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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 기독교 지도자(3) - 김익두 목사

“예수 십자가고난 상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김익두 목사와 김익두 목사의 군산집회광경(1930년)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믿으면 ‘구원 받는다’고 주장한다. 우리 주변에는 ‘예수 믿고 새 사람 됐다’는 사람이 적지 않다. 지난날 그릇된 삶을 살다가 예수를 믿고 목사가 된 사람도 있다. 그들의 간증을 듣노라면 신앙의 위대한 힘에 감동받는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은 것 같다. 어려움이 닥치면 예전의 악습이 나타나 다시 죄악의 길로 빠져들기 때문이다. 죄악 된 행실을 끊고 새 사람 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예수 믿고 구원받은 모델인간은 많다. 예수 핍박자 사울이 사도 바울이 되어 기독교를 일으킨 위대한 전도자가 되고, 순교자가 된 것처럼 ‘개망나니’로 불리던 김익두(1874~1950)도 목사가 되어 우리나라 개신교의 위대한 전도자가 되고, 순교자가 되었다.


개망나니로 살다 예수믿고 새사람 돼


김익두 목사는 황해도 안악군 대원면 평촌에서 아버지 김응선(金應善)과 어머니 전익선(田益善)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김익두는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였고, 16세에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말았다. 아들 김익두에게 희망을 걸었던 부친은 몸져누웠고, 그 길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후 시장에서 일하던 김익두는 안악읍에서 상점을 운영하던 사람의 돈 보따리를 주워 돌려주었고, 주인은 김익두를 자신의 상점 점원으로 채용했다. 생활이 안정된 김익두는 이웃 마을 처녀와 결혼해 가정을 이뤘다.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친구의 보증을 섰다가 잘못되어 모든 재산을 잃고 말았다. 낙망한 김익두는 술로 살면서 방탕한 생활에 빠져들었다. 불량배들과 패싸움을 벌리고, 사람들을 괴롭혔다. 사람들은 그를 ‘개망나니 익두’라느니 ‘안악골의 호랑이’라고 불렀다. 불꽃같은 그의 열정이 빗나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던 것이다.

김익두는 건달처럼 행동했지만 의식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절망적인 환경 속에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망나니처럼 살고는 있었지만 ‘진리’를 찾아보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한때 불교 사찰에 들어가 얼마 동안 불도에 심취하기도 했다. 27세 되던 1900년 봄, 김익두는 친구의 전도로 안악군에 있는 금산교회에 나가게 된다. 그러나 그 전에 스왈렌(William Swallen) 선교사가 전도지를 주며 “예수 믿고 천당 갑시다”라고 하자, 전도지에 코를 풀어 길바닥에 내팽개친 적이 있었다. 그때 스왈렌 선교사가 던진 한 마디가 교회를 찾게 한 계기가 되었다.

김익두는 예배당에 나가면서 술을 끊었다가 친구들의 유혹에 빠져 술을 마시고 만취해 집에 돌아와서 괴로워하던 중 비몽사몽간에 ‘불덩어리가 가슴 속에 떨어지는’ 신비체험을 한 후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1901년 김익두는 어머니와 부인과 함께 스왈렌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고, 기도와 성경탐독생활을 계속하는 한편 동네마다 다니며 전도하였다. 영원한 진리를 찾은 김익두, 변화된 김익두는 그동안 자신의 그릇된 삶을 애통하며, 성경과 찬송가를 들고 찬송을 부르고 전도했지만 사람들은 김익두가 ‘정신이 이상하게 되었다’, ‘예수 귀신에 씌웠다’고 욕하며 핍박했다. 사람들은 김익두의 변화를 믿으려하지 않았다. 마침내 김익두는 동네에 “김익두 죽다”는 방을 붙이기에 이른다.


회개와 구원눈물 대중에게 옮겨붙어


김익두의 완전 개과천선을 입증하는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네가 받는다”는 유명한 일화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설이 있다. 어떤 사람이 김익두가 정말 죽었는가 시험하기 위해 김익두의 얼굴에 구정물을 퍼부었다.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으나 이내 감정을 다스리고 이 말을 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김익두가 전도사시절 부흥회를 인도하려고 고개 너머 교회로 가다가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을 때 취객이 왜 나보다 먼저 올라왔느냐며 시비를 걸고 때렸다. 김익두는 아무 말 없이 맞고 있다가 자신이 김익두라고 말하자, 취객은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이때 김익두는 이 말을 하고는 취객을 부흥회에 데리고 갔고, 그는 후에 예수 믿고 훌륭한 장로가 되었다는 것이다.

김익두는 세례받기까지 매일 목욕한 후 성경을 읽었고, 2년 동안 아내와 따로 방을 쓰면서 성스런 생활을 했다. 스왈렌 선교사의 지도를 받은 김익두는 1903년 신천 서북교회 전도사로 활동하다가 1907년 3월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한다. 1911년 제3회로 졸업한 김익두는 그 해 황해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신천서북교회 위임목사가 되었다.

김익두 목사가 본격적으로 부흥사역에 나서게 된 것은 1919년 3.1운동 직후였다.  이후 그의 부흥운동은 약 20년 동안 전국을 휩쓸었고, 시베리아와 일본에까지 성령 폭발을 일으켰는데, 이는 부흥회 방식이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적이었기 때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설교내용은 예수의 십자가와 속죄, 회개에 따른 중생의 체험, 부활과 천국의 영생복락이었다. 1920년 6월 평양의 연합부흥집회에는 3천 명을 수용하는 장대현교회당이 좁을 정도로 대중이 몰려들었고, 같은 해 10월 서울승동교회에서 열린 일곱교회 연합집회에는 1만여 명이 참석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김인서 목사는 김익두 목사의 부흥집회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대정 9년[1920년] 여름이라. …사람들은 새벽기도회에 모이면 회개하여 울고 슬퍼 울었나니 울고 울어 눈물의 집회가 되었고 낮 공부에 모히면 두려운 기운에 잠기었고 저녁에 모히면 웃고 또 울었다. 그런데 사람이 너무 많이 모힌 때문에 다수의 회중은 김[익두]목사의 말을 잘 듣지도 못하면서 김 목사의 모양만 보고 웃고 또 울었다.”

김익두 목사가 인도하는 부흥회는 웃음과 울음이 반복, 교차되는 특이한 형식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과거 자신의 패악과 구원이 예수 십자가고난과 부활로 연결되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성경 읽은 은혜보다 큰 은혜 없었다”


김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하여 치유를 받은 사람과 은혜 받고 거듭난 사람은 수없이 많다. 김 목사가 가진 부흥회 집회는 대략 776회, 설교회수 2만 8천회, 교회신축 150개소, 유치원 120개소를 세웠다. 또한 그의 감화로 목사가 된 사람이 200명이나 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박사 남궁혁도 1917년 광주부흥회에서 김익두 목사의 설교를 듣고 목사가 되었고, 신학자 김재준 목사도 기독교인이 되었다. 1920년 5월 27일 아산 문창교회에서 열린 부흥사경회에 참석한 주기철은 김익두 목사의 “성신을 받으라”는 제목의 설교를 듣고 평양신학교에 진학했다.

김익두 목사는 신약성경을 100번 읽은 후 세례를 받았다. 성경읽기는 평생 이어졌다. 그는 구약성경을 1백 번, 신약성경을 1천 번 읽었다고 한다. 김익두 목사는 눈물로 성경을 읽은 사람이다. 그는 성경을 통해 예수의 심정을 읽었다.

“나는 4복음서를 읽을 때마다 한 번도 울지 않은 적이 없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모습, 그 십자가에 달려 못 박히신 장면을 상상하면 눈물이 앞을 가려 성경 글씨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나는 금식도 많이 해보고, 이적도 많이 체험해 보고, 부흥집회도 많이 해보았으나 성경을 읽어 얻은 은혜보다 더 큰 은혜가 없음을 깊이 깨달았다.”

1950년 10월 14일 김익두 목사는 신천서부교회에서 패주하는 공산군에게 피살당했다. 순교 당일 신도 한춘근(김익두 목사의 업적과 일대기《내 영혼을 받으소서》저자)이 인민군이 교회로 올 것이니 피하라고 애원했으나 김 목사는 물러서지 않았다. 기도회를 마치려는 순간 공산군들이 들이닥쳐 김 목사에게 총을 들이댔다. 김 목사는 이날 신도 5명과 함께 순교했다. 그 해 11월 29일, 김 목사의 시체는 안악으로 가는 고개 넘어 산중턱에 안장되었다.

김 목사에 대해 좋지 않은 평도 있다. 미신적 신앙소유자, 무식한 목사, 신사참배자가 그것이다. 그러나 그는 성경을 통해 예수의 심정을 체휼한 진정한 예수 제자였다. 김익두를 위대한 목사로 만든 것은 한 때의 패악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김익두 목사는 생전에 설교집 1권을 남겼다. 1940년 3월 신문당(新文堂)에서 펴낸106페이지의 소책자로, 13제목의 설교가 수록되어 있다.





길선주가 말씀을 통해 영적 각성과 성령의 은혜를 주도한 한국의 바울이라면,

김익두는 이 치유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한 한국의 베드로였다.


그는 1874년 황해도 안악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이 일찍 돌아가신 가정을 일찍부터 돌봐 왔던 그가

사기를 당해 모든 재산을 잃게 된 것이 그로 하여금 타락의 생활을 하게 된 계기였다.

 
그는 날마다 주색잡기에 빠져 방탕했고 사람들을 괴롭히는 불량배가 되었다. 
그가 얼마나 악행하였는지 사람들이 '오늘 호랑이 익두인지 억두인지

만나지 않게 해 줍소서'라고 성황당(城隍堂)에 빌었고, 

만나는 사람마다 강제로 돈을 빼앗아 "김내라"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였다.

회심한 후에는 그가 과거를 뉘우치고 사람을 때린 장소마다 찾아다니며

방성대곡으로 울었다고 한다.


그는 어느 날인가 장에 나갔다가 서양 여자가 전도하며

전해준 전도지 사건을 계기로 회심하게 되었다. 

전도지를 받은 김익두는 '뭐 나더러 양귀신을 믿으라고' 하며

전도지로 코를 풀어 길바닥에 팽개치고 말았다.

그러자 그 여자는 "청년 전도지로 코를 풀면 코가 썩어요"하는 것이었다.


 

 ▲ 김익두목사가 평생시무하다 순교한 신천서부교회


그 후 그는 '어느 모로 보나 자기보다 개화되어 있는 서양 여자가

멀리 이국 땅에 와서 저러는 것을 보면 무언가 있다' 라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이때 친구인 박태후의 전도를 받아 교회엘 나가게 된 것이다. 

그는 순 한문 신약성서를 100번 읽으며 신앙에 심취했고

그 과정에서 가슴을 칼로 찢는 것 같은 불세례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가 40일간 금식기도를  하고 산에서 내려 올 때

큰 불덩어리가 가슴에 떨어져 화끈거리는 체험을 하였고

하늘에서 "김익두야! 김익두야!"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임을 깨달았고 하염없이

울며 감사의 찬송을 불렀다.

 

그의 사역에서는 특히 치병의 역사가 많이 나타났는데

심지어 임택권 목사는 '이적증명회'를 만들어 김익두 목사의 집회 현장에서

이적이 일어나는 장면을 기록하고 사진을 찍어 그것을 증명했는데

약 일만명 가량의 치병자를 추측하고 있다. 

그의 최초의 이적은 1919년 12월 25일 달성군 현풍읍내 현풍교회에서였다.

거지 행각을 하며 살던 박수진이란 자가 있었다. 

10년전 사고로 아래턱이 떨어져 음식도 누워서 먹던 자였다.

김익두목사는 그를 불쌍히 여겨 금식하며 기도했는데

박수진의 아래 턱이 올라가 붙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에 감격한 박수진이 온 동네를 뛰어 다니며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하여

온 동네가 놀라게 되었다. 

그의 신유의 역사는 이후 계속 되었고 곱사등이 
소녀가 펴지기도 하고 소경이 눈을 뜨는 역사가 계속 되었는데, 
이런 사건들을 동아일보 58호에서는 '김익두의 이적'이라는 제목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이런 김익두목사의 신유의 사역은 병자 자신의 회개와 간구가 함께 역사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능력이 아니요 순결한 삶으로 요구되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대구 집회에서 김경애라는 기생이 1년 남짓 중풍으로 고생하다가

김익두목사의 간절한 기도와 자신의 간절한 회개로 고침을 받았다.

그러나 후에 다시 기생의 생활로 돌아가는 바람에 병이 재발하고 말았다. 

또 안악군 동문면에 최석황이라는 자는 
30년이나 고생하던 종기를 치료받았는데 후에 타락하여 병이 재발하고

급기야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이 응한 사건이었다.

그의 집회 역시도 철저한 죄의 고백과 회개가 임하는 집회였다.

1920년 10월 11일부터 열린 평양집회에는 일만여명이 모여

통회와 자복을 하는 일이 있었는데,
새벽기도에는 수천명이 마당에 멍석을 깔고 통회의 눈물로

아침을 밝히는 영적 각성이 있기도 했다.

김익두목사는 원칙을 세우고 생활을 하였는데 오늘의 목회자들이 기억해야 할 것이다.

새벽에 은밀히 기도할 것, 신구약 2장씩 숙독할 것, 냉수마찰,

하루 세 번 가정예배 드릴 것 등이다. 

그는 또한 철저히 성경을 읽고, 성경대로 믿는 생활을 몸소 실천했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이적의 사역자로 삼으신 것은 이런 믿음의 그릇이 있었기때문인 것이다. 

그는 150여 곳에 교회를 세웠고, 설교횟수 이만팔천번, 새신자 28만명,

치병자 일만여명이였고, 그의 감화로 목사가 된 사람이 200여명이 있는데

그 중에 이성봉, 주기철, 김재준 등 한국교회사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는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사경에 이르도록 고문을 당했고, 목사직을 박탈당했다.

광복 후 목회를 계속 할 수 있었지만 
한국동란 때 교회당에 모여 예배를 드리다 공산당에 의해 교인들과 함께 순교당하고 말았다.

그 날이 1950년 10월 14일이었다. 

김익두 목사는 초기 한국교회의 부흥을 주도한 인물 중 한 명이었는데,

이적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함으로 환란과 핍박 가운데 고통하는

이 민족에게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잃지 않게 하였다. 

그리고, 수많은 부흥 집회를 통해 이 땅에 능력으로 복음을 전한 하나님의 종이였던 것이다.

참고도서: 초기한국교회불의사자 김익두목사
이태선목사지음 (보이스출판사)




<이순일권사의 현장 증언>


김익두목사의 순교현장에서 함께 예배드리고 하나님만세 예수만세를 부르다가 인민군의 죽창에 등을 찔려 지금까지도 등에 창자국을 지니고 있는 신천서부교회 이순일권사의 현장 증언이다.


저는 1950년 10월 김익두목사님이 섬기던 황해도 신천서부교회 주일학교 교사와 성가대 대원으로 봉사하였습니다. 그때 제 나이 21살이었습니다.

6.25전쟁 때 UN군이 38선을 넘어오자 인민군들이 북쪽으로 도망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김익두목사님이 교회의 종을 쳐서 교인들을 모았습니다. 당시는 교회의 종을 칠 수 없을 때였습니다. 종소리를 들은 교인들 4,50명이 모였어요. 그때 김익두목사님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시다'고 선언하고 '만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하겠네'를 찬송하였습니다.


그때 김익두목사님은 '나는 하나님께 5가지 제목을 두고 기도하였는데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셨어요. 첫째는 우리 교인들이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날을 속히 주옵소서. 둘째는 신천읍의 5일장을 다시 열 수 있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였는데 이제는 5일장이 서게 되니 성도들과 자유롭게 만날 수 있게 되었어요. 셋째는 하루속히 인민군대가 무너지고 성도들이 자유롭게 예배를 드리게 하옵소서. 자유로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날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였더니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우리 같이 하나님만세 예수만세를 부르자'고 하여 같이 '하나님 만세 예수님 만세'를 불렀습니다.


예배당 종소리를 들은 후퇴하던 인민군이 예배당에 몰려오니 '하나님 만세 예수님 만세'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구둣발로 예배당에 쳐들어왔습니다. 이때 교인들이 '목사님 목사님 인민군대가 쳐들어오니 속히 지하 토굴로 피하세요'라고 권하였으나 김익두목사님은 '이제 우리는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어요. 목사는 교회를 지켜야 하고 성경에 예수 안에 죽는 것이 복이라고 하였는데 내가 이 복을 저버릴 수 없어요'라고 할 때 인민군의 총이 빵하고 쏘자 김익두 목사님은 강대상 옆에서 '억'하고 쓰러졌어요.


이때 교인들이 우르르 도망갔어요. 나는 급히 예배당 창문을 뛰어넘어 밖으로 뛰어넘었어요. 내가 뛰어넘는 그곳에 인민군대가 죽창을 들고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죽창으로 어깨등을 찔렀습니다.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고 땅에 쓰러졌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흩어진 교인들과 같이 예배당 안에 김익두 목사님을 찾았습니다. 김익두목사님은 강대상 옆에서 인민군대의 총에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가셨습니다.

교인들은 울고불고 하면서 김익두목사님의 시신을 수습하고 신천서부교회에서 가까운 산에 장례를 치루었습니다. 이때 성도들은 모두 흰가운을 입고 '하늘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를 찬송하며 하늘나라 환송식을 드렸습니다.


김익두목사님은 마지막 교회를 지키고 주안에 주님 이름을 부르며 죽음이 복이라고 우리에게 간증하여 주셨습니다. 그때 우리는 김익두 목사님과 함께 '하나님 만세 예수님 만세'를 불렀던 것을 잊지 못합니다.


결론에서 김남식 박사는 순교의 개념과 순교자의 마지막 생애 그리고 누구 안에서 죽었느냐? 누구를 위해서 죽음을 당하였는가를 제시하여 김익두목사는 순교자로 봄이 정당한 평가라고 평하였다.

특히, 김남식 박사가 지적한 부분은 1945. 8. 15일 해방으로 북한에서 김일성이 정부를 설립할 때 김익두목사가 가장 도움이 필요하여 자신의 외삼촌 강양욱목사를 통해 김익두목사를 영접하여 노동당과 기독교도연맹의 책임자로 삼았으나 김익두목사는 북한땅 천하에서 김일석 주석을 만날 때 반드시 '김일성씨'라고 김일성을 불렀다는 것이다.


즉, 아무리 공산당을 하고, 주석이 되고, 북한 천하를 통치하여도 김익두목사가 본 김일성은 여전히 '예수를 믿어 구주로 받아들여야할 김일성씨'라는 것이었다고 평가하였다.



출처 : 대구평신도교회
글쓴이 : 더마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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