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 창조이야기
성경을 열면 제일 먼저 대하게 되는 말씀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셨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바울은 천지 창조는 예수님에 의한 것이고, 예수님을 위한 것이라고 증거해 주고 있다.
이는 곧 만물의 창조 목적이 예수님의 필요에 의하여서 만들어 졌다는 것이다.
골 1:15-17=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만물이 예수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만물을 통하여서 예수님을 드러내고 있다는 말씀이다.
이처럼 예수님에 의해서 창조된 세계는 예수님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다.
그래서 예수님 이야기가 중심 주제인 성경의 첫 장을 열면서부터 창조이야기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만물을 통하여서 은유적으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계신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에 나오는 만물을 통하여 예수그리스도를 보아야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뜻을 올바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친히 모든 성경은 자신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요 5:39="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눅 24:27="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그렇다면 모든 성경 속의 이야기를 예수그리스도 이야기로 해석하여야 한다.
즉 성경에 나온 모든 이야기들을 예수님과 관계된 이야기로 보라는 것이다.
예수님과 관계된 이야기로 본다 함은 곧 예수님이 하신 일 중심으로 본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예수님이 자기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으므로 당연히 예수님 이야기가 증거 되는 곳에는 죄인 이야기도 함께 다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계신 곳엔 반드시 죄 문제가 따르게 되어 있고, 죄가 없는 곳엔 예수님이 필요가 없다.
성경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자기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는 이야기가 중심주제이다.
그것이 창조이야기이든,
전쟁이야기이든,
영웅호걸이 죽고 사는 문제이든지,
민초들이 살아가는 이야기이든지 모두 예수님과 연관성이 있다.
성경은 인간을 행복하게 살도록 가르치는 삶에 지침서도 아니고,
병을 고치는 의학서적도 아니고,
돈을 많이 벌게 해 주는 경제서적도 아니다.
성경은 오직 예수님에 의하여 죄인이 구원을 받는 구속사 이야기로 가득 채워져 있다.
이러한 전제조건으로 성경을 예수님을 통한 죄인 구원 이야기로 탐사해 보자.
성경을 펼치면 첫 장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으로 운을 뗀다.
천지(天地)란? 하늘과 땅이란 말이다.
성경이 만약 예수님의 구속사를 주제로 하지 않는다면 그냥 문자적으로 아!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구나! 라고 이해하면 된다.
만약 성경을 문자적으로 하늘과 땅 이야기로 본다면 성경을 이해하는데 있어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은 전혀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지혜와 지식으로도 얼마든지 성경을 문자적 의미로 충분히 이해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성경은 예수님을 통한 자기백성의 구원이야기가 중심주제이다.
그렇다면 천지창조 이야기를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만드셨구나! 라는 식으로 이해하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알다시피 모든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들이다.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은 성령의 감동 없이는 성경해석이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성령은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하여 성경을 기록하셨다.
그러므로 성경을 예수그리스도 이야기로 보지 않고 그 외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은 성령이 성경을 기록한 목적에 위배되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성경을 억지로 풀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벧후 3:16절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성경을 잘못 푼다는 것은 인간 입장에서 보지 말라는 말이다.
성경을 인간 입장에서 풀이하게 되면 멸망에 이른다고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인간을 위해서 기록한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물이 예수를 위하여 창조가 되었다고 하였으니 인간 또한 예수를 위하여 창조가 된 자들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인간 중심으로 이해하면 안 되고 창조주이신 예수님 입장에서 보아야 된다는 것이다.
성령을 철저하게 예수님 입장에서 성경을 해석하도록 계시하신다.
어떤 책이든 저자 입장에서 책을 이해하여야지 독자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하게 되면 오해를 하게 된다.
세상에서도 어떤 사람이 책을 내면 저자 직강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하여서 독자와 저자의 만남을 갖는 시간을 갖는다.
이유는 저자가 책을 쓰게 된 동기이며 책의 흐름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를 독자들에게 알려주기 위함이다.
이는 책 내용을 곡해하지 말라는 뜻에서 이런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다.
성경 해석은 첫째도 성령의 감동이고, 둘째도 성령의 감동하심이다.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시는 해석을 일컬어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라 한다.
계시(啓示)란 말은 하나님께서 눈을 열어서 보여 주신다는 뜻이다.
성경을 계시의 책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열어서 보여 주시지 않으면 그 의미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알게 해 주시는 예수가 있고, 인간 입장에서 아는 예수가 있다.
여기서 한 성경을 가지고 두 예수 이야기로 전개 할 수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즉 인간 입장에서 예수이야기를 할 수 있고, 성령 입장에서 예수이야기를 할 수 있다.
인간 입장에서 예수를 이해하게 되면 베드로의 말대로 성경을 억지로 풀게 되는 것이므로 멸망을 받는다.
문자적으로 동일한 예수를 말하지만 전혀 다른 예수이야기로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구원과 멸망이라는 극과 극의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
한 쪽은 예수로 구원에 이르지만, 한 쪽은 예수 때문에 멸망을 받게 된다.
그러니 성경해석은 함부로 다룰 수 없는 폭탄과 같이 위험한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에 떨어진 폭탄인 셈이다.
이쯤 되면 작금의 한국교회가 얼마나 예수라는 폭탄을 잘못 다루고 있는지 짐작할 수가 있다.
예수라는 폭탄을 잘 다루면 구원을 얻지만 잘못 다루면 풍비박산이 난다.
수많은 사람이 예수라는 폭탄을 잘못 다루어서 저주의 길로 가고 있다.
성경이 얼마나 위험한 책인지 이 정도 살펴보고 다시 창조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자! 이제 성경을 열어보자.
창 1: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성경적 언어로 말하면 하나님은 태초에 천(天,영靈,빛)의 세계와, 지(地,육肉,어두움)의 세계로 창조하셨다.
이를 예수님이야기로 전개한다면 어떻게 해석이 될까?
예수라는 이름 속에 어떻게 해석이 되어질지가 힌트가 들어가 있다.
왜냐하면! 예수라는 이름이 자기백성과 남의 백성, 즉 너희와 저희로 두 쪽으로 갈라내는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라는 이름 속에 담긴 뜻으로 본다면 예수님에 의해서 구원받을 자와 구원받지 못할 자로 나누어져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야기로 창세기 1장 1절을 본다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은 곧 하늘과 땅을 창조하였다는 말이 아니라 천국 백성과 지옥백성을 창조하셨다는 말이 된다.
이는 곧 하나님은 애당초 예수님을 위해서 천국과 지옥을 만드셨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천국과 지옥을 만드셨다는 것은 곧 천국백성도 창조하셨고, 지옥 백성도 창조하셨다는 말이다.
이를 인간 구원이야기로 보면 천국에 갈 백성과, 지옥에 갈 백성을 창조시에 이미 작정해 놓았다는 말이다.
바울은 이 사실을 토기장이 비유로 말하였다.
롬 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이 없느냐"
하나님께서 모세와 바로를 또는 에서와 야곱을 들어서 하나는 천국의 그릇으로 만드셨고, 하나는 지옥의 그릇으로 만드셨다고 한다.
앞으로 천국백성과 지옥 백성이 만들어 질 것이 아니고, 이미 만들어졌다고 한다.
야곱과 에서가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결정이 되었다.
예례미아 선지자는 자신이 구원을 받고 보니 자신의 구원은 자신이 엄마 뱃속에서 만들어지기 전에 즉 이미 창세전에 이루어진 것임을 알았다.
렘 1장 4-5절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5 내가 너를 복 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그래서 성경에서는 성도의 구원 사건을 창세전에 이미 이루어진 사건이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창세전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인간에 의해서 번복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천국에 갈 자나, 지옥에 갈 자 모두가 예수님을 위하여 창조가 되어졌다는 사실이다.
빌 2:9-11=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위의 말씀을 보면 하늘에 있는 자나, 땅에 있는 자나, 땅 아래 있는 모든 자들이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영광을 돌린다고 한다.
하늘에 있는 자란? 천국에 있는 자들을 말하고,
땅 아래 있는 자란? 지옥에 간 자들을 말하고,
땅에 있는 자란? 세상에 잇는 자란 말이다.
그렇다면 현재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자들이나, 이미 천국에 간 백성이나, 지옥에 간 자들 모두에게 예수님은 주라는 사실이다.
즉 모두가 예수님의 주권 아래 잇다는 말이다.
결국 예수님은 모든 인간들이 창조주로서 심판주로 계신 것이다.
상식적으로 이해하면 천국에 간 자들이야 당연히 주님께 영광을 돌리지만, 지옥에 간 자들이 주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납득이 가질 않는다.
이는 인간 쪽에서 이해가 가질 않지만, 창조주 입장에서 이해를 하면 당연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왜냐하면! 토기장이 되신 하나님이 지옥의 그릇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즉 토기장이가 요강을 만들었으면 요강은 배설물을 열심히 받아 내는 것이 만든 이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 되는 것과 같다.
창조주에게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창조의 목적에 맞게 사용되어지면 된다.
지옥은 오물을 처리하는 곳이다.
오물들은 오물 창고에 들어가야 주인께 영광이 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선 천국과 지옥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다.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가 나온다.
눅 16:19-26=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20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21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26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재미있는 것은 지옥에 간 부자가 지옥에서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지옥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부자에게 다정하게 얘! 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과 이삭이라는 아들이 있는 것과 같다.
거지 나사로는 천국에 간 이삭을 표상하고, 지옥에 간 부자는 이스마엘을 표상한다.
그런데 둘 다 다정하게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아버지는 둘 다에게 다정하게 아들이라고 한다는 사실이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에게도 아버지이고 이삭에게도 아버지이다.
동일한 아버지이고 동일한 아들이지만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여 쫓겨날 자와 유업을 이을 자로 나누어진다는 것이다.
이스마엘이 약속 없는 이스마엘로 나고 싶어서 난 것도 아니고, 이삭이 약속을 받은 이삭으로 나고 싶어서 난 것도 아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운명이 결정이 되었다. (에서와 야곱도 마찬가지이다.)
성도가 놀라야 하는 것은 천국의 그릇으로 창조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성도는 이 사실을 뼛속 깊이 깊이 새기고 또 새기며 살아가야 한다.
그래야 어떤 형편에 처한다 할지라도 범사에 감사 할 수가 있게 된다.
성도가 예수를 믿는데 자기가 알아서 믿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믿게 해 주셔서 믿은 것이니 이 어찌 횡재가 아니라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엄청난 사실을 모르는 자를 시편 49:20절에서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자는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 고 하였다.
자신이 구원의 그릇으로 지음 받았음을 안다면 세상에서의 삶이 비록 거지 나사로 같이 산다고 하여도 불평할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신자가 세상에서 불평하고 원망한다는 것은 구원의 놀라움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세상의 모든 성도들에게 이런 엄청난 구원을 깨닫는 마음과 눈을 달라고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엡 1:16-19=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 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음이야말로 세상을 이기게 하는 힘이 된다.
바울은 이 사실을 알았기에 감옥에서도 찬송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예수님이 모든 만물의 주가 되기 위해서도 반드시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창세기로 돌아가서 창조 이야기를 살펴보자.
창 1장 1-2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만든 세상이 무슨 연고인지는 몰라도 빛과 어두움이 한데 섞여서 혼돈하다고 한다.
아니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혼돈 된 세상을 만드실 리는 없을 터이다.
그런데 창세기의 증거는 하나님께서 창조한 세계가 혼돈 된 세계라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창조의 첫째 날부터 혼돈 된 세상을 갈라내는 일로 시작하셨다.
창 1:3-5=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4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5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하나님은 지금 빛과 어두움이 섞여 잇는 혼돈된 세상을 갈라내시는 일을 창조이야기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빛을 하늘이라고 한다면 어두움은 땅이다.
빛을 천국이라고 한다면 어두움은 지옥이라 하겠다.
빛에 속한 자를 성도라 한다면 어두움에 속한 자를 마귀의 자식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각자가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다.
마치 집안에 아이들이 어지럽혀 놓은 것들을 부모가 제자리로 정리정돈하고 기분 좋아하는 것과 같다.
둘째 날 역시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랫물로 나누이는 일을 하셨다.
창 1:6-8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7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8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셋째 날 역시 땅과 바다를 갈라내는 일을 하셨다.
창 1:9-13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10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11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12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13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세째 날이니라"
그리고 넷째 날, 다섯째 날, 여섯째 날 3일간은 갈라낸 곳을 채우는 일을 하신다.
하늘에 필요한 것들을 채우고 땅에 필요한 것들을 채우고 바다에 필요한 것들을 채우신다.
성경의 증거는 이렇게 혼돈되어 섞여 잇는 것을 갈라내고 채우는 일을 창조라고 한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창조 그러면 무엇을 만드는 것으로 이해를 하지만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창조란 갈라내는 일을 창조라고 한다.
왜? 성경은 혼돈 된 것을 갈라내는 일을 창조라고 말하고 있는가?
이는 성경의 중심 주제가 예수님께서 천국백성과 지옥백성을 갈라내는 일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창조이야기를 갈라내는 일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가 구원받는 것을 거듭난다고 하면서 출생 즉 창조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 창조 이야기를 예수님의 구원사로 이야기하면 하늘에 속한 자와, 땅에 속한 자가 함께 섞여 있는데 예수님께서 하늘 백성은 하늘로 보내고, 땅에 백성은 땅으로 보내고 계신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천국에 간 자나, 지옥에 간 자 모두가 영원하다는 것이다.
하늘 백성이 천국으로 가는 것을 영생이라고 하고, 땅에 백성이 지옥으로 가는 것을 영벌이라고 한다.
한 쪽은 생명으로 영원하고 한 쪽은 벌 받음으로 영원하게 된다.
천국백성은 천국에서 영원하고, 지옥 백성은 지옥에서 영원한 것이다.
그러니 성경이 말하는 영생이라는 말뜻은 예수님의 생명으로 산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을 영생의 삶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아담이 예수님의 생명으로 영원히 살기를 바라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라는 것은 인간의 창조 목적은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창 2장 7-17절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자세히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시고 그를 에덴동산으로 이끄심을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에덴동산으로 이끈 이유는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함이다. 아담은 생명과를 통하여서 한번의 변화가 되어야 하는 존재로 창조가 되었다.
즉 아직 불완전한 자란 말이다.
어떤 면에서 불완전한가?
아직 영생하는 자가 아닌 상태에서 불완전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 창조된 아담은 영생하는 자가 아님을 알 수가 있다.
왜? 하나님은 아담을 처음부터 영생하는 자로 만들지 않고 꼭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도록 하셨는가?
이는 인간은 생명과를 통하여서만 영생 할 수 있는 자로 만들기 위함이다.
즉 아담이 예수의 생명으로 영생하는 자가 되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그런데 아담이 착각하기를 자신은 이미 영생하는 자인 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신약적인 의미로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서 영생하는 인간이 되도록 애초부터 그렇게 작정하셨다는 말이다.
그러니 예수의 생명이 없는 인간은 흙이지 인간이 아니다.
참 인간이란? 예수의 생명을 가진 자이다.
이런 자에게만 천국에서 살 자격이 있고 영생하시는 하나님이 참 아버지가 되신다.
마치 아브라함에겐 육으로 난 이스마엘과 약속으로 난 이삭, 이 두 아들이 있었지만 약속으로 난 이삭이 아브라함의 유업을 이을 참 아들이었던 것과 같다.
이스마엘과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똑 같은 아들이지만 그 속에 하나님의 약속이 담겨져 잇는 아들인가? 아닌가? 로 유업이 결정되었다.
성경은 천국을 유업이라고 말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예수님의 생명을 가진 자 만이 하나님의 참 아들이 되어 천국을 유업으로 이을 자가 되는 것이다.
즉 예수의 생명이 없는 자는 생물학적으로는 인간이라고 하지만 영적으로는 인간이 아닌 짐승에 불과하다.
예수님이 이삭과 같이 하나님의 약속으로 난자 곧 창세로부터 아버지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들을 찾아내서 천국으로 보내시는 일을 하시러 오신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이미 영생 주시기로 작정 된 자들을 찾아가서 생명을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위해서 예수라는 이름으로 아들을 세상에 파송하셨고 예수님은 그 이름대로 하나님께서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기 백성들을 찾아내어서 영생을 주신다.
그럼 예수님께서 창세 전에 이미 천국백성으로 창조된 자들을 어떻게 찾아내시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이 세상에선 천국백성과 지옥백성이 함께 섞여 있다.
섞여 있다는 것은 육안으로는 누가 천국백성이고, 누가 지옥 백성인지 모른다는 말이다.
그런데 섞여 있는 그 무리들 위에 하나님의 신이 운행을 하고 계신다고 하셨다.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신다는 말은 성령이 무엇인가를 일 하신다는 말이다.
즉 성령께서 누가 천국백성이고 누가 지옥백성인지를 갈라내는 일을 하신다는 말이다.
구원이란? 세상 속에서 하늘 백성으로 찾아내어지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하늘 백성을 찾아내는 방법은 하늘에 말로 찾아내신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소리로 하늘에 속한 자를 찾아내시는 것이다.
이 세상은 하늘과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그 누구도 하늘에 소리를 모른다.
하늘로부터 오신 예수님께서 하늘에 소리를 한다는 것은 이 땅 입장에선 외국말인 셈이다.
이를 성경에선 생소한 언어 즉 방언이라고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생소한 방언을 알아먹는 자들이 잇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찾아내는 것을 양과 목자의 비유로 말씀하셨다.
요 10장 3-4절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그가 양 앞서 가면 양은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가느니라"
목자가 양을 찾는 방법이 아주 간단하다.
목자가 양 앞에서 이름을 부르면 양은 그 음성을 알고 따라 나선다는 것이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따라 나선다는 것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각자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다.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이미 창조가 되어 있는 존재란 말이다.
왜냐하면! 이름이란? 출생을 하여야 부모가 지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14장에 보면 구원 얻은 무리인 십사만 사천 명이 시온산에 섰는데 이들은 어린양이 어디로든지 인도하는 대로 따라 가는 자들인데 모두가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다고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양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각각 불러내신다고 하였다.
이는 마치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던 베드로를 예수님께서 찾아가셔서 베드로야 나를 따르라고 하시자 그 말씀 한마디에 그물과 배를 버려 두고 예수님을 좇던 베드로의 모습과 같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의문을 가질 수가 있다.
베드로는 어떻게 예수님이 구주인 줄 알고 따라 나섰느냐 이다.
베드로가 척 알아먹고 따라 나섰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알아먹게 해 주셔서 따라 나섰는가?
이를 알게 해 주는 대목이 베드로의 신앙고백 장면에 잘 나와 있다.
마 16장 13-17절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묻기를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보는지 물으셨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보지 않고 그져 조금 똑똑한 선생 정도로 본다고 하였다.
이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묻기를 그러면 너희들은 내가 누구라고 보느냐! 라고 물으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대표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대답하였다.
이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려 주신 분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래서 인간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것은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요 1:11-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하나님께로 난자는 예수를 영접하게 되어 있고 하나님께로 나지 않은 자는 예수를 영접 할 수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영생주시기로 작정된 자들을 예수님 앞으로 끌고 오신다.
요 6:44절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느니라"
45절 "아버지께서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65절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로 올 수 없느니라"
이렇게 성령에 이끌림 받는 것을 일컬어 아버지께 듣고 배웠다고 한다.
우리가 언제 아버지로부터 듣고 배웠는가? 성령께서 알게 해 주셨다는 말이다.
성령이 천국복음을 알아먹도록 해 주셨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의 천국복음을 아무나 알아들을 수가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서 들을 수 있도록 귀를 주신 자만이 알아들을 수 있다.
계 2, 3장=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마 13:16절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귀 있는 자만이 들을 수 있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곧 하나님께로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받은 자를 찾아내기 위함이다.
그래서 말씀을 듣는 귀를 받은 것이 복된 자라고 하는 것이다.
귀를 받은 자는 예수님의 말을 듣는데 전혀 어렵지가 않다.
제가 과거에 중동지역에 근무한 적이 있는데 그곳은 회교국가라 여자들이 활동하는데 많은 제약을 받는 곳이라 한국여자를 만나기란 하늘에 별 따기와 같이 어려웠다.
그런데 어느 날 시내에서 동료들과 함께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다가 동양여인을 만났다.
반가운 나머지 말이라도 붙여 볼까 하여 접근을 하였다.
그런데 외모로는 그 여인이 한국 사람인지, 일본 사람인지, 중국 사람인지를 분간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 여인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찾아내는 방법은 간단하다.
오직 하나 그 여자에게 한국말을 하는 것이다.
그 여인이 한국 사람이라면 한국말을 알아먹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
그래서 한국말로 "아가씨" 라고 하자 대뜸 한국말로 "안녕하세요" 라고 반응을 보인다.
이렇게 한국말로 한국 사람은 찾아지는 것이다.
한국 사람이 한국말을 듣고, 말하는 일이 전혀 어렵지가 않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도 하늘백성을 찾아내는데 천국복음으로 찾아내시는 것이다.
천국백성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는데 전혀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이를 더 신앙적으로 확대하면 하나님께로 난 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홀로 다 이루신 것을 믿는데 전혀 어렵지가 않다.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다는 것도 술술 믿어지고,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도 술술 믿어지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도 술술 믿어지고,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 받았다는 것도 술술 믿어지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도 술술 믿어지고,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도 전혀 낯설지가 않고 술술 믿어진다.
예수님이 믿어지니 믿는 것이지, 믿고자 노력해서 믿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 복음은 하나님 백성들이 듣는데 에는 전혀 어려운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귀를 받은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가 전혀 낯설지가 않다.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인간 쪽에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을 차단시켜 놓은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선 자기 백성만 찾으라고 아들에게 "예수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일한 예수를 보아도 어떤 이는 주로 믿고, 어떤 이는 선생으로 믿는다.
예수를 선생으로 믿는 자는 예수님을 본받으려고 한다.
그래서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아야 된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본받을 분이 아니고 믿어야 할 구주이시다.
구주(救主)란 말은 나를 죄에서 구원하신 주님이라는 말이다.
예수님을 본받자고 하게 되면 날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무엇이 부족한가? 라는 식으로 자기 성찰을 하게 된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것은 자기의 허물을 가리고 점점 더 완벽한 인간으로 개조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날마다 자기 악함을 깨닫고 구원하심에 감사하는 것이다.
쥐꼬리를 삼년 묻어 두어도 쥐꼬리이듯이 죄인은 아무리 갈고 닦아도 죄인일 뿐이다.
신앙의 법칙은 자신을 갈고 닦으면 닦을수록 예수님과 멀어지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많이 깨달을수록 예수님과 가까워진다.
성도가 예수님의 무엇을 믿는가?
우리 죄를 십자가에서 대신 담당해 주신 것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성도가 담당해야할 말씀들을 다 지켜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구주로 믿는 자에겐 더 이상 말씀을 지켜서 갚아야 할 부채가 없다.
신약의 말씀은 우리가 날마다 갚아야 할 부채가 아니고, 예수님께서 너희가 갚아야 할 이런 부채를 다 갚아 주셨다는 것을 알게 하기 의하여 있는 것이다.
즉 말씀이 나로 하여금 더욱 더 죄인 되게 고발하고 있다.
그러니 말씀이 점점 더 내가 지고 잇던 채무가 어떤 것이었는가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또한 말씀이 예수님께서 내가 진 채무를 어떻게 갚아 주셨는가를 알게 하신다.
그러나 예수님을 선생으로 모시는 자는 자신이 채무를 갚으려고 지금도 열심히 말씀에 순종하려고 애를 쓴다.
이런 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기 때문에 자기가 애써 말씀을 지켜보겠다고 한다.
순종하여야 된다고 한다.
성경은 이런 자들을 일컬어 종의 영을 받은 자라고 한다.
종은 일하지 않으면 그 안에 영이 곤고해짐으로 불안해서 못산다.
종이 안식할 수 있는 길은 열심히 일을 하는 것이다.
일을 시키지 않으면 종은 마음이 불안하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하여서 주인에게 자기 존재를 알리고자 한다.
이런 자들에게 할 말은 그래 열심히 갚으세요.
이것도 갚아야 하고, 저것도 갚아야 합니다.
또 저기도 있네요,,,또 그 다음,,,,,언제 잠 잘 틈이 잇습니까?
열심 또 열심히 해야지요,,
종에겐 끊임없이 할 일만 남아 있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당연히 무엇인가를 할 것인가에 만 관심이 잇다.
열심히 갚아야겠다고 불철주야로 설쳐대니 다 이루신 예수님이 보일리가 없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홀로 다 이루신 것을 믿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깨닫는 마음과 들을 귀를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교회 안에서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예수님께서 홀로 다 이루셨다는 말씀을 전하고 계신다. 그러면 두 부류로 반응이 나타난다.
누가 하나님께로 귀를 받았고, 귀를 받지 않았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귀가 없는 놈들이 귀 있는 자들을 핍박을 한다.
길을 가다가 소경과 눈 뜬 사람이 길에서 부딪치면 눈 뜬 사람이 "아이구 제가 앞을 못 보았군요 죄송합니다" 라고 사과를 해야 한다.
그러면 앞 못 보는 소경이 일갈한다.
앞으로는 길을 갈 때 앞을 제대로 보고 다니시오.
누가 누구를 나무라야 하는가?
참으로 할 말이 없다.
이처럼 어처구니없이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죽임 당한 것이 십자가 사건이다.
그런데 이런 기괴한 일을 성경은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한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비밀을 아는 자로 산다는 것은 아픔이 동반되게 되어 있다.
달리 아픔이 아니고 알기 때문에 참아야 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기에 용서하여야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았기에 사랑하여야 하고,
예수님으로부터 섬김을 받았기 때문에 섬겨야 하고,
알기 때문에 참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섬겨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더러 모르는 놈을 나무라지 말고, 아는 놈이 하라고 한다.
아는 네가 참으라고 한다.
아는 놈이 손해 보라고 한다.
너는 천국을 유업으로 받는 놈 아니냐! 그러니 소망 없는 자들과 아둥바둥 싸우지 말고 양보하라고 한다.
저 놈들이야 세상이 전부이니 세상에서 기를 쓰고 살아야 하지만, 너는 천국이라는 유업이 있지 않는냐!
그러니 양보하라고 하신다.
이런 양보를 성령의 열매인 관용이라고 하고 관대함이라고 한다.
관용과 관대함은 아는 자만이 행세 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는 스데반이 죽어가면서도 죽이는 자들을 용서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용서는 용서받은 자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이다.
바울은 이런 아픔을 해산의 고통이라고 하였다.
산모가 겪는 산고는 기쁨이지 슬픔이 아니다.
해산의 고통은 자식을 낳는 소망이 있기 때문에 아픔이라 하지 않고 기쁨이라고 한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예수님 때문에 아픔을 당하면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신 것이다.
성도가 세상에서 복음으로 인하여 당하는 아픔들은 모두가 천국 백성이기 때문에 당하는 아픔이므로 복된 것이다.
깨달으면 기쁨이고 깨닫지 못하면 슬픔이다.
나는 예수를 믿는게 기쁜가?
아니면 짐스러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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