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 강
백마 탄 자의 등장과 짐승의 멸망
(계 19:1-21)
Ⅰ. 도입
19장은 17-18장에 소개된 음녀 바벨론의 심판과 멸망 기사의 연장선상에서 하늘에 속한 승리자들의 찬양(1-5절)과 어린양의 혼인잔치(6-10절), 그리고 본질상 재림하신 예수님을 상징하는 백마 탄 자의 진영과 짐승의 진영과의 종말적 전쟁기사로 구성됩니다(11-21절).
사실상 17-18장에 기록된 음녀 바벨론의 멸망기사는 세상가운데 역사하는 악의 세력을 총칭하는 바벨론의 멸망을 소개한 내용으로, 큰 성 바벨론의 멸망은 필연적으로 일곱째 천사가 대접재앙을 공기(공중) 중에 쏟음으로(16:17, 엡 2:2, 6:12) 악의 세력의 본거지가 초토화된 심판사건에 근거합니다. 따라서 악의 본산인 ‘공중’의 진멸에 근거해 사단의 세력을 총체적으로 함의하고 있는 음녀 바벨론의 멸망이 17-18장에 소개되고, 이어서 두 짐승의 멸망기사(19:19-21)와 용의 멸망(20:1-3, 7-10절), 마지막으로 죽은 자들로 묘사되고 있는 짐승을 경배하며 추종하던 불신자들이 백보좌의 심판에 처해지는 내용(20:11-15)이 보다 미시적인 관점으로 계속해서 기술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19:1-10에 소개된 하늘에 속한 승리자의 찬양과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소개하는 도입부분은 17-18장의 바벨론 멸망사건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음을 문맥을 통해 확인하게 됩니다.
Ⅱ. 전개
사단의 세력을 총체적으로 함의하고 있는 17-18장에 소개된 음녀 바벨론의 심판과 멸망기사에 근거해 19장은 그 동안 용을 대신해 사단의 왕권을 대리적으로 수행해 온 두 짐승의 멸망사건을 중심으로 기술합니다. 이 과정에서 요한은 하늘에 속한 승리자들의 찬양과 혼인잔치의 당위성 및 예수님의 재림의 뉘앙스를 담고 있는 백마 탄 자의 등장을 소개합니다.
1. 하늘에 속한 승리자들의 찬양(1-5절)
음녀 바벨론의 심판과 멸망 선언에 뒤이어 요한은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을 듣게 됩니다(1절). 찬송의 요지는 성도에 대한 구원의 능력이 하나님께 있으며, 음행으로 땅을 더럽힌 바벨론에 대한 심판의 정당성과, 심판의 동인이 순교자들의 신원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란 사실에 집중됩니다. 여기서 하나님께 찬양 드리는 하늘에 속한 허다한 무리의 정체는 이미 4-5장에 소개된 찬양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듯이 24장로와 네 생물과 수많은 천군천사들로 구성돼 있음을 넉넉히 추정케 됩니다. 이런 사실은 찬양의 당사자들을 소개하고 있는 4절이 24장로와 네 생물을 소개하는 것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영광과 공의로우신 심판을 찬양하며 송축하며 감사드릴 수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과 이들의 구원으로 인해 죄의 저주로부터 회복되기를 학수고대하는 피조물들일 수밖에 없음을 성경은 분명하게 증거합니다(롬 8:19-22). 이런 의미에서 1-5절에 소개된 허다한 무리의 찬양은 18:20에서 성도들을 향해 바벨론의 멸망에 대해 즐거워하라고 요청하고 있는 내용에 대한 반응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3절에서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는 표현은 음녀 바벨론의 완전하고 영원한 멸망을 은유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사 34:10에 소개된 에돔의 멸망에 대한 설명을 배경삼고 있습니다.
4절은 1절의 허다한 무리의 찬양에 이어 24장로와 네 생물의 찬양이 소개됩니다. 유사 이래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을 상징하는 24장로와 피조물을 대표하는 네 생물이 허다한 무리의 찬양에 아멘 할렐루야로 화답하는 가운데 보좌로부터 음성이 들려옵니다.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무론대소하고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하더라”(5절). 본문은 찬양의 대상이 하나님이신 사실을 분명히 확인시켜 줍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구속사의 경륜을 총체적으로 주관하시며(엡 1:4-6) 그 일환으로 바벨론의 멸망 또한 성취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 찬양의 당사자들로 네 부류가 소개됩니다. 하늘의 허다한 무리, 24장로, 네 생물, 그리고 하나님의 종들로 표현된 자들입니다. 네 생물이 피조물을 대표하는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 세 부류는 경우에 따른 표현상의 차이가 있을 뿐, 본질상 하나님의 택함 받은 성도들 곧 교회공동체를 총체적으로 가리키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할 수 있는 자들은 그들이 순교당한 성도이든, 순교를 각오하고 믿음의 정절을 지킨 자들이든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로 총칭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어린양의 구속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덧입은 자들의 공통적인 관심사는 하나님의 사랑에 빚진 자의 심정을 가지고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감사하고 그 분의 기뻐하시는 뜻을 좇고자 하는 무익한 종의 심정을 발휘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눅 17:10). 이 과정에서 현대교회가 한 가지 유념할 것이 있습니다. 무익한 종의 심정과 고백 속에 이 시대의 기독교인들이 보편적으로 표출하고 있는 기복적이며 보상심리적이고 지성감천주의적인 신앙의 모습과 태도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인간의 궁극적인 필요인 죄와 사망과 심판과 지옥의 영벌로부터 은혜로 구원받은 사실에 근거해 계시의존적인 신앙관을 정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원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정당하게 인식하고 평가하는 자들에게 구원은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복이요 최상의 상급으로 인식되기 마련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구원+알파’의 신앙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구원<알파의 공식에 입각한 기독교 신앙이란 본질상 성립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제사보다 젯밥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는 신앙이란 근본적으로 이교도적인 우상숭배 신앙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며 영원토록 하나님으로 즐거워하며 기뻐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만을 좇는 말씀중심의 신앙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제자도의 첩경이 자기부인과 자기포기 및 자기 십자가까지도 지고 좇아야 한다(마 16:24)는 의미가 이런 사실과 원리상 직결됩니다.
2. 어린양의 혼인잔치(6-10절)
요한은 환상의 장면이 바뀌면서 또 다른 음성을 듣습니다(6절). 이번에 들리는 음성은 단순히 1절에 소개되었던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이 아닙니다.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소리(1:15) 같기도 하고, 큰 뇌성(14:2-3) 같기도 한 삼중적인 음성을 듣습니다. 이는 1-5절의 찬양에 비해 더욱 장엄하고 웅장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찬양의 핵심주제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통치와 주재권의 선언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바벨론으로 상징된 사단의 총체적인 세력이 심판을 받아 멸망당하게 된 것은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이 최종 완성된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로 말미암는 왕적 통치권이 정상적으로 시행되기에 이르렀다는 선언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물론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와 교회의 종말적 승리는 21-22장을 통해 소개됩니다. 그러나 바벨론의 멸망 선포와 더불어 사실상 하나님의 왕적 통치권은 시행된 것이나 다름없음을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신약교회의 성도들이 아직 미래의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는 도래하지 않았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이미 도래된 현재적 하나님 나라에 소속돼 그 실질을 현실적으로 소유해 누리는 것을 통해 미래적인 삶을 이미 보장받고 있다는 사실과 동일한 원리 속에서 말입니다.
6-8절의 찬양은 세 가지 사실에 집중됩니다. 주된 찬양의 주제는 하나님의 왕적 통치의 때가 마침내 도래했다는 사실입니다(6절). 이 사실에 근거해 나머지 찬양의 정당성이 제기됩니다.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근거한 어린양의 혼인기약이 이르렀다는 것입니다(7절). 이는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신부된 교회의 연합과 일치의 때가 찼음을 의미합니다. 전투하는 교회가 승리하는 교회를 향해 믿음의 경주를 마치고 마침내 새 창조의 질서 속에서 맛보게 될 주님의 영광에 동참하게 되었음을 시사합니다. 골 3:4입니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 셋째는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신부된 교회로 하여금 입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8절). 이는 음녀 바벨론이 금과 보석과 진주로 치장된 사치와 허영의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은 것과는 대조를 이룹니다(17:4, 18:16). 여기서 세마포 옷은 결혼예복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 절에서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의 의미는 성도의 옳은 행실이라고 해석해 줍니다. 그런가 하면 7:14에서는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하늘에 속한 흰 옷 입은 큰 무리의 정체성을 설명하면서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된 자들’로 소개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의롭게 된 자들을 일컫는 은유적인 표현입니다. 따라서 흰 옷을 가리키는 세마포의 의미는 계시록 전체를 통해 ‘구속함을 받아 의롭게 된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로 인해 핍박과 고난을 받는 가운데서도 믿음의 정절을 지킨 자들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자 곧 세속에 물들지 않음으로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그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은 신앙의 절개를 지킨 자들입니다. 오직 말씀에 순종하여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자원해 따라갔으며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무익한 종의 심정을 소유한 신실한 자들입니다. 이런 다양한 의미를 함의한 세마포와 관련해 사데 교회에게는 이기는 자에게 흰 옷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3:5).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는 흰 옷을 사서 벌거벗은 수치를 가릴 것을 강력히 촉구하셨습니다(3:18). 나아가 19:14에서는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탄자를 따르는 장면이 소개됩니다. 이상의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세마포를 입을 수 있는 유자격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덧입고 의롭게 된 교회가 말씀을 신앙과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믿음의 정절을 지켜 마침내 하늘에 입성한 승리한 교회공동체를 가리킴에 틀림없습니다.
9-10절은 천사가 요한에게 어린양의 혼인예식과 관련해 기록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는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이 상대적으로 복된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이 과정에서 7-8절은 교회공동체에 초점을 맞춰 어린양의 신부로 묘사합니다. 반면 9절에선 혼인예식에 초청받는 성도 개개인을 대상으로 삼습니다. 이는 동일한 대상을 경우에 따라 달리 표현하고 있을 뿐입니다. 주체를 객체화시킨 용법입니다(이필찬 800). 마치 여자의 후손언약(창 3:15) 속에 여자의 후손의 정체성이 경우에 따라 단수(예수님)적이며 동시에 복수(하나님의 백성)적인 개념으로 혼용되듯이 말입니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 성도에게 복 중의 복은 어린양의 신부로 어린양의 혼인예식에 초청을 받는 일입니다. 어린양의 혼인예식은 다양한 영적 의미를 함의합니다. 총체적인 관점에서 연합과 일치를 가리킵니다. 임마누엘 신학과 언약의 최종 완성 말입니다(계 21:2-3). 에덴에서 죄로 인해 훼손되었던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단절이 어린양의 구속 안에서 재결합과 일치가 회복된 사실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린양의 혼인예식은 본질상 에덴의 회복을 가리킵니다(22:1-5). 성전계시의 종말적 성취를 가리킵니다(21:22). 이는 새 언약의 종말적 성취인 구원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복음의 선한 싸움을 마치고 마침내 하늘에 입성한 교회의 최종 승리를 의미합니다(딤후 4:7-8). 하늘의 기업에 실제로 동참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부활의 생명인 영생의 실질에 참여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새 창조의 질서 속에 구원의 완성으로서 천상의 삶을 실질로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가 새 창조의 질서 속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21:1-2). 죄로 인해 파괴된 첫 창조의 질서가 새 창조의 질서 속에서 온전히 회복되는 것을 가리킵니다(롬 8:19-23). 하늘과 땅이 통일되는 것으로 하늘에서 이루신 것같이 하나님의 뜻이 이 땅 위에 실현되는 구속사의 최종 성취를 의미합니다(21:6).
이상 바벨론의 멸망환상(17:1-18:24)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통치의 시행 및 어린양의 혼인잔치(19:1-10)와 관련된 하나님의 말씀을 천사로부터 전해들은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에 압도돼 천사에게 경배하려 합니다(10절상, 골 2:18). 천사는 요한을 제지하며 자신 또한 예수의 증거를 받은 성도들과 동일한 하나님의 종인 사실을 전하며 경배의 대상이 아님을 분명히 밝힙니다. 더불어 하나님만이 경배의 대상임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하나님만이 경배의 대상이 되심은 본질상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과 구원자가 되심에 대한 고백의 결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음 안에서 창조주와 구속주로 고백하며 신앙할 수 있는 자들만이 진정한 경배와 찬양을 드릴 수 있습니다. 이들의 경배만이 신령과 진리성에 근거해 하나님께 열납 된다는 것이 성경의 진술입니다(요 4:24). 이런 관점에서 아벨의 제사는 신령과 진리로 드린 예배의 전형입니다(창 4:3-5). 여기서 신령의 정체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정립과 회복된 교제를 가리킵니다. 진리란 이런 사실을 가능케 한 동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에 접촉된 것을 말합니다(창 6:8-9). 다시 말해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사죄의 은총과 의롭다고 여김을 받아 하나님과의 바른 인격적인 관계가 정립된 자들의 예배가 열납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받으심 직한 예배의 정체성은 드리는 자의 의지에 의존되지 않습니다. 받으시는 분의 뜻에 부합되느냐가 관건입니다(롬 10:2-3, 마 7:21-23).
한편 천사는 경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신 사실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요한의 경배를 받을 수 없는 이유를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the Spirit of prophecy)이란 말로 대신합니다(10절하).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수종을 들고 있는 천사 자신도 요한이나 다른 제자들과 다를 바 없이 성령님의 역사를 좇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인의 사명을 담당하고 있을 뿐이란 사실입니다. 이런 이유로 천사나 요한이나 하나님의 종 된 신분으로 성령의 인도를 따라 본질상 동일한 말씀을 증거하는 것이기에 요한이 천사에게 경배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재차 강조합니다.
동일한 관점에서 복음의 증인으로 하나님의 종 된 목회자와 성도 간에 아무런 신분상의 차등이나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목회자는 성직자이고 제사장적 신분이며 교인은 일개 평신도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사고는 중세의 잔재일 뿐입니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은혜로 죄사함을 받고 의롭게 된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하나님의 소유된 친 백성들일 뿐입니다(벧전 2:9). 단지 교회의 출현과 더불어 허락하신 은사를 좇아 목사와 교사의 직임을 감당함으로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워나가는 일’에 일조하는 은사적 사명을 받았을 뿐입니다(엡 4:11-12). 이런 이유로 말씀의 수종자로 목회의 소명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데서 오는 존경의 대상은 될망정(딤전 5:17) 성도 위에 군림해 무소불위의 권세를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은 결코 주어진 바 없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오직 주님이실 뿐입니다. 성도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몸의 지체로서 머리의 통치를 받아야 할 공동운명체입니다. 이 사실과 관련해 신분상의 아무런 차별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회자는 강단에서 설교를 마치고 내려오는 순간에 성도의 일원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3. 백마 탄 자와 등장과 짐승의 멸망(11-21절)
본 절은 바벨론 멸망(17-18장)에 근거해 사단의 주체세력으로 용의 통치를 대리적으로 수행해 오던 두 짐승의 멸망을 소개합니다. 이는 최후의 심판장면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 과정에서 두 짐승의 심판(19:11-21), 용의 심판(20:1-10), 그리고 짐승의 추종자들에 대한 최종 백보좌의 심판(20:11-15) 내용을 순서를 따라 개별적으로 소개합니다.
백마 탄 자의 등장(11-16절)
요한은 하늘이 열리고 백마 탄 자의 모습을 환상을 통해 봅니다(11절상). 이미 4:1에서 하늘의 열린 문을 소개합니다. 이어서 11:19과 15:5에서는 하늘의 성전이 열린 사실을 기술합니다. 그리고 19:11절에서는 하늘 자체가 열렸다고 기록합니다. 특별히 하늘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4:1과 19:11의 표현은 구속사적 관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와 섭리역사의 발원지인 하늘과 관련해 전자는 하늘의 기능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이미 성취된 종말의 개념을, 후자는 앞으로 완성될 미래의 종말의 개념을 내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이팔찬, 816). 따라서 계시의 성격이 어느 시점을 가리키든 ‘하늘이 열렸다’는 것은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과 고난, 죽음, 부활, 승천의 전 과정을 포함하고 있는 구속사의 경륜과 밀접하게 연관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19:11에서 하늘 자체가 열렸다는 표현은 곧 진행될 백마 탄 자의 등장(예수님의 재림의 소극적 측면)과 관련해 구속사의 종말적 성취를 그만큼 완전하고 확실하게 보증한다는 의미가 강조됩니다. 이제 열린 하늘을 통해 종말적 구속계시의 절정이 소개됩니다. 요한은 이런 사실을 ‘보라’는 명령어를 사용해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킵니다(11절중). 드디어 환상의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그는 백마를 탔습니다(11절상). 문맥 속에서 백마 탄 자의 등장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불가분의 연관성을 가집니다. 재림의 뉘앙스를 띱니다. 그러나 본 환상의 강조점은 백마 탄 자의 재림 자체를 부각시키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백마 탄 승전한 장군의 등장을 강조함으로 짐승과 그의 추종자들을 심판해 멸망시키기 위한 전사(戰士)들의 대장으로 묘사하는 데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만일 재림 그 자체에 강조점을 두었다면 주님의 재림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시라”(계 1:7)든가,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24:3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 26:64) 등의 복음서의 표현을 사용함으로 보다 장엄하고 웅장하며 영광스럽게 묘사했을 것입니다. 대신 백마 탄 자가 피 뿌린 옷을 입었다든가, 그를 따르는 자들을 주님의 재림시 수종 드는 천사로 묘사하지 않고 하늘 군대로 설명하는 등이 재림보다는 종말적 전쟁과 심판을 수행하는 심판주와 승리한 장수의 이미지를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계시록 저자는 백마 탄 자의 정체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습니다. 대신 그의 정체성을 세 가지 이름(호칭)을 통해 소개합니다. 충신과 진실(19:11), 하나님의 말씀(19:13), 그리고 만왕의 왕과 만주의 주(19:16)로 기술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종말적 심판과 전쟁을 수행하시기 위해서는 재림이 불가피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백마 탄 자의 등장은 묵계적으로 예수님의 재림사건을 함의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재림의 적극적인 면을 기술하기보다는 소극적인 면을 소개한다고 보는 것이 바른 해석적 관점으로 여겨집니다. 다시 말해 재림에 대한 뉘앙스는 분명히 나타나지만 재림의 광경을 증거하는 데는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직접적으로 간청하고 있는 계 22:20절에서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고백하는 요한의 간절한 염원의 기도를 통해 이런 사실이 재확인됩니다. 그러므로 19장의 백마 탄 자의 등장(11절) 환상은 재림의 적극적인 장면이 아닙니다. 이미 17:14에서 소개된 짐승의 진영과 어린양의 종말적 전쟁기사와 내용적으로 동일한 사건에 불과합니다. 이처럼 17:14의 전쟁기사가 19:11-16에서는 백마 탄 자의 등장과 교회를 상징하는 세마포 입은 하늘 군대가 그 뒤를 따르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사실을 뒷받침 해 주는 단서가 17:14과 19:16절에서 동일하게 주님을 가리켜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17:14의 어린양과 19:11의 백마 탄 자는 동일 인물로 예수님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백마 탄 자의 등장을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해 구원의 완성과 교회의 승리라는 적극적인 측면에 조명을 맞추기보다 하나님과 교회의 적대 세력들에 대한 최종 심판과 멸망을 위한 종말적 전쟁수행이라는 소극적인 측면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 할 것입니다. 이상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한 구원과 심판이라는 이중적인 맥락 속에서 심판에 무게를 두고 진술하는 백마 탄 자의 세 가지 이름 속에 담긴 정체성에 대해 살펴봅니다.
첫째로 백마 탄 자를 충신(Faithful)과 진실(True)이라는 이름(칭호)을 가진 자로 소개합니다(11절하). 이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구속사역을 성취하시기 위해 일생을 죽기까지 순종하시며 범사에 본을 보이신 충성된 종의 삶을 총칭하는 표현입니다. 특별히 이 시점에서 예수님의 칭호를 ‘충신과 진실’로 강조한 것은 당시 핍박과 고난 가운데 있는 일세기 교회성도들에게 위로와 용기와 미래의 승리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심어주기 위함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는 원리에 근거해서 말입니다(롬 8:18). 백마 탄 자의 오심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심판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심판주는 예수님이십니다(요 5:22, 행 17:31, 살후 1:7-8). 예수님은 불신자들을 공의롭게 심판하실 것입니다(살후 1:8).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십니다(전 12:14, 계 20:11-12). 예수님의 심판은 전 인류를 영생과 영벌로 가를 것입니다. 계속해서 요한은 백마 탄 자의 눈이 불 꽃 같고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있는데 자기 밖에는 아는 자가 없다고 말하는 것을 봅니다(12절). 불 꽃 같은 눈은 1:14, 2:18과 병행을 이루면서 인간의 내면과 세상 만사와 만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시는 통찰력을 갖고 계심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실은 곧 그가 수행할 심판이 정당하며 공정할 것을 암시해 줍니다. 백마 탄 자의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다는 것은 용의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고(12:3), 짐승의 머리에 열 개의 면류관이 있는 것(13:1)과는 대조되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만왕의 왕으로서 만물과 만사의 주권과 왕권을 소유하고 계심을 증거해 줍니다. 자기 밖에 모르는 이름을 가졌다는 것은 예수님의 초월적 성격을 강조하는 것으로 그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능력과 권세와 속성을 갖고 계심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호크마 종합주석, 515).
두 번째로 요한은 백마 탄 자의 또 다른 이름을 봅니다.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한다는 것입니다(13절). 피 뿌린 옷을 입었다는 것은 옷이 피로 흠뻑 적셔졌다는 의미입니다. 본 환상은 이스라엘 백성을 대적하는 에돔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기술하고 있는 사 63:1-6을 배경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심판의 포도주 틀을 밟음으로 선혈이 내 옷에 튀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다’는 준엄한 심판의 이미지를 계시록 본문에서 심판주로 등장하고 있는 백마 탄자에게 적용시킴으로 이후 진행되는 두 짐승에 대한 백마 탄 자의 심판의 맹렬함과 철저함을 암시해 줍니다. 이 과정에서 백마 탄 자의 이름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칭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원상 요 1:1의 로고스와 동일한 단어를 사용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말씀이 인격화되고 성육신화 된 예수님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세상의 중보자로 오신 신인(God-Man)이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13절에서 말하는 말씀은 문맥 속에서 피 뿌린 옷과 연결돼 심판주이신 예수님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이후 전개되는 짐승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내용을 통해 확인됩니다. 백마 탄 자의 등장과 더불어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 탄 자의 뒤를 따릅니다(14절). 짐승을 심판하기 위한 최후의 일전에 참가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짐승과의 최후의 전쟁은 백마 탄 자가 독자적으로 수행합니다. 교회는 백마 탄 자의 승리에 동참해 그 승리를 더불어 만끽할 뿐입니다. 때문에 하늘 군대를 묘사하는 과정에서 이들이 갖고 있어야 할 무기에 관해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습니다. 이런 사실은 바벨론 심판과 멸망을 기술하는 과정에서 최후의 전쟁기사를 다루고 있는 어린양과 짐승 진영과의 종말적 전투내용을 통해 이미 확인된 바 있습니다(17:14). 사실상 이 두 전쟁기사는 본질상 병행관계를 이루면서 최후의 종말적 심판광경을 보여줍니다. 동일한 사건을 다른 관점에서 조명하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백마 탄 자를 뒤따르는 세마포를 입은 무리들은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신부의 자격으로 초청된 하늘의 교회공동체를 가리킵니다. 희고 빛난 세마포를 입은 사실이 두 무리 사이의 병행관계를 통해 동일집단인 사실을 확인시켜 줍니다. 따라서 19장에서 어린양의 신부와 백마 탄 자에 소속된 하늘 군대를 가리키는 동일집단의 이중적 정체성이 의미하는 바는 교회는 어린양의 신부이며 동시에 전투하는 교회원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의 군대란 사실입니다(엡 6:12). 이는 바울의 지적대로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롬 8:17)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기도는 만사형통의 열쇠라든가,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한다’(요삼 2절)는 요한의 바람이 혹자의 주장대로 삼중적 구원을 보증하는 말씀이 아님을 확인하게 됩니다. 참 된 기독교 복음은 결코 만사형통의 축복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이생과 내세의 축복을 아울러 보증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이비 복음입니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세상에서는 많은 환난을 겪어야 될 것을 강조합니다(행 14:22, 빌 1:29, 딤후 3:12, 벧전 4:12-13). 사단이 임금으로 통치하는 세상에서(요 12:31) 하나님의 백성 된 신분으로 나그네와 행인의 삶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히 11:13). 하늘 본향을 향해 먼 길을 떠난 순례자의 정체성을 띠고서 말입니다.
세 번째로 요한은 백마 탄 자의 피 뿌린 옷과 그 다리에 만왕의 왕과 만주의 주라고 쓰인 이름을 봅니다(16절). 이 과정에서 백마 탄 자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와서 그것으로 만국을 치고,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는 것을 목격합니다(15절). 여기서 15절은 백마 탄 자로 묘사된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적들을 심판하시는 모습이 세 가지로 진술됩니다. 먼저 입에서 나온 이한 검으로 만국을 친다는 것은 사 11:4에서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라는 말씀의 반영으로 계 1:16과 병행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이한 검 곧 말씀으로 만국을 심판하신다는 의미로 히 4:12-13의 말씀이 이런 사실을 결정적으로 뒷받침 해 줍니다. 히브리서 본문은 말씀을 살았고 운동력이 있는 좌우의 날 선 검으로 비유하면서 만물과 만사를 판단하는 기준이 됨을 설명합니다. 이로 보건대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날카로운 검이란 심판의 말씀을 가리킴이 확실합니다. 다음으로 만국을 철장으로 다스린다는 것은 시 2:9의 반영으로 계 2:27, 12:5과 병행합니다. 따라서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린다는 표현은 대적자들을 심판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과 심판의 확고부동함을 강조합니다. 이는 짐승과 그의 추종자들에 대한 심판과 멸망의 확실성을 증거합니다. 나아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는다는 철저한 심판과 관련된 묘사(14:19-20)는 사 63:1-6을 반영합니다. 포도주 틀을 밟는 과정에서 튀는 포도주 즙에 옷이 젖게 되는데 이런 정황은 19:13에서 백마 탄 자가 피 뿌린 옷을 입었다는 설명을 통해 잘 부합됩니다. 이처럼 만국이 포도주 틀에 밟혀 피를 흘리듯 백마 탄 자의 심판을 감당해야 하는 것은 그들 역시 성도들의 피를 흘리게 했기 때문이란 지적입니다(6:9-10, 16:6, 17:6, 18:24, 19:2). 이제 백마 탄 자의 세 번째 이름이 소개됩니다.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고 합니다. 이런 표현은 종종 하나님의 칭호로 사용되는데(단 2:37, 4:37, 딤전 6:15) 계 17:14과 19:16절에서 예수님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시됨을 가리킵니다. 이는 문맥 속에서 종말에 대적자들을 심판으로 파멸시키시고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왕적 권세를 시사합니다. 이와 관련해 17:14에서 바벨론의 주동세력인 짐승과 그의 추종자들을 진멸하시는 어린양의 전투는 종말적 심판의 성격을 띠면서 19:11에 등장하는 백마 탄 자와 칭호상 언어적 병행을 이루는 것을 통해 동일한 전쟁(19:19-20)기사를 기술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두 짐승의 멸망(17-21절)
본문의 중심 주제는 두 짐승과 그의 추종자들에 대한 심판과 멸망에 집중됩니다. 본문은 다시 두 부분으로 구분되는데, 겔 39:17-20에 배경을 둔 하나님의 큰 잔치 내용(17-18절)과 하나님의 큰 잔치 내용을 두 짐승에게 적용시켜 저들의 멸망을 기술하는 전쟁내용(19-21절)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큰 잔치(the great supper of God)에 관한 내용입니다(17-18절). 한 천사가 해 아래 서서(standing in the sun) 큰 소리로 공중에 나는 모든 새들을 하나님의 큰 잔치에 초대합니다(17절). 본문에서 하나님의 큰 잔치란 전쟁에서 죽은 수많은 병사들의 시체를 새들로 하여금 와서 먹으라는 내용입니다(18절). 이들 수많은 시체들은 전쟁에서 패한 병사들의 시신입니다. 17-18절의 하나님의 큰 잔치 기사는 구약의 겔 39:17-20을 배경 삼습니다. 에스겔서 본문은 바벨론 포로로부터 회복된 이스라엘과 마곡 땅에 살고 있는 강력한 이방의 연합군(겔 38:1-6)들과의 전쟁(7-8절) 기사를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본 전쟁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의 승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시기 위한 명예회복의 성격을 띤 전쟁임을 밝히십니다(겔 39:21-24). 계 19:17-18은 바로 이스라엘과 마곡과의 전투에서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이스라엘이 승리한 결과를 기록한 내용입니다. 본 전쟁은 이스라엘의 역사상 일어난 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에스겔서의 전쟁은 이스라엘의 미래적인 회복과 관련된 종말적 전쟁기사를 묵시문학적으로 소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에 정통한 요한은 바로 이 전쟁기사를 백마 탄 자와 두 짐승의 진영 사이에서 일어나는 종말적 전쟁을 통해 성취되는 것으로 적용시킵니다. 요한은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의 시체를 모든 새가 배부르게 먹더라’는 언어적 병행(18절하/21절하)을 통해 두 전쟁을 종말적 전쟁이라는 주제 속에서 상호 보완적으로 연결시킵니다. 그런 의미에서 겔 39:17-20의 전쟁기사를 계 19:17-18에서 재인용함으로 계 19:19-21의 아마겟돈 전쟁을 통해 성취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이스라엘의 종말적 전쟁을 통한 미래의 회복을 어린양의 종말적 전쟁수행을 통한 교회의 승리에 상응시켜 기술하고 있음).
다음은 두 짐승의 진영과 백마 탄 자의 종말적 전쟁기사 내용입니다(19-21절). 본 내용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겔 39:17-20을 반영하는 하나님의 큰 잔치(17-18절) 기사에 대한 구체적인 성취기록 내용입니다. 한편 본 전쟁은 백마 탄 자의 이름을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16절)로 표현하는 언어적 병행(17:14)을 통해 17:14에서 짐승의 세력들과 전투를 벌여 승리로 이끄시는 어린양의 전쟁기사를 소개하는 내용과 본질상 동일한 사건임을 암시해 줍니다. 아울러 어린양에 소속된 군대(17:14하)와 백마 탄 자의 군대(19:14)를 소개하면서 이들이 전쟁을 직접 진두지휘하는 어린양과 백마 탄 자에게 내용적으로 부속돼 전쟁의 승리에 동참하고 있을 뿐 직접적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아니란 사실을 통해서도 두 전쟁 사이에 유사성이 확인됩니다.
19절은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 군대와 백마 탄 자와 그의 군대 사이에 전쟁기사를 소개합니다. 이 전쟁은 백마 탄 자의 등장과 두 짐승의 심판과 멸망을 다룬다는 관점에서 종말적 전쟁의 성격을 띱니다. 전쟁의 결과는 17-18절에서 이미 확인한 대로 짐승 진영의 완패로 종식됩니다. 이 전쟁이 물리적인 전쟁이 아닌 것은 양 진영 간의 전쟁 상황을 구체적으로 묘사함이 없이 백마 탄 자의 입에서 나온 이한 검 (15절상)곧 말씀의 선포(히 4:12)로 이내 전쟁이 끝나버리는 것으로 기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짐승과 거짓선지자가 한 순간에 잡혀서 불못에 던져집니다(20절). 여기서 거짓선지자의 정체는 땅에서 나온 짐승(13:11-12)을 가리킵니다. 결국 백마 탄자와의 종말적 전쟁에서 두 짐승과 그의 추종자들은 철저히 패배를 당합니다. 그 결과로 두 짐승은 즉각 산채로 잡혀 불못에 던져집니다. 불못은 심판의 최종 장소로서 단 7:9-11을 배경 삼으며 본질상 지옥과 다를 바 없습니다(마 25:41). 이처럼 계시록에서 종말적 최후의 전쟁과 관련된 심판 및 멸망 사건은 근본적으로 16:12-16에서 기술하고 있는 아마겟돈 전쟁과 동질성을 띱니다. 다시 말해 아마겟돈 전쟁의 구속사적 성격은 주로 주님의 재림 직전에 악의 세력들에 의해 집중적으로 발생하는 전쟁으로서 주님의 재림으로 이내 종식되는 영적 전쟁을 가리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 장의 백마 탄 자와 두 짐승 진영과의 전투나, 17:14에서 어린양이 짐승의 연합군들과 벌이는 전쟁이나, 16:12-16절에서 일곱 대접 재앙의 일환으로 발생되는 아마겟돈 전쟁기사나 본질상 동질성을 띤다고 하겠습니다. 단지 상황에 따라 다양한 방법으로 서술하는 것을 통해 사단의 세력들에 대한 종말적 심판과 멸망 및 구원과 승리의 당위성을 첨예하게 대비시킴으로 저자의 의도를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극적 효과를 배가시키게 됩니다. 이런 식의 묵시문학의 다양한 표현들은 믿음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 고난과 핍박을 감내해야 했던 1세기 성도들은 물론, 모든 시대에 진리를 보수하며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고통당하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소망가운데 믿음의 인내를 발휘케 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게 됩니다.
그런데 본 전쟁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두 짐승이 불못에 산 채로 던져지는 것에 반해 나머지 악의 추종자들의 죽음이 달리 처리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백마 탄자의 입에서 나오는 이한 검으로 죽임을 당해 그 시체들이 모든 새들의 먹잇감이 된다는 지적입니다. 이런 표현은 다분히 의도적인 기술입니다. 왜냐하면 이들 추종자들의 정체는 본질상 짐승의 표를 받고 그 우상을 경배하던 땅에 거하는 자들(13:8, 12절)로, 이들의 결국은 20:15에서 불못 곧 둘째 사망에 처해지게끔 돼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왜 이들 추종자들의 죽음과 그 결과를 두 짐승과는 별도로 기술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는 요한이 두 짐승의 진영과 백마 탄 자와의 종말적 전쟁 상황을 겔 39:17-20의 성취로 인용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찾아집니다. 다시 말해 요한은 계 19:19-21의 전쟁 정황을 겔 39:17-20의 전쟁기사의 성취로 적용시키는 과정에서 동일하게 에스겔서 전쟁의 결과인 ‘큰 잔치’ 이미지를 계시록 본문에 적용시킴으로 두 짐승의 추종자들의 시체를 새의 먹잇감으로 차별화시켜 해석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Ⅲ. 결론
19장의 혼인잔치와 백마 탄 자에 의한 두 짐승의 멸망기사는 16:12-21에 기술된 아마겟돈 전쟁에 근거하며, 17-18장에 언급된 음녀 바벨론과 큰 성 바벨론의 멸망과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다시 말해 19장의 혼인잔치는 악의 세력을 총칭하는 바벨론의 멸망의 결과로 구원의 완성과 교회의 승리라는 전제 속에서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요한은 계속해서 바벨론의 주동세력들인 두 짐승의 멸망기사(19:19-20)와, 용의 멸망기사(20:1-3, 7-10절), 그리고 마지막으로 짐승의 표를 받고 그 우상에게 경배했던 불신자들의 심판기사(20:11-15)를 다룹니다. 이는 악의 세력의 멸망을 차별화시켜 보다 미시적으로 기술하는 것을 통해 사단세력의 철저한 멸망과 교회의 구원 및 승리의 효과를 극대화시키려는 저자의 의도로 엿보입니다. 이런 사실은 새 창조의 질서 속에서 교회가 세세무궁토록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해야 하는 결정적인 동인으로 작용할 것입니다(엡 1:6).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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