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7년 대환난 교리, 과연 성경적인가?
7년 대환난 교리, 과연 성경적인가?
(단 9:24-27)
성경공부와 관련해 특별히 구약 선지서에 대한 연구는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율법언약 및 다윗의 왕국언약과 불가분의 연관을 맺는다. 왜냐하면 상기 세 언약의 총체적인 성취와 관련해 다윗과 솔로몬 통치 하의 통일 이스라엘 왕국(왕정)의 등장은 동시에 왕의 경호원들로서 본격적인 선지직의 등장과 밀접하게 연관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통일 이스라엘과 분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집중적으로 등장하게 되는 포로 전/포로기/포로 후 선지자들의 사역은 불가피하게 시내산 율법언약(모세언약)에 불순종한 이스라엘의 타락과 심판 경고 및 회개를 통한 구원과 회복의 메시지를 전파(약속)하는 일에 집중된다. 이들 선지자들의 메시지의 핵심 내용들이 다름 아닌 새 언약 사상이다(렘 25:8-12, 31:31-34, 겔 36:24-31, 37:24-28).
이런 관점에서 다니엘서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세 번에 걸친 남유다 침략(BC 605/597/586)과 관련해 그 첫 번째 침략 (BC 605)사건에 관련된 내용이다(*참고로 본 강의안은 장수민 목사의‘다니엘서 9:27과 7년 대환난의 관계’란 글을 부분적으로 수정/보완해 재구성했다).
1. 다양한 종말론 해석
모든 종교는 나름대로의 내세관을 제시한다. 내세관이 없으면 종교로 성립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내세관은 다양한 종교관 성립의 관건으로 기능한다. 내세관은 불가피하게 종말론과 깊이 연계된다. 기독교도 이런 관점에 있어서 예외일 수 없다.“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 15:19).
성경연구에 있어서 특별히‘종말론’이라는 분야만큼 신비로움과 흥미로움을 가져다주는 주제도 없을 것이다. 한국 교회 현장에서 이 민감한 주제를 다룸에 있어서‘7년 대환난’이라고 하는 이론이 마치 당연한 진리인 듯 취급되어지는 경향이 팽배함을 보게 된다. 이 사상은 세대주의 신학이 주장하는 종말론과 관련된 부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사건에 앞서 먼저 공중 재림(살전 4:16-17)이 발생하는 것과 때를 같이 해 지구상에‘7년간의 대환난’이 일어나게 되고, 7년 대환난 후에 공중으로 휴거(rapture)된 성도(교회)들과 더불어 예수님께서 지상 재림을 하게 된다는 학설이다. 세대주의 신학은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이중적(공중/지상) 재림을 주장한다. 세대주의 신학에서는 교회와 이스라엘을 별개의 두 부류의 하나님의 백성들로 구별한다(죤 넬슨 다비, 1800~1882).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공중 재림에 참여하는 휴거된 성도들은 부활한 교회를 가리키는 셈이 된다.
7년 대환난을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이 이론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에 아주 내려오시지 않고‘공중에서 7년 동안 머물러 계시면서 성도들과 더불어 혼인잔치를 배설해 주신다’고 가르친다(계 19:9). 이 혼인잔치에 참석하기 위해 이미 죽은 성도들은‘부활’하여 휴거되고, 살아 있던 성도들은 산채로 변화돼 휴거가 이루어지며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해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된다. 이들은 신약시대의 교회원들로 구성된다. 공중에서 벌어지는 혼인잔치 기간 동안 세상은 7년 동안의 극한 대환난기에 접어든다고 주장한다.
7년 대환난 주의자들은 계속해서 주장하기를, 결과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대환난 기간인‘7년’이 지난 다음에 휴거돼 혼인잔치에 참석했던 부활한 성도들과 더불어 비로소 지상으로 재림하시게 되며, 이후 재건된 예루살렘 성전에서 왕이 되어 친히 성도들과 더불어 천년 동안 온 세상을 공평과 정의로 다스리게 된다고 역설한다(세대주의 전 천년설, 계 20:4-6). 예수 그리스도의 천년 지상 통치 때는 예수님의 공중 재림 시 혼인잔치에 참석했던 부활한 자들과, 7년 대환난 기간 동안에 살아 남은 이방인과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데 섞여서 예수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를 받게 된다. 물론 지상의 천년 왕국에서 교회의 위상은 백성들과 차별화된다.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짐승을 잡아 드리는 구약의 속죄제사가 기념제사의 성격을 띠고 문자적으로 회복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천년 지상 통치 시기에 다시 죄악이 관영해 지고(계 20:7-10),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께서 최종적으로 저들을 심판하심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수립되기에 이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세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종말론 교리, 특별히‘7년 대환난’사상은 대단히 비성경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이 이처럼‘7년’이라고 하는 기간을 주장함에 있어서 그 산출 근거는 크게 나누어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다니엘서의‘70 이레’를 해석함에 있어서 마지막‘한 이레’를‘7년’이라고 임의로 가정해 해석하고, 다음으로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42달’,‘1260일’,‘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삼일 반’이라고 하는 표현들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데서 기인한다. 이때 계시록의 표현들은 절대적으로 다니엘서의 한 이레를 7년으로 가정해 해석하는 토대에 근거한다. 따라서‘ 7년 대환난’의 진위성을 가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다니엘서 9:24-27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 요구된다.
다니엘서 9:24-27에서 유의해 볼 대목은‘70 이레’의 때에 오실‘기름부음을 받은 자’의 도래다(25절). 구약적 관점에서 기름부음을 받을 자는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에 국한된다. 이들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일컬어 히브리어로는 메시아, 헬라어로는 그리스도라 부른다. 이때 메시아나 그리스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적으로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예표적으로 가리킨다. 이런 관점에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구약의 메시아는 사실상 메시아의 실체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삼직을 예표하기도 한다. 이 메시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허물이 마치며/죄가 끝나며/죄악이 속량되며/영원한 의가 드러나는 일’로서의 구원 역사가 성취될 것이다(24절). 그런데‘70 이레’의 기간이 세 부분으로 분할된다. 일곱(7) 이레’와‘육십(62) 이 이레’와 나머지‘한(1) 이레’가 그것이다(25절, 27절).
세대주의 신학에서는 27절에 등장하는‘그’를‘적그리스도’라고 해석함으로서 성경 본문을 상당한 수준까지 왜곡시키고 있다. 27절의‘그’는 적그리스도가 아니다. 근접 문맥을 통해 24절에서 예시된‘기름부음을 받는 자’를 가리킨다. 이는 다니엘서 9:24-27 전체의 주제가‘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등장과 그 대속적인 사역에 집중된다는 사실로부터 자연스럽게 추론되는 결론이다(24절).
2. 다니엘서 9:24-27의 요지
먼저 본문의 전체적인 구성을 한 절 한 절씩 살펴보자.
첫째, 24절은 이곳 전체 문장의 표제어(제목)에 해당된다.“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죄의 속량, atone for)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본문의 내용은 ①섭리적 작정의 기간으로 70이레의 기간 설정, ②죄의 속량과 사면, ③영원한 의의 도래, ④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도래 등에 대해서 언급한다.
둘째, 25절은 기름부음 받은 자가 도래하기 이전까지 발생할 사건들이 기술된다.“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 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를 것이며” 본문에는 ①70이레의 시작 시점(성전건축 공시), ②일곱 이레와 육십 이 이레의 기간(성전건축 공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왕의 출현 때까지), ③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고 거리와 해자(성벽)가 이루어지는 역사 등이 기술된다.
셋째, 26절은 기름부음 받은 자의 도래와 그 수난에 대해서 기술한다. “육십 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여기 본문에서는 ①기름 부음 받은 자의 끊어짐, ②한 왕의 백성으로 말미암는 성읍과 성소의 훼파, ③이들의 멸망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 등이 선포된다.
24절:7이레+62이레+1이레
25절:7이레+62이레
26-27절:1이레
이상의 내용에 근거해 상기 본문(24절-27절)을 좀 더 세부적으로 분석해 보자.
3. 본문의 개요는 무엇인가?
상기 다니엘서 본문(9:24-27)에서 핵심적인 주제는 그 동안 구약의 언약적 구속사의 점진적인 진행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꾸준히 예언되어 왔던‘기름 부음 받은 자’, 곧 메시아가 드디어 도래한다는 사실에 대한 선언이다(24절). 그가 오실 때까지‘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다(25절). 그러나 그러한 모든 수고가 진정한 회복을 가져오지는 않는다(26절). 오직‘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 부음을 받는 일’에 근거해서만 온전한 회복이 가능하다. 그 분께서 오셔서 일련의 사역을 수행하심으로 비로소 영원한‘새 언약’이 세워지게 된다(27절).
메시아의 사역의 효력은‘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속량)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24절). 이런 결과는 절대적으로‘메시아께서 받으실 대속적인 고난의 사역’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구약에는 벌써부터 고난의 종으로 말미암는 대속적인 사역에 대한 전형적인 예언이 이사야를 통하여 기록되었다.“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5-6). 이 내용이 26절에서는‘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유대인들이 이러한 메시아의 수난에 결정적인 역할을 주도하게 된다. 따라서 본문은 이러한 유대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강조되고 있다. 26절을 보면 거룩한 예루살렘의 도성과 성전이 훼파될 것이 예언되고 있다(AD 70년). 자기들의 구원의 주(메시아)를 도리어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린 데 대한 준엄한 심판으로서 예루살렘의 파괴는 하나님의 작정에 속한 것이다. 따라서 27절에서‘그’로 표현된 메시아의 사역은 필연적인 상대성에 의해서 유대교의 종말을 가져온다.‘그’의 구속사역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언약으로서‘새 언약’이 성취되고 따라서‘제사와 예물’로서 상징되는 일체의 구약적 제사 제도는 영원히 폐지된다. 성전, 제사, 혈통 등의 일체의 모형적인 구약의 율례와 규례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하나님의 나라로서 교회의 출현 안에서 모두 사라져 버린다(골 2:16-17, 히 8:5, 9:10, 10:1).
이상의 사실들이 다니엘서 9:24-27의 의미하는 핵심 내용이다. 다시 말해 다니엘서 본문의 핵심 주제는‘기름 부음 받은 자의 도래와 그 사역으로 말미암는 죄의 사면 및 영원한 의의 성취와, 새 언약의 수립에 집중된다. 그러므로 다니엘서 본문과 관련해 보편적으로 인식되고 있는‘적그리스도의 등장과 그로 인한 7년 대환난’등의 이론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이런 주장들은 본문을 지극히 자의적이고 편의적으로 해석하는 데서 오는 왜곡이며, 필요 이상의 호기심과 선입견을 가지고 보는 데서 오는 오해이다.
4.‘70 이레’의 기간 해석에 있어서 두 오류
‘70 이레’의 기간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그 중에 대표적인 흐름은‘연속적 해석’과‘공백기 해석’으로 나뉜다. 그러나 이 두 견해 모두 본문을 바르게 보는 관점이 아니다. 보다 바른 견해는 본문의 70이레를 하나님의 섭리적 작정의 기간으로 보는 ‘상징적 해석’의 관점이다.
첫째, 70이레를 연속적으로 보는 견해는 24절의‘70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라는 구절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렇게 접근하게 된다. 즉 기한을 정했다는 표현 자체가 성경 독자로 하여금 연속적인 기간을 생각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 기한을 정했다는 말은 70이레에 대한 해석 여하에 따라서 본래적으로 의도된 의미가 보다 광범위하게 드러나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므로 여기서는 다만 70이레의 기간을 연속적 시간의 길이로 보지 말아야 한다는 점만 확인해 둔다.
둘째, 공백기 해석은 세대주의 학파의 해석적 관점이다. 세대주의 학파는 70이레의 기간들 사이에 괄호 시대를 집어넣어 해석한다. 26절에 나타난 두 가지 사건(기름부음 받은 자의 끊어짐/한 왕과 그의 백성의 출현)의 역사적 성취를 전제하여 이런 식으로 해석한다. 즉 26절의 사건은 역사적으로 성취되었는데 그러나 27절의 사건은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두 기간 사이에 괄호 시대를 설정한다(7이레+62이레+( )+1이레). 바로 이 부분에서 정통 개혁주의 학파와 큰 차이를 보인다. 즉 개혁주의 학파는 70이레를 구속사의 진행과 관련해 상징적인 하나님의 섭리적 작정기간으로 보면서 현 교회시대를 한(1) 이레의 기간으로 해석한다. 반면에 세대주의 학파는 현 교회 시대를 69이레(7이레 +62이레)와 한(1) 이레의 사이에 속한 괄호시대로 묶어 해석한다. 다시 말해 세대주의 학파의 주장은 69이레의 기간은 지나갔지만 나머지 한 이레의 시기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는 관점이다. 이 나머지 한 이레의 기간과 관련해 세대주의 학파가 주장하는 소위‘7년 대환난’이론이 등장하게 된다. 이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이들은 이레란 용어를 문자적으로 해석해 7년으로
7이레(49년) + 62이레(434년) + (괄호시대 : 교회시대) + 1이레(7년) = 70이레(490년)
이상의 공식을 보면‘7년 대환난’이론은 지극히 자의적인 것이라는 사실이 한눈에 나타난다. 왜냐하면 처음 7이레와 뒤이어 오는 62이레를 연속적으로 계산하다가 갑자기 마지막 1이레와 관련해서는 무려 2000여년의 기간을 뛰어넘는 이상한 이론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이 뿐만 아니다. 사실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라는 영이 난 때(스 1:1-4, BC 536/고레스)부터 기름부음 받은 자(메시아)가 오신 때까지의 기간도 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렇게 기계적으로 딱 들어맞는 것도 아니다. 즉 저들이 계산한 시작과 끝의 총수인 69이레/483년은 자기들의 기계적인 계산법을 정당화하기 위해 지극히 자의적으로 만들어낸 방법일 뿐이다. 왜냐하면 다니엘서 9장의 전체적인 문맥을 고려해 볼 때,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라는 영이 난 때의 시작은 70년간의 포로생활을 끝마치게 되는 해방령과 직결된다. 이 해방령이 일어난 때는 BC 536년이다. 주전 536년에 바벨론 제국을 정복한 페르시아의 고레스 대왕은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주었고 따라서 이스라엘은 스룹바벨의 지휘 하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면서 구약 종교를 회복하는 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난 때는 바로 이때로부터 시작된다(스 1:1-4).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라는 영을 내리신 이는 하나님이시며 이는 저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수 있도록 섭리하신 사실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라는 영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70년간의 포로생활을 벗어나 드디어 자유케 되었던 사실을 가리키며, 이 모든 역사를 주관하신 분은 절대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이셨음을 증거해 준다(사44:28, 45:1-4).
70이레의 예언이 주어진 배경은 다니엘이 예레미야의 서책을 읽는 가운데 70년만에 포로생활이 끝날 것이라고 예언 했던 사실을 깨닫고(단 1-2, 렘 25:11-12), 이를 위해서 기도를 드리게 된 사건과 깊이 연관된다(단 9:3-19).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의 기도를 들으시고 가브리엘을 통해 응답하셨다(단 9: 20-27). 이렇게 70 이레라고 하는 표현은 이스라엘이 70년간의 포로 생활로부터의 해방이라고 하는 사상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다시 말해 다니엘서 9:24-27 본문에서‘이레’라는 용어는 7이라는 숫자를 가리키는 특별한 용례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역을 섭리적으로 주관해 가시는 가운데 주어지는 일정한 기간, 즉‘특별한 섭리적 작정의 기간’을 일컫는 구속사적 표현이다.
5. 왜‘70 이레’의 기간인가?
‘70 이레’라는 표현은 이제까지 이스라엘이 복역하였던 70년간의 포로생활의 기간이 끝나는 기간과 상응하여 의도적이며 상대적으로 사용되었다. 즉 이스라엘이 70년의 바벨론 포로기간을 마치고 가나안 고토에로의 귀환이 시작되었는데 그 때로부터 70이레의 기간이 도래할 때에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원히 속량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는 날이 올 것이라는 의미이다(24절).
그런 의미에서 70년간의 포로 상태로부터의 회복은 그 자체가 진정한 회복이 아니다. 그것은 영원한 회복의 출발에 불과할 뿐이다. 더 이상 속박이 없게 될 영원한 회복을 위한 첫 출발로서의 시작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70 이레가 차는 날에 이스라엘의 회복을 완성하실 메시아가 출현하게 된다. 이스라엘의 미래지향적인 회복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는 신정왕국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회복은 구약 역사 속에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끊임없이 예언돼 왔던 바로 그 메시아의 도래 안에서 성취될 것이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의 미래적인 회복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신 메시아께서 오심으로 이루어진다는 논리다(24절).
사실 하나님 나라의 정체성의 특징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죄의 권세와 능력이 더 이상 존재하거나 역사하지 못한다는 데서 찾아진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이와 같은 미래지향적인 신정 왕국의 성격과 출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여러 선지들의 메시지를 통해 반복적으로 계시해 오셨다. 그런 의미에서 구약의 이스라엘은 장차 오시게 될 참 메시아로 말미암는 하나님 나라의 정체성을 명실상부하게 구현해 낼 구속계시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이스라엘의 진정한 회복은 70년간의 바벨론 포로생활로부터 해방되는 것과 때를 맞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참 메시아께서 오셔서 죄의 문제를 근절시켜 줄 십자가의 구속사역을 성취하심으로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기름부음을 받으신 메시아께서 오셔서 구속사역을 완성하시는 때에 진정한 의미의 이스라엘, 곧 새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이다. 이는 메시아로 말미암아 회복된 새 이스라엘의 정체가 다름 아닌 신약시대의 교회공동체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런 관점에서 아브라함 언약 속에 약속돼 있는 자손의 정체성은 처음부터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들이 아니었다. 참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로부터 구속함을 받게 될 그리스도인들 곧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들인 교회를 가리키고 있었다는 사실을 간파하게 된다(갈 3:7, 29).
신약의 교회공동체는 원리상 죄가 역사하지 못하는 하나님 나라로 존재한다. 더 이상 죄의 왕 노릇 하는 권세가 교회를 지배하지 못하며, 따라서 음부의 권세도 교회를 주장하지 못한다(마 16:18). 교회는 의의 왕 노릇 하는 권세로서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심으로 새 이스라엘인 교회를 세우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님은 진정‘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마1:21)의 신분과 능력으로 오신 참 메시아이시며 십자가의 구속사역을 통해 자기 백성을 흑암의 권세에서 빼내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히 회복하신 분이다. 그러므로 참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의 생명에 연합한 자들이야말로 참 이스라엘이요 하나님의 친(親)백성들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해 이 땅에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본체 되신 분이다(빌 2:6-8, 마 1:21-23).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면서‘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고 외치신 배경이 이렇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참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하여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고 종말론적으로 완성하시는 때가 바로 70 이레의 마지막 기간에 해당된다.
이처럼 70 이레의 상징적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앞서 다니엘서 2장과 7장에서 이미 예언되었던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와 연관된다. 거대한 신상을 부수뜨리는 뜨인 돌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나라(단 2:34-35)와, 작은 뿔을 심판하시는 인자 같은 이의 권세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나라(단 7:13-14)가 이제‘칠십의 일곱(70이레)’들로 표현된‘신적 작정의 때’가 이르는 날에 드디어 도래하게 되는 것이다.
6.‘이레’는 반드시 ‘칠 년’을 의미하는가?
(* 본 주제는 내용의 성격상 장수민 목사의 글을 전문 그대로 인용했다.)
다음으로 생각해 볼 주제는 과연‘이레’라는 용어가 반드시 문자적으로‘7년’을 가리키는가의 문제다. 이레라는 단어의 히브리어는‘샤부임 쉬브임’으로 의도적으로 남성 복수 명사가 사용되었다. 이는 일곱 이라는 말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적인 기법이다. 왜냐하면 히브리어에서‘주간’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언제나 여성 복수‘샤부옷트’란 표현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70이레를 문법적으로 정확히 번역하면‘칠십의 일곱들’이라는 뜻이다. 즉‘70 이레’는‘70 일곱들’이라는 의미가 성립된다.
‘샤부임’이라는 표현 자체는 일곱들이라는 의미만을 가질 뿐이어서 시간적인 개념을 나타내지 않는다. 시간적인 개념을 갖기 위해서는 그것을 설명하는 다른 단어가 수반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다니엘 10:2-3에 의하면 다니엘이‘세 이레’동안 금식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때 사용된 단어가‘샤부임’과‘아임’의 결합이다. 즉‘이레’(샤부임)와‘날들’(아임)이라는 단어가 결합하여 시간적인 길이를 표현해 내고 있다. 그래서 이 경우‘샤부임’은‘주간’을 뜻하는‘이레’로 번역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다니엘서 10:2-3은 다니엘이 21일 동안 금식했다는 사실을 기술한다. 그렇지 않고 무조건‘샤부임’을‘이레’로 번역해 버리면 다니엘이 21년 동안 금식했다는 식으로 해석하게 된다. 그럴 수 없다.
이상의 사실들을 고려할 때, 이곳의‘한 이레’가‘년 수’를 가리키는‘7년’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경우 논리적으로 모순된다. 문맥적으로‘날 수’는 더더욱 아니다. 그렇다고‘년 수’를 가리켜 70이레를‘70년’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없다. 그러므로 가장 정확한 뜻은‘칠십의 일곱들’이다. 그렇다면‘칠십의 일곱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문법적으로 이해를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철저하게 상징적으로 사용되었다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이런 사실은‘70 이레’가 세 부분(7이레+62이레+1이레)으로 나뉘어서 사용되는 방법이 도입된 자체를 보더라도 순전히 상징적인 용법으로 등장했음을 간파하게 된다.
7. 왜 세 부분으로 분할되었는가?
그렇다면‘70 이레’는 왜 굳이‘일곱 이레’와‘육십 이 이레’와‘한 이레’등의 세 부분으로 분할되었는지를 살펴보자.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사실 이런 식의 표현 방식이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런 표현법은 이미 다니엘서 7:25에서 나타났고, 지금 또 다시 나타났으며, 이후 12:7에서도 다시 한 번 나타난다. 즉 세 군데 공히‘한 때’와‘두 때’와‘반 때’라는 표현이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된다. 이런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이런 식의 표현법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계획된 어떤‘섭리적 작정의 기간’을 가리키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사용된 표현이란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어떤 섭리적 기간이 있는데 그것은‘한 때’와‘두 때’와‘반 때’의 기간이란 사실이다.
지금 다니엘서 9장에서 사용된 세 기간의 분할도 동일한 용법이다. 즉 특정 목적을 위해 어떤 기간이 세 부분으로 분할되어 묘사된 것은 이제 하나님께서 특별한 구속사적 목적을 이루시는 일과 관련해 각각의 분할된 기간마다 해당되는 어떤‘특정한 사건 설명’이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로 해석된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염두에 두신 어떤 구속사의 사건들이 있는데, 이것이‘한 때’와‘두 때’와‘반 때’의 기간들 속에서 성취된다는 것이다. 다니엘서 7:25의 경우, 이 기간은‘작은 뿔’을 통하여 성도들을 연단시키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여 준다. 다니엘서 12:7에서는 다니엘이 자기에게 계시된 사건이 있는데, 그것이 성취되는 때를 알기 위해서 일정 기간을 기다려야 하는‘기다림의 기간’과 관련해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 기간은 하나님의 섭리적 작정 안에 속해 있다.
여기 다니엘서 9장에서 70 이레의 기간이 세 부분으로 분할된 원리도 같은 맥락이다. 이것 역시‘한 때’와‘두 때’와‘반 때’의 의미가 담겨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한 때’와‘7 이레’가 상응하고,‘두 때’와‘62 이레’가 상응하며, 나머지‘반 때’와‘한(1) 이레’가 상응하는 식으로 상호 연결된다. 다만 이것이‘70년 바벨론 포로기간의 종식’이라는 개념과 비교되기 위해서 상대적으로‘70 이레’라고 하는 개념을 도입했을 뿐이다.
이 사실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요한 계시록에 나타나는 같은 용법의 표현들을 크게 오해하게 된다. 요한 계시록에서도 이 사상이 연장되어‘한 때와 두 때와 반 때’가 한 번 나타나고(계 12:14), 계속해서‘사흘 반’이 두 번(11:9-11),‘42달’이 두 번(11:2, 13:5),‘1260일’이 두 번(11:3, 12:6)에 걸쳐서 나타난다. 이들 표현들을 종합해 보면 모두‘3.5’라고 하는‘상징’을 원리로 하고 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이‘3.5’의 원리가 응용적으로 확대되어‘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로 혹은‘사흘 반’으로 나타나고, 또한‘42달’과‘1260일’로 나타나고 있다. 요한 계시록에서 발견되는 이런 일련의 표현들은 여기 다니엘서에 나타난‘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의 개념의 도입이요 확대인 셈이다. 이처럼‘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의‘3.5’의 원리는 결국‘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작정하신 섭리적 기간’을 표현한다.
결과적으로 세대주의 학파는 이런 사실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면서‘전반기 3년 반’과‘후반기 3년 반’운운하면서 두 기간을 합하여‘7년’이라고 하는 숫자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세대주의 학파가 주장하는 소위‘7년 대환난’교리는 이상의 맥락에서 나온 비성경적 주장이다.
8. 27절의‘그’는 누구인가?
결론적으로 한(1) 이레 동안의 언약은 렘 31: 31-34절의 성취이다. 이 성취는 오직 메시아의 오심 안에서만 가능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맺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눅 22:20, 마 26:26-28, 고전 11:23-26)을 통해서만 예레미야의 새 언약(렘 31:31-34)은 성취가 보증된다. 예레미야의 새 언약의 핵심은 죄의 영원한 도말에 집중된다(렘 31:34).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구속사역을 감당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까지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상징적이며 모형적이고 예표적으로 가르쳐 왔던 일체의‘제사 행위’가 종식되었다. 그런 식으로‘제사와 예물을 금지시키신 것’이다(단 9:27). 그리스도께서 어린 양의 실체로서 우리의 구속을 위해 산 제물로 드려졌기 때문이다(요 1:29).
다니엘서 9:27에서‘이레의 절반’은 전술했던 원리를 고려하건대, 문자적으로‘3년 반’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구속사의 점진성의 원리 속에서‘중요한 전환점의’사건이 발생한 기간, 혹은 때를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이레의 절반’이란 표현 속에는‘기름 부음 받은 자’의 실체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사건이 함축돼 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사건은 창세전에 협약된 삼위하나님의 구속경륜(엡 1:4-14) 속에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온전히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명실상부하게 선언하는 구속사적 의미를 확증시켜 주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다니엘서 9:27의‘그’의 정체는 명백하게 24절에서 이미 언급되었던‘지극히 거룩한 자’로서‘기름 부음을 받은 자’곧 참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칼빈은 그의‘다니엘서 주석’에서, 그리고 구약의 뛰어난 석학 에드워드 제이 영(Edward J. Young)은 그의‘다니엘의 예언’이라는 책에서 이 사실을 논리적으로 잘 규명하고 있다. 미국의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교수로서 사당동 총신 신대원에서 교수로서 봉직한 바 있는 간하배(Harvie M. Conn)교수 역시‘다니엘서의 메시아 예언’이라고 하는 그의 저서에서 이 사실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이상 살펴보았듯이 다니엘서 9:27의 마지막‘한 이레’는‘지극히 거룩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작된‘의의 나라’(현재적 하나님 나라)로서의 교회시대 전체 기간을 가리킨다는 결론에 이른다.‘한 이레’는 이 기간의 도래를 가리키는 상징적 표현으로‘반 때’에 상응하는 용법인 셈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도래한‘새 언약의 시대’인 신약시대 전체의 기간을 가리킨다. 한 이레와 관련해 EC와 적그리스도와 7년 대환난 운운하는 내용은 전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비성경적 견해이며 관점에 불과하다.
성경 해석에 있어서 기본적인 원리는 언약적 구속사관에 근거해 총체적인 계시관을 통한 구속 계시의 일관성과 통일성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통전적이고 통시적인 문맥의 흐름을 외면하고 특정 본문에 대한 자의적(사변적)인 해석과 편의적인 적용은 사람들의 관심과 흥미를 유발시킬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을 정상적인 신앙생활 곧 계시의존적이고 섭리의존적인 신앙에로 이끌어가는 일과 관련해 불법적이고 불순종적인 결과를 초래시킬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