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 강
용의 멸망과 천년왕국, 그리고 백보좌의 심판
(계 20:1-15)
Ⅰ. 도입
20장은 짐승과 거짓선지자의 멸망(19장)에 이어 악의 세력의 총수인 사단(용)과 그의 추종세력인 짐승의 표를 받은 불신자들의 최후의 멸망사건을 기술합니다. 이 과정에서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한다는 소위 천년 왕국설에 관한 내용이 소개됩니다. 따라서 본 장은 사단과 그의 추종자들이 받는 최후의 심판과 멸망 및 그리스도와 그에게 부속된 성도들이 살아서 왕 노릇한다는 천년왕국설이 극한 대비를 이루는 가운데 믿음의 정절을 지켜나가는 땅의 성도들에게 큰 위로와 소망과 믿음의 확신을 갖게 합니다.
20장은 문맥의 구조상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용의 결박과 멸망을 다루는 내용(1-3절, 7-10절)과 그 사이에 교회공동체가 천 년간 왕 노릇하는 소위 천년왕국설에 관한 내용(4-6절), 그리고 사단의 추종자들인 불신자들이 받는 최후의 심판내용(11-15절)으로 구분됩니다. 따라서 20장에서 보여주는 용(사단)과 불신자들의 심판과 멸망은 19장의 두 짐승의 멸망을 포함해 결과적으로 세상역사의 본질로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 나온 하나님의 구속사가 마침내 최종 완성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지기를 염원했던 주기도문의 내용이 온전히 성취된다는 사실 말입니다(마 6:10). 이런 사실이 새 창조 질서의 회복을 가리키는 21장의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1절)와 승리한 교회를 상징하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등장(2절)을 통해 확증됩니다.
Ⅱ. 전개
용(사단)의 결박과 멸망기사를 다루고 있는 20장의 내용은 세상역사의 본질로서 하나님의 구속사가 창 3:15의 여자의 후손언약에 근거해 적대적인 투쟁의 성격을 띠면서 진행돼 오다가 마침내 최종적으로 종결된다는 계시사적 의미를 가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사역으로 예비적 성취를 이뤘던 여자의 후손언약은 사단이 불못에 처해지는 본장의 최종심판 사건으로 마침내 종말론적으로 완성되기에 이릅니다. 본질상 창세전부터 수립된 영원한 목적으로서 하나님의 언약적 구속사(엡 1:4-6)의 대단원이 마침내 종료되는 순간에 이른 셈입니다. 여자의 후손언약(창 3:15)에서 뱀의 머리가 상함을 받는 치명상의 의미가 본장에서 사단이 불못에 던져지는 종말적 전쟁정황을 통해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1. 용의 결박과 감금 및 놓임과 심판(1-3절, 7-10절)
요한이 새로운 환상을 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한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손에 들고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와 용을 잡아 결박해 무저갱에 일천년간 감금합니다. 이는 상징적 묘사로 용의 정체는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고 합니다. 이런 용에 대한 삼중적 표현은 12:9과 병행을 이루면서 본장에서 천사에 의해 결박된 용의 정체가 미가엘과 하늘의 전투에서 패해 내어 쫓긴 용과 동일한 대상임을 시사합니다(12:9하). 여기서 용의 패함과 축출의 두 단계를 확인하게 됩니다. 처음은 하늘에서 땅입니다(12:9, 13절). 다음은 땅에서 무저갱입니다(20:3). 무저갱은 악한 세력들이 최종 심판을 받고 영원한 불못에 들어가기 전에 한시적으로 감금당하는 감옥의 성격을 띱니다. 본문에서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란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하늘에서 패해 땅으로 내어 쫓긴 용을 잡아 결박해 무저갱에 가두기 위해 천사가 뒤쫓아 땅으로 내려온 것을 가리킵니다. 용의 패배와 축출 사건과 관련해 용이 미가엘과의 전투에서 패한 결정적인 원인은 아이의 승천사건과 밀접하게 연관된 것으로(12:5)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결과인 사실을 이미 확인한 바 있습니다(막 3:27, 마 12:29, 눅 10:17-19, 요 12:31-33). 이를 여자의 후손언약적 관점에서 조명해 보면 여자의 후손인 아이(예수님)에 의해 뱀의 머리가 상함을 받아 치명상을 받은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용이 무저갱에 갇힌 천년의 기간은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를 포괄하는 상징적인 기간임을 간파하게 됩니다.
용의 결박과 무저갱에 감금당한 과정을 좀 더 세밀하게 관찰해 봅니다(1-3절). 아이의 승천(12:5)으로 하늘에서 패한 용이 땅으로 축출당합니다(12:9). 뒤를 좇아 한 천사가 땅으로 급파됩니다. 천사의 손에는 큰 쇠사슬과 무저갱의 열쇠가 들려 있습니다. 마침내 천사는 땅으로 내려와 용을 잡습니다. 용을 쇠사슬로 결박해 일천년간 무저갱에 감금합니다. 그것도 부족해 무저갱에 자물쇠를 채우고 그 위에 인(印)을 쳐 봉합니다. 이는 무저갱에 일천년의 감금기간 동안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천년이 차면 반드시 잠간 놓이게 될 것을 시사합니다.
그렇다면 용의 결박 및 감금과 관련해 쇠사슬, 결박, 무저갱, 감금, 잠금, 인봉함 등의 이미지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완전결박으로 인한 사단의 무활동입니다(total inactivity of Satan). 적어도 일천년이 지나 감금기간이 해제돼 반드시 잠간 놓일 때까지는 전혀 활동의 여지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무저갱에 감금당한 것과 쇠사슬로 결박당한 채 감금당했다는 것과의 차이를 말입니다. 더욱 무저갱을 자물쇠로 잠그고 그 위에 인을 봉했다는 표현은 천년이 차기까지 누구를 만난다거나 무저갱 밖으로 잠시 외출을 할 수 있는 제한결박의 개연성조차도 철저하게 배제되었음을 강력히 시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유 1:6, 벧후 2:4, 이순태, 14-19).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제기될 수 있습니다. 본 사건을 용의 완전결박과 무활동으로 해석하게 될 때, 성경에서 교회시대에 여전히 사단과 마귀의 활동을 경계시키며 깨어 근신하라는 말씀들과의 충돌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의 문제 말입니다(엡 2:2, 4:26-27, 벧전 5:8-9, 딤후 2:26, 고후 4:3-4, 11:14-15). 해결방안은 용의 수석 하수인인 짐승이 용의 왕권을 천년기간 동안 대리적으로 수행한다는 관점입니다. 환언하면 용이 자신의 왕권을 짐승에게 위임해 줌으로 여전히 짐승을 통해 자신의 왕적 권한과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짐승의 정체성은 본질상 용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짐승의 사역이 곧 용의 사역을 대신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은 주관적인 관점이 아닙니다. 계시록에서 자증하는 객관적인 관점입니다.
그렇다면 언제 어떤 방식으로 용의 통치권이 짐승에게 위임되었단 말인가요. 먼저 용이 짐승에게 통치권을 위임한 내용입니다. 13:1-2절이 이런 사실의 가능성을 뒷받침 해 줍니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의 정체는 단 7:1-7을 배경으로 네 번째 짐승에 해당합니다. 계시록(13:1-2)에서는 다니엘서 본문의 네 짐승을 하나로 통합해 더욱 막강한 권세를 발휘하는 자로 부각시켜 짐승에게 적용시킵니다. 짐승의 모습을 열 뿔과 일곱 머리를 가진 자로 표현하는 것을 통해 이런 사실이 뒷받침 됩니다. 따라서 바다는 네 짐승이 나온 단 7:3에 근거해 하나님께 대적하는 악한 세력의 총본산임을 우회적으로 가리킵니다. 후에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21:1하)고 강조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새 창조의 질서 속에서는 악의 세력들이 더 이상 존재하거나 활동할 수 없는 회복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용이 이 짐승에게 자신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위임해 줌으로 용의 왕권을 합법적으로 대행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줍니다(13:2). 이런 결과로 4절은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줌으로 (온 땅이) 용과 짐승에게 경배하며 가로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라고 짐승의 권세를 한껏 고양시켜 기술합니다. 이상의 장면은 용의 왕권을 짐승이 대리적으로 수행하게 되었음을 가리키는 결정적인 대목들입니다. 아울러 짐승이 용의 왕권을 행사하는 42달 동안 용의 활동은 더 이상 13장에서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짐승의 활동을 보좌하는 자로 땅에서 올라온 두 번째 짐승 곧 거짓선지자의 미혹의 활동이 소개될 뿐입니다(13:11-18). 그렇다면 ‘무엇이 용으로 하여금 자신의 보좌(왕권)까지 짐승에게 위임하게 만들었을까요’라는 질문이 제기됩니다. 이런 충분히 가능성 있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이렇습니다. 용이 미가엘에게 패해 땅으로 추방당하는 과정에서 용은 ‘자신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직감합니다.(12:12하). 이 사실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용의 절박한 심정이 용으로 하여금 악의 세력의 총본산인 바다에 찾아와 짐승에게 자신의 왕권을 위임해 주는 결정적인 동기부여로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사단의 미혹과 참소와 대적의 본성은 그가 불못에 들어갈 때까지 결코 근절될 수 없는 사단의 고유한 속성으로 기능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용은 짐승에게 자신의 통치권을 위임해 주는 방식으로 계속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제기되는 문제가 시기입니다. 다시 말해 언제 용이 짐승에게 자신의 왕권을 위임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물론 성경은 이 부분에 대해 침묵합니다. 그러나 문맥을 통해 추정할 수 있습니다. 용이 땅으로 축출된 후 아이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려 했으나(12:13) 하나님께서 여자를 광야로 이끄셔서 1260일(12:6)과 한 때 두 때 반 때의 기간(12:14)을 보호하시고 양육하심으로 용의 핍박을 무위로 끝나게 하신 시점입니다. 혹자는 이 시점이 용이 바다로 찾아가 짐승에게 보좌의 왕권을 위임한 때로 해석합니다. 이런 사실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1:14과 15절 사이에 ‘그 후’(then)라는 부사시제를 사용하고 있는 NIV성경을 인용해 증거로 삼습니다(이순태, 32). 따라서 여자가 광야에서 양육과 보호를 받는 내용을 기술한 12:14 직후에 용은 바다로 찾아가 짐승에게 통치권을 위임해 주고 바로 무저갱에 갇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여자의 뒤에서 물을 강같이 토해’ 여자를 익사시키려는 12:15의 용의 시도는 ‘그 후’인 1260일이나 한 때 두 때 반 때(3년 반)의 교회의 양육시간이 지난 후를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대부분의 계시록 해석자들이 12:17절에서 여자의 남은 자손과의 일전을 벌이기 위해 바다 모래 위에 섰다는 용의 정황을 천년이 찬 후에 무저갱에서 놓임을 받은 사단(용)이 20:7-10에서 종말적 전쟁을 시도하려는 것과 동일한 사건으로 해석한다는 데서 긍정적인 지지를 받는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여자의 양육기간인 1260일(한 때와 두 때와 반 때)과 용의 통치권을 위임받은 짐승이 42달 동안 교회를 핍박하는 기간(13:5)과 용이 무저갱에 결박당한 채로 감금당한 천년기간이 본질상 동일한 기간임을 확인하게 됩니다(1260일=3년 반=42달=1000년). 이상의 일련의 사건 정황을 고려할 때 사실 용은 아기의 승천으로 자신이 패한 사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영적으로 직감하고 있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래서 비상강구책의 일환으로 짐승으로 자신의 대리자를 삼아 영향력을 행사함으로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교회를 대적하고 핍박하는 방도를 마련했던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용의 권세를 한시적으로 위임받은 짐승의 활동기간인 42달(13:5)은 용이 무저갱에 갇힌 1000년 기간과 내용상 동일한 기간임을 감지하게 됩니다.
천년이 차매 용이 무저갱으로부터 ‘반드시 잠간 놓임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전 설정(20:3하)에 따라 사단이 옥으로부터 일시적으로 석방됩니다(20:7). 이 과정에서 흥미로운 대목은 20:1-3에서 용이 무저갱에 감금되었다는 설명이 7절에서 사단이 옥에서 놓였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용과 무저갱이 사단과 감옥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실례입니다. 따라서 7절의 사단과 옥(감옥)이란 표현은 1-3절의 용과 무저갱에 대한 상징을 해석하고 있다고 봐야합니다(이필찬, 842). 아울러 3절에서는 미혹의 대상을 만국으로 설명하는데 반해 8절에서는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는 것으로 좀 더 구체화됩니다. 사단이 곧 수행할 종말의 전투가 그만큼 현실화될 것이기에 자신의 추종자들 또한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셈입니다. 여기서 곡과 마곡을 미혹해 자기 수하로 삼아 교회와의 최후의 일전을 불사하려는 사단의 종말적 전쟁정황은 겔 38-39장을 배경으로 삼습니다. 에스겔서의 전쟁 상황은 19:17-18에서 인용한 내용과 맥을 같이 합니다.즉 곡은 마곡지역을 통치하는 왕으로 주위의 여러 왕들을 규합해 강력한 연합군을 형성하는 가운데 바벨론 포로로부터 회복된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이나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대패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들의 병사들의 시체를 먹잇감으로 삼아 공중의 모든 새들을 초청해 큰 잔치를 벌인다는 내용입니다. 이런 식으로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회복과 관련된 종말적 전쟁 모티브를 요한은 계시록에 적용시키는 것을 통해 사단세력의 종말적 패배와 심판 그리고 교회의 종말적 승리와 완성으로 발전시킵니다. 그런 의미에서 소위 아마겟돈 전쟁을 중심으로 악의 세력을 진멸시키는 16:12-21의 일곱 대접재앙의 절정기사와 17:14의 어린양과 짐승 진영과의 전쟁기사, 19:17-21의 백마 탄 자의 진영과 두 짐승 진영과의 전투기사, 그리고 본장의 사단을 비롯한 그의 추종세력들과 교회공동체와의 최후의 전쟁기사들은 본질상 동일한 영적 전쟁을 다양한 관점에서 기술함으로 극적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있음을 감지하게 됩니다. 고난과 핍박 중에 있는 성도와 교회를 향해 사단의 세력인 악의 결국은 패망(The Cross is short)이고, 하나님께 속한 선의 결국은 승리(The Glory is long)라는 구속사적 명제를 확고부동하게 각인시켜 줌으로 끝까지 믿음의 인내로 선한 싸움을 싸울 것을 격려하고 위로하며 소망을 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사단이 진두지휘하는 본 종말적인 영적 전투에서 아군의 정체는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으로 묘사합니다(9절). 이는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키는 구약적인 표현들입니다. 성도들의 진(陣)이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여정 길에 성막을 중심으로 12지파가 질서정연하게 캠프를 치고 행군했던 사실을 연상케 합니다(출 14:19, 민 2:2). 사랑하시는 성(시 78:68, 87:2, 132:12-14)이란 하나님의 통치의 중심인 시온성이나 예루살렘 성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이런 구약적 표현들을 통해 사단의 세력들이 교회공동체를 대상으로 벌이는 최후의 영적 전쟁을 상징적으로 묘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계시록에서 소개되는 전쟁기사들을 물리적인 전쟁으로 오해해 지구상에 현존하는 어떤 나라들과의 구체적인 전쟁으로 비약시켜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총체적인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진영과 사단의 진영과의 영적 싸움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엡 6:12-17).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권세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2-17).
이 전쟁의 승패는 한 순간에 갈립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사단의 추종자들을 일순간에 태워버립니다(9절하). 마귀는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집니다(10절). 이는 하나님의 신속하고도 확실한 심판의 성격을 가리킵니다. 천년이 찬 후에 용의 석방과 관련해 반드시 ‘잠간’(for a short time) 놓임을 받게 될 것(3절하)에 대한 실상이 이처럼 속전속결로 사단과 그의 수하 세력들을 심판해 멸망시키신 것입니다. 여기서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는 장면은 에스겔의 환상(겔 38:22, 39:6)을 반영하는 것으로 마곡의 연합군을 멸망시키는 하나님의 단호한 심판의 양상을 차용해 적용시킨 내용입니다. 불못에는 이미 백마 탄 자와의 전쟁에서 패한 짐승과 거짓선지자가 먼저 들어가 (19:20)고통을 당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20:10). 이제 마귀도 이들과 함께 영원한 불못의 고통에 동참합니다. 이로서 뱀의 머리가 여자의 후손에 의해 상하게 될 것이라는 여자의 후손언약에 핵심내용(창 3:15)이 백마 탄 자가 두 짐승과 사단을 불못에 던져 넣는 것을 통해 최종 성취를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두 짐승의 멸망사건(19장)과 사단의 멸망사건(20장)은 묵시문학적 관점(초시간성/초공간성)에서 본질상 동일한 사건으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2. 교회 공동체의 천년 왕 노릇(4-6절)
요한은 1절에서 땅으로 내어 쫓긴 용을 잡아 무저갱에 가두기 위해 천사가 큰 쇠사슬을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온 환상에 이어 4절에서 새로운 장면이 연출되는 또 다른 환상을 봅니다. 두 번째 환상의 중심 내용은 하늘과 땅을 망라한 교회공동체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한다는 환상입니다(4-6절). 이상의 설명을 통해 1-3절에서 무저갱에 감금된 용의 결박 환상과, 4-6절에서 보좌에 앉아 심판하는 권세를 받은 교회공동체(4:4, 24장로) 환상은 문맥 속에서 상호 연계성을 가지면서도 극한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단의 결박과 교회공동체의 왕 노릇이라는 두 상반된 주제에 대한 극한 대비를 통해서 말입니다. 이런 상호간 극한 대조와 대비는 다분히 저자의 의도적인 구성인 사실이 엿보입니다. 다시 말해 구속사적 관점에서 극한 대비를 이루고 있는 용과 교회공동체와의 현재적인 영적 상태를 통해 비록 악의 세력이 일시적으로 득세하는 것 같아도 그 결국은 심판과 멸망인 반면, 교회는 잠시 세상에서 고난과 핍박을 받을지라도 종국에 가서는 승리가 보장돼 있다는 사실을 확증시켜 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흔히 4-6절의 내용을 일컬어 소위 천년 왕국설(millenarianism)로 부릅니다. 천년왕국설은 본문 속의 ‘천년’을 문자적으로 해석해 현세와 내세 사이에 과도기적인 중간 시대가 있어 인간의 이상향이 메시야를 중심으로 일천년간 이루어진다고 믿는 하나의 학설입니다(호크마 종합주석, 541). 그런 의미에서 천년왕국설은 교회역사 속에서 객관적으로 정립된 교리체계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본 천년왕국설은 크게 전천년설(Premillennialism), 세대주의 전천년설(Dispensational Premillennialism), 후천년설(Postmillennialism), 무천년설(Amillennialism) 등 3-4가지의 학설로 요약됩니다. 특별히 무천년설은 천년을 여자(如字)적으로 보지 않고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에 이르기까지의 복음시대 전 기간을 상징적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주님의 재림은 자연히 섭리적 작정기간인 복음시대가 끝나는 시점에 이루어 질 것으로 내다봅니다. 반면에 전천년설은 문자적으로 천년기간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지상에서 왕 노릇한다는 입장을 견지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재림은 천년왕국 이전에 이루어 실현될 것을 강조합니다. 같은 개혁주의 신학자들 가운데서도 천년왕국설에 관해서는 크게 전천년설과 무천년설로 나뉘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택자들의 예정의 시점과 관련해 전택설과 후택설로 나뉘듯이 말입니다. 이처럼 동일한 본문이 나름대로의 입장과 견해를 달리하는 여러 학설로 나뉘게 된 근저에는 본문을 여자(如字)적으로 해석할 것인가, 상징적으로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와,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기를 어느 시점으로 잡느냐의 여부가 결정적인 동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 어느 곳에서도 본문의 천년왕국설을 지지할 만한 유력한 단서가 발견되지 않습니다. 단지 본문에서만 발견될 뿐입니다. 따라서 이를 교리적으로 접근하려고 하기보다는 문맥적인 접근을 시도하는 것이 보다 본문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됩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1-10절의 전체 문맥 속에서 용의 결박과 석방 및 보좌에 앉힌바 된 교회공동체와의 극한 대비와 연계성을 통해서 말입니다. 더불어 요한계시록에서 사용되고 있는 대부분의 숫자들이 한결 같이 문자적인 의미보다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도 본문에 언급된 천년의 의미를 바르게 해석하는데 하나의 단서를 제공한다고 하겠습니다.
우선 본문(4-6절)의 의미를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 1-10절의 문맥을 통해 살펴봅니다. 1-10절의 문맥 속에서 4-6절의 위치는 용의 결박과 감금(1-3절) 및 석방과 멸망(7-10절)기사를 다루고 있는 중간에 놓여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문맥 속에서 크게 두 가지 사실을 시사합니다. 하나는 위에서 지적한 대로 1-10절에 대한 저자의 의도적인 편집상의 문제와 관련됩니다. 즉 저자는 용의 결박과 감금 및 석방과 멸망 기사를 보좌에 앉은 교회공동체와 상호 대비를 시킴으로 양자 간의 극한 영적 차별 상태를 보여줍니다. 곧 악의 패배 및 굴욕과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의 승리와 영광을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로 고난과 핍박을 받고 있는 모든 시대의 모든 교회들에게 큰 위로와 격려 및 소망을 안겨 줄 것이며 믿음의 인내를 촉구하는 결정적인 동인으로 작용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1-3절에서 용이 무저갱에 감금된 기간을 일천년으로 제한시키고 있습니다. 천년이 차면 반드시 잠간 놓임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7절은 1-3절의 연장선상에서 용이 천년이 차매 잠시 놓임을 받아 악의 무리들을 규합하는 사건이 소개됩니다. 이런 사실이 문맥 속에서 의미하는 바는 4-6절의 교회공동체의 천년 왕노릇의 기간과 용이 무저갱에 갇힌 천년의 기간이 동일한 기간으로 상호 중복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저자가 의도적으로 일천년간의 용의 결박과 패배와 수치를 동일한 기간인 일천년간의 교회의 승리와 영광과 상호 대비시키므로 양자 간의 차별화된 극한 영적 상태를 성경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성취된 영적 실질이 최후의 종말적 승리를 보증해 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구원의 현재성이 미래의 구원의 완성을 보증해 주듯이 말입니다.
이상의 맥락 속에서 용이 무저갱에 감금당한 일천년 기간 속에 담긴 구속사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첫째는 아이의 승천으로 인한 용의 패배와 하늘로부터의 추방을 의미합니다(12:5, 7-9절). 둘째는 천사에 의해 쇠사슬로 묶여 무저갱에 갇히고 인봉함으로 용의 완전결박과 무활동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셋째는 따라서 용이 무저갱에 감금된 천년의 기간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섭리적 작정기간을 상징적으로 가리킵니다. 결과적으로 계시록 안에서 교회와 용 사이에 결부된 중요한 숫자들 간에 이런 등식이 성립됩니다. 1260일=한때 두 때 반 때=42달=1000년이란 등식 말입니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 용이 무저갱에 갇힌 천년기간(1-3절)과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일천년간 왕 노릇하는 기간(4-6절)이 동일한 기간으로 중복되고 있다면 용의 천년 감금기간이 상징적인 기간이듯이 교회가 왕 노릇하는 천년기간 또한 상징적인 기간임이 증명됩니다. 아울러 용의 감금기간의 성격이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과 밀접하게 연관된다면 교회의 왕 노릇하는 기간도 같은 기간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왕 노릇하는 이들의 정체는 구체적으로 누구일까요. 4절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하는 이들이 하늘 보좌에 앉아 심판하는 권세를 가진 자들이라고 설명합니다. 보좌와 심판의 성격은 통치권의 이미지를 공통분모로 가집니다(이필찬, 850). 따라서 보좌에 앉은 자들과 심판하는 권세를 가진 자들은 동격의 대상들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런 사실은 하늘 보좌 주위에 둘러 앉은 24장로들의 보좌를 연상케 합니다(계 4:4). 이들은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으로 하나님의 통치에 동참하고 있는 하늘의 교회공동체를 상징적으로 대표해 가리킵니다. 4절이 이들이 누구인지를 보충설명 해 주는 것을 통해 이런 사실을 확증시켜 줍니다.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하니(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본문은 두 부류의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전자는 신앙의 정절을 지키다 죽은 하늘의 순교자들의 영혼들입니다. 후자는 순교의 각오로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그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않은 땅에 있는 하나님의 충성된 종들입니다. 이 두 부류가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한다는 사실입니다. 특별히 계시록에서 죽은 성도들이 하늘에 여전히 살아있는 상태를 묘사할 때 영혼이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20:4의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은 6:9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란 표현과 병행적 관계를 이룹니다. 따라서 이들은 동일한 존재들로 하늘에서 여전히 살아있는 순교자들의 영혼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4절에서 그리스도의 더불어 천년동안 왕 노릇 하는 자들의 정체는 하늘에 속한 순교자들의 영혼과 땅에서 순교의 각오로 믿음의 정절을 지키며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성도들을 동시에 가리키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계 5:9-10). 결국 보좌에 앉아 심판하는 권세를 가진 자들은 하늘과 땅에 있는 성도들 곧 교회공동체를 총칭하고 있음을 문맥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5절에서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한다’고 괄호로 묶어 설명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여기서 ‘나머지 죽은 자들’이란 환언하면 ‘죽은 자들의 나머지’란 의미로 4절과의 문맥 속에서 목 베임을 받은 영혼들을 제외한 나머지 죽은 자들을 총칭하는 표현입니다. 결국 이들의 정체는 예수님과 무관하게 죽은 불신자들을 가리킵니다. 짐승의 표를 받고 그 우상을 경배하며 살다가 죽은 자들 모두를 가리킵니다. 이들이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한다는 것은 주님의 재림으로 발생하게 될 우주적인 부활(요 5:28-29)이 있기까지, 곧 예수님의 재림 시까지 음부에서 고통 중에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누가의 표현에 의하면 마치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얘기에서 죽은 후 이들의 상태가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부자는 음부에서 고통 중에 있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듯이 말입니다(눅 16:19-25). 하나님과 무관한 자의 삶은 살았다고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것과 방불하다는 것이 성경의 관점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마 8:22). 이런 관점에서 ‘나머지 죽은 자들은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한다’(5절상)는 의미는 ‘죽은 부자’의 경우와 본질상 동일한 상태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은 계속해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하는 천년 기간이 또 다른 의미에서 첫째 부활이라고 말합니다(5절).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특별히 복이 있고 거룩한 자들인데 그 이유는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한이 없기 때문이라고 진술합니다(6절). 첫째 부활이 있다는 것은 둘째 부활이 있음을 의미하며, 둘째 사망이 있다는 것은 첫째 사망이 있음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첫째 부활의 의미는 무엇이고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누구일까요. 위의 진술을 통해 첫째 부활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하는 자들의 영적 상태를 가리키며 동시에 이들은 둘째 사망에 참여치 않는 복되고 거룩하게 구별된 자들로 묘사합니다. 말하자면 첫째 부활의 의미는 죽은 순교자들의 영혼이 살아서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권(왕 노릇)에 참여하는 것과 몸으로 살아있는 땅의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거듭난 상태(중생)를 일컫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이 둘째 사망과 무관하다는 지적을 통해서 재차 확인됩니다. 둘째 사망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 들어가는 불못의 형벌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계 20:14-15). 이들은 불신자들로 생전에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이요, 마귀에게 속한 자들이며, 하나님과는 무관한 자들을 가리킵니다(계 13:8). 반면 성도들은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영생이 보장 된 자들로 그 이름이 생명책에 녹명된 자들입니다(빌 4:3, 눅 10:20). 이들은 둘째 사망인 불못의 심판과는 무관한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으면 심판에서 이미 제외되었기 때문입니다(요 5:24, 3:18). 따라서 하늘에 속한 죽은 성도들의 영혼과 땅에 있는 거듭난 성도들의 영적 상태는 이미 첫째 부활에 참여하고 있는 자들로 둘째 사망인 불못의 심판과는 무관한 자들로 존재합니다. 정리하면 첫째 부활은 땅에 사는 거듭난 성도들의 중생사건과 죽은 성도들의 영혼이 여전히 살아서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벧전 2:9, 계 5:10)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들은 둘째 사망인 불못의 형벌로부터 제외됩니다.
둘째 부활은 우주적인 육체의 부활사건을 가리킵니다. 천년 기간(초림과 재림 사이)이 끝나고 주님의 재림과 더불어 둘째 부활이 일어납니다. 여기에는 신자와 불신자가 공히 동참합니다. 그러나 부활의 성격이 다릅니다. 신자의 부활은 생명의 부활의 성격을 띠지만 불신자의 부활은 심판의 부활의 성격을 띱니다(요 5:28-29). 계 20:11-15의 백보좌의 심판이 우주적 부활과 최후의 심판의 경우를 보여주는 실례입니다. 한편 첫째 사망은 모든 사람이 직면하게 되는 육체의 사망을 가리킵니다(히 9:27). 반면 둘째 사망은 둘째 부활(우주적 부활)에 참여하는 불신자들이 맞게 되는 불못의 형벌을 말합니다(계 20:14-15). 둘째 부활에 참여하는 신자들은 불못과는 무관하게 새 창조의 질서인 영생의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될 것입니다(21:1-4).
3. 불신자들의 최종 심판과 멸망(11-15절)
지금까지 악의 세력을 총칭하는 바벨론에 대한 심판과 멸망을 근거(17:1:19:10)로 이를 좀 더 세분화시키고 개별화시켜 두 짐승의 멸망(19:19-20)과 용의 멸망을 살펴봤습니다(20:7-10). 본문은 마지막 심판의 대상인 짐승의 추종자들 곧 무론대소하고 ‘죽은 자’들로 묘사된 짐승의 표를 받고 그에게 경배했던 자들에 대한 최후의 심판내용을 기술합니다. 요한은 먼저 심판주가 크고 흰 보좌에 앉아 계심을 봅니다. 반면 심판주의 정체를 ‘그 위에 앉으신 자’로만 소개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동시적으로 심판주로 언급합니다(계 14:14, 마 7:22-23, 25:31-36, 요 5:22, 롬 14:10, 고후 5:10). 따라서 본문에서 심판주를 ‘그 위에 앉으신 자’란 문구를 통해 단수로 표현한 것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일체성과 단일성을 강조함으로(호크마 종합주석, 535)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심판을 주관하심을 보여줍니다. 아울러 크고 흰 보좌란 보좌에 앉으신 분의 정체성인 위엄과 권능과 영광과 거룩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불 수 있습니다.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심판주의 얼굴을 피해 사라집니다. 이런 표현이 계 21:1의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진 것’과 병행을 이루는 표현이라면 의미상 재창조의 개념보다는 우주적인 개벽 곧 체질의 변화(벧후 3:10)로 말미암는 갱신(making everything new)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W.헨드릭슨, 241-243/이필찬, 872-874).
따라서 하나님의 종말적 심판의 성격은 피조세계에서 죄로 말미암는 온갖 부정적인 결과들을 제거한다는 의미와 더불어 첫 창조의 질서 속에 담겼던 하나님의 뜻을 회복시켜 완성시킨다는 이중의 의미를 가집니다(계 21:3-5, 22:1-5, 롬 8:19-23). 그런 의미에서 새 창조의 질서로 회복된 새 하늘과 새 땅은 완성된 나라의 성격을 띠게 될 것입니다. 믿음과 소망과 지식이 더 이상 필요치 않은 완전무결한 나라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이 동기 유발된 구원의 은혜의 영광만이 가득 찬 의와 평강과 희락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롬 14:17).
다음으로 심판의 대상과 방법이 소개됩니다(12절). 요한은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크고 흰 보좌 앞에 서 있고 보좌 앞에는 책들과 또 다른 책이 펴져 있다고 소개합니다. 이런 재판정의 모습은 하나님과 성도를 대적했던 네 번째 짐승을 심판하는 단 7:9-10을 배경으로 재판정의 정황을 의도적으로 연출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본문에서 또 다른 책이란 생명책을 가리킵니다. 이는 책들에 근거한 최후의 심판이 동시에 생명책에 근거한 구원의 확증이란 추가적인 의미를 담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의도로 풀이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문맥에서 요한이 강조하고자 하는 내용은 생명책과 구원사건보다는 책들과 심판사건에 치중하고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본 백보좌의 심판은 죽은 자들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것을 통해 17장부터 악의 세력들인 바벨론(17-18장), 두 짐승(19장), 용(20장)에 이어 용과 짐승의 추종세력들인 불신자를 마지막으로 악의 무리들에 대한 최종심판 내용을 주제로 삼아 일관성 있게 기술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 심판과정에서 사실상 생명책에 기록된 무리들은 심판에서 제외됩니다. 이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구원받은 자들로 그 이름이 생명책에 녹명돼 있기에 처음부터 심판으로부터 제외되었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요 5:24). 물론 본문에서 소개되고 있는 책들과 생명책이란 표현은 상징적인 묘사입니다. 실제로 하늘에 불신자들의 행위를 수록한 책들과 성도들의 이름이 기록된 생명책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속마음까지도 감찰하시는 머리털까지 세신바 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무엇이 부족해 불신자들의 죄목을 일일이 책들에 기록하고 성도들의 이름을 생명책에 녹명해야 되겠습니까. 단지 이런 상징을 통해 불신자들에 대한 심판의 공정성과 필연성 및 성도의 구원에 대한 확실성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묵시문학의 특성상 다양한 상징과 환상과 비유를 매개로 저자의 의도를 보다 풍성하게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13-15절은 죽은 불신자들의 정황을 좀 더 자세하게 기술합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바다와 사망과 음부도 죽은 자를 내어 줍니다(13절). 본 절에서 바다와 사망과 음부는 악의 영역으로 죽은 자들이 최후의 심판 때까지 한시적으로 머무는 중간상태의 장소를 은유적으로 가리킵니다. 이곳에 머물던 죽은 자들이 최후의 심판을 받기 위해 백보좌의 심판대 앞에 불려나온다는 얘깁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이런 사실을 가리켜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이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올 것”을 선언합니다(요 5:28-29). 따라서 계시록 본문의 심판정황은 ‘심판의 부활’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백보좌의 심판은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책들에 기록된 내용에 따라 심판이 집행됩니다. 이런 묘사는 최후의 심판에서 한 사람의 예외도 있을 수 없이 모두가 철저하게 심판에 처해질 것을 가리킵니다. 마치 구원하시기로 작정된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하나님의 구원에 적극 동참하는 것처럼 말입니다(행 13:48, 요 6:37-39). 마침내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집니다. 여기서 불못은 본질상 지옥과 동질성을 띤 형벌의 장소로 영원한 심판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됩니다. 이처럼 불못에 처해지는 것이 둘째 사망입니다. 따라서 둘째 사망에는 우주적인 둘째 부활에 참여한 불신자들이 해당됩니다. 요한은 이를 가리켜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둘째 사망인 불못에 던져질 것을 확증합니다(15절). 반면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에게 둘째 부활은 생명의 부활의 의미를 가집니다(요 5:28-29). 둘째 사망이 이들을 주장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둘째 사망에 처해지는 불못의 심판과도 무관합니다. 대신 새 창조의 질서 속에서 첫째 부활(중생/죽은 성도의 살아있는 영혼상태)을 통해 보증된 구원의 생명을 실질로 소유해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새 창조의 질서가 회복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승리한 교회공동체가 누리는 천상적 삶을 가리킵니다(계 22:1-5).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는 의미에서 신자와 불신자의 사후의 상태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계시록적 관점에 의하면 불신자의 경우는 죽음과 더불어 바다와 사망과 음부라는 중간의 대기상태에 영혼이 머물게 됩니다(계 20:13, 눅 16:22-23:). 신자의 경우는 낙원이라고도 하고 아브라함의 품이라고도 하는 중간상태에 머물게 됩니다(눅 23:42-43, 눅 16:22). 누가는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얘기를 통해 이런 사실을 지지해 줍니다(눅 16:22-23). 최후의 심판 때(재림)까지입니다. 다음 단계로 최후의 심판 때가 되면 신자와 불신자 모두가 우주적인 육체의 부활에 참여합니다. 그러나 신자의 부활은 생명의 부활로, 불신자의 부활은 심판의 부활이란 양극단의 대조적인 성격을 띠면서 나타납니다(요 5:28-29). 우주적인 부활 후에 신자의 경우는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을 입고 구원의 생명을 실질로 누리게 될 복락의 장소인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갑니다. 반면 불신자의 경우는 심판의 부활(백보좌의 심판)을 통해 본질상 지옥과 다름없는 영원한 고통의 장소인 불못으로 던져집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 21:1).
Ⅲ. 결론
20:1-10은 ‘아이의 승천’(12:5)으로 하늘의 전쟁에서 패한 용이 불못에 처해지는 심판과 멸망의 기사를 다룹니다. 이 과정에서 용은 일천년간 무저갱에 결박당한 채 감금당합니다. 용의 감금기간은 동시에 교회공동체에게는 그리스도의 제사장으로 천년동안 왕 노릇하는 기간이기도 합니다. 이를 교회의 관점에서는 첫째 부활로 간주합니다. 첫째 부활은 죽은 성도들의 영혼이 하늘에서 살아서 주님의 통치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과 땅에서 거듭난 성도들이 동일한 맥락에서 그리스도의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으로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에 참여하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용의 결박기간과 교회가 왕 노릇하는 일천년의 기간은 주님의 초림과 재림 기간을 상징적으로 가리키는 섭리적 작정의 기간으로 해석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현 교회의 복음시대가 다름 아닌 그리스도와 더불어 교회가 왕 노릇하는 기간으로 곧 천년왕국설의 입장에서 보면 무천년설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아가 11-15절은 용과 짐승의 추종세력들에 대한 최종심판 기사를 다룹니다. 이들은 살아생전에 짐승의 표를 받고 그를 우상처럼 경배하던 자들이요 영적 음행인 세속주의(요일 2:15-16)를 적극 신봉하던 자들입니다. 이들의 심판을 일컬어 소위 백보좌의 심판이라고 부릅니다. 백보좌의 심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관하십니다. 이 심판은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되지 않은 죽은 불신자들을 총괄해 집행하는 최후의 심판의 성격을 띱니다. 이들이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아 둘째 사망인 불못에 던져집니다. 이들의 정체는 ‘무론대소’란 표현대로 ‘큰 자와 작은 자’들이 모두 포함됩니다. 여기서 큰 자와 작은 자란 일종의 은유적인 표현으로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총칭하는 수사적인 문구입니다. 이들 모두가 우주적인 부활을 통해 최후의 심판대에 서게 됩니다. 성경은 이를 일컬어 ‘심판의 부활’로 풀이합니다(요 5:28-29). 그런가 하면 책들과 함께 생명책이 소개됩니다. 책들이 영원한 형벌인 최후의 심판을 상징한다면 생명책은 영원한 구원의 생명을 상징합니다. 책들에는 불신자들의 행위가 낱낱이 기록돼 있어 심판의 근거로 기능합니다. 생명책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사함을 받고 의롭게 된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름이 기록돼 있습니다. 이들은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영적 음행에도 동참하지 않은 흰 세마포를 입은 자들입니다. 진리를 생명처럼 받들며 믿음의 정절을 지킨 자들로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입니다(계 14:4-5).
이제 17장의 바벨론 멸망으로부터 시작된 악의세력들에 대한 심판은 악의 세 축인 짐승과 거짓선지자와 용의 심판에 이어 이들의 추종세력들인 불신자들까지 불못에 처해짐으로 하나님의 심판은 일단락됩니다. 이로서 창 3:15절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구속사는 악의 척결을 통해 성취의 절정을 이루면서 이에 대응하는 구원의 완성을 도래시킵니다. 이런 사실이 21-22장에 이어지는 새 창조의 질서회복과 승리한 교회를 상징하는 새 예루살렘 성의 영광을 통해 소개됩니다.
'요한계시록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요한계시록 구속사(제 20 강) : 재림의 소망과 종말적 신앙관(계시록 최종 강의안) (1) | 2013.09.17 |
---|---|
[스크랩] 요한계시록 구속사(제 19 강) : 새창조의 질서회복과 교회의 영광 (0) | 2013.09.17 |
[스크랩] 요한계시록 구속사(제 17 강) : 백마 탄 자의 등장과 짐승의 멸망 (0) | 2013.09.16 |
[스크랩] 요한계시록 구속사(제 16 강) : 큰 성 바벨론의 멸망 (0) | 2013.09.14 |
[스크랩] 요한계시록 구속사(제 15 강) : 음녀 바벨론과 짐승 (0) | 2013.09.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