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서

[스크랩] 11강. 일어나서 함께 가자

제이원1 2013. 7. 26. 13:56

11강.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가 2:10-13)

 

아 2:10-13=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11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12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13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술람미가 그 모진 고난을 어떻게 이겨 냈는지 깨닫는 지혜를 주옵소서. 어떤 소망으로 어떻게 인내하면서 솔로몬에 대한 사랑을 지켰는지 알게 하옵소서. 성령의 감동하심이 오늘도 본문을 해석케 하시고 나의 아가(雅歌)서로 불려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실 때의 대략을 보면 모든 것을 지으시고 난 후엔 반드시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독 아담을 지으시고 홀로 독처(獨處)하는 것이 보시기에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담(사람)이 혼자 있는 모습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영 안쓰러웠던 모양이에요.

 

이로보건데 하나님 앞에선 사람은 홀로 사는 존재가 아닌 모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의 몸에서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하와를 아담에게 데리고 오니 아담은 대뜸 자기 몸에서 나온 자라는 것을 알아봅니다.

그래서 “이는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에 뼈” 라고 기뻐하면서 맞이합니다.

 

아담은 하와를 첫눈에 자기와 한 몸이라는 것을 알아봅니다.

그러니 내 살이고 뼈라고 하지요.

이건 자기 꺼란 말입니다.

 

이걸 복음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목자와 양으로 비유하면 이해가 쉬울 겁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나니” 라고 하지요.

이는 양은 목자의 음성을 척 알아듣는다는 말입니다.

마치 아담이 하와를 한 눈에 척 알아보듯이 말이에요.

 

아담과 하와의 결혼이 자기 짝을 찾는 것이듯이!

예수님이 성도를 구원하는 것도 자기 짝을 찾는 것입니다.

여기서 의미로운 것은 하나님이 하와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온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자기 짝을 찾아 준 겁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누구든지 아버지께서 이끌지 않으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짝인 성도를 이끌어 준다고 했어요.

 

그러니 성도의 구원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는 것입니다.

우린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이 알아서 다 해 주세요.

그러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자기 백성을 하나라도 빠지지 않고 다 예수 믿게 만들어주세요.

마치 목자가 잃은 양을 찾듯이 다 찾아내세요.

 

암튼 아담은 하나님이 하와를 이끌고 오자 한 눈에 자기 꺼! 라고 알아봅니다.

첫눈에 반했어요.

 

사랑이 뭐냐!

첫눈에 반하는 겁니다.

아! 저건 내꺼야! 라고 알아보는게 사랑이에요.

 

마치 아담이 하와를 보고 내 꺼! 라고 한 것처럼 말이에요.

이걸 세상 말로 천생연분(天生緣分)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이는 서로가 서로를 알아봐요.

 

아담과 하와는 예수님과 성도의 표상이에요.

그러니 창세전에 예정된 성도들은 예수님을 알아봐요.

본능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알아봐요.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처럼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란 말은 한 몸이란 말입니다.

둘이 아니라 하나란 뜻입니다.

이걸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사랑은 서로를 찾게 되는 겁니다.

 

지금 솔로몬과 술람미가 이런 사랑을 하고 있어요.

그러니 서로 떠나 있으면서도 마음으로는 항상 하나로 있는 겁니다.

내가 있는 곳에 님도 있고 님이 가 있는 곳에 나도 가 있어요.

그래서 서로가 그리워하는 겁니다.

 

사랑이 뭐냐?

있어도 보고 싶고!

떠나도 보고 싶은 겁니다.

 

연애하면 그렇잖아요.

함께 있으나 떠나 있으나 항상 하나로 있잖아요.

그렇지 않은가요?

 

사람은 본능적으로 누군가를 그리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혼자는 외로워요.

그래서 하나 될 짝을 찾게 되어 있단 말입니다.

인간은 누군가를 사랑해야 행복해 하는 존재입니다.

 

성의학자들은 사랑은 최고의 보약(補藥)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사랑을 하게 되면 좋은 호르몬들이 활발하게 활동을 하게 된답니다.

이런 호르몬들이 몸에 컨디션을 좋게 해주고 노화도 방지하고 건강하게 해 준다고 해요.

실제로 금술이 좋은 부부일수록 건강하고 표정도 밝아요.

그래서 사랑을 많이 하라고 합니다.

 

뜬금없이 왠 부부타령이나고요.

부부타령이 아니고 사랑타령을 말하고자 함이에요.

성경은 예수 믿는 것을 주님과 사랑한다고 하잖아요.

 

그렇다면 주님과 깊은 사랑을 나누는 성도들로 다정한 부부처럼 행복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마음으로 사랑한다면 마음이 행복하여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래야 사랑하는 거지요.

 

예수님과 사랑해 보세요.

마음이 행복해요.

근심걱정이 없어요.

육신적으로는 아픔들이 많지만 마음은 행복해요.

 

바깥으로는 우겨쌈을 당하여도 마음은 염려근심이 없고 편안해요.

어~ 진짜라니까요!

주님의 사랑을 받으면 행복하다니까요!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성령께서 해 주시잖아요.

성령이 임하면 소망이 생겨요.

오순절날 성령이 임하고 나니 젊은이는 환상을 보고 늙은이는 꿈을 꾼다고 하지요.

늙은이에게 꿈이란 소망이에요.

 

늙은이들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어요.

그건 천국의 소망이에요.

죽어도 다시 산다는 부활의 소망 말이에요.

그러니 성령 안에서 예수님과 사랑하는 성도는 기쁘고 행복하지요.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 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의지한다는 겁니다.

의지할 대상이 있으니 든든한 겁니다.

술람미가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버틸 수 있는 것은 솔로몬이라는 버팀목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라는 신랑이 있기 때문에 고난 속에서도 이겨내는 겁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 없다는 예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힘이 들거나 병들거나 약해지면 사랑하는 사람의 생각이 더욱더 절실하게 납니다.

이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기대고 싶고!

위로받고 싶고!

의지하고 싶어해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의지하고자 하는 모습은 사랑의 한 단면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사랑을 해 보셨으니 잘 알 것 아닙니까?

 

힘들고 약할수록 사랑하는 사람이 더 그리워요.

그렇지요.

남편은 아프면 아내를 찾고 아내는 아프면 남편을 찾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들도 아프면 엄마를 더 찾잖아요.

 

이와 같이 술람미도 너무도 힘들고 고통스러우니 솔로몬을 찾게 되는 겁니다.

힘들수록 솔로몬이 더욱더 그리운 겁니다.

힘이 드니 사랑하는 사람이 더욱 그리운 겁니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아픔을 주셔서 주님을 더 찾도록 하신 것과 같아요.

성도가 세상에서 편안하게 살면 주님을 찾지 않아요.

이건 인간의 본성상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에겐 세상에 편안한 삶을 허락하지 않고 고난을 주는 겁니다.

고난으로 하여금 주님에게로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겁니다.

성도는 어려울수록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되어 있어요.

고난이 닥쳤는데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는 것은 성도가 아니에요.

 

여러분 시편의 많은 부분이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면서 토해낸 기도에요.

얼마나 간절했으면 여호와는 나의 산성이시요!

여호와는 나의 방패시요!

여호와는 나의 바위시요! 라고 했겠어요.

이는 모두가 사울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고 도망 다니면서 토해낸 절규에요.

 

하나님께서 우리더러 기도하라는 것은 그만큼 성도는 이 세상에서의 운명이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다는 말입니다.

원수가 많다는 겁니다.

어려우니 기도하라는 겁니다.

 

술람미가 솔로몬에게 탄원하는 것은 기도에요.

성도가 예수님에게 기도하는 것과 같아요.

어쩌면 아가(雅歌)서 전체가 술람미의 기도와 같아요.

 

술람미가 솔로몬과의 사랑을 회상하면서 독백하는 것도 일종의 기도입니다.

예루살렘 여자들로부터 너무도 많은 아픔을 당하니 솔로몬과의 사랑을 회상하면서 이겨내고 있는 겁니다.

 

지난 시간 술람미가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제발 자기를 가만히 내버려 달라고 하였지요.

그러면서 솔로몬이 자신을 데리러 오겠다는 약속을 회상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 님이 데리러 온다고 하였다고 하면서!님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고 합니다.

 

이제 님이 오면 자신을 님이 계신 곳으로 데리고 가겠다고 합니다.

님이 계신 곳이란 아가(雅歌)서에서 문자적인 의미에선 솔로몬이 사는 궁궐을 말합니다.

복음적으로는 천국을 말해요.

 

오늘 본문은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하는 노래입니다.

솔로몬이 낙심이 되어있는 술람미에게 힘을 북돋우어 주는 노래에요.

술람미는 지금 지난날 솔로몬이 자신에게 한 약속을 솔로몬의 이야기로 회상하는 겁니다.

술람미가 그렇게 듣고 있는 겁니다.

 

아가(雅歌)서는 술람미가 솔로몬에 대한 그리움을 토해내는 노래입니다.

물론 솔로몬께 받은 사랑에 대한 반응이에요.

두 사람은 사랑을 하면서 수많은 밀어(蜜語)들을 나누었어요.

그 밀어(蜜語)들 속엔 장차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약속도 담겨져 있어요.

 

연애 할 때 애인이 우리 앞으로 이렇게 살자 라는 식으로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잖아요.

솔로몬도 수많은 약속들을 술람미에게 하였어요.

그래서 술람미는 힘들 때마다 그 솔로몬의 약속들을 회상하고 있는 겁니다.

아! 우리 신랑이 이런 약속을 했었지!

다시 만나면 이렇게 해 준다고 하였지!

 

이건 마치 남편이 해외 파견근무를 할 때 아내가 살면서 힘들면 외국에 나가있는 남편이 보내준 편지를 읽으면서 아픈 마음을 달래는 것과 같아요.

그 편지 내용엔 남편이 귀국해서 저 푸른 초원 위에 아름다운 집을 짓고 행복하게 잘 살자는 내용들이 담겨져 있어요.

아내는 그 남편의 약속을 생각하고 힘든 삶을 이겨내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시 오마 약속을 남겨둔 채로 하늘나라로 가셨지요.

제자들은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그 약속 하나 믿고 살았어요.

수많은 핍박과 아픔 속에서 예수님의 약속 하나만 믿고 이겨내었어요.

 

지금 우리도 동일해요.

약속 믿고 살고 있어요.

성령이 소망을 품고 살게 하세요.

 

성도는 성경을 통하여서 주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힘을 얻어야 합니다.

마치 술람미가 고난이 올 때마다 솔로몬에게 받았던 사랑과 약속을 회상하면서 이겨낸 것처럼 이겨내야 해요.

 

술람미가 힘들 때마다 다시 온다는 신랑의 약속을 생각하고 살았듯이!

지금 저와 여러분들도 신랑의 약속을 믿고 사는 겁니다.

그러니 술람미의 이야기가 곧 우리들의 이야기인 겁니다.

 

약속 속에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다 들어가 있어요.

연애편지를 받으면 옛날이야기에서부터 현재이야기로 해서 미래이야기까지 다 들어가 있잖아요.

하나님의 약속이 그래요.

하나님의 약속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다 담겨져 있어요.

 

그러니 약속을 받았다는 것은 이미 완료된 것을 받은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창세전 묵시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이미 완료된 것과 같아요.

무슨 말인고 하니!

이 세상은 창세전 언약에 의하여 생겨났고 움직여져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건 마치 바울이 삼층천에서 자기 모습을 본 것과 같아요.

바울은 역사라는 지평 속에선 아직도 살고 있어요.

그런데 삼층천이라는 묵시 속에선 역사 속에 바울이 아니고 역사를 벗어난 바울로 있는 겁니다.

 

바울은 지금 자기 자신을 역순(逆順)으로 보고 있는 겁니다.

마치 다 끝난 바둑을 복기(復棋)하는 것과 같아요.

여러분이 지금 20년 전에 비디오를 보고 있는 것과 같아요.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이에요.

예수님은 약속 하나 달랑 주고 떠났어요.

그리고 성령을 보내주셨어요.

성령이 예수님이 주신 약속을 붙잡고 살라고 합니다.

 

술람미가 예루살렘 여자들로부터 당하는 아픔이나 성도가 세상에서 당하는 아픔이나 동일해요.

그렇다면 술람미가 아픔을 어떻게 이겨냈는지를 통하여서 성도들도 술람미처럼 고난을 이겨내야 되겠지요.

 

그럼 술람미가 어떻게 이겨냈는지 살펴봅시다.

본문을 보니 솔로몬이 어디로 가자고 합니다.

 

아 2:10절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술람미는 솔로몬이 자기를 데리러 오는 소리를 들었어요.

데리러 온다는 말은 지금 있는 곳은 떠나야 할 곳이란 말이지요.

여긴 머물 곳이 아니란 말입니다.

 

솔로몬이 떠난 것은 술람미가 살 곳을 예비하러 떠난 것과 같아요.

그리고 와서 가자고 하지요.

이는 마치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께서 처소를 예비하면 다시 오겠다고 하신 말씀과 같아요.

 

솔로몬이 술람미를 사랑하면서 왕궁으로 데리고 가지 않은 것은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이 예수님과 성도의 사랑이야기의 예표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솔로몬과 술람미라는 남녀 간의 그런저런 사랑이야기라고 한다면 술람미를 왕궁으로 이미 데리고 가서 살았을 겁니다.

 

그럼에도 솔로몬이 술람미를 고난가운데 두고 간 것은 예수님과 성도간의 사랑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가(雅歌)서가 성경으로 있는 겁니다.

 

솔로몬이 술람미를 두고 왕궁으로 간 것은 예수님이 성도를 이 세상에 두고 하늘나라로 간 것과 같아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다시 오마 약속하고 떠나간 것이나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다시 오마 약속하고 떠나간 것이나 동일해요.

 

그러니 우린 술람미를 통하여서 성도의 모습을 볼 수가 있게 되는 겁니다.

술람미가 솔로몬이 데리고 온다는 약속을 붙잡고 살았듯이 성도들도 다시 온다는 약속을 붙잡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 이 세상은 떠나야 할 곳이란 것을 알고 살면 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저주를 머금고 있어요.

아담이 범죄하자 하나님은 이 땅을 저주했어요.

왜? 땅을 저주했을까요?

이는 범죄한 아담이 살아갈 터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저주하자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어요.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난다는 것은 아픔이 있다는 겁니다.

모세의 고백대로 수고와 슬픔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 땅은 무엇과 같은고 하니!

죄수를 감옥에 가두는 것과 같아요.

죄수를 감옥에 가두는 것은 고생하라고 세상과 격리 시키고 가두는 겁니다.

감옥을 호텔처럼 해 놓으면 그건 죄값을 치르게 하는 것이 아니고 쉬게 하는 것이 되겠지요.

 

감옥이 감옥다우려면 환경도 열악하고 고생스러워야 해요.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고생스러워야 감옥인 겁니다.

감옥이란? 형벌 받는 곳이에요.

 

지금 이 세상이 감옥이에요.

이 세상은 지옥이에요.

지옥이란? 땅에 감옥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고생스러운 곳이지요.

 

그런데 인간들은 이 세상이 감옥인 줄 몰라요.

잘 살고 있어요.

그러니 이 세상을 떠날 마음을 먹지 않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도에겐 이 세상이 지옥이라는 것을 알려주세요.

발붙이고 살 곳이 아니란 것을 알려 주세요.

그럼에도 우리 육신은 땅에 코를 박고 살고자 해요.

 

육신이라는 놈은 흙에서 났기 때문에 흙이 좋아요.

흙과 친화력이 있어요.

그래서 땅 강아지 마냥 흙에 기운을 좋아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늘로 낚아 잡아채지 않으면 우린 땅을 못 떠나요.

아니 떠날 수가 없어요.

흙이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들을 이 땅에 정착하지 못하도록 핍박받는 구조로 만들어 놓은 겁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이 가는 곳마다 토박이들로부터 시비가 붙게 하지요.

핍박당하게 하지요.

하나님이 터를 잡고 살지 못하게 하시려고 그런 겁니다.

이는 이 땅엔 분깃이 없다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육신은 터를 잡고 정착하고자 해요.

땅에 기운으로 살고자 합니다.

알다시피 땅은 하나님의 저주의 기운이 서려 있어요.

그럼에도 흙에서 난 우리 육신은 땅을 집착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살만 하면 자꾸만 흔들어요.

터를 박지 못하게 해요.

정착하지 못하고 떠나도록 만들어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지요.

그런 아브라함을 나그네로 만들지요.

이는 믿음에 사람들은 이 땅에서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살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함입니다.

 

창세기 12장을 보면 아브람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서 가나안까지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흉년이 들게 만들어서 가나안을 떠나게 만들어요.

이걸 히브리서에선 가나안이 약속의 땅이 아니라 약속의 땅은 하늘에 있다고 알려 주려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 것이라고 합니다.

 

히 11:13-16=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15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창세기 12장을 보면 아브람이 처음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입을 때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했어요.

그래서 아브람은 마침내 하나님이 지시한 땅으로 들어갔어요.

거기가 가나안 땅이에요.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가나안 땅도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약속한 땅은 이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선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한 성(城)을 예비해 두셨다고 합니다.

 

그러니 믿음에 조상인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성도들도 이 땅엔 분깃이 없는 겁니다.

하늘에 있어요.

그래서 성령이 임하면 하늘에 소망을 주는 겁니다.

애들아! 너희가 살 곳은 여기가 아니고 하늘이다! 라고 알려주는 겁니다.

 

바울이 그러지요.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땅에 것을 생각하지 말고 하늘에 것을 생각하라고!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하잖아요.

그러면서 땅에 것을 추구하는 것은 십자가의 원수라고 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에게서 땅에 것을 빼앗는 일들을 벌리시는 겁니다.

 

여러분 신앙은 떠나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떠나게 만들어요.

우린 자발적으로 떠나고자 하지 않아요.

땅에 코를 박고 살고자 하지 떠나고자 하지 않아요.

 

그래서 고난을 당하게 만드는 겁니다.

고난이 천국을 소망하게 만듭니다.

고난이 땅을 떠나게 만들어요.

그래서 성경은 고난을 복이라고 하는 겁니다.

 

개그콘서트에 보면 술 푸게 하는 사람들이란 코너에서 박성광이가 그러지요.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국가가 나에게 해 준 것이 뭐가 있느냐!

에이! 더러운 세상!

그러잖아요.

 

전 그 말이 우리가 뱉어낼 말이라고 생각해요.

에이~ 고난만 안겨주는 더러운 세상!

수고와 슬픔만 안겨주는 더러운 세상!

이 더러운 세상을 빨리 떠나야지! 라고 해요.

 

성도는 이 세상에 미련이 없어요.

무슨 미련이 있겠어요.

뭘 기댈만한 것이 있어야 미련을 갖지요.

 

하나님이 우리 체질을 다 아시기 때문에 기댈 것을 주지 않아요.

우리 체질은 땅에 것을 사랑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자꾸만 흔들어 대는 겁니다.

 

술람미도 예루살렘 여자들이 자꾸만 흔들어요.

오빠들도 핍박을 해요.

그래서 싫은 겁니다.

솔로몬이 빨리 와서 데려가기를 바라는 겁니다.

 

그래서 술람미는 예루살렘 여자들이 핍박을 하면 할수록 솔로몬이 자신을 데리러 오겠다고 한 약속이 점점 새록 새록 떠오르는 겁니다.

오늘본문도 그 약속을 떠올리고 회상하는 겁니다.

 

이는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에요.

우리의 원함과 반대되는 일들을 자꾸만 발생시키는 겁니다.

가시와 엉겅퀴 같이 귀찮은 일들이 자꾸만 일어나는 겁니다.

이는 모두가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떠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육적으로 편안하면 잠을 자니까 원수들을 일어나게 만들어서 귀찮게 만들어요.

배부른 짐승은 사냥을 하지 않듯이 등 따습고 배부르면 졸게 되어 있어요.

그냥 땅에 푹 눌러 앉아서 뱀처럼 땅에 기운을 받고 살게 되어 있어요.

 

레위기에 보면 먹을 것과 먹지 못할 것을 구분해 줄 때 땅에 기어 다니는 것들은 다 부정하다고 먹지 못하게 하였어요.

이는 땅에 기운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뱀처럼 땅에 기운을 맡고 사는 것들은 저주 받은 것들이에요.

그래서 먹지 못하게 한 겁니다.

 

먹을 것은 땅에서 뛰는 것들이에요.

땅에서 뛴다는 것은 땅을 떠나고자 한다는 말입니다.

하늘로 가고자 한단 말입니다.

 

하나님께선 이렇게 먹는 것으로도 이스라엘의 소속을 알려주고 있는 겁니다.

얘들아! 너희는 하늘 소속이다!그러니 땅에서 뛰어다니는 것들을 잡아먹으라고 한 겁니다.

이는 모두가 상징적 계시에요.

 

그럼에도 성도들이 모르니까 하나님은 땅을 흔들어 버립니다.

지구 곳곳에서 지진이 일어나고!

화산이 터지고!

홍수가 나고!

쓰나미가 덮치고!

추위와 더위가 오고 갖가지 사건과 사고가 터지는 것은 살 곳이 못 된다는 말입니다.

 

천재지변도 하나님의 싸인이에요.

애들아! 이 땅이 이런 곳이다! 라고 알려주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랬잖아요.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가 되면 지구가 미친다고!

천재지변은 지구가 미쳤다는 증거에요.

 

지금 보세요.

한 쪽엔 가뭄으로 난리이고!

다른 한 쪽엔 홍수로 난리이고!

한쪽엔 더워서 죽고!

한쪽에선 추워서 죽어요.

 

인간들은 자신이 발 디디고 사는 곳이 용암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불 구덩이인줄 몰라요.

언제 화산이 폭발할지 모르는 곳에서 희희낙락하고 살고 있어요.

하늘에서 불이 안내려도 땅 속에 용암만 터트려도 지구는 불바다가 되고 말아요.

그럼에도 인간들은 종말을 모르고 살고 있는 겁니다.

 

땅위에 천재지변이 일어나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천재지변이 일어나고 있어요.

귀찮은 일들이 일어나고!

사건이 터지고!

크고 작은 근심걱정 거리들이 파도처럼 늘 닥치는 겁니다.

이를 통하여서 성도로 하여금 천국을 사모하게 만들어요.

 

술람미가 만약에 예루살렘 여자들로부터 왕후 대접을 받고 핍박을 당하지 않았다면 솔로몬을 기다리지 않았어요.

솔로몬이 없어도 편한데 무얼 하러 기다립니까?

기다린다 하여도 애절하지가 않아요.

오면 좋고 안와도 대접받고 잘 사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어요.

 

그러나 예루살렘 여자들이 핍박을 하니 솔로몬을 오매불망 기다리게 되는 겁니다.

왜? 빨리 안 오시나요.

언제 오시렵니까.

 

그러니 귀를 기우려서 산을 넘고 강을 건너서 사랑하는 님이 달려오는 소리를 듣고 아픔을 견뎌내고 위로받고 있는 겁니다.

귓가에 님이 와서 일어나 함께 가자! 라고 손을 잡아채서 가자고 합니다.

 

님이 그럽니다.

자! 이제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다고 합니다.

 

아 2:11절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겨울이란? 추운 시련기를 말하고!

비란? 괴롭고 슬픈 일들을 말해요.

그런데 이제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다고 합니다.

겨울비에 옷이 젖어 보세요.

을씨년스럽잖아요.

 

겨울도 지나고 비가 그쳤다는 말은 고난의 시련과 고통과 염려와 근심 걱정하는 것들이 다 사라졌단 말입니다.

이제 고난의 시기가 다 끝이 났다는 말입니다.

 

이제 수고와 슬픔이 다 끝났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쨍하고 해뜰 날이 다가 왔다는 말입니다.

그동안 술람미는 육적으로는 겨울과 같이 추었어요.

 

예루살렘 여자들로부터 핍박을 받을 땐 마음이 염려와 근심과 불안과 초조로 지옥이었어요.

그런데 이제 신랑이 자신을 데리러 온다는 소식을 들으니 마음에 근심걱정이 봄 눈 녹듯이 다 사라져 버린 겁니다.

 

신랑이라는 소리에 온 몸에 화색(花色)이 돌아요.

술람미가 오늘 본문에서 하는 말들은 전부가 과거 솔로몬의 한 약속을 회상하는 거예요.

지금식으로 말하면 성경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에요.

 

예루살렘 여자들로부터 핍박을 받을 땐 그 핍박으로 인하여 아파했는데 불현듯이 솔로몬이 한 약속을 기억하니 힘이 생기는 겁니다.

내가 왜? 이렇게 나약해 하지!

그러면서 기운을 차리는 겁니다.

 

이걸 복음적으로 말해 봅시다.

우린 율법 아래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율법 아래서 종노릇을 했어요.

율법 아래선 신앙생활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에요.

마음이 겨울이에요.

신앙생활이 비처럼 을씨년스러웠어요.

 

그런데 예수님의 피로서 율법에서 해방 되었어요.

이 소리가 얼마나 기쁩니까!

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겐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이 말이 겨울비처럼 을씨년스러웠던

율법의 종에서 해방시켰어요.

마음에 천국이 이루어진 겁니다.

이젠 예수 믿을 맛이 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때로는 자신의 믿음을 의심할 때가 있어요.

마귀는 자꾸만 자기 행함에 의미를 두게 만들어요.

자기 행함에 눈길이 고정되면 야! 이거 내가 예수를 믿기는 믿는 건가!

이거 내가 그냥 교회만 다니는 것은 아닌가!

고민이 될 때가 있을 겁니다.

 

이럴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내가 지금까지 엉뚱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세운 새 언약이 깨달아지면 의심에 구름이 싹 걷혀 버려요.

그러면 내가 괜한 근심 걱정을 했구나!

마음에 어둠이 사라지잖아요.

 

마귀는 우리에게 구원의 즐거움을 상실하도록 해요.

현실의 일들을 가지고 하늘에 소망을 잊게 만들어요.

이럴 때 우리의 눈을 돌이키게 하는 것이 하나님 말씀이에요.

말씀을 들으면 괜한 걱정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툴툴 털고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말씀을 가까이 하라는 겁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면 마귀의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있어요.

하나님의 말씀은 심령을 윤택하게 하는 양약이에요.

 

잠 16:24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술람미에겐 솔로몬이 온다는 기쁜 소리와 같은 겁니다.

그러니 신앙에 겨울도 지나고 미음에 비도 그친 겁니다.

 

겨울이란? 지구가 태양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때를 말합니다.

이는 성도가 의(義)에 태양이신 예수님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말과 같아요.

다른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다 잊고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마음이 겨울이지요.

춥고 배고프지요.

 

여러분도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아 보세요.

금방 마음이 싸늘해져요.

무덤덤해져요.

 

김 집사님이 그러대요.

목사님 수요일에 설교 한 번 더 듣는 것 하고 안 듣는 것하고 천지 차이가 난다고해요.

그럼 그렇지요.

 

밥 한끼 굶는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겁니다.

건강한 사람은 밥 한끼 안 먹으면 허기져서 짜증나요.

눈이 어두워져요.

 

전 어려서 젖배를 곯아서 허기지면 눈 앞이 깜깜해요.

제 때 밥을 먹지 않으면 짜증이 나요.

길 가다가도 주저앉고 싶어져요.

 

우리 신앙도 그래야 해요.

말씀을 안 들으면 허기를 느껴야 해요.

말씀이 고파야 한단 말입니다.

 

말씀을 많이 먹어 보세요.

든든해요.

세상에 염려근심이 없어요.

 

그런데 말씀을 듣지 않아 보세요.

모든게 걱정이에요.

앞으로 어떻게 살지!

아프면 어떻게 하지!

 

이런 것들을 한방에 날려 보내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약속이에요.

천국에 간다는 소망이에요.

 

술람미가 지금 그런 겁니다.

신랑의 소리를 듣기 전에는 겨울비 맞은 것처럼 추웠는데!

신랑이 온다는 소리를 듣고 나니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펄펄 나는 겁니다.

 

술람미가 솔로몬의 소리를 들은 것은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과 같아요.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약속이 생각나니 힘이 생기는 겁니다.

약속이 믿어지면 마음에 봄날이 와요.

성도는 말씀을 안 들으면 겨울이 되고 말씀을 들으면 봄날이 되어요.

 

여러분들도 그런 일이 있지요.

사랑하는 사람이 소식도 없이 사라졌을 때 그 곤고함과 불안함과 초조함 말이에요.

전화를 해도 받지 않고!

요즘처럼 문자를 보내도 소식이 없으면 답답하지요.

온갖 생각이 다 들잖아요.

 

이 사람이 어디에 갔나!

무슨 사고라도 당했나!

혹시 나쁜 일이라도 당한 것은 아닐까!

온갖 상상을 다 해보잖아요.

 

인간이란? 어리석어서 좋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어요.

남편이나 아내나 아이들이나 가족들이 늦게 들어오면 거의가 나쁜 생각을 하잖아요.

좋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어요.

모두가 안 좋은 일 나쁜 일이 있다고 생각을 해요.

 

이게 모두가 마귀가 주는 거거든요.

그래서 나쁜 상상을 하게 되는 겁니다.

마귀는 항상 불안과 초조감을 주어요.

마음을 지옥으로 만든 단 말입니다.

 

불안한 생각이 들면 근심걱정으로 한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땅이 꺼지듯이 하고!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고 안절부절 하잖아요.

일도 손에 안 잡히고!

글도 눈에 안 들어오고!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온통 그 사람 생각뿐이잖아요.

이 사람이 어디서 무얼 하는 거야!

 

그러다가 전화가 와서 목소리를 들으면 그 동안 쌓였던 염려와 근심과 걱정과 초조함들이 순식간에 다 사라지고 마음에 평안함이 깃들지요.

어휴~하고 한숨이 나오고 제 정신이 돌아오잖아요.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양약(良藥)인 겁니다.

 

지금 술람미가 신랑이 온다는 소리가 양약인 겁니다.

그러니 그동안 쌓였던 온갖 시름을 다 잊고 마음에 평강이 넘치는 겁니다.

야! 신랑이 온다고 했지!

신랑이 나를 푸른 초원으로 데리고 간다고 했지!

마음속으로는 벌써 함께 손잡고 기화요초(琪花瑤草) 만발한 초원으로 달리고 있는 겁니다.

 

신랑의 목소리를 들으니 지면에 꽃이 피고 새들의 노래 소리가 들리는 겁니다.

 

아 2:12절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신랑의 소리에 심령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겁니다.

구원의 즐거움이 회복이 된 겁니다.

그러니 새 소리처럼 마음에서 찬송이 터져 나오는 겁니다.

저절로 흥얼거려지는 겁니다.

 

지면에 꽃이 피었다는 것은 마음에 화색이 돈다는 말입니다.

평화가 넘친다는 말입니다.

마음이 기뻐서 너무도 행복하다는 겁니다.

 

마음이 기쁘면 자연히 노래가 나오지요.

그래서 새가 노래하고 반구의 소리가 들린다고 합니다.

새가 노래하는 것은 신령한 노래를 말합니다.

 

여러분 마음이 기뻐 보세요.

마음속에서 저절로 흥이 나요.

찬송이 나온다구요.

 

13장 찬송을 한번 불러보세요.

베토벤이라는 영화를 보면 베토벤이 강가에 나가서 마음속으로 풀들이 노래하는 소리를 듣고 이 곡을 쓰는 장면이 나옵니다.

압권이에요.

영화를 다시 한 번 보아야겠네요.

 

 

♪~ ♬

기뻐하며 경배하세 영광의 주 하나님

주 앞에서 우리 마음 피어나는 꽃같이

죄와 슬픔 사라지고 의심구름 걷히니

변함없는 기쁨의 주 밝은 빛을 주시네

 

땅과 하늘 만물들이 주의 솜씨 빛내고

별과 천사 노래 소리 끊임없이 드높아

물과 숲과 산과 골짝 들판이나 바다나

모든 만물 주의 사랑 기뻐찬양 하여라

 

우리 주는 사랑이요 빛과 진리이시니

삶이 기쁜 샘이 되어 바다처럼 넘치네

아버지의 사랑 안에 우리모두 형제니

서로 서로 사랑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새벽별의 노래 따라 힘찬 찬송 부르니

주의사랑 줄이 되어 한맘 되게 하시네

노래하며 행진하여 싸움에서 이기고

승전가를 높이 불러 주께 영광 돌리세

♪~ ♬

 

 

가사가 끝내 주지 않나요.

엄청납니다.

얼마나 황홀합니까!

지금 술람미의 마음에 이런 찬송이 울려 퍼지고 있는 겁니다.

우리 마음속에도 이런 찬송이 울려 퍼져야 해요.

 

기분이 좋으면 딱히 찬송가가 아니라도 노래가 나와요.

찬송가가 심심하면 유행가라도 부르세요.

기쁨으로 부르면 다 찬송가에요.

유행가다 찬송가다 따지지 마세요.

하나님의 은혜로 들으면 다 훌륭한 찬송이에요.

 

김종환의 “사랑을 위하여” 같은 곡은 대단한 찬송가에요.

“너” 라는 말을 “주” 라고 바꿔서 불러 보세요.

아주 훌륭한 찬송가가 되어요.

 

최진희가 부른 “꼬마 인형” 도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부르는 훌륭한 찬송가에요.

 

하나님은 멜로디와 가사로 찬송이나 아니다 따지지 않아요.

어떤 마음으로 부르느냐를 물어요.

감사함으로 불렀으면 “한오백년”도 새 노래이고!

아무 생각 없이 부르면 “주 예수보다도 귀한 것은 없네” 도 죽은 노래에요.

마음속에 주님과 동행하면 “강원도 아리랑”도 천국의 노래로 불려져요.

 

죽은 자는 찬송을 하지 못해요.

마음이 겨울이면 찬송이 나오지 않아요.

 

시 115:17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하리로다”

 

마음이 근심걱정이 가득한데 어찌 찬송이 나옵니까!

슬픔이 마음을 감싸고 있는데 어찌 노래가 나온단 말입니까!심령이 싸늘하게 죽었는데 무슨 노래가 불러지겠어요.

 

교회에서도 찬송을 목소리 높여서 부르는 성도들은 다 얼굴이 밝아요.

찬송을 입안에서 우물우물하는 사람들은 다 죽을상이에요.

그러니 기뻐하는 사람은 찬송을 부르면서 더 기뻐지고!

근심 걱정하는 사람은 찬송도 부르지 못하고 고민만 하다가 돌아가는 겁니다.

얼마나 불쌍합니까?

 

죽은 심령을 살리는 것이 말씀이에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죽은 자를 살려 냅니다.

성령께서 말씀과 동행하여 하나님의 약속이 믿어지게 만들어요.

 

말씀을 들으면 개구리 입이 떨어지듯이 흥얼 흥얼 해져요.

심령이 기쁘면 나타나는 것이 찬송이에요.

그러니 찬송을 입 속에 넣고 우물거리지 말고 좀 크게 부르세요.

 

육적으로도 신랑의 사랑을 받아 보세요.

자연히 ~룰루랄라~ 하지요.

저절로 춤이 춰지고 흥이 겨워 노래가 나오게 되어 있어요.

기분이 좋은데 시무룩한 사람은 없어요.

 

술람미는 신랑의 소리가 얼음장처럼 추운 겨울같은 마음을 따스한 봄날로 만들어 놓은 겁니다.

봄에 새싹이 나듯이 생명의 역사들이 나타나는 겁니다.

심령이 천국이 되니 갖가지 새 소리들처럼 찬송소리도 들리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반구의 소리가 들리게 되었다는 겁니다.

반구의 소리란? 비둘기의 울음소리를 말하는데 이는 평화의 소리를 의미합니다.

비둘기 울음은 평화 노래 소리에요.

 

렘 8:7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반구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 하셨다 하라”

 

비둘기는 평화의 때를 알려주는 새에요.

이제 겨울 같은 시절을 지나가고 꽃피는 춘삼월과 같이 생명이 피어나는 새로운 시대가 마음속에서부터 열리는 겁니다.

 

성령이 비둘기처럼 새로운 시대를 몰고 온 겁니다.

그러니 심령이 기쁨으로 충만해 지는 겁니다.

환란과 핍박으로 인하여 추웠던 환란의 시기가 지나고 봄이 와서 새싹이 푸르게 나오고 새소리가 들리는 천국과 같은 평화로운 시대가 마음속에 도래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성도의 심령은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기쁨이 넘치고!

삶이 바뀌고!

언어가 바뀌어요.

 

사랑을 해보세요.

기분이 들뜨잖아요.

떨어져 있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다고 해 보세요.

흥분되잖아요.

 

지금 술람미의 마음이 그래요.

님의 소리가 들리니까 가슴이 쿵쾅거려요.

마음이 설레고 무엇이든지 긍정적적으로 변해요.

 

사랑은 사람을 관대하게 하고 부드럽게 해요.

나긋나긋하게 한다구요.

자기도 모르게 혼자 흥얼흥얼 해져요.

 

이해가 안 됩니까?

참~ 딱합니다.

제발! 사랑 좀 하고 사세요.

멋대가리 없이 살지 말고!

 

가슴 속에 주님으로부터 사랑이 없으니 쌀쌀 맞지요.

아내고 남편이고 부모고 자식이고 이웃한데도 냉정하지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담도 헐어주셨지만!

이웃과 이웃 간에 막힌 담도 헐어 주어요.

 

십자가 안에선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하나에요.

이건 과거 율법 아래선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들어와 보니 너나 나나 죄인이긴 마찬가지 란 것을 알게 되니 서로 하나가 되는 겁니다.

 

뭘 말씀을 들어야지 알지!

맨 날 쓰잘데기 없는 드라마나 보고 자빠졌으니 사는게 힘들고 재미가 없지요.

교회에 와도 신이 나지 않지요.

 

말씀을 들어야 속사람이 강건해지고 삼층천에서 세상을 바라보아져요.

삼층천에서 세상을 바라보세요.

세상이 세피하게 보여요.

천국에 소망이 있는데 왜? 기가 죽겠어요.

 

은혜 받은 사람의 특징은 마음에 근심걱정이 사라져요.

근심걱정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처럼 여기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얼굴엔 빛이 나고 입술엔 찬송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얼굴은 마음에 창(窓)이에요.

마음이 기쁘면 얼굴도 빛이 나고 꽃이 피어요.

마음이 슬프면 얼굴이 어두워지고 수심이 가득해져요.

 

찬송은 천국의 노래에요.

그러니 찬송이 나온다는 것은 마음에 천국이 임했다는 말입니다.

찬송을 부른다는 것은 심령이 살아 있다는 말입니다.

 

속사람이 강건하다는 말입니다.

심령에 천국이 임하니 신앙의 아름다운 열매들이 열리지요.

 

그래서 술람미에게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고 향기를 토한다고 하는 겁니다.

 

아 2:13절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고 향기를 토한다는 것은 신앙생활의 활력이 넘친다는 겁니다.

 

무화과나무는 안으로 꽃이 피어요.

꽃이 없는 나무라고 해서 무화과나무라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꽃이 안에서 피어요.

안으로 핀 꽃이 열매로 익은 겁니다.

 

그러니 술람미가 무화과나무 열매가 맺혔다는 것은 심령이 천국이란 말입니다.

심령 속에 꽃이 활짝 핀 겁니다.

술람미에게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익었다는 것은 속사람이 강건하다는 말입니다.

 

은혜를 받아 보세요.

삶에 여유가 생겨요.

사람이 나긋나긋해져요.

흐믈 흐믈 해 진다구요.

 

사랑을 받은 여자들을 보세요.

얼마나 부드럽습니까.

여유가 있고!

온화하고 애교가 넘치잖아요.

보는 이로 하여금 기쁘게 하잖아요.

 

그러나 사랑받지 못한 여자들은 까칠해요.

말도 비수같이 찌르고 날카로워요.

가까이 하면 찬바람이 쌩쌩 불어요.

매사에 트집을 잡고!

짜증을 내고!

부드러움이 없고!

건들면 신경질을 내요.

 

특히 목사들이 신경질을 잘 내면 그 사람은 마음이 겨울이란 말이에요.

가까이 하지 마세요.

언제 미친개처럼 물지 몰라요.

 

은혜 받지 못한 교인들을 보면 매사에 부정적이고 비판적이에요.

남을 헐뜯고!

폄훼하고!

업신여기고!

인색해요.

움켜잡을 줄만 알았지 손을 펴지 않아요.

 

어디 대접을 할 줄 압니까?

겸손하기를 합니까?

섬길 줄 압니까?

 

지금 제가 윤리 도덕 수업을 하는게 아니잖아요.

하나님의 은혜가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는 능력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바울이 그 많은 환란가운데서도 감사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바울을 강권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은혜를 받아 보세요.

관대하고!

자비롭고!

온유하고!

남을 배려하고!

섬겨요.

 

예수님이 손 마른 사람을 고쳐 주었지요.

손 마른 병이란 움켜쥐고 안 펴지는 병이에요.

이건 탐욕을 말해요.

모든 인간은 움켜쥐고 안 내어 놓아요.

어리석은 부자처럼 창고를 늘리고 또 늘리면서 모으고 또 모아요.

 

마치 이 시대 교회들과 같아요.

그져 움켜쥐기에 바빠요.

교회 건물을 늘리기에 바빠요.

이게 모두가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였다는 증거에요.

그러니 손 마른 사람들처럼 움켜잡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을 만나 보세요.

먼저 손을 펴요.

천국이 임하니 세상 것을 놓는 겁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지 제일먼저 나타난 현상이 움켜잡았던 것을 내어놓았어요.

자기 것이라고 움켜잡았었는데 은혜를 받고 보니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알고 그동안 모아두었던 재물을 교회에다 내어놓잖아요.

유무상통하잖아요.

 

은혜를 받으면 마음이 부자가 되어서 밥값도 자기가 내요.

성도를 섬기는 일이 기뻐요.

그러나 자기 것으로 섬기면서도 기뻐하는 겁니다.

 

이게 모두가 무화과나무가 안으로 꽃이 피어서 열매로 익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술람미가 솔로몬의 음성을 들으니 무화과나무 열매처럼 속이 든든한 겁니다.

속 사람이 강건해 진 겁니다.

 

지금 솔로몬이 술람미를 칭찬하는 겁니다.

솔로몬의 눈에 술람미가 무화과나무 열매처럼 잘 익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칭찬하는 거예요.

 

그리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었고 향기를 토한다는 말은 예수의 냄새를 풍긴다는 말입니다.

보통의 과실들은 꽃이 피고 그 꽃이 떨어진 뒤에 열매가 맺히잖아요.

대 부분의 유실수(有實樹)들이 그래요.

 

그런데 포도나무는 열매를 먼저 맺히고 꽃을 피워요.

열매가 익어가면서 꽃은 시들어 떨어져요.

그러니 포도나무에 꽃이 피었다는 것은 반드시 거기엔 열매가 결실이 되었다는 증거에요.

 

이는 믿음이 예수의 냄새를 풍기게 된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포도열매라고 한다면 꽃은 믿음이 토해내는 행함이지요.

믿음은 추상적이에요.

 

무엇이 믿음이냐!

믿음은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일 수가 없어요.

이게 믿음입니다 라고 할 수가 없어요.

 

그러나 믿음엔 반드시 어떤 동사(動詞)가 나타나요.

어떤 움직임이 나타난단 말입니다.

이걸 행함이라고 해요.

마치 포도나무 꽃이 피므로 서 여기 열매가 있어요!

그러는 것과 같아요.

 

믿음은 마치 전기(電氣)와 같아요.

전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에요.

어떤 능력이에요.

기계를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에요.

그러니 전기가 들어오면 기계가 움직이는 겁니다.

전기를 넣었는데도 기계가 움직이게 않는다는 것은 그 전기는 가짜이지요.

 

그래서 야고보서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합니다.

귀신의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귀신도 믿음이 있어요.

그런데 죽었어요.

주둥이로만 믿는다고 나불거려요.

 

이 시대 대 부분의 교인들이 귀신의 믿음을 갖고 있어요.

입으로만 믿어요.

입으로는 모두가 예수님보다 믿음이 더 좋아요.

그런데 손가락 하나 가딱하지 못해요.

 

그러니 섬기기를 합니까?

교회를 나옵니까?

연보를 합니까?

충성을 합니까?

 

뭐라고 하면 어디 행함으로 구원을 받나요 하면서 꼴값을 떨어요.

귀만 커가지고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에는 으뜸이에요.

그러니 그런 사람에겐 생명이 나오지 않고 죽음이 나오는 겁니다.

사망의 냄새가 풀풀 나와요.

따뜻함이 없고 찬바람만 쌩쌩 불어요.

 

포도나무에 꽃이 핀 것은 믿음이 살아있다는 겁니다.

술람미가 살아 있으니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용서가 나오는 겁니다.

솔로몬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술람미 속에서 살아서 열매를 맺고 있기 때문에 용서라는 포도나무 꽃을 피우는 겁니다.

그래서 향기를 발하는 겁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거예요.

믿음과 행함은 반드시 같이 가요.

그러니 믿음을 자랑하지 말고 그 믿음을 삶으로 토해내세요.

용서로!

섬김으로!

베품으로!

연보로!

형제사랑으로 토해내세요.

 

믿음은 남자에요.

웬 뜬금없는 소리인가 들리지요.

무슨 말인고 하니

믿음이 남자라고 하면 행함은 여자란 말입니다.

 

새로운 용어 하나 만들어 봅시다.

드디어 정낙원 목사가 이단의 본색을 드러내나보네요.

믿음을 남자라 하고 행함을 여자라고 말하는 것을 보니!

 

잘 들으세요.

믿음은 남자처럼 힘을 공급해요.

아까 전기 비유를 했잖아요.

전기처럼 믿음이 들어오면 힘이 생겨요.

 

마치 남자가 여자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것과 같아요.

여자가 남자에게 생명을 공급받으면 그 여자는 남자가 준 생명을 자기 몸으로 표현해 냅니다.

임신(姙娠)을 하여서 그 아이를 키우잖아요.

여자가 아이를 임신하면 자기 모든 것을 동원하여서 키우는 것을 행함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남자이고 행함은 여자와 같다고 하는 겁니다.

비유예요.

비유!

 

그러니 또 정낙원 목사는 믿음은 남자이고 행함은 여자라고 말하지 마세요.

그러지 않아도 이단인데 또 이단 되면 사단이 되잖아요.

전 사단 되기 싫거든요.

그냥 예수님처럼 이단으로만 있을래요.

 

바울이 그러지요.

남자답게 강건하라고 하지요.

왜? 남자답게 강건하라고 했을까요.

 

남자라고 할 때는 여자를 반대하여서 말하는 겁니다.

믿음을 남자의 특징으로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제가 믿음을 남자라고 말을 한 것은 바울의 말에 살을 붙여서 한 말이니 틀린 말아 아니지요.

 

남자와 여자의 차이는 주는 자와 받는 자의 차이에요.

남자는 하늘을 상징하고 여자는 땅을 상징해요.

하늘은 땅에게 다 주어요.

땅은 하늘로부터 받은 것으로 산물(産物)을 내요.

 

남자는 하늘처럼 여자에게 씨를 주어요.

여자는 땅처럼 받아서 생명을 틔워요.

 

그래서 성경은 남자를 예수님이라고 하고 모든 성도는 여자로 말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남자가 되어서 여자인 성도들에게 자기 생명을 주어요.

그러면 여자는 예수님의 생명을 받아서 틔워야합니다.

 

생명을 틔워서 남자답게 강건해져야 해요.

예수님처럼 섬기는 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스스로 종이 되어 섬긴다는 말이에요.

이걸 본문에서 포도나무가 꽃을 피워서 향기를 토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예수를 믿는 신앙은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짐을 대신 짊어지는 거예요.

마치 부모가 자식을 섬기듯이 섬겨요.

교회는 믿음이 강한 자들이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돌아보아야 해요.

 

술람미와 예루살렘 여자를 비유하면 술람미는 강한 자이고 예루살렘 여자들은 약한 자에요.

약하니까 투기하고 시기 질투를 하지요.

술람미는 강하니까 참는 겁니다.

자기를 핍박하는 자들은 용서하는 겁니다.

이건 강한 자만이 할 수가 있어요.

 

누가 강하냐!

신랑으로부터 사랑받으면 강해요.

사랑받으면 넉넉해져요.

그러니 강해지는 겁니다.

 

술람미는 어떻게 강한 자가 되었나요?

그건 신랑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술람미 속엔 솔로몬의 사랑이 들어 있어요.

마치 여자의 몸속에 남자의 씨를 임신하였듯이 말이에요.

 

예루살렘 여자들 속엔 솔로몬의 사랑이 없어요.

그러나 술람미 속엔 솔로몬의 사랑이 있어요.

솔로몬의 사랑이라는 아이를 잉태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강한 자가 되는 거지요.

 

여러분! 믿음을 받으면 여유로워져요.

이상하게 느긋해져요.

누구랑 경쟁할 이유도 없고!

그냥 편안해요.

 

그러니 싸울 이유가 없지요.

남과 비교하지도 않아요.

하나님의 일하심과 은혜를 알기 때문이에요.

 

제가 과거 율법이라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할 때는 모두가 경쟁이었어요.

그런데 은혜를 받고 보니 경쟁할 이유가 사라졌어요.

그냥 주어진 대로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이건 억지로 그래야지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어요.

경쟁 하지도 않지만 설령 경쟁한다 하여도 이긴들 무엇 하겠으며 진들 또 어떠냐에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다툼이 생기지 않지요.

그냥 마음이 편안해요.

 

술람미는 솔로몬의 음성을 듣고 나니 여유가 생겼어요.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을 용서할 수가 있어졌어요.

자신은 신랑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관대함이 묻어나오는 겁니다.

 

술람미는 예루살렘 여자들과 싸우지 않았어요.

때리면 맞았어요.

이는 예루살렘 여자들이 받아 보지 못한 신랑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포도나무 꽃처럼 향기를 토해내게 되는 겁니다.

 

솔로몬이 지금 술람미의 모습을 칭찬하는 겁니다.

술람미야! 넌 어쩜 그렇게도 마음이 고우냐!

그렇게 널 미워하고 핍박한 자들을 어떻게 용서 할 수 있느냐!

 

술람미의 모습을 무화과나무 열매로 포도나무 꽃 향기로 말하고 있는 겁니다.

역시 내 색시답구나!

그러는 겁니다.

 

술람미가 토해내는 향기는 솔로몬의 향기에요.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포도나무 향기를 토하고 가셨어요.

자기를 핍박하고 죽이는 자들을 행하여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달라고 했어요.

저들이 알지 못하여서 그런다고 도리어 긍휼을 베풀었어요.

 

스데반 집사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님의 약속을 받은 자들에겐 이런 관대함들이 나와요.

열매를 맺은 자들만이 토해 낼 수가 있어요.

관대함은 이긴 자만이 토해 낼 수가 있어요.

이긴 자의 여유에요.

 

천국엔 이런 자들이 가는 곳입니다.

예수님의 신부가 가는 곳이에요.

예수님의 신부가 되려면 예수님과 같은 마음을 가져야지요.

 

바울이 그럽니다.

너희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로 오신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술람미는 지금 솔로몬의 마음을 품고 있어요.

그러니 가자고 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고 합니다.

 

이제 되었구나!

네가 다 익었구나!

이젠 왕궁에서 살아도 되겠구나!

이젠 당당하게 왕후로서 살아도 되겠구나!

그러니 이제 왕궁으로 가자고 합니다.

 

왕후로서 살려면 왕과 같은 마음을 품어야 살 수가 있어요.

그래야 백성들에게 왕의 자애로운 마음들을 나누어 줄 수가 있지요.

솔로몬을 따라 왕궁으로 들어가면 술람미는 왕후가 됩니다.

그럼 예루살렘 여자들도 백성이에요.

왕후로서 예루살렘 여자들도 보듬어주어야 해요.

지금 솔로몬은 술람미에게서 왕후로서의 모습을 본 겁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을 일컬어 포도나무라고 합니다.

솔로몬은 예수님의 표상적 인물이지요.

그럼 솔로몬도 예수님처럼 포도나무가 되겠지요.

그런데 솔로몬이 술람미를 포도나무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한다고 합니다.

이는 술람미가 자신과 같은 마음을 품고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 성도가 예수의 마음을 품으면 예수님처럼 되는 겁니다.

예수가 된다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과 같은 마음이 든단 말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세요.

그러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그러니 여러분의 마음에도 기화요초 만발하는 봄을 맞이하세요.

겨울이 지나고 비도 그치고 세들이 노래하고 무화과나무 열매가 익고 포도나무 꽃향기가 토해지는 그런 날 속에서 사세요.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부디 이 은혜가 여러분의 마음속에 임하여 신령한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마음속에도 봄이 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주는 은혜 안에서 불안과 초조와 근심 걱정들이 다 사라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마음에 천국이 회복되어지게 하시고 처음 사랑을 회복하여 신령한 노래로 친미의 제사를 드릴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출처 : 울 산 목 양 교 회
글쓴이 : 정낙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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