보상의 개념으로 크게 구원과 심판이란 맥락 속에서 언급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런 사실은 두 증인의 상징을 통해 교회의 복음사역이 종결되었을 때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관련된 24장로들의 찬양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됩니다. 11:18입니다.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임하여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무론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본문에서 세상 나라가 하나님 나라가 되는 종말의 때(11:15)에 두 가지 종말적 사건이 발생하게 될 것을 분명히 기술합니다. 그것은 짐승에게 속했던 악한 자들(22:11절상)에게는 심판이, 성도들에게는 상이 수여된다고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성도들이 받게 될 상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자체 문맥 속에서 악한 자의 보응이 심판이라면 선한 자(성도)의 보응 곧 상은 구원이 아니겠는지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성된 구원의 삶(계 22:1-5)을 실질로 누린다는 것은 복 중의 복이며 상급 중의 상급이란 사실을 계시록은 악한 자의 종말적 심판과 대응시켜 시종일관하게 강조합니다. 12절에서 성도의 상급수여와 더불어 13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호칭을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 시작과 끝’으로 기술하는 것은 주님께서 하나님과 더불어 역사의 주관자가 되심을 강조함으로 곧 상급 수여의 당사자가 되심을 가리킵니다(11:18).

 

마지막으로 극심한 환난과 핍박가운데 있었던 일세기 교회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미래에 대한 확실한 소망으로 믿음의 인내를 가지고 살아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런 이유로 본서에는 이기는 자에게 주어질 보상의 약속과 배교자 및 악한 자들에게 임할 임박한 진노의 심판이 거듭 강조됩니다. 특별히 14절은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의 복에 대해 보증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효로 죄사함을 받고 의롭게 된 자들이 계속 말씀의 통치 안에서 살아가는 삶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내용입니다. 이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이 계속해서 약속됩니다. 곧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해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된 자들이 누리게 될 신령한 복의 실질이 이렇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종말적 교회공동체에 속한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들을 일컫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여기서 생명나무에 나아간다는 것은 회복된 에덴에서 영생의 삶을 누린다는 것을,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는다는 것은 종말적 교회공동체를 상징하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백성이 되었음을 보증하는 내용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상의 참 된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이미 회복된 에덴과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진 종말적 교회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존재하는 자들입니다. 반면에 15절은 정반대의 내용을 소개합니다. 이들은 성 밖에 존재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의 정체는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본질상 21:8에 소개된 자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짐승에 속해 불못에 처해질 자들입니다. 새 창조의 유업을 상속받지 못할 자들입니다. 이로 보건대 12절에서 약속한 각 사람의 행위에 따른 보상의 개념은 구원과 심판이라는 사실이 재확인됩니다. 이상의 내용들과 관련해 말씀에 참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속성은 당신의 모든 약속을 반드시 성취하실 것입니다. 이런 사실이 자신을 다윗의 뿌리와 광명한 새벽별로 묘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확증됩니다(16절). 이는 메시아사상에 대한 구약의 전망과 기대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전히 성취되었음을 시사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

 

주님께서는 본서의 계시의 중요성과 성취의 신실성을 가감승제(加減乘除)에 대한 절대금지를 경고하심으로 재차 강조하십니다. 누구든지 본서의 계시에 더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이 책의 재앙을 더하실 것이며, 누구든지 본서의 계시를 제하는 자들에게는 생명나무와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할 것이라고 말입니다(22:18-19). 이는 요한계시록에 대한 인위적인 변환이나 개정을 금함으로 하나님의 계시의 완전성과 자충족성을 보존케 하며 동시에 사사롭게 악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이단이 아닌 이상 말씀의 가감승제가 이 시대에 어떤 방식으로 가능할까요. 하나님을 정상적으로 신앙하는 현대교회 속에서 누가 감히 의도적으로 말씀을 더하거나 뺄 수 있단 말인가요. 원칙상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본의(What the Bible Says)와는 무관하게 자의적(恣意的)인 해석과 편의적인 적용을 시도한다면 이는 본질상 말씀의 가감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하나님의 본의와는 무관한 해석과 적용이 될 테니까요. 가령 솔로몬의 성전건축을 이 시대의 성전건축의 근거와 모델로 삼아 축복을 보증한다거나, 솔로몬이 드렸던 소위 일천 번제(사실은 일천 마리의 희생 제물이었음, 대하 1:6)를 이 시대의 일천 번의 헌금으로 변형시켜 준수케 함으로 지성감천주의적인 신앙관을 심어준다거나, 야베스의 기도(대상 4:10)를 축복을 보장받는 기도의 사례로 강조한다거나, 헌금의 양과 축복의 정도는 정비례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고후 9:6) 설교함으로 은연중에 헌금의 필요성을 강조한다면 이런 방식이 다름 아닌 현대판 말씀의 가감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해석은 곧 바로 신앙관 형성과 직결됩니다(롬 10:17). 따라서 바른 지식은 바른 신앙관과 바른 교회관 및 바른 목회관 정립의 관건입니다.

 

2. 예수님의 재림의 약속과 기원

지금까지 본 예언서의 신실성과 신뢰성의 확증과 관련해 진술하던 요한은 주님의 마지막 약속의 말씀을 소개합니다. 그것은 큰 환난과 핍박 중에도 주님을 향한 일편단심의 신앙의 절개와 믿음의 정절을 지킨 신실한 성도들의 피를 신원해 주시기 위해 주님께서 ‘내가 속히 오시겠다’는 말씀의 선언입니다(20절). 주님의 재림에 대한 약속은 초림예언의 성취에 근거해 그 확실성이 보증됩니다. 따라서 속히 오시겠다는 의미는 빨리라는 시간적인 긴박성보다는 ‘틀림없이’라는 언약성취의 실현성이 강조되는 표현이라고 봅니다.

주님의 재림약속에 대해 요한은 ‘아멘, 주 예수님 어서 오시옵소서’(Amen, Come, Lord Jesus)라고 화답합니다. 22장에서 주님은 ‘속히 오시겠다’( I am coming soon)는 약속을 세 번에 걸쳐 반복해 주십니다(7, 12, 20절). 이처럼 주님은 자신의 재림을 연속적으로 강조해 주심으로 고난 중에 있는 일세기 성도들을 위로해 주실 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의 성도들을 향해 소망 중에 믿음의 확신과 인내를 가지고 정진할 것을 권면해 주십니다. 실로 ‘마라나타’(maranata)의 재림신앙은 진리 안에서 복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의 정절을 지켜나가는 모든 신실한 성도들의 동일한 기도의 제목이며 소망이고 인내의 원천으로 기능합니다.

요한은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의 축원의 기도로 계시록의 대단원을 마감합니다(22:21). 본 절의 ‘주 예수의 은혜’란 개념은 핍박 가운데 처해 있는 일세기 성도들과 보통의 성도들이 감지하는 느낌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을 줄 압니다. 전자에게는 피부에 와 닿는 생생한 현장감으로 인해 확신과 능력과 위로와 소망으로 다가오는 반면, 후자에게는 자칫 형식적이고 의례적이며 관념적으로 비쳐질 수 있습니다. 1세기와 21세기란 시대적인 괴리감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영적 빈곤감이나 신앙적 위기감을 충분히 감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은 창 3:15 속에 예언된 두 세력 간의 적대적 투쟁관계의 연장선상에서 정의돼야 합니다. 아이의 승천으로 상징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으로 구속사역은 성취되었고 본질상 사단은 패배했을지라도 짐승에게 위임된 사단의 통치권은 동일한 양상으로 여전히 발휘되고 있기 때문입니다(계 13:1-2). 따라서 하나님을 신앙한다는 것은 근본에서 신분과 소속과 가치관이 바뀌었음을 전제합니다. 마귀의 자녀에게서 하나님의 자녀로,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로, 자기중심적이고 현세지향적이던 가치관이 하나님 중심적이고 천상지향적인 가치관으로 말입니다. 이런 식의 총체적이고 전인적인 변환으로 인해 성도가 세상을 살아간다는 의미는 하늘 본향을 향해 순례의 여정 길을 떠나는 나그네와 행인의 삶으로 풀이됩니다(히 11:13-16). 따라서 한시적으로 마귀에게 허락된 세상(눅 4:4-6, 요 12:31)은 원리상 성도를 핍박하게 돼 있습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한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고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 이런 이유로 성도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경험하게 되는 다양한 고난과 핍박은 역설적으로 자신의 신앙의 현주소와 정체성 및 믿음의 진위성 여부를 가름하는 잣대로 기능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주님의 은혜는 구원뿐만이 아니라 성도의 전 신앙여정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관장하는 천상적 능력이요 신앙생활의 동력으로 작용합니다(고전 15:10). 성도의 삶의 성격은 은혜로 거듭나고 은혜로 살아가며 은혜로 마감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풀어 주시는 구원의 은혜가 초림사역과 관련된다면 구원의 완성을 향한 은혜의 역사는 재림을 통해 실현될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교회 성도들도 일세기 교회 성도들과 동일한 심정으로 오늘도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마라나타의 종말적 재림신앙에 근거해 살아가는 자들로 존재합니다.

 

Ⅲ. 결론

 

요한계시록은 이스라엘의 종말적 회복으로 말미암는 메시아 왕국의 도래를 교회의 종말적 승리와 축복으로 재해석하는 가운데 새 창조 질서 속에서 새 예루살렘 표상을 통해 묵시문학적으로 기술합니다. 이 과정에서 창 3:15의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예언된 두 계열 간의 적대적인 투쟁관계를 중심 테마로 구속사의 영적 진전을 소개합니다. 마침내 아이의 승천과 용의 패배 및 무저갱의 감금이라는 표상을 통해 여자의 후손언약은 성취의 절정을 이룹니다. 이 과정에서 용은 자신의 보좌인 통치권을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에게 위임해 줌으로 짐승을 통해 자신의 통치권과 영향력을 계속 행사합니다. 이후 짐승이 용의 활동을 대리적으로 수행하면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회를 핍박하지만 백마 탄 자로 재림하신 예수님에 의해 일망타진 되면서 악의 삼위일체로 불리는 용과 두 짐승은 이들의 추종세력들과 더불어 마침내 불못의 심판에 처해집니다. 반면에 악의 세력들의 총체적인 멸망과 심판은 자연히 교회의 종말적 승리와 완성을 보증합니다. 이런 사실이 새 하늘과 새 땅의 출현과 새 창조 세계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새 예루살렘 표상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됩니다. 종말적 교회공동체를 상징하는 새 예루살렘 표상은 하나님과 어린양이 사람들 가운데 거하신다는 임재와 연합과 일치를 의미하는 것으로 곧 성전계시의 완성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새 하늘과 새 땅과 일치된 새 예루살렘에는 가시적인 성전이 없습니다(21:22). 아니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어린양이 새 예루살렘을 통해 성전의 실체로 존재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새 예루살렘은 첫 창조의 목적인 에덴의 온전한 회복과 동질성을 띠면서 하늘과 땅이 통일된 현장입니다. 첫 창조의 목적이 새 창조의 질서 속에서 온전히 회복되고 완성된 현장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계 22장의 결론과 축복기도는 동시에 요한계시록 전체의 결론의 성격을 띠기도 합니다. 그만큼 22장은 서론의 일부분과 내용상의 중요한 대목들을 취사선택해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논증합니다. 무엇보다도 계시의 신뢰성과 관련해(6절) 계시의 전달자가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며(13, 16절) 계시의 수납자가 요한인 사실을 밝힘으로(8절) 요한계시록의 진리성과 진정성 및 예언의 실현성을 강조합니다. 재림의 긴박성과 관련해서도 세 번에 걸쳐 증거함으로(7, 12, 20절) 성취의 확실성을 강조합니다. 주님의 재림은 이기는 자에게 약속한 복과 상급을 구원과 심판이라는 이중적인 관점에서 기술하면서도(11-12절) 결코 복음에로의 초청에 인색하지 않습니다(17절). 이는 요한계시록의 중심주제가 악의 종말적 패배와 멸망을 간과하지 않으면서도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은 자들인 교회공동체의 종말적 완성과 승리를 상대적으로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종말적 교회공동체를 상징하는 새 예루살렘이 회복된 에덴의 삶을 향유하는 것을 통해 교회의 미래상을 조명해 줍니다(22:1-5). 이런 사실은 새 창조의 질서가 첫 창조의 목적을 완전하게 회복시킨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곧 새 예루살렘의 삶의 성격이 옛 에덴의 삶의 반영인 것을 의도적으로 강조합니다. 이는 창세전에 수립하셨던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엡 1:4-6)이 새 예루살렘으로 표상된 종말의 교회공동체와의 연합과 일치를 통해 완벽하게 성취되었음을 시사합니다(21:1-3, 22절). 이런 사실은 또 다른 관점에서 구약의 구속사를 통해 일관되게 진행돼 나온 성전계시와 에덴의 종말계시가 새 예루살렘 안에서 완전한 모습으로 회복되고 완성된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새 예루살렘 표상 안에는 구약의 성전적 요소와 에덴적 요소가 동시적으로 내재돼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마침내 새 예루살렘 안에서 하늘과 땅이 통일됩니다. 에덴이 회복됩니다. 이것이 새 하늘과 새 땅의 실체입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실현될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양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은 어떤 열악한 환경가운데서도 주님의 재림을 확신하며 소망하는 가운데 오늘도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마라나타의 심정으로 기도할 것을 요구받습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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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remnant7000
글쓴이 : sky blu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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