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뱀이 여자를 꼬시는 이야기
성경이 말하는 남자와 여자의 의미는 하나님의 생명의 유무로 판가름 한다.
교회 안에서 남자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강건한 자로서 가르치는 자를 지칭한다.
반면에 여자는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위치에 있는 교인들을 말한다.
교회의 타락 원인은 강건한 남자로 있어야 할 가르치는 지도자들이 가르침을 받아야 할 교인들인 여자의 말을 듣는데서 기인하였다.
무슨 말인고 하니 소위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이라고 자청하는 목사들이 교인들의 뜻대로 교회를 움직여 나가기 때문이다.
이 시대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의사결정권은 사실 교인들에게 있다.
그러다 보니 목사가 교인들의 눈치를 살피고 그들의 비위를 맞추는데 급급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곧 아담이 여자의 말을 듣는 것과 다름없다.
목사가 교인들의 눈치를 살핀다는 것 자체가 목사도 남자가 아닌 여자임을 자증하는 것이다.
진정 목사가 남자라면 교인들이 떠나간다 하여도 십자가 도만 증거하여야 한다.
그러나 어느 목사가 교인들이 다 떠나가는데 독야청청 할 수 있단 말인가!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그 일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병서(兵書)에 지피지기(知彼知己) 하면 백전백승(百戰百勝) 이라는 말이 있다.
먼저 적(敵)을 알고 싸우라는 말이다.
이 말을 성도가 신앙생활 하는데 적용을 한다면 먼저 사탄의 계략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도 어떤 사람이 전쟁을 하려고 하는데 상대방의 군사가 일만이고 자기 군사가 일천이면 자기 주제를 알고 먼저 가서 화친을 청하라고 하였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뱀이 어떻게 성도를 미혹하는지 알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 뱀의 미혹에 넘어가자 않는다.
그럼 에덴동산에서 뱀이 여자를 미혹하는 것을 통하여서 마귀의 계락을 살펴보기로 하자.
에덴동산은 이 시대 교회를 상징하고 있다.
그럼 에덴동산에 먹으면 죽을 과실과 먹으면 영생하는 과실이 있었듯이 교회 안에도 두 과실이 있다.
두 과실은 두 의(義)로 상징할 수 있다.
그럼 붙잡으면 살 의(義)가 있고 붙잡으면 죽을 의(義)가 있다는 말이다.
율법으로 난 의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난 의가 있다.
율법으로 난 의를 붙잡으면 죽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난 의를 붙잡으면 산다.
뱀이 여자에게 먹으면 죽을 선악과로 미혹하였듯이 지금도 마귀는 교회 안에서 붙잡으면 죽을 의로 미혹을 한다.
에덴동산에서 뱀은 여자를 선악과로 미혹한다.
여자는 뱀의 미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고 죽은 자가 되고 만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자 하나님은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추방한다.
추방하는 이유는 선악과를 먹고 죽은 자가 된 인간들이 생명과를 먹고 영생 할까봐서이다.
이는 죄인이 만약 생명과를 먹게 되면 죄인으로서 영생하기 때문이다.
죄인으로서 만약 영생을 한다면 어찌될까?
이건 영원한 비극이다.
이걸 현실적으로 인간들에게 적용한다면 이렇게 예를 들을 수 있다.
어떤 집에 불치의 병에 걸린 자식이 있다고 하자.
부모는 그 자식을 볼 때마다 마음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진다.
그런데 그 자식이 죽지도 않고 부모 앞에서 얼쩡거리며 영원토록 산다고 생각해 보자.
이런 불치의 병든 몸으로 오래 산다는 것은 결코 복이라 할 수가 없다.
생명이 붙어 있다는 것을 삶에 의미로 둔다면 고통을 당하면서도 오래 살아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사느냐를 삶에 의미를 둔다면 오히려 일찍 죽는 것이 복(福)이라 할 것이다.
지금 선악과를 먹고 죄인이 된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서 불치의 병에 걸린 자식들과 같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인을 죽이고 다시 살려내는 방식으로 일을 하신 것이다.
십자가의 복음이 먼저 인간에게 죽이는 심판성을 띠고 다가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구원이란? 죄인을 죽이고 의인으로 살려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순서는 먼저 죽이고 나중에 살려내는 방식으로 전개가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먼저 죽이는 예수를 보내시고 나중에 살리는 예수를 보내셨다.
육신으로 오신 예수는 자기 백성들을 십자가에 데리고 가서 죽이시는 일을 한다.
그리고 성령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죽은 자기 백성들을 살려내는 일을 하신다.
그래서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살려주는 영이라고 한다.
그럼 왜? 인간이 돌이킬 수 없는 불치의 병에 걸리게 되었는가를 살펴보자?
사람이 죽는 것은 생명과를 먹지 아니하여서이다.
아담이 만약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생명과를 먼저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었으면 선악과를 먹어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미 영생하는 생명이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갓 지어진 아담은 아직까지 영생하는 자가 아니다.
아담이 영생하는 자가 되려면 생명과를 먹어야 한다.
이런 사실은 누구보다도 뱀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뱀은 사람으로 하여금 생명과를 먹지 못하게 하려고 생명과로부터 관심을 멀어지게 하는 작전을 편 것이다.
뱀은 선악과로서 여자의 눈길을 생명과로부터 돌리는데 성공을 하였다.
여자의 눈길이 생명과로부터 돌려지는 순간 뱀과의 게임은 이미 끝이 나 버렸다.
왜냐하면! 선악과는 인간의 마음을 빼앗고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여자는 선악과를 보는 순간 그 마력으로부터 빠져 나올 수가 없었다.
선악과는 신약적 의미로 율법에 의라고 했다.
율법은 인간들이 마음을 빼앗고 눈길을 사로잡는다.
왜냐하면! 율법 속에는 인간의 영광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귀는 옛 언약으로 새 언약을 가리는 방식의 전략을 쓴다.
신약에서 마귀는 사람들에게 항상 율법적인 면을 부각시킴으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 율법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여 율법을 지키는 싸움을 하게 만든다.
옛 언약에 눈이 고정되면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인가” 를 붙잡게 된다.
그럼 “무엇을 믿을까” 는 사라지게 된다.
믿음에서 행함으로 과녁이 옮겨지고 만다.
죄란? 이처럼 과녁에서 이탈한 것을 말한다.
이렇게 되면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는 것은 사라지고 말씀을 지켜서 구원을 받는 쪽으로 과녁이 옮겨지게 된다.
이는 타락이고 죄이다.
이 시대 교인들은 흔히 구원은 인간의 행함으로 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믿음으로 받는 것이라고 말들은 그럴 듯하게 한다.
그러면서 성도가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다만 구원을 받은 자로서 합당한 도리이기 때문에 지키는 것이라고 한다.
참으로 지당한 말처럼 들린다.
그런데 이 말이 바로 뱀이 여자를 미혹하는데 사용하는 수법이다.
뱀은 항상 먹으면 죽을 것에 인간의 관심을 붙잡아 두려고 한다.
이는 곧 역설적으로 먹어서 살 것에는 관심을 갖지 못하게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뱀이 제시한 먹으면 죽을 것이 인간의 눈을 사로잡는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선악과는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럽게 할 만큼 매력적이다.
그럼 선악과 신앙이 인간들에게는 매력적이라는 말이 된다.
선악과 신앙이 뭔가?
에덴동산의 두 과실은 두 언약을 상징한다고 했다.
먹으면 죽는 선악과는 붙잡으면 죽을 옛 언약을 상징하고!
먹으면 영생하는 생명과는 붙잡으면 영생하는 새 언약을 상징한다.
이걸 성경으로 말하면 구약과 신약이 된다.
구약을 옛 언약이라고 하고, 신약을 새 언약이라고 한다.
옛 언약을 율법이라고 하고, 새 언약을 은혜(믿음)라고 한다.
알다시피 율법은 말씀을 지켜야 하는 행함을 근거로 하고 있으며, 은혜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러니까 옛 언약인 율법 신앙은 인간의 행함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새 언약인 은혜는 예수를 믿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되면 율법은 말씀을 지켜야 하는 주체가 인간이 되고, 은혜는 말씀을 지킨 주체가 예수님이 되신다.
결국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는 말씀을 지키는 주체가 누구냐로 차이가 난다.
옛 언약이 선악과라면 새 언약은 생명과이다.
선악과가 인간의 눈을 사로잡는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것이었듯이 율법 역시 인간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매력이 넘치는 것이다.
사람들이 율법을 좋아 하는 것은 율법지킴 속에 자기 사랑과 자기 자랑과 자기 영광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흔히들 말씀을 열심히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신앙의 본질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이지 말씀을 열심히 지키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라고 하면, 아니 신자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뭐가 잘못 되었습니까? 라고 항변을 한다.
이는 말씀을 지키는 것을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답이 아니라는 것이다.
좋은 것과 정답은 다르다.
좋다고 하여서 다 정답일 수가 없다.
교인들이 말씀을 지키고 사는 것은 좋은 것일 수는 있다.
하지만 신앙의 정답은 말씀을 지키고 사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를 믿는 것이다.
말씀을 지키는 것은 옛 언약에 속한 것이지만 주 예수를 믿는 것은 새 언약이다.
구원은 옛 언약에 있지 않고 새 언약 안에 있다.
그러므로 신앙의 정답은 새 언약을 믿는 것이다.
새 언약은 예수님의 피와 살로 맺어진 언약이다.
즉 예수님의 죽으심을 바탕으로 세워진 언약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근거로 언약을 맺었다.
그래서 새 언약은 하나님과 예수님 두 분 사이에서 맺어진 것이므로 인간이 끼어들 틈이 없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과만 언약을 맺었다는 것은 인간하고는 상대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말씀을 지켰다는 것을 신앙이라고 내어놓아도 안 받는다.
왜냐하면! 애당초 하나님은 인간과 언약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예수와 언약을 맺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관심사는 예수님이 하신 일에만 있다.
왜? 하나님은 예수님이 하신 일에만 관심을 두시는가?
이는 예수님께서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셨기 때문이다.
믿음이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요구를 완성하신 분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렇지만 마귀는 믿음에 인간의 것을 섞는 것으로 미혹한다.
너도 구원받아서 이젠 의인이 되었잖아!
의인이 되었으면 의인답게 살아야 되지 않느냐? 라고 미혹한다.
뱀의 목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요구를 완성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감추고, 반면에 인간이 말씀을 지켜야 하는 쪽으로 몰아간다.
그래서 마귀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지키고 행하여야 한다고 가르친다.
예를 들어서 도적질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고 한다.
죄인에게 이러한 말씀을 주신 진의(眞意)는 파악치 않고 문자에 매이게 한다.
마귀는 절대로 도적질하지 말고 살인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라고 가르치지 살인하고 도적질하고 간음해도 괜찮다는 식으로 가르치지 않는다.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사람들은 흔히 율법을 범하도록 꼬드기는 주범이 마귀인 줄 알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마귀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도적질하면 안 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도적질한 영혼더러 번민하게 만들고 고민하게 만든다.
마귀는 도적질 근처에도 안 가고 착하게 사는 영혼들을 칭찬하고 권면하며 신앙인의 표본처럼 떠받들게 한다.
이렇게 되면 선악구도가 율법지킴이라는 선악과 속에서 나온 선과 악으로 나누이게 된다.
자연히 선악과만 남고 생명과는 사라지게 된다.
그럼 예수를 믿는 것과 상관이 없이 도적질 안한 사람은 선한 사람이 되고 도적질을 행한 사람은 악한 사람이 되고 만다.
이렇게 되면 한 주간 동안 전도하고 성경을 읽고 남들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고 착하게 산 사람들은 고무도 당당하게 기쁘고 행복한 마음으로 교회에 나오게 된다.
반면에 한 주간 동안 기도도 안하고 성경도 안보고 술이나 퍼먹고 나쁜 짓만 한 사람은 교회에 오는 것이 부담스러워지게 된다.
이는 모두가 선악이라는 법에 매여서 스스로의 양심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 평생 도적질하지 않으려는 싸움을 하게 된다.
때론 힘이 부쳐 쓰러지고 넘어지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십자가 앞에 자비를 구한다.
하지만 신자들의 이런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흘리는 주체는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라는 점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원하심은 우리가 도적질 안 하는 사람 되는 게 아니다.
뱀이 여자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라고 화두(話頭)를 던진 것은 여자의 관심사를 선악과에 묶어 두고자 함이다.
마귀는 사람들이 선악과를 먹느냐 안 먹느냐!
도적질을 하느냐 안 하느냐 에는 별 관심이 없다.
다만 삶의 주소를 선악과라는 동네에 붙잡아 두고자 한다.
주소지가 선악과라는 동네에서 옮겨지지만 않으면 된다.
선악과라는 동네에 주소를 두고 살면 생명과라는 동네엔 자연히 발길을 끊게 된다.
그래서 뱀은 우리가 율법을 지키도록 한다.
절대로 율법을 어기도록 부추기지 않는다.
뱀은 다만 우리가 율법의 세계를 떠나지 못하도록 할 뿐이다.
뱀의 이러한 전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뱀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가 없다.
오늘날 대다수의 교인들은 선악의 법으로 살고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이는 모두가 마귀가 교인들의 시선을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운 율법 쪽으로 붙들어 매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인들은 하나님 앞에 나와서 “나는 이런 저런 죄를 지었습니다” 라는 식의 회개를 하거나 아니면 “나는 이런 저런 일을 하였습니다” 라는 자랑을 하게 된다.
마치 바리새인들의 기도와 같은 것들을 신앙이라고 내어놓고 있다.
그러나 분명히 알 것은 생명의 능력은 율법 지킴에서 나오지 않는다.
생명의 능력은 생명과를 먹음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예수를 믿음으로 주어진다.
그렇다면 도적질해도 괜찮단 말인가?
이웃의 재물이나 이웃의 아내를 탐내도 괜찮다는 말인가?
안식일을 어겨도 괜찮고 부모를 공경하지 않아도 괜찮단 말인가?
살인해도 되고?
간음해도 된단 말인가?
이건 하라는 소린가?
하지 말라는 소리인가?
마귀가 이러한 명제로 예수에게 접근했다.
그럼 예수님은 마귀를 어떻게 대응 하였는지 살펴보자.
마 4:3-11=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 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마귀는 예수님에게 끊임없이 자기를 증명해 보이라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이 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한다.
이는 곧 예수님은 자기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오셨다고 하신다.
신앙은 내가 영웅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즉 마귀와 예수님과의 싸움은 누구에게 관심을 갖느냐의 싸움이었다.
자기 잘남을 증명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 것인가?
이를 성도에게 적용하면 자기에게 관심을 갖게 되면 말씀을 자기를 증명하는데 끌어당기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 관심을 갖게 되면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셨는가에 눈길을 돌리게 된다.
우리가 아무리 엄청난 일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완벽하게 지켰다 할지라도 그것이 나를 살리지 못한다.
이는 인간의 행위에서는 의(義)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의로는 죄를 이기지 못한다.
피 흘리심이 없으면 죄사함이 없다.
그 피는 우리의 피가 아니라 주 예수님의 피이다.
왜? 우리 피는 안 되고 예수님의 피는 되는가?
이는 우리 피는 죄인의 피고 예수님의 피는 의에 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인간의 몸을 입게 하셨지만 죄 없는 모습으로 보내신 것은 죄인을 속량하시기 위함이다.
즉 하나님은 고장난 죄인의 몸 말고 대신 새 몸을 받겠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쫓으라고 하니 자기가 죄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이건 착각이다.
내가 죽는다고 죄 문제가 해결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죄는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만이 해결하실 수가 있다.
뱀의 머리는 우리가 깨트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깨트리신다.
신앙이란? 글자 그대로 예수를 믿고 바라보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보고 박수치고 기뻐하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이든 신약이든 하나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어떻게 싸우시는지를 보라고 하신다.
구약에선 여호와께서 용사가 되셔서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물리치는 것을 보라고 했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한다.
신앙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긴 것이 나의 기쁨이 되어야 한다.
성도는 예수님 때문에 즐거워하는 자이지 자기 행위 때문에 즐거워하는 자가 아니다.
예수를 넘어서려고 하지 말라.
피조물은 절대로 창조주를 넘어서 살 수가 없다.
예수를 넘어서고자 하는 것이 악이고 참람이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응수하시는지 예수의 답안지를 보자.
마 22:15-22=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론하고 16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17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한대 18 예수께서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19 셋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 왔거늘 20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21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22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기이히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자기들의 율법 지킴의 논리에 가두고자 하였다.
그래서 어떻게 하여야 하는 것으로 끌어당긴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쳐야 되느냐! 안 바쳐야 되느냐! 라고 묻는다.
이는 예수님의 관심사를 율법에 붙잡아 두고자 함이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바치느냐! 안 바치느냐! 라고 말씀하셨다면 예수님은 그들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미 그들의 의도를 간파 하셨다.
그래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하셨다.
이는 곧 데나리온에 적혀 있는 형상과 글이 문제가 아니라 너희들 마음속에 새겨져 있는 형상과 글이 어떤 것이냐를 묻고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의 관심사는 곧 그 사람의 본질이다.
그 속에 세상 임금이 자리 잡고 있으면 세상 사람이고, 하나님이 자리 잡고 있으면 하나님 사람이다.
결국 예수님은 네 안에 누가 있느냐를 되묻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법으로 사느냐!
은혜로 사느냐이다.
법은 아무리 지켜도 그 속에서 생명이 나오지 않는다.
이와 같이 선과 악의 싸움에 매여 사는 사람은 그의 삶에서 선이 악을 이겼느냐 악이 선을 이겼느냐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여전히 선악과 아래 머무름이며, 그 결과는 필연적인 사망일뿐이다.
하나님 안에서의 삶은 선악과를 먹느냐 먹지 않느냐의 싸움이 아니다.
즉 가이사에게 세를 바쳐야 되느냐 바치면 안 되느냐의 싸움이 아니다.
예수를 믿느냐! 아니냐의 싸움이다.
쉬운 말로 술을 마셔도 되느냐! 아니냐?
담배를 피울 수 있느냐! 없느냐?
제사 음식을 먹어도 됩니까? 안 됩니까? 의 싸움도 아니다.
신앙의 본질은 말씀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에 있지 않고 예수를 믿느냐 안 믿느냐이다.
신앙이란? 예수 안에서 사는 것이지 예수 밖에서 성자로 사는 것이 아니다.
예수 안은 정죄함이 없지만 예수 밖은 무조건 정죄뿐이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에게 눈길을 고정시키고 산다는 뜻이다.
말씀을 지켜야 할까요? 라고 묻는 것은 결국 자기에게 눈길을 두고 있는 것이 된다.
마귀는 우리의 눈길을 자기에게 잡아 두고자 한다.
자기에게 눈길이 고정되면 자기 행위를 살피게 된다.
그걸 신앙으로 붙잡게 된다.
말씀을 지켜야 할까요! 라고 묻는 것은 스스로 말씀을 지켜 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착각하기를 하나님께서 말씀을 지키라고 명령 하신 것은 성도가 그 말씀을 지켜낼 능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예수님을 공연히 죽인 것이 되고 만다.
예수를 보내지 말고 바로 성령을 보내서 말씀을 잘 지키도록 하면 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런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 하고 사흘 만에 부활을 시켜서 하늘나라로 데려 가시고 성령을 대신 보내시는 방법을 사용하셨다.
왜? 하나님은 이런 번거로운 방법으로 죄인을 구원하셨을까?
이는 죄인은 반드시 죄의 삯대로 죽어야 하고 하나님께서 다시 죄 없는 몸으로 창조를 하셔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마지막 아담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죄인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일을 혼자 다 하셔서 새로운 조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처음 아담이 망쳐 놓은 것은 예수님을 보내서 다 쓸어버리시고 새롭게 만드시는 일을 하신 것이다.
이건 마치 창세기 1장에서 혼돈과 공허한 세상을 갈라내고 새롭게 하는 창조 사역을 하시는 것과 같다.
성령은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하여서 이런 일들을 하셨다고 알게 해주시고 믿어지게 하신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성경을 통하여서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보고 아! 그렇구나!
내가 이런 몹쓸 죄인이었기에 하나님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이시고 다시 살려내는 일을 하셨구나! 를 깨닫게 된다.
예수만 높이고,
예수만 자랑하고,
예수만 사랑하게 된다.
요한계시록 5장을 보면 천국의 모습이 나온다.
계 5장 11-14절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12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13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14 네 생물이 가로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구원받은 자들이 천국에서 하는 일이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리는 일이다.
즉 성도가 천국에 가면 하는 일이 오로지 어린 양을 찬송하는 일이라고 한다.
왜? 어린 양을 영원토록 찬송하는가?
이는 어린 양이 첫 아담이 망쳐 놓은 세상을 다시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께선 천국에 오기로 작정된 이 땅에 사는 성도들에게 이 사실을 믿게 하고 깨닫게 하는 일을 하신다.
그리하여 세상 사는 날 동안 예수님이 하신 일을 찬송하고 감사하고 자랑하게 한다.
신앙에는 자기 자신에게 눈을 돌릴 틈이 없다.
오로지 예수님에게만 눈길을 주고 살아야 한다.
만약 예수님 말고 자기 자신에게 눈길을 주고 살면 간음한 자로 취급한다.
간음이란? 예수를 바라보지 않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눈길을 고정시키는 한 예수님이 하신 일을 간과하게 된다.
마귀는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안다.
마귀는 지금도 성도들에게 다가와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거룩하고 멋진 사람으로 증명해 보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렇게 살아서 되겠느냐? 라는 식으로 미혹을 한다.
그럴 듯 하지 않은가?
그러나 이게 뱀이 여자는 꼬시는 함정이다.
여기에 걸려들면 자기 주체 챙기기를 하게 된다.
그렇지 내가 그래도 하나님의 아들인데 이렇게 살아서야 안 되지! 라고 분발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믿을 것은 사라지고 무엇을 해야 할 것들만 가득 차게 된다.
마귀는 이런 자들에게 박수를 친다.
너 참으로 대단하다고 부추긴다.
이런 박수를 받기 시작하면 마약과 같아서 점점 더 깊은 자기 영광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바리새인들이 이 마약에 빠져서 사람에 영광을 구하고 살았다.
그러다가 예수님으로부터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저주를 받았다.
예수님은 우리가 믿어야 할 구주이지 우리가 본 받아야할 선생이 아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나에게 있어 예수님의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님은 본받고 배워야 할 선생인가?
아니면! 믿어야 할 그리스도인가?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묻고 계신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여기에 나는 어떤 대답을 내어 놓고 있는가?
스스로 확증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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