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남자와 여자이야기
아담에게 있어 돕는 배필이란? 아담이 어디를 지향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하였다.
아담은 "네페쉬 하야"라는 "생령(生靈)"으로 있어서는 안 되고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사람으로 거듭나서 영생의 세계로 나아가야 할 자이다.
그러니까 생령(生靈)인 아담은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로 한번은 거듭나야 하는 자로 창조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아담은 당연히 영생의 세계로 이끌어줄 돕는 배필을 구하여야 했다.
그럼에도 아담은 자기 몸에서 나온 여자를 돕는 배필로 맞이하고 만다.
여자가 자기 몸에서 나왔다 함은 곧 여자는 자기 수준을 벗어 날 수 없는 존재란 말이다.
그럼 여자는 돕는 배필이 될 수가 없다 .
그럼에도 아담은자기 수준에 불과한 여자를 돕는 배필로 맞아들임으로서 화를 키우고 말았다.
이게 아담에게 있어서 악이고 타락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은 왜? 아담에게 돕는 배필을 주시고자 하셨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만약 아담이 영생의 세계로 나아가는 길이 순탄한 길이라면 하나님께선 굳이 돕는 배필을 주실 필요가 없다.
뭔가를 도울 때는 아담 스스로는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뭔가 방해꾼이 있고 위험한 요소가 있기 때문에 돕는 자를 주시고자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돕는 배필을 주시겠다고 한 것은 동산에 뱀이라는 악(惡)의 원흉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담은 이 뱀의 정체를 모른다.
하나님의 목적은 아담이 알지 못하는 이 악(惡)의 세력을 폭로시킴에 있다.
나중에 아담이 범죄하고 난 후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아담에게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전쟁이 있을 것을 말씀해 주셨다.
에덴동산에는 이미 뱀이 있었다.
알다시피 뱀은 아담을 죽음의 길로 끌고 간 장본인이다.
그렇다면 아담에게 돕는 배필을 주시겠다고 한 것은 뱀의 미혹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자 하심임을 알 수가 있다.
하나님이 작정한 창세전 언약의 그림 속에는 이미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간에 싸움을 담고 있었다.
그러므로 성경의 중심 사상은 창세기 3장 15절의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간에 일어날 싸움을 모티브로 하는 이야기로 전개 될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그래서 창세후에 주어진 에덴동산에서의 언약은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깨트린다는 것을 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이 범죄하자 그 악(惡)의 근본을 폭로한다.
하나님은 아담의 범죄 끝에 뱀(악)이 있음을 알려 주셨다.
그래서 아담의 범죄를 추궁할 때 아담에게서 하와로 그리고 하와에게서 뱀에게로 역(逆) 추적을 해 나가신 것이다.
창 3장 11-13절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12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결국 하나님은 아담의 범죄를 통하여서 악(惡)의 정체를 폭로하신 것이다.
그래서 모든 성경이야기는 뱀과 그 뱀의 머리를 깨트릴 여자의 후손과의 싸움 이야기가 중심 줄거리로 풀어져 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가 뱀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하게 된다.
그리하여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야는 뱀에게 사로잡힌 자기 백성들을 찾아오게 된다.
이렇게 찾아온 자들은 여자의 후손에 전리품이 된다.
그러므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간의 전쟁 이야기 속에는 전리품인 성도들의 구원이야기가 삽입이 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성도의 구원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주어지는 것도 다 이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의 중심 사상은 뱀의 머리를 깨트린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귀결되어지게 되는 것이다.
만물의 창조 목적이 이 창세전 언약을 구현하고자 함이다.
골 1장 16-17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하나님은 세상의 창조 목적을 분명하게 말해준다.
이는 예수그리스도를 위한 것이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서게 하기 위해서 창조를 하셨다고 한다.
이 세상은 한마디로 예수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한 활동무대이다.
이렇게 되면 성경에 나타나는 모든 것들은 예수 이야기가 된다.
에덴동산이나, 생명수 강이나, 선악과나, 생명과나, 아담이나, 뱀이나,,,
그 외 모든 것들은 예수그리스도를 만유의 주가 되게 하기 위한 세트에 불과한 것들이다.
사도요한 성령에 감동으로 천국을 보았다.
그런데 그 천국에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다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이러면 처음 하늘과 처음 땅에 속한 모든 것들은 예수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한 모델하우스와 같은 것임을 알 수가 잇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애초부터 이 세상은 사용이 끝나면 용도 폐기 되어 질 것으로 창조가 되었다가 증거해 주고 있다.
사도 베드로 역시 장치 이 세상은 불타 없어질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히 1:10-12절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11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12 의복처럼 갈아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 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
벧후 3:7절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오늘 우리가 살펴 볼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성도라는 전리품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들로 만들어지는지를 남자와 여자 이야기로 고찰해보고자 한다.
남자와 여자 이야기 속에 예수와 성도의 구원이야기가 씨눈처럼 심겨져 있기 때문이다.
도움이란? 언제나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베푸는 것이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도울 수가 있다.
이는 곧 도움이란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주어진다는 말이다.
성경은 남자를 하나님으로 상징하고 여자를 피조물로 상징하고 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남자는 씨를 주는 자이고 여자는 씨를 받는 자라고 하였다.
남자는 하늘을 상징하고 여자는 땅을 상징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되면 남자가 여자를 돕게 된다는 말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창조한 세계의 도움에 원리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도움을 입어야만 살 수 있도록 해 놓으셨다.
땅이 하늘에 것을 받아서 산물을 내는 것이 이를 보여주고 있는 그림이다.
죄란? 이를 역행하는 것이다.
약한 자가 강한 자의 도움을 거절하는 것이다.
피조물이 창조주의 도움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초림 사건으로 본다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도움을 거절한 것으로 나타났다.
창조주이신 예수님은 유대인(제자)들을 도울 수가 있지만, 피조물인 유대인(제자)들은 예수님을 도울 수는 없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이요.
예수님으로부터 도움을 입어야 한다.
신앙이란? 이 원리로 사는 것이다.
주께 도움을 입고 사는 것입니다.
이를 알고 감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들이 살아가는 죄의 세계는 하나님의 세계와 그 반대이다.
역설적이다.
이 세상은 낮은 사람들이 오히려 높은 사람들을 돕지 못해 안달을 한다.
없는 자가 있는 자에게 갖다 바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세상이다.
그야말로 시절을 좇아 선물은 낮은 데서 높은 데로 흐르고 있는 실정이다.
중소기업이 대기업에 갖다 바치지 않으면 살아남지를 못한다.
가진 자들이 없는 자들에게 왜? 안 가지고 오느냐! 라고 압력을 행사한다.
이 세상은 철저하게 약육강식의 법칙으로 다스려진다.
이게 바로 죄인들의 세계이다.
이름하여 타락이며 악이다.
이런 죄의 모순들이 교회 안에서도 그대로 횡행하고 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 할 존재들이 하나님을 돕겠다고 나서고 있는 것이다.
피조물이 창조주에 도움을 입고 사는 것이 정상적임에도 이 정상이 교회에선 통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 자신이 짓는 것이라고 하여도 말을 듣지 않는다.
기어코 수십억, 수백억씩 들여서 성전을 짓겠다고 충성경쟁을 벌리고 있다.
참으로 대단한 열성이다.
하나님도 말릴 수가 없다.
행 17:24-25=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 49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50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그토록 하나님의 집을 짓지 말라고 하여도 인간들은 말을 듣지 않는다.
하나님께 얻어먹고 살라고 하는데도, 죽어도 하나님을 먹여 살리겠다고 한다.
목이 곧아서 아무리 말을 해도 들어 쳐 먹지 않는다.
이런 현실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는가?
웃어야 하는가?
울어야 하는가?
이걸 신앙이라고 어찌 말하겠는가?
지혜로움이란? 자기가 누구인지를 바로 아는 것이다.
내가 지금 하나님께 얻어먹어야 할 자인지!
아니면 하나님께 갖다 바쳐야 할 자인지 아는 것이다.
자기 주제를 분명히 분간하고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담은 이를 분간치 못하였다.
도움을 입어야 할 자가 도움을 거절하고 만 것이다.
아담의 혈통으로 난 우리도 그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아비에 그 아들이다.
그래서 오늘은 이 무지몽매한 사건을 일으킨 아담과 하와 이야기를 남자와 여자 이야기로 풀어보고자 한다.
앞서 돕는 배필에서 언급했듯이 아담이 영생의 세계로 나아가자면 영생의 세계를 모르는 여자를 돕는 배필로 두어서는 안 된다.
아담이나 여자나 영생의 세계를 모르기는 동등하다.
어찌 보면 여자가 아담의 몸에서 나왔기 때문에 아담이 여자의 돕는 배필이 될지언정 여자가 아담의 돕는 배필은 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영생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라면 아담이 여자보다 한 수 앞서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이러면 아담이 여자를 돕겠다고 한 것도 잘못이다.
왜냐하면! 아담도 아직까지는 영생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즉 아담도 여자처럼 영생의 세계로 나아가는 길을 모르기 때문이다.
아담이 영생의 세계로 나아가야 하는 것을 창조의 순서를 가지고 그림을 그린다면 아담아 먼저이고 여자가 나중이다.
이러면 아담과 여자에게 있어 돕는 배필의 구도가 달라지게 된다.
나중에 나온 여자가 먼저 나온 남자를 돕는 배필에 모습의 그림이 아니고,
반대로 먼저 나온 남자인 아담이 나중에 나온 여자인 하와를 돕는 배필이 되는 그림으로 그려지게 된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남자와 여자의 의미는 예수님과 성도의 의미로서 돕는 자와 도움을 입는 자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함이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 속에 예수님과 성도간의 관계를 설정해 둔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의 돕는 배필은 여자가 아닌 하나님 자신이 되고자 하셨다.
그렇다면 "아담이 여자의 자리"에 있어야 하고, "하나님이 남자의 자리"에 서 있는 그림으로 그려지게 된다.
그런데 에덴동산에서의 아담과 하와의 그림은 아담이 남자가 되어 여자를 돕는 자로 그려졌다.
만약에 아담이 동산에 거주할 것 같으면 여자를 도울 수 있는 자로 설 수 있다.
하지만 동산에서 에덴으로 나아가야 하는 길이라고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아담 역시 돕는 자를 기다려야 할 처지이다.
아담이 영생의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면 아담 역시 남자가 아니라 여자의 위치에서 자신을 "영생의 세계로 끌어줄 남자"를 기다려야 한다.
남자와 여자가 창조가 되어진 순서를 보아서도 남자가 여자를 도울 수 있지 여자가 남자를 도울 수 있는 입장에 서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바울은 여자가 남자를 가르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서 생물학적으로서의 남자와 여자를 말하고 있지 않음을 첨언해 둔다.
영적인 이야기이다.
그럼 먼저 남자와 여자의 존재부터 살펴보자.
창세기 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먼저 아담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난 후 여자를 창조하였다.
창세기 2장 23절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위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남자에게서 여자를 빼 냈다고 말해주고 있다.
이는 곧 아담이 원래부터 남자인 것은 아니 라는 말이 된다.
아담은 그냥 사람이다.
아담이 남자가 된 것은 하나님께서 아담 속에 있던 “여자(hV;ai 이솨)”를 빼 내면서부터 아담이 “남자(vyai 이쉬)”가 되었다.
즉 처음 창조가 된 아담 속에는 “남성” 성(性)과, “여성” 성(性)이 함께 있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담 속에 있던 “여성 성(性)”을 빼내서 하와를 만듦으로서 아담은 남자가 되고 하와는 여자가 된 것이다.
성(性)으로 구분하면 남자와 여자로 구분이 된다.
하지만 성(性)을 떠나서는 남자나 여자나 모두가 사람이다.
사람이라는 말에는 남자나 여자의 구분이 없다.
남자도 사람이고 여자도 사람이다.
우리 옛말에 "남녀칠세부동석"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은 어릴 때는 남자와 여자의 개념을 모르다가 일곱 살 정도가 되면 이성에 눈을 떠서 남자와 여자를 알게 되므로 함께 하지 말라는 말이다.
실제로 어린아이들은 남자와 여자 구분하지 않는다.
차차 자라가면서 자아가 발달하고 이성(理性)에 대하여 눈을 뜨면서 자기 성(性)의 정체성을 알고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게 된다.
이는 몸의 구조를 통하여 인식에 변화를 몰고 오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는 딸 아이가 아빠 손에 이끌려 남자 목욕탕에 가고, 사내 놈이 엄마 손에 붙잡혀 여자 목욕탕으로 갈 수 있다.
이 때는 남자와 여자라는 성(性)의 정체성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딸아이가 아빠! 나 아빠랑 남자 목욕탕에 안 갈래! 라고 하는 때가 온다.
그럼 아빠는 아! 이놈이 이제 이성(異性)에 대하여 눈이 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제부터 남자는 남자로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되고, 여자는 여자로서 살아가는 법을 베우게 된다.
이성(異性)에 눈을 떴다는 얘기는 자아(自我)에 대한 눈을 떴다는 말이기도 하다.
아! 나는 남자(男子)이구나!
아! 나는 여자(女子)이구나! 를 알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자신이 남자이고 여자인 것을 알았다고 해서 모든 게 끝이 나는 것은 아니다.
이제부터 남자는 남자로서 살아가는 삶이 있고, 여자는 여자로서 살아가야 하는 삶이 남아 있다.
각 자 남자와 여자로서 살아가려면 무엇보다도 자신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필요하다.
남자는 “남자다움”이 있어야 하고,
여자는 “여자다움”이 있어야 한다.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이란 무엇인가?
이는 남자나 여자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이 만개하여 자기 구실을 제대로 할 때이다.
남자의 구실이 있고 여자의 구실이 있다
그 구실을 충분히 할 때 우리는 “남자답다” 혹은 “여자답다” 라는 말을 하게 된다.
이성에 눈을 떴다고 하여서 어린 초등학생이 여자 친구를 데리고 와서 아빠 나 결혼 할래요! 라고 한다면 난감힌 일이다.
자신이 온전한 남성이라는 것에 대한 눈을 떴다면 축하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아직 남자로 여물기도 전에 부모의 그늘을 벗어나서는 안 될 위치에서 결혼하여 독립하겠다고 한다면 이건 좀 곤란한 일이다.
남자가 아니라서가 아니라 남자 구실을 못하기 때문이다.
창세기 2장의 아담 역시 이런 점이 문제가 된다.
남성이냐! 여성이냐! 는 성(性) 문제가 아니고!
아담이 남자 구실을 제대로 하는 남자이냐? 에 있다.
여기서 남자 구실이란? 여자를 영생의 세계로 끌고 가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아담 역시 자신을 영생의 세계로 끌고 갈 돕는 배필을 필요로 하는 미숙한 인간이라고 한다면 아담이 남자로 살 것이 아니라 자기도 도움을 받아야 할 여자로 다소곳이 있어야 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남자를 보내 주셨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담은 자기도 돕는 자를 필요로 하는 주제에 자기 주제도 모르고 여자를 보고 남자 구실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 문제가 되었다.
남자란? “씨(생명)”를 가진 자를 말한다.
물론 아담이 가지고 있어야 할 “씨(생명)”는 “하나님의 생명”을 말한다.
아담에게 남자 구실을 하여야 한다는 말은 여자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줄 수 있는 상태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담은 아직 여자에게 “하나님의 생명(씨)”을 줄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아담은 생명과를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생명은 생명과 속에 있다.
그러므로 아담이 생명과를 먹지 전에는 자신도 생명을 받아야 할 여자인 것이다.
아담이 여자에게 줄 수 있는 씨란 고작하여 “네페쉬 하야” 라는 “생령”의 씨 뿐이다.
이 생령의 씨는 아무리 많이 주어도 그 속에 생명이 없기 때문에 뱀의 노리개감 밖에 안 된다.
하나님은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하나님의 씨(생명)”를 가진 자가 되기를 바라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씨가 들어 있는 “생명과를 먹으라” 고 명령하셨던 것이다.
아담이 만약 생명과를 먹었으면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여 “씨(하나님의 생명)”를 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생명과를 먹기 전의 아담은 아니다.
여자와 다름없다.
하나님의 씨가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아담은 남자 구실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인간적 입장으로 말을 한다면 아담은 지금 여자를 맞아들여 가정을 꾸릴 수 있을 만큼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강건하지 못하다.
아담은 초등학생과 같이 여자와 결혼할 시기가 아니라 오히려 남자 구실을 할 수 있는 자로 강건하게 자라가야 할 단계라는 점이다.
그럼에도 아담이 남자 구실도 못하면서 남자로서 살고자 한 것은 아담 자신에게나 여자에게나 커다란 불행의 단초가 되고 만 것이다.
오늘날 신자들이 가장 크게 속고 있는 점은 열심히 가르침을 받아야 할 자들이 가르침을 뒷전으로 하고 남에게 가르치고자 한다는 것이다.
아담의 모습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먹어서 믿음이 남자답게 강건하게 자라가야 한다.
그럼에도 자라기도 전에 하나님께 헌신해야 한다는 맹목적인 충성심으로 선생 노릇을 하고자 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설쳐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일을 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다.
문제는 자신이 정말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존재이냐는 것이다.
쉬운 말로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자인지 아니면 아직도 복음을 들어야 할 자인지 구분 하라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일이란? 인간들이 생각하는 차원에서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차원에서 말하는 일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일을 알려 주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우리가 무슨 일을 할까요? 라고 물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라고 하였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일과 하나님이 생각하는 일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아무리 하나님 말씀이 추상같이 명령을 한다고 하여도 자신이 그 말씀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인간인지 아니면 지킬 수 없는 인간인지 분간을 하여야 한다.
자기 주제도 모르면서 하나님 말씀을 지켜보겠다고 한다면 생각이야 가상하지만 그게 어디 하나님께서 기뻐할 일이던가!
그것은 하나님을 근심케 하고 한 숨 짓게 하는 일이다.
마귀는 항상 창조의 순리를 역리로 바꾸는 일을 한다.
믿어야 할 것을 행함으로 둔갑을 시켜 버린다.
이러면 창조주와 피조물의 위치를 바꿔치기 당하게 된다.
도움을 입어야 할 자가 돕겠다고 나서게 되는 것이다.
마귀는 우리의 신앙에 관심사를 생명과에서 눈을 돌리게 하여 선악과에 고정을 시키고자 한다.
선악과에 눈을 고정시키는 한 아담은 생명과를 먹을 수가 없다.
그래서 지금도 마귀는 신앙의 본질을 예수그리스도가 무슨 일을 하셨는가? 에서 눈을 돌리게 하고 대신 성도다운 삶에 관심을 갖도록 한다.
주객을 전도 시키는 일을 한다.
이렇게 되면 신앙의 초점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에서 떨어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로 옮겨지게 된다.
그러면 평생 헛 싸움만 하게 되고 만다.
이러한 마귀의 간계(奸計)를 알아차리라는 차원에서 성도는 남자답게 강건하게 자라가야 한다.
아직 의(義)의 말씀에 대해서는 경험하지 못하고 젖도 못 떼었으면서 말씀에 순종하여야 하겠다고 하는 것은 교만이다.
또한 근근이 끼니 걱정하며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겠다고 전셋돈을 빼서 바치는 것은 어리석음이다.
복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남을 가르치겠다고 설치는 것은 또한 무슨 망발인가?
말씀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젖먹이가 어쭙잖게 성경 구절 몇 개 외워 가지고 전도를 한답시고 어깨에 띠를 띠고 길거리로 나가서 “주 예수를 믿으십시오 그래야 구원을 얻습니다” 라고 한다고 해서 그걸 어찌 충성이라고 하겠는가?
그것이 어찌 하나님이 영광을 받고 기뻐하실 일이겠는가?
속된 말로 학교에 열심히 다니면서 자라가야 할 어린애가 공부할 생각은 하지 않고 껌 팔아서 아버지 집 짓는데 보태겠다고 한다면 어느 아버지가 좋아하겠는가?
그게 어찌 아버지를 돕는 것이며, 아버지가 기뻐하실 일이겠는가?
신앙생활에 있어서 문제의 심각성은 아버지가 원하지도 기뻐하지도 않는 일을 아버지가 막지 않는다는 것이다.
육신의 아버지는 아들이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껌 팔아 아버지 사업에 보태겠다고 돌아다닌다면 두들겨 패서라도 막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자비로운 하나님 아버지는 막지를 않고 그대로 지켜 볼 뿐이다.
탕자 비유에서 이를 볼 수가 있다.
철없는 둘째 아들이 사업을 하겠다고 아버지에게 미리 유산을 앞당겨서 달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의 아버지는 말리지도 않는다.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이 묻지도 않고 거금을 손에 쥐어주어서 집을 나가게 한다.
무슨 이런 아버지가 있는가?
그런데 성경은 그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고 아버지라고 증거해 주고 있다.
왜?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유산을 상속해 달라는 것을 막지 않고 원하는 대로 들어 주셨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이것은 말린다고 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스스로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도 알아야 하고 세상엔 강도와 사기꾼들이 널려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세상의 악함을 알고 무서운 줄 알게 하기 위함이고 자기 주제를 알게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보호에서 벗어나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 아버지 집을 떠나겠다는 소릴 안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는 집을 떠나가는 둘째 아들을 말리거나 붙잡지 않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떠나가는 자식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실 뿐이다.
누가 이 아버지의 마음을 알까?
아무튼 둘째 아들은 거금을 손에 쥐고 장미 빛 꿈을 안고 아버지 곁을 떠났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기다리고 있던 강도와 사기꾼들을 만나 가지고 있던 재산을 몽땅 털리고 탕진해 버리고 만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난 후에야 비로서 세상은 도적놈 소굴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상은 자기 힘으로 살아 갈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기가 평안히 살 곳은 아버지 집뿐임을 깨닫게 되었다.
아버지 집을 떠나 자기 주제를 온전히 파악한 그 깨달음이 급기야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도록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집을 나갈 땐 아들로 나겠는데 돌아 올 땐 스스로 생각하여 종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아버지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무능하고 못난 아들이었는가를 제대로 알게 되어 이제는 아들이 아니라 종의 심정으로 돌아온 것이다.
집을 나가 강도를 만나고 사기꾼을 만나고 보니 자기 주제를 알게 된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스스로 종이 되겠다고 돌아온 아들을 종으로 보지 않고 이제야 진정한 아들로 인정하여 유업을 맡기는 금가락지를 끼워주신다.
결국 아버지는 세상에 악당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고 아들이 아버지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려고 아들이 집을 나간다는 것을 붙잡지 않은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세상엔 강도가 있다는 것과 자기 능력으로는 살아갈 수가 없는 무서운 곳인 줄 알게 하시려고 비싼 수업료를 치른 것이다.
이는 곧 아담이 자기 주제를 모르고 남자 행세를 하다가 뱀에게 사기 당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유리하다가 다시 에덴동산으로 돌아오기까지 비싼 수업료를 내는 것과 같다.
아담이 에덴동산으로 다시 돌아오는데 하나님의 아들이 죽는 비싼 수업료가 지불되었다.
그런데 집에 있는 큰아들은 아직까지 자기 주제를 모른다.
그래서 자신은 여전히 아들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은 한 번도 아버지 명(命)을 어기지 않고 충성하였기 때문에 진짜로 아버지가 기뻐하는 아들인줄 알고 있다.
하기사 집 밖을 나가 보지 않았으니 세상에 악당이 있는 줄 모르니 큰 소리를 칠 수밖에!
이 놈이야 말로 아버지의 근심거리이고 두통거리이다.
이 큰 아들의 문제는 아버지는 열심히 일만 하면 기뻐할 것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탕자 이야기를 에덴동산의 아담이야기로 그려보시기 바란다.
왜?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가 뱀에게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는 것을 말리지 않고 물끄러미 보고 계셔야만 했는지를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남자와 여자에 대하여 더 상고해 보자.
내가 남자다!
또는 나는 여자다! 라는 것은 말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나 자신이 도움을 받을 존재냐!
아니면 도와줄 존재냐! 를 아는데 있다.
그렇다면 창세기 2장의 아담은 도움을 받으려고 하여야지 남을 도와주려고 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아담에게서 피어나야 할 성(性)은 씨를 주어야 할 남성인가?
아니면 씨를 받아야 할 여성인가?
아담에게서 피어나야 할 “성(性)”은 여자에게 씨를 줄 “남성(男性)”이 아니라, 하나님께 씨를 받아야 할 “여성(女性)”인 것이다.
아담은 남자로 살고자 해서는 안 되고 여자로 살고자 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그는 하나님이 세 번째로 제시하는 돕는 배필을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돕는 배필은 그에게 “남성(男性)”으로 나타날 것이다.
바울의 이 사실을 정확히 알고 진짜 남자를 성도들에게 소개시켜 준다고 하였다.
고린도후서 11장 2절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바울이 본 것처럼 아담은 정결한 처녀로 그리스도를 남편으로 맞아들였어야 했다.
그러나 아담이 스스로 남자가 되어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다는 사실은 비극의 시작이 되었다. 그 비극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유리하는 아담들의 조상이 되고 만 것이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남자와 여자의 차이는 “씨를 주는 자”와 “씨를 받는 자”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씨란? 생명과 속에 담겨진 “씨” 곧 “하나님의 생명”을 말한다.
남자는 생명의 씨를 주는 자이고,
여자는 남자가 주는 생명의 씨를 자궁에 받아서 생명을 꽃피워야할 위치에 있는 자이다.
그렇다면 아담은 아직 생명의 씨를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이므로 당연히 여자로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아담이 기다리는 남자는 어디에 있는가?
아담은 누구의 “씨(생명)”를 받아야 하는가?
아담이 받아야 할 “씨(생명)”는 당연히 “하나님의 씨(생명)”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씨를 받지 못한다면 아담이 여자에게 줄 수 있는 씨는 고작 하여서 뱀의 미혹에 넘어갈 “네페쉬 하야”인 “생령의 씨(생명)”일 뿐이다.
창세기 5장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 자기들의 형상을 닮은 사람을 생산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런데 아담이 자기 형상으로 낳은 모든 후손들은 예외 없이 다 “죽었다”고 한다.
팔백년을 살고, 구백년을 살아도 결과적으로 “다 죽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성경이 아담의 후손들은 다 죽었더라고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씨(생명)”를 받지 못한 자들은 다 죽더라는 것을 말해주고자 함이다.
왜? 죽었다! 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가?
그 이유는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씨(생명)”를 받지 못하고 쫓겨났기 때문이다.
아담은 “씨(생명)”도 없는 주제에 여자에게 남자 구실을 하겠다고 한 것이 화근이 되어서 “하나님의 씨(생명)”에서 멀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아담이 여자를 통하여서 생산이 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이 없어서 죽은 자로 태어나 죽게 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이 죽는 이유는 “하나님의 씨(생명)”를 받지 못한 조상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의 조상이 “하나님의 씨(생명)”을 받지 못하고 쫓겨났으니 모든 인간들은 남자가 아니라 종신토록 여자로 살아가게 된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에게 유일한 소망이라면 하나님이 보내 주실 남자뿐이다.
신랑으로 오실 한 남자를 기다려야 한다.
“마치 등불 들고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들처럼!”
이 땅에 모든 인간은 아담을 조상으로 두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선 모두가 여자이다.
남자는 오직 하나님 자신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떠나가는 아담에게 남자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목적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씨(생명)”를 주어서 사람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씨(생명)”를 성도라는 밭에 뿌려 삼십 배나, 육십 배, 혹은 백 배에 이르는 결실을 거두실 것이다.
성경에서 교회와 성도를 모두 “여성 명사”를 쓰고 있는 이유는 예수님만이 남자이고 모두가 "예수님의 생명(씨)"을 받아야 하는 위치에 있는 여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교회를 예수그리스도의 “신부(新婦)”라고 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 한 남자에게 성도들을 중매한다고 한다.
이제 “예수님의 씨(생명)”를 받은 사람은 이제 여자가 아니라 남자가 된다.
성도를 딸이라 하지 않고 아들이라 하는 이유는 “아들의 영”을 받았기 때문이다.
성령을 아들에 영이라 하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이다.
그리고 분명히 아들이라고 하면서도 “남성 명사”를 쓰지 않고 “여성 명사”를 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예수님의 생명을 받으면 분명히 남자가 된다.
그러나 구원 받은 성도라 할지라도 예수님 앞에선 여전히 예수님께서 공급하는 은혜와 사랑을 받아야만 살 수 있는 여자이다.
성도는 생명이 없는 세상 사람들 앞에선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로서는 남자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먹고 살아가야 하는 입장에선 여전히 여자이다.
남자처럼 사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 아니다.
신앙의 본질은 잠시라도 예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살 수가 없는 여자로서 사는 것이다.
나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처럼 나무에 항상 뿌리가 공급해 주는 생명이라는 진액을 받아야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이 지혜로움이다.
가지는 진액이 끊기면 시름 시름 말라져 죽게 된다.
여자 역시 만찬가지이다.
남자의 사랑을 받지 못한 여자는 불행하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여자는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자이다.
남편의 사랑을 듬뿍 받고 사는 여자는 얼굴에 빛이 난다.
그러나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사는 여자는 얼굴에 그늘이 지게 된다.
남편의 사랑은 여자로 하여금 빛을 준다.
이런 노래가 있다.
“사랑을 하면은 예뻐져요”
“아무리 못 생긴 여자라도 사랑을 하면은 예뻐져요”
왜? 못 생긴 여자가 사랑을 하면 예뻐진다고 하는가?
이는 여자의 속성은 남자의 사랑을 받는 자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자에게 있어 남자는 소망이고 능력이고 기쁨이고 행복이다.
이와같이 성도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강퍅해 진다.
그러므로 성도가 신랑 되신 예수님의 사랑을 받게 되면 소망이 생기고 기쁨이 생기고 세상에 대하여 담대함이 생긴다.
하박국 선지자는 이를 알았기에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고 모든 것이 없을지라도 구원받은 하나로 감사하다고 찬양하였던 것이다.
사도 요한도 세상을 이기는 이김은 이것이니 곧 믿음이라고 하였다.
스스로가 점검해 보라!
나는 지금 여자로 살고 있는가?
남자로 살고 있는가?
성도여! 그대의 이름은 예수님의 사랑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여자이니라!
그러므로 늘 예수님의 사랑에 배고파하며 살아가라!
성도란? 예수님의 사랑을 늘 배고파하고 사모하는 자이다.
예수라는 신랑에 대한 관심이 없는 자는 필히 다른 애인을 두고 있는 간음하는 간부(奸婦)이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세상을 사랑하는 자를 간음하는 여자라고 하였던 것이다.
육신은 마음에 담긴 사랑을 향하여 움직이게 되어 있다.
그대 속에 사랑하는 남자는 누구인가?
예수인가?
세상인가?
부디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한 남자”(예수님)의 사랑을 듬뿍 받아 행복한 여자로 사시기 바란다.
5-1. 여자가 남자 되는 여자 이야기
이번 글은 지난번 남자와 여자이야기에서 못 다한 남은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지난 시간 남자는 오직 예수님뿐이고 이 세상에 모든 인간들은 여자라고 하였다.
이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 자와 없는 자로서 볼 때 예수님은 생명을 주는 입장이므로 남자이고 모든 사람들은 “생명(씨)”을 받아야 살 수 있다는 논리 하에서 여자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이유는 자기백성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기 위함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살려 주는 영”으로서 마지막 아담으로 오셨다.
인간은 예수님이 살려 주어야만 살 수 있는 자이다.
이렇게 예수님의 생명을 받아야 하는 자를 성경에선 여자라고 한다.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은 자는 더 이상 여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남자가 된다.
성도는 예수님 앞에선 생명을 받아야 하는 여자이지만, 세상에선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로서 세상에 예수의 생명을 주어야 하는 남자이다.
오늘은 여자가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으면 어떤 변화를 통하여서 남자가 되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하나님의 씨가 “밭(여자, 성도)”에 뿌려지면 밭은 더 이상 다른 일로 한가 할 수가 없다.
밭은 자신의 모든 것을 동원하여 자신에게 뿌려진 하나님의 씨가 생명에 풍성함으로 싹을 내고 자라 가도록 모든 것을 쏟아 붓게 된다.
여자는 그 씨가 생명의 풍성함으로 자라나게 하기 위하여 자신은 죽어간다.
결국 여자는 씨에게 먹히는 꼴이 되고 만다.
씨가 여자를 잠식하게 된다.
이건 마치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를 부풀게 하는 것과 같다.
육적으로 임신한 여자는 그의 모든 에너지가 자궁 속의 태아(胎兒)에게로 흐르듯이 영적인 사건도 마찬가지이다.
여자가 남자의 씨를 받으면 모든 생체 리듬은 아이에게로 맞추어지게 된다.
그래서 아이가 원하는 음식을 먹어야 하는 심한 입덧을 하게 된다.
여자는 아이가 원하는 것을 찾게 된다.
이젠 아이가 여자를 주장한다.
여자는 아이가 원하는 것을 하도록 조정 받게 된다.
여자의 주인이 아이가 된 셈이다.
이런 상태를 성경에선 “내가 주 안에 주가 내 안에서 산다” 라고 한다.
이러한 삶이 나는 날마다 죽고 예수로 살게 한다.
이는 마치 우리가 밥을 먹으면 밥에 힘으로 사는 것과 같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밥이 나로 살게 하는 것이다.
밥이 나를 주장하지 내가 밥을 주장하지 않는다.
육신은 밥을 먹지 않으면 죽는다.
나로 살게 하는 것은 밥이지 내가 아니다.
결국 밥은 나로 살게 하는 생명이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씨가 내 안에 들어오면 예수의 씨가 나로 살게 하는 것이지 나 때문에 예수의 씨가 사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의 씨가 들어오면 내 몸은 예수의 씨가 원하는 것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아이가 원하는 음식은 여자가 원하는 음식과는 전혀 다른 음식들이라는 것이다.
평상시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것들이 먹고 싶어진다.
옷을 입어도 아이가 편한 것으로 입게 된다.
여자로서의 아름다움은 다 사라져 버리고 오로지 아이를 위한 삶으로 모든 것이 변하게 된다.
만약 아이를 밴 임산부가 아이를 생각하지 않고 놀러 다니고,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마약을 한다면 그를 어찌 여자라 할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성도가 예수님의 씨를 받게 되면 임신부에게 입덧이 오듯이 가치관의 변화를 몰고 오게 된다.
이제는 자기 좋은 데로 살지 못한다.
예수님이 뿌려준 새 생명이 좋아하는 대로 살아가게 된다.
예수님의 씨를 받기 전에는 세상이 전부인줄 알았고 세상에서 높아지고 성공하고 대접받고 살기를 좋아하였다.
그런데 예수님의 씨를 받고 나니 하늘이라는 다른 세상이 믿어지기 시작한다.
예수님의 씨가 새로운 세계를 몰고 온 것이다.
새로운 가치관을 몰고 온 것이다.
이제는 낮아지고 섬기고 베푸는 삶이 살아진다.
믿음으로 속 사람이 강건해져서 남자처럼 여자를 돌보는 모습으로 살아가게 된다.
옛날에는 상상도 하지 못 할 일들이 일어난다.
이를 일컬어 “해산의 고통”이라고 한다.
신앙생활이란? 겉 사람은 후패해지고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것이다.
이렇게 겉 사람은 후패해지고 속사람이 새로워지는 현상은 결국 “씨(예수)”가 “밭(성도)”을 잡아먹는 셈이 되고 마는 것이다.
“밭(성도)”은 “씨(예수)” 안으로 빨려 들어가 자기는 죽고 결국 씨로 살게 되는 것이다.
이래서 여자가 남자로 바뀌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남자로 이 땅에 오신 것은 여자 속에 자기 씨(생명)를 심어 그 여자를 자신의 생명으로 남자로 만들기 위함이다.
예수님에게 생명을 받은 성도는 이제 여자의 삶에서 남자의 삶으로 바뀌는 “해산의 고통”이 따르게 된다.
“해산의 고통”이란? 더 이상 “나(여자, 땅, 받는 자)”로 살지 않고 “예수(남자, 하늘, 주는 자)”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나로 살지 않고 예수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고통이다.
우리의 본성은 여자의 속성을 담고 있다.
그런데 그 본성에 반하는 남자로 산다는 것은 여간 고난이 아닐 수가 없다.
받는 자에게서 주는 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자기 부인이고 자기 포기이다.
이제는 땅처럼 받는 자가 아니라 하늘처럼 주는 자로 살게 된다.
이젠 땅 사람이 아니고 하늘사람이 된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살아가는 원리가 다르다.
하늘과 땅이란? 주는 자와 받는 자의 의미이다.
하늘은 땅에게 모든 것을 부어준다.
반면에 땅은 하늘이 주는 것을 모두 받아 생산을 해 낸다.
그래서 우리는 우스갯소리로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라고 한다.
이는 남자는 하늘의 속성을 가지고 있고 여자는 땅의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속성이 그렇게 되어 있다.
그래서 남자는 하늘로서 땅인 여자에게 모든 것을 쏟아 줌으로서 행복을 느낀다.
반면에 여자는 남자의 것을 아낌없이 받아 냄으로서 기뻐한다.
남자의 기쁨은 한 달 동안 고생 고생하면서 번 돈을 아내에게 갖다 주면서 행복감을 느낀다.
그러나 아내는 남편이 벌어다 준 월급을 통째로 받으면서 행복해 한다.
남편이 숨겨 놓은 비상금까지 달달 긁어내면서 여자는 기뻐하고, 남자 역시 비상금까지 빼앗기면서도 기뻐한다.
이 모두가 하나님께서 남자는 하늘에 속성으로서의 기쁨을 누리고, 아내는 땅의 속성으로서의 기쁨을 누리도록 해 놓았기 때문이다.
원리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자가 남자가 될 때가 있다.
언제인가 하면 자식 앞에서이다.
여자는 자식 앞에서 남자가 된다.
그러니까 여자가 남자의 씨를 통해서 엄마가 된다.
엄마는 자식 앞에선 여자로 살지 않고 남자로 살게 된다.
엄마는 자식에게는 남자처럼 모든 것을 빼앗기면서 행복해 한다.
결국 여자가 남자의 씨인 자식을 통하여서 엄마라는 남자가 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하늘로서 자신의 모든 것을 물과 피를 땅에다 쏟아주신 것이다.
하늘에 남자로서 세상에 씨를 뿌려주신 것이다.
이는 땅에 사람을 하늘에 사람으로 만들기 위함이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성령이 임하면 그 성령이 성도들 속에서 이러한 일들을 일으킨다.
여자를 남자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면 어느 순간부터 성도 안에서 남자인 하늘(예수님)에 속성들이 나타나게 된다.
섬김만 받던 자가 섬기기 시작한다.
높은 자리를 탐하던 자가 낮은 자리로 내려간다.
정죄하고 비판하기 좋아하던 입술에서 용서와 사랑이 나오기 시작한다.
이제 남자로 사는 법을 터득해 가는 것이다.
비록 서투른 몸짓이지만,,,
이걸 성화라 말하지 말라.
이건 남자로 강건하면 자연히 피어나는 현상들이다.
이는 마치 배부르면 포만감에 기분이 좋아 여유로움이 나오는 것과 같다.
사람이란? 배가 부르면 관대함이 나온다.
돈에 배가 부르든지, 사랑에 배가 부르든지, 권력으로 배가 부르든지 하면 관대함이 나타난다.
마치 주머니가 두둑하면 괜히 선심도 쓰고 싶어지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런 관대함도 주머니가 비면 사라져 버린다.
결국 성도가 행하는 아름다운 일들은 주의 은혜를 얼마나 받느냐에 따라서 변하는 가변적(可變的)인 것이 되고 만다.
주의 은혜가 풍성하면 남자처럼 나누고 베푸는 삶이 살아지지만 은혜가 고갈 당하면 여자처럼 움켜쥐고 인색하게 된다.
그렇다면 성도는 예수님 앞에선 항상 여자로서 사랑 받기를 사모하며 살아가야 한다.
신앙생활은 은혜를 얼마나 받고 사느냐에 따라서 삶 속에서 희비가 교차하게 된다.
그래서 은혜 받기를 사모하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 몸은 속성상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으면 남자로서 살아 갈 수가 없다.
이 땅에 진정한 남자로서 사신 분은 예수님뿐이시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가진 분으로서의 부요함이 있었기 때문에 기꺼이 모든 것은 나누어주면서 자신은 가난한 자로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남자로서 자신의 피와 살까지 모든 것을 여자인 우리에게 주었다.
그런데 인간들에게 있어서는 예수님과 같은 남자로서의 살아가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는 우리 몸의 한계성 때문이다.
우리 몸은 죄 아래 팔린 몸이다.
죄가 우리 몸을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은 늘 우리 안에서 싸우게 된다.
이 싸움이 해산의 수고와 같다.
그래서 바울은 여자(성도)가 믿음으로 사는 것을 해산함으로서 구원을 얻는다고 하였다.
육(肉)을 가진 사람이 하늘에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해산하는 것과 같이 아픈 일이다.
딤전 2장 15절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이렇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는 이렇게 살아가도록 되어 있다는 말이다.
구원은 정결하게 산 조건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먼저 구원해 주시고 이런 요구를 한다.
즉 네가 받은 예수의 생명 속에는 이런 것들이 담겨져 있으니 이제 한번 펼쳐 보이라는 것이다.
성령이 그렇게 인도해 가실 것이다.
물론 서툴지만!
예수님의 생명 속에는 하늘로서 땅에게 부어 주실 수많은 것들이 들어가 있다.
마치 컴퓨터의 알집 속에 수많은 자료들이 들어가 있는데 알집을 해제하면 그 속에 있는 수많은 자료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과 같다.
기억 할 것은 예수의 생명을 받으면 임신한 여자와 같이 자기는 점점 후패해진다는 것이다.
여자로서의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엄마로서 강인한 모성애(母性愛)로 자기보다 아기를 위하여 자기 삶을 던지게 된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자기 백성을 위하여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로 오셨다.
예수는 엄마처럼 자기 백성을 물과 피를 쏟으시고 낳았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남자로서 자기 백성을 지켜내시는 것이다.
자식을 키우는 엄마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이다.
실제로 자식을 키워보면 남편은 여자처럼 유약하고 엄마는 남자처럼 강해진다.
왜? 엄마가 자식을 키우는 데에는 남자같이 강해지는가?
이는 엄마는 자식을 통하여서 남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자는 약하여도 엄마는 강하다.
그래서 예수의 씨를 받아서 그 생명이 여자에서 남자로 바꾸어져서 강건해지면 바울처럼 남자다운 삶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게 되어 있는 것이다.
삶이란? 억지로 살라고 해서 살아지는 것은 아니다.
남자가 남자로서 살아가는 삶은 전혀 어렵지가 않다.
성도가 남자로 살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지 자신의 능력이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남자답게 강건하라”고 하였다.
여기서 “남자답다” 라는 말에 유념해야 한다.
“남자답다” 라는 것은 남자로서의 삶이 정형(定型)화되어 있다는 뜻이다.
남자로서의 정형화된 삶이란? 다름 아닌 예수님과 같이 자기를 비우는 삶을 말한다.
즉 예수님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사는 자가 남자라는 것이다.
빌립보서 2장 5-8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바울은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사는 것이 남자다운 강건한 자의 삶이다.
이는 형제를 위하여 자기를 비우는 삶을 말한다.
바울에게 있어 남자다운 삶을 말하자면 먼저는 복음을 훼손하는 일이라면 천사라 할지라도 용서하지 않는 냉정함이다.
베드로조차 탄핵하는 모습은 바울이 무엇에 관심을 두고 사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라 하겠다.
그리고 복음으로 인하여 참아주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다.
바울은 부모의 심정으로 성도들을 대하였다.
정죄와 비판이 아니라 이해와 용서와 사랑으로 섬겼다.
마치 예수님이 제자들을 섬겼듯이 바울도 성도들을 섬겼다.
신앙의 남자들은 본질적인 면에 대하여는 양보와 타협이 없다.
하지만 비본질적인 일들에는 이해와 관용과 용서로 살게 된다.
바울에게 있어 본질적인 것은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의(義)를 가리는 일에는 일체의 양보나 타협이 없었다.
그러나 비본질적인 것들이라 함은 살아가는 모습이다.
예를 들어 우상의 제물을 먹어야 하느냐!
아니면 먹지 말아야 하느냐!
결혼을 해야 되느냐!
안 해야 되느냐! 라는 것들과 같이 살아가는 방식들이라 말할 수 있다.
교회나 성도들의 가정에 타락 원인은 모두가 바울과 같은 남자가 아닌 여자들이 가르치는 자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여자란? 복음을 모르는 자를 말한다.
이를 교회적으로 말하면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섰다고 한다.
복음을 모르는 자가 설교하는 것은 여자가 남자를 주관하는 것과 같다.
이는 악이고 타락이다.
교회 안에는 남자로서의 목사도 있고, 여자로서의 목사도 있다.
비유적으로 말을 한다면 성령으로 거듭난 목사는 남자이고, 신학교에서 배워서 교단이라는 제도가 세운 목사는 여자이다.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이 세운 목사는 "복음을 위하여" 목회를 한다.
하지만 교단이 세운 목사는 "교회를 위하여" 목회를 한다.
일찍이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런 자들은 하나님이 세우지도 않았는데 선지자 노릇을 하고 있는 자들이라고 하였다.
이들은 여호와의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독한 물(뱀의 말, 인본주의)을 교인들에게 먹이 운다고 하였다.
예레미야 23장 15-16절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내가 선지자에 대하여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그들에게 쑥을 먹이며 독한 물을 마시우리니 이는 사악이 예루살렘 선지자들에게로서 나와서 온 땅에 퍼짐이라 하시니라 16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의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21-22절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 22 그들이 만일 나의 회의에 참여하였더면 내 백성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로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하였으리라"
하나님이 세운 목사는 오직 복음 증거를 위해 목회를 하지만 교단이 세운 목사는 교회 존립을 위한 목회를 한다.
하나님이 세운 목사는 복음을 위해서라면 교회도 헐어버리지만 교단이 세운 목사는 교회를 위해서라면 복음을 버린다.
이걸 이 시대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들여다보자.
편의상 가르치는 목사를 남자라 하고 가르침을 받는 교인들을 여자라고 하자.
이 시대 교회의 주인은 교인들이다.
이건 여자가 남자를 주관하는 것과 같다.
여자(성도)들이 목사(남자)를 좌지우지 하고 있지 않은가?
여기서 목사를 남자라 함은 복음을 가르쳐야 하는 위치에 있다는 것으로 전제하여 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 시대 목사들은 교인들의 눈치를 살피기에 급급하다.
왜? 그러한가?
이는 복음이라는 씨도 없는 자가 가르치는 남자 구실을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여자인 교인들의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한 것이다.
자연히 교인들이 좋아하는 말을 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자취를 감추고 뱀(인간)의 말들이 설교되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름하여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게 된 것이다.
강단에서 쑥물이 쏟아져 나와서 교인들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
뱀은 평생 동안 땅을 떠날 수 없는 자이므로 땅의 기운으로 살아간다.
그러므로 뱀의 말이란? 세상에 눈을 고정시켜 흙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말이다.
인간을 기쁘게 하는 말이다.
뱀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땅에 대한 집착만 강해진다.
그러니 여자가 가르치는 교회들은 땅을 지향하게 되고 세상의 놀이터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런데 이 시대 성도들은 이런 생명이 없는 여자(복음을 모르는 목사)들을 남자라고 따른다는 것이 문제이다.
바울은 그토록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고 가르치려고 나서지 말고 하였다.
남자 앞에서 종용하라고 하였다.
이는 복음을 모르는 자는 가르치려고 하지 말고 배우라는 말이다.
하기사 이 말이 무슨 말인 줄 모르니 문제이다.
기껏 해석한다는 것이 문자적으로 여자들은 목사가 되면 안 된다고 한다.
그래서 여자들은 교회에서 나서지 말라고 한다.
딤전 2장 11-14절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12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13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14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않은 것은 여자(복음 없는 목사)에겐 나누어 줄 하나님의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아담과 같이 “네페쉬 하야”인 생령의 생명만 가지고 있는 흙에 속한 여자들이다.
“네페쉬 하야”는 땅에 생명이지 하늘에 생명이 아니다.
바울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말하는 여자란? 생물학적인 여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나 복음을 모르는 모든 자를 지칭한다.
목사이든 교인이든 복음을 모르면 여자이다.
그럼에도 개탄스러운 것은 이 시대 교회들이 바울의 이 말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여자들은 가르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여자는 목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이런 해석을 한다는 것 자체가 성경이 말하는 남자와 여자를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자들은 스스로가 여자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일이다.
이게 이 시대 교회의 실상이다.
그런데 더 웃기는 것은 교인들이 이런 마귀의 교리에 순종한다는 것이다.
결국 모두가 예수님의 씨가 없는 “네페쉬 하야”인 것이다.
“네페쉬 하야”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생명을 받지도 못한 여자들이 남자 행세를 하여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소경이 소경에게 인도를 받고 있는 형국이다.
눈 뜬 사람은 절대로 소경의 인도함을 받지 않는다.
소경이기 때문에 소경의 인도를 받는 것이다.
이처럼 여자인 “네페쉬 하야” 들이 말하는 것을 그 속에 생명이 없는 여자들은 속지만,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남자는 속지 않는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생명을 받은 남자들인 제자들에게 너희는 빛에 속한 고로 어둠에 다니지 않는다고 하셨다.
즉 거짓 선생들의 말에 속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회의 타락은 “네페쉬 하야”인 여자들이 아담처럼 남자 구실을 하면서 일어났다.
예수님의 초림 당시에 구약 교회가 이런 모습이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씨도 없으면서 남자 행세를 하여서 망하였다.
그래서 진짜 남자인 예수를 배척하고 만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차라리 못 본다고 하면 죄가 없었을 터인데 본다고 하니 그저 죄가 있느니라” 고 말씀하셨다.
즉 생명을 받아야 하는 여자로 있었으면 좋았을 터인데!
남에게 생명을 준다는 남자 구실을 한다고 하다가 망하였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본다고 하는 자들은 못 보게 하시고 못 본다고 하는 자들은 보게 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예수님은 자기가 여자인줄 아는 자는 남자로 만들어 주고 자기가 남자 인줄 아는 자는 여자로 만들어 버리신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가 남자로 살았기 때문에 진짜 남자가 왔음에도 거부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남자도 아니면서 남자 구실을 하는 바리새인들에게 화 있을진저!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하면서 지옥으로 가라고 저주를 퍼부은 것이다.
너희는 이 바다에서 저 바다로 교인하나를 얻기 위하여 분주하게 쫓아다니지만 막상 교인을 얻으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을 만든다고 하였다.
그래서 가장 남자 같았던 그들을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어떻게 임박한 진노를 피할 수 있겠느냐! 라고 저주의 불을 쏟아 부으셨던 것이다.
스스로 남자라고 생각하면 그 때부터 신앙생활을 무엇을 할 것인가를 찾아 나서게 된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에게 고정되어 있지 성도에게 있지 않다.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뜻이다.
자신이 죄인임을 모르는 자는 결국 자기 의 때문에 하나님의 의를 거부하게 되어 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한 것은 자기들의 율법 지킴이라는 행함 때문에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바리새인들은 자기 행함 때문에 망한 것이다.
차라리 율법을 지키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율법을 지켰다는 것 때문에 망하고 만 것이다.
일을 안 해서 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을 너무 하여서 망하였다.
이런 모순을 어찌 여자들이 이해 할 수가 있겠는가!
여자이면서 남자이고!
남자이면서 여지로 살아가야 하는 이 비밀을 성령을 받은 자는 알리라!
그래서 귀 있는 자에게만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한 것이다.
들을 귀 있는 그대는 복 있는 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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