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22강. 문둥병이 들지 않게 하라 (레 14:49-57)
22강. 문둥병이 들지 않게 하라 (레 14:49-57)
레위기에서 가장 많은 분량으로 언급한 것이 문둥병에 관한 것입니다.
총 27장 가운데서 2장을 할애하면서 말씀 하셨습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가 됩니다.
알다시피 문둥병은 죄를 상징합니다.
죄는 삶의 모든 부분에서 나타납니다.
그래서 몸에서부터 의복과 생활 용품과 집에 문둥병이 생긴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문둥병은 치료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고쳐주어야지만 나을 수 있는 병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문둥병을 고쳐 주었는지는 정결예식 속에 그 팁이 담겨져 있습니다.
문둥병에서 나음을 입은 자가 드리는 정결예식을 통해서 네가 어떻게 문둥병에서 놓임을 입게 되었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정결의식을 위하여 흠 없는 새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흠 없는 새의 죽은 피를 문둥병에서 나음을 입은 자에게 뿌리라고 합니다.
이것은 흠 없는 새의 죽음으로 문둥병이 나았음을 입었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새에게 문둥병을 짊어지게 하신 것입니다.
우린 모두가 문둥병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나음을 입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입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예수그리스도에게 대신 담당 시키신 것입니다.
이를 아는 사람은 죄에 대하여 아파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문둥병은 언제든지 다시 재발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둥병에서 나음을 입은 자는 다시 문둥병에 걸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은 깨끗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를 거룩을 지키는 전쟁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용서 하시고는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십니다.
죄를 용서 받은 여인은 예수님이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신 그 말씀이 아마도 살아가는 동안 늘 귓가에 큰 울림으로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여인은 그 울림을 가슴에 안고 죄를 멀리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용서 받은 자들이 갖게 되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것은 문둥병에서 나음을 입은 사람이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하여서 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문둥병은 죄로 인하여 주어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문둥병에 걸리면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문둥병에 걸린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만이 살 길임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서 이스라엘의 진 밖에 홀로 우거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만을 사모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서 문둥병에서 나음을 입게 되었습니다.
정결의식을 마치고 이스라엘 진 안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럼 그 사람은 어떤 자세로 살아갔을까요?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다시는 문둥병에 걸리지 않도록 깨끗하게 살아가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은 많이 탕감 받은 자는 많이 살아하고 적게 탕감 받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탕감의 량의 문제가 아닙니다.
탕감의 의미를 알고 있느냐입니다.
하나님은 악인과 선인에게 모두에게 동일한 은혜를 주십니다.
햇빛도 주시고 비도 주십니다.
햇빛과 비는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깨닫는 사람이 있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을 자기 이야기로 듣는 사람과,
그냥 성경의 이야기로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이야기로 듣는 사람은 모든 성경의 이야기가 실제가 되지만,
그냥 성경 책 속의 이야기로 듣는 사람은 성경의 이야기는 관념으로 듣게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상고하는 것은 그 속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이야기로 듣는 사람은 문둥병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사랑을 실제로 입은 사람은 그 사랑에 대한 감사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남의 이야기로 들리는 사람은 그저 그런 일이 있었구나 라는 식의로 남의 이야기로 듣고 흘러 버리게 것입니다.
삶은 그 사람의 정체성을 보여줍니다.
문둥병에서 나음을 입은 사람은 다시는 문둥병에 걸리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문둥병이 몰고 온 그 저주를 진 바깥으로 쫓겨나 살아가면서 처절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문둥병에 걸리면 진에서 쫓겨나게 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둥병에 걸리지 않도록 애쓰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문둥병은 죄를 상징합니다.
문둥병은 몸과 옷과 물품과 가옥에 생긴다고 합니다.
이는 죄가 모든 삶 속에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의 마음에서부터 생각과 몸으로 하는 행동과 먹고 입고 마시는 것까지의 모든 영역 속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왜 이방인들과 같이 살지 말라고 할까요?
이는 이방인의 삶의 모습이 하나님을 떠난 죄인들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출애굽 한 백성들에게 먹고 마시고 입고하는 것에서부터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는 것에서도 구별을 시키신 것입니다.
구별된 삶을 통해서 거룩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레위기의 모든 말씀들이 거룩에 관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는 것입니다.
죄는 특정한 것에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나타납니다.
우리의 마음에서부터 행동에까지 나타납니다.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죄악상을 고발하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 몸이 성한 곳이 하나도 없이 다 상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사 1:5-6절.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 하느냐 온 머리는 병 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6.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 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마음의 생각에도 죄가 있고,
살아가는 삶에도 죄가 있고,
추구하는 가치관에도 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삶에서 죄를 멀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밧세바를 범하고 그의 남편 우리야를 죽이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는 마음속에서부터 오는 죄책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죄로 인한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큰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살 맛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다윗은 이러한 상태를 구원의 즐거움을 상실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건 신자만이 갖게 되는 현상입니다.
다윗이 죄로 인하여 빼앗긴 구원의 즐거움을 어떻게 회복을 하였나요?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서 자기 죄 때문에 우리야가 죽은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죄를 위하여 우리야를 죽였다는 것을 깨달게 되었습니다.
성신이 알게 해 주신 것입니다.
다윗은 주께서 꺽은 뼈를 보시고 자기를 용서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성신을 거두지 마시고 자기 안에 정직한 영으로 새롭게 해 달라고 합니다.
비로소 다윗은 문둥병과 같은 죄와 죄책으로부터 해방을 받고 잃어버렸던 구원의 즐거움을 다시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성도가 죄와 싸워야 하는 것은 그 죄가 구원의 즐거움을 빼앗아 가기 때문입니다.
죄가 우리의 구원을 빼앗아 가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구원의 즐거움은 빼앗아 갈 수가 있습니다.
쉬운 말로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를 짓는다고 족보에서 제하는 일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한 것에 대한 징계를 가하십니다.
그 징계가 저주에 가까우므로 죄를 멀리하는 삶을 살고자 싸우는 것입니다.
문둥병에 걸리면 이스라엘 진 밖으로 쫓겨남을 당하지만 이스라엘에게서 제외 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언제든지 문둥병에서 나음을 입으면 진 안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문둥병에서 나음을 입고 진 안으로 들어 온 자는 다시는 진 밖으로 나가지 않고자 합니다.
그래서 다시는 문둥병에 걸리지 않도록 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거룩을 위하여 죄와 싸우는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거듭남으로서 새로운 피조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을 받은 자들입니다.
죄를 주관하는 마귀로부터 벗어나 자유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죄로부터 자유하지는 못합니다.
죄는 항상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몸은 여전히 죄 아래서 난 그 몸이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도 죄악으로 충만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건 마치 탄광촌에서 흰 옷을 입고 살아가는 것과도 같습니다.
탄광촌에서 흰 옷을 입고 살면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 연탄을 묻히면서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흰 옷을 입은 사람은 어떻게 하든지 흰 옷을 보존하면서 살아가려고 합니다.
이것이 흰 옷을 입고 살아가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이것을 우리와 죄로 비유해 보세요.
우리는 그동안 죄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였습니다.
죄가 이끄는 대로 살았습니다.
죄의 종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해방을 시켜 주었습니다.
하지만 죄는 사라진 것이 아니고 여전히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습니다.
우리가 빈틈을 보이면 즉시로 우리 몸을 문둥병 번지듯이 번지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몸을 죄의 병기로 드리지 말라고 합니다.
이는 우리 안에 죄가 우리 몸을 주관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인이 되어서 죄를 다스려야지 우리가 죄의 종이 되어서 끌려 다니지 말라는 뜻입니다.
즉 죄에게 주인 자리를 내어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몸은 죄 아래서 난 몸입니다.
죄에서 비록 해방을 맞이하였지만 죄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지를 않습니다.
죄는 여전이 우리 안에 세균처럼 살아 있습니다.
이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한 죄로부터 자유롭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성령을 보내서 죄와 싸울 수 있는 억제력을 주셨습니다.
억제력을 주었기 때문에 싸우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는 문둥병에 걸리지 말라는 것은,
다시는 죄가 우리 몸을 주관하지 못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죄에게 우리의 주권을 이양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죄가 우리 몸에 번지지 못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두 가지 문둥병이 있습니다.
문둥병임에도 문둥병이라고 진단하는 것과 문둥병이지만 괜찮다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살아서 움직이는 문둥병이 있고 죽어서 가만히 있는 문둥병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은 문둥병에 걸렸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더 번지지 않으면 괜찮다고 하였습니다.
제사장이 문둥병이라고 진단을 하는 것은 그것이 주변으로 번질 때입니다.
병이 가만있지 않고 주변으로 번진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이건 양성 문둥병입니다.
제사장은 양성 문둥병은 문둥병으로 진단을 하고서 격리를 시킵니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 음성 문둥병도 있습니다.
비록 문둥병이지만 주변으로 번지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활동을 하지 않는 것이므로 죽어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서 음성 문둥병으로 괜찮다고 합니다.
똑 같은 문둥병이지만 살아 있는 문둥병과 죽어 있는 문둥병이 있는 것입니다.
살아 움직이는 양성 문둥병은 죄가 우리 몸을 가지고 그 증상들을 쏟아내는 것이고,
움직이지 않는 음성 문둥병은 우리 몸 안에 있지만 그 증상들을 쏟아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문둥병은 죄를 상징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럼 살아 있는 죄가 있고 죽은 죄가 있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죄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고,
죽어 있는 죄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죄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죄는 죽지 않습니다.
다만 죽은 척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강한 힘에 의하여 결박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둥병으로 본다면 번지지 않고 가만히 있는 음성 문둥병인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 안에 죄가 비록 있다고 하여도 그것이 우리 몸을 주장하여서 죄를 짓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괜찮다는 것입니다.
죄를 안고 살지만 죄인 아닌 것으로 간주를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는 언제든지 살아납니다.
지금은 드러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환경만 맞으면 드러낼 수가 있습니다.
결박하고 있는 힘이 약할 때는 언제든지 움직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은 죄가 드러나는 환경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자면 마음속에 항상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로 굳게 하여야 합니다.
깨어서 기도하여야 합니다.
주께서 우리 마음을 지켜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경건에 이르는 연습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비록 구원을 받았지만 죄를 품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다만 예수 안에서 죄에 대하여 간과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예수 안에서는 의인지만 예수 밖에서는 여전히 죄인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그리스도 안에 머물게 하시는 것입니다.
죄와 싸우라는 말은 예수그리스도 안에 머물라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에서 떠나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몸을 다하고 온 마음을 다하고 온 생각을 다하고 온 목숨을 다해서 예수를 따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그리스도의 것으로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것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왕을 삼아 준다고 하여도 거절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하늘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세상 왕을 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세상의 부귀영화와 권세를 쫓아가지 않은 것입니다.
마귀가 애수님에게 찾아와서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와 권세와 영광을 준다고 하여도 일언지하에 거절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살아가는 의미는 이 세상에서의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영광을 쫓아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마귀가 예수님에게 준다고 한 것은 모두가 세상에 것들입니다.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있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요일 2:15-17절.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이 세상은 영원한 곳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우리의 소속은 하늘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적을 두고서 살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것들입니다.
우리의 육체의 즐거움을 주는 각양의 탐욕이고 더러운 정욕들입니다.
이름하여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아버지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 모두가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합니다.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말은 세상의 주인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의 주인이 누구인가요?
마귀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속한 일과 세상에 속한 것들을 마귀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마귀에게 이 세상을 넘겨주었습니다.
그래서 마귀를 세상 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으로부터 넘겨받은 권세로 땅에 속한 자들의 임금으로 다스리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습니다.
소유를 위하여 존재하는 자가 있고,
존재를 위하여 소유하는 자가 있습니다.
이것은 살아가는 목적을 말합니다.
흙에서 난 인간은 소유를 위하여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는 자기 몸뚱이가 신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 몸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자기를 위하여 모든 것을 모으는 것입니다.
자기 몸을 위하여 살아가는 자에게는 소유와 존재는 그 중수가 동일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라는 흙에 기운으로 살아가는 인간들은 살기 위해서 모으고, 모으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땅에 속한 자들은 모두가 이러한 삶을 살아갑니다.
이게 육신적인 삶이고 세상적인 삶입니다.
모세는 광야 40년을 지나온 백성들에게 인간의 삶에 목적을 말해줍니다.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언약의 후손이 살아가는 이유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살아가는 자라고 합니다.
우리 성도가 그러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고자 사는 것이 존재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한 목적을 하나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는 것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사 43:21절.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행 2:44-47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오순절 성령강림이 임하지 이러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동안 움켜쥔 손들을 펴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가진 자들이 물질을 교회를 위하여 내어 놓았습니다.
물질을 소유한 목적이 달라진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자기를 위하여 물질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고 나자 교회를 위하여 물질을 내어 놓았습니다.
성령이 임하자 가치관의 전도가 일어난 것입니다.
물질의 주인이 바뀐 것입니다.
물질은 자기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것임을 안 것입니다.
자신이 소유한 물질은 교회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내어 놓은 것입니다.
교회를 일컬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합니다.
그럼 물질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용되어지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성령이 임하자 물질의 주인을 안 것입니다.
물론 자기 인생의 주인도 알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는 땅의 가치로 모으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가치인 나누어주는 자로 살게 된 것입니다.
성령이 육신의 소욕을 죽이니까,
하늘이 생명인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어 놓는 나눔의 삶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곳이 아니고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는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죄가 주장하면 먹고 마시는 것으로 살아가게 되고,
성령이 ‘죄’ 인 육신의 소욕을 죽이면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안에 죄라는 문둥병이 번지면 세상의 떡을 쫓아가게 되고,
그럼 물질의 종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물질을 자기 육신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사용하는 것도 문둥병인 죄를 이기고 살아가는 것의 한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성령의 소욕이 육신의 소욕을 이긴 것이라고 합니다.
성령께서 물질의 가치를 이기게 하신 것입니다.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만 이길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은혜로서 굳게 함이 아름답습니다.
이는 우리 마음에 은혜가 사라지지 않게 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성도는 세상의 물질적 가치로 살지 않고 하늘의 영적 가치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죄는 탐욕과 탐심을 일으킵니다.
탐욕과 탐심은 하나님의 은혜로서만이 이겨 낼 수가 있습니다.
탐욕과 탐심을 몰아 낼 수는 없지만 그것이 우리 안에서 주장하지 못하도록 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가 탐심을 결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 있는 죄라는 문둥병이 번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 받으라는 말은 죄가 우리 몸을 주관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죄라는 문둥병이 번지지 못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죄는 율법신앙으로도 나타납니다.
법은 자기 힘(의)으로 살아가게 합니다.
만약에 우리 안에 법이 자리 잡으면 우리의 의로 살아가고자 합니다.
인간은 의가 쌓이면 교만해집니다.
스스로 심판자가 됩니다.
법은 인간으로 하여금 신의 자리에 앉게 합니다.
그리하여 왕 노릇하게 합니다.
자기 의가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밀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의가 밀려나게 되면 은혜가 사라집니다.
은혜가 사라지면 법이 활동을 합니다.
법은 인간의 의로 활동을 하기 때문에 사람들 간에 차별을 불러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교회 안에서 우열이 생기고 서열이 생기게 됩니다.
법을 지킨 자는 높은 자가 되고 법을 어긴 자는 낮은 자가 됩니다.
이러면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인간의 조건으로 차별하는 담을 허물어 버린 것을 다시 쌓는 것이 됩니다.
그럼 인간의 조건으로 차별이 생기게 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담과 종과 자유자의 담을 다시 쌓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헛 된 것으로 만들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법이 자리 잡지 못하게 하여야 합니다.
법이 자리 잡으면 우리는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천사의 말을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였고,
크고 비밀한 말을 하여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였고,
내 몸을 불사르는데 내어 준다고 하여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행하면 자랑 할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은혜로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문둥병에서 고침을 받은 성도는 살아가는 삶에서도 죄가 우리 안에서 세속적 가치로 자리 잡지 못하게 하여야 하고, 법이 우리 안에서 자리 잡지 못하도록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문둥병이 생기지 않도록 몸과 마음이라는 환경도 정결하게 지켜야 합니다.
문둥병은 정결하지 못한 곳에 발병을 합니다.
문둥병은 정결한 곳에는 발병하지 못합니다.
깨끗하게 살면 문둥병에 걸리지 않습니다.
문둥병은 밝고 깨끗한 곳에는 발병 할 수가 없습니다.
더러움은 문둥병의 온상이 됩니다.
불결하면 문둥병에 걸리게 된다는 것은 문둥병의 균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항상 잠복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몸은 깨끗하게 씻고 옷은 자주 빨아서 입고, 물건들은 정리정돈을 잘하고, 가옥은 햇빛이 잘 들게 하고, 통풍이 잘 되게 하여서 습한 기운을 없애야 하는 것입니다.
이걸 우리의 삶에 적용을 해 보세요.
죄 문제로 적용해 보세요.
죄는 환경만 맞으면 언제든지 우리 몸을 삼키게 됩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빛처럼 비추게 하여서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생각들과 같은 어둠이 물러가게 하고,
사랑과 온유와 자비와 양선과 오래 참음과 긍휼과 감사와 같은 성령의 바람이 불게 하여서 부정적인 사고들을 몰아내고,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이라는 따뜻한 기운으로 생명의 향기를 토하면서 죄가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죄는 문둥병처럼 우리 안에 항상 잠복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결한 마음으로 살면 발호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가 발호하는 환경을 만들지 않는 싸움을 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거룩한 삶입니다.
하나님은 죄인과는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 백성들을 거룩케 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어린 양의 피 뿌림으로 거룩함을 입었습니다.
두 가지 거룩이 있습니다.
신분적인 거룩과 수준적인 거룩이 있습니다.
신분적인 거룩은 우리의 노력과 상관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주어진 거룩입니다.
이것은 단번에 얻은 거룩입니다.
단번에 얻은 거룩은 출생과 같습니다.
이것은 어린 양의 피로 죽음에서 살아남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죽음에서 살아난 것은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신분적으로 거룩한 백성이 된 것입니다.
거룩한 백성이라는 신분은 우리의 행위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신분적 구원은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지켜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낳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위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에서 잘려나가는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루어가야 하는 거룩의 삶은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수준의 거룩입니다.
수준의 거룩은 우리가 이루고 지켜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으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이를 현재 구원을 이루어 간다고 합니다.
현재 이루는 구원은 죄와 싸우는 것입니다.
주신 신분의 거룩을 수준에 맞도록 지키는 것입니다.
주신 거룩을 지키지 못하면 구원의 즐거움을 상실하게 됩니다.
구원의 즐거움을 상실하게 되면 마음이 지옥이 됩니다.
이건 재앙입니다.
죄가 구원의 즐거움을 빼앗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이방인과 같이 육신의 쾌락을 쫓아가면 구원의 즐거움을 상실하게 됩니다.
우리 안에 법이 작동하면 구원의 즐거움을 상실하게 됩니다.
또한 우리 안에 세상의 가치가 자리 잡으면 구원의 즐거움을 상실하게 됩니다.
우리가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하는 것은 구원의 즐거움을 빼앗기지 않고자 함입니다.
죄와 싸우라는 말은 우리 안에 세상 것이 자리 잡지 못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세상 가치가 자리 잡으면 탐심 때문에 구원의 즐거움을 빼앗기게 됩니다.
세상 가치는 물질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소유를 모으는 삶을 살아가도록 합니다.
이러면 율법 아래서 살던 것처럼 손을 움켜잡으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세상의 물질적 가치로 살아가는 자들을 십자가의 원수라고 하였습니다.
빌 3:18-19절. “내가 여러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바울은 먹고 마시는 것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을 땅의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를 세상에서 복 받고 잘 살아가기 위하여 믿는 것이 바로 땅의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신은 자기 배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를 자기 삶에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자들을 십자가의 원수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질적 가치로 살아가는 곳은 애굽입니다.
애굽적 가치로 사는 것이 문둥병에 걸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 한 백성들에게 애굽에서 살던 방식으로 살지 말고 구별 되게 살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거룩을 지키는 것입니다.
거룩은 모든 삶 속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거룩의 반대는 죄입니다.
모든 삶이 거룩해야 한다면 죄도 모든 삶에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삶 속에서 나타나는 죄의 모습들을 문둥병을 통해서 알려주었습니다.
문둥병의 모습이 죄와 같기 때문입니다.
죄는 모든 삶에서 나타납니다.
그래서 문둥병이 몸에도 생기고 옷에도 생기고 생활용품에도 생기고 가옥에도 생긴다고 하는 것입니다.
몸에 생기는 문둥병은 악성 피부병이고,
옷이나 생활용품이나 가옥에 생기는 문둥병은 곰팡이 균입니다.
악성 피부병이나 곰팡이 균은 그 성질이 주변을 오염시키고 악취를 풍기고 부패하여서 본질을 훼손시키고 망가지게 합니다.
그래서 제사장으로 하여금 사람이든 옷이든 생활 용품이든 집이든 문둥병이 생기면 격리하여서 철저하게 관리 하도록 하였습니다.
잘 관리하라는 것은 또 생길 수 있다는 뜻입니다.
문둥병은 걸리기도 하지만 나음을 입기도 합니다.
문둥병은 죄를 상징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문둥병에 걸린 모든 것을 어린 양의 피로 정결케 하라고 하셨습니다.
비록 어린 양의 피로 거룩케 된 자들도 죄악 된 세상에서 살아가자면 자기의 원함과 상관없이 죄를 짓기도 합니다.
그래서 죄사함을 위한 제사 제도를 주신 것입니다.
성막의 제사 제도는 죄사함을 위한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룩케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죄사함을 위한 제사 제도를 주셨다는 것은 죄를 지을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죄 아래서 낫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가 없고 죄를 지을 것을 아시고 제사 제도를 주신 것입니다.
구원이란? 죄와 사망에서 빼내심을 입는 것입니다.
어떻게 빼내심을 입었습니까?
어린 양의 대신 죽음으로 살아났습니다.
출애굽 한 백성들은 어린 양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백성들의 몸에 새기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죄인이 흠 없는 제물의 죽음으로 용서 받는 제사 제도입니다.
죄 아래서 살아가는 백성들이 살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흠 없는 제물의 희생 때문입니다.
성경적 죄와 세상적 죄는 다릅니다.
그 기준이 다릅니다.
옛 사람으로 살아갈 때의 죄와 새 사람으로 살아갈 때의 죄는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가면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 주시겠다고 합니다.
다른 보혜사는 성령을 말합니다.
요 16:8-11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성령이 오시면 죄가 무엇인지, 의가 무엇인지, 심판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신다고 합니다.
잘 보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 하신다고 합니다.
책망을 하신다는 것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왜 세상을 책망하십니까?
이는 세상의 기준이 틀렸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세상의 기준에서 바라본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정한 것이 있습니다.
세상이 정한 기준은 선악의 법 아래서 정한 기준입니다.
선악의 법은 죄의 법입니다.
그러므로 선악의 법 아래 있는 세상이 정한 기준은 하나님 앞에서는 틀린 것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 앞에 세상의 기준으로 나오는 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성령이 오시면 하나님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게 하신다고 알려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 기준을 성령이 오시면 알게 해 주신다고 합니다.
성령이 오시면 기존에 알고 있던 기준으로 살아가면 책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세상의 기준으로 살아가면 됩니다.
그러나 성도는 세상의 기준으로 살아가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고 하늘에 속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정한 죄와 하나님이 정해주신 죄가 어떻게 다른지를 살펴봅시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만들어진 나라가 이 세상에서는 교회로 나타났습니다.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곳입니다.
교회를 예수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한 기준이 교회 안에서 통용되는 것과 교회 밖 세상에서 통용되는 것이 다르게 됩니다.
교회 안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중심으로 판단이 되고, 교회 밖 세상은 선악의 법 아래서 만들어진 기준 그대로 판단을 하게 됩니다.
성령이 오시면 새로운 법을 주십니다.
이것은 예수그리스도를 기준으로 하는 법입니다.
성령이 주신 새로운 법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의라고 하고 예수그리스도를 안 믿는 것을 죄라고 합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동의 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 기준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인간들이 정해 놓은 규정을 어기는 것을 죄라고 합니다.
인간들이 정한 규정을 법이라고 합니다.
인간들이 정한 법은 인간들의 유익을 위하여 정한 것입니다.
이를 윤리와 도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비윤리와 비도덕적인 사람을 법으로 판단해서 죄인이라고 구금을 합니다.
인간들의 죄는 겉으로 드러날 때만 성립이 됩니다.
쉬운 말로 마음속에 죽이고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 실행하지 않으면 괜찮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실행되지 않은 것을 죄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이를 율법이라고 합니다.
율법은 애굽의 법입니다.
세상을 애굽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애굽에 교육을 받았습니다.
애굽의 법이 그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애굽의 법을 안고 출애굽을 하였습니다.
출애굽 한 자들은 어린 양의 피로서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난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 속에는 애굽의 법이 작동을 합니다.
애굽의 법은 겉으로 드러난 것을 죄로 규정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마음속이야 어떻든 겉으로 나타나지만 않으면 죄인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그 죄를 끄집어내는 일을 하십니다.
그것이 광야 길입니다.
광야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입니다.
렘 2:6절. “그들이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 땅, 건조하고 사망의 음침한 땅, 사람이 다니지 아니하고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을 통과케 하시던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신 8:15절.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건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성경은 광야를 정의하기를 사망의 음침한 땅이라고 합니다.
사막이고 구덩이가 있고 건조하고 물이 없고 불 뱀과 전갈이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사람도 다니지 않고 거주하지 않는 곳이라고 합니다.
왜 이러한 길로 인도를 하였을까요?
이는 그들 속에 있는 죄를 끄집어내기 위함입니다.
인간은 육신의 아픔을 당하게 되면 그 속에 숨겨진 악이 밖으로 토해져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광야는 죄를 끄집어내는 가장 좋은 곳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잘 보여 줄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러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 인생을 차압하는 곳입니다.
육신이 추구하는 세상의 모든 정과 욕심을 죽이게 하는 곳입니다.
사람들이 십자가를 싫어하는 것은 우리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 서면 우리 안에 있는 죄들이 그대로 토설되어서 나오는 것입니다.
죄인이 그 죄를 용서 받는 곳이 또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그 피가 우리의 모든 죄에서 건짐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옛 사람은 죽이고 새 사람으로 살려내십니다.
성도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세상의 영향 아래 있지 않고 하늘의 영향 아래 있습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피조물은 하나님이 정한 새로운 기준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골 3:1-10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7.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합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합니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합니다.
명제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입니다.
이를 구약식으로 표현을 하면 너희가 어린 양의 피로 살아났으면 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생각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너희는 새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린 땅만 보고 살았습니다.
땅이 전부라고 여기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의 소속을 땅에서 하늘로 옮겨 주셨습니다.
너희는 이제부터 땅에 속한 자가 아니고 하늘에 속한 자라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땅에서 난 그 몸 그대로입니다.
소속만 바뀌었을 뿐 몸뚱이는 그대로인 것입니다.
위에서 난 몸뚱이를 가지고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하면 문제가 안 되는데,
문제는 우리는 여전히 땅에서 난 몸뚱이로 예수를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땅에서 난 몸뚱이로 하늘에 것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마음은 그렇게 하고 싶지만 몸뚱이는 그렇게 되지를 않습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연약하여서 입니다.
우리 몸뚱이는 본능적으로 땅에 것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 여기서 죄가 발생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 앞에 서면 우리의 연약함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죄로부터 벗어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복 받은 사람은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자라고 합니다.
시 1:1-2절.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복인가요?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악인의 꾀를 쫓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않게 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항상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말씀을 가까이 하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게 하십니다.
몸도 마음도 삶도 죄(문둥병)로부터 지켜내라고 하십니다.
몸은, 육체의 소욕으로부터 오는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방탕으로부터 지키고,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 은혜로서 법이 자리 잡지 못하도록 지키고,
삶은,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로 이방인과 같이 물질적 가치로 살지 않는 것으로 지켜야 합니다.
문둥병으로부터 나음을 입었습니까?
그럼 문둥병에 다시 걸리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것이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합니다.
우리는 잠정적으로 죄를 품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 죄가 우리 몸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늘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케 하여야 합니다.
성령의 검이신 말씀으로 무장하고 기도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죄가 살아서 역사 하지 못하도록 싸움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합니다.
한마디로 우리 속에 죄악의 판도라 상자의 뚜껑이 열리지 않도록 성령의 능력으로 누르시기를 바랍니다.
그것만이 문둥병에 걸리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래의 말씀을 깊이 묵상 하여서 그것이 힘으로 작용하여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빌립보서 3장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