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이야기

[스크랩] 남자가 부모를 떠나는 이야기

제이원1 2013. 7. 26. 13:48

6. 남자가 부모를 떠나는 이야기

 

 

남자가 부모를 떠나는 이야기는 예수님의 이야기이면서 우리의 이야기이다.

예수님이 부모를 떠나는 이야기와 우리가 부모를 떠나는 이야기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르다.

예수님이 부모를 떠나는 것은 자기백성들의 구원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우리가 부모를 떠나는 것은 타락이고 죽음이 된다.

이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신 남자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고 예수로부터 생명을 받아야 하는 여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담이 부모를 떠나는 이야기 속에는 인간의 타락 이야기도 있고 죄인이 구원 받는 이야기도 함께 들어 있다.

예수님 이야기로 풀면 구원이야기가 되고, 우리 이야기로 풀면 타락이야기가 된다.

오늘은 아담의 이야기로 풀어보기로 하자.

 

지난 시간 성도는 여자이면서 남자이고 남자이면서 여자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성도는 예수님으로부터 아들의 생명을 받음으로 씨 없는 여자에서 씨를 가진 남자가 되었다.

그러나 성도는 비록 남자라고 하지만 여전히 진짜 남자인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끊임없이 받아야 하는 입장에서는 여자이다.

 

성도는 세상에서는 예수의 씨를 가진 남자이다.

그러나 성도라 할지라도 독자적으로 살 수 있는 자가 아니다.

계속하여서 예수의 생명을 공급받음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자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자이다.

 

생명이란? 항상 살아 있는 것이다.

그러자면 영생하는 하나님으로부터 계속하여서 생명을 공급 받아야지만 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미 구원을 받았다 하여도 여전히 구원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 받고 살아야 하는 자이므로 여전히 여자이다.

 

이를 요한복음 15장에서는 포도나무와 가지로 비유해 주고 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을 땐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하지만 나무에서 떨어져 나와 독단적으로 열매를 맺고자 한다면 반드시 고사하고 말게 된다.

하나님의 생명은 우리의 구원의 근원이신 예수님으로부터 공급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가지인 성도가 뿌리인 예수로부터 떨어져 독자적으로 살고자 하는 것을 악이라 하고 교만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농부가 되셔서 이렇게 나무에서 떨어져 독자적으로 열매를 맺고자 하는 자들은 다 모아서 불에 태운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성도는 아무리 은혜를 받았다고 하여도 하나님 앞에선 여자로 살아야지 남자로 살고자 하여서는 안 된다.

만약 자기 주제를 모르고 남자로 살고자 하면 어떤 고통을 당하게 되는지를 아담을 통하여서 말씀해 주시고 있다.

 

먼저 아담은 곧 우리의 자화상임을 밝혀두고자 한다.

 

그러므로 오늘은 피조물이 창조주를 떠나서 독자적으로 살면 어떻게 되는지를 아담을 통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스스로 남자라고 생각하여 부모를 떠나 독자적으로 살고자 하는 자가 겪는 아픔을 상고해 보자.

 

창 2장 24절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남자가 부모를 떠난다는 말은 곧 부모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남자가 부모를 떠나기 위해서는 먼저 스스로가 독립하여 살 수 있는 남자 구실을 할 수 있어야지만 한다.

 

부모에게 의존해야 하는 남자는 아직 온전한 남자가 아니다.

그럼 독립해서는 안 된다.

부모 아래서 남자 구실을 할 수 있도록 더욱 더 강건한 자로 자라가야 한다.

 

부모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어린아이이지 남자가 아니다.

그가 아무리 장성한 남자로서의 구실을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부모를 떠나지 않은 남자는 부모 밑에서 어린아이일 뿐이다.

어린아이는 한시도 부모 없이는 존립이 어려운 존재이다.

부모의 도움으로 살아야 한다.

 

그러다가 부모 밑에서 건강한 생명으로 자란 아들은 반드시 그 부모를 떠남으로써 남자가 된다.

또한 남자로서의 삶을 충실히 살아냄으로써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이러 할 때 남자가 부모를 떠남이 성립이 된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는 이유는 자신이 바로 그 부모가 되고자 함이다.

성경의 역설은 아버지가 되고자 하는 자는 아들의 상태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예수의 생명을 얻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아담의 생명을 버려야 한다는 점이다.

이건 가나안(하늘)을 가자면 땅(애굽)을 떠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것이 부모를 떠남이다.

부모를 떠나지 않은 상태에서 아버지같이 되겠다는 것과, 생명을 버림 없이 영원히 살려고 하는 것은 곧 참람이며 곧 불경이다.

 

육신적인 결혼 생활에서도 가장 큰 문제는 남자가 부모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제적인 문제는 말할 것도 없다.

정신적으로나 인격적으로도 부모로부터 온전히 독립된 개체여야 할 남자가 이런 저런 문제로 부모에게 매여 있다면 이는 아직 결혼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결혼을 하게 되면 모두가 불행해 진다.

본인뿐만 아니라 부모나 아내나 자식까지도 불행해 진다.

심지어 주변에 사람들까지도 피해를 주게 된다.

 

부모를 온전히 떠날 수 있다면 고부(姑婦)간의 갈등이니, 부모의 유산 때문에 생기는 형제간의 다툼 따위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고부간의 갈등 가운데 거의 십중팔구는 남자가 그의 어머니를 떠나지 못해서 일어난다.

 

고부(姑婦)간의 갈등에 원인은 대다수가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그 남자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두 여자의 갈등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우리나라 남자들의 대부분은 이 경우 아내는 버리더라도 어머니는 버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부모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부모 역시 자식을 붙잡고 있으므로 동일하다.

 

돈 때문에 형제들 간에 원망과 불평이 쌓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결혼할 정도의 나이가 된 남자라면 부모의 돈에 땡전 한 푼의 미련도 있어서는 안 된다.

스스로 수고하여 준비하고 자신의 이마에 땀을 흘려서 밥그릇을 마련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남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책임의 절반은 부모에게도 있다.

부모에게 있어 자식은 언제나 품안에 자식이다.

 

장성하여 자기 품을 떠날 때가 된 아들은 더 이상 자기 자식이 아니라고 생각하여야 한다.

스스로 가정을 꾸리고 살도록 독립시켜야 한다.

이런 면에서 남자인 아버지는 비교적 매정한 편이다.

이는 씨의 속성상 그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렇지 못하다.

아들을 자기 자궁 속에서 하나로 함께 살았고 젖을 물리고 키우고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누이면서 정성을 다해서 키웠던 여자인 어머니는 그럴 수가 없다.

아들에 대한 끈을 놓고자 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식이 떠나려고 하면 본능적으로 뱉어내는 말들이?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이다.

 

이는 너는 나를 떠나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계속하여서 아들로 붙잡아 두고자 함이다.

결국 아들도 어미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일이 발생하고 어미 또한 아들로 인하여 고통당하는 일들이 발생하게 된다.

 

여자는 남자로부터 받은 씨를 자신의 모든 진액을 다 쏟아 부어 그 씨를 장성한 자로 살려내는 것으로 자신의 의미를 다하는 것이 된다.

다 키웠으면 독립을 시켜야 한다.

스스로의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낳고 키우면서 부모가 되는 삶을 살도록 분가를 시켜야 한다.

 

그런데 실상에선 그러하지를 못한다.

장성하여도 떠나보내지 않고 붙잡아 두고자 한다.

이러면 자식은 어미에게 있어 부모와 같은 존재가 되고 자식 또한 그러하다.

그럼 어미나 자식이나 둘 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지 못함이 된다.

 

어머니는 자식을 자기로부터 떠나게 함으로서 남자가 부모를 떠나게 되는 것이 된다.

즉 어머니는 자식을 독립된 존재로 출가를 시킴으로서 자신은 자식이라는 끈(부모)으로부터 떠나게 되는 것이다.

 

어머니를 떠나는 자식이나, 자식을 떠나보내는 어머니는 모습만 서로 어머니와 자식으로 다를 뿐이지 그 내용과 의미는 떠나서 독립적인 개체가 된다는 것엔 동일하므로 모두가 부모를 떠나는 것이 된다.

 

이 모두가 자식이 남자로서 강건하게 장성할 때의 이야기이다.

장성하지 못할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창세기 2장의 아담은 이런 의미로서의 부모를 떠나서는 안 될 자가 떠남으로서 타락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생명과를 먹지 못한 아담은 아직까지 그 안에 생명이 없는 여자이다.

여자에게 씨를 줄 수 있는 입장이 못 된다.

그렇다면 아담은 하나님을 남편으로 맞아들여 하나님의 씨를 잉태함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낳아야 할 여자로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씨를 받으면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토양을 전부 동원하여 그 아들을 튼튼하게 키움으로서 아이를 통하여서 남자가 되어야 할 여자이다.

여자는 아들 속에서 용해(鎔解) 되어지고 아이를 키우는 일에는 남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생명을 받을 때까지는 여자로 있어야 할 때이다.

 

아담에게 있어 급선무는 하나님의 씨를 받아 그 씨 안에 자신이 죽어지고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고 남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고 난 후에라야 비로서 부모를 떠날 수 있게 된다.

 

그럼에도 아담은 하나님의 씨를 받아야 할 여자인 주제에 자기 갈비뼈에서 만들어진 여자를 보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고 하며 빠져들고 말았다.

하나님의 생명을 받지도 못한 아담이 동일한 “네페쉬 하야” 인 여자에게 빠져들었다는 것은 그것 자체로 곧 죽음을 의미한다.

 

강건한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룸으로 자기의 생명을 여자에게 주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하나 된다는 것은 자기도 죽고 상대방도 죽이는 엄청난 불행을 초래하고 만다.

 

창세기 2장의 아담이 정말 온전한 남자였다면 3장에서 선악과를 먹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온전한 남자는 절대로 선악과를 먹지 않는다.

 

자기와 함께 한 여자가 선악과를 먹고 그걸 자신에게 가지고 와서 함께 먹자고 권유하더라도 그는 먹지 않는다.

이 일로 인하여 여자를 잃어버릴지라도 그는 선악과의 길로는 빠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생명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이 여자의 말을 듣고 결과적으로 선악과를 먹게 되는 것은 아직 아담이 그만큼 성숙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즉 남자로서의 삶을 제대로 살 수 없었다는 뜻이다.

 

이건 마치 성도가 예수를 믿어 그 믿음 안에서 남자답게 강건하게 자라가야 하는데 전도를 한다거나 구제하며 봉사하는 일에 빠져버리는 것과 같다.

믿음이 연약한 성도는 먼저 말씀을 듣고 강건해 지는 것이다.

그리고 난 후에 구제나 봉사나 전도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믿음도 없는 상태에서 열심과 충성에 미치는 것은 마치 아담이 여자를 보고 빠져드는 것과 같다.

믿음이 없음에도 일하는 것은 그 일을 통하여서 얻어지는 영광 때문이다.

 

아담이 여자에게 빠진 것은 여자가 곧 자기의 자랑이고 분신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행하는 열심과 충성 속에는 자기 사랑과 자기 보람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쉽사리 놓치는 못하는 것이다.

 

아담이 자기 갈비뼈로 만들어진 여자를 보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고 하여 여자에게 빠져드는 것 자체를 가지고 나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즉 성도가 열심과 충성을 한다고 해서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아담이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룬다는 것도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자기 옆에 여자가 하나 생겼다고 해서 그것으로 자신이 온전한 남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다.

남자로 자라는 것은 남자로 자라는 것이고!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이 되는 것은 또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이 되는 것이다.

이 둘은 별개이다.

 

예를 들어서 친구가 박사라고 해서 내가 박사가 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친구가 박사이면 자신도 박사인줄 착각을 한다.

사람들은 종종 친구의 신분이 자기의 신분인줄 착시현상을 일으킨다.

 

이런 착시 현상이 사기행각을 벌리게 된다.

마치 대통령의 아들들이 아버지가 대통령인 것을 마치 자기가 대통령인줄 착각하여 온갖 부조리를 저지른 것을 보면 착시현상의 무서움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걸 교회에 적용하면 교인들은 복음을 증거하는 목사에게 가르침을 받으면 마치 그 목사의 믿음과 자신도 동일하다고 착각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믿음 있는 행세를 한다.

 

이게 바로 아담처럼 남자 구실도 못하는 자가 남자 행세를 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성경은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였고 선생이 되려고 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처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남을 가르치려고 들다간 자신도 죽고 남도 죽이게 된다.

흔히 사람들은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들의 숫자를 가지고 자신이 진리라는 것을 증명하려 든다.

 

그러나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

그리고 그 수(數)가 많다는 것과 적다는 것은 진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사람들은 그저 자기와 비슷한 수준을 찾아 모여들기 마련이다.

그리고 어느 수준이든지 한 두명의 따르는 자들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있다 해서 자신이 곧 진리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아담에게 있어서는 그 여자가 몹시도 사랑스러웠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본능적으로 사랑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아담에게 있어 여자는 아담의 분신이었으므로 아담이 그 여자를 사랑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이해가 간다.

짐승들 속에 살고 있던 아담이 어느 날 자기를 이해하고 자기 말을 알아듣는 여자를 만났으니 얼마나 좋았겠는가!

그러니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들 역시 십자가 복음을 아무리 외쳐도 누구 하나 들은 척도 안하는 세상에서 그걸 같이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신이 나고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 멋진 만남도 때에 따라서는 독(毒)이 되어 자신을 죽일 수 있다는 말이다.

복음을 전하지 않아서 죽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한 것 때문에 망하는 일이 일어난다는 게 문제이다.

 

창세기 2장의 아담은 바로 이런 사람이다.

아내를 사랑하지 않아서 망한 것이 아니라, 아내를 사랑한 것 때문에 망하고 말았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목사를 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이 목사를 해서 망하게 된다는 말이다.

복음을 전하지 말아야 할 사람이 복음을 전한 것 때문에 망한다.

무슨 쌩뚱 맞는 말인가?

 

무슨 말인고 하니 아담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강건하게 자라야 함에도 아내를 사랑하느라고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일에 게을렀다는 말이다.

또한 말씀을 듣고 더욱 더 강건해 가야할 사람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느라고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등한시 했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흔히 예수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말 한 마디를 전하여서 상대방이 그 말을 믿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복음이 전해지는 줄 안다.

그렇다고 예수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이 복음이 아니란 얘기가 아니다.

 

아주 중요한 내용이고 반드시 이해하고 믿어야 할 대목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신앙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신앙은 예수님의 생명으로 예수님과 하나 되어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믿음과 지식이 자라가야 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를 알아 가는 것이고!

부르심에 소망이 무엇인지를 더 깊게 더 많이 알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만이 삶에 의미이며 가치의 전부이어야 하는 수준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바울 식으로 말해서 남자답게 강건해져 가는 것이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아들의 생명을 튼튼하게 키워 가는 길이다.

그래서 사람의 간사한 궤술과 사단의 유혹과 갖가지 밀려오는 교훈의 풍조로부터 든든히 서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침이 없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든든히 서 가야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과정을 버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하나를 알았다고 그걸 앵무새처럼 전하는 일에만 한 평생을 보낸다.

이것도 정말 안 것인지 궁금하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일(전도와 봉사, 복음을 전하는 것)”에 파묻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짜 “하나님의 일(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은 놓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아담이 생명과를 먹어야 하는 일은 놓쳐버리고 여자와 노는 일에 빠져들고 만 것과 같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와보니 유대인들의 모습이 그러하였다.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특심한데 그 속에 하나님은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라고 하신 것이다.

 

모두가 아담과 같이 본질을 놓치고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야단법석을 떨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일갈하신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을 하라고!”

 

요 6장 27-29절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28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여기서 인간들이 생각하는 일과 하나님이 생각하는 일은 전혀 다름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예수)를 믿는 것과, 그를 전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는 일 따위를 하나님의 일로 보지 않았다.

 

예수님에게 있어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 진의(眞意)를 모르고 자기 식으로 해석을 한다.

그 당시에도 그랬지만 오늘날도 이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교인들은 전도나 교회에 대한 열심과 충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과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은 다르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예수를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의 한 부분일 뿐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충실히 한 사람들이 누리는 복이지 결코 일일 수 없다.

이는 마치 음식점하는 아저씨가 자기 아들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서 기분이 너무 좋아서 손님들에게 음식 값을 받지 않고 무료로 나누어주는 것과 같이 기쁜 일이다.

 

성도가 행하는 일들도 이처럼 예수가 믿어지는 것이 너무도 기쁘고 신나는 일이라서 그만 주체를 못하고 전도나 봉사로 섬김으로 표현을 해 내는 것일 뿐이다.

이건 일이 아니라 기쁨의 다른 표현이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은 결코 의무가 아니며 고통이 아니다.

육신적인 세계에서도 생명의 씨는 고통이나 괴로움 가운데서 잉태되지 않는다.

만약에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루어 자식을 낳는 일이 정말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한다면 인류는 벌써 멸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생명의 번식을 고통이나 괴로움으로 이루어지게 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즐거움으로 이루어지게 하셨다.

기쁨으로 하게 함으로서 번성케 하였다.

 

짐승이든 사람이든 짝짓기를 고통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짐승이나 사람이나 발정기가 일어나서 짝짓기를 한다는 것은 장성하였다는 것이다.

이제는 어른 구실을 할 수 있다는 신체의 자연적인 현상이다.

 

이와 같이 성도가 예수를 믿는 일을 충실히 하면 믿음이 그 안에서 주체할 수 없는 일들을 일어나게 하는데 그것이 봉사나 충성이나 전도나 헌금과 같은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것에 장성한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것들은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아담이 부모를 떠나 여자와 한 몸이 되는 것도 아담이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하고 튼튼한 어른이 되었느냐에 있다.

만약에 여자를 감당할 수 없는 남자라면 부모를 떠나 그 여자와 한 몸이 되는 것은 자신을 죽이는 것이 된다.

 

창세기 3장의 아담이 여자가 들고 온 선악과를 받아먹었다는 것은 그가 아직 그 여자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강건한 남자로 자라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하나님의 요구와 여자의 요구를 선별할 능력이 없는 아담에게 여자는 치명적이 될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건장한 남자가 될 것인가?

 

아담의 예로 보면 우선은 남자의 씨를 받아 남자로 태어나야 하고, 다음은 생명의 양식을 먹어 그 남자를 길러가야 한다.

남자의 씨를 받아 남자로 태어났더라도 그에게 알맞은 양식의 공급이 적절치 않으면 건장한 남자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씨와 양식은 동일한 무게로 중요하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하더라도 거듭난 사람으로서의 양식을 먹고 자라는 삶이 없으면 그는 불원간 말라죽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생명을 받아서 새사람이 되었다면 새사람으로 살 수 있도록 말씀을 먹고 강건해져 가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이건 마치 엄마 뱃속에서 나온 아이는 엄마 젖을 먹고 자라는 것이 최고의 일인 것과 같다.

말씀으로 먼저 배부름을 얻으라.

믿음은 말씀을 들음(먹음)에서 나고 그 들음(먹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양식)에서 난다.

그래서 말씀을 듣는 것이 믿음이고, 하나님의 일인 것이다.

 

말씀을 먹고 소화하여 강건한 자로 자라가라.

강건하면 봉사의 일은 자연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말씀을 먹지도 않고 또한 먹은 말씀을 제대로 소화하지도 못하고 일을 하게 되면 반드시 그 일로 인하여 후회하게 된다.

 

이건 마치 어린아이들이 수재의연금을 내는 것과 같다.

어린 아이들이 용돈을 받고 세뱃돈을 받아서 쓰지 않고 아껴서 돼지 저금통에 저금을 해 놓았다.

그런데 어느 날 홍수가 나서 TV 방송국에서 수재민 돕기 성금 모금을 하는데 엄마가 돼지 배를 갈라서 아이에게 재해 성금으로 내라고 한 것과 같다.

엄마에겐 성금 내는 일이 기쁜 일이 될 수가 있지만 아이에겐 울고 싶은 마음과 같은 것이다.

 

믿음도 없는 사람이 분위기에 휩쓸려 헌금을 냈다가 아까워서 후회하는 것과 같다.

“아나니아 삽비라”가 이들이다.

이들은 헌금을 안 해서 망한 것이 아니라 헌금을 해서 망했다.

 

봉사와 충성도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이 있는 사람이 하여야지 믿음도 없는 사람이 누가 시킨다고 해서 또 남이 한다고 해서 공명심으로 하게 되면 반드시 후회하게 된다.

교회에 오기 싫은 것을 목사가 강요해서 오게 되면 교회에 와 주었다는 것 때문에 그 사람은 망하게 된다.

 

왜? 교회에 와야 하고!

왜? 봉사를 하여야 하고!

왜? 헌금을 하여야 하고!

왜? 성도를 섬겨야 하는지를 알기까지 자라가야 한다.

무엇이든지 소화할 수 있는 자로 강건하게 자라가야 한다.

 

섬김을 받아야 할 때는 섬김 받는 것이 신앙이다.

반면에 섬겨야 할 때는 섬기는 것이 신앙이다.

 

바울처럼 우상의 제물을 먹든 안 먹든 자유 할 수 있는 강건한 자가 되어야 한다.

모든 것이 가(可)하나 모든 것이 유익(有益)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러할 때 자유를 자기를 위하여 사용하지 않고 남에 유익을 위하여 사용하게 된다.

 

아담이 여자를 다스릴 수 있으려면 여자와 차원이 달라야 한다.

여자가 그 어떤 무기를 들고 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만큼 냉정해야 한다.

바울처럼 강건한 남자는 여자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러나 아담은 여자와 동일한 차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은 여자의 아픔에 같이 울 수는 있었을지언정,,,

그녀를 생명으로 인도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여자들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무기는 눈물이다.

하지만 진정한 구원은 여자의 눈물이 남자의 냉정을 이해할 때 비롯된다.

성숙한 남자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 냉정함이다.

 

하나님이나 그리스도는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분이지만 그러나 당신의 섭리에서 벗어나는 일에 대하여는 지극히 냉정하신 분이다.

예수님에게는 혈연도 인정도 통하지 않았다.

 

일명 수(首) 제자 라고 하는 베드로도 일순간에 사탄의 자리로 내려 보낼 만큼 차디찬 분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도 죽이실 만큼 냉정한 분이다.

그래서 신앙은 여자처럼 인정에 매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럼 신약의 바울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하나 되는 것을 어떻게 이야기 하고 있는가!

 

엡 5:30-32=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킹 제임스 버전이나 우리말 새 성경을 보면 30절을 이렇게 해석하였다.

 

“우리는 그의 뼈로부터 나온 지체요 그의 살로부터 나온 지체” 라고 한다.

 

바울은 아담과 하와 이야기를 그리스도와 교회 이야기로 말해주고 있다

아담이 자기 아내를 보고 고백한 내용을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말씀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그러면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이 되는 사건은 인간들의 육신적인 결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떠나(成肉身) 우리와 연합하여 교회를 이루는 사건이라고 하였다.

 

바울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는 것을 예수님이 자기를 비워 “종(肉身)”의 형체로 오셔서 성도를 구원한 사건으로 정의해 주고 있다.

예수님이 “종(肉身)”의 형체로 오실 수 있는 것은 부모를 떠나서 독립할 수 있는 건강한 남자로서 살려주는 영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한 몸을 이루는 것은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지 성도가 할 일이 아님을 밝혀둔다.

한 몸이란? 주신 자가 취하는 것을 말한다.

아담에게서 나온 여자가 아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될 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구성원은 그리스도의 뼈 중의 뼈이며 살 중의 살인 지체가 되는 것이다.

 

이 점은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지체는 몸에 붙어서 몸이 공급하는 것으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지체(肢體)는 독자적으로 살 수 없다.

몸이라는 그늘에서 자양분(滋養分)을 받으면서 살아야 한다.

 

바울에게 있어 우리는 그리스도의 뼈이고 그리스도의 살로서 그리스도와 완벽한 한 몸이다.

이를 에베소서의 견해로 본다면 교회의 구성원인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여자인 셈이다.

여자라면 남자의 사랑을 받아 그와 한 몸을 이루는 것이 본분인 것이다.

 

바울의 해석으로 본다면 창세기 2장의 아담은 스스로 그리스도의 위치에 가서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분명 역리(逆理)의 모습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씨를 받아야 할 여자로서의 삶을 버리고 오히려 자신과 동일한 여자를 향하여 남자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흙과 생기로 지음을 받은 생령(生靈)에 불과한 아담이 “네페쉬 하야”로서 생명을 여자에게 주는 영(靈)의 구실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죄이고 타락이다.

 

아담이 여자를 다스리지 못하고 여자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먹은 것은 이런 삶의 필연적인 진행일 뿐이다.

아담이 여자를 다스릴 수 있으려면 여자와 차원이 달라야 한다.

여자가 그 어떤 무기를 들고 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만큼 냉정해야 한다.

 

그러나 아담은 그렇지 못하였다.

아담은 여자와 동일한 차원이었다.

그러기에 여자를 생명으로 인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담은 여자가 선악과를 들고 오자 그냥 먹어버리고 만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었지만 여자를 향한 육정(肉情)을 끊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다.

바울의 말대로 아담이 그리스도의 지체로 살아야 할 존재라는 것을 알았다면 여자가 주는 선악과를 먹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담이 여자의 말을 들은 것은 곧 인정을 끊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곧 여자가 아담의 몸에서 나온 자이므로 자기를 넘어서지 못한 것이다.

여자의 눈물은 이처럼 한 사람을 동반 자살시킬 만큼 강력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자의 눈물에 현혹되지 않으신다.

 

그러나 대부분의 남자는 여자의 이 눈물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이런 저런 자기 합리화의 과정을 거친 뒤에 여자의 원함을 들어주고 만다.

이것이 남자의 타락이며 여자와 공멸하는 길이다.

 

교회가 오늘날처럼 타락하게 된 것은 냉정한 남자로 살았어야 할 목사들이 여자와 같은 교인들의 눈물에 현혹되어 신앙의 기준과 원칙을 인간적인 차원으로 양보한데서 기인한다.

교인들 편을 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이 모두가 예수나 바울같이 건장한 남자가 아닌 자들이 아담처럼 남자(가르치는 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대 교회 안에서는 여자(성도)들의 발언권이 강해지고 있다.

여자의 발언권이 강해지고 나니까 그리스도의 생각이 설자리가 없어지고 말았다.

 

바울의 말을 빌리면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성도(여자)가 목사(남자)를 가르치고 다스리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되면 자연히 선악과를 먹는 것은 필연적 수순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목사가 예수님처럼 강한 남자로서 가르치고 다스리려면 먼저 자신이 강하고 냉정한 남자로 자라 있어야 한다.

그런데 실상을 다르다.

 

가르치는 목사가 가르침을 받아야 할 교인보다 약하다.

그러다 보니 교회 안에서 여자의 말이 힘을 얻게 된다.

이는 마치 아담이 여자에게 빠져드는 것과 같다.

이게 바로 교회의 타락이고 아담의 타락이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남자답게 강건해져 가는 것”과, “남자답게 사는 것”은 다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가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같이 살 수 있는 자가 아니다.

 

항상 육신이라는 몸에 소욕을 이길 수 없는 한계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부모의 도움을 힘 입어야지만 살아 갈 수가 있는 죄인들이다.

그렇다면 아담처럼 부모를 떠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도가 지나쳐 자신이 곧 예수님처럼 산다고 한다.

예수처럼 살라고 성령이 오셨다고 한다.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성령을 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처럼 살 수 있다고 한다.

예수님처럼 살지 못하는 것은 다 능력을 받지 못하여서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날마다 성령 충만을 받아서 예수님처럼 살라고 한다.

이게 마귀의 미혹이다.

 

이렇게 되면 믿을 것은 날아가 버리고 살아야(행함) 할 것만 남게 된다.

이름하여 죄이고 타락이다.

“행함(선악과)”에 관심을 가지면 “믿음(생명과)”에서는 눈이 멀어지게 된다.

마귀가 노리는 노림수가 바로 이것이다.

믿을 것(예수의 의)을 잊게 하고 살아야 할 것(자기 의)을 붙잡게 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는 바이지만 영생하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것은 내가 예수처럼 사는 것도 아니고 천사처럼 변화되는 것도 아니다.

신앙생활이란? 날마다 예수라는 신랑과 한 몸이 되어 사는 것이다.

예수의 피로서 죄사함을 입고 사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날마다 예수를 믿는 것이다.

예수는 어저께 한 번 믿었으니 오늘은 안 믿어도 되는 그런 분이 아니다.

죄 아래서 난 몸을 가지고 사는 한 예수는 믿어야할 구주이지 본 받을 스승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대속 제물이 되신 것은 죄인의 몸으로는 예수처럼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내신 자 곧 예수를 믿는 것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확정을 해 주신 것이다.

 

첫째도 믿음이고!

둘째도 믿음이고!

셋째도 믿음이다.

 

믿음 이외에 그 어떤 달콤한 말은 다 마귀의 말이다.

예수를 떠나서 독단적으로 살라는 것은 마귀의 감언이설(甘言利說)이다.

 

생명은 생명과(예수 믿음) 속에만 있지, 선악과(성도의 행함) 속에는 없다.

선악과를 아무리 많이 먹었다 할지라도 살 수는 없다.

생명은 생명과를 먹을 때에만 얻어진다.

 

왜? 생명과의 실체로 오신 예수님은 스스로를 나는 하늘로서 내려 온 “산 떡(양식, 밥)이라고 말씀 하셨는가?

이는 예수는 날마다 먹어야 살 수 있는 밥이기 때문이다.

 

밥은 한 끼 먹어서 평생을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몸은 날마다 끼니마다 밥을 먹어야지만 살 수가 있다.

죄사함도 마찬가지이다.

단번에 받은 죄사함도 있지만 날마다 받아야 할 죄사함도 있다

 

그러므로 예수는 한 번만 믿으면 끝이 나는 것이 아니고 날마다 그를 믿음으로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마치 부모로부터 단번에 얻은 생명을 날마다 밥을 먹고 살아야 하는 것과 같다.

 

신앙을 생명으로 말하는 것은 이처럼 날마다 살아서 자라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갓 태어난 어린아이와 어른의 차이가 무엇인가?

갓 태어난 아이의 몸과 어른의 몸은 동일하다.

다만 어린아이의 몸과 어른의 몸은 성숙과 크기의 차이일 뿐이다.

 

어른으로 자라간다는 것은 몸이 성숙해지고 튼튼해져 간다는 말이다.

몸이 튼튼해지는 것은 하나밖에 없다.

오로지 밥을 잘 먹는 것 밖에 없다.

 

그러므로 산 자에게 가장 큰 일은 양식을 잘 챙겨 먹는 것이다.

항우장사라도 굶으면 죽게 된다.

먹는 것이 귀찮다고 하면 그는 중병에 걸린 증거이다.

 

신앙 역시 마찬가지이다.

어저께 믿음이 좋았으니 내일도 좋을 것이란 법이 없다.

믿음은 날마다 예수의 힘으로 사는 것이다.

 

믿음이 정지되면 고사(枯死)하고 만다.

믿음이 좋다는 것이 무엇인가?

글자 그대로 예수를 잘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날마다 예수라는 하늘에서 온 양식을 잘 먹어야 한다.

 

성도의 신앙생활은 광야 길과 같다.

하나님께서 광야 길에 만나를 일 년치를 한꺼번에 주시지 않고 매일매일 주신 이유를 알겠는가?

하나님의 은혜는 한꺼번에 왕창 받아 두어서 곶감 빼먹듯이 하는게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날마다 때를 따라 받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는 날마다 모이기를 힘쓰고 말씀 듣기를 사모 하여야 한다.

교회는 엄마의 품처럼 성도로 하여금 하늘에 생명을 공급해 주는 곳이어야 한다.

 

부모를 떠나서 아내와 한 몸을 이루실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뿐이시다.

 

그러니 아담처럼 자기가 예수님처럼 부모를 떠나 살려고 하지 말라.

성령은 성도를 독단적으로 예수님처럼 살게 하기 위하여서 오신 분이 아니다.

도리어 예수에게 붙잡아 두고자 오셨다.

 

성령은 인간은 왜? 예수님처럼 살 수가 없고!

왜? 예수를 믿어야만 하는지를 알게 해 주시기 위해 오셨다.

인간이 예수님처럼 살 수 없는 것은 죄를 이길 수 없는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처럼 살고 싶어도 살아 갈 수가 없는 것이 인간의 몸에 한계이다.

 

그러므로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셨다.

죄인은 정답을 제시해 주셔도 정답대로 살 수 없는 자이다.

이러한 인간의 한계를 아는 자는 절대로 아담처럼 부모를 떠나서 독립하겠다고 하지를 않는다.

아버지를 떠나는 순간 탕자처럼 되고 만다.

 

영적으로 남자답게 강건한 자는 야곱처럼 마마보이가 되어 부모 곁에서 붙어서 산다.

하지만 육적으로 남자답게 강건한 자는 에서처럼 부모를 떠나 스스로의 능력으로 사냥을 하면서 살려고 한다.

 

육적으로 보면 야곱은 유약한 믿음으로 보이고 에서는 강건한 믿음으로 보인다.

이게 함정이다.

그러니 스스로 예수처럼 살고자 하는 자는 에서와 같고, 나는 예수님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다는 것을 아는 자는 야곱과 같다.

 

바울은 이 사실을 잘 알았기에 수많은 성경을 기록하였음에도 날마다 주의 은혜를 사모하며 날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간다고 하였다.

남에게 복음을 전하고도 정작 자신은 버림을 받을까 염려하며 살았다.

이건 두려워서가 아니고 자기 주제를 분명히 알기 때문에 지극히 정상적으로 나타나는 고백이다.

 

최고의 남자 같은 신앙을 가진 바울도 부모를 떠나고자 하지 않았다.

늘 부모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게 강건한 남자이다.

 

바울이 남자답게 강건하라는 말은 예수님처럼 독립하여 살라는 말이 아니다.

나는 잠시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가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자가 남자답게 강건한 자이다.

 

가장 강건한 자는 자기 주제를 올바로 아는 자이다.

자신은 하나님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자야말로 남자답게 강건한 사람으로 자라 가고 있는 모습이다.

 

탕자처럼 나는 할 수가 있어 라고 하나님을 떠나는 자는 여자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같이 미숙한 자이다.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이고 자기에게서는 죄만 쏟아져 나온다는 것을 아는 자는 절대로 예수를 떠나고자 하지를 않는다.

즉 말씀을 듣고 주를 의지하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예수님처럼 선생이 되려고 하지 말고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아는 자가 되라.

그래야 십자가가 복음으로 남게 된다.

 

성도는 복음으로 기뻐하는 자이지!

복음을 가지고 자기를 치장하고 자기의 완전함을 자랑하려고 하는 자가 아니다.

인간은 아담의 수준을 벗어 날 수가 없다.

인간은 항상 돕는 자 안에서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죄란? 피조물이 하나님같이 되려는 것으로부터 출발을 하였다.

선악과의 아름다움이란? 피조물의 위치를 뛰어 넘어서 하나님같이 되려고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빠져든다.

 

아름다움이란? 피조물은 피조물의 위치에 있고 하나님은 하나님 위치에 있는 것이다.

 

부디 안다고 하는 자들은 아직까지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영안이 열리시길 바란다.

그리하여 주인에게 얻어 먹고 살아가는 종의 자리에 서서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는 복으로 사시기 바란다.

자기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예수님의 것으로 기뻐하며 사시기 바란다.

 

 

 

출처 : 울 산 목 양 교 회
글쓴이 : 나그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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