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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스크랩] 7강. 백향목 궁전

7강. 백향목 궁전 (아가 1:15-17)

 

아 1:15-17=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16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 17 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석가래로구나”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변함없이 말씀을 상고 할 수 있도록 은혜 주심을 감사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풀어가야 할 것인가는 주께서 은혜를 주셔야 합니다. 그러니 종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사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증거 할 수 있도록 허락하옵소서. 성령의 감동으로 솔로몬과 술람미의 마음을 허락하셔서 아가(雅歌)서가 나의 아가(雅歌)서가 되게 하시고 이 설교를 듣는 모든 성도들 또한 자신들의 아가(雅歌)서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아가(雅歌)서를 강해하면서 점점 더 느끼는 것은 너무 어렵다는 겁니다.

사랑의 표현이 전부 상징이다 보니 어려운 겁니다.

사랑을 표현해도 좀 쉽게 하지!

왜? 이렇게 어렵게 표현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인간적으로 말하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이는 마치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왜? 천국이야기를 그렇게 어렵게 하느냐고 묻는 것과 같지요.

이에 예수님의 대답이 우리의 질문에 입을 닫게 만듭니다.

천국에 비밀은 택한 자만이 알아먹게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아가(雅歌)서도 성경이니 택한 자만 알아먹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아가(雅歌)서는 둘만이 아는 사랑에 밀어(蜜語)에요.

솔로몬과 술람미 두 사람만 알 수가 있어요.

알다시피 솔로몬과 술람미는 예수님과 성도의 모형이잖아요.

 

그럼 예수님의 사랑을 입은 성도는 다 알아먹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원리적으로 보면 그렇잖아요.

 

성경은 하늘로부터 난 자들만 알아먹을 수가 있어요.

아가(雅歌)서는 하늘에 사랑이야기잖아요.

하늘 이야기이니 육적으로는 알 수가 없겠지요.

하늘이야기이니 우리 인간들에겐 생소하게 들려지는 겁니다.

 

어떤 분이 전화를 했어요.

제가 아가(雅歌)서를 해석하는 것은 기존에 목사님들이 해석한 것과 전혀 다르다나요.

다를 만도 하지요.

기존에 아가(雅歌)서들은 인간 중심으로 보았고 저는 예수님 십자가 중심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기존에 자기가 알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자 해요.

이걸 지난 시간에 역사적 해석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 전통적으로 해석을 해 온 바탕에서 성경을 이해하려는 거지요.

이게 유대인들의 성경해석법이라고 했어요.

율법적 해석으로 예수님을 판단하니 예수님은 이단인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을 죽이는 우(愚)를 범하고 만 겁니다.

 

사도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유대인들의 전통(傳統)적이고 정통(正統)적 해석법으로 예수님을 판단했어요.

그런데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율법의 전통으로 배워온 정통적인 해석법은 예수를 죽이는 해석임을 알았어요.

유대인들이 전통과 정통적인 해석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일으켰으니 이젠 역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로 성경을 재해석을 하기 시작한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구약의 율법을 예수님으로 재 해석을 한 겁니다.

그러니 기존에 유대인들이 극렬하게 반발을 하지요.

역시 바울도 예수님처럼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십자가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하면 죽임 당해요.

이단 소리 듣는단 말입니다.

다를 수밖에 없어요.

 

제게 전화를 하신 분도 아가(雅歌)서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이 너무도 생소하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아가(雅歌)서를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는 겁니다.

전부 성도들에게 이렇게 하라는 식의 성화이야기 뿐이니 그럴 수도 있지요.

아가(雅歌)서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가 나오는지 희한하다는 겁니다.

 

성경을 예수님 이야기로 보면 쉬워요.

물론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에 한해서 말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 그러면 쉬워요.

복음은 단순해요.

예수 믿으면 구원받아요.

아주 단순하잖아요.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하라고 하면 복잡해지는데 예수가 믿어지면 구원받아요.

 

믿음은 선물로 주어지잖아요.

그럼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은 단순하지요.

그냥 믿어지니 믿는 겁니다.

 

그러나 믿음을 선물로 받지 않으면 복잡해집니다.

믿음을 선물로 받지 않으면 방법론을 찾기 때문에 복잡해지는 겁니다.

제 주장은 복음은 하나님께로 난 자를 겨냥하고 증거되기 때문에 단순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복잡하게 할 필요가 없어요.

어차피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 알 수가 없고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인간의 지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알 수 없다고 했어요.

이는 하늘에 말은 인간들에겐 알아먹을 수 없는 방언(方言)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는 육으론 알 수가 없는 방언이에요.

비밀(秘密)이에요.

 

고린도전서 2장을 봅시다.

 

고전 2:1-6=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바울은 지금 십자가를 도리어 인간의 지혜로 전할까봐서 경계했어요.

예를 들어서 자기 학식이나 자기가 배워온 신학을 토대로 복음을 전할 까봐서 염려했어요.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배워온 신학이 도리어 걸림돌이 되어요.

그래서 배설물처럼 버렸다고 하는 겁니다.

 

바울은 지금 식으로 말하면 최고로 유명한 신학교 출신이에요.

가말리엘 문하생이라고 하면 최고로 유명했어요.

바울은 요즘같이 박사학위가 난무하는 시대라면 박사 학위를 7개 정도는 받을 수 있어요.

그만큼 많이 베우고 똑똑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데 이런 것이 도리어 걸림돌이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학문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혹여라도 사람들이 야! 바울이 많이 배웠으니 바울이 하는 말은 맞을 것이야 라고 생각 할까봐서 두려워했다고 해요.

이렇게 되면 복음이 인간의 지식으로도 이해 할 수 있는 학문의 범주에 속하기 때문이에요.

 

바울은 차라리 자기가 무식한 사람이고 싶었어요.

그래야 복음이 바울의 실력으로 증거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기존에 율법 아래서 알았던 학문은 철저히 배격하는 해석을 한 겁니다.

 

바울의 이런 모습은 이 시대 목사들과 비교하면 극과 극으로 달라요.

이 시대 목사들은 자기 지식 자랑하기에 바쁘잖아요.

나 어느 신학교 출신이다.

난 신학박사다.

나 유학 갖다 왔다.

자기 학력을 뻥튀기하잖아요.

 

목사들이 가짜 박사가 제일 많아요.

거의가 돈 주고 샀어요.

가짜라도 박사 학위를 받는 것은 박사라는 것이 목회에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박사가 성경을 해석하니 얼마나 잘 하겠느냐 라는 인식을 교인들이 갖고 있기 때문에 돈을 주고서라도 박사 학위를 받고자 하는 겁니다.

 

이 시대는 공부를 많이 한 신학박사나 교수들이나 유학을 갖다 온 목사들이 설교를 하면 그 학문을 보고서 교인들이 진리처럼 받아들여요.

그러니 교회마다 유학을 갖다온 목사들을 청빙을 하고자 혈안인 겁니다.

복음을 아느냐 모르느냐를 보지 않고 외국 유학을 했는지 경력을 보는 겁니다.

시골교회에서도 교인 100명만 되어도 유학파라야 서류전형에 통과한다고 하니 한국교회의 정서를 알만 하지요.

 

그러니 얼마나 바울과 다릅니까?

바울과 다르다는 말은 가짜란 말이에요.

바울도 사울 시절엔 그랬어요.

 

이게 엄청 중요해요.

사울하고 바울하고는 달라요.

사울이 죽고 바울이 되었어요.

 

잘 들으세요.

사울은 옛사람이고, 바울은 새 사람이에요.

사울은 아담 안에 사람이고, 바울은 예수 안에 사람이에요.

사울은 율법으로 성경을 해석했고, 바울은 예수로 해석해요.

 

지금 식으로 말하면 사울은 정통 신학으로 역사적 해석법으로 성경을 해석했어요.

그러나 바울은 정통 신학을 배설물로 버리고 십자가로 해석했어요.

한마디로 성령의 계시 파에요.

이처럼 사울 신학과 바울 신학은 하늘과 땅만큼 완전히 달라요.

 

사울은 인간의 지식과 학문으로 성경을 해석했고!

바울은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로 성경을 해석했어요.

사울은 십자가 밖에 사람이고, 바울은 십자가 안에 사람이에요.

사울과 바울을 잘 이해하세요.

 

이 시대 많은 목사들은 사울이에요.

성화를 주장하는 목사는 다 사울계통이에요.

그러니 사울처럼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역사적인 정통 신학으로 상경을 해석하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 중심의 신앙이 자리 잡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바울처럼 십자가 중심으로 해석하는 목사님들이 있어요.

물론 숫자는 미미해요.

이분들은 철저하게 십자가 중심으로 모든 성경을 해석하는 겁니다.

십자가 중심으로 하는 해석은 인간은 배제되고 예수님만 증거가 되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하셨다는 것으로 해석을 해요.

그러니 성경이 전부 예수님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저도 과거엔 사울 식으로 성경을 해석했어요.

그래서 교인들에게 열심과 충성을 강조하고 성화하여야 한다고 강조했어요.

인간의 행함을 강조했어요.

그러나 저에게도 바울처럼 다메섹 사건이 일어났어요.

 

그래서 지금은 모든 성경을 예수님의 십자가 중심으로 해석하게 된 겁니다.

과거엔 십자가가 안 보였는데 지금은 보여요.

십자가가 밝히 보이니 십자가를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가(雅歌)서도 미흡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중심으로 해석하는 겁니다.

 

제가 누누이 말하는 것은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했어요.

그렇다면 성경 해석은 성령만이 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성령은 목사나 교수나 박사들에게만 주시지 않았어요.

모든 성도들에게 주셨어요.

일차적으로 모든 성도는 성경을 해석 할 수가 있어요.

원칙론으로 보면 그렇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교회를 위해서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셨어요.

어떤 사람은 가르치는 자로 세우고!

어떤 사람은 섬기는 자로 세웠어요.

가르치는 자에겐 지혜의 말씀에 은사와 지식의 말씀에 은사를 주셨어요.

이건 세상 학벌과 상관없어요.

 

쉽게 말할게요.

지식(知識)의 은사란? 원리를 깨닫는 거예요.

지혜(知慧)의 은사란? 원리를 잘 작용하는 거예요.

흔히 재주가 좋은 아이들을 보면 야! 그 녀석 지혜롭다 그러잖아요.

반대로 뭘 많이 알면 그 녀석 지식이 많네! 라고 하지요.

 

예를 들어서 지식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성경을 보는 안목이 탁월해요.

성경전체의 흐름을 예수님의 새 언약 중심으로 기가 막히게 풀어요.

한마디로 성경의 원리를 잘 가르쳐요.

 

그러나 지혜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그 원리를 잘 풀어서 이해를 시켜요.

지혜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설교하는 것을 보면 쉬워요.

귀에 속속 들어와요.

 

지식은 음식 재료와 같고!

지혜는 그 재료로 잘 요리하는 것과 같아요.

목사는 요리를 잘 하는 사람이에요.

 

성경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하는 지식이라면!

그 성경을 예수님과 성도의 구원이야기로 잘 풀어주는 것은 지혜에 속한 겁니다.

목사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쉽게 잘 풀어주는 사람이에요.

이해되지요.

 

십자가는 비밀이에요.

비밀이라면 인간의 지식이나 지혜로는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이 세상에서 최고로 똑똑하다는 사람들의 손에서 일어난 겁니다.

인간들의 지혜로는 하나님의 일을 가늠 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최고의 지혜자들이 모여서 한 일이 예수님을 죽이는 일을 한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오로지 하나님께 사랑을 입은 성도만이 알아먹을 수 있어요.

성도만 알아먹게 하려고 비밀로 하였어요.

이건 만세전부터 이미 예정된 것이에요.

그래서 자기 백성들에게만 성령을 주어서 알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 난 배우지 못하였으니 성경을 몰라!

그러지 마세요.

목사님들이 하는 말은 무조건 다 맞아!

그러지 말란 말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논리적으로 말은 할 수가 없지만 옳고 그름은 판단해요.

남에게 가르치지는 못하여도 목사님들의 설교에 맞다 틀리다는 분별은 할 수가 있어요.

 

그 판단 기준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피 이야기에요.

그러니 성령이 계신 성도는 그 어떤 성경을 말한다 하여도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로 풀어지면 아멘을 해요.

 

다시 말합니다.

성경은 비밀이에요.

비밀이란? 감추어졌다는 말이잖아요.

그렇다면 십자가 이야기는 육으론 알 수가 없으니 방언이지요.

 

방언은 성령께서 통역을 해 주셔야지만 알 수가 있어요.

그래서 성령께서 아가(雅歌)서를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로 통역을 해 주세요.

지금 제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아가(雅歌)서를 예수님 이야기로 통역하고 있는 겁니다.

제게 주신 지혜와 지식의 은사로 풀어내는 겁니다.

그러니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이야기를 예수님이 성도를 구원하는 이야기로 풀이하는 겁니다.

이해가 되는가요.

 

세상에서 가장 흔한 이야기가 사랑이에요.

너무도 흔한 말이라서 그져 그렇게 들려요.

그러다 보니 사랑이라는 말의 홍수 속에 살면서도 사랑을 잊고 살았어요.

마치 홍수 속에 생수가 없듯이 사랑의 홍수 속에 사랑이 희귀해요.

 

이걸 우리 신앙으로 말해봅시다.

교회마다 십자가를 세워 놓았어요.

십자가가 지천에 깔렸어요.

목사들도 너도 나도 십자가를 말해요.

예수님 이야기를 해요.

 

그런데 정작 그 속을 들여다보면 교회 안엔 십자가가 없고 교인들 속엔 예수가 없어요.

전부 이상한 십자가이고 이상한 예수에요.

이상한 예수가 떡하니 차지하고 있으니 이상하게 예수를 믿는 겁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몰라요.

십자가를 말하는데 십자가의 의미를 몰라요.

습관처럼 예수님 사랑을 말하나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희귀해요.

 

마치 세상 사람들이 사랑이라는 말을 입에 침이 마르지 않을 정도로 말을 하지만 사랑이 없듯이 교인들도 입만 열면 예수님 이야기를 쉴 새 없이 하지만 예수님의 사랑이 없어요.

그러니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성도들의 심령이 가뭄에 논바닥 갈라지듯이 쩍쩍 갈라져 있어요.

술람미와 같은 기쁨이 없어요.

도리어 술람미처럼 기뻐하는 사람을 이상하게 보아요.

 

이 시대 교인들을 보면 어쩌면 잘 길들여진 용병(用兵)들처럼 보여요.

언어(言語)도 옛날 구중궁궐(九重宮闕) 안에서 사용하는 언어처럼 화석화 되어 있어요.

쉬운 말이 있는데도 어려운 말을 함으로서 유식한 척 하잖아요.

 

지금 교회 안에 구중궁궐과 같아요.

교회 안에서 사용하는 신앙적인 말이 따로 있어요.

종교적인 말을 하여야 신앙이 있는 것처럼 되었어요.

거룩한 말이 따로 있는 줄 알아요.

성경적인 말에 어떤 능력이 있는 줄 알아요.

 

성경적인 말을 하여야 신앙이 있다고 믿어요.

그러니 교회 안에선 전부 천사 같은데 집에 가면 개판인 겁니다.

교회 안에서의 인간과 교회 밖에서 인간이 달라요.

말 자체가 달라요.

 

이 시대 교인들은 법도(法道)에 매여 버렸어요.

마치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이 율법이라는 신앙에 가두어져 있는 것처럼 교회의 전통(傳統)과 유전(遺傳)에 가두어져 버렸어요.

 

종교적인 언행 심사에 미이라처럼 꽁꽁 매여져서 가두어져 있어요.

그러다 보니 언어 구사도 교회에서 가르쳐주는 말만 앵무새처럼 하는 겁니다.

그게 거룩이라고 생각해요.

 

교회 안에서 하는 언행과 교회 밖에 하는 것이 너무도 달라요.

성경적 언어는 성(聖)이고 세상 말은 속(俗)이에요.

말도 속(俗)된 말과 거룩한 말로 구분을 해 놓았어요.

그러니 아가(雅歌)서를 솔로몬과 술람미처럼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남사스러운 겁니다.

저는 마치 못할 말을 하는 것처럼 죄인이 되고 말았어요.

 

교회가 교인들이 살아가는 모든 것을 구획정리하듯이 성(聖)과 속(俗)으로 구분했어요.

그러다 보니 유행가라도 부르면 무슨 염병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쳐다보는 겁니다.

노래방이라도 가면 타락했다고 해요.

맥주라도 한 잔 마시면 무슨 벼락을 맞는 줄 알아요.

전부 인간의 행동을 성(聖)과 속(俗)으로 구분을 해 놓아서 그래요.

 

교회는 성(聖)이고 교회 밖은 속(俗)이에요.

직업도 성(聖)과 속(俗)으로 구분해 놓았어요.

식당에서 술을 안 팔면 성경적이고 술을 팔면 세속적이에요.

기독교 서점을 하면 성(聖)스러운 직업이고 술을 파는 식당이라도 하면 속(俗)되다고 여겨요.

교인들이 직업을 가질게 없어요.

그러다 보니 장로나 권사가 되면 전부 기독교 서점을 하려고 해요.

 

회식자리에 가서도 사이다를 마시면 성(聖)이고 맥주를 마시면 속(俗)이에요.

노래방에 가서도 찬송가를 불러야지 유행가를 부르면 안 되어요.

찬송가를 부르면 거룩하고 유행가를 부르면 세속적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런 것은 모두가 목사들이 율법적으로 성(聖)과 속(俗)을 분리시켜서 가르쳐 놓았기 때문이에요.

 

분명하게 말하지만 성(聖)은 이 땅에 없어요.

예수님만 성(聖)이에요.

예수님만 죄가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성(聖)이란 거룩을 말하는데 이 세상엔 거룩이 없어요.

인간에게선 거룩이 안 나와요.

죄인은 착한 말을 해도 속(俗)이고 욕을 해도 속(俗)이에요.

 

거룩은 오로지 하늘에서 오신 예수님에게만 있어요.

예수님은 욕을 해도 성(聖)이고 술을 먹어도 성(聖)이에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다 거룩한 겁니다.

 

악함이란? 죄인에게서 거룩이 나온다고 믿는 겁니다.

이 시대 성화주의자들이 이 함정에 빠졌어요.

그래서 그 이름도 거룩하게 변화하자는 의미에서 성화(聖化) 하여야 한다고 하잖아요.

죄인이 예수님처럼 변화하자고 하잖아요.

이건 자기 주제를 몰라서 그래요.

 

속(俗)이란 죄(罪)를 말해요.

그렇다면 예수 밖은 다 죄인이므로 다 속(俗)이에요.

이 땅은 모두가 죄이고 속(俗)된 것이에요.

 

인간은 죄 아래서 태어나요.

그러니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죄이고 속(俗)된 것이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도 여러분의 행함에 의미를 두지 마세요.

여러분에게 무슨 선한 것이 나온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짜면 죄만 나와요.

슈바이쳐나 테레사 수녀같이 살아도 죄에요.

 

선(善)은 오직 예수님에게만 있어요.

그러므로 예수 안에선 다 선(善)이고 예수 밖에선 다 악(惡)이에요.

바울이 그러지요.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하지요.

 

여기서 감사함이란? 주님이 주신 것이라고 여기란 말입니다.

우상의 제물도 주님이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면 우상의 제물이 아니고 그냥 음식이에요.

우상은 우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만 우상이에요.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흔히들 교인들은 제사음식은 우상의 제물이라고 안 먹잖아요.

그래서 교인들은 제사상에 올려지지 않은 음식을 먹어요.

똑 같은 음식인데도 제사상에 올려지면 속된 것이고 올려지지 않으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럼 제사를 지내음식을 그 사람 몰래 아니라고 하면서 먹으라고 하면 거리낌 없이 먹어요.

그러니 음식 자체는 변한게 없는데 자기 생각에 의해서 성(聖)과 속(俗)으로 나누어지는 겁니다.

결국 본인이 우상이냐 아니냐로 결정하는 겁니다.

 

본인이 우상이라고 보면 다 우상이고 아니라고 보면 아닌 겁니다.

바울은 우상을 인정하지 않았어요.

그러니 마음껏 먹은 겁니다.

다만 건덕상 연약한 사람의 입장을 고려해서 가려서 먹었어요.

 

누가 물어요.

목사님 술 먹어도 됩니까?

그래서 그건 니 마음대로 하세요 라고 했어요.

술 먹는 것을 죄라고 여기면 죄이고 아니라고 여기면 아닌 겁니다.

믿음으로 술을 먹으면 신앙이고, 믿음이 없이 술을 안 먹어도 그건 불신앙인 겁니다.

무엇을 먹느냐 안 먹느냐가 중요치 않고 어떤 정신으로 사느냐가 중요해요.

범사에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고 의식하고 감사하면서 살면 되어요.

 

유행가도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면 훌륭한 찬송이 되어요.

반대로 찬송가도 은혜를 모르고 부르면 유행가가 되어요.

그러니 찬송가를 불렀다 유행가를 불렀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떤 마음으로 불렀느냐가 중요해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부르면 다 찬송이에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느냐 모르느냐 이지 어떤 노래를 불렀느냐가 아니에요.

유행가를 불렀느냐 찬송가를 불렀느냐가 본질이 아니고 내가 죄인인줄 알고 내게선 의가 없음을 알고 예수 안에서만 의가 된다는 것을 믿고 감사하고 살면 되어요.

 

사이다를 마셨느냐 맥주를 마셨느냐가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아느냐가 중요해요.

하나님의 은혜를 알면 평생 맥주 마시고도 천국에 가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면서 평생 사이다만 마신 사람은 지옥에 갑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알고 살면 모든게 성(聖)이고 모르고 살면 모든게 속(俗)된 것입니다.

 

왜? 이런 말을 장황하게 하는가 하면 아가(雅歌)서를 강해하면서 언어 문제 때문에 힘들어서 그래요.

남녀 간에 일어나는 애정 문제를 표현하자니 좀 그렇거든요.

사랑이야기를 하는데 있어서 무슨 말이든지 어떻게 읽느냐가 중요해요.

노골적이냐 아니냐가 본질이 아니고 왜? 이런 말을 하느냐를 읽을 줄 알아야 해요.

점잖은 말이 복음적이 아니고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이 복음적이에요.

 

예수님과 성도간의 사랑을 아가(雅歌)서에선 솔로몬과 술람미라는 사랑을 표현하잖아요.

부부간의 사랑이야기로 말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언어가 노골적인 겁니다.

 

사랑을 더 세심하게 느끼라고 노골적인 말로 표현하는 겁니다.

아가(雅歌)서니까 그러는 겁니다.

그러니 양해하고 들으세요.

 

저도 글을 쓰면서 얼굴이 화끈 거려요.

직설적인 표현을 쓰면서도 과연 이런 말을 써도 되나 망설이고 또 망설여요.

그러니 언어가 토해내는 의미를 붙잡으세요.

그래서 주님과의 깊은 사랑 속으로 빠져 드세요.

그리고 느끼세요.

 

바람결에 피부가 파르르 떨리듯이 주님의 사랑을 손으로 만진바가 되고 눈으로 본바가 되고 귀로 들은 바가 되세요.

만물을 통하여서 오감(五感)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해 보세요.

느껴보세요.

 

그래서 나의 주시여!

나의 신랑이시여! 라고 고백하세요.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라고 나도 향을 토해내세요.

 

메마른 심령에 속에 아가서가 이슬처럼 촉촉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내려서 부드러워지고 사랑의 사람으로 변하기를 바랍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기를 바래요.

성화하라는 말이 아니고 주께 받은 사랑으로 자신을 녹이라는 말입니다.

더 풍성한 은혜 속으로 자신을 내어 맡기란 말입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이 좀 흐믈 흐믈 해지란 말입니다.

좀 나긋 나긋해 지시고!

좀 말랑 말랑해 지시고!

좀 살랑 살랑해 지세요.

 

맛대가리 없는 사람이 되지 말고 좀 맛난 사람이 되란 말입니다.

예수님과 사랑해 보세요.

맛난 사람이 되어요.

복음이 주는 소망 때문에 세상사는게 여유로워져요.

 

왜? 주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 그렇게 사납고 투견하는 개처럼 무섭습니까?

싸움닭처럼 사납습니까.

술람미가 솔로몬의 몰약 향낭을 품고 솔로몬의 사랑을 토해 내듯이 여러분들도 예수님의 사랑을 토해내세요.

 

아가(雅歌)서는 내가 솔로몬과 술람미가 되지 않고서는 온전하게 해석을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성령께 그 사랑의 감동을 달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제가 아가(雅歌)서를 해석하는 기본 틀은 예수님의 사랑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야기의 핵심이 십자가에 죽으심이니 이를 모티브로 풀어가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 틀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모든 성경이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니 성경 어디를 펴도 예수님의 피 이야기가 나와야 한다는 것이 제 지론입니다.

 

오늘 본문은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하는 노래에요.

 

아 1:15절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솔로몬은 술람미를 바라보니 너무도 예쁜 겁니다.

그래서 당신은 어쩌면 그렇게 예쁘냐고 감탄을 하고 있어요.

 

야! 어쩜 저렇게 예쁠까!

보면 볼수록 예쁘단 말이야!

세상에서 당신처럼 아름다운 여인은 없어!

수많은 여인 중에서 당신이 최고야!

그대가 정녕 내 여자란 말이오!

 

좌우지간 최고의 수식어를 동원하여서 칭찬하는 겁니다.

그래서 반복하여 감탄하고 또 감탄하는 겁니다.

보면 볼수록 빠져 드는 겁니다.

 

왜? 만유를 호령하는 왕인 솔로몬이 미천한 여인에게 빠져 들까요?

빠져들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 아닙니까?

솔로몬이 술람미를 사랑하는 이유는 술람미 속에 온통 솔로몬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술람미는 솔로몬의 은혜로 푹 젖어 있어요.

 

어디를 보아도 솔로몬의 사랑이 배여 있는 겁니다.

이리 보아도 내 사랑이고!

저리 보아도 내 사랑인 겁니다.

술람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술로몬이 준 것으로 단장을 하고 있어요.

그러니 솔로몬의 눈에 더 없이 예쁜 겁니다.

 

지난시간 이스라엘의 결혼풍습을 통하여서 신부는 신랑이 보낸 옷과 빙폐물로 단장을 한다고 했잖아요.

지금 술람미가 솔로몬이 준 것으로 단장을 하고 있어요.

천하디 천한 노예가 무슨 단장 할 것이 있겠어요.

그러니 솔로몬이 준 것으로 온 몸에 두르고 있는 겁니다.

 

신앙이란? 내 것을 버리고 예수님의 것으로 채우는 겁니다.

옛 것은 버리고 새 것으로 채우는 겁니다.

옛 것이란? 율법신앙이에요.

 

내 의(義)를 버리고 예수님의 의(義)로 채우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로 나를 감추는 겁니다.

야곱처럼 염소 털로 매끈 매끈한 곳은 보이지 않도록 감추는 겁니다.

 

레위기에 보면 모든 소제 물에 소금을 치라고 하잖아요.

 

레 2:13절 “네 모든 소제 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찌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찌니라”

 

모든 소제 물이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말해요.

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성도의 삶을 영적 예배라고 했어요.

예수님의 십자가 정신으로 사는 것을 산 제물이라고 했어요.

 

이를 언약의 소금이라고 해요.

모든 소제 물에 소금으로 맛을 내듯이 성도의 모든 삶에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이 묻어 나와야 해요.

용서받고 산다는 감사가 나와야 한단 말입니다.

성화하라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살란 말입니다.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것으로 사는 것이 드러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처럼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으로 사는 겁니다.

 

좋은 신앙이란? 자기에게서 예수님의 흔적이 많이 묻어 나와야 해요.

바울이 그러지요.

내가 약할 때가 가장 강함이라고 하지요.

나의 무너짐 속에서 예수님의 살리심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강하게 하지 않아요.

약하게 하세요.

혼자서도 살아가는 에서가 아니라 엄마 치맛자락만 붙잡고 사는 야곱으로 만들어요.

그래서 늘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라고 해요.

내가 약할수록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강할수록 멀어져요.

 

술람미도 약하니 솔로몬을 더 사모하는 겁니다.

술람미처럼 예루살렘 여자들로부터 천대받고 멸시받고 조롱을 당하지만 솔로몬의 사랑 때문에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 인내하면서 약속하나 붙잡고 사는 것이 강함이에요.

솔로몬의 눈에는 그 모진 핍박 속에서도 약속 하나 믿고 살아가는 술람미가 그렇게 예쁜 겁니다.

그러니 감탄하는 겁니다.

 

술람미가 자기만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이 예쁜 겁니다.

술람미는 자기 능력으로 핍박을 이겨낸 것이 아니에요.

솔로몬의 사랑에 힘으로 버텨낸 겁니다.

바울 식으로 말하면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으로 살기 때문에 예쁜 겁니다.

 

율법 신앙은 내 것을 채우는 겁니다.

사람들이 율법 신앙을 좋아하는 것은 믿음이 없이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신앙은 자기의지만 강하면 얼마든지 할 수가 있어요.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 하면 할 수가 있어요.

마음도 마인드 콘트롤로 다스려요.

성화주의자들 보세요.

참으로 대단해요.

 

마치 수절과부가 밤마다 허벅지를 꼬집으면서 끓어오르는 욕정(欲情)을 이기듯이 율법주의자들도 마음을 다스리고 또 다스려요.

우리 인간적으로 이건 인정해 주자고요.

하지만 이건 하나님이 바라는 신앙이 아니에요.

신앙은 아니더라도 그들의 노력은 인정하자고요.

 

율법신앙엔 보람이 있어요.

뿌듯함이 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좋아라 하는 겁니다.

자기 긍정이 있으니 좋지요.

 

예루살렘 여자들은 모두가 화려한 친정집 가문의 후광을 입고 있어요.

모두가 정략결혼을 하였기 때문에 뒤가 든든해요.

그러니 자기 능력으로 단장을 합니다.

 

자기 것으로 단장을 하니 스스로 얼마나 예쁘다고 하겠어요.

온갖 자기가 장만한 장신구로 단장을 하잖아요.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술람미는 솔로몬의 것으로 가득 채웠어요.

술람미가 솔로몬의 것으로 채운 것은 자기 것이 없기 때문이에요.

상대적으로 예루살렘 여자들은 자기 것으로 치장했어요.

자기 것이 있기 때문에 치장한 겁니다.

 

복음적인 의미로 보면 술람미는 예수님의 의(義)로 나오는데 예루살렘 여자들은 율법의 의(義)로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술람미는 솔로몬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예루살렘 여자들은 사랑받지 못하는 겁니다.

 

마치 여자들이 외출을 할 때 이 옷도 입어보고 저 옷도 입어보고 하잖아요.

장롱 속에 있는 옷을 다 입어보잖아요.

옷 하나 찾아 입는데 한 시간이 걸려요.

거기다가 머리단장 하는데 한 시간!

화장하는데 한 시간!

화장도 했다가 고치고!

그렸다가 지우고!

아이라인 하나 삐뚤면 그것하나 30분 그려요.

자기 마음이 들 때까지 고치고 또 고치고 하잖아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건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이지 남편의 마음에 드는 게 아니에요.

사람이 화장을 하고 옷을 입는 것은 상대방에게 예쁘게 보이려고 하는 거잖아요.

상대방이 예쁘게 보아야 예쁜 겁니다.

자기 딴에는 명품을 걸치고 랑콤으로 분칠을 해도 상대방이 싫으면 소용없어요.

헛수고요.

 

여자들이 오해하는 것은 자기가 예쁘면 남편도 예뻐하는 줄 알아요.

아니에요.

남편은 남편이 바라는 것을 할 때 이뻐해요.

 

남자 입장에서 말합니다.

 

남편이 옷도 이게 좋겠는데 그러면 알았어! 하고 입으면 얼마나 좋아요.

그러면 꼭 당신은 패션 감각이 없어!

그러면서 꼭 자기 고집대로 입어요.

그리곤 나 예뻐!

그런다고요.

 

그럼 말하기 싫어서 그냥 가자 그래요.

느낌대로 말하면 짜증내잖아요.

말을 해 보아야 듣지도 않으니 싸우기 싫으니 건성 건성으로 대답하는 겁니다.

 

자기는 좋은데 남편은 싫어요.

남편은 말을 듣는 것을 바라지 자기 색깔 내는 것을 바라지 않아요.

아내는 남편의 마음에 들도록 해야지 다른 사람의 이목에 집중하고자 하면 안 되어요.

이건 아내나 남편이나 동일해요.

 

본인은 본인에게 관대해요.

그래서 자기가 예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자아 환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판단능력이 상실이 되어 있어요.

 

그러나 상대방은 제 삼자 입장에서 보잖아요.

연예인들이 코디네이터를 두는 것도 제 삼자 입장에서 패션을 보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상대방이 코멘트가 맞는 겁니다.

 

그런데 그 어느 인간도 상대방의 코멘트를 듣지 않아요.

자기고집대로 해요.

그러니 상대방으로부터 예쁘다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겁니다.

 

지금 예루살렘 여자와 술람미가 그래요.

술람미는 자기 생각이 없어요.

솔로몬이 입으라고 하는 옷을 입고 하라는 것을 해요.

그러니 솔로몬의 눈에는 술람미가 최고로 예쁜 겁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여자들은 자기들이 좋은 것으로 치장을 했어요.

솔로몬의 것은 하나도 없고 자기들 것으로만 치장을 했어요.

그러니 솔로몬이 싫어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솔로몬이 노란 색을 입으세요.

그러면 예! 하면 되는데!

아니에요.

난 빨간 색이 좋아요 하곤 입는 겁니다.

 

이게 자기 생각이 살아 있기 때문이에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남자는 순종하는 여자를 좋아해요.

제일 싫어하는 게 고집이 센 여자에요.

 

술람미는 은혜 아래 있는 성도의 표상이고!

예루살렘 여자는 율법 아래 있는 교인들이 표상이에요.

그러니 술람미는 솔로몬이 기뻐하는 짓을 하는데 예루살렘 여자들은 자기고집이 쎄기 때문에 자기 뜻대로 하는 겁니다.

 

율법 신앙은 자기 고집이 살아 있으니 남편의 말을 안 들어요.

예수님이 내가 다 해줄게 그러잖아요.

그런데 아닙니다!

제가 할게요!

 

제가 말씀대로 살아서 영광 돌리겠습니다.

그러고 있어요.

자아도취에 빠져서 스스로에게 흐뭇해하고 있어요.

 

예루살렘 여자들은 옛 언약 아래 있는 자들의 모형이고!

술람미는 새 언약 아래 있는 성도의 모형이에요.

성도는 자기 것이 없어요.

 

그러니 자기 생각도 없지요.

성령께서 믿으라고 하는 것을 믿어요.

성령은 예수님 것으로 치장을 해요.

 

그러니 예수님이 성도를 보면 기쁜 겁니다.

어이쿠~ 저 녀석! 내가 준 것으로 치장을 했네!

아이고~ 이뻐라!

그런단 말입니다.

 

예수님 앞에선 아기가 되어야 해요.

아기는 엄마가 입혀준 옷만 입어요.

엄마는 아기에게 자기가 좋아하는 색깔의 옷을 입혀 놓고 흐뭇해하잖아요.

어이쿠~ 내 새끼!

어쩌면 이렇게 예쁠까!

그러니 보면 볼수록 예뻐 죽겠는 거예요.

 

솔로몬이 술람미가 얼마나 예뻤으면 네 번씩이나 찬사를 보내겠어요.

야! 예쁘다!

어쩌면 저렇게도 아름답냐!

눈이 부시게 화려하다!

와~ 매력이 넘친다!

보면 볼수록 예뻐 죽겠어요!

그러니 기뻐하고 기뻐하는 겁니다.

 

여자에게 있어 남자가 예쁘다고 하는 말은 최고의 찬사에요.

여자는 남편의 사랑을 먹고 살아요.

한 남자의 사랑을 받고 사는 여자는 행복해요.

이게 평범한 것 같지만 이런 사랑을 받고 사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아요.

 

전 지금 남존여비(男尊女卑)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솔로몬과 술람미를 가지고 예수님과 우리 관계를 말하는 겁니다.

괜히 오해해서 남자들이 잘난 척 하면 안 되어요.

 

모든 여자(인간)는 사랑을 받고 싶어 해요.

항상 누군가의 사랑을 갈망하고 살아가는 존재들이에요.

그래서 사랑에 목말라 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간단해요.

 

아내는 남편이 좋아하는 것으로 단장하면 되어요.

남편은 아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면 되어요.

상대방이 바라는 것에 순종하면 되어요.

그게 사랑받는 조건이에요.

 

지금 솔로몬의 눈에 술람미가 그래요.

그러니 환장하는 겁니다.

당신 한 번 돌아봐 봐!

그러면서 야! 내 색시 예쁘네!

그러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당신은 어여쁘고! 어여쁘다! 어여쁘고! 화창하다고 탄성을 자아내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서 술람미의 눈을 쳐다보면서 술람미 눈동자 속에 비췬 자기 모습을 보면서!

야! 당신은 어쩌면 당신 눈 속에 나만 담아 두었어!

그러는 겁니다.

솔로몬이 술람미 눈을 들여다보니 그 속에 솔로몬이 서 있는 겁니다.

 

그래서 술람미의 눈을 비둘기의 눈이라고 하는 겁니다.

 

아 1:15절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솔로몬이 술람미의 눈을 비둘기의 눈이라고 한 것은 비둘기의 눈에 특징을 보고 하는 말이에요.

술람미의 눈 속에서 비둘기의 눈에 특징을 본 겁니다.

그래서 비둘기 눈 같다고 칭찬하는 겁니다.

 

그럼 비둘기 눈의 특징이 있겠지요.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했잖아요.

모든 성경은 한 성령이 감동케 해서 기록했잖아요.

그러면 성경 속에 비둘기가 나올 것이지요.

그럼 비둘기가 바라본 눈이 있을 것 아닙니까?

솔로몬이 성령의 감동으로 그 비둘기의 눈을 바라보는 겁니다.

 

성경에 보면 최초로 비둘기가 나타난 사건이 있어요.

창세기 8장을 보면 노아가 홍수 후에 방주에서 물이 감했는지 알려고 두 새를 내어 보내지요.

먼저 까마귀를 내 보냅니다.

그런데 까마귀는 돌아오지 않았어요.

썩은 시체 먹는다고 오지 않았어요.

 

그래서 다시 비둘기를 내 보냈어요.

그러자 비둘기가 아직 물이 감하지 않아서 방주로 돌아옵니다.

그리곤 7일을 기다린 후에 비둘기를 다시 내어 보냅니다.

그러자 이번에 새 감람나무 잎사귀를 몰고 온 겁니다.

그리곤 7일을 기다린 후에 다시 비둘기를 내어 보내었는데 다시 돌아오지 않았어요.

 

자 여기서 비둘기가 바라본 세상이에요.

비둘기는 새로운 세상을 보고 왔어요.

심판 후의 새로운 은혜의 세상을 본 겁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지요.

눈은 몸의 등불이니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라고 했지요.

“성하다” “밝다” 라는 말은 소망이고 새로운 세계를 본다는 말입니다.

 

비둘기가 눈이 등불처럼 새로운 세상을 본 겁니다.

심판 후에 열린 새로운 세상 말이에요.

홍수가 끝난 땅은 하나님의 은혜를 머금고 있는 땅입니다.

 

그래서 비둘기가 노아에게 새 감람나무 잎사귀를 물어다 준 겁니다.

새 감람나무란?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나무에요.

옛 것은 지나고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는 말이에요.

 

감람나무는 평화를 상징해요.

그렇다면 새로운 시대는 평화의 시대란 말입니다.

다시 심판이 없는 세상이에요.

그런데 이 은혜가 정결한 제물의 피를 보시고 주세요.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이 정결한 짐승을 잡아서 하나님께 제사를 지냈어요.

하나님이 그 제물을 흠향하시고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언약을 했어요.

흠 없는 제물의 피를 보시고 언약을 한 겁니다.

누구든지 흠 없는 제물의 피로 인하여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이 사실을 아는 자가 새로운 세상에서 살 수 있는 자에요.

이런 사람에겐 심판이 없습니다.

그러나 흠 없는 제물의 희생을 모르는 자는 홍수 이전의 인간과 동일한 인간으로 취급을 당하여 징벌을 당합니다.

 

홍수 이후의 세상은 평화의 세상이에요.

그 평화는 흠 없는 제물의 희생으로 주어진 겁니다.

이 평화의 세상을 비둘기가 전해 주었어요.

 

그래서 비둘기를 평화의 새라고 하는 겁니다.

그럼 비둘기의 눈이란 것은 평화를 아는 눈이란 말입니다.

어떻게 평화가 주어졌는지 아는 눈이에요.

 

지금 술람미는 자기가 누리는 평화는 솔로몬의 낮아지심으로 주어진 평화임을 알고 있는 겁니다.

솔로몬의 낮아짐이란? 정결한 제물의 희생과 같아요.

왕이라는 신분을 버리고 술람미를 사랑해 주었어요.

이건 자기희생이에요.

 

술람미는 이런 솔로몬의 낮아지심으로 자신을 사랑해 주었다는 것을 알아요.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 왕이라는 신분을 버리고 사랑해 주었다는 것을 알아요.

그러므로 자신이 누리는 이 사랑은 솔로몬의 피 흘림(낮아지심)으로 주어진 것임을 알고 감사하고 있는 겁니다.

 

사랑을 받은 술람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은 자기 눈에 솔로몬만 담아 두는 겁니다.

그래서 술람미는 자기 눈 속에 솔로몬만 담고 있는 겁니다.

이 사실을 솔로몬이 알고 있어요.

술람미가 솔로몬을 바라보는 그 시선 속에서 느낀 겁니다.

그래서 너의 눈은 비둘기의 눈과 같다고 말하는 겁니다.

 

이걸 이 시대 복음으로 살펴봅시다.

 

성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 평화를 얻었다는 것을 보아야 해요.

내가 지금 누리는 이 안식은 예수님의 피 흘리심에 산물이에요.

그가 찔림으로서 우리가 나음을 입었어요.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서 우리가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있는 겁니다.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했다고 하지요.

그럼 성령을 받은 성도의 눈은 비둘기와 같은 눈을 가졌어요.

비둘기 같은 눈을 가진 성도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보이는 겁니다.

그 십자가로 인하여 내가 구원을 받았고!

내가 자유를 누린다는 것을 알아요.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마귀의 참소가 빗발치더라도 예수님의 피로 당당히 이겨내는 겁니다.

이건 내 신랑이 나를 위하여 흘린 피라고 당당히 말한다고요.

성도의 눈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 보여요.

그래서 십자가만 자랑하는 겁니다.

 

비둘기는 하나의 사물만 본다고 합니다.

 

술람미의 눈에는 솔로몬만 보여요.

일편단심이에요.

눈은 거울(窓)이에요.

솔로몬은 술람미의 거울 속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보고 사랑했어요.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은 눈을 보면 그 눈 속에 사랑이 담겨져 있어요.

여러분도 사랑을 해 보셨잖아요.

눈과 눈이 마주치면서 사랑을 했잖아요.

서로의 눈 속으로 빨려드는 사랑 말이에요.

 

사랑을 하면서 그윽한 눈으로 사랑에 넘치면서 바라보는 그 시선을 기억하시나요.

사랑하면서 얻어지는 만족과 행복함으로 서로의 눈 속으로 빨려 들잖아요.

자기야! 사랑해! 하면서 빨려 들잖아요.

사랑하는 님을 그윽하게 바라보는 그 시선!

 

이게 바로 비둘기의 눈이에요.

술람미가 지금 솔로몬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어요.

그러니 얼마나 사랑스럽겠어요.

 

미움은 미움을 낳고, 사랑은 사랑을 낳아요.

미운 놈은 하는 짓마다 밉게 보이고, 사랑하는 사람은 하는 짓마다 사랑스럽게 보여요.

미움과 사랑은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져요.

 

사랑하는 눈으로 보면 더 사랑스러워져요.

그러니 더욱더 사랑하는 겁니다.

더 많은 사랑을 쏟아부어주고 싶은 겁니다.

지금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그러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찬사를 보내는 거예요.

 

사랑을 하면 그 사람의 눈에는 사랑하는 사람만 담겨져 있어요.

길을 가도 눈에 선하고!

일을 해도 눈에 선하고!

잠을 자도 눈에 선해요.

 

그 사람의 눈빛과 몸짓 하나하나를 다 기억하잖아요.

그러면서 사랑의 달콤함을 회상하면서 느끼잖아요.

눈으로 선명하게 그리잖아요.

 

눈이란? 마음에 창(窓)이에요.

사람은 마음에 거리낌이 있으면 눈으로 나타나요.

미워하면 눈을 마주치지 못해요.

눈을 피해요.

 

여러분 범죄자들을 대질 신문을 하지요.

왜? 그럽니까?

눈과 눈을 마주치면 인간의 본능은 속이지 못해요.

 

눈은 거짓말을 못한다고 합니다.

거짓말을 하면 동공이 커지거나 흔들려요.

그래서 욕을 하고 뒤에서 흉을 보는 사람은 만나면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겁니다.

 

사랑해야만 눈을 마주볼 수가 있어요.

그러니 사람의 눈을 보면 이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 알 수가 있어요.

사람과 사람의 사귐에서도 눈을 바로 쳐다보지 않고 눈을 감는 사람은 진실성이 없어요.

이건 참고적으로 말하는 것인데 누군가와 말을 할 때 눈을 피하거나 하는 사람과 특히 눈을 감고 말을 하는 사람은 경계를 해야 해요.

이건 본능이 나타내는 겁니다.

 

제가 설교를 하면서도 은혜를 받는 사람은 눈으로 빨려 들어가요.

전 그런 사람하고만 눈을 마주치면서 설교를 해요.

눈을 마주보고 할 땐 그 순간 말씀 안에서 사랑을 하는 겁니다.

그럴 땐 말씀이 더 힘이 있어지고 새로운 성령의 영감들이 떠올라요.

그래서 눈을 바라보는 사람을 보면서 설교를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사람 뒤에 숨어요.

눈을 마주치지 않아요.

이런 사람은 거의가 설교를 듣지 않고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을 보다간 설교자가 말씀을 놓쳐버려요.

그러면 준비한 말씀도 다 까먹고 깜깜해 져요.

 

그래서 전 그런 사람들은 눈길을 주지 않아요.

설교 시간에 딴 짓을 하는 사람이나 눈을 마주치지 않는 사람이나 숨는 사람이나 다 같아요.

건성으로 앉아 있는 겁니다.

그러니 설교가 지겹게 들리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이 꼭 트집을 잡아요.

신기할 정도로 다른 것은 다 잊어버리고 귀에 거슬리는 것만 잡아요.

부정적이고 비판적이에요.

꼭 밥에서 티를 찾아내고 밥숟가락을 놓는 사람과 같아요.

 

예전에 어떤 분이 그러더군요.

주일날 예배 마치고 같은 방향이라서 차를 같이 타고 가는데 차에 타는 순간부터 목사를 그렇게 욕을 한다는 겁니다.

설교를 트집 잡는데요.

전혀 트집 잡을 내용이 아닌데도 트집을 잡는다는 거예요.

말씀을 꺼꾸러 듣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의 차를 타지 않는다고 해요.

그 사람 입에서 단 한 번도 좋은 말을 들어보지 못하였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눈이 어두워서 그래요.

그러니 온 몸이 어두운 겁니다.

그러니 매사가 부정적이고 비판적이고 기쁨이 없는 겁니다.

이런 사람은 목사를 힘들게 하려고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저는 그럽니다.

목사가 싫으면 다른 교회로 가라고 합니다.

목사가 싫으면 그 어떤 설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아요.

그러면 둘 다 상처를 받아요.

그러니 자기 귀에 들어오는 설교를 하는 목사를 찾아 가라고 해요.

 

왜? 허송세월 합니까?

그 귀한 시간을 내어서 교회에 와서 싸움을 하고자 합니까?

그런 사람은 불쌍해요.

 

한 성령 안에 있으면 비록 책망을 하여도 아멘으로 받아요.

성령은 우리의 자존심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죄를 고발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은혜를 드러내요.

그러니 어떤 말씀을 증거하더라도 시험에 들지 않아요.

그러나 마음이 어두우면 미움으로 가득해서 그 어떤 말을 하여도 시험에 들어요.

그래서 목사가 미우면 다른 교회로 가라고 하는 겁니다.

 

목사가 설교를 하는 것은 성도와 사랑하는 거예요.

너와 나가 말씀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겁니다.

이걸 주 안에서 하나가 된다고 해요.

 

목사에겐 말씀을 잘 듣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행복한 겁니다.

제일 고역이 말씀을 듣기 싫어하는 사람이에요.

이런 사람은 설교하다가 말고 당장 나가! 라고 소리치고 싶고 가서 쥐어박고 싶어요.

 

그만큼 눈은 사람과 사람의 교감을 불러일으켜요.

여러분 사랑은 눈으로 하는 거예요.

그저 바라만 보아도 좋잖아요.

보면 볼수록 빠져들잖아요.

 

술람미가 지금 솔로몬을 바라보는 눈이 그런 눈이에요.

그윽하게 님이시여!

그대가 정녕 나의 님이시란 말인가요!

그러면서 솔로몬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어찌 예쁘지 않겠어요.

 

이건 마치 예수님의 발 앞에서 말씀을 듣는 마리아와 같아요.

예수님의 눈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먹는 마리아가 얼마나 예뻤겠어요.

아마도 마리아는 눈으로 예수님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말씀을 들었을 겁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와 사랑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제 사랑의 보금자리인 침실을 살펴봅시다.

 

아 1:16-17절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 17 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석가래로구나”

 

오늘 본문은 한마디로 침실이야기에요.

침실은 사랑하는 곳이에요.

둘만의 은밀한 공간입니다.

그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는 곳이에요.

 

침상이 푸르다고 하지요.

이는 생명이 흘러넘친다는 말입니다.

부부간에 나누는 사랑은 생명의 교감이에요.

 

사랑 속에서 생명이 싹터요.

봄에 새싹이 파릇파릇하게 돋아나듯이 사랑을 하면 생기가 돌아요.

그래서 사랑을 하면 예뻐지는 겁니다.

 

사랑은 기쁨이고 행복한 겁니다.

부부간에 소원한 일도 사랑을 하고 나면 다 사라져요.

옛말에 부부는 그 어떤 일이 있어도 각방을 쓰지 말고 한 이불 덮고 자라고 합니다.

이는 그 어떤 문제도 사랑으로 해결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부부간의 사랑은 지친 몸과 마음을 활력소를 주는 겁니다.

 

술람미는 현실을 바라보면 낙망할 것 밖에 없어요.

안팎으로 예루살렘 여자들로 우겨쌈을 당하고 있어요.

거기다가 오빠들의 미움으로 포도원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어요.

현실은 한숨과 절망뿐이에요.

기뻐할 것이라곤 하나도 없어요.

그냥 죽고 싶어요.

우울해요.

 

그러나 그 어렵고 힘든 현실을 이겨내게 하는 것은 솔로몬과의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과 사랑을 나누었던 그 침실을 그리는 겁니다.

시집살이가 아무리 매서워도 남편의 사랑만 있으면 이겨낸다고 하듯이 술람미도 그 모진 핍박도 솔로몬과의 사랑으로 이겨낸 겁니다.

솔로몬과의 사랑을 회상하면 다시 힘이 솟았어요.

다시 만날 소망이 있기 때문에 좌절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들이 사랑을 나누는 집은 백향목 들보에다 잣나무 서까래로 지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직역하면 우리 집은 백향목 기둥에다가 잣나무 서까래와 판자로 만든 집에 둘만이 사랑하는 침대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 백향목 기둥과 잣나무 서까래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살펴봅시다.

 

백향목은 왕궁이나 성전을 짓는 재료에요.

다윗도 왕궁을 백향목으로 지었어요.

 

삼하 7:2절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찌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도다”

 

솔로몬은 백향목과 잣나무로 성전을 지었어요.

백향목은 레바논의 헐몬 산에 이슬을 먹고 자란 나무에요.

 

헐몬 산의 이슬은 성령을 상징해요.

 

시 133:3절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헐몬이란 거룩하다는 뜻이에요.

이슬은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해요.

 

그러니 헐몬산의 이슬은 성령을 상징하는 겁니다.

헐몬산의 이슬로 자란 백향목으로 성전을 지었다는 것은 성령이 성전을 지었다는 말이기도 해요.

성령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성도의 심령에 성전을 지어요.

지금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지어준 집이 신약식으로 말하면 성령의 전인 겁니다.

 

백향목은 해발 약 3천 고지에서 자라는 나무인데 붉은 색으로 독특한 향이 나서 벌레를 쫓아내고 내구성이 강해서 끝까지 향을 뿜어낸다고 합니다.

백향목이나 잣나무는 아주 강한 향이 나서 해충들이 달려들지 못해요.

그러니 성전 안에 항상 향기가 나는 겁니다.

그래서 성전 안엔 해충과 벌레들이 없는 겁니다.

 

또한 백향목이나 잣나무는 내구성이 강해서 오래도록 변하지 않아요.

천년을 간다고 해요.

이는 한번 지으면 끝까지 원형이 보존이 된다는 말이에요.

 

지금 솔로몬은 술람미에게 내가 네게 준 사랑은 성전과 같이 변하지 않는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이는 술람미를 향한 사랑은 백향목처럼 변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솔로몬의 사랑이 중간에 취소되거나 변개되지 않고 유효하다는 말이에요.

백향목의 냄새가 해충이나 벌레를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듯이 솔로몬의 사랑이 그 어떤 벌레나 해충과 같은 것으로부터도 지켜준다는 뜻입니다.

 

솔로몬이 술람미를 괴롭히는 그 어떤 것으로도 보호하고 지켜준다는 말입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은 술람미를 괴롭히는 해충들이에요.

벌레들이에요.

솔로몬이 이들로부터 술람미를 지켜 주었어요.

 

특히 잣나무는 노아가 방주를 지을 때 사용한 나무에요.

잣나무로 판자를 켜서 역청을 발라서 바깥에 물이 스며들지 못하도록 했어요.

무엇보다도 잣나무는 물에 썩지 않아요.

 

또한 잣나무 편자처럼 그 어떤 물속에서도 썩지 않듯이 그 어떤 예루살렘 여자들의 참소에서도 다 지켜준다는 말입니다.

왕궁의 중신들의 상소가 빗발쳐도 솔로몬의 술람미에 대한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걸 복음적으로 해석을 해 봅시다.

백향목 기둥과 잣나무 서까래로 지은 성전이란? 예수님의 피로 세운 성전을 말해요.

성령께서 성도들 안에 지은 성전은 예수님의 피로 백향목의 향기처럼 그 어떤 사단의 권세로부터 지켜주어요.

예수님의 피로 세운 성전은 그 어떤 마귀의 권세로도 무너뜨릴 수가 없어요.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은 그 어떤 마귀의 참소로부터도 무너지지 않아요.

 

한마디로 백향목과 잣나무로 지은 술람미와 솔로몬이 사랑을 하는 침실이 있는 집은 예수님의 피로 세운 교회와 같아요.

성도들 심령 속에 세운 성령의 전(殿)이에요.

성령의 전엔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이 있어요.

 

성도는 새 언약 안에서 생명을 누리고 쉼을 얻어요.

솔로몬의 침실이 항상 푸르듯이 새 언약 안에선 항상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흘러넘쳐요.

항상 기쁨이 있고 범사에 감사함이 있어요.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 안에 있으면 그 어떤 이단교리도 달려들지 못해요.

철학과 헛된 속임수나 간사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아요.

사람의 궤술이나 풍조에 밀려 떠내려가지 않아요.

즉 성화하여야 한다느니!

교회를 개혁하여야 한다느니!

성전을 지어야 한다느니!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영광 돌려야 한다느니 라는 것들과 같은 거짓말에 속지 않아요.

 

그리고 그 어떤 참소로부터도 끄떡없어요.

너 그 따위로 예수 믿을래!

너 그러고도 천당에 갈 수 있느냐!

너 그러고도 신자냐!

예수님의 피가 이 모든 것으로부터 넉넉히 이기게 해주세요.

 

마귀는 날마다 율법으로 성도를 참소해요.

말씀대로 살았느냐!

갖가지 성경의 조문들을 들고 와서 닦달을 해요.

 

이럴 때 성령께서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율법적 요구를 완성했다고 알려주어요.

그러면 성도는 이 믿음으로 마귀의 참소를 이기게 되는 겁니다.

죄를 이기는 것은 예수님의 피에요.

 

그러니 예수님의 피는 백향목과 잣나무로 지은 성전과 같아요.

성도는 이 피가 주는 자유함 속에서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겁니다.

이 시대는 어쩌면 비진리가 홍수처럼 쏟아지는 시대에요.

 

이렇게 해야 한다느니!

저렇게 해야 한다느니!

갖가지 이설(異說)들이 난무해요.

그러나 예수님의 피가 이 모든 것으로부터 흔들리지 않게 해주세요.

 

노아 방주는 교회와 같아요.

비 진리를 이기는 교회는 잣나무로 지은 노아의 방주처럼 예수님의 피로 도배를 해야 해요.

지금은 성화하여야 한다느니!

개혁을 하여야 한다느니!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갖가지 비 진리들이 물밀듯이 교회 안으로 들어왔어요.

 

이럴 때 성도의 심령은 예수님의 피가 발라져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 진리에 넘어지지 않아요.

예수님의 피가 밝히 보이는데 왜? 다시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려고 합니까?

인간이 뭔가 하여야 한다는 것은 종들이 지키는 초등학문이에요.

 

이제 말씀을 마칩시다.

우린 술람미처럼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의 약속을 받았어요.

성령이 보증으로 와 계세요.

 

성령이 와 계시다는 것은 입맞춤을 받았다는 말이에요.

입맞춤을 받았기 때문에 새 언약이 믿어지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가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해 주신다는 것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지요.

나가 다시 와서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는다고 하셨어요.

지금 성령이 우리 안에 보혜사가 되셔서 우리를 지켜주고 있어요.

그러니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지지가 않아요.

 

그러니 낙심하지 마세요.

그 누가 뭐라고 하여도 흔들리지 마세요.

우린 헐몬 산에 이슬로 자란 백향목 궁전에 살고 있어요.

성령이 거하는 전이에요.

예수님의 피가 백향목의 향기가 되어서 그 어떤 해충으로부터 넉넉하게 지켜 줄 겁니다.

 

부디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 안에서 안심하고 사시길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우리 안에 백향목 궁전을 지어주심을 감사합니다. 예수님이 지어주신 침실에서 마음껏 주님과 사랑을 하게 하옵소서. 주님의 그 사랑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바 되고 마음으로 느끼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출처 : 울 산 목 양 교 회
글쓴이 : 정낙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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