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인가

[스크랩] 여자의 서원을 대신 할 남자

제이원1 2013. 8. 29. 14:27

여자의 서원을 대신 할 남자 (민 30:1-16)

 

민수기 16장 1-16절=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 지파의 두령들에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의 명령이 이러하니라 2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마음을 제어하기로 서약하였거든 파약하지 말고 그 입에서 나온 대로 다 행할 것이니라 3 또 여자가 만일 어려서 그 아비 집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 서원한 일이나 스스로 제어하려 한 일이 있다 하자 4 그 아비가 그의 서원이나 그 마음을 제어하려는 서약을 듣고도 그에게 아무 말이 없으면 그 모든 서원을 행할 것이요 그 마음을 제어하려는 서약을 지킬 것이니라 5 그러나 그 아비가 그것을 듣는 날에 허락지 아니하면 그 서원과 마음을 제어하려던 서약이 이루지 못할 것이니 그 아비가 허락지 아니하였은즉 여호와께서 사하시리라 6 또 혹시 남편을 맞을 때에 서원이나 마음을 제어 하려는 서약을 경솔히 그 입에서 발하였다 하자 7 그 남편이 그것을 듣고 그 듣는 날에 그에게 아무 말이 없으면 그 서원을 행할 것이요 그 마음을 제어하려는 서약을 지킬 것이니라 8 그러나 그 남편이 그것을 듣는 날에 허락지 아니하면 그 서원과 마음을 제어하려고 경솔히 입술에서 발한 서약이 무효될 것이니 여호와께서 그 여자를 사하시리라 9 과부나 이혼당한 여자의 서원이나 무릇 그 마음을 제어하려는 서약은 지킬 것이니라 10 부녀가 혹시 그 남편의 집에 있어 서원을 하였다든지 마음을 제어하려고 서약하였다 하자 11 그 남편이 그것을 듣고도 아무 말이 없고 금함이 없으면 그 서원은 무릇 행할 것이요 그 마음을 제어하려는 서약은 무릇 지킬 것이니라 12 그러나 그 남편이 그것을 듣는 날에 무효케 하면 그 서원과 마음을 제어하려던 일에 대하여 입술에서 낸 것을 무엇이든지 이루지 못하나니 그 남편이 그것을 무효케 하였은즉 여호와께서 그 부녀를 사하시느니라 13 무릇 서원과 무릇 마음을 괴롭게 하려는 서약은 그 남편이 그것을 지키게도 할 수 있고 무효케도 할 수 있나니 14 그 남편이 일향 말이 없으면 아내의 서원과 스스로 제어하려는 일을 지키게 하는 것이니 이는 그가 그것을 들을 때에 그 아내에게 아무 말도 아니하였으므로 지키게 됨이니라 15 그러나 그 남편이 들은 지 얼마 후에 그것을 무효케 하면 그가 아내의 죄를 담당할 것이니라 16 이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율례니 남편이 아내에게, 아비가 자기 집에 있는 유년 여자에게 대한 것이니라”

 

 

예수님께서는 모든 성경은 자신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모든 성경이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하여 기록되어져 있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증거대로 라면 이스라엘이라는 인간의 역사만 보지 말고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로 볼 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구약 성경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역사를 배경으로 기록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모든 일들은 사사로운 일이 아니라 예수님과 연관된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오늘 본문은 여자가 한 서원을 남자가 대신 담당한다는 내용이다.

어떤 여자가 시집을 가기 전에 하나님께 서원을 하였으면 아비가 그 서원을 담당하겠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그 여자의 서원을 받아주신다고 한다.

 

그러나 만약 그 아비가 딸에 서원을 허락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 서원은 없었던 걸로 하시겠다고 한다.

또한 시집을 가서 서원을 하였다면 남편의 허락 여부에 따라서 유효가 되기도 하고 무효가 되기도 한다.

 

서원이란? 하나님 앞에 맹세하는 약속을 말한다.

즉 여자가 나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살겠습니다 라고 약속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약속한다는 것은 난 앞으로 이렇게 헌신하고 순종하며 살겠습니다 라는 것들이다.

결국 서원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지키겠다는 충성맹세와 같다.

 

마치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산에서 주신 율법을 자신들이 지키겠다고 하나님께 약속한 것과 같다.

그런데 약속은 지킬만한 사람이 하여야 그 약속에 가치가 있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가 어른에게 약속을 하였다고 하여도 어른은 그 약속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왜냐하면! 약속은 서로 간에 격이 맞을 때 지켜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여자가 서원을 하면 그 서원을 남자가 담보로 할 때 가치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받아 주겠다고 하신다.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은 여자의 말을 믿지 않고 남자의 말을 믿겠다는 것이다.

 

여자는 약속을 지킬 주체가 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또한 하나님은 여자와 상종하지 않겠다는 뜻도 포함되어져 있다.

그래서 비록 여자가 서원을 하였다 할지라도 남자가 허락하여야 그 서원에 가치가 있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남자가 허락한다는 말은 남자가 그 여자를 보증을 서겠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은 왜? 여자와 약속하지 않고 남자와만 하시는지를 알아보아야 한다.

먼저 성경이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어떻게 정의하고 계시는지를 알아야 한다.

 

창세기 2:7-9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에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다고 한다.

그런데 위 본문에서는 어떤 사람을 만드셨는지는 말해주고 있지를 않는다.

 

그런데 이어지는 2장 18-23절을 보면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

 

2:18-23=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나님께서 아담이라는 사람을 잠들게 하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었다고 한다.

창세기의 증거를 보면 하나님은 처음에 남자를 만드셨고 그 후에 남자의 몸에서 여자를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하나님에게서 나왔고 여자는 남자에게서 나왔음을 볼 수가 있다.

그렇다면 남자의 주인은 하나님이고 여자의 주인은 남자라는 논리가 성립된다.

사도바울은 성령의 감동으로 이 사실을 알았다.

 

고린도전서 11:3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바울은 남자는 여자의 머리라고 한다.

머리란? 주인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창세기 3장 16절에서는 여자는 남자의 다스림 안에서 살도록 하셨다.

 

창세기 3:16절=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정리를 하면 여자는 홀로 존재하는 자가 아니라 남자 아래서 존재하는 자라는 뜻이다.

여자는 항상 자신은 남자 안에서만 존재 할 수 있는 자라는 것을 인지하고 살아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자가 서원한 문제를 주인인 남자가 책임을 지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성경 속에서 남자는 여자의 허물을 책임지는 자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최초의 남자와 여자였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는 예수그리스도와 성도를 남편과 아내라고 말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는 예수그리스도와 성도를 표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창세기에서는 아담과 하와로 이야기 하였지만 실제로는 예수그리스도와 성도이야기를 하고 계셨던 것이다.

 

성경 속에서 남자란 생명을 주는 자를 말한다.

생명이란? 하나님의 생명을 말한다.

알다시피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생명을 받지 못한 채 범죄하여 죽은 자가 되었다.

 

모든 인간은 아담의 후손이므로 모두가 생명이 없는 죽은 자로 태어난 죽은 자들이다.

그렇다면 이 땅엔 생명을 줄 수 있는 남자가 없다는 말이다.

흔히들 우수겟소리로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라고 한다.

맞다.

 

모든 인간은 하늘이 주는 생명을 받아야 할 땅이다.

모든 인간은 예수님이 주는 생명을 받아야 할 자들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남자는 예수그리스도 한 분뿐이고 모든 인간들은 여자이다.

모든 인간들이 여자라는 것은 하나님과 상대할 자들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모든 인간이 여자라고 하는 것은 인간들 쪽에서 죄를 책임을 져줄 자가 없다는 말이다.

 

부정모혈로 태어난 자는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죄를 대신 할 자가 없다.

목사도 아니고, 교황도 아니고, 공자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다 여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속한 그 어떤 인간을 추종해서도 안되고 믿어서도 안 된다.

믿어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께서 남자라고 인정해 주는 분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인간들은 하나님이 인정하는 남자가 누구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 남자를 찾아서 자신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다고 서원 한 것을 대신 담당해 달라고 해야 한다.

하나님은 이 땅에 남자가 누구인지를 요단강에서 알려 주셨다.

 

마태복음 3:16-17절=“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요단강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보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공포하셨다.

이는 하나님이 인정하는 최초의 남자가 이 세상에 출현하는 장면이다.

 

이러한 광경을 목격한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하였다.

눈여겨 들어야 하는 말이 “세상 죄를 지고 간다” 라는 말이다.

세상 죄를 지고 간다 라는 말은 죄인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간다는 말이다.

여자인 인간들이 지고 가야할 죄를 남자인 예수님이 대신 지고 간다고 한다.

 

세례요한의 이 말을 오늘 본문으로 의역하면 예수님은 인간들의 서원을 대신 갚아주실 분이라는 말이다.

이제 하나님이 인정하는 남자가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이 세상의 모든 운명은 예수님에게 달려있다.

이제 예수그리스도가 대신 담당해 주시는 자라야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을 수가 있다.

성도의 죄를 예수님께서 책임을 지는 이유는 성도를 예수님께서 선택하였기 때문이다.

마치 아담의 몸에서 여자가 나온 것과 같다.

 

그래서 본문에서 여자가 하나님께 헌신한 것을 남자인 예수님이 대신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여자와 같은 죄인의 것을 받기를 원치 않고 남자와 같은 예수그리스도의 것을 받기를 원하신다.

 

이를 알고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다고 한다.

 

히브리서 3:6절=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성도들에게 당부하기를 예수그리스도가 아들로서 하나님께 충성을 하였으니 그 아들을 견고히 붙잡으라고 한다.

성경은 이렇게 하나님과 남자 되신 예수그리스도와 맺은 언약을 새 언약이라고 한다.

 

새 언약은 하나님과 예수님 두 분 사이에 맺어진 언약이다.

여자인 성도들의 모든 죄를 남자로 오신 예수님께서 대신 책임을 지겠다는 언약이 새 언약이다.

 

새 언약 하에선 하나님 앞에서는 예수그리스도가 책임져 주는 것만이 유효한 것이 된다.

예수님이 책임져 주는 인간만이 하나님 앞에서 용서를 받을 수가 있다.

대신 죄를 져 주는 것을 대속이라고 한다.

 

성도란? 대속 자 때문에 용서 받고 사는 자들이다.

신앙생활이란? 대속자를 사랑하고, 대속자에게 감사하고, 대속자를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의 행함으로 죄가 속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의 행함을 의지할 수가 없다.

 

교회가 죄를 사해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교회의 말에 순종할 필요도 없다.

교단이 죄를 사해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교단의 말을 들을 필요도 없다.

 

하나님은 성도의 충성를 보고 죄를 사해 주시지 않고,

성도의 헌금을 보고 사해 주시지 않고,

성도의 착한 삶을 보고 사해 주시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오직 남자 되신 예수그리스도를 보고 성도의 죄를 사해 주신다.

그렇다면 성도가 붙잡고 있어야 할 것은 남자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뿐이다.

성도가 사랑해야 될 대상이 분명하게 정해져 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누구든지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으라고 한 것이다.

 

고린도전서 16:22절= “만일 누구든지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성도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 이외 사랑할 대상을 두어서는 안된다.

교회를 사랑해서는 안되고, 목사를 사랑해서도 안 되고,

오로지 예수그리스도만 사랑하여야 한다.

 

어느 목사가 왜? 당신은 목사의 말에 순종하지 않습니까? 라고 한다면 당신이 날 위해 십자가를 지지 않았는데 내가 왜? 당신의 말에 순종해야 합니까? 라고 해야 한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의 말일지라도 그 말이 예수그리스도만을 높이고 증거하는 말이라면 순종을 하여야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들을 필요가 없다.

 

예를 들어서 목사가 성도 여러분! 교회를 짓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니 헌금을 하십시오 라고 한다면 복음을 아는 성도라면 하나님은 교회 짖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라고 해야 한다.

 

인간들이 하는 일을 믿음에 결부시켜서는 안 된다.

만약 교회에 충성하고 봉사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한다면 또 하나의 믿음이 생기게 된다.

충성과 봉사와 헌신은 강요할 문제가 아니고 감사의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살아 있는 어린아이가 잠시라도 가만있지 않고 꼬물락 거리듯이 예수님의 생명이 살아 있는 사람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주님께 받은 사랑을 쏟아낸다.

그러니 예수 안에서 사는 성도는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예수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증거하게 되어 있다.

 

그 증거가 때로는 성도를 섬기는 모습으로,

때로는 복음 증거를 위한 헌금으로,

때로는 복음 전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 행함을 믿음이라고 하지 않는다.

다만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일로 표현했을 뿐이다.

 

예수님은 옥합을 깨트려 예수님의 발을 씻겨 주던 여인을 보고 힐난하던 제자들에게 많이 탕감 받은 자는 많이 사랑하고 적게 탕감 받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고 하시면서 여인을 책망하던 제자들을 나무랐다.

즉 죄사함의 은혜를 많이 깨닫는 사람은 예수그리스도를 많이 사랑할 것이고 적게 깨닫는 사람은 적게 사랑할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니 깨닫는 사랑이 교회에 헌신하는 모습으로 성도를 섬기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가 있다.

그러나 그 헌신 자체가 믿음은 아니다.

믿음은 오직 예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에 봉사와 충성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봉사와 충성은 믿음 없이도 얼마든지 행할 수 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외식을 질책하셨다.

 

마 15장 8절=“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라고 하셨다.

 

외식이란? 겉 다르고 속 다르다는 말이다.

인간이란? 겉으론 “안녕하세요” 하면서 속으론 “나쁜 놈” 이라고 욕을 한다.

이게 인간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인간의 충성 맹세나 서원을 받지 않는다.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셔야만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들은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갈대처럼 흔들리는 여자처럼 인간은 믿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자인 죄인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려고 오신 것이다.

대신 짊어지는 것은 여자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 대신 죽어주는 것이다.

마치 남자인 아담이 여자인 하와와 함께 죽는 길을 택한 것과 같다.

 

아담은 선악과를 안 먹을 수도 있었다.

실제로 아담은 한 동안 하나님의 명령대로 선악과를 먹지 않았다.

알다시피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고 한 시점은 여자가 만들어지기 전이었다.

 

최소한도 아담은 여자가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뜻대로 선악과를 따 먹지 않고 살았다.

그런데 자기 몸에서 나온 여자가 선악과를 따 먹고 죽은 자가 되니 알면서도 같이 먹고 죽어 버린 것이다.

남자가 여자와 한 몸이 되어 죽은 것이다.

 

같이 죽어 줄 수 있는 사람은 자기 몸에서 내어 준 자만이 할 수가 있다.

아담의 몸에서 여자가 나왔고 예수님의 몸에서 성도가 나 온 것과 같이,,,,

 

그래서 성도의 죄를 성도를 낳아 주신 예수님이 대신 져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지 않아도 되는데 성도들 때문에 죽어 주신 것이다.

예수님이 선택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끝까지 책임져 주시는 것이다.

 

마태복음 11장 28-30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남자로서의 예수님이 대신 담당해 주지 않으면 인간의 죄는 사해지지가 않는다.

하나님 앞에서 남자로 살려하지 말고 여자로 살아라.

 

성도의 축복이란? 자신의 죄를 대속하실 분을 모시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나를 보호해 주실 강건한 남자이신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에 성도는 복된 자이다.

 

 

 

출처 : 울 산 목 양 교 회
글쓴이 : 나그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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