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선악과(善惡果) 이야기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증거해 주고 있다.
천지가 말씀으로 창조가 되었다는 말은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존재한다는 말이다. 말씀으로 창조된 피조물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은 곧 하나님 말씀 안에서만 가능하다.
즉 피조물은 말씀을 떠나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처럼 처음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만 살 수 있는 존재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에덴동산에 두시곤 하나님 말씀으로 살도록 하셨다.
말씀으로 산다는 말은 말씀을 지켜야만 살 수 있다는 말이다.
피조물은 창조주와 순종 관계 안에 있어야 살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창조주가 곧 생명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창조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곧 생명을 얻는 것이다.
아담이 영생 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 말씀을 지켜서 생명과를 먹는 것이었다.
아담이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으면 영원토록 에덴동산에서 살 수가 있었다.
그런데 아담은 창조주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만다.
이것은 곧 생명줄에서 끊어진 것과 같다.
마귀가 하나님의 말씀 밖으로 나오도록 한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곧 생명과를 먹는 것이다.
그런데 아담은 하나님이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 먹어버렸다.
이는 하나님 말씀을 지키지 않은 것이 되고 만 것이다.
선악과를 먹고 난 인간은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생명을 얻는 길에서는 완전히 차단이 되어 버렸다.
왜냐하면!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말씀 밖으로 떨어져 죽은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선악과를 먹고 난 후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이 없는 자가 되고 만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서 살 수 있는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어 생명나무로부터 격리시켜 버렸다.
인간은 과거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서 생명을 누리도록 허락이 되었지만 이제는 말씀을 지킬 능력이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인간에게 새로운 살 길을 약속해 주셨다.
그 약속이란 다름 아닌 여자의 후손을 보내 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여자의 후손을 보내 주신다는 것은 곧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과만 상대를 하시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제 인간들에겐 여자의 후손을 믿음으로서 생명을 얻는 새로운 길이 주어졌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로 사는 것이다.
이것이 죽은 자들에게 떨어진 새로운 말씀을 지켜야 하는 세계이다.
이 여자의 후손이 오셔서 인간이 지켜내지 못한 하나님의 말씀들을 대신 다 지켜 내실 것이다.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이 자기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준 것을 믿는 자들은 말씀을 지킨 것으로 간주해 주신다.
에덴동산 역시 말씀 안의 세계였으나 그때는 인간이 스스로 지켜야 하는 세계였다.
그러나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죄인들의 세계는 인간이 말씀을 지키는 세계가 아니라, 여자의 후손이 오셔서 말씀을 대신 지켜 주신 것을 믿어야 하는 세계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믿는 세계는 여자의 후손이 대신 지켜주는 세계이므로 인간의 행함이라는 것은 전혀 해당되지 않는 세계이다.
오로지 대신 지켜 주신 분을 믿는 믿음의 법만이 통용되는 세계이다.
이렇게 말씀을 대신 지켜주실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새 언약에서의 말씀에 순종하는 세계인 것이다.
신앙에는 두 가지가 있다.
말씀을 지켜서 사는 것이 있고! 예수를 믿어서 사는 것이 있다.
이름하여 행함과 믿음이다.
에덴동산에서는 내가 말씀에 순종하는 행함으로 살아야지만 살 수가 있었다.
하지만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에겐 말씀을 지켜서 사는 것은 사라지고 오로지 예수를 믿음으로서 살아야 한다.
사는 방법이 달라진 것이다.
하나님은 어느 시대나 말씀을 지킴으로서 살 수 있도록 해 놓으셨다.
과거 에덴동산에서는 아담이 생명과를 먹는 것이 말씀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이 말씀을 지킨 것을 믿는 것이 말씀을 지키는 것이 된다.
행함에서 믿음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사단은 어느 시대이고 말씀을 지키는 세계를 훼방하는 활동을 한다.
이것은 에덴동산의 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과거엔 에덴동산에서 활동을 하였지만 지금은 교회 안에서 활동을 한다.
에덴동산에도 먹으면 사는 것이 있었고 먹으면 죽는 것이 있었다.
지금도 교회 안에는 붙잡으면 사는게 있고 붙잡으면 죽는게 있다.
두 의(義)가 있다.
율법으로 난 의(義)가 있고 예수로 난 의(義)가 있다.
율법으로 난 의(義)로 살면 죽고 예수로 난 의(義)를 살면 영생한다.
두 행함이 있다.
믿음으로 하는 행함이 있고, 인간이 행한 행함이 있다.
믿음으로 난 예수의 행함을 붙잡으면 살고, 인간의 행함을 붙잡으면 죽는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의 두 과실을 다른 모습으로 두셨다.
먹으면 죽을 나무실과는 보기에도 좋고, 맛있어 보이고, 멋있게 해 놓았다.
그러나 먹으면 살 나무 실과는 볼품없이 만들어 놓으셨다.
마귀는 보기 좋은 것으로 인간의 눈을 사로잡아 버린다.
아담(인간)도 보기 좋은 과실에 빠져 들고 말았다.
결국 하나님 말씀에 불 순종을 하고 만 것이다.
알다시피 뱀이 에덴동산에서는 생명과 대신 선악과를 따먹게 함으로서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을 방해를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교회 안에서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죄사함을 얻고 의로워진다는 것을 믿지 못하도록 방해를 한다.
아담은 뱀의 미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어 버렸다.
선악사상에 빠지게 되었다.
아담 기준의 선악을 갖게 된 것이다.
이는 곧 하나님의 선악에서의 단절을 의미한다.
결국 아담은 선악과를 먹음으로서 하나님이 정해 놓은 선과 악에 대하여는 죽은 자가 되었다.
에덴동산에서의 하나님의 선이란? 오직 생명과를 먹는 것이다.
왜냐하면! 생명과를 먹어야 산 자가 되기 때문이다.
산 자가 되어야 영생하시는 하나님과 살 수가 있다.
이를 예수님은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하셨다.
즉 하나님은 산 자들과만 상대하신다는 말이다.
하나님 앞에서 아담은 선악과를 먹고 죽은 자가 되고 만 것이다.
산 자이신 하나님과는 죽은 자는 함께 할 수가 없다.
결국 죽은 자가 된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축출당하고 만다.
죽은 자인 아담이 내어놓을 수 있는 선(善)이란? 고작하여 선악사상에서의 선(善) 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선악 사상에서 뱉어낸 모든 것을 악(惡)이라고 한다.
선악사상에 빠진 인간이 말씀을 지킴으로서 만들어내는 선(善)은 하나님 앞에선 악(惡)일뿐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바라보는 시각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이를 거부한다.
인간들도 얼마든지 선(善)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선(善)이라고 내어 놓는 것을 거들떠보지 않으신다.
이 사실을 욥기 36장에서 증거하고 있다.
욥 36:5-8= "너는 하늘을 우러러 보라 네 위의 높은 궁창을 바라보라 6 네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 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7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8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
하나님은 인간들이 만들어 내는 선(善)과 악(惡)은 인정하지 않는다.
왜? 하나님은 인간의 선(善)과 악(惡)을 인정하지 않고 또한 영향도 받지 않으시는가?
그것은 인간은 선악과를 먹고 이미 하나님이 정한 선(善)으로부터 죽은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죽은 자들이 아무리 좋은 것을 선(善)이라고 내어놓아도 이미 죽은 자들의 선(善)이다.
짐승들의 세계에도 윤리와 도덕이 있다.
그러나 인간들은 짐승들의 도덕이나 윤리를 인정하지를 않는다.
왜? 그런가?
이는 생명의 세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도 선악과를 먹고 죽은 자가 된 인간은 짐승에 불과하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한다.
이는 인간에게서는 하나님이 바라는 의가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러면 하나님 앞에 인간의 의를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죄가 된다.
인간은 말씀을 지켜서 영생을 얻는 약속으로부터는 단절이 되었다.
그러므로 인간이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행함의 신앙은 새 언약 하에선 말씀을 지키지 않음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새 언약 하에서 말씀을 지키는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이 대신 말씀을 지켰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인간적으로 보면 예수를 믿는 쪽이 말씀을 지키지 않고 불순종하는 자처럼 보인다.
반대로 열심히 말씀을 지키고 행하는 쪽이 순종하는 자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를 믿는 쪽을 말씀을 지킨 자로 간주한다.
그리고 말씀을 열심히 지킨 것을 신앙으로 붙잡는 자를 말씀을 거역한 자로 간주해 버리신다.
정 반대로 취급을 하신다.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게 되면 하나님이 쳐 놓은 함정에 빠지고 말게 된다.
인간이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행함 신앙은 곧 예수그리스도를 불신하는 죄가 된다.
신약에서는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죄이다.
에덴동산에서 뱀은 말씀에 불순종하게 하였다.
그러나 에덴동산 바깥에서는 말씀에 순종하라고 한다.
항상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식으로 역사한다.
지금은 마귀는 말씀대로 살라고 한다.
너 그래서 어떻게 신자라고 할 수 있느냐?
그러면서 우리의 시선을 우리의 행함에 고정시키고자 한다.
말씀을 지키게 함으로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신 것을 가리게 한다.
그런데 새 언약 하에선 말씀대로 사는 것이 악이 된다.
즉 말씀대로 사는 것을 의(義)라고 생각하는 것이 악이다.
왜냐하면! 의는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만 있기 때문이다.
마귀가 내어놓는 신앙이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하는 신앙이다.
믿음이냐! 아니냐! 의 차이는 말씀을 지킨 주체가 누구이냐를 가지고 논한다.
인간이 말씀을 지켜야 한다고 하면 마귀의 신앙이다.
인간의 행함을 높이는 것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헛된 것으로 전락시키는 것이 된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의 피를 부정하게 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용서치 않는다고 경고를 하였다.
히브리서 10장 28-29절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29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누가 아들의 피를 부정한 자로 만드는가?
예수의 죽음을 헛되게 만드는 자이다.
믿음이란? 예수님이 대신 말씀에 순종한 것을 믿는 것이지 자기가 말씀을 지킨 것을 내어놓은 것이 아니다.
자기 것을 내어놓으면 놓을수록 예수를 더욱 더 욕보이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자기 행함을 근거로 신앙을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사단의 유혹에 빠져 있다는 증거가 된다.
사단에게 미혹된 자들은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이들은 예수를 믿기 때문에 더 적극적으로 말씀을 지켜야 된다고 한다.
성도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신앙이고 예수를 잘 믿는 것이라고 한다.
결국 믿음을 자신이 말씀을 지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말 자체가 자기 자신을 떠나 있는데도, 이들은 믿음을 자기 자신에게 두고자 한다.
결국 자기 주체 챙기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행함을 주장하는 자들은 예수를 믿음으로 신앙을 가늠하지 않고 자신이 말씀을 지킨 것으로 가늠한다.
자기 행위로 믿음을 가늠한다는 것 자체가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원론적으로 말을 하면 성도는 자책할 권리조차도 없는 자이다.
자책이란? 자기가 기대하던 것에 미치지 못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기대를 걸고 있지 않다.
자기에게 기대를 거는 것은 악이다.
사단의 미혹에 빠진 자들은 예수님의 공로에 자신의 행함을 더함으로써 온전한 신앙이 된다고 한다.
이들은 예수님의 공로만이 선이며 인간의 모든 것이 악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믿음은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만을 의지하고 높이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를 믿기 때문에 말씀을 지켜야 한다고 한다.
즉 말씀을 지킨 자신도 인정해 달라는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이 인정하는 선이란 인간에겐 없고 오직 예수에게만 있다는 것을 모른다.
선(善) 자체가 인간의 소관이 아닌데도 끝까지 선(善)을 만들어 내겠다고 한다.
죄인이 선(善)을 만들어 내겠다고 하는 것이 죄인 줄 모른다.
결국 사단의 미혹에 빠진 결과일 뿐이다.
그래서 인간은 행함이라는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운 선악과의 함정에서 빠져 나오지를 못하는 것이다.
왜? 선악과가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운가?
이는 인간의 영광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 시대에 바리새인들이 이 아름다움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였다.
우리는 저 세리들과 같이 방종과 방탕하게 살지 않고 철저히 하나님 말씀을 지켰으며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전도하고, 거룩하게 살았다고 한다.
하나님 우리 같은 자들이 천국에 안가면 누가 가겠습니까? 라고 당당하였다.
세리와 다르다는 이 말씀을 지켰다는 이 다름을 얼마나 인간들이 선호하는 영광이던가?
바리새인들에게 있어 행함 신앙은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운 선악과였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저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사람의 영광을 구하는 자들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사람에게 칭찬을 받으면 화(禍)가 있다고 한 것이다.
이는 사람에게 칭찬을 받고자 하는 자는 화가 있다는 말이다.
아나니아 삽비라처럼 화를 당한다.
아나니아 삽비라는 믿음으로 행한 행함이 아니고 자기들이 행한 행함이다.
왜? 자기들이 행하였는가?
이는 사람의 영광을 위해서였다.
행함 신앙엔 반드시 행한 그 사람을 드러나게 하는 영광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번 그 맛에 빠져들면 중독이 되어서 나오지를 못하게 되는 것이다.
죄인에게 칭찬이란? 마약과 같아서 한번 듣기 시작하면 끊기가 어렵다.
말씀을 전하는 목사 자신도 누가 설교를 잘한다고 해 주어야 존재에 의미를 느낀다.
설교에 반응을 살피게 된다.
그만큼 인간은 칭찬에 약한 존재들이다.
그래서 인간들은 본능적으로 자기가 무엇인가를 행한 것을 마음 뿌듯해 하고 기뻐하게 되는 것이다.
선악과를 선호한다.
그러나 선악과가 주는 자기 영광이라는 영적 나르시즘에 빠지면 죽는다.
행함 신앙을 공격하면 필사적으로 방어를 하고자 하는 것은 자기 존재가 부정 당하는 것은 참지 못하겠다는 본능적인 자기 지킴의 현상이다.
그래서 사단은 행함이 없는 믿음을 믿음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함을 가지고 믿음이라고 하신 적이 없다.
그러므로 자기 행함으로 믿음을 확인하려고 하는 것은 악이다.
왜? 굳이 믿음을 남에게 확인 받으려고 하는가?
이는 그 안에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확인 받고 싶은 것이다.
자기가 말씀을 지킨 것으로 믿음을 확인 받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이 홀로 다 이루셨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안 믿어지니 믿음을 만들어서라도 사람들에게 확인을 받고 영광을 받고 싶어하는 것이다.
믿음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다.
마치 광야에 내린 만나처럼 주어진다.
만나라는 말의 뜻이 "이것이 무엇이냐" 이다.
구약에 사람들은 만나를 먹으면서도 "이것이 무엇이냐?" 라고 하였다.
지금도 사람들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이것이 무엇이냐” 라고 비아냥거리면서 조소한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습니다” 라고 하면 그럼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냐 라고 역성을 내는 것은 “이것이 무엇이냐” 라는 것과 같다.
믿음이 하늘에서 뚝 떨어져서 믿어지는 사람들은 만나를 이것이 무엇이냐 라고 하지 않는다.
생명의 떡을 주심에 그저 감사한다.
어제도 주시더니 오늘도 변함없이 주시는군요.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그럼 내일도 주실 것을 믿고 푹 자겠습니다.
이게 믿음이다.
믿음을 만들어서 확인하려고 하지 말라.
왜? 사람들로부터 믿음을 확인 받고자 하는가?
이는 사람들의 관심을 붙잡아 두고자 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영광이 그립기 때문이다.
믿음은 외부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자기 안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누구에게 확인 받을 이유가 없다.
자기가 안다.
자기 안에서 믿어지는 증거가 없는 자는 그 무엇을 해도 믿어지지가 않는다.
어느 시대이고 항상 가짜일수록 진짜같이 행세하였다.
왜냐하면! 자신의 가짜 됨을 화려함으로 가리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짜 같이 행세하는 가짜에게 그것은 가짜 라고 하면 성질을 낸다.
그러나 진짜인 사람에게 당신 가짜라고 하면 그냥 씩 웃고 만다.
진짜를 가짜라고 한다고 하여서 진짜가 가짜 되는 것도 아니고, 가짜를 진짜라고 하여도 가짜가 진짜가 되질 않는다.
가짜인지 진짜인지는 자기 자신이 더 잘 안다.
그런데 인간이란 가짜인줄 알면서 진짜 행세를 한다는게 문제이다.
이는 죄는 스스로도 속이게 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귀를 거짓의 아비라고 한 것은 스스로도 속이고 남도 속이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지 않으신다.
또한 성령을 받은 자도 속지 않는다.
그 안에 빛이 있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않는다.
하나님은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라고 하신다.
이는 하나님께 귀를 받은 자를 찾아내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귀를 받은 자는 다 듣게 되어 있다는 말이다.
들을 귀를 받은 사람은 다 알아먹게 되어 있다.
반면에 귀를 받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말해도 알아먹지 못한다.
하나님이 다 그렇게 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쉬운 예를 든다.
MBC에서 월요일 밤 11시에 개그夜 라는 프로그램에 이런 코너가 있다.
두 친구가 만나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설명을 해 놓고 "뭔 말인지! 알지!" 라고 묻는다.
그러면 상대방 친구는 알았다는 듯이 응! 하고선 전혀 다른 엉뚱한 답을 내어놓는다.
동문서답(東問西答)을 한다.
그러면 질문한 친구가 하는 말!
야! 그게 아니야!
내가 말한 건 그게 아니고 이거야!
그래도 모르겠어!
야! 내 말을 몰라!
뭔! 말인지 몰라!
어휴! 답답해!
너! 커서 뭐가 될래!
너 왜? 사니!
야! 니 머리는 방학을 했나!
이제 좀 개학을 해라!
이젠 개학을 할 때가 됐잖아!
아무리 소리치고 가슴을 쳐봐도 모르는 것은 말로 설명할 수가 없는 법이다.
이게 어디 개그인가?
신학이지?
어쩌면 이 모습이 행함을 주장하는 자들과, 십자가만을 증거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서로가 서로를 보고서 가슴을 치며 "뭔 말인지 몰라!" 라고 애를 태운다.
믿음에 따르는 행함이란? 믿는 분의 행함을 말하는데도 기어코 믿는 자기의 행함을 내어놓고 믿음의 행함이라고 우기니 이를 어쩌겠나!
그럼 그냥 그렇게 노세요! 라고 할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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